호상世説新語 豪爽第十三
1소매를 떨쳐 일어나 북채를 들고 떨쳐 치니 곁에 사람이 없는 듯하였다
王大將軍年少時,舊有田舍名,語音亦楚。武帝喚時賢,共言伎藝之事,人人皆多有所知;唯王都無所關,意色殊惡。自言知打鼓吹。帝即令取鼓與之,於坐振袖而起,揚槌奮擊,音節諧捷,神氣豪上,傍若無人。舉坐嘆其雄爽。
왕대장군이 나이 어릴 때 예부터 시골집이라는 이름이 있었고 말소리도 또한 초나라 사투리였다.
무제가 그때 어진 이들을 불러 함께 재주와 재간의 일을 말하니 사람마다 다 아는 바가 많았는데, 오직 왕돈만이 도무지 상관하는 바가 없어 뜻과 낯빛이 자못 나빴다.
스스로 북 치고 피리 부는 것을 안다 말하니, 임금이 곧 북을 가져다 주게 하였다.
자리에서 소매를 떨쳐 일어나 북채를 들고 떨쳐 치니, 소리와 마디가 어울리고 재빠르며 정신과 기운이 호탕하고 위로 솟아 곁에 사람이 없는 듯하였다.
온 자리가 그 씩씩하고 시원함을 탄식하였다.
협주 1
或曰:敦嘗坐武昌釣臺,聞行船打鼓,嗟稱其能。俄而一槌小異,敦以扇柄撞几曰:「可恨!」應侍側曰:「不然,此是回颿槌。」使視之,云「船人入夾口」。應知鼓又善於敦也。
어떤 이는 말하였다. 왕돈이 일찍이 무창의 낚시대에 앉았다가 다니는 배에서 북 치는 소리를 듣고 감탄하며 그 잘함을 일컬었다. 이윽고 한 채가 조금 다르므로 왕돈이 부채 자루로 안석을 치며 「한스럽구나」 하였다. 왕응이 곁에서 모시다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돛을 돌리는 채입니다」 하였다. 사람을 시켜 보게 하니 「뱃사람이 좁은 어귀에 들었습니다」 하였다. 왕응이 북을 앎이 또 왕돈보다 나았다.
2이와 같은 것은 몹시 쉬울 뿐이오
王處仲世許高尚之目,嘗荒恣於色,體為之弊。左右諫之,處仲曰:「吾乃不覺爾。如此者,甚易耳!」乃開內後閤,驅諸婢妾數十人出路,任其所之。時人嘆焉。
왕처중이 세상에서 높고 높다는 제목을 허락받았는데, 일찍이 여색에 거칠고 멋대로 하여 몸이 이 때문에 헐었다.
곁의 사람이 간하니 처중이 말하였다. "내가 이에 깨닫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것은 몹시 쉬울 뿐이다."
이에 안뒷방을 열어 여러 계집종과 첩 수십 사람을 길로 내몰아 그 가는 대로 맡겼다. 그때 사람들이 이를 탄식하였다.
협주 1
鄧粲《晉紀》曰:「敦性簡脫,口不言財,其存尚如此。」
등찬의 『진기』에 이르기를 「왕돈은 성품이 간결하고 벗어나 입으로 재물을 말하지 않았으니, 그 두어 높임이 이와 같았다」 하였다.
3높고 환하며 성글고 시원하며 배움이 좌씨에 통한다
王大將軍自目:「高朗疎率,學通左氏。」
왕대장군이 스스로 두고 말하였다. "높고 환하며 성글고 시원하며 배움이 좌씨에 통한다."
협주 1
《晉陽秋》曰:「敦少稱高率通朗,有鑒裁。」
『진양추』에 이르기를 「왕돈은 젊어서 높고 시원하며 통하고 환하다 일컬어졌고 살펴 마름함이 있었다」 하였다.
4여의로 침 뱉는 병을 두드려 병 아가리가 다 이지러졌다
王處仲每酒後,輒詠「老驥伏櫪,志在千里;烈士暮年,壯心不已」,以如意打唾壺,壺口盡缺。
왕처중이 술 뒤마다 문득 「늙은 천리마가 구유에 엎드려도 뜻은 천 리에 있고, 매서운 선비는 저문 나이에도 씩씩한 마음이 그치지 않는다」를 읊으며, 여의로 침 뱉는 병을 두드리니 병 아가리가 다 이지러졌다.
협주 1
魏武帝《樂府詩》。
위나라 무제의 「악부시」다.
5하룻밤 사이에 못을 만들어 새벽이 되자 곧 이루어졌다
晉明帝欲起池臺,元帝不許。帝時為太子,好養武士。一夕中作池,比曉便成。今太子西池是也。
진나라 명제가 못과 대를 일으키려 하니 원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명제가 그때 태자로 무사 기르기를 좋아하였다. 하룻밤 사이에 못을 만들어 새벽이 되자 곧 이루어졌다. 이제 태자의 서지가 이것이다.
협주 1
《丹陽記》曰:「西池,孫登所創,吳史所稱西苑也。明帝修復之耳。」
『단양기』에 이르기를 「서지는 손등이 만든 것이니 오나라 사서에 일컬은 서원이다. 명제가 이를 고쳐 되살렸을 뿐이다」 하였다.
6내가 삼천 군사를 이끌고 창으로 다리를 찔러 오르게 하겠다
王大將軍始欲下都處分樹置,先遣參軍告朝廷,諷旨時賢。祖車騎尚未鎮壽春,瞋目厲聲語使人曰:「卿語阿黑:何敢不遜!催攝面去,須臾不爾,我將三千兵,槊腳令上!」王聞之而止。
왕대장군이 처음 서울에 내려와 처분하고 세우려 할 때, 먼저 참군을 보내 조정에 알리고 그때 어진 이들에게 뜻을 넌지시 이르게 하였다.
조거기가 아직 수춘을 지키기 전이었는데, 눈을 부릅뜨고 매서운 소리로 심부름꾼에게 말하였다. "경은 아흑에게 말하라. 어찌 감히 겸손하지 않은가. 서둘러 낯을 거두고 가라. 잠깐이라도 그러지 않으면 내가 삼천 군사를 이끌고 창으로 다리를 찔러 오르게 하겠다."
왕돈이 이를 듣고 그쳤다.
협주 1
敦小字也。
왕돈의 아이 적 이름이다.
7나의 이 걸음이 이 쏘기와 같으리라
庾稚恭既常有中原之志,文康時權重,未在己。及季堅作相,忌兵畏禍,與稚恭歷同異者久之,乃果行。傾荊、漢之力,窮舟車之勢,師次于襄陽。大會參佐,陳其旌甲,親授弧矢曰:「我之此行,若此射矣!」遂三起三疊,徒眾屬目,其氣十倍。
유치공이 이미 늘 중원의 뜻이 있었는데, 문강이 그때 권세가 무거워 저에게 있지 않았다.
계견이 재상이 됨에 이르러 군사를 꺼리고 화를 두려워하여 치공과 같고 다름을 겪은 지 오래인 뒤에야 이에 과연 행하였다.
형주와 한수의 힘을 기울이고 배와 수레의 세를 다하여 군사가 양양에 머물렀다.
참좌를 크게 모아 그 깃발과 갑옷을 벌이고 몸소 활과 화살을 잡고 말하였다. "나의 이 걸음이 이 쏘기와 같으리라."
마침내 세 번 일어나 세 번 겹쳐 맞히니, 무리가 눈을 붙이고 그 기운이 열 배가 되었다.
협주 1
《漢晉春秋》曰:「翼風儀美劭,才能豐贍,少有經緯大略。及繼兄亮居方州之任,有匡維內外,埽蕩群凶之志。是時,杜乂、殷浩諸人盛名冠世,翼未之貴也。常曰:『此輩宜束之高閣,俟天下清定,然後議其所任耳!』其意氣如此。唯與桓溫友善,相期以寧濟宇宙之事。初,翼輒發所部奴及車馬萬數,率大軍入沔,將謀伐狄,遂次于襄陽。」《翼別傳》曰:「翼為荊州,雅有正志。每以門地威重,兄弟寵授,不陳力竭誠,何以報國。雖蜀阻險塞,胡負凶力,然皆無道酷虐,易可乘滅。當此時,不能掃除二寇,以復王業,非丈夫也。於是徵役三州,悉其帑實,成眾五萬,兼率荒附,治戎大舉,直指魏、趙,軍次襄陽,耀威漢北也。」
『한진춘추』에 이르기를 「유익은 풍모와 몸가짐이 아름답고 좋으며 재주와 능함이 넉넉하고, 젊어서 날과 씨를 다스릴 큰 헤아림이 있었다. 형 유량을 이어 지방 주의 소임에 있게 되매, 안팎을 바로잡아 지키고 뭇 흉한 이를 쓸어 없앨 뜻이 있었다. 이때 두예와 은호 등 여러 사람이 성한 이름이 세상에 으뜸이었는데 유익은 이를 귀히 여기지 않았다. 늘 이르기를 『이 무리는 마땅히 묶어 높은 다락에 두었다가, 천하가 맑아지고 정해지기를 기다린 뒤에 그 맡을 바를 의논할 뿐이다』 하였으니, 그 뜻과 기운이 이와 같았다. 오직 환온과 벗하여 사이가 좋아 서로 우주를 편안히 건질 일을 기약하였다. 처음에 유익이 문득 거느린 바 종과 수레와 말 만여를 내어 큰 군사를 이끌고 면수에 들어, 장차 오랑캐 칠 일을 꾀하여 마침내 양양에 머물렀다」 하였다. 『익별전』에 이르기를 「유익이 형주가 되어 우아하게 바른 뜻이 있었다. 늘 문벌이 위엄 있고 무거우며 형제가 사랑받아 벼슬을 받았으니, 힘을 펴고 정성을 다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나라에 갚겠는가 하였다. 비록 촉이 험한 요새로 막히고 오랑캐가 흉한 힘을 졌으나, 다 도가 없고 모질고 사나우니 쉬이 틈타 없앨 만하다 하였다. 이때에 두 도적을 쓸어 없애고 왕업을 되찾지 못하면 대장부가 아니라 하였다. 이에 세 주에서 부역을 거두고 그 창고를 다하여 무리 오만을 이루고, 겸하여 거친 데 붙은 이들을 거느려 군사를 다스려 크게 일으켜 곧장 위나라와 조나라를 가리키니, 군사가 양양에 머물러 위엄을 한수 북녘에 빛냈다」 하였다.
8경들이 왕대장군을 보지 못한 것이 한이오
桓宣武平蜀,集參僚置酒於李勢殿,巴、蜀縉紳,莫不來萃。桓既素有雄情爽氣,加爾日音調英發,敘古今成敗由人,存亡繫才。其狀磊落,一坐嘆賞。既散,諸人追味餘言。于時尋陽周馥曰:「恨卿輩不見王大將軍。」
환선무가 촉을 평정하고 참좌와 아전을 모아 이세의 전각에서 술자리를 베푸니, 파와 촉의 벼슬한 이들이 와서 모이지 않는 이가 없었다.
환온이 이미 본디 씩씩한 정과 시원한 기운이 있는 데다, 그날 소리와 가락이 꽃부리처럼 피어남을 더하여, 옛날과 이제의 이룸과 무너짐이 사람에게 말미암고 있음과 없음이 재주에 매였음을 폈다. 그 모습이 우뚝하니 온 자리가 탄식하고 기렸다.
이윽고 흩어지자 여러 사람이 남은 말을 좇아 맛보았다.
이때 심양의 주복이 말하였다. "경들이 왕대장군을 보지 못한 것이 한이오."
협주 1
《中興書》曰:「馥,周撫孫也,字湛隱。有將略,曾作敦掾。」
『중흥서』에 이르기를 「주복은 주무의 손자요 자는 담은이다. 장수의 헤아림이 있었고 일찍이 왕돈의 아전을 지냈다」 하였다.
9누가 이런 시내처럼 깎아지른 몸가짐을 할 수 있겠는가
桓公讀《高士傳》,至於陵仲子,便擲去曰:「誰能作此溪刻自處!」
환공이 『고사전』을 읽다가 어릉의 진중자에 이르러 곧 던져 버리며 말하였다. "누가 이런 시내처럼 깎아지른 몸가짐을 할 수 있겠는가."
협주 1
皇甫謐《高士傳》曰:「陳仲子字子終,齊人。兄戴相齊,食群萬鍾。仲子以兄祿為不義,乃適楚,居於陵。曾乏糧三日,匍匐而食井李之實,三咽而後能視。身自織屨,令妻擗纑,以易衣食。嘗歸省母,有饋其兄生鵝者。仲子嚬顣曰:『惡用此鶂鶂為哉?』後母殺鵝,仲子不知而食之。兄自外入曰:『鶂鶂肉邪?』仲子出門,哇而吐之。楚王聞其名,聘以為相,乃夫婦逃去,為人灌園。」
황보밀의 『고사전』에 이르기를 「진중자는 자가 자종이요 제나라 사람이다. 형 진대가 제나라 재상이 되어 녹이 만 종이었다. 중자가 형의 녹을 옳지 않다 여겨 이에 초나라로 가서 어릉에 살았다. 일찍이 양식이 떨어져 사흘 만에 기어가 우물가 오얏 열매를 먹었는데 세 번 삼킨 뒤에야 볼 수 있었다. 몸소 신을 삼고 아내에게 삼실을 타게 하여 옷과 밥과 바꾸었다. 일찍이 어머니를 뵈러 돌아왔는데, 그 형에게 산 거위를 보낸 이가 있었다. 중자가 낯을 찡그리며 『이 꽥꽥거리는 것을 어디에 쓰겠는가』 하였다. 뒤에 어머니가 거위를 잡았는데 중자가 모르고 먹었다. 형이 밖에서 들어와 『꽥꽥거리는 고기다』 하니, 중자가 문을 나가 왝왝거리며 토하였다. 초나라 왕이 그 이름을 듣고 재상으로 맞으니, 이에 지아비와 지어미가 달아나 남을 위해 밭에 물을 대었다」 하였다.
10하삭이 마침내 그 이름으로 학질을 끊었다
桓石虔,司空豁之長庶也;小字鎮惡,年十七八,未被舉,而童隸已呼為鎮惡郎。嘗住宣武齋頭,從征枋頭;車騎沖沒陳,左右莫能先救。宣武謂曰:「汝叔落賊,汝知不?」石虔聞,氣甚奮;命朱辟為副,策馬於數萬眾中,莫有抗者。徑致沖還。三軍嘆服。河朔遂以其名斷瘧。
환석건은 사공 환활의 맏서자다. 아이 적 이름은 진악인데, 나이 열일고여덟에 아직 천거되지 않았는데도 아이종이 이미 진악랑이라 불렀다.
일찍이 선무의 서재에 머물다가 방두 싸움을 따라갔다.
거기 환충이 진중에 빠졌는데 곁의 사람이 앞장서 건지지 못하였다.
선무가 일러 말하였다. "네 작은아버지가 도적에게 떨어졌는데 너는 아느냐."
석건이 듣고 기운이 몹시 떨쳐, 주벽에게 명하여 버금을 삼고 몇만 무리 가운데로 말을 채찍질하니 맞서는 이가 없었다. 곧장 환충을 데리고 돌아왔다. 삼군이 탄식하며 따랐다.
하삭이 마침내 그 이름으로 학질을 끊었다.
협주 2
《豁別傳》曰:「豁字朗子,溫之弟。累遷荊州刺史,贈司空。」
『환활별전』에 이르기를 「환활은 자가 낭자요 환온의 아우다. 여러 벼슬을 거쳐 형주자사에 이르렀고 사공을 내려 주었다」 하였다.
《中興書》曰:「石虔有才榦,有史學,累有戰功。仕至豫州刺史,贈後軍將軍。」
『중흥서』에 이르기를 「환석건은 재주와 재간이 있고 역사의 배움이 있었으며 여러 번 싸움의 공이 있었다. 벼슬이 예주자사에 이르렀고 후군장군을 내려 주었다」 하였다.
11손백부의 뜻과 업이 이루어지지 못하였구나
陳林道在西岸,都下諸人共要至牛渚會。陳理既佳,人欲共言折。陳以如意拄頰,望雞籠山嘆曰:「孫伯符志業不遂!」於是竟坐不得談。
진임도가 서쪽 언덕에 있을 때 서울의 여러 사람이 함께 우저에 이르러 모이자 청하였다.
진임도의 결이 이미 좋으니 사람들이 함께 말하여 꺾으려 하였다.
진임도가 여의로 뺨을 괴고 계롱산을 바라보며 탄식하였다. "손백부의 뜻과 업이 이루어지지 못하였구나."
이에 마침내 온 자리가 이야기하지 못하였다.
협주 2
《晉陽秋》曰:「逵為西中郎將,領淮南太守,戍歷陽。」
『진양추』에 이르기를 「진규가 서중랑장이 되어 회남태수를 거느리고 역양을 지켰다」 하였다.
《吳錄》曰:「長沙桓王諱策,字伯符,吳郡富春人。少有雄姿風氣,年十九而襲業,眾號孫郎。平定江東,為許貢客射破其面,引鏡自照,謂左右曰:『面如此!豈可復立功乎?』乃謂張昭曰:『中國方亂,夫以吳、越之眾,三江之固,足以觀成敗。公等善相吾弟。』呼大皇帝授以印綬曰:『舉江東之眾,決機於兩陳之閒,卿不如我;任賢使能,各盡其心,我不如卿。慎勿北渡!』語畢而薨,年二十有六。」
『오록』에 이르기를 「장사환왕은 휘가 책이요 자가 백부니 오군 부춘 사람이다. 젊어서 씩씩한 자태와 풍모와 기운이 있었고, 나이 열아홉에 업을 이어받으니 무리가 손랑이라 불렀다. 강동을 평정하다가 허공의 손에게 낯을 맞아 깨지니, 거울을 당겨 스스로 비추어 보고 곁의 사람에게 이르기를 『낯이 이러하니 어찌 다시 공을 세울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장소에게 이르기를 『중국이 바야흐로 어지러운데, 무릇 오나라와 월나라의 무리와 세 강의 굳음으로 이룸과 무너짐을 보기에 넉넉하오. 공들은 내 아우를 잘 도우시오』 하고, 대황제를 불러 인끈을 주며 『강동의 무리를 들어 두 진 사이에서 기틀을 결단하는 것은 경이 나만 못하고, 어진 이를 맡기고 능한 이를 부려 저마다 그 마음을 다하게 하는 것은 내가 경만 못하다. 삼가 북쪽으로 건너지 마라』 하였다. 말을 마치고 죽으니 나이 스물여섯이었다」 하였다.
12그때에 한자리에 사람이 없음을 느꼈소
王司州在謝公坐,詠「入不言兮出不辭,乘回風兮載雲旗」。語人云:「當爾時,覺一坐無人。」
왕사주가 사공의 자리에 있으면서 「들어와도 말이 없고 나가도 하직이 없이, 도는 바람을 타고 구름 깃발을 실었네」를 읊었다.
남에게 말하였다. "그때에 한자리에 사람이 없음을 느꼈소."
협주 1
離騷九歌少司命之辭。
「이소」 「구가」 소사명의 말이다.
13퉁소와 피리에 남은 소리가 있는데 양왕은 어디 있는가
桓玄西下,入石頭。外白:「司馬梁王奔叛。」玄時事形已濟,在平乘上笳鼓並作,直高詠云:「簫管有遺音,梁王安在哉?」
환현이 서쪽에서 내려와 석두에 들어갔다.
밖에서 아뢰었다. "사마 양왕이 달아나 배반하였습니다."
환현은 그때 일의 형세가 이미 이루어졌으므로, 평승 위에서 갈잎피리와 북이 아울러 울리는데 곧바로 높이 읊었다. "퉁소와 피리에 남은 소리가 있는데 양왕은 어디 있는가."
협주 2
《續晉陽秋》曰:「梁王珍之字景度。」《中興書》曰:「初,桓玄篡位,國人有孔璞者,奉珍之奔尋陽。義旗既興,歸朝廷,仕至太常卿,以罪誅。」
『속진양추』에 이르기를 「양왕 진지는 자가 경도다」 하였다. 『중흥서』에 이르기를 「처음에 환현이 자리를 빼앗자 나라 사람 가운데 공박이라는 이가 있어 진지를 받들고 심양으로 달아났다. 의로운 깃발이 이미 일어나자 조정에 돌아왔고 벼슬이 태상경에 이르렀는데 죄로 죽임을 당하였다」 하였다.
阮籍詠懷詩也。
완적의 「영회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