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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치世説新語 汰侈第三十

세설신어 世說新語 · 유의경(劉義慶) 엮음 · 유효표(劉孝標) 주 · 남조 송(5세기) · 양 유효표 주 · 단락 12 · 한자 951자 · 낭독 3.8분

「세설신어」 「태치」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해가 멉니다. 사람이 해 가에서 왔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그대로 알 수 있습니다」 — 몇 살 난 아이가 아버지 무릎에서 한 대답이다. 이튿날 다시 묻자 「해가 가깝습니다. 눈을 들면 해는 보이나 장안은 보이지 않습니다」 했다. 후한 말부터 동진까지 이백여 해, 사람들이 주고받은 말과 몸짓만을 서른여섯 갈래로 나누어 모았다. 덕행·언어·정사·문학에서 시작해 사치·성냄·시새움·원수까지 내려가니, 기릴 것과 나무랄 것을 같은 무게로 놓은 셈이다. 대숲의 일곱 사람이 나오고, 왕희지가 사위로 뽑히고, 눈 오는 밤 배를 저어 벗의 집 앞까지 갔다가 흥이 다했다며 돌아온다. 한 조각이 대개 서너 줄, 길어도 한 쪽을 넘지 않는다. 유효표가 백여 종의 책을 끌어와 단 주는 그 책들이 거의 다 없어진 지금 도리어 본문보다 길게 남았다.

1제가 제 집 사람을 죽이는데 경의 일에 무슨 상관이오

石崇每要客燕集,常令美人行酒,客飲酒不盡者,使黃門交斬美人。王丞相與大將軍嘗共詣崇,丞相素不能飲,輒自勉彊,至於沉醉。每至大將軍,固不飲,以觀其變。已斬三人,顏色如故,尚不肯飲。丞相讓之,大將軍曰:「自殺伊家人,何預卿事!」

석숭이 손을 청하여 잔치하고 모을 때마다 늘 아름다운 사람에게 술을 돌리게 하고, 손이 술을 다 마시지 않으면 황문에게 번갈아 아름다운 사람을 베게 하였다.

왕승상이 대장군과 함께 일찍이 석숭을 찾아갔다.

승상은 본디 마시지 못하였으나 문득 스스로 억지로 힘써 흠뻑 취함에 이르렀다.

대장군에 이를 때마다 굳이 마시지 않고 그 바뀜을 보았다.

이미 세 사람을 베었는데도 낯빛이 예와 같아 오히려 마시려 하지 않았다.

승상이 그를 나무라니 대장군이 말하였다. "제가 제 집 사람을 죽이는데 경의 일에 무슨 상관이오."

협주 1

王隱《晉書》曰:「石崇為荊州刺史,劫奪殺人,以致巨富。」《王丞相德音記》曰:「丞相素為諸父所重,王君夫問王敦:『聞君從弟佳人,又解音律,欲一作妓,可與共來。』遂往。吹笛人有小忘,君夫聞,使黃門階下打殺之,顏色不變。丞相還,曰:『恐此君處世,當有如此事。』」兩說不同,故詳錄。

왕은의 『진서』에 이르기를 「석숭이 형주자사가 되어 겁박하고 빼앗고 사람을 죽여 큰 넉넉함에 이르렀다」 하였다. 「왕승상덕음기」에 이르기를 「승상이 본디 여러 아저씨에게 무겁게 여겨졌는데, 왕군부가 왕돈에게 묻기를 『그대의 종제가 아름다운 사람이고 또 음률을 안다 들었소. 한 번 기생 놀이를 하고자 하니 함께 올 만하오』 하매 마침내 갔다. 피리 부는 이가 조금 잊음이 있으매 군부가 듣고 황문에게 섬돌 아래서 때려죽이게 하는데 낯빛이 바뀌지 않았다. 승상이 돌아와 이르기를 『아마 이분이 세상에 처하매 마땅히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하였다」 하였다. 두 설이 같지 않으므로 자세히 적는다.

2이 손은 반드시 도적질을 할 수 있겠다

石崇廁,常有十餘婢侍列,皆麗服藻飾。置甲煎粉、沈香汁之屬,無不畢備。又與新衣著令出,客多羞不能如廁。王大將軍往,脫故衣,著新衣,神色傲然。羣婢相謂曰:「此客必能作賊。」

석숭의 뒷간에는 늘 열 남짓 계집종이 모시고 벌여 있었는데 다 고운 옷에 꾸밈을 하였다.

갑전분과 침향즙 따위를 두어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 새 옷을 주어 입고 나가게 하니, 손이 흔히 부끄러워 뒷간에 가지 못하였다.

왕대장군이 가서 헌 옷을 벗고 새 옷을 입는데 정신과 낯빛이 거만하였다.

뭇 계집종이 서로 일러 말하였다. "이 손은 반드시 도적질을 할 수 있겠다."

협주 1

《語林》曰:「劉寔詣石崇,如廁,見有絳紗帳大床,茵蓐甚麗,兩婢持錦香囊。寔遽反走,即謂崇曰:『向誤入卿室內。』崇曰:『是廁耳。』」

『어림』에 이르기를 「유식이 석숭을 찾아가 뒷간에 갔다가 붉은 깁 휘장에 큰 평상이 있고 요와 자리가 몹시 고우며 두 계집종이 비단 향주머니를 든 것을 보았다. 유식이 급히 돌아 달아나며 곧 석숭에게 이르기를 『아까 잘못 경의 방 안에 들었소』 하니, 석숭이 『뒷간일 뿐이오』 하였다」 하였다.

3사람 젖으로 돼지를 먹였습니다

武帝嘗降王武子家,武子供饌,並用瑠璃器。婢子百餘人,皆綾羅絝𧟌,以手擎飲食。烝㹠肥美,異於常味。帝怪而問之,答曰:「以人乳飲㹠。」帝甚不平,食未畢,便去。王、石所未知作。

무제가 일찍이 왕무자의 집에 내려가매 무자가 음식을 이바지하는데 아울러 유리 그릇을 썼다.

계집종 백 남짓 사람이 다 비단 바지와 저고리를 입고 손으로 마실 것과 먹을 것을 받쳐 들었다.

찐 돼지가 살지고 아름다워 여느 맛과 남달랐다.

임금이 괴이히 여겨 물으니 대답하였다. "사람 젖으로 돼지를 먹였습니다."

임금이 몹시 언짢아 먹기를 마치기 전에 곧 갔다. 왕씨와 석씨도 지을 줄 알지 못하던 바였다.

협주 1

𧟌,一作襬。

체(𧟌)는 한 본에 파(襬)로 되어 있다.

4왕개는 붉은 석지로 벽을 바르다

王君夫以𥹋糒澳釜,石季倫用蠟燭作炊。君夫作紫絲布步障碧綾裹四十里,石崇作錦步障五十里以敵之。石以椒為泥,王以赤石脂泥壁。

왕군부는 엿 섞은 마른밥으로 솥을 씻고 석계륜은 밀초를 써서 밥을 지었다.

군부가 자줏빛 실 베로 걸음 가리개를 만들고 푸른 비단으로 안을 대어 사십 리를 하매, 석숭이 비단 걸음 가리개 오십 리를 만들어 이에 맞섰다.

석숭이 산초로 진흙을 삼으니 왕개는 붉은 석지로 벽을 발랐다.

협주 1

《晉諸公贊》曰:「王愷字君夫,東海人,王肅子也。雖無檢行,而少以才力見名,有在公之稱。既自以外戚,晉氏政寬,又性至豪。舊制,鴆不得過江,為其羽櫟酒中,必殺人。愷為翊軍時,得鴆於石崇而養之,其大如鵝,喙長尺餘,純食蛇虺。司隸奏按愷、崇,詔悉原之,即燒於都街。愷肆其意色,無所忌憚。為後軍將軍,卒,諡曰醜。」

『진제공찬』에 이르기를 「왕개는 자가 군부요 동해 사람이니 왕숙의 아들이다. 비록 검속하는 행실은 없었으나 젊어서 재주와 힘으로 이름이 났고 공적인 데 있다는 일컬음이 있었다. 이미 스스로 외척인 데다 진나라의 정사가 너그러웠고, 또 성품이 지극히 호사스러웠다. 옛 제도에 짐새는 강을 건널 수 없었으니, 그 깃으로 술에 저으면 반드시 사람을 죽이는 까닭이다. 왕개가 익군이 되었을 때 석숭에게서 짐새를 얻어 길렀는데, 그 크기가 거위만 하고 부리가 한 자 남짓이며 순전히 뱀만 먹었다. 사예가 왕개와 석숭을 살피기를 아뢰니 조칙으로 다 용서하고 곧 도성 거리에서 태웠다. 왕개가 그 뜻과 낯빛을 멋대로 하여 꺼리는 바가 없었다. 후군장군이 되었다가 죽으매 시호를 추(醜)라 하였다」 하였다.

5석숭이 뒤에 듣고 알린 이를 다 죽이다

石崇為客作豆粥,咄嗟便辦。恆冬天得韭蓱䪢。又牛形狀氣力不勝王愷牛,而與愷出遊,極晚發,爭入洛城,崇牛數十步後,迅若飛禽,愷牛絕走不能及。每以此三事為搤腕。乃密貨崇帳下都督及御車人,問所以。都督曰:「豆至難煮,唯豫作熟末,客至,作白粥以投之。韭蓱䪢是搗韭根,雜以麥苗爾。」復問馭人牛所以駛。馭人云:「牛本不遲,由將車人不及制之爾。急時聽偏轅,則駛矣。」愷悉從之,遂爭長。石崇後聞,皆殺告者。

석숭이 손을 위해 콩죽을 짓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곧 마련하였다.

늘 겨울날에도 부추 싹 절임을 얻었다.

또 소의 생김과 힘이 왕개의 소를 이기지 못하는데, 왕개와 함께 나가 노닐다가 몹시 늦게 떠나 다투어 낙양성에 들어갈 때는, 석숭의 소가 몇십 걸음 뒤에 있다가 빠르기가 나는 새 같아 왕개의 소가 죽어라 달려도 미치지 못하였다.

늘 이 세 가지 일로 팔뚝을 움켜쥐었다.

이에 몰래 석숭의 휘장 아래 도독과 수레 모는 사람을 재물로 사서 그 까닭을 물었다.

도독이 말하였다. "콩은 지극히 삶기 어려우므로, 오직 미리 익힌 가루를 만들어 두었다가 손이 이르면 흰죽을 지어 이를 넣습니다. 부추 싹 절임은 부추 뿌리를 찧어 보리 싹을 섞은 것일 뿐입니다."

다시 모는 이에게 소가 빠른 까닭을 물으니 모는 이가 말하였다. "소는 본디 더디지 않은데, 수레를 이끄는 사람이 이를 다스리지 못함에 말미암을 뿐입니다. 급할 때 한쪽 끌채로 기울게 두면 곧 빠릅니다."

왕개가 다 이를 좇아 마침내 앞섬을 다투었다.

석숭이 뒤에 듣고 알린 이를 다 죽였다.

협주 1

《晉諸公贊》曰:「崇性好俠,與王愷競相誇衒也。」

『진제공찬』에 이르기를 「석숭이 성품이 협객을 좋아하여 왕개와 다투어 서로 자랑하고 뽐내었다」 하였다.

6한 점을 먹고 곧 가다

王君夫有牛,名「八百里駮」,常瑩其蹄角。王武子語君夫:「我射不如卿,今指賭卿牛,以千萬對之。」君夫既恃手快,且謂駿物無有殺理,便相然可。令武子先射。武子一起便破的,卻據胡床,叱左右:「速探牛心來!」須臾,炙至,一臠便去。

왕군부에게 소가 있어 이름을 「팔백리박」이라 하고 늘 그 굽과 뿔을 반드럽게 하였다.

왕무자가 군부에게 말하였다. "내가 활쏘기는 경만 못하나, 이제 경의 소를 가리켜 걸고 천만으로 이에 맞서겠소."

군부가 이미 손 빠름을 믿고 또 준마 같은 물건은 죽일 결이 없다 하여 곧 그러자 하였다.

무자에게 먼저 쏘게 하니 무자가 한 번 일어나 곧 과녁을 깨뜨렸다.

물러나 호상에 걸터앉아 곁의 사람을 꾸짖었다. "빨리 소의 염통을 더듬어 오너라."

잠깐 뒤에 구이가 이르매 한 점을 먹고 곧 갔다.

협주 1

《相牛經》曰:「牛經出甯戚,傳百里奚。漢世河西薛公得其書,以相牛,千百不失。本以負重致遠,未服輜軿,故文不傳。至魏世,高堂生又傳以與晉宣帝,其後王愷得其書焉。」臣按其《相經》云:「陰虹屬頸,千里。」注曰:「陰虹者,雙筋白尾骨屬頸,甯戚所飯者也。」愷之牛,其亦有陰虹也。《甯戚經》曰:「棰頭欲得高,百體欲得緊,大膁疏肋難齡齝,龍頭突目好跳。又角欲得細,身欲促,形欲得如卷。」

『상우경』에 이르기를 「소의 경이 영척에게서 나와 백리해에게 전하였다. 한나라 세상에 하서의 설공이 그 글을 얻어 소를 보매 천에 백도 잃지 않았다. 본디 무거운 것을 지고 먼 데 이르게 하는 것이라 짐수레에 매지 않았으므로 글이 전하지 않았다. 위나라 세상에 이르러 고당생이 또 전하여 진나라 선제에게 주었고, 그 뒤에 왕개가 그 글을 얻었다」 하였다. 신이 살피건대 그 『상경』에 이르기를 「그늘 무지개가 목에 붙으면 천 리를 간다」 하였다. 주에 이르기를 「그늘 무지개란 두 힘줄과 흰 꽁무니뼈가 목에 붙은 것이니 영척이 먹인 바다」 하였다. 왕개의 소도 그 또한 그늘 무지개가 있었으리라. 『영척경』에 이르기를 「방망이 머리는 높아야 하고 온몸은 팽팽해야 하며, 옆구리가 크고 갈비가 성글면 새김질하기 어렵고, 용의 머리에 튀어나온 눈은 잘 뛴다. 또 뿔은 가늘어야 하고 몸은 바투어야 하며 꼴은 말린 듯해야 한다」 하였다.

7마침내 주려 날을 지내고 헷갈려 어디로 갈지 알지 못하였다

王君夫嘗責一人無服餘衵,因直內著曲閤重閨裏,不聽人將出。遂饑經日,迷不知何處去。後因緣相為垂死,迺得出。

왕군부가 일찍이 한 사람이 남은 속옷을 입지 않았다 꾸짖고, 이로 인해 곧바로 굽은 문의 겹진 안방 안에 들여 사람이 데리고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마침내 주려 날을 지내고 헷갈려 어디로 갈지 알지 못하였다.

뒤에 인연 있는 이가 서로 위해 주어 죽을 지경에 이르러서야 나올 수 있었다.

8왕개가 멍하니 스스로 잃었다

石崇與王愷爭豪,並窮綺麗,以飾輿服。武帝,愷之甥也,每助愷。嘗以一珊瑚樹,高二尺許賜愷。枝柯扶疎,世罕其比。愷以示崇。崇視訖,以鐵如意擊之,應手而碎。愷既惋惜,又以為疾己之寶,聲色甚厲。崇曰:「不足恨,今還卿。」乃命左右悉取珊瑚樹,有三尺四尺,條榦絕世,光彩溢目者六七枚,如愷許比甚眾。愷惘然自失。

석숭이 왕개와 호사를 다투어 아울러 곱고 고움을 다하여 수레와 옷을 꾸몄다.

무제는 왕개의 생질이라 늘 왕개를 도왔다.

일찍이 산호나무 하나를 높이가 두 자쯤 되는데 왕개에게 내렸다.

가지가 무성하여 세상에 그에 견줄 것이 드물었다.

왕개가 이를 석숭에게 보였다. 석숭이 보기를 마치고 쇠 여의로 이를 치니 손에 응하여 부서졌다.

왕개가 이미 아까워하고, 또 저의 보배를 시새운 것이라 하여 소리와 낯빛이 몹시 매서웠다.

석숭이 말하였다. "한할 것이 없소. 이제 경에게 돌려주겠소."

이에 곁의 사람에게 명하여 산호나무를 다 가져오게 하니, 석 자 넉 자 되는 것으로 가지와 줄기가 세상에 뛰어나고 빛깔이 눈에 넘치는 것이 예닐곱 개요, 왕개의 것쯤 되는 것은 몹시 많았다.

왕개가 멍하니 스스로 잃었다.

협주 2

《續文章志》曰:「崇資產累巨萬金,宅室輿馬,僭擬王者。庖膳必窮水陸之珍。後房百數,皆曳紈綉,珥金翠,而絲竹之蓺,盡一世之選。築榭開沼,殫極人巧。與貴戚羊琇、王愷之徒競相高以侈靡,而崇為居最之首,琇等每愧羡,以為不及也。」

『속문장지』에 이르기를 「석숭이 밑천과 살림이 거만 금을 쌓아 집과 방과 수레와 말이 왕 노릇 하는 이에 참람히 견주었다. 부엌 음식은 반드시 물과 뭍의 진귀함을 다하였다. 뒷방이 백으로 헤아려지는데 다 비단을 끌고 금과 비취를 달았으며, 실과 대의 재주는 한 세상의 뽑힘을 다하였다. 정자를 짓고 못을 파 사람의 공교로움을 다하였다. 귀한 겨레 양수와 왕개의 무리와 다투어 서로 사치와 방탕함으로 높이려 하였는데, 석숭이 그 으뜸을 차지하매 양수 들이 늘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여 미치지 못한다 여겼다」 하였다.

《南州異物志》曰:「珊瑚生大秦國,有洲在漲海中,距其國七八百里,名珊瑚樹洲。底有盤石,水深二十餘丈,珊瑚生於石上。初生白,軟弱似菌。國人乘大船,載鐵網,先沒在水下,一年便生網目中,其色尚黃,枝柯交錯,高三四尺,大者圍尺餘。三年色赤,便以鐵鈔發其根,繫鐵網於船,絞車舉網還裁鑿,恣意所作。若過時不鑿,便枯索蟲蠱。其大者輸之王府,細者賣之。」《廣志》曰:「珊瑚大者,可為車軸。」

『남주이물지』에 이르기를 「산호는 대진국에서 나니 물가가 창해 가운데 있어 그 나라에서 칠팔백 리 떨어져 있고 이름이 산호수주다. 밑에 반석이 있고 물 깊이가 스무 남짓 길인데 산호가 돌 위에 난다. 갓 날 때는 희고 부드럽고 약하여 버섯 같다. 나라 사람이 큰 배를 타고 쇠그물을 실어 먼저 물 아래 잠기게 하면, 한 해 만에 곧 그물눈 가운데 나는데 그 빛이 아직 누렇고 가지가 어긋나며 높이가 서너 자요 큰 것은 둘레가 한 자 남짓이다. 세 해면 빛이 붉어지매 곧 쇠갈고리로 그 뿌리를 떼고 쇠그물을 배에 매어 자아틀로 그물을 들어 돌아와 마름하고 쪼아 뜻대로 짓는다. 만일 때가 지나 쪼지 않으면 곧 말라 시들고 벌레가 먹는다. 그 큰 것은 왕의 곳간에 바치고 가는 것은 판다」 하였다. 『광지』에 이르기를 「산호가 큰 것은 수레 굴대를 만들 만하다」 하였다.

9그때 사람들이 금 도랑이라 불렀다

王武子被責,移第北邙下。于時人多地貴,濟好馬射,買地作埒,編錢匝地竟埒。時人號曰「金溝」。

왕무자가 꾸짖음을 입어 집을 북망 아래로 옮겼다.

이때 사람이 많고 땅이 귀하였는데, 왕제가 말 타고 활 쏘기를 좋아하여 땅을 사서 담을 만들고, 돈을 엮어 땅을 둘러 담을 다하였다.

그때 사람들이 「금 도랑」이라 불렀다.

협주 2

《晉諸公贊》曰:「濟與從兄恬不平,濟為河南尹,未拜,行過王宮,吏不時下道,濟於車前鞭之,有司奏免官。論者以濟為不長者。尋轉太僕,而王恬已見委任,濟遂斥外。」

『진제공찬』에 이르기를 「왕제가 종형 왕념과 사이가 고르지 않았다. 왕제가 하남윤이 되어 아직 임명되기 전에 왕궁을 지나는데 아전이 제때 길에서 내리지 않으매, 왕제가 수레 앞에서 그를 채찍질하니 맡은 이가 벼슬 면하기를 아뢰었다. 논하는 이가 왕제를 어른답지 않다 하였다. 이윽고 태복으로 옮겼는데 왕념이 이미 맡김을 받았으므로 왕제가 마침내 밖으로 내쳐졌다」 하였다.

溝一作埒。

구(溝)는 한 본에 날(埒)로 되어 있다.

10선비는 마땅히 몸과 이름이 다 넉넉하게 할 것이지 어찌 독 창으로 남에게 말하는 데 이르겠소

石崇每與王敦入學戲,見顏、原象而嘆曰:「若與同升孔堂,去人何必有間!」王曰:「不知餘人云何?子貢去卿差近。」石正色云:「士當令身名俱泰,何至以甕牖語人!」

석숭이 왕돈과 학교에 들어가 노닐 때마다, 안회와 원헌의 형상을 보고 탄식하였다. "만일 함께 공자의 마루에 올랐다면 남과 떨어짐이 어찌 반드시 사이가 있었으랴."

왕씨가 말하였다. "다른 사람은 어떠할지 모르겠으나 자공은 경에게서 조금 가깝소."

석숭이 낯빛을 바로 하고 말하였다. "선비는 마땅히 몸과 이름이 다 넉넉하게 할 것이지, 어찌 독 창으로 남에게 말하는 데 이르겠소."

협주 3

《家語》曰:「顏回字子淵,魯人。少孔子二十九歲,而髮白,三十二歲蚤死。」原憲已見。

『가어』에 이르기를 「안회는 자가 자연이요 노나라 사람이다. 공자보다 스물아홉 살 아래인데 머리털이 세고 서른둘에 일찍 죽었다」 하였다. 원헌은 이미 보인다.

《史記》曰:「端木賜字子貢,衛人。嘗相魯,家累千金,終於齊。」

『사기』에 이르기를 「단목사는 자가 자공이요 위나라 사람이다. 일찍이 노나라의 재상이 되었고 집에 천 금을 쌓았으며 제나라에서 마쳤다」 하였다.

原憲以甕為巨牖。

원헌이 독으로 큰 창을 삼았다.

11이미 먹기를 그만두지 않고 또 아끼는 바를 두시오

彭城王有快牛,至愛惜之。王太尉與射,賭得之。彭城王曰:「君欲自乘則不論;若欲噉者,當以二十肥者代之。既不廢噉,又存所愛。」王遂殺噉。

팽성왕에게 빠른 소가 있어 지극히 이를 아꼈다.

왕태위가 함께 활을 쏘아 걸고 이를 얻었다.

팽성왕이 말하였다. "그대가 스스로 타려 하면 곧 따지지 않겠소. 만일 먹고자 한다면 마땅히 살진 것 스물로 이를 대신하겠소. 이미 먹기를 그만두지 않고 또 아끼는 바를 두시오."

왕씨가 마침내 죽여 먹었다.

협주 1

朱鳳《晉書》曰:「彭城穆王權,字子輿,宣帝弟馗子。太始元年封。」

주봉의 『진서』에 이르기를 「팽성 목왕 사마권은 자가 자여요 선제의 아우 사마규의 아들이다. 태시 원년에 봉해졌다」 하였다.

12이로써 보는 눈을 고치다

王右軍少時,在周侯末坐,割牛心噉之。於此改觀。

왕우군이 젊었을 때 주후의 끝자리에 있었는데 소의 염통을 베어 먹여 주었다.

이로써 보는 눈을 고쳤다.

협주 1

俗以牛心為貴,故羲之先餐之。

세속에서 소의 염통을 귀하게 여기므로 왕희지에게 먼저 먹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