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일世説新語 棲逸第十八
1돌아보니 이에 아까 그 사람이 휘파람을 분 것이었다
阮步兵嘯,聞數百步。蘇門山中,忽有真人,樵伐者咸共傳說。阮籍往觀,見其人擁厀巖側。籍登嶺就之,箕踞相對。籍商略終古,上陳黃、農玄寂之道,下考三代盛德之美,以問之,仡然不應。復敘有為之教,棲神導氣之術以觀之,彼猶如前,凝矚不轉。籍因對之長嘯。良久,乃笑曰:「可更作。」籍復嘯。意盡,退,還半嶺許,聞上𪡧然有聲,如數部鼓吹,林谷傳響。顧看,迺向人嘯也。
완보병의 휘파람은 몇백 걸음까지 들렸다.
소문산 가운데 홀연히 참사람이 있어 나무하는 이들이 다 함께 전하여 말하였다.
완적이 가서 보니 그 사람이 바위 곁에서 무릎을 안고 있었다.
완적이 고개에 올라 그에게 나아가 두 다리를 뻗고 마주 앉았다.
완적이 옛날부터의 일을 헤아려 말하되, 위로는 황제와 신농의 아득하고 고요한 길을 펴고 아래로는 삼대의 성한 덕의 아름다움을 상고하여 이를 물으니, 우뚝하니 응하지 않았다.
다시 함이 있는 가르침과 정신을 깃들이고 기운을 이끄는 법을 펴서 그를 보니, 저는 오히려 앞과 같아 엉기어 바라볼 뿐 돌리지 않았다.
완적이 이로 인해 그를 마주하여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한참 뒤에 이에 웃으며 말하였다. "다시 해도 좋다."
완적이 다시 휘파람을 불었다. 뜻이 다하여 물러나 고개 절반쯤 돌아왔는데, 위에서 우렁차게 소리가 있어 몇 부의 북과 피리 같아 숲과 골짜기가 울림을 전하였다.
돌아보니 이에 아까 그 사람이 휘파람을 분 것이었다.
협주 1
《魏氏春秋》曰:「阮籍常率意獨駕,不由徑路,車跡所窮,輒慟哭而反。嘗遊蘇門山,有隱者莫知姓名,有竹實數斛,杵臼而已。籍聞而從之,談太古無為之道,論五帝三王之義,蘇門先生脩然曾不眄之。籍乃嘐然長嘯,韻響寥亮。蘇門先生乃逌爾而笑。籍既降,先生喟然高嘯,有如鳳音。籍素知音,乃假蘇門先生之論,以寄所懷。其歌曰:『日沒不周西,月出丹淵中。陽精晦不見,陰光代為雄。亭亭在須臾,厭厭將復隆。富貴俛仰閒,貧賤何必終。』」《竹林七賢論》曰:「籍歸,遂著大人先生論,所言皆胸懷閒本趣,大意謂先生與己不異也。觀其長嘯相和,亦近乎目擊道存矣。」
『위씨춘추』에 이르기를 「완적이 늘 뜻대로 홀로 수레를 몰아 지름길을 말미암지 않고, 수레 자국이 다한 데서 문득 애통히 곡하고 돌아왔다. 일찍이 소문산에 노닐었는데 숨은 이가 있어 성과 이름을 알지 못하였고, 대 열매 몇 섬과 절굿공이와 절구가 있을 뿐이었다. 완적이 듣고 그를 좇아 태고의 함이 없는 길을 이야기하고 오제와 삼왕의 옳음을 논하니, 소문선생은 훌쩍하니 일찍이 곁눈질도 하지 않았다. 완적이 이에 컬컬하게 길게 휘파람을 부니 울림이 아득하고 밝았다. 소문선생이 이에 흐뭇이 웃었다. 완적이 이미 내려오매 선생이 한숨 쉬듯 높이 휘파람을 부니 봉의 소리 같음이 있었다. 완적이 본디 소리를 알았으므로 이에 소문선생의 논을 빌려 품은 바를 부쳤다. 그 노래에 이르기를 『해는 부주산 서쪽에 지고 달은 단연 가운데서 나온다. 볕의 정기가 어두워 보이지 않고 그늘의 빛이 대신하여 씩씩함이 된다. 우뚝함은 잠깐 사이에 있고 시들함이 장차 다시 높아진다. 부유하고 귀함은 굽어보고 우러르는 사이요, 가난하고 천함이 어찌 반드시 마치겠는가』 하였다」 하였다. 『죽림칠현론』에 이르기를 「완적이 돌아와 마침내 「대인선생론」을 지었는데, 말한 바가 다 가슴에 품은 사이의 본디 뜻이요, 큰 뜻은 선생이 저와 다르지 않다 이른 것이다. 그 길게 휘파람 불며 서로 어울림을 보면 또한 눈으로 마주쳐 도가 있음에 가깝다」 하였다.
2그대는 재주는 곧 높으나 몸을 지키는 길이 넉넉하지 않소
嵇康遊於汲郡山中,遇道士孫登,遂與之遊。康臨去,登曰:「君才則高矣,保身之道不足。」
혜강이 급군의 산 가운데 노닐다가 도사 손등을 만나 마침내 그와 함께 노닐었다.
혜강이 떠나려 할 때 손등이 말하였다. "그대는 재주는 곧 높으나 몸을 지키는 길이 넉넉하지 않소."
협주 1
《康集·序》曰:「孫登者,不知何許人。無家,於汲郡北山土窟住。夏則編草為裳,冬則被髮自覆。好讀易,鼓一絃琴,見者皆親樂之。」《魏氏春秋》曰:「登性無喜怒,或沒諸水,出而觀之,登復大笑。時時出入人間,所經家設衣食者,一無所辭,去皆舍去。」《文士傳》曰:「嘉平中,汲縣民共入山中,見一人,所居懸巖百仞,叢林鬱茂,而神明甚察。自云『孫姓,登名,字公和』。康聞,乃從遊三年。問其所圖,終不荅。然神謀所存良妙,康每薾然歎息。將別,謂曰:『先生竟無言乎?』登乃曰:『子識火乎?生而有光,而不用其光,果然在於用光。人生有才,而不用其才,果然在於用才。故用光在乎得薪,所以保其曜;用才在乎識物,所以全其年。今子才多識寡,難乎免於今之世矣!子無多求!』康不能用。及遭呂安事,在獄為詩自責云:『昔慚下惠,今愧孫登!』」王隱《晉書》曰:「孫登即阮籍所見者也。嵇康執弟子禮而師焉。魏、晉去就,易生嫌疑,貴賤並沒,故登或默也。」
『강집·서』에 이르기를 「손등이라는 이는 어디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집이 없어 급군 북산의 흙굴에 살았다. 여름이면 풀을 엮어 치마를 삼고 겨울이면 머리를 풀어 스스로 덮었다. 『역』 읽기를 좋아하고 한 줄 거문고를 타니 보는 이가 다 그를 가까이하고 즐거워하였다」 하였다. 『위씨춘추』에 이르기를 「손등은 성품에 기쁨과 성냄이 없어, 어떤 이가 그를 물에 빠뜨리고 나와서 보면 손등이 다시 크게 웃었다. 때때로 사람 사이에 드나들며 지나는 집에서 옷과 밥을 차려 주면 하나도 사양하는 바가 없었고, 갈 때는 다 버리고 갔다」 하였다. 『문사전』에 이르기를 「가평 연간에 급현 백성이 함께 산 가운데 들어가 한 사람을 보았는데, 사는 데가 백 길 되는 벼랑에 걸리고 떨기 숲이 우거졌으며 정신과 밝음이 몹시 살폈다. 스스로 이르기를 『성은 손이요 이름은 등이요 자는 공화다』 하였다. 혜강이 듣고 이에 좇아 노닌 지 세 해였다. 그 꾀하는 바를 물었으나 마침내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묘한 꾀로 두는 바가 참으로 묘하니 혜강이 늘 시들하게 탄식하였다. 장차 헤어질 때 이르기를 『선생께서는 마침내 말씀이 없으십니까』 하니, 손등이 이에 말하기를 『그대는 불을 아는가. 나면서 빛이 있으나 그 빛을 쓰지 않으면, 그러함은 빛을 씀에 있다. 사람이 나면서 재주가 있으나 그 재주를 쓰지 않으면, 그러함은 재주를 씀에 있다. 그러므로 빛을 씀은 섶을 얻는 데 있으니 그 빛남을 지키는 바요, 재주를 씀은 물건을 아는 데 있으니 그 나이를 온전히 하는 바다. 이제 그대는 재주가 많고 앎이 적으니 이제 세상에서 벗어나기 어렵겠구나. 그대는 많이 구하지 마라』 하였다. 혜강이 쓰지 못하였다. 여안의 일을 만남에 이르러 옥에서 시를 지어 스스로 꾸짖어 이르기를 『옛날 하혜에게 부끄러웠고 이제 손등에게 부끄럽다』 하였다」 하였다. 왕은의 『진서』에 이르기를 「손등은 곧 완적이 본 이다. 혜강이 제자의 예를 잡아 스승 삼았다. 위나라와 진나라의 나아감과 물러남은 쉬이 의심을 내니, 귀하고 천한 이가 아울러 죽었으므로 손등이 더러 잠잠하였다」 하였다.
3혜강이 산공에게 글을 보내 끊기를 알리다
山公將去選曹,欲舉嵇康;康與書告絕。
산공이 장차 인사 맡은 자리를 떠나며 혜강을 천거하려 하니, 혜강이 글을 보내 끊기를 알렸다.
협주 1
《康別傳》曰:「山巨源為吏部郎,遷散騎常侍,舉康,康辭之,並與山絕。豈不識山之不以一官遇己情邪?亦欲標不屈之節,以杜舉者之口耳!乃荅濤書,自說不堪流俗,而非薄湯武。大將軍聞而惡之。」
『강별전』에 이르기를 「산거원이 이부랑이 되었다가 산기상시로 옮기며 혜강을 천거하니, 혜강이 이를 사양하고 아울러 산씨와 끊었다. 어찌 산씨가 벼슬 하나로 저를 대접하는 정이 아님을 알지 못하였겠는가. 또한 굽히지 않는 절개를 드러내어 천거하는 이의 입을 막고자 하였을 뿐이다. 이에 산도에게 답한 글에 스스로 흐르는 세속을 견디지 못한다 말하고 탕왕과 무왕을 그르다 하고 엷게 여겼다. 대장군이 듣고 그를 미워하였다」 하였다.
4무홍이 이에 다시 벼슬 하나로 남에게 빌려 주는가
李廞是茂曾第五子,清貞有遠操,而少羸病,不肯婚宦。居在臨海,住兄侍中墓下。既有高名,王丞相欲招禮之,故辟為府掾。廞得牋命,笑曰:「茂弘乃復以一爵假人!」
이흠은 무증의 다섯째 아들이니 맑고 곧으며 먼 지조가 있었으나, 젊어서 여위고 병들어 혼인과 벼슬을 즐기지 않았다.
임해에 살며 형 시중의 무덤 아래 머물렀다.
이미 높은 이름이 있으매 왕승상이 불러 예우하려 하여 짐짓 불러 부의 아전으로 삼았다.
이흠이 글의 명을 얻고 웃으며 말하였다. "무홍이 이에 다시 벼슬 하나로 남에게 빌려 주는가."
협주 1
《文字志》曰:「廞字宗子,江夏鍾武人。祖康,秦州刺史。父重,平陽太守。世有名望。廞好學,善草隸,與兄式齊名。躄疾不能行坐,常仰臥,彈琴、讀誦不輟。河閒王辟太尉掾,以疾不赴。後避難,隨兄南渡,司徒王導復辟之。廞曰:『茂弘乃復以一爵加人!』永和中卒。廞嘗為二府辟,故號李公府也。式字景則,廞長兄也。思理儒隱,有平素之譽。渡江,累遷臨海太守、侍中。年五十四而卒。」
『문자지』에 이르기를 「이흠은 자가 종자요 강하 종무 사람이다. 할아버지 이강은 진주자사요 아버지 이중은 평양태수니 대대로 이름과 바람이 있었다. 이흠이 배우기를 좋아하고 초서와 예서를 잘하여 형 이식과 이름을 나란히 하였다. 절뚝발이 병으로 다니고 앉지 못하여 늘 우러러 누워 거문고를 타고 읽고 외기를 그치지 않았다. 하간왕이 태위연으로 부르니 병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뒤에 난을 피해 형을 따라 남쪽으로 건너니 사도 왕도가 다시 그를 불렀다. 이흠이 『무홍이 이에 다시 벼슬 하나로 남에게 더해 주는가』 하였다. 영화 연간에 죽었다. 이흠이 일찍이 두 부의 부름을 받았으므로 이공부라 불렸다. 이식은 자가 경칙이요 이흠의 맏형이다. 생각의 결이 선비답고 숨어 평소의 기림이 있었다. 강을 건너 여러 벼슬을 거쳐 임해태수와 시중에 이르렀다. 나이 쉰넷에 죽었다」 하였다.
5내 다섯째의 이름이 어찌 반드시 표기만 못하겠소
何驃騎弟以高情避世,而驃騎勸之令仕。答曰:「予第五之名,何必減驃騎?」
하표기의 아우가 높은 정으로 세상을 피하니 표기가 그를 권하여 벼슬하게 하려 하였다.
대답하였다. "내 다섯째의 이름이 어찌 반드시 표기만 못하겠소."
협주 1
《中興書》曰:「何準字幼道,廬江灊人。驃騎將軍充第五弟也。雅好高尚,徵聘一無所就。充位居宰相,權傾人主,而準散帶衡門,不及世事。于時名德皆稱之。年四十七卒。有女,為穆帝皇后。贈光祿大夫。子恢,讓不受。」
『중흥서』에 이르기를 「하준은 자가 유도요 여강 첨 사람이다. 표기장군 하충의 다섯째 아우다. 우아하게 높이 숭상하기를 좋아하여 불러도 하나도 나아가는 바가 없었다. 하충이 자리가 재상에 있어 권세가 임금을 기울였으나, 하준은 띠를 풀고 가로장 문에 있어 세상일에 미치지 않았다. 이때 이름과 덕 있는 이가 다 그를 일컬었다. 나이 마흔일곱에 죽었다. 딸이 있어 목제의 황후가 되었다. 광록대부를 내려 주었는데 아들 하회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하였다.
6이분은 요사이 사랑과 욕됨에 놀라지 않소
阮光祿在東山,蕭然無事,常內足於懷。有人以問王右軍,右軍曰:「此君近不驚寵辱,雖古之沈冥,何以過此?」
완광록이 동산에 있으며 쓸쓸히 일이 없어 늘 안으로 품음에 넉넉하였다.
어떤 이가 이를 왕우군에게 물으니 우군이 말하였다. "이분은 요사이 사랑과 욕됨에 놀라지 않으니, 비록 옛날의 잠기고 어두운 이라도 무엇으로 이를 넘겠는가."
협주 3
《阮裕別傳》曰:「裕居會稽剡山,志存肥遁。」
『완유별전』에 이르기를 「완유가 회계 섬산에 살며 뜻이 살찌게 숨음에 있었다」 하였다.
老子曰:「寵辱若驚,得之若驚,失之若驚。」
『노자』에 이르기를 「사랑과 욕됨에 놀라는 듯하니, 얻어도 놀라는 듯하고 잃어도 놀라는 듯하다」 하였다.
楊子曰:「蜀、莊沈冥。」李軌注曰:「沈冥,猶玄寂,泯然无跡之貌。」
『양자』에 이르기를 「촉과 장이 잠기고 어둡다」 하였다. 이궤의 주에 이르기를 「잠기고 어둡다 함은 아득하고 고요함과 같으니, 아득히 자취가 없는 모습이다」 하였다.
7백성이 도술이 있다 하여 산 채로 사당을 세우다
孔車騎少有嘉遁意,年四十餘,始應安東命。未仕宦時,常獨寢,歌吹自箴誨,自稱孔郎,遊散名山。百姓謂有道術,為生立廟。今猶有孔郎廟。
공거기가 젊어서 아름답게 숨을 뜻이 있어, 나이 마흔 남짓에 비로소 안동의 명에 응하였다.
아직 벼슬하지 않았을 때 늘 홀로 자며 노래하고 읊어 스스로 경계하고 가르치며, 스스로 공랑이라 일컫고 이름난 산에 노닐어 흩어졌다.
백성이 도술이 있다 하여 산 채로 사당을 세웠다. 이제도 오히려 공랑묘가 있다.
협주 1
《孔愉別傳》曰:「永嘉大亂,愉入臨海山中,不求聞達,中宗命為參軍。」
『공유별전』에 이르기를 「영가의 큰 어지러움에 공유가 임해의 산 가운데 들어가 알려져 이름남을 구하지 않았는데, 중종이 명하여 참군으로 삼았다」 하였다.
8양기에 산 지 여러 해에 옷과 밥의 있고 없음을 늘 마을 사람과 함께하다
南陽劉驎之,高率善史傳,隱於陽岐。于時符堅臨江,荊州刺史桓沖將盡訏謨之益,徵為長史,遣人船往迎,贈貺甚厚。驎之聞命,便升舟;悉不受所餉,緣道以乞窮乏,比至上明亦盡。一見沖,因陳無用,翛然而退。居陽岐積年,衣食有無常與村人共;值己匱乏,村人亦如之;甚厚,為鄉閭所安。
남양의 유인지는 높고 시원하며 역사와 전기를 잘하였는데 양기에 숨었다.
이때 부견이 강에 임하매, 형주자사 환충이 장차 큰 꾀의 보탬을 다하려 하여 불러 장사로 삼고 사람과 배를 보내 맞으며 준 것이 몹시 두터웠다.
유인지가 명을 듣고 곧 배에 올랐으나, 보내온 것을 다 받지 않고 길을 따라 궁하고 모자란 이에게 주니 상명에 이를 즈음에 또한 다하였다.
한 번 환충을 보고 이로 인해 쓸모없음을 아뢰고 훌쩍 물러났다.
양기에 산 지 여러 해에 옷과 밥의 있고 없음을 늘 마을 사람과 함께하였고, 제가 모자랄 때를 만나면 마을 사람이 또한 그와 같이 하였다. 몹시 두터워 마을이 편안히 여기는 바가 되었다.
협주 1
鄧粲《晉紀》曰:「驎之字子驥,南陽安眾人。少尚質素,虛退寡欲。好遊山澤閒,志存遁逸。桓沖嘗至其家,驎之方條桑,謂沖:『使君既枉駕光臨,宜先詣家君。』沖遂詣其父。父命驎之,然後乃還,拂短褐與沖言。父使驎之自持濁酒葅菜供賓,沖敕人代之。父辭曰:『若使官人,則非野人之意也。』沖為慨然,至昏乃退。因請為長史,固辭。居陽岐,去道斥近,人士往來,必投其家。驎之身自供給,贈致無所受。去家百里,有孤嫗疾,將死,謂人曰:『唯有劉長史當埋我耳!』驎之身往候之疾終,為治棺殯。其仁愛皆如此。以壽卒。」
등찬의 『진기』에 이르기를 「유인지는 자가 자기요 남양 안중 사람이다. 젊어서 바탕스럽고 수수함을 숭상하여 비고 물러나 하고자 함이 적었다. 산과 못 사이에 노닐기를 좋아하고 뜻이 달아나 숨음에 있었다. 환충이 일찍이 그 집에 이르렀는데 유인지가 바야흐로 뽕나무 가지를 치다가 환충에게 이르기를 『사군께서 이미 수레를 굽혀 빛나게 임하셨으니 마땅히 먼저 집 어른을 뵈어야 합니다』 하였다. 환충이 마침내 그 아버지를 뵈었다. 아버지가 유인지를 부른 뒤에야 이에 돌아와 짧은 갈옷을 떨치고 환충과 말하였다. 아버지가 유인지에게 몸소 흐린 술과 김치와 나물을 들어 손을 대접하게 하니, 환충이 사람을 시켜 대신하게 하였다. 아버지가 사양하며 『만일 벼슬아치를 부리면 곧 들사람의 뜻이 아닙니다』 하였다. 환충이 이 때문에 감개하여 저물어서야 물러났다. 이로 인해 장사 되기를 청하였으나 굳이 사양하였다. 양기에 살았는데 길에서 매우 가까워 인사가 오갈 때 반드시 그 집에 들었다. 유인지가 몸소 대접하고 보내 준 것은 받는 바가 없었다. 집에서 백 리 되는 데에 외로운 할멈이 병들어 장차 죽게 되매 사람에게 이르기를 『오직 유장사만이 마땅히 나를 묻어 주리라』 하였다. 유인지가 몸소 가서 그 병을 살피고 죽으매 널을 다스려 빈소를 차려 주었다. 그 어질고 아낌이 다 이와 같았다. 목숨대로 살다 죽었다」 하였다.
9그 뒤에 주씨가 적씨를 찾아가니 적씨가 더불어 말하지 않았다
南陽翟道淵與汝南周子南少相友,共隱于尋陽。庾太尉說周以當世之務,周遂仕;翟秉志彌固。其後周詣翟,翟不與語。
남양의 적도연이 여남의 주자남과 젊어서 서로 벗하여 함께 심양에 숨었다.
유태위가 주씨에게 요즘 세상의 일을 달래니 주씨가 마침내 벼슬하였고, 적씨는 뜻을 잡음이 더욱 굳었다.
그 뒤에 주씨가 적씨를 찾아가니 적씨가 더불어 말하지 않았다.
협주 1
《晉陽秋》曰:「翟湯字道淵,南陽人,漢方進之後也。篤行任素,義讓廉潔,饋贈一無所受。值亂多寇,聞湯名德,皆不敢犯。」《尋陽記》曰:「初,庾亮臨江州,聞翟湯之風,束帶躡屐而詣焉。亮禮甚恭。湯曰:『使君直敬其枯木朽株耳。』亮稱其能言,表薦之。徵國子博士,不赴。主簿張玄曰:『此君臥龍,不可動也。』終于家。」
『진양추』에 이르기를 「적탕은 자가 도연이요 남양 사람이니 한나라 적방진의 뒤다. 행실을 도타이 하고 수수함에 맡기며 옳음으로 사양하고 청렴하고 깨끗하여, 보내 주는 것을 하나도 받는 바가 없었다. 어지럽고 도적이 많은 때를 만났는데, 적탕의 이름과 덕을 듣고 다 감히 범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심양기』에 이르기를 「처음에 유량이 강주에 임하여 적탕의 바람을 듣고 띠를 매고 나막신을 신고 그를 찾아갔다. 유량의 예가 몹시 공손하였다. 적탕이 『사군께서 다만 그 마른 나무와 썩은 그루터기를 공경하실 뿐입니다』 하였다. 유량이 그 말 잘함을 일컬어 표로 그를 천거하였다. 국자박사로 부르니 나아가지 않았다. 주부 장현이 『이분은 누운 용이니 움직이게 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집에서 죽었다」 하였다.
10소고가 이러하니 만년은 죽어도 좋다
孟萬年及弟少孤,居武昌陽新縣。萬年遊宦,有盛名當世;少孤未嘗出,京邑人士思欲見之,乃遣信報少孤,云兄病篤。狼狽至都。時賢見之者,莫不嗟重,因相謂曰:「少孤如此,萬年可死!」
맹만년과 아우 소고가 무창 양신현에 살았다.
만년은 벼슬살이에 노닐어 요즘 세상에 성한 이름이 있었고, 소고는 일찍이 나오지 않았다.
서울의 인사가 그를 보고자 생각하여, 이에 기별을 보내 소고에게 알리기를 형의 병이 깊다 하였다.
허둥지둥 서울에 이르니 그때 어진 이로 그를 본 이가 탄식하고 무겁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로 인해 서로 일러 말하였다. "소고가 이러하니 만년은 죽어도 좋다."
협주 1
袁宏《孟處士銘》曰:「處士名陋,字少孤,武昌陽新人,吳司空孟宗後也。少而希古,布衣蔬食,棲遲蓬蓽之下,絕人閒之事,親族慕其孝。大將軍命會稽王辟之,稱疾不至,相府歷年虛位,而澹然無悶,卒不降志,時人奇之。」
원굉의 「맹처사명」에 이르기를 「처사는 이름이 맹루요 자는 소고니 무창 양신 사람이요 오나라 사공 맹종의 뒤다. 젊어서 옛것을 바라 베옷을 입고 나물을 먹으며 쑥대 사립 아래 깃들어 노닐고 사람 사이의 일을 끊으니 겨레붙이가 그 효도를 그리워하였다. 대장군이 회계왕에게 명하여 그를 부르게 하였으나 병을 일컬어 이르지 않아, 재상의 부가 여러 해 자리를 비웠는데도 담담히 답답함이 없어 마침내 뜻을 낮추지 않으니 그때 사람들이 그를 기이하게 여겼다」 하였다.
11이름과 소리가 이에 일어나매 뒤에 견디지 못하여 마침내 나왔다
康僧淵在豫章,去郭數十里立精舍,旁連嶺,帶長川,芳林列於軒庭,清流激於堂宇。乃閒居研講,希心理味。庾公諸人,多往看之,觀其運用吐納,風流轉佳;加處之怡然,亦有以自得;聲名乃興。後不堪,遂出。
강승연이 예장에 있으며 성곽에서 몇십 리 떨어진 데에 절을 세웠다.
곁으로 고개를 잇고 긴 내를 띠었으며, 꽃다운 숲이 마루와 뜰에 벌여 있고 맑은 흐름이 집채에 부딪쳤다.
이에 한가히 살며 갈고 강론하여 마음을 결의 맛에 쏟기를 바랐다.
유공의 여러 사람이 흔히 가서 그를 보았는데, 그 놀려 쓰고 뱉고 들임을 보매 풍류가 굴러 아름다웠고, 거기 처함이 기쁘고 그러하여 또한 스스로 얻음이 있음을 더하였다.
이름과 소리가 이에 일어나매 뒤에 견디지 못하여 마침내 나왔다.
협주 1
僧淵已見。
강승연은 이미 보인다.
12아랫벼슬아치는 그 근심을 견디지 못하고 집안 아우는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소
戴安道既厲操東山,而其兄欲建「式遏」之功。謝太傅曰:「卿兄弟志業,何其太殊?」戴曰:「下官『不堪其憂』,家弟『不改其樂』。」
대안도가 이미 동산에서 지조를 갈고 있었는데, 그 형은 「막아 그침」의 공을 세우려 하였다.
사태부가 말하였다. "경의 형제는 뜻과 업이 어찌 그리 몹시 다른가."
대씨가 말하였다. "아랫벼슬아치는 「그 근심을 견디지 못하고」 집안 아우는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습니다」."
협주 2
《續晉陽秋》曰:「逵不樂當世,以琴書自娛,隱會稽剡山,國子博士徵,不就。」
『속진양추』에 이르기를 「대규가 요즘 세상을 즐기지 않고 거문고와 책으로 스스로 즐기며 회계 섬산에 숨었는데, 국자박사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하였다.
《戴氏譜》曰:「逯字安丘,譙國人。祖碩,父綏,有名位。逯以武勇顯,有功,封廣陵侯,仕至大司農。」
『대씨보』에 이르기를 「대록은 자가 안구요 초국 사람이다. 할아버지 대석과 아버지 대수가 이름과 자리가 있었다. 대록은 굳센 날램으로 드러나 공이 있어 광릉후에 봉해졌고 벼슬이 대사농에 이르렀다」 하였다.
13광주리와 꾸러미는 짐짓 마땅히 천하의 보배보다 가벼울 뿐이오
許玄度隱在永興南幽穴中,每致四方諸侯之遺。或謂許曰:「嘗聞箕山人,似不爾耳!」許曰:「筐篚苞苴,故當輕於天下之寶耳!」
허현도가 영흥 남쪽 그윽한 굴 가운데 숨었는데, 늘 사방 제후의 보냄을 오게 하였다.
어떤 이가 허씨에게 말하였다. "일찍이 기산 사람은 이렇지 않은 듯하다 들었소."
허씨가 말하였다. "광주리와 꾸러미는 짐짓 마땅히 천하의 보배보다 가벼울 뿐이오."
협주 1
鄭玄《禮記注》云:「苞苴,裹肉也。或以葦,或以茅。」此言許由尚致堯帝之讓,筐篚之遺,豈非輕邪?
정현의 『예기』 주에 이르기를 「포저(苞苴)는 고기를 싼 것이다. 더러 갈대로 하고 더러 띠로 한다」 하였다. 이 말은 허유가 오히려 요임금이 사양함도 이르게 하였으니, 광주리로 보내는 것이 어찌 가볍지 않으냐는 것이다.
14범선이 곧 수레 뒤에서 종종걸음으로 내렸다
范宣未嘗入公門。韓康伯與同載,遂誘俱入郡。范便於車後趨下。
범선은 일찍이 관청 문에 들어간 적이 없었다.
한강백이 함께 수레를 타고 마침내 꾀어 함께 군에 들어가니, 범선이 곧 수레 뒤에서 종종걸음으로 내렸다.
협주 1
《續晉陽秋》曰:「宣少尚隱遁,家于豫章,以清潔自立。」
『속진양추』에 이르기를 「범선은 젊어서 숨어 달아나기를 숭상하여 예장에 살며 맑고 깨끗함으로 스스로 섰다」 하였다.
15요사이 섬에 이르니 마치 관사 같소
郗超每聞欲高尚隱退者,輒為辦百萬資,并為造立居宇。在剡為戴公起宅,甚精整。戴始往舊居,與所親書曰:「近至剡,如官舍。」郗為傅約亦辦百萬資,傅隱事差互,故不果遺。
치초는 높이 숨어 물러나려는 이가 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문득 그를 위해 백만의 밑천을 마련하고 아울러 살 집을 지어 주었다.
섬에서 대공을 위해 집을 일으켰는데 몹시 정하고 가지런하였다.
대공이 처음 옛집에 가서 가까운 이에게 글을 보내 말하였다. "요사이 섬에 이르니 마치 관사 같소."
치초가 부약을 위해서도 또한 백만의 밑천을 마련하였으나, 부약이 숨은 일이 어긋났으므로 마침내 보내지 못하였다.
협주 1
約,瓊小字。
약은 부경의 아이 적 이름이다.
16허연은 한갓 빼어난 정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로 빼어난 데를 건널 도구가 있다
許掾好遊山水,而體便登陟。時人云:「許非徒有勝情,實有濟勝之具。」
허연이 산과 물에 노닐기를 좋아하였고 몸이 오르고 밟기에 알맞았다.
그때 사람들이 말하였다. "허연은 한갓 빼어난 정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로 빼어난 데를 건널 도구가 있다."
17마음을 얽맬 만한 데가 도무지 다하였다
郗尚書與謝居士善。常稱:「謝慶緒識見雖不絕人,可以累心處都盡。」
치상서가 사거사와 사이가 좋았다.
늘 일컬었다. "사경서는 앎과 봄이 비록 남보다 뛰어나지는 않으나, 마음을 얽맬 만한 데가 도무지 다하였다."
협주 1
尚書,郗恢也。別見。檀道鸞《續晉陽秋》曰:「謝敷字慶緒,會稽人,崇信釋氏。初入太平山中十餘年,以長齋供養為業,招引同事,化納不倦。以母老還南山若邪中。內史郗愔表薦之,徵博士,不就。初,月犯少微星,一名處士星。古云:『以處士當之。』時戴逵居剡,既美才藝而交遊貴盛,先敷著名,時人憂之。俄而敷死,會稽人士以嘲吳人云:『吳中高士,便是求死不得。』」
상서는 치회다. 따로 보인다. 단도란의 『속진양추』에 이르기를 「사부는 자가 경서요 회계 사람이니 부처의 가르침을 높이 믿었다. 처음에 태평산 가운데 들어간 지 열 남짓 해에 긴 재계와 이바지함을 업으로 삼고, 같은 일 하는 이를 끌어들여 바꾸어 들이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미가 늙었으므로 남산 약야 가운데로 돌아왔다. 내사 치음이 표로 그를 천거하여 박사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처음에 달이 소미성을 범하였는데 한 이름은 처사성이다. 옛말에 『처사로 이에 맞선다』 하였다. 이때 대규가 섬에 살며 이미 재주와 재간이 아름답고 사귀어 노닒이 귀하고 성하여 사부보다 먼저 이름이 드러나니 그때 사람들이 그를 걱정하였다. 이윽고 사부가 죽으매 회계의 인사가 오나라 사람을 조롱하여 이르기를 『오 땅 가운데 높은 선비는 곧 죽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한다』 하였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