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 › 세설신어

임탄世説新語 任誕第二十三

세설신어 世說新語 · 유의경(劉義慶) 엮음 · 유효표(劉孝標) 주 · 남조 송(5세기) · 양 유효표 주 · 단락 54 · 한자 3,449자 · 낭독 13.8분

「세설신어」 「임탄」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해가 멉니다. 사람이 해 가에서 왔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그대로 알 수 있습니다」 — 몇 살 난 아이가 아버지 무릎에서 한 대답이다. 이튿날 다시 묻자 「해가 가깝습니다. 눈을 들면 해는 보이나 장안은 보이지 않습니다」 했다. 후한 말부터 동진까지 이백여 해, 사람들이 주고받은 말과 몸짓만을 서른여섯 갈래로 나누어 모았다. 덕행·언어·정사·문학에서 시작해 사치·성냄·시새움·원수까지 내려가니, 기릴 것과 나무랄 것을 같은 무게로 놓은 셈이다. 대숲의 일곱 사람이 나오고, 왕희지가 사위로 뽑히고, 눈 오는 밤 배를 저어 벗의 집 앞까지 갔다가 흥이 다했다며 돌아온다. 한 조각이 대개 서너 줄, 길어도 한 쪽을 넘지 않는다. 유효표가 백여 종의 책을 끌어와 단 주는 그 책들이 거의 다 없어진 지금 도리어 본문보다 길게 남았다.

1세상이 죽림칠현이라 이르다

陳留阮籍,譙國嵇康,河內山濤,三人年皆相比,康年少亞之。預此契者:沛國劉伶,陳留阮咸,河內向秀,琅邪王戎。七人常集于竹林之下,肆意酣暢,故世謂「竹林七賢」。

진류의 완적과 초국의 혜강과 하내의 산도는 세 사람의 나이가 다 서로 비슷하였고 혜강이 나이가 조금 아래였다.

이 맞음에 참여한 이는 패국의 유령과 진류의 완함과 하내의 상수와 낭야의 왕융이다.

일곱 사람이 늘 대숲 아래 모여 뜻을 멋대로 하여 흠뻑 시원하였으므로, 세상이 「죽림칠현」이라 일렀다.

협주 1

晉陽秋曰:「于時風譽扇于海內,至于今詠之。」

『진양추』에 이르기를 「이때 명성이 온 세상에 퍼져 이제에 이르도록 이를 읊는다」 하였다.

2완적이 마시고 먹기를 그치지 않고 정신과 낯빛이 태연하였다

阮籍遭母喪,在晉文王坐,進酒肉。司隸何曾亦在坐,曰:「明公方以孝治天下,而阮籍以重喪,顯於公坐,飲酒食肉,宜流之海外,以正風教。」文王曰:「嗣宗毀頓如此,君不能共憂之,何謂?且有疾而飲酒食肉,固喪禮也!」籍飲噉不輟,神色自若。

완적이 어머니 상을 당하고 진나라 문왕의 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었다.

사예 하증도 또한 자리에 있다가 말하였다. "명공께서 바야흐로 효도로 천하를 다스리시는데, 완적이 무거운 상중에 공의 자리에 드러나게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으니, 마땅히 바다 밖으로 내쳐 풍속과 가르침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문왕이 말하였다. "사종이 헐고 무너짐이 이와 같은데 그대가 함께 이를 걱정하지 못하니 무슨 말인가. 또 병이 있어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 것은 본디 상례요."

완적이 마시고 먹기를 그치지 않고 정신과 낯빛이 태연하였다.

협주 2

晉諸公贊曰:「何曾字穎考,陳郡陽夏人。父夔,魏太僕。曾以高雅稱,加性仁孝,累遷司隸校尉。用心甚正,朝廷師之。仕晉至太宰。」

『진제공찬』에 이르기를 「하증은 자가 영고요 진군 양하 사람이다. 아버지 하기는 위나라 태복이다. 하증이 높고 우아함으로 일컬어지고 성품이 어질고 효성스러움을 더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사예교위에 이르렀다. 마음 씀이 몹시 발라 조정이 그를 스승 삼았다. 진나라에 벼슬하여 태재에 이르렀다」 하였다.

干寶晉紀曰:「何曾嘗謂阮籍曰:『卿恣情任性,敗俗之人也。今忠賢執政,綜核名實,若卿之徒,何可長也!』復言之於太祖,籍飲噉不輟。故魏、晉之閒,有被髮夷傲之事,背死忘生之人,反謂行禮者,籍為之也。」魏氏春秋曰:「籍性至孝,居喪雖不率常禮,而毀幾滅性。然為文俗之士何曾等深所讎疾。大將軍司馬昭愛其通偉,而不加害也。」

간보의 『진기』에 이르기를 「하증이 일찍이 완적에게 이르기를 『경은 정을 멋대로 하고 성품에 맡기니 풍속을 무너뜨리는 사람이오. 이제 참되고 어진 이가 정사를 잡아 이름과 실을 모아 살피니, 경 같은 무리가 어찌 길 수 있겠소』 하였다. 다시 이를 태조에게 말하였으나 완적은 마시고 먹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러므로 위나라와 진나라 사이에 머리 풀고 오랑캐처럼 거만한 일과 죽음을 저버리고 삶을 잊는 사람이 있어 도리어 예를 행하는 이라 일렀으니, 완적이 이를 만든 것이다」 하였다. 『위씨춘추』에 이르기를 「완적이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상중에 있으며 비록 여느 예를 좇지 않았으나 몸이 상하여 거의 목숨을 잃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글과 속됨의 선비 하증 들에게 깊이 원수처럼 미움받는 바가 되었다. 대장군 사마소가 그 통하고 훌륭함을 아껴 해를 더하지 않았다」 하였다.

3부인의 말은 삼가 들을 수 없습니다

劉伶病酒,渴甚,從婦求酒。婦捐酒毀器,涕泣諫曰:「君飲太過,非攝生之道,必宜斷之!」伶曰:「甚善。我不能自禁,唯當祝鬼神,自誓斷之耳!便可具酒肉。」婦曰:「敬聞命。」供酒肉於神前,請伶祝誓。伶跪而祝曰:「天生劉伶,以酒為名,一飲一斛,五斗解酲。婦人之言,慎不可聽。」便引酒進肉,隗然已醉矣。

유령이 술병이 나서 목이 몹시 말라 아내에게 술을 구하였다.

아내가 술을 버리고 그릇을 헐며 눈물을 흘리고 간하였다. "그대는 마심이 너무 지나쳐 몸을 다스리는 길이 아니니 반드시 마땅히 이를 끊으셔야 합니다."

유령이 말하였다. "몹시 좋소. 내가 스스로 금하지 못하니 오직 마땅히 귀신에게 빌어 스스로 맹세하여 이를 끊을 뿐이오. 곧 술과 고기를 갖추어도 좋소."

아내가 말하였다. "삼가 명을 듣겠습니다."

술과 고기를 신 앞에 이바지하고 유령에게 빌어 맹세하기를 청하였다.

유령이 무릎 꿇고 빌었다. "하늘이 유령을 내매 술로 이름을 삼았으니, 한 번 마시면 한 섬이요 닷 말로 숙취를 푼다. 부인의 말은 삼가 들을 수 없다."

곧 술을 당기고 고기를 먹어 무너지듯 이미 취하였다.

협주 2

毛公注曰:「酒病曰酲。」

모공의 주에 이르기를 「술병을 정(酲)이라 한다」 하였다.

見竹林七賢論。

『죽림칠현론』에 보인다.

4짐짓 온종일 함께 마시고 취하였다

劉公榮與人飲酒,雜穢非類,人或譏之。答曰:「勝公榮者,不可不與飲;不如公榮者,亦不可不與飲;是公榮輩者,又不可不與飲。」故終日共飲而醉。

유공영이 남과 술을 마시는데 섞이고 더러워 같은 무리가 아니매 어떤 이가 이를 나무랐다.

대답하였다. "공영보다 나은 이는 더불어 마시지 않을 수 없고, 공영만 못한 이도 또한 더불어 마시지 않을 수 없고, 공영과 같은 무리인 이도 또 더불어 마시지 않을 수 없소."

짐짓 온종일 함께 마시고 취하였다.

협주 1

劉氏譜曰:「昶字公榮,沛國人。」晉陽秋曰:「昶為人通達,仕至兗州刺史。」

『유씨보』에 이르기를 「유창은 자가 공영이요 패국 사람이다」 하였다. 『진양추』에 이르기를 「유창은 사람됨이 통하고 통달하여 벼슬이 연주자사에 이르렀다」 하였다.

5부엌에 술 몇백 섬이 쌓여 있어 완적이 이에 보병교위 되기를 구하다

步兵校尉缺,廚中有貯酒數百斛,阮籍乃求為步兵校尉。

보병교위 자리가 비었는데 부엌 가운데 쌓아 둔 술 몇백 섬이 있으매, 완적이 이에 보병교위 되기를 구하였다.

협주 1

文士傳曰:「籍放誕有傲世情,不樂仕宦。晉文帝親愛籍,恒與談戲,任其所欲,不迫以職事。籍常從容曰:『平生曾遊東平,樂其土風,願得為東平太守。』文帝說,從其意。籍便騎驢徑到郡,皆壞府舍諸壁障,使內外相望,然後教令清寧。十餘日,便復騎驢去。後聞步兵廚中有酒三百石,忻然求為校尉。於是入府舍,與劉伶酣飲。」竹林七賢論又云:「籍與伶共飲步兵廚中,並醉而死。」此好事者為之言。籍景元中卒,而劉伶太始中猶在。

『문사전』에 이르기를 「완적이 놓아 방탕하고 세상을 거만히 보는 정이 있어 벼슬살이를 즐기지 않았다. 진나라 문제가 완적을 가까이 아껴 늘 함께 이야기하고 놀며 그 하고자 하는 바에 맡기고 벼슬일로 다그치지 않았다. 완적이 늘 조용히 이르기를 『평생에 일찍이 동평에 노닐어 그 땅의 풍속을 즐겼으니 동평태수 되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문제가 기뻐하여 그 뜻을 좇았다. 완적이 곧 나귀를 타고 곧장 고을에 이르러, 다 부의 집 여러 벽과 가림을 헐어 안팎이 서로 바라보게 한 뒤에 가르침과 명령이 맑고 편안해졌다. 열 남짓 날 만에 곧 다시 나귀를 타고 갔다. 뒤에 보병 부엌 가운데 술 삼백 섬이 있다는 말을 듣고 흔연히 교위 되기를 구하였다. 이에 부의 집에 들어가 유령과 흠뻑 마셨다」 하였다. 『죽림칠현론』에는 또 이르기를 「완적이 유령과 함께 보병 부엌 가운데서 마시다가 아울러 취하여 죽었다」 하였다. 이는 일 좋아하는 이가 지어낸 말이다. 완적은 경원 연간에 죽었고 유령은 태시 연간에 아직 있었다.

6그대들은 어찌하여 내 잠방이 속에 들어오는가

劉伶恆縱酒放達,或脫衣裸形在屋中,人見譏之。伶曰:「我以天地為棟宇,屋室為㡓衣,諸君何為入我㡓中?」

유령이 늘 술을 멋대로 마셔 놓아 통달하매, 더러 옷을 벗고 알몸으로 방 안에 있으니 사람들이 보고 이를 나무랐다.

유령이 말하였다. "나는 하늘과 땅을 마룻대와 처마로 삼고 방을 잠방이로 삼는데, 그대들은 어찌하여 내 잠방이 속에 들어오는가."

협주 1

鄧粲晉紀曰:「客有詣伶,值其裸袒,伶笑曰:『吾以天地為宅舍,以屋宇為㡓衣,諸君自不當入我㡓中,又何惡乎?』其自任若是。」

등찬의 『진기』에 이르기를 「손이 유령을 찾아왔다가 그가 벌거벗은 것을 만나매, 유령이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하늘과 땅을 집으로 삼고 처마를 잠방이로 삼으니, 그대들이 절로 마땅히 내 잠방이 속에 들어오지 말아야 하거늘 또 무엇을 미워하는가』 하였다. 그 스스로 맡김이 이와 같았다」 하였다.

7예가 어찌 우리 무리를 위해 베푼 것이겠는가

阮籍嫂嘗還家,籍見與別。或譏之。籍曰:「禮豈為我輩設也?」

완적의 형수가 일찍이 친정에 돌아가매 완적이 보고 더불어 헤어졌다.

어떤 이가 이를 나무라니 완적이 말하였다. "예가 어찌 우리 무리를 위해 베푼 것이겠는가."

협주 1

曲禮:「嫂叔不通問。」故譏之。

「곡례」에 「형수와 시아우는 안부를 통하지 않는다」 하였으므로 이를 나무란 것이다.

8지아비가 처음에는 자못 이를 의심하였으나 마침내 딴 뜻이 없었다

阮公鄰家婦有美色,當壚酤酒。阮與王安豐常從婦飲酒,阮醉,便眠其婦側。夫始殊疑之,伺察,終無他意。

완공의 이웃집 부인이 아름다운 얼굴이 있어 술청에 앉아 술을 팔았다.

완적이 왕안풍과 늘 그 부인을 좇아 술을 마셨는데, 완적이 취하면 곧 그 부인 곁에서 잤다.

지아비가 처음에는 자못 이를 의심하여 엿보아 살폈으나 마침내 딴 뜻이 없었다.

협주 1

王隱晉書曰:「籍鄰家處子有才色,未嫁而卒。籍與無親,生不相識,往哭,盡哀而去。其達而無檢,皆此類也。」

왕은의 『진서』에 이르기를 「완적의 이웃집 처녀가 재주와 얼굴이 있었는데 시집가기 전에 죽었다. 완적이 가깝지도 않고 살아서 서로 알지도 못하였는데, 가서 곡하여 슬픔을 다하고 갔다. 그 통달하여 검속이 없음이 다 이런 무리다」 하였다.

9우선 다시 그럴 뿐이오

阮籍當葬母,蒸一肥豚,飲酒二斗,然後臨訣,直言「窮矣」!都得一號,因吐血,廢頓良久。

완적이 어머니를 장사 지내려 할 때 살진 돼지 하나를 찌고 술 두 말을 마신 뒤에 마지막 하직에 임하여, 곧바로 「다하였구나」 말하였다.

도무지 한 번 부르짖음을 얻고 이로 인해 피를 토하여 무너져 지침이 한참이었다.

협주 1

鄧粲晉紀曰:「籍母將死,與人圍棋如故,對者求止,籍不肯,留與決賭。既而飲酒三斗,舉聲一號,嘔血數升,廢頓久之。」

등찬의 『진기』에 이르기를 「완적의 어미가 장차 죽으려 하는데 남과 바둑 두기를 예와 같이 하였다. 마주한 이가 그치기를 구하였으나 완적이 즐겨 하지 않고 붙들어 두고 승부를 결단하였다. 이윽고 술 서 말을 마시고 소리를 들어 한 번 부르짖고 피 몇 되를 토하며 무너져 지침이 오래였다」 하였다.

10완적이 어머니를 장사 지내며 살진 돼지를 찌고 술 두 말을 마시다

阮仲容、步兵居道南,諸阮居道北。北阮皆富,南阮貧。七月七日,北阮盛曬衣,皆紗羅錦綺。仲容以竿挂大布犢鼻㡓於中庭。人或怪之,答曰:「未能免俗,聊復爾耳!」

완중용과 보병은 길 남쪽에 살고 여러 완씨는 길 북쪽에 살았다.

북쪽 완씨는 다 넉넉하고 남쪽 완씨는 가난하였다.

칠월 이레에 북쪽 완씨가 옷을 성하게 볕에 쬐는데 다 깁과 비단이었다.

중용이 장대로 큰 베 잠방이를 가운데 뜰에 걸었다.

어떤 이가 이를 괴이하게 여기니 대답하였다. "아직 속됨을 면하지 못하니 우선 다시 그럴 뿐이오."

협주 2

咸也。

완함이다.

竹林七賢論曰:「諸阮前世皆儒學,善居室,唯咸一家尚道棄事,好酒而貧。舊俗:七月七日,法當曬衣,諸阮庭中,爛然錦綺。咸時總角,乃豎長竿,掛犢鼻㡓也。」

『죽림칠현론』에 이르기를 「여러 완씨가 앞 세상에 다 선비의 배움을 하고 집안 살림을 잘하였는데, 오직 완함의 한 집안만이 도를 숭상하고 일을 버려 술을 좋아하고 가난하였다. 옛 풍속에 칠월 이레는 법으로 마땅히 옷을 볕에 쬐는데, 여러 완씨의 뜰 가운데 비단이 눈부시었다. 완함이 그때 총각이었는데 이에 긴 장대를 세우고 잠방이를 걸었다」 하였다.

11완적은 밖의 사람이라 예의 제도를 높이지 않고 우리 무리는 속의 사람이라 법도로 스스로 처합니다

阮步兵喪母,裴令公往弔之。阮方醉,散髮坐床,箕踞不哭。裴至,下席於地,哭弔喭畢,便去。或問裴:「凡弔,主人哭,客乃為禮。阮既不哭,君何為哭?」裴曰:「阮方外之人,故不崇禮制;我輩俗中人,故以儀軌自居。」時人嘆為兩得其中。

완보병이 어머니 상을 당하매 배영공이 가서 이를 조문하였다.

완적이 바야흐로 취하여 머리를 풀고 평상에 앉아 다리를 뻗고 곡하지 않았다.

배해가 이르러 자리를 땅에 내리고 곡하며 조문하기를 마치고 곧 갔다.

어떤 이가 배해에게 물었다. "무릇 조문에 주인이 곡하여야 손이 이에 예를 하는 법이오. 완적이 이미 곡하지 않았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곡하였소."

배해가 말하였다. "완적은 밖의 사람이라 예의 제도를 높이지 않고, 우리 무리는 속의 사람이라 몸가짐의 법도로 스스로 처하오."

그때 사람들이 둘 다 알맞음을 얻었다 감탄하였다.

협주 3

籍也。

완적이다.

楷也。

배해다.

名士傳曰:「阮籍喪親,不率常禮,裴楷往弔之,遇籍方醉,散髮箕踞,旁若無人。楷哭泣盡哀而退,了無異色,其安同異如此。」戴逵論之曰:「若裴公之制弔,欲冥外以護內,有達意也,有弘防也。」

『명사전』에 이르기를 「완적이 어버이 상을 당하여 여느 예를 좇지 않았는데, 배해가 가서 이를 조문하다가 완적이 바야흐로 취하여 머리를 풀고 다리를 뻗고 곁에 사람이 없는 듯함을 만났다. 배해가 곡하고 울어 슬픔을 다하고 물러나는데 조금도 남다른 낯빛이 없었으니, 그 같음과 다름에 편안함이 이와 같았다」 하였다. 대규가 이를 논하여 이르기를 「배공이 조문을 지음 같은 것은 밖을 어둡게 하여 안을 지키려 한 것이니, 뜻에 통달함이 있고 넓게 막음이 있다」 하였다.

12그때 돼지 떼가 와서 마시니 곧바로 위를 걷어 내고 함께 마시다

諸阮皆能飲酒,仲容至宗人閒共集,不復用常桮斟酌,以大甕盛酒,圍坐,相向大酌。時有群豬來飲,直接去上,便共飲之。

여러 완씨가 다 술을 잘 마셨다.

중용이 겨레붙이 사이에 이르러 함께 모이면 다시 여느 잔으로 따르지 않고, 큰 독에 술을 담아 둘러앉아 서로 마주하고 크게 떴다.

그때 돼지 떼가 와서 마시니 곧바로 위를 걷어 내고 곧 함께 마셨다.

13중용이 이미 여기 참여하였으니 경은 다시 그러지 마라

阮渾長成,風氣韻度似父,亦欲作達。步兵曰:「仲容已預之,卿不得復爾。」

완혼이 자라매 풍모와 기운과 기품과 도량이 아비를 닮아 또한 통달함을 짓고자 하였다.

보병이 말하였다. "중용이 이미 여기 참여하였으니 너는 다시 그러지 마라."

협주 1

竹林七賢論曰:「籍之抑渾,蓋以渾未識己之所以為達也。後咸兄子簡,亦以曠達自居。父喪,行遇大雪,寒凍,遂詣浚儀令,令為它賓設黍臛,簡食之,以致清議,廢頓幾三十年。是時竹林諸賢之風雖高,而禮教尚峻,迨元康中,遂至放蕩越禮。樂廣譏之曰:『名教中自有樂地,何至於此?』樂令之言有旨哉!謂彼非玄心,徒利其縱恣而已。」

『죽림칠현론』에 이르기를 「완적이 완혼을 누른 것은 대개 완혼이 제가 통달한 까닭을 아직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뒤에 완함의 형의 아들 완간도 또한 트이고 통달함으로 스스로 처하였다. 아비 상에 다니다가 큰 눈을 만나 춥고 얼매 마침내 준의령을 찾아가니, 영이 다른 손을 위해 기장국을 차렸는데 완간이 이를 먹어 맑은 의논을 일으켜 무너져 지친 것이 거의 서른 해였다. 이때 죽림 여러 어진 이의 바람이 비록 높았으나 예의 가르침이 오히려 준엄하였는데, 원강 연간에 이르러 마침내 방탕하여 예를 넘음에 이르렀다. 악광이 이를 나무라 이르기를 『이름의 가르침 가운데 절로 즐거운 데가 있거늘 어찌 여기에 이르는가』 하였다. 악령의 말에 뜻이 있구나. 저들이 아득한 마음이 아니라 한갓 그 멋대로 함을 이롭게 여겼을 뿐임을 이른 것이다」 하였다.

14서로 마주하여 손과 주인이 되어 조금도 남다른 낯빛이 없었다

裴成公婦,王戎女。王戎晨往裴許,不通徑前。裴從床南下,女從北下,相對作賓主,了無異色。

배성공의 아내는 왕융의 딸이다.

왕융이 새벽에 배씨의 처소에 가서 알리지 않고 곧장 나아갔다.

배씨는 평상 남쪽으로 내려오고 딸은 북쪽으로 내려와, 서로 마주하여 손과 주인이 되어 조금도 남다른 낯빛이 없었다.

협주 1

裴氏家傳曰:「頠取戎長女。」

『배씨가전』에 이르기를 「배위가 왕융의 맏딸을 맞았다」 하였다.

15사람의 씨는 잃을 수 없다

阮仲容先幸姑家鮮卑婢。及居母喪,姑當遠移,初云當留婢,既發,定將去。仲容借客驢箸重服自追之,累騎而返。曰:「人種不可失!」即遙集之母也。

완중용이 앞서 고모 집의 선비족 계집종을 사랑하였다.

어머니 상중에 있게 되매 고모가 마땅히 멀리 옮겨 가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마땅히 계집종을 남기겠다 하더니 떠날 때 정말로 데려갔다.

중용이 손의 나귀를 빌려 무거운 상복을 입고 스스로 그를 뒤쫓아, 말을 겹쳐 타고 돌아왔다.

말하였다. "사람의 씨는 잃을 수 없다."

곧 요집의 어미다.

협주 1

竹林七賢論曰:「咸既追婢,於是世議紛然。自魏末沈淪閭巷,逮晉咸寧中,始登王途。」阮孚別傳曰:「咸與姑書曰:『胡婢遂生胡兒。』姑答書曰:『魯靈光殿賦曰:「胡人遙集於上楹」,可字曰遙集也。』故孚字遙集。」

『죽림칠현론』에 이르기를 「완함이 이미 계집종을 뒤쫓으매 이에 세상의 의논이 어지러웠다. 위나라 말부터 마을에 잠겼다가 진나라 함녕 연간에 이르러 비로소 벼슬길에 올랐다」 하였다. 『완부별전』에 이르기를 「완함이 고모에게 글을 보내 이르기를 『오랑캐 계집종이 마침내 오랑캐 아이를 낳았습니다』 하니, 고모가 답하는 글에 이르기를 『「노령광전부」에 「오랑캐 사람이 멀리 위 기둥에 모인다」 하였으니 자를 요집이라 하여도 좋겠다』 하였다. 그러므로 완부의 자가 요집이다」 하였다.

16원부는 북하문 같아 우수수 절로 무너지려 하니 나무 하나로 버틸 바가 아니오

任愷既失權勢,不復自檢括。或謂和嶠曰:「卿何以坐視元裒敗而不救?」和曰:「元裒如北夏門,拉攞自欲壞,非一木所能支。」

임개가 이미 권세를 잃고 다시 스스로 검속하지 않았다.

어떤 이가 화교에게 말하였다. "경은 어찌하여 원부가 무너지는 것을 앉아 보면서 건지지 않소."

화교가 말하였다. "원부는 북하문 같아 우수수 절로 무너지려 하니 나무 하나로 버틸 바가 아니오."

협주 1

晉諸公贊曰:「愷字元裒,樂安博昌人。有雅識國幹,萬機大小多綜之。與賈充不平,充乃啟愷掌吏部,又使有司奏愷用御食器,坐免官,世祖情遂薄焉。」

『진제공찬』에 이르기를 「임개는 자가 원부요 낙안 박창 사람이다. 우아한 앎과 나라의 재간이 있어 만 가지 기틀의 크고 작은 것을 흔히 모아 다스렸다. 가충과 사이가 고르지 않았는데, 가충이 이에 임개가 이부를 맡았다 아뢰고 또 맡은 이를 시켜 임개가 임금의 밥그릇을 썼다 아뢰게 하니, 이에 걸려 벼슬을 면하매 세조의 정이 마침내 엷어졌다」 하였다.

17가라 가라 다시 갚음이 될 만한 것이 없다

劉道真少時,常漁草澤,善歌嘯,聞者莫不留連。有一老嫗,識其非常人,甚樂其歌嘯,乃殺豚進之。道真食豚盡,了不謝。嫗見不飽,又進一豚,食半餘半,迺還之。後為吏部郎,嫗兒為小令史,道真超用之。不知所由,問母;母告之。於是齎牛酒詣道真,道真曰:「去!去!無可復用相報。」

유도진이 젊었을 때 늘 풀 우거진 못에서 고기를 잡았는데, 노래하고 휘파람 불기를 잘하여 듣는 이가 머물러 이어지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한 늙은 할멈이 있어 그가 예사 사람이 아님을 알고 그 노래와 휘파람을 몹시 즐거워하여, 이에 돼지를 잡아 그에게 올렸다.

도진이 돼지를 다 먹고 조금도 사례하지 않았다.

할멈이 배부르지 않은 것을 보고 또 돼지 하나를 올리니, 절반을 먹고 절반을 남겨 이에 돌려주었다.

뒤에 이부랑이 되매 할멈의 아들이 작은 영사가 되었는데 도진이 그를 뛰어넘어 썼다.

그 까닭을 알지 못하여 어미에게 물으니 어미가 이를 알려 주었다.

이에 소와 술을 가지고 도진을 찾아가니, 도진이 말하였다. "가라, 가라. 다시 갚음이 될 만한 것이 없다."

협주 1

劉寶已見。

유보는 이미 보인다.

18완선자가 돈 백을 지팡이 끝에 걸고 술집에 이르면 곧 홀로 흠뻑 즐기다

阮宣子常步行,以百錢挂杖頭,至酒店,便獨酣暢。雖當世貴盛,不肯詣也。

완선자가 늘 걸어 다니며 돈 백을 지팡이 끝에 걸고 술집에 이르면 곧 홀로 흠뻑 즐겼다.

비록 요즘 세상의 귀하고 성한 이라도 찾아가려 하지 않았다.

협주 1

名士傳曰:「脩性簡任。」

『명사전』에 이르기를 「완수는 성품이 간결하고 맡겼다」 하였다.

19손을 들어 갈강에게 묻기를 병주 아이와 견주어 어떠하냐 하네

山季倫為荊州,時出酣暢。人為之歌曰:「山公時一醉,徑造高陽池。日莫倒載歸,茗艼無所知。復能乘駿馬,倒箸白接籬。舉手問葛彊,何如并州兒?」高陽池在襄陽。彊是其愛將,并州人也。

산계륜이 형주가 되어 때로 나가 흠뻑 즐겼다.

사람들이 그를 두고 노래하였다. "산공이 때로 한 번 취하면 곧장 고양지에 이른다. 해 저물어 거꾸로 실려 돌아오니 곤드레만드레 아는 바가 없다. 다시 준마를 탈 수 있어 흰 두건을 거꾸로 쓰고, 손을 들어 갈강에게 묻기를 병주 아이와 견주어 어떠하냐 하네."

고양지는 양양에 있다. 갈강은 그가 아끼던 장수니 병주 사람이다.

협주 1

襄陽記曰:「漢侍中習郁於峴山南,依范蠡養魚法作魚池,池邊有高隄,種竹及長楸,芙蓉蔆芡覆水,是遊燕名處也。山簡每臨此池,未嘗不大醉而還,曰:『此是我高陽池也!』襄陽小兒歌之。」

『양양기』에 이르기를 「한나라 시중 습욱이 현산 남쪽에 범려의 고기 기르는 법에 기대어 고기 못을 만들었는데, 못 가에 높은 둑이 있어 대와 긴 개오동을 심고 연꽃과 마름과 가시연이 물을 덮으니 이는 노닐고 잔치하는 이름난 데다. 산간이 이 못에 임할 때마다 일찍이 크게 취하여 돌아가지 않은 적이 없으며 이르기를 『이는 나의 고양지다』 하였다. 양양의 어린아이가 이를 노래하였다」 하였다.

20나에게 몸 뒤의 이름이 있게 하는 것은 곧 이때의 한 잔 술만 못하오

張季鷹縱任不拘,時人號為江東步兵。或謂之曰:「卿乃可縱適一時,獨不為身後名邪?」答曰:「使我有身後名,不如即時一桮酒!」

장계응이 멋대로 맡겨 얽매이지 않으매 그때 사람들이 강동의 보병이라 불렀다.

어떤 이가 그에게 말하였다. "경은 한때를 멋대로 즐길 수야 있으나, 어찌 죽은 뒤의 이름은 생각하지 않으시오."

대답하였다. "나에게 몸 뒤의 이름이 있게 하는 것은 곧 이때의 한 잔 술만 못하오."

협주 1

文士傳曰:「翰任性自適,無求當世,時人貴其曠達。」

『문사전』에 이르기를 「장한이 성품에 맡겨 스스로 맞추고 요즘 세상에 구함이 없으니 그때 사람들이 그 트이고 통달함을 귀히 여겼다」 하였다.

21곧 한살이를 마치기에 넉넉하다

畢茂世云:「一手持蟹螯,一手持酒桮,拍浮酒池中,便足了一生。」

필무세가 말하였다. "한 손에 게 집게를 잡고 한 손에 술잔을 잡고 술 못 가운데 둥둥 떠 있으면 곧 한살이를 마치기에 넉넉하다."

협주 1

晉中興書曰:「畢卓字茂世,新蔡人。少傲達為胡毋輔之所知。太興末,為吏部郎,嘗飲酒廢職。比舍郎釀酒熟,卓因醉,夜至其{雝缶}間取飲之。主者謂是盜,執而縛之,知為吏部也,釋之。卓遂引主人燕{雝缶}側,取醉而去。溫嶠素知愛卓,請為平南長史,卒。」

『진중흥서』에 이르기를 「필탁은 자가 무세요 신채 사람이다. 젊어서 거만하고 통달하여 호무보지에게 알려졌다. 태흥 말에 이부랑이 되었는데 일찍이 술을 마시고 일을 그만두었다. 이웃집 낭관이 술을 익히매 필탁이 취한 김에 밤에 그 독 사이에 이르러 가져다 마셨다. 맡은 이가 도적이라 하여 잡아 묶었다가 이부랑인 줄 알고 풀어 주었다. 필탁이 마침내 주인을 이끌어 독 곁에서 잔치하고 취함을 얻어 갔다. 온교가 본디 알아 필탁을 아꼈으므로 평남장사 되기를 청하였는데 죽었다」 하였다.

22장계응이 길에 얹혀 타고 곧 하순과 함께 떠나다

賀司空入洛赴命,為太孫舍人。經吳閶門,在船中彈琴。張季鷹本不相識,先在金閶亭,聞絃甚清,下船就賀,因共語。便大相知說。問賀:「卿欲何之?」賀曰:「入洛赴命,正爾進路。」張曰:「吾亦有事北京。」因路寄載,便與賀同發。初不告家,家追問迺知。

하사공이 낙양에 들어가 명에 나아가 태손사인이 되었다.

오나라 창문(閶門)이라는 성문을 지나며 배 안에서 거문고를 탔다.

장계응이 본디 서로 알지 못하였는데 먼저 금창정에 있다가 줄 소리가 몹시 맑음을 듣고, 배에서 내려 하순에게 나아가 이로 인해 함께 말하매 곧 크게 서로 알고 기뻐하였다.

하순에게 물었다. "경은 어디로 가려 하오."

하순이 말하였다. "낙양에 들어가 명에 나아가려 바로 이렇게 길을 나섰소."

장씨가 말하였다. "나도 또한 북쪽 서울에 일이 있소."

이로 인해 길에 얹혀 타고 곧 하순과 함께 떠났다.

처음에 집에 알리지 않아 집에서 뒤쫓아 물어서야 이에 알았다.

23어젯밤에 다시 남당에 한 번 나갔소

祖車騎過江時,公私儉薄,無好服玩。王、庾諸公共就祖,忽見裘袍重疊,珍飾盈列,諸公怪問之。祖曰:「昨夜復南塘一出。」祖于時恆自使健兒鼓行劫鈔,在事之人,亦容而不問。

조거기가 강을 건널 때 공사 간에 검소하고 엷어 좋은 옷과 즐길 것이 없었다.

왕씨와 유씨 여러 공이 함께 조씨에게 나아갔다가 홀연히 갖옷과 도포가 겹겹이 쌓이고 진귀한 꾸밈이 벌여 가득함을 보고, 여러 공이 괴이하여 이를 물었다.

조씨가 말하였다. "어젯밤에 다시 남당에 한 번 나갔소."

조씨가 이때 늘 스스로 씩씩한 아이들을 시켜 북 치고 나아가 겁박하고 노략질하게 하였는데, 일 맡은 사람도 또한 봐주고 묻지 않았다.

협주 1

晉陽秋曰:「逖性通濟,不拘小節。又賓從多是桀黠勇士,逖待之皆如子弟。永嘉中,流民以萬數,揚土大饑,賓客攻剽,逖輒擁護全衛,談者以此少之,故久不得調。」

『진양추』에 이르기를 「조적이 성품이 통하고 건졌으며 작은 마디에 얽매이지 않았다. 또 손과 따르는 이가 흔히 사납고 약고 날랜 선비였는데, 조적이 이들을 대접하기를 다 자제처럼 하였다. 영가 연간에 흐르는 백성이 만으로 헤아려지고 양 땅이 크게 주려 손들이 쳐서 빼앗으매, 조적이 문득 감싸 지켜 온전히 호위하니 말하는 이가 이로써 그를 낮추었으므로 오래도록 벼슬을 얻지 못하였다」 하였다.

24올해 밭에서 차조 칠백 섬을 얻었으나 누룩 일을 마치지 못하였다

鴻臚卿孔群好飲酒。王丞相語云:「卿何為恆飲酒?不見酒家覆瓿布,日月糜爛?」群曰:「不爾,不見糟肉,乃更堪久。」群嘗書與親舊:「今年田得七百斛秫米,不了麴蘖事。」

홍려경 공군이 술 마시기를 좋아하였다.

왕승상이 말하였다. "경은 어찌하여 늘 술을 마시오. 술집의 항아리 덮는 베가 나날이 문드러지는 것을 보지 못하오."

공군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술지게미에 담근 고기가 이에 더욱 오래 견딤을 보지 못하십니까."

공군이 일찍이 가깝고 옛 이에게 글을 보내 말하였다. "올해 밭에서 차조 칠백 섬을 얻었으나 누룩 일을 마치지 못하였다."

협주 1

群已見上。

공군은 이미 위에 보인다.

25내가 만 리 긴 강 같으니 어찌 천 리에 한 굽이가 없겠는가

有人譏周僕射:「與親友言戲,穢雜無檢節。」周曰:「吾若萬里長江,何能不千里一曲。」

어떤 이가 주복야를 나무랐다. "가까운 벗과 말하고 놀 때 더럽고 섞여 절제가 없소."

주씨가 말하였다. "내가 만 리 긴 강 같으니 어찌 천 리에 한 굽이가 없겠소."

협주 1

鄧粲晉紀曰:「王導與周顗及朝士詣尚書紀瞻觀伎。瞻有愛妾,能為新聲。顗於眾中欲通其妾,露其醜穢,顏無怍色。有司奏免顗官,詔特原之。」

등찬의 『진기』에 이르기를 「왕도가 주의와 조정의 선비와 함께 상서 기첨을 찾아가 재주 부리는 것을 보았다. 기첨에게 아끼는 첩이 있어 새 소리를 지을 수 있었다. 주의가 뭇사람 가운데서 그 첩과 통하려 하여 그 더러움을 드러내는데 낯에 부끄러운 빛이 없었다. 맡은 이가 주의의 벼슬을 면하기를 아뢰니 조칙으로 유난히 그를 용서하였다」 하였다.

26경이 나를 되사 줄 만하오

溫太真位未高時,屢與揚州、淮中估客樗蒱,與輒不競。嘗一過,大輸物,戲屈,無因得反。與庾亮善,於舫中大喚亮曰:「卿可贖我!」庾即送直,然後得還。經此數四。

온태진이 자리가 아직 높지 않았을 때, 자주 양주와 회수 가운데의 장사치와 저포를 하였는데 하면 문득 겨루지 못하였다.

일찍이 한 번은 크게 물건을 잃고 놀이에 굽혀 돌아올 길이 없었다.

유량과 사이가 좋으므로 배 안에서 크게 유량을 불러 말하였다. "경이 나를 되사 줄 만하오."

유량이 곧 값을 보낸 뒤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이런 일을 겪음이 서너 번이었다.

협주 1

中興書曰:「嶠有俊朗之目,而不拘細行。」

『중흥서』에 이르기를 「온교는 뛰어나고 환한 제목이 있었으나 잔 몸가짐에 얽매이지 않았다」 하였다.

27태진은 온종일 더러운 말이 없다

溫公喜慢語,卞令禮法自居。至庾公許,大相剖擊。溫發口鄙穢,庾公徐曰:「太真終日無鄙言。」

온공이 거만한 말을 좋아하고 변영은 예와 법으로 스스로 처하였다.

유공의 처소에 이르러 크게 서로 쪼개고 쳤다.

온공이 입에서 더러운 말을 내니 유공이 천천히 말하였다. "태진은 온종일 더러운 말이 없다."

협주 2

卞壼別傳曰:「壼正色立朝,百寮嚴憚,貴遊子弟,莫不祗肅。」

『변곤별전』에 이르기를 「변곤이 낯빛을 바로 하여 조정에 서매 온 벼슬아치가 엄히 꺼렸고 귀히 노니는 자제가 공경하고 엄숙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하였다.

重其達也。

그 통달함을 무겁게 여긴 것이다.

28그때 사람들이 사흘 복야라 이르다

周伯仁風德雅重,深達危亂。過江積年,恆大飲酒。嘗經三日不醒,時人謂之「三日僕射」。

주백인은 풍모와 덕이 우아하고 무거우며 위태로움과 어지러움에 깊이 통달하였다.

강을 건너 여러 해에 늘 크게 술을 마셨다.

일찍이 사흘이 지나도록 깨지 않으니 그때 사람들이 이를 「사흘 복야」라 일렀다.

협주 1

晉陽秋曰:「初,顗以雅望,獲海內盛名,後屢以酒失。庾亮曰:『周侯末年,可謂鳳德之衰也。』」語林曰:「伯仁正有姊喪,三日醉,姑喪,二日醉,大損資望。每醉,諸公常共屯守。」

『진양추』에 이르기를 「처음에 주의가 우아한 바람으로 온 세상의 성한 이름을 얻었으나 뒤에 자주 술로 잃었다. 유량이 이르기를 『주후의 말년은 봉의 덕이 쇠하였다 할 만하다』 하였다」 하였다. 『어림』에 이르기를 「백인이 마침 누이 상에 사흘을 취하고 고모 상에 이틀을 취하여 지위와 명망을 크게 덜었다. 취할 때마다 여러 공이 늘 함께 진 치고 지켰다」 하였다.

29위군장이 온공의 처소에 가서도 또한 그러하였다

衛君長為溫公長史,溫公甚善之。每率爾提酒脯就衛,箕踞相對彌日。衛往溫許,亦爾。

위군장이 온공의 장사가 되매 온공이 몹시 그와 좋았다.

뜻대로 술과 포를 들고 위씨에게 나아가 다리를 뻗고 서로 마주하기를 날이 다하도록 할 때마다, 위군장이 온공의 처소에 가서도 또한 그러하였다.

협주 1

衛永已見。

위영은 이미 보인다.

30어디서 유오군을 찾는가 이 안이 곧 그다

蘇峻亂,諸庾逃散。庾冰時為吳郡,單身奔亡,民吏皆去。唯郡卒獨以小船載冰出錢塘口,蘧篨覆之。時峻賞募覓冰,屬所在搜檢甚急。卒捨船市渚,因飲酒醉還,舞棹向船曰:「何處覓庾吳郡?此中便是。」冰大惶怖,然不敢動。監司見船小裝狹,謂卒狂醉,都不復疑。自送過淛江,寄山陰魏家,得免。後事平,冰欲報卒,適其所願。卒曰:「出自廝下,不願名器。少苦執鞭,恆患不得快飲酒。使其酒足餘年畢矣,無所復須。」冰為起大舍,市奴婢,使門內有百斛酒,終其身。時謂此卒非唯有智,且亦達生。

소준의 난에 여러 유씨가 달아나 흩어졌다.

유빙이 그때 오군이 되었는데 홑몸으로 달아나니 백성과 아전이 다 떠났다.

오직 고을의 병졸만이 홀로 작은 배에 유빙을 싣고 전당 어귀로 나가며 왕골자리로 그를 덮었다.

이때 소준이 상을 걸고 유빙을 찾으매 있는 데마다 뒤져 살피기를 몹시 급히 하였다.

병졸이 배를 물가 저자에 두고 이로 인해 술을 마시고 취해 돌아와, 노를 휘두르며 배를 향해 말하였다. "어디서 유오군을 찾는가. 이 안이 곧 그다."

유빙이 크게 두려웠으나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살피는 벼슬아치가 배가 작고 꾸림이 좁음을 보고 병졸이 미친 듯 취하였다 하여 도무지 다시 의심하지 않았다.

스스로 절강을 지나 보내어 산음의 위씨 집에 부치니 면할 수 있었다.

뒤에 일이 평온해지매 유빙이 병졸에게 갚고자 하여 그 바라는 바에 맞추려 하였다.

병졸이 말하였다. "천한 아래에서 나왔으니 이름과 그릇을 바라지 않습니다. 젊어서 채찍 잡기에 괴로웠고 늘 술을 시원히 마시지 못함을 걱정하였습니다. 그 술로 하여금 남은 나이를 넉넉히 마치게 하시면 다시 바랄 바가 없습니다."

유빙이 그를 위해 큰 집을 일으키고 종과 계집종을 사 주어, 문 안에 백 섬 술이 있게 하기를 그 몸이 마치도록 하였다.

그때 이 병졸이 다만 슬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한 삶에 통달하였다 일렀다.

협주 1

中興書曰:「冰為吳郡,蘇峻作逆,遣軍伐冰,冰棄郡奔會稽。」

『중흥서』에 이르기를 「유빙이 오군이 되었는데 소준이 거스름을 지어 군사를 보내 유빙을 치매 유빙이 고을을 버리고 회계로 달아났다」 하였다.

31잠기는 것은 절로 잠기고 뜨는 것은 절로 뜨라

殷洪喬作豫章郡,臨去,都下人因附百許函書。既至石頭,悉擲水中,因祝曰:「沈者自沈,浮者自浮,殷洪喬不能作致書郵。」

은홍교가 예장군이 되어 떠나려 할 때, 서울 사람이 백 남짓 통의 글을 부쳤다.

이윽고 석두에 이르매 다 물 가운데 던지고 이로 인해 빌었다. "잠기는 것은 절로 잠기고 뜨는 것은 절로 떠라. 은홍교는 글 부치는 역졸 노릇을 하지 못한다."

협주 1

殷氏譜曰:「羡字洪喬,陳郡人。父識,鎮東司馬。羡仕至豫章太守。」

『은씨보』에 이르기를 「은선은 자가 홍교요 진군 사람이다. 아버지 은식은 진동사마다. 은선은 벼슬이 예장태수에 이르렀다」 하였다.

32사람으로 하여금 안풍을 생각하게 한다

王長史、謝仁祖同為王公掾。長史云:「謝掾能作異舞。」謝便起舞,神意甚暇。王公熟視,謂客曰:「使人思安豐。」

왕장사와 사인조가 함께 왕공의 아전이 되었다.

장사가 말하였다. "사 아전이 남다른 춤을 출 수 있습니다."

사인조가 곧 일어나 춤추는데 정신과 뜻이 몹시 한가하였다.

왕공이 익히 보고 손에게 말하였다. "사람으로 하여금 안풍을 생각하게 한다."

협주 3

王濛別傳曰:「丞相王導辟名士時賢,協贊中興。旌命所加,必延俊乂,辟濛為掾。」

『왕몽별전』에 이르기를 「승상 왕도가 이름난 선비와 그때 어진 이를 불러 중흥을 도와 도왔다. 기와 명을 더하는 바에 반드시 뛰어난 이를 끌어들였는데 왕몽을 불러 아전으로 삼았다」 하였다.

晉陽秋曰:「尚性通任,善音樂。」語林曰:「謝鎮西酒後,於槃案閒,為洛市肆工鴝鵒舞,甚佳。」

『진양추』에 이르기를 「사상이 성품이 통하고 맡겼으며 음악을 잘하였다」 하였다. 『어림』에 이르기를 「사진서가 술 뒤에 소반과 안석 사이에서 낙양 저자 가게 장인의 구관조 춤을 추니 몹시 아름다웠다」 하였다.

戎性通任,尚類之。

왕융이 성품이 통하고 맡겼는데 사상이 그를 닮았다.

33흠뻑 잔치하기 반쯤 앉아서야 이에 상복을 벗지 않았음을 깨닫다

王、劉共在杭南,酣宴於桓子野家。謝鎮西往尚書墓還,葬後三日反哭。諸人欲要之,初遣一信,猶未許,然已停車。重要,便回駕。諸人門外迎之,把臂便下,裁得脫幘箸帽。酣宴半坐,乃覺未脫衰。

왕씨와 유씨가 함께 항남에 있으며 환자야의 집에서 흠뻑 잔치하였다.

사진서가 상서의 무덤에 갔다 돌아왔으니 장사 뒤 사흘 만에 돌아와 곡하는 것이었다.

여러 사람이 그를 청하려 하여 처음에 기별 하나를 보내니 아직 허락하지 않았으나 이미 수레를 멈추었다.

거듭 청하매 곧 멍에를 돌렸다.

여러 사람이 문 밖에서 그를 맞아 팔을 잡고 곧 내리게 하니, 겨우 두건을 벗고 모자를 쓸 수 있었다.

흠뻑 잔치하기 반쯤 앉아서야 이에 상복을 벗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협주 2

伊已見。

환이는 이미 보인다.

尚書,謝裒,尚叔也。已見。宋明帝文章志曰:「尚性輕率,不拘細行。兄葬後,往墓還,王濛、劉惔共遊新亭,濛欲招尚,先以問惔曰:『計仁祖正當不為異同耳。』惔曰:『仁祖韻中自應來。』乃遣要之。尚初辭,然已無歸意。及再請,即回軒焉。其率如此。」

상서는 사부니 사상의 아저씨다. 이미 보인다. 송나라 명제의 『문장지』에 이르기를 「사상이 성품이 가볍고 시원하여 잔 몸가짐에 얽매이지 않았다. 형을 장사 지낸 뒤에 무덤에 갔다 돌아오는데, 왕몽과 유담이 함께 신정에 노닐다가 왕몽이 사상을 부르려 하여 먼저 유담에게 묻기를 『헤아리건대 인조가 바로 마땅히 같고 다름을 하지는 않겠지』 하니, 유담이 『인조는 울림 가운데 절로 마땅히 오리라』 하였다. 이에 보내어 그를 청하였다. 사상이 처음에 사양하였으나 이미 돌아갈 뜻이 없었다. 다시 청함에 미쳐 곧 수레를 돌렸다. 그 시원함이 이와 같았다」 하였다.

34네가 마침내 원언도를 아느냐

桓宣武少家貧,戲大輸,債主敦求甚切,思自振之方,莫知所出。陳郡袁躭,俊邁多能。宣武欲求救於躭,躭時居艱,恐致疑,試以告焉。應聲便許,略無嫌吝。遂變服懷布帽隨溫去,與債主戲。躭素有蓺名,債主就局曰:「汝故當不辦作袁彥道邪?」遂共戲。十萬一擲,直上百萬數。投馬絕叫,傍若無人,探布帽擲對人曰:「汝竟識袁彥道不?」

환선무가 젊어서 집이 가난한데 놀이에 크게 잃어, 빚 준 이가 다그쳐 구하기를 몹시 절박하게 하매 스스로 떨칠 방도를 생각하였으나 나올 바를 알지 못하였다.

진군의 원탐은 뛰어나고 빼어나 잘하는 것이 많았다.

선무가 원탐에게 구원을 구하려 하였으나, 원탐이 그때 상중에 있으므로 의심을 살까 두려워 시험 삼아 이를 알렸다.

소리에 응하여 곧 허락하고 조금도 꺼리고 아끼는 바가 없었다.

마침내 옷을 바꾸고 베 모자를 품고 환온을 따라가 빚 준 이와 놀이를 하였다.

원탐이 본디 재주의 이름이 있었으매 빚 준 이가 판에 나아가 말하였다. "너는 짐짓 마땅히 원언도를 만들어 내지는 못하겠지."

마침내 함께 놀이하였다. 십만을 한 번 던져 곧바로 백만 셈에 올랐다.

말을 던지며 크게 외치되 곁에 사람이 없는 듯하다가, 베 모자를 더듬어 꺼내 마주한 이에게 던지며 말하였다. "너는 마침내 원언도를 아느냐."

협주 2

袁氏家傳曰:「耽字彥道,陳郡陽夏人,魏中郎令渙曾孫也。魁梧爽朗,高風振邁,少倜儻不羈,有異才,士人多歸之。仕至司徒從事中郎。」

『원씨가전』에 이르기를 「원탐은 자가 언도요 진군 양하 사람이니 위나라 중랑령 원환의 증손이다. 크고 훌륭하며 시원하고 환하며 높은 바람이 떨쳐 빼어났고, 젊어서 얽매이지 않고 남다른 재주가 있어 선비들이 흔히 그에게 돌아갔다. 벼슬이 사도종사중랑에 이르렀다」 하였다.

郭子曰:「桓公樗蒱,失數百斛米,求救於袁耽。耽在艱中,便云:『大快。我必作采,卿但大喚。』即脫其衰,共出門去。覺頭上有布帽,擲去,箸小帽。既戲,袁形勢呼袒,擲必盧雉,二人齊叫,敵家頃刻失數百萬也。」

『곽자』에 이르기를 「환공이 저포로 몇백 섬 쌀을 잃고 원탐에게 구원을 구하였다. 원탐이 상중에 있었는데 곧 이르기를 『몹시 시원하다. 내가 반드시 좋은 끗수를 낼 터이니 경은 다만 크게 외치라』 하고, 곧 그 상복을 벗고 함께 문을 나섰다. 머리 위에 베 모자가 있음을 깨닫고 던져 버리고 작은 모자를 썼다. 이윽고 놀이하매 원탐이 형세를 보아 웃통을 벗으라 외치고 던지면 반드시 노와 치가 나오니, 두 사람이 가지런히 외쳐 적수 집안이 잠깐 사이에 몇백만을 잃었다」 하였다.

35술은 바로 사람마다 스스로 멀어지게 한다

王光祿云:「酒,正使人人自遠。」

왕광록이 말하였다. "술은 바로 사람마다 스스로 멀어지게 한다."

협주 1

光祿,王蘊也。續晉陽秋曰:「蘊素嗜酒,末年尤甚。及在會稽,略少醒日。」

광록은 왕온이다. 『속진양추』에 이르기를 「왕온이 본디 술을 즐겼는데 말년에 더욱 심하였다. 회계에 있을 때는 깬 날이 몹시 적었다」 하였다.

36손승공은 미친 선비라 더러 반쯤 돌아갔다가 도로 돌아온다

劉尹云:「孫承公狂士,每至一處,賞翫累日,或回至半路卻返。」

유윤이 말하였다. "손승공은 미친 선비라 한 곳에 이를 때마다 기려 즐기기를 여러 날 하고, 더러 돌아오다가 반쯤 길에 이르러 도로 돌아간다."

협주 1

中興書曰:「承公少誕任不羈,家於會稽,性好山水。及求鄞縣,遺心細務,縱意遊肆,名阜盛川,靡不歷覽。」

『중흥서』에 이르기를 「승공은 젊어서 터무니없이 맡겨 얽매이지 않았고 회계에 집이 있었으며 성품이 산과 물을 좋아하였다. 은현을 구함에 미쳐 마음을 잔일에서 버리고 뜻을 멋대로 하여 노닐어, 이름난 언덕과 성한 내를 두루 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하였다.

37다시 한 사람이 있어 경에게 짝지어 주지 못함이 한이오

袁彥道有二妹:一適殷淵源,一適謝仁祖。語桓宣武云:「恨不更有一人配卿。」

원언도에게 두 누이가 있어 하나는 은연원에게 가고 하나는 사인조에게 갔다.

환선무에게 말하였다. "다시 한 사람이 있어 경에게 짝지어 주지 못함이 한이오."

협주 1

袁氏譜曰:「耽大妹名女皇,適殷浩。小妹名女正,適謝尚。」

『원씨보』에 이르기를 「원탐의 큰누이는 이름이 여황이니 은호에게 갔고, 작은누이는 이름이 여정이니 사상에게 갔다」 하였다.

38아까 이 고기를 얻고 그대 배 위에 마땅히 회칠 도구가 있으리라 보았으므로 왔을 뿐이오

桓車騎在荊州,張玄為侍中,使至江陵,路經陽岐村,俄見一人,持半小籠生魚,徑來造船云:「有魚,欲寄作膾。」張乃維舟而納之。問其姓字,稱是劉遺民。張素聞其名,大相忻待。劉既知張銜命,問:「謝安、王文度並佳不?」張甚欲話言,劉了無停意。既進膾,便去,云:「向得此魚,觀君船上當有膾具,是故來耳。」於是便去。張乃追至劉家,為設酒,殊不清旨。張高其人,不得已而飲之。方共對飲,劉便先起,云:「今正伐荻,不宜久廢。」張亦無以留之。

환거기가 형주에 있을 때 장현이 시중이 되어 심부름으로 강릉에 이르렀다.

길이 양기촌을 지나는데 이윽고 한 사람이 반쯤 찬 작은 바구니에 산 고기를 들고 곧장 배로 와서 말하는 것을 보았다. "고기가 있으니 회를 지어 얹고자 하오."

장현이 이에 배를 매고 그를 들였다.

그 성과 자를 물으니 유유민이라 일컬었다.

장현이 본디 그 이름을 들었으므로 크게 서로 기뻐 대접하였다.

유씨가 이미 장현이 명을 받든 줄 알고 물었다. "사안과 왕문도는 다 잘 계시오."

장현이 몹시 말하고자 하였으나 유씨는 조금도 머물 뜻이 없었다.

이윽고 회를 올리자 곧 가며 말하였다. "아까 이 고기를 얻고 그대 배 위에 마땅히 회칠 도구가 있으리라 보았으므로 왔을 뿐이오."

이에 곧 갔다.

장현이 이에 뒤쫓아 유씨의 집에 이르니 술을 차려 주는데 자못 맑고 맛있지 않았다.

장현이 그 사람을 높이 여겨 마지못해 이를 마셨다.

바야흐로 함께 마주 마시는데 유씨가 곧 먼저 일어나 말하였다. "이제 바로 갈대를 베어야 하니 오래 그만두는 것이 마땅하지 않소."

장현도 또한 그를 머물게 할 바가 없었다.

협주 2

村臨江,去荊州二百里。

마을이 강에 임하였고 형주에서 이백 리 떨어져 있다.

中興書曰:「劉驎之,一字遺民。」已見。

『중흥서』에 이르기를 「유인지는 한 자가 유민이다」 하였다. 이미 보인다.

39아까 큰 힘 있는 이가 이를 지고 달아났소

王子猷詣郗雍州,雍州在內,見有毾㲪,云:「阿乞那得此物?」令左右送還家。郗出覓之,王曰:「向有大力者負之而趨。」郗無忤色。

왕자유가 치옹주를 찾아갔다.

옹주가 안에 있는데 담요가 있음을 보고 말하였다. "아걸이 어찌 이 물건을 얻었는가."

곁의 사람을 시켜 집으로 보내게 하였다.

치씨가 나와 이를 찾으니 왕씨가 말하였다. "아까 큰 힘 있는 이가 이를 지고 달아났소."

치씨가 거스르는 낯빛이 없었다.

협주 3

中興書曰:「郗恢字道胤,高平人。父曇,北中郎將。恢長八尺,美頿𩓿,風神魁梧。烈宗器之,以為蕃伯之望。自太子左率,擢為雍州刺史。」

『중흥서』에 이르기를 「치회는 자가 도윤이요 고평 사람이다. 아버지 치담은 북중랑장이다. 치회는 키가 여덟 자요 구레나룻과 수염이 아름다우며 풍모와 정신이 크고 훌륭하였다. 열종이 그를 그릇으로 여겨 울타리 맏이의 바람이 있다 하였다. 태자좌솔에서 뽑혀 옹주자사가 되었다」 하였다.

阿乞、恢小字。

아걸은 치회의 아이 적 이름이다.

莊子曰:「夫藏舟於壑,藏山於澤,謂之固矣。然有大力者負之而走,昧者不知也。」

『장자』에 이르기를 「무릇 배를 골짜기에 감추고 산을 못에 감추면 굳다 이른다. 그러나 큰 힘 있는 이가 있어 이를 지고 달아나면 어두운 이는 알지 못한다」 하였다.

40안석은 다치지 않았는가

謝安始出西戲,失車牛,便杖策步歸。道逢劉尹,語曰:「安石將無傷?」謝乃同載而歸。

사안이 처음 서쪽에 나가 놀다가 수레와 소를 잃고 곧 지팡이를 짚고 걸어 돌아왔다.

길에서 유윤을 만나니 말하였다. "안석은 다치지 않았는가."

사안이 이에 함께 타고 돌아왔다.

41참으로 이백쉰 겹의 검은 소반이었다

襄陽羅友有大韻,少時多謂之癡。嘗伺人祠,欲乞食,往太蚤,門未開。主人迎神出見,問以非時,何得在此?答曰:「聞卿祠,欲乞一頓食耳。」遂隱門側。至曉,得食便退,了無怍容。為人有記功,從桓宣武平蜀,按行蜀城闕觀宇,內外道陌廣狹,植種果竹多少,皆默記之。後宣武漂洲與簡文集,友亦預焉。共道蜀中事,亦有所遺忘,友皆名列,曾無錯漏。宣武驗以蜀城闕簿,皆如其言。坐者嘆服。謝公云:「羅友詎減魏陽元!」後為廣州刺史,當之鎮,刺史桓豁語令莫來宿。答曰:「民已有前期。主人貧,或有酒饌之費,見與甚有舊,請別日奉命。」征西密遣人察之。至日,乃往荊州門下書佐家,處之怡然,不異勝達。在益州語兒云:「我有五百人食器。」家中大驚。其由來清,而忽有此物,定是二百五十沓烏樏。

양양의 나우가 큰 기품이 있었는데 젊었을 때는 흔히 그를 어리석다 하였다.

일찍이 남이 제사 지내기를 엿보아 밥을 빌고자 하여 갔는데 너무 일러 문이 아직 열리지 않았다.

주인이 신을 맞으러 나오다가 보고, 때가 아닌데 어찌 여기 있는가 물었다.

대답하였다. "경이 제사 지낸다는 말을 듣고 한 끼 밥을 빌고자 할 뿐이오."

마침내 문 곁에 숨었다. 새벽이 되어 밥을 얻자 곧 물러나는데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낯빛이 없었다.

사람됨이 기억하는 재간이 있어, 환선무를 따라 촉을 평정할 때 촉의 성과 대궐과 누각과 집, 안팎 길과 거리의 넓고 좁음, 심어 놓은 과일과 대의 많고 적음을 살펴 다녀 다 말없이 기억하였다.

뒤에 선무가 표주에서 간문제와 모일 때 나우도 또한 참여하였다.

함께 촉 가운데 일을 말하는데 또한 빠뜨리고 잊은 바가 있으매, 나우가 다 이름을 벌여 조금도 어긋나거나 빠뜨림이 없었다.

선무가 촉의 성과 대궐 장부로 살펴보니 다 그 말과 같아 자리에 있던 이들이 감탄하여 탄복하였다.

사공이 말하였다. "나우가 어찌 위양원만 못하겠는가."

뒤에 광주자사가 되어 마땅히 진에 가게 되매, 자사 환활이 말하여 저녁에 와서 묵으라 하였다.

대답하였다. "저에게 이미 앞선 기약이 있습니다. 주인이 가난하여 혹 술과 반찬의 비용이 있을 터인데, 저와 몹시 옛 사이가 있으니 다른 날 명을 받들기를 청합니다."

정서가 몰래 사람을 보내 이를 살피게 하였다.

그날에 이르러 이에 형주의 문하 서좌 집에 가서 거기 처하기를 기쁘게 하여 뛰어나고 통달한 이와 다르지 않았다.

익주에 있을 때 아이에게 말하였다. "나에게 오백 사람의 밥그릇이 있다."

집 안이 크게 놀랐다. 그가 온 뒤로 맑았는데 홀연히 이런 물건이 있다 하니, 참으로 이백쉰 겹의 검은 소반이었다.

협주 1

晉陽秋曰:「友字它仁,襄陽人。少好學,不持節檢。性嗜酒,當其所遇,不擇士庶。又好伺人祠,往乞餘食,雖復營署壚肆,不以為羞。桓溫常責之云:『君太不逮!須食,何不就身求?乃至於此!』友傲然不屑,答曰:『就公乞食,今乃可得,明日已復無。』溫大笑之。始仕荊州,後在溫府。以家貧乞祿,溫雖以才學遇之,而謂其誕肆,非治民才,許而不用。後同府人有得郡者,溫為席起別,友至尤晚。問之,友答曰:『民性飲道嗜味,昨奉教旨,乃是首旦出門,於中路逢一鬼,大見揶揄,云:「我只見汝送人作郡,何以不見人送汝作郡?」民始怖終慚,回還以解,不覺成淹緩之罪。』溫雖笑其滑稽,而心頗愧焉。後以為襄陽太守,累遷廣、益二州刺史。在藩舉其宏綱,不存小察,甚為吏民所安說。薨於益州。」

『진양추』에 이르기를 「나우는 자가 타인이요 양양 사람이다. 젊어서 배우기를 좋아하였으나 절제하는 몸가짐을 지니지 않았다. 성품이 술을 즐겨 만나는 바에 따라 선비와 여느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또 남이 제사 지내기를 엿보아 가서 남은 밥을 빌기를 좋아하여, 비록 다시 진영과 술집이라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환온이 늘 그를 꾸짖어 이르기를 『그대는 너무 미치지 못하는구나. 밥이 필요하면 어찌 나에게 나아가 구하지 않고 이에 이르는가』 하였다. 나우가 거만히 하찮게 여기며 대답하기를 『공에게 나아가 밥을 빌면 이제 얻을 수야 있으나 내일이면 이미 다시 없습니다』 하니 환온이 크게 웃었다. 처음에 형주에 벼슬하고 뒤에 환온의 부에 있었다. 집이 가난하므로 녹을 빌었는데, 환온이 비록 재주와 배움으로 그를 대접하였으나 그가 터무니없고 멋대로 하여 백성을 다스릴 재주가 아니라 하여 허락하고도 쓰지 않았다. 뒤에 같은 부의 사람으로 고을을 얻은 이가 있어 환온이 자리를 열어 헤어짐을 아쉬워하는데 나우가 유난히 늦게 이르렀다. 이를 물으니 나우가 대답하기를 『저는 성품이 마시는 길과 맛을 즐기는데, 어제 가르치신 뜻을 받들어 이에 첫새벽에 문을 나섰습니다. 길 가운데서 한 귀신을 만나 크게 놀림을 받았는데, 이르기를 「나는 다만 네가 남을 보내 고을살이 가는 것만 보았지 어찌 남이 너를 보내 고을살이 가게 함은 보지 못하는가」 하였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두려웠고 마침내 부끄러워, 돌아왔다가 이를 풀고 오느라 늦어진 죄를 이룬 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환온이 비록 그 익살을 웃었으나 마음에 자못 부끄러워하였다. 뒤에 양양태수로 삼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광주와 익주 두 주의 자사에 이르렀다. 울타리에 있으며 그 큰 벼리를 들고 잔 살핌에 마음 쓰지 않으니 몹시 아전과 백성이 편안하고 기뻐하는 바가 되었다. 익주에서 죽었다」 하였다.

42자야는 한번 가면 깊은 정이 있다 이를 만하다

桓子野每聞清歌,輒喚:「奈何!」謝公聞之曰:「子野可謂一往有深情。」

환자야가 맑은 노래를 들을 때마다 문득 외쳤다. "어찌하랴."

사공이 이를 듣고 말하였다. "자야는 한번 가면 깊은 정이 있다 이를 만하다."

43장씨는 집 아래 주검을 벌이고 원씨는 길 위에서 상여를 간다

張湛好於齋前種松柏。時袁山松出遊,每好令左右作挽歌。時人謂「張屋下陳屍,袁道上行殯」。

장담이 서재 앞에 소나무와 잣나무 심기를 좋아하였다.

그때 원산송이 나가 노닐 때 곁의 사람에게 만가 짓게 하기를 늘 좋아하였다.

그때 사람들이 「장씨는 집 아래 주검을 벌이고 원씨는 길 위에서 상여를 간다」 하였다.

협주 3

晉東宮官名曰:「湛字處度,高平人。」張氏譜曰:「湛祖嶷,正員郎。父曠,鎮軍司馬。湛仕至中書郎。」

『진동궁관명』에 이르기를 「장담은 자가 처도요 고평 사람이다」 하였다. 『장씨보』에 이르기를 「장담의 할아버지 장억은 정원랑이요 아버지 장광은 진군사마다. 장담은 벼슬이 중서랑에 이르렀다」 하였다.

山松別見。續晉陽秋曰:「袁山松善音樂,北人舊歌有行路難曲,辭頗疏質,山松好之,乃為文其章句,婉其節制,每因酒酣,從而歌之。聽者莫不流涕。初,羊曇善唱樂,桓尹能挽歌,及山松以行路難繼之,時人謂之三絕。」今云挽歌,未詳。

원산송은 따로 보인다. 『속진양추』에 이르기를 「원산송이 음악을 잘하였다. 북쪽 사람의 옛 노래에 「행로난」 가락이 있어 말이 자못 성글고 바탕스러웠는데, 원산송이 이를 좋아하여 이에 그 글귀를 무늬 놓고 그 가락의 마디를 곱게 다듬어, 술이 무르익을 때마다 이를 따라 노래하니 듣는 이가 눈물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처음에 양담이 음악 부르기를 잘하고 환윤이 만가를 잘하였는데, 원산송이 「행로난」으로 이를 이음에 미쳐 그때 사람들이 세 뛰어남이라 일렀다」 하였다. 이제 만가라 이르니 자세하지 않다.

裴啟語林曰:「張湛好於齋前種松,養鴝鵒。袁山松出遊,好令左右作挽歌。時人云云。」

배계의 『어림』에 이르기를 「장담이 서재 앞에 소나무 심기를 좋아하고 구관조를 길렀다. 원산송이 나가 노닐며 곁의 사람에게 만가 짓게 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때 사람들이 이러이러하다 하였다」 하였다.

44흰 양고기가 맛있다는 말을 들었으나 한살이에 일찍이 먹어 보지 못하였소

羅友作荊州從事,桓宣武為王車騎集別。友進坐良久,辭出,宣武曰:「卿向欲咨事,何以便去?」答曰:「友聞白羊肉美,一生未曾得喫,故冒求前耳。無事可咨。今已飽,不復須駐。」了無慚色。

나우가 형주의 종사가 되었는데 환선무가 왕거기를 위해 헤어짐의 모임을 열었다.

나우가 나아가 앉은 지 한참 만에 하직하고 나가니, 선무가 말하였다. "경이 아까 일을 여쭈려 하더니 어찌 곧 가는가."

대답하였다. "나우가 흰 양고기가 맛있다는 말을 듣고 한살이에 일찍이 먹어 보지 못하였으므로, 짐짓 무릅쓰고 앞에 나오기를 구하였을 뿐입니다. 여쭐 만한 일은 없습니다. 이제 이미 배부르니 다시 머무를 것이 없습니다."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낯빛이 없었다.

협주 1

車騎,王洽,別見。

거기는 왕흡이니 따로 보인다.

45경은 전횡의 문인도 아니면서 어찌 이렇게 문득 이르렀는가

張驎酒後挽歌甚悽苦,桓車騎曰:「卿非田橫門人,何乃頓爾至致?」

장린이 술 뒤에 만가를 부르는데 몹시 처량하고 괴로우매, 환거기가 말하였다. "경은 전횡의 문인도 아니면서 어찌 이렇게 문득 이르렀는가."

협주 1

驎,張湛小字也。譙子法訓云:「有喪而歌者。或曰:『彼為樂喪也,有不可乎?』譙子曰:『書云:「四海遏密八音。」何樂喪之有?』曰:『今喪有挽歌者,何以哉?』譙子曰:『周聞之:蓋高帝召齊田橫至于戶鄉亭,自刎奉首,從者挽至於宮,不敢哭而不勝哀,故為歌以寄哀音。彼則一時之為也。鄰有喪,舂不相引,挽人銜枚,孰樂喪者邪?』」按莊子曰:「紼謳所生,必於斥苦。」司馬彪注曰:「紼,引柩索也。斥,疏緩也。苦,用力也。引紼所以有謳歌者,為人有用力不齊,故促急之也。」春秋左氏傳曰:「魯哀公會吳伐齊,其將公孫夏命歌虞殯。」杜預曰:「虞殯,送葬歌,示必死也。」史記絳侯世家曰:「周勃以吹簫樂喪。」然則挽歌之來久矣,非始起於田橫也。然譙氏引禮之文,頗有明據,非固陋者所能詳聞。疑以傳疑,以俟通博。

인은 장담의 아이 적 이름이다. 『초자법훈』에 이르기를 「상이 있는데 노래하는 이가 있다. 어떤 이가 『저는 상을 즐기는 것이니 안 될 것이 있는가』 하니, 초자가 『「서」에 「사해가 여덟 소리를 막고 잠잠히 한다」 하였으니 무슨 상을 즐김이 있는가』 하였다. 이르기를 『이제 상에 만가 부르는 이가 있으니 무엇 때문인가』 하니, 초자가 『주나라에서 이를 들었다. 대개 고제가 제나라 전횡을 불러 호향정에 이르매 스스로 목을 찔러 머리를 바치니, 따르는 이들이 끌어 궁에 이르러 감히 곡하지 못하나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으므로 노래를 지어 슬픈 소리에 부친 것이다. 저는 곧 한때의 일이다. 이웃에 상이 있으면 방아 찧으며 소리를 이끌지 않고 상여 끄는 이도 재갈을 무는데, 누가 상을 즐기는 이겠는가』 하였다」 하였다. 살피건대 『장자』에 이르기를 「상여줄 노래가 생긴 바는 반드시 성글고 느슨함과 힘씀에서다」 하였다. 사마표의 주에 이르기를 「불(紼)은 널을 끄는 밧줄이다. 척(斥)은 성글고 느슨함이요 고(苦)는 힘을 씀이다. 상여줄을 끌 때 노래가 있는 까닭은 사람이 힘씀이 가지런하지 않으므로 이를 재촉하고 급히 하는 것이다」 하였다. 『춘추좌씨전』에 이르기를 「노나라 애공이 오나라와 모여 제나라를 치는데 그 장수 공손하가 「우빈」을 노래하라 명하였다」 하였다. 두예가 이르기를 「「우빈」은 장사 보내는 노래니 반드시 죽음을 보인 것이다」 하였다. 『사기·강후세가』에 이르기를 「주발이 퉁소를 불어 상을 즐겼다」 하였다. 그러면 곧 만가가 온 지 오래니 전횡에게서 비롯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초씨가 끌어온 예의 글에 자못 밝은 근거가 있으니, 굳고 좁은 이가 자세히 들을 바가 아니다. 의심스러운 것은 의심스러운 대로 두어 통하고 넓은 이를 기다린다.

46어찌 하루라도 이분이 없을 수 있으랴

王子猷嘗暫寄人空宅住,便令種竹。或問:「暫住何煩爾?」王嘯詠良久,直指竹曰:「何可一日無此君?」

왕자유가 일찍이 잠깐 남의 빈 집에 부쳐 살면서 곧 대를 심게 하였다.

어떤 이가 물었다. "잠깐 사는데 어찌 그리 번거롭게 하시오."

왕씨가 휘파람 불고 읊기를 한참 하다가 곧바로 대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어찌 하루라도 이분이 없을 수 있으랴."

협주 1

中興書曰:「徽之卓犖不羈,欲為傲達,放肆聲色頗過度。時人欽其才,穢其行也。」

『중흥서』에 이르기를 「왕휘지는 우뚝하여 얽매이지 않아 거만하고 통달하고자 하매, 음악과 여색에 멋대로 함이 자못 도를 지나쳤다. 그때 사람들이 그 재주를 흠모하고 그 행실을 더럽다 하였다」 하였다.

47내가 본디 흥을 타고 갔다가 흥이 다하여 돌아왔으니 어찌 반드시 대안도를 보랴

王子猷居山陰,夜大雪,眠覺,開室,命酌酒。四望皎然,因起仿偟,詠左思招隱詩。忽憶戴安道。時戴在剡,即便夜乘小船就之。經宿方至,造門不前而返。人問其故,王曰:「吾本乘興而行,興盡而返,何必見戴?」

왕자유가 산음에 살 때 밤에 큰 눈이 왔다.

잠에서 깨어 방을 열고 술을 따르라 명하였다.

사방을 바라보니 희고 환하여 이로 인해 일어나 서성이며 좌사의 「초은시」를 읊었다.

홀연히 대안도가 생각났다. 이때 대안도가 섬에 있었는데 곧 밤에 작은 배를 타고 그에게 나아갔다.

밤을 지나서야 바야흐로 이르렀는데 문에 이르러 나아가지 않고 돌아왔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왕씨가 말하였다. "내가 본디 흥을 타고 갔다가 흥이 다하여 돌아왔으니 어찌 반드시 대안도를 보랴."

협주 1

中興書曰:「徽之任性放達,棄官東歸,居山陰也。」左詩曰:「杖策招隱士,荒塗橫古今。巖穴無結構,丘中有鳴琴。白雪停陰岡,丹葩曜陽林。」

『중흥서』에 이르기를 「왕휘지가 성품에 맡겨 놓아 통달하매 벼슬을 버리고 동쪽으로 돌아와 산음에 살았다」 하였다. 좌사의 시에 이르기를 「지팡이를 짚고 숨은 선비를 부르니 거친 길이 옛날과 이제에 가로놓였다. 바위굴에 얽어 지은 것이 없으나 언덕 가운데 우는 거문고가 있다. 흰 눈이 그늘진 등성이에 머물고 붉은 꽃이 볕 든 숲에 빛난다」 하였다.

48술은 바로 절로 사람을 빼어난 데로 이끈다

王衛軍云:「酒正自引人箸勝地。」

왕위군이 말하였다. "술은 바로 절로 사람을 빼어난 데로 이끈다."

협주 1

王薈已見。

왕회는 이미 보인다.

49손과 주인이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王子猷出都,尚在渚下。舊聞桓子野善吹笛,而不相識。遇桓於岸上過,王在船中,客有識之者云:「是桓子野。」王便令人與相聞云:「聞君善吹笛,試為我一奏。」桓時已貴顯,素聞王名,即便回下車,踞胡床,為作三調。弄畢,便上車去。客主不交一言。

왕자유가 서울에 나와 아직 물가에 있었다.

예부터 환자야가 피리를 잘 분다고 들었으나 서로 알지 못하였다.

마침 환씨가 언덕 위로 지나가는데 왕씨는 배 안에 있었고, 손 가운데 그를 아는 이가 있어 말하였다. "이는 환자야요."

왕씨가 곧 사람을 시켜 서로 알리게 하였다. "그대가 피리를 잘 분다 들었으니 시험 삼아 나를 위해 한 번 불어 주시오."

환씨가 그때 이미 귀하고 드러났고 본디 왕씨의 이름을 들었으므로, 곧 돌아 수레에서 내려 호상에 걸터앉아 세 가락을 지어 주었다.

놀이를 마치자 곧 수레에 올라 갔다. 손과 주인이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협주 1

續晉陽秋曰:「左將軍桓伊善音樂,孝武飲燕,謝安侍坐,帝命伊吹笛。伊神色無忤,既吹一弄,乃放笛云:『臣於箏乃不如笛,然自足以韻合歌管。臣有一奴,善吹笛,且相便串,請進之。』帝賞其放率,聽召奴。奴既至,吹笛,伊撫箏而歌怨詩,因以為諫也。」

『속진양추』에 이르기를 「좌장군 환이가 음악을 잘하였다. 효무제가 마시고 잔치하는데 사안이 모시고 앉았더니 임금이 환이에게 피리를 불라 명하였다. 환이가 정신과 낯빛에 거스름이 없이 이미 한 가락을 불고, 이에 피리를 놓고 이르기를 『신이 쟁에는 이에 피리만 못하나 그래도 절로 울림이 노래와 대롱에 맞기에 넉넉합니다. 신에게 한 종이 있어 피리를 잘 불고 또 서로 익숙하니 그를 들이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그 놓아 시원함을 기려 종 부르기를 들어 주었다. 종이 이르러 피리를 부니 환이가 쟁을 뜯으며 원망하는 시를 노래하여, 이로써 간함을 삼았다」 하였다.

50우리 집안의 꺼릴 이름을 범하였으니 경의 일에 무슨 상관이오

桓南郡被召作太子洗馬,船泊荻渚。王大服散後已小醉,往看桓。桓為設酒,不能冷飲,頻語左右:「令溫酒來!」桓乃流涕嗚咽,王便欲去。桓以手巾掩淚,因謂王曰:「犯我家諱,何預卿事?」王嘆曰:「靈寶故自達。」

환남군이 불리어 태자세마가 되어 배를 갈대 물가에 대었다.

왕대가 산을 먹은 뒤에 이미 조금 취하였는데 환씨를 보러 갔다.

환씨가 술을 차려 주었는데 차게 마시지 못하여 자주 곁의 사람에게 말하였다. "술을 데워 오게 하라."

환씨가 이에 눈물을 흘리고 흐느끼니 왕씨가 곧 가려 하였다.

환씨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가리고 이로 인해 왕씨에게 말하였다. "우리 집안의 꺼릴 이름을 범하였으니 경의 일에 무슨 상관이오."

왕씨가 탄식하였다. "영보는 짐짓 절로 통달하였다."

협주 3

玄別傳曰:「玄初拜太子洗馬,時朝廷以溫有不臣之跡,故抑玄為素官。」

『현별전』에 이르기를 「환현이 처음 태자세마에 임명되었는데, 그때 조정이 환온에게 신하답지 않은 자취가 있다 하여 짐짓 환현을 눌러 흰 벼슬을 삼았다」 하였다.

晉安帝紀曰:「玄哀樂過人,每歡戚之發,未嘗不至嗚咽。」

『진안제기』에 이르기를 「환현은 슬픔과 즐거움이 남보다 지나쳐, 기쁨과 슬픔이 일어날 때마다 일찍이 흐느낌에 이르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였다.

靈寶,玄小字也。異苑曰:「玄生而有光照室,善占者云:『此兒生有奇耀,宜目為天人。』宣武嫌其三文,復言為『神靈寶』,猶復用三。既難重前,卻減『神』一字,名曰『靈寶』。」語林曰:「玄不立忌日,止立忌時,其達而不拘,皆此類。」

영보는 환현의 아이 적 이름이다. 『이원』에 이르기를 「환현이 나며 빛이 있어 방을 비추니, 점 잘 치는 이가 이르기를 『이 아이는 나면서 기이한 빛남이 있으니 마땅히 하늘 사람이라 이름 할 것입니다』 하였다. 선무가 그 글자가 셋임을 꺼려 다시 「신령보」라 말하였으나 오히려 다시 셋을 썼다. 이미 앞의 것을 거듭하기 어려우므로 「신」 한 자를 덜어 「영보」라 이름 하였다」 하였다. 『어림』에 이르기를 「환현이 꺼릴 날을 세우지 않고 다만 꺼릴 때만 세웠으니, 그 통달하여 얽매이지 않음이 다 이런 무리다」 하였다.

51완적은 가슴 가운데 돌덩이가 있으므로 술로 이를 씻어야 하였소

王孝伯問王大:「阮籍何如司馬相如?」王大曰:「阮籍胸中壘塊,故須酒澆之。」

왕효백이 왕대에게 물었다. "완적은 사마상여와 견주어 어떠하오."

왕대가 말하였다. "완적은 가슴 가운데 돌덩이가 있으므로 술로 이를 씻어야 하였소."

협주 1

言阮皆同相如,而飲酒異耳。

완적이 다 사마상여와 같으나 술 마심이 다를 뿐이라는 말이다.

52사흘 술을 마시지 않으니 몸과 정신이 다시 서로 가깝지 않음을 느낀다

王佛大嘆言:「三日不飲酒,覺形神不復相親。」

왕불대가 탄식하며 말하였다. "사흘 술을 마시지 않으니 몸과 정신이 다시 서로 가깝지 않음을 느낀다."

협주 1

晉安帝紀曰:「忱少慕達,好酒,在荊州轉甚,一飲或至連日不醒,遂以此死。」宋明帝文章志曰:「忱嗜酒,醉輒經日,自號上頓。世喭以大飲為『上頓』,起自忱也。」

『진안제기』에 이르기를 「왕침이 젊어서 통달함을 그리워하고 술을 좋아하였는데 형주에 있으며 더욱 심해져, 한 번 마시면 더러 며칠을 잇도록 깨지 않다가 마침내 이 때문에 죽었다」 하였다. 송나라 명제의 『문장지』에 이르기를 「왕침이 술을 즐겨 취하면 문득 날을 지나매 스스로 상돈이라 불렀다. 세상에서 크게 마시는 것을 「상돈」이라 하니 왕침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하였다.

53다만 늘 일 없음을 얻어 아프도록 술을 마시고 이소를 익히 읽으면 곧 이름난 선비라 일컬을 만하다

王孝伯言:「名士不必須奇才。但使常得無事,痛飲酒,熟讀離騷,便可稱名士。」

왕효백이 말하였다. "이름난 선비는 반드시 기이한 재주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늘 일 없음을 얻어 아프도록 술을 마시고 「이소」를 익히 읽으면 곧 이름난 선비라 일컬을 만하다."

54낭야의 왕백여는 마침내 마땅히 정 때문에 죽으리라

王長史登茅山,大慟哭曰:「琅邪王伯輿,終當為情死。」

왕장사가 모산에 올라 크게 애통히 곡하며 말하였다. "낭야의 왕백여는 마침내 마땅히 정 때문에 죽으리라."

협주 1

王氏譜曰:「廞字伯輿,琅邪人。父薈,衛將軍。廞歷司徒長史。」周祗隆安記曰:「初,王恭將唱義,使喻三吳,廞居喪,拔以為吳國內史。國寶既死,恭罷兵,令廞反喪服。廞大怒,即日據吳都以叛。恭使司馬劉牢之討廞,廞敗,不知所在。」

『왕씨보』에 이르기를 「왕흠은 자가 백여요 낭야 사람이다. 아버지 왕회는 위장군이다. 왕흠은 사도장사를 지냈다」 하였다. 주기의 『융안기』에 이르기를 「처음에 왕공이 장차 옳음을 부르짖으려 하며 삼오에 알리게 하였는데, 왕흠이 상중에 있으매 뽑아 오국내사로 삼았다. 왕국보가 이미 죽고 왕공이 군사를 그치매 왕흠에게 상복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왕흠이 크게 성내어 그날로 오나라 서울을 차지하고 배반하였다. 왕공이 사마 유뇌지를 시켜 왕흠을 치니 왕흠이 패하였는데 있는 데를 알지 못한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