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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극世説新語 仇隟第三十六

세설신어 世說新語 · 유의경(劉義慶) 엮음 · 유효표(劉孝標) 주 · 남조 송(5세기) · 양 유효표 주 · 단락 8 · 한자 725자 · 낭독 2.9분

「세설신어」 「구극」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해가 멉니다. 사람이 해 가에서 왔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그대로 알 수 있습니다」 — 몇 살 난 아이가 아버지 무릎에서 한 대답이다. 이튿날 다시 묻자 「해가 가깝습니다. 눈을 들면 해는 보이나 장안은 보이지 않습니다」 했다. 후한 말부터 동진까지 이백여 해, 사람들이 주고받은 말과 몸짓만을 서른여섯 갈래로 나누어 모았다. 덕행·언어·정사·문학에서 시작해 사치·성냄·시새움·원수까지 내려가니, 기릴 것과 나무랄 것을 같은 무게로 놓은 셈이다. 대숲의 일곱 사람이 나오고, 왕희지가 사위로 뽑히고, 눈 오는 밤 배를 저어 벗의 집 앞까지 갔다가 흥이 다했다며 돌아온다. 한 조각이 대개 서너 줄, 길어도 한 쪽을 넘지 않는다. 유효표가 백여 종의 책을 끌어와 단 주는 그 책들이 거의 다 없어진 지금 도리어 본문보다 길게 남았다.

1흰머리로 함께 돌아가는 데라 이를 만하다

孫秀既恨石崇不與綠珠,又憾潘岳昔遇之不以禮。後秀為中書令,岳省內見之,因喚曰:「孫令,憶疇昔周旋不?」秀曰:「中心藏之,何日忘之?」岳於是始知必不免。後收石崇、歐陽堅石,同日收岳。石先送市,亦不相知。潘後至,石謂潘曰:「安仁,卿亦復爾邪?」潘曰:「可謂『白首同所歸』。」《潘金谷集》詩云:「投分寄石友,白首同所歸。」乃成其讖。

손수가 이미 석숭이 녹주를 주지 않음을 한하고, 또 반악이 옛날 그를 예로 대접하지 않음을 한하였다.

뒤에 손수가 중서령이 되매 반악이 성 안에서 그를 보고 이로 인해 불러 말하였다. "손령, 지난날 두루 지내던 것을 기억하시오."

손수가 말하였다. "마음 가운데 이를 감추었으니 어느 날에 이를 잊으랴."

반악이 이에 비로소 반드시 면하지 못할 줄 알았다.

뒤에 석숭과 구양견석을 잡고 같은 날에 반악을 잡았다.

석숭이 먼저 저자에 보내졌는데 또한 서로 알지 못하였다.

반악이 뒤에 이르매 석숭이 반악에게 말하였다. "안인, 경도 또한 다시 그러한가."

반악이 말하였다. "『흰머리로 함께 돌아가는 데』라 이를 만하오."

반악의 「금곡집」 시에 이르기를 「몫을 던져 돌 같은 벗에게 부치니 흰머리로 함께 돌아가는 데로다」 하였는데 이에 그 참언이 되었다.

협주 4

干寶《晉紀》曰:「石崇有妓人綠珠,美而工笛,孫秀使人求之。崇別館北邙下,方登涼觀,臨清水,使者以告。崇出其婢妾數十人以示之曰:『任所以擇。』使者曰:『本受命者,指綠珠也,未識孰是?』崇勃然曰:『綠珠,吾所愛,不可得也!』使者曰:『君侯博古知今,察遠照邇,願加三思。』崇不然。使者已出又反,崇竟不許。」

간보의 『진기』에 이르기를 「석숭에게 기생 녹주가 있어 아름답고 피리를 잘 불었는데 손수가 사람을 보내 그를 구하였다. 석숭이 북망 아래 딴 집에서 바야흐로 서늘한 누각에 올라 맑은 물에 임하였는데 심부름꾼이 이를 알렸다. 석숭이 그 계집종과 첩 몇십 사람을 내어 이를 보이며 이르기를 『가리는 대로 맡기겠다』 하였다. 심부름꾼이 『본디 명을 받은 것은 녹주를 가리킨 것인데 누구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석숭이 발끈하여 『녹주는 내가 아끼는 바니 얻을 수 없다』 하였다. 심부름꾼이 『군후께서 옛날에 넓고 이제를 아시며 먼 데를 살피고 가까운 데를 비추시니, 세 번 생각을 더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석숭이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심부름꾼이 이미 나갔다가 또 돌아왔으나 석숭이 마침내 허락하지 않았다」 하였다.

王隱《晉書》曰:「岳父文德,為琅邪太守,孫秀為小吏給使,岳數蹴蹋秀,而不以人遇之也。」

왕은의 『진서』에 이르기를 「반악의 아버지 반문덕이 낭야태수가 되었을 때 손수가 작은 아전으로 심부름을 하였는데, 반악이 자주 손수를 발로 차며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았다」 하였다.

《晉陽秋》曰:「歐陽建字堅石,渤海人。有才藻,時人為之語曰:『渤海赫赫,歐陽堅石。』初,建為馮翊太守,趙王倫為征西將軍,孫秀為腹心,撓亂關中,建每匡正,由是有隙。」王隱《晉書》曰:「石崇、潘岳與賈謐相友善,及謐廢,懼終見危,與淮南王謀誅倫,事泄,收崇及親期以上皆斬之。初,岳母誡岳以止足之道,及收,與母別曰:『負阿母!』崇家河北,收者至。曰:『吾不過流徙交、廣耳!』及車載東市,始歎曰:『奴輩利吾家之財。』收崇人曰:『知財為害,何不蚤散?』崇不能答。」

『진양추』에 이르기를 「구양건은 자가 견석이요 발해 사람이다. 재주와 무늬가 있어 그때 사람들이 그를 두고 말하기를 『발해가 빛나고 빛나니 구양견석이로다』 하였다. 처음에 구양건이 풍익태수가 되었는데, 조왕 사마륜이 정서장군이 되고 손수가 배와 가슴이 되어 관중을 흔들어 어지럽히매 구양건이 늘 바로잡으니 이로 말미암아 틈이 있었다」 하였다. 왕은의 『진서』에 이르기를 「석숭과 반악이 가밀과 서로 벗하여 사이가 좋았는데, 가밀이 폐함에 미쳐 마침내 위태로움을 볼까 두려워 회남왕과 사마륜 베기를 꾀하다가 일이 새어, 석숭과 가까운 기약 이상을 잡아 다 베었다. 처음에 반악의 어미가 반악을 그치고 넉넉히 여기는 도로 경계하였는데, 잡힘에 미쳐 어미와 헤어지며 이르기를 『어머님께 저버렸습니다』 하였다. 석숭의 집이 하북인데 잡는 이가 이르렀다. 이르기를 『내가 교주와 광주로 흘러 옮겨질 뿐이겠지』 하였다. 수레에 실려 동쪽 저자에 이름에 미쳐 비로소 탄식하기를 『종놈들이 우리 집 재물을 이롭게 여겼구나』 하였다. 석숭을 잡은 사람이 『재물이 해가 되는 줄 알았으면 어찌 일찍 흩지 않았는가』 하니 석숭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語林》曰:「潘、石同刑東市,石謂潘曰:『天下殺英雄,卿復何為?』潘曰:『俊士填溝壑,餘波來及人。』」

『어림』에 이르기를 「반씨와 석씨가 함께 동쪽 저자에서 형벌을 받는데, 석씨가 반씨에게 이르기를 『천하가 영웅을 죽이는데 경은 다시 무엇을 하였는가』 하였다. 반씨가 『뛰어난 선비가 도랑과 골짜기를 메우매 남은 물결이 사람에게 미쳤소』 하였다」 하였다.

2젊은이가 어찌하여 가벼이 남에게 나아가 묵는가

劉璵兄弟少時為王愷所憎,嘗召二人宿,欲默除之。令作阬,阬畢,垂加害矣。石崇素與璵、琨善,聞就愷宿,知當有變,便夜往詣愷,問二劉所在?愷卒迫不得諱,答云:「在後齋中眠。」石便徑入,自牽出,同車而去。語曰:「少年,何以輕就人宿?」

유여 형제가 젊었을 때 왕개에게 미움을 받았다.

일찍이 두 사람을 불러 묵게 하고 말없이 그들을 없애려 하였다.

구덩이를 파게 하여 구덩이가 다 되매 거의 해를 더하게 되었다.

석숭이 본디 유여와 유곤과 사이가 좋았는데, 왕개에게 나아가 묵는다는 말을 듣고 마땅히 바뀜이 있으리라 알아, 곧 밤에 왕개를 찾아가 두 유씨가 있는 데를 물었다.

왕개가 갑작스럽게 다그쳐져 숨기지 못하고 대답하였다. "뒷 서재 안에서 자오."

석숭이 곧 곧장 들어가 스스로 끌어내어 수레를 같이하여 갔다.

말하였다. "젊은이가 어찌하여 가벼이 남에게 나아가 묵는가."

협주 1

劉璨《晉紀》曰:「琨與兄璵俱知名,遊權貴之間,當世以為豪傑。」

유찬의 『진기』에 이르기를 「유곤이 형 유여와 함께 이름이 알려져 권세 있고 귀한 이 사이에 노닐매 요즘 세상이 호걸이라 하였다」 하였다.

3무기가 놀라 부르짖고 칼을 뽑아 나오다

王大將軍執司馬愍王,夜遣世將載王於車而殺之,當時不盡知也。雖愍王家,亦未之皆悉,而無忌兄弟皆稺。王胡之與無忌,長甚相暱,胡之嘗共遊,無忌入告母,請為饌。母流涕曰:「王敦昔肆酷汝父,假手世將。吾所以積年不告汝者,王氏門彊,汝兄弟尚幼,不欲使此聲著,蓋以避禍耳!」無忌驚號,抽刃而出,胡之去已遠。

왕대장군이 사마 민왕을 잡아 밤에 세장을 보내 왕을 수레에 싣고 죽였는데, 그때에 다 알지는 못하였다.

비록 민왕의 집안이라도 또한 다 알지 못하였고 무기 형제는 다 어렸다.

왕호지가 무기와 자라며 몹시 서로 가까웠다.

호지가 일찍이 함께 노닐 때 무기가 들어가 어미에게 알리고 음식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어미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왕돈이 옛날 네 아비에게 모짊을 멋대로 하며 세장에게 손을 빌렸다. 내가 여러 해 너에게 알리지 않은 까닭은, 왕씨의 문벌이 굳세고 너희 형제가 아직 어리므로 이 소리가 드러나게 하고자 하지 않아서다. 대개 화를 피하려 함일 뿐이다."

무기가 놀라 부르짖고 칼을 뽑아 나왔으나 호지가 간 지 이미 멀었다.

협주 3

《晉陽秋》曰:「司馬丞字元敬,譙王遜子也。為中宗相州刺史,路過武昌,王敦與燕會,酒酣,謂丞曰:『大王篤實佳士,非將御之才。』對曰:『焉知鈆刀不能一割乎?』敦將謀逆,召丞為軍司馬,丞歎曰:『吾其死矣!地荒民解,勢孤援絕。赴君難,忠也;死王事,義也。死忠與義,又何求焉?』乃馳檄諸郡,丞赴義。敦遣從母弟魏乂攻丞,王廙使賊迎之,薨於車。敦既滅,追贈驃騎,謚曰愍王。」

『진양추』에 이르기를 「사마승은 자가 원경이요 초왕 사마손의 아들이다. 중종의 상주자사가 되어 길이 무창을 지나매, 왕돈이 함께 잔치하고 모이다가 술이 무르익어 사마승에게 이르기를 『대왕은 도탑고 실한 아름다운 선비나 장수로 몰 재주는 아니오』 하였다. 대답하기를 『어찌 납칼이 한 번 베지 못할 줄 알겠소』 하였다. 왕돈이 장차 거스름을 꾀하며 사마승을 불러 군사마를 삼으니, 사마승이 탄식하기를 『내가 그 죽겠구나. 땅이 거칠고 백성이 흩어지며 세가 외롭고 도움이 끊겼다. 임금의 어려움에 나아감은 참됨이요 왕의 일에 죽음은 옳음이다. 참됨과 옳음에 죽으니 또 무엇을 구하랴』 하였다. 이에 여러 고을에 격문을 달려 보내니 사마승이 옳음에 나아간 것이다. 왕돈이 이모의 아우 위예를 보내 사마승을 치고, 왕이가 도적을 시켜 그를 맞으니 수레에서 죽었다. 왕돈이 이미 없어지매 표기를 내려 주고 시호를 민왕이라 하였다」 하였다.

《無忌別傳》曰:「無忌字公壽,丞子也。才器兼濟,有文武幹。襲封譙王,衛軍將軍。」

『무기별전』에 이르기를 「무기는 자가 공수요 사마승의 아들이다. 재주와 그릇이 아울러 건졌고 글과 무예의 재간이 있었다. 초왕에 봉함을 이었고 위군장군이었다」 하였다.

《司馬氏譜》曰:「丞娶南陽趙氏女。」《王廙別傳》曰:「廙字世將。祖覽、父正。廙高朗豪率。王導、庾亮遊于石頭,會廙至,爾日迅風飛颿,廙倚船樓長嘯,神氣甚逸。導謂亮曰:『世將為復識事。』亮曰:『正足舒其逸耳。』性倨傲,不合己者面拒之,故為物所疾。加平南將軍,薨。」

『사마씨보』에 이르기를 「사마승이 남양 조씨의 딸을 맞았다」 하였다. 『왕이별전』에 이르기를 「왕이는 자가 세장이다. 할아버지는 왕람이요 아버지는 왕정이다. 왕이가 높고 환하고 호탕하고 시원하였다. 왕도와 유량이 석두에 노니는데 마침 왕이가 이르렀다. 그날 빠른 바람에 돛이 날매 왕이가 배 다락에 기대어 길게 휘파람 부는데 정신과 기운이 몹시 빼어났다. 왕도가 유량에게 이르기를 『세장이 다시 일을 아는구려』 하니, 유량이 『바로 그 빼어남을 펴기에 넉넉할 뿐이오』 하였다. 성품이 거만하여 저와 맞지 않는 이는 낯으로 이를 물리쳤으므로 물건에게 미움받는 바가 되었다. 평남장군을 더하였고 죽었다」 하였다.

4수재가 달아나 물에 던지매 거룻배 위 사람이 받아 건져 면할 수 있었다

應鎮南作荊州,王脩載、譙王子無忌同至新亭與別,坐上賓甚多,不悟二人俱到。有一客道:「譙王丞致禍,非大將軍意,正是平南所為耳。」無忌因奪直兵參軍刀,便欲斫。脩載走投水,舸上人接取,得免。

응진남이 형주가 되매 왕수재와 초왕의 아들 무기가 함께 신정에 이르러 헤어졌다.

자리 위에 손이 몹시 많아 두 사람이 함께 온 줄 깨닫지 못하였다.

한 손이 말하였다. "초왕 사마승이 화를 이룬 것은 대장군의 뜻이 아니라 바로 평남이 한 바일 뿐이오."

무기가 이로 인해 직병참군의 칼을 빼앗아 곧 베려 하였다.

수재가 달아나 물에 던지매 거룻배 위 사람이 받아 건져 면할 수 있었다.

협주 2

王隱《晉書》曰:「應詹字思遠,汝南南頓人,璩曾孫也。為人弘長有淹度,飾之以文才。司徒何充歎曰:『所謂文質之士!』累遷江州刺史、鎮南將軍。」

왕은의 『진서』에 이르기를 「응첨은 자가 사원이요 여남 남돈 사람이니 응거의 증손이다. 사람됨이 넓고 길며 잠긴 도량이 있고 이를 글재주로 꾸몄다. 사도 하충이 탄식하기를 『이른바 무늬와 바탕의 선비다』 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쳐 강주자사와 진남장군에 이르렀다」 하였다.

《中興書》曰:「褚裒為江州,無忌於坐拔刀斫耆之,褒與桓景共免之。御史奏無忌欲專殺害,詔以贖論。」前章既言無忌母告之,而此章復云客敘其事,且王廙之害司馬丞,遐邇共悉,脩齡兄弟,豈容不知?孫盛之言,皆實錄也。

『중흥서』에 이르기를 「저부가 강주가 되었을 때 무기가 자리에서 칼을 뽑아 기지를 베려 하니, 저부가 환경과 함께 그를 면하게 하였다. 어사가 무기가 오로지 죽여 해치려 하였다 아뢰니, 조칙으로 속죄로 논하게 하였다」 하였다. 앞 장에 이미 무기의 어미가 그에게 알렸다 말하고 이 장에 다시 손이 그 일을 폈다 이르니, 또 왕이가 사마승을 해친 것은 멀고 가까운 데서 함께 다 아는데 수령 형제가 어찌 알지 못함을 받아들이랴. 손성의 말이 다 실다운 적음이다.

5왕우군이 마침내 병을 일컬어 고을을 떠나 분하고 감개함으로 마침에 이르다

王右軍素輕藍田,藍田晚節論譽轉重,右軍尤不平。藍田於會稽丁艱,停山陰治喪。右軍代為郡,屢言出弔,連日不果。後詣門自通,主人既哭,不前而去,以陵辱之。於是彼此嫌隟大構。後藍田臨揚州,右軍尚在郡,初得消息,遣一參軍詣朝廷,求分會稽為越州,使人受意失旨,大為時賢所笑。藍田密令從事數其郡諸不法,以先有隟,令自為其宜。右軍遂稱疾去郡,以憤慨致終。

왕우군이 본디 남전을 가벼이 여겼는데 남전이 늘그막에 논하는 기림이 굴러 무거워지매 우군이 더욱 언짢아하였다.

남전이 회계에서 상을 당하여 산음에 머물러 상을 치렀다.

우군이 대신하여 고을이 되매 자주 나가 조문한다 말하였으나 날을 이어 이루지 못하였다.

뒤에 문에 이르러 스스로 알리고, 주인이 이미 곡하매 나아가지 않고 가서 이로써 그를 업신여기고 욕보였다.

이에 이쪽과 저쪽의 꺼림과 틈이 크게 얽혔다.

뒤에 남전이 양주에 임하고 우군이 아직 고을에 있었는데, 처음 소식을 얻고 한 참군을 조정에 보내 회계를 나누어 월주로 삼기를 구하였다.

심부름꾼이 뜻을 받되 그 뜻을 잃어 크게 그때 어진 이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남전이 몰래 종사에게 그 고을의 여러 법답지 않은 것을 셈하게 하고, 앞서 틈이 있었으므로 스스로 그 마땅함을 하게 하였다.

우군이 마침내 병을 일컬어 고을을 떠나 분하고 감개함으로 마침에 이르렀다.

협주 1

《中興書》曰:「羲之與述志尚不同,而兩不相能。述為會稽,艱居郡境,王羲之後為郡,申慰而已,初不重詣,述深以為恨。喪除,徵拜揚州,就徵,周行郡境,而不歷羲之。臨發,一別而去。羲之初語其友曰:『王懷祖免喪,正可當尚書,投老可得為僕射,更望會稽,便自邈然。』述既顯授,又檢校會稽郡,求其得失,主者疲於課對。羲之恥慨,遂稱疾去郡,墓前自誓不復仕。朝廷以其誓苦,不復徵也。」

『중흥서』에 이르기를 「왕희지가 왕술과 뜻과 숭상함이 같지 않아 둘이 서로 능하다 하지 않았다. 왕술이 회계가 되었을 때 상중에 고을 지경에 살았는데, 왕희지가 뒤에 고을이 되어 펴 위로할 뿐 처음부터 거듭 찾아가지 않으매 왕술이 깊이 이를 한하였다. 상을 벗고 불려 양주에 임명되매 부름에 나아가 고을 지경을 두루 다니면서도 왕희지를 지나지 않았다. 떠남에 임하여 한 번 헤어지고 갔다. 왕희지가 처음에 그 벗에게 이르기를 『왕회조가 상을 면하면 바로 상서는 될 만하고 늘그막에 복야는 될 수 있겠으나, 다시 회계를 바라는 것은 곧 절로 아득하다』 하였다. 왕술이 이미 드러나게 받고 또 회계군을 살펴 그 얻고 잃음을 구하니, 맡은 이가 과제에 맞추기에 지쳤다. 왕희지가 부끄러워 감개하여 마침내 병을 일컬어 고을을 떠나고, 무덤 앞에서 다시 벼슬하지 않겠다 스스로 맹세하였다. 조정이 그 맹세가 괴로우므로 다시 부르지 않았다」 하였다.

6다만 마침을 이김이 어떠한가를 물을 뿐이오

王東亭與孝伯語,後漸異。孝伯謂東亭曰:「卿便不可復測!」答曰:「王陵廷爭,陳平從默,但問克終云何耳。」

왕동정이 효백과 말하다가 뒤에 차츰 달라졌다.

효백이 동정에게 말하였다. "경은 곧 다시 헤아릴 수 없구려."

대답하였다. "왕릉은 조정에서 다투었고 진평은 잠잠함을 좇았으나, 다만 마침을 이김이 어떠한가를 물을 뿐이오."

협주 1

《漢書》曰:「呂后欲王諸呂,問右相王陵,以為不可。問左丞相陳平,平曰:『可。』陵出讓平,平曰:『面折廷爭,臣不如君;全社稷,定劉氏,君不如臣。』」《晉安帝紀》曰:「初,王恭赴山陵,欲斬國寶。王珣固諫之,乃止。既而恭謂珣曰:『此日視君,一似胡廣。』珣曰:『王陵廷爭,陳平從默,但問克終如何也。』」

『한서』에 이르기를 「여후가 여러 여씨를 왕 삼고자 하여 우상 왕릉에게 물으니 옳지 않다 하였다. 좌승상 진평에게 물으니 진평이 『옳습니다』 하였다. 왕릉이 나와 진평을 나무라니 진평이 『낯으로 꺾고 조정에서 다툼은 신이 그대만 못하나, 사직을 온전히 하고 유씨를 정함은 그대가 신만 못하오』 하였다」 하였다. 『진안제기』에 이르기를 「처음에 왕공이 산릉에 나아가 국보를 베려 하매 왕순이 굳이 이를 간하여 이에 그쳤다. 이윽고 왕공이 왕순에게 이르기를 『이날 그대를 보매 하나같이 호광 같소』 하니, 왕순이 『왕릉은 조정에서 다투었고 진평은 잠잠함을 좇았으나, 다만 마침을 이김이 어떠한가를 물을 뿐이오』 하였다」 하였다.

7경은 무슨 까닭으로 서둘러 나를 죽이려 하였는가

王孝伯死,縣其首於大桁。司馬太傅命駕出至標所,孰視首,曰:「卿何故趣,欲殺我邪?」

왕효백이 죽으매 그 머리를 대항에 매달았다.

사마태부가 수레를 명하여 나가 표목이 있는 데에 이르러 머리를 익히 보고 말하였다. "경은 무슨 까닭으로 서둘러 나를 죽이려 하였는가."

협주 1

《續晉陽秋》曰:「王恭深懼禍難,抗表起兵。於是遣左將軍謝琰討恭,恭敗,走曲阿,為湖浦尉所擒。初,道子與恭善,欲載出都,面相折數。聞西軍之逼,乃令於兒塘斬之,梟首於東桁也。」

『속진양추』에 이르기를 「왕공이 화와 어려움을 깊이 두려워하여 표를 올려 군사를 일으켰다. 이에 좌장군 사염을 보내 왕공을 치니 왕공이 패하여 곡아로 달아나다가 호포위에게 사로잡혔다. 처음에 사마도자가 왕공과 사이가 좋아 실어 서울로 내어 낯을 마주하고 꺾어 셈하려 하였다. 서쪽 군사가 다그친다는 말을 듣고 이에 아당에서 그를 베게 하고 동항에 머리를 매달았다」 하였다.

8내가 그를 길렀으매 차마 이 일을 행함을 보지 못하겠다

桓玄將篡,桓脩欲因玄在脩母許襲之。庾夫人云:「汝等近,過我餘年,我養之,不忍見行此事。」

환현이 장차 자리를 빼앗으려 할 때, 환수가 환현이 환수의 어미 처소에 있음을 틈타 그를 덮치려 하였다.

유부인이 말하였다. "너희가 가까우니 내 남은 나이를 지나거든 하여라. 내가 그를 길렀으매 차마 이 일을 행함을 보지 못하겠다."

협주 1

《桓氏譜》曰:「桓沖後娶潁川庾蔑女,字姚。」《晉安帝紀》曰:「脩少為玄所侮,言論常鄙之,脩深憾焉,密有圖玄之意。脩母曰:『靈寶視我如母,汝等何忍骨肉相圖!』脩乃止。」

『환씨보』에 이르기를 「환충이 뒤에 영천 유멸의 딸을 맞으니 자가 요다」 하였다. 『진안제기』에 이르기를 「환수가 젊어서 환현에게 업신여김을 받아 말과 논에 늘 그를 더럽다 하매 환수가 깊이 이를 한하여, 몰래 환현을 꾀할 뜻이 있었다. 환수의 어미가 『영보가 나를 어미같이 보는데 너희가 어찌 차마 뼈와 살로 서로 꾀하느냐』 하니, 환수가 이에 그쳤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