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 › 삼국지 동이전 › 오환선비

선비鮮卑

삼국지 동이전 三國志 魏書 烏丸鮮卑東夷傳 · 진수(陳壽), 주석 배송지(裴松之) · 3세기 말 (주는 429년) · 단락 7 · 한자 1,702자 · 낭독 6.8분

「삼국지 동이전」 오환선비 「선비」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중국 사람이 둘레 나라를 적은 가장 오래된 기록. 부여·고구려·옥저·읍루·예·삼한·왜인이 여기 처음 나온다. 같은 붓이 북쪽 오환·선비와 서쪽 대진(로마)까지 한 권에 적어, 그때 중국이 남을 어떤 잣대로 갈라 보았는지가 함께 드러난다.

1선비

鮮卑

선비(鮮卑).

2위서에 적힌 선비 — 동호의 남은 무리

《魏書》曰:鮮卑亦東胡之餘也,別保鮮卑山,因號焉。其言語習俗與烏丸同。其地東接遼水,西當西城。常以季春大會,作樂水上,嫁女娶婦,髠頭飲宴。其獸異於中國者,野馬、羱羊、端牛。端牛角爲弓,世謂之角端者也。又有貂、豽、鼲子,皮毛柔蠕,故天下以爲名裘。鮮卑自爲冒頓所破,遠竄遼東塞外,不與餘國爭衡,未有名通於漢,而自與烏丸相接。至光武時,南北單于更相攻伐,匈奴損耗,而鮮卑遂盛。建武三十年,鮮卑大人於仇賁率種人詣闕朝貢,封於仇賁爲王。永平中,祭肜爲遼東太守,誘賂鮮卑,使斬叛烏丸欽志賁等首,於是鮮卑自燉煌、酒泉以東邑落大人,皆詣遼東受賞賜,青、徐二州給錢,歲二億七千萬以爲常。和帝時,鮮卑大都護校尉廆帥部衆從烏丸校尉任常擊叛者,封校尉廆爲率衆王。殤帝延平中,鮮卑乃東入塞,殺漁陽太守張顯。安帝時,鮮卑大人燕荔陽入朝,漢賜鮮卑王印綬,赤車參駕,止烏丸校尉所治寗下。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선비 또한 동호의 남은 무리다. 따로 선비산(鮮卑山)을 지켰으므로 이를 이름으로 삼았다. 그 말과 풍속은 오환과 같다. 그 땅은 동으로 요수에 닿고 서로 서성(西城)에 마주한다.

늘 늦봄에 크게 모여 물가에서 풍악을 잡히고, 딸을 시집보내고 며느리를 맞으며, 머리를 깎고 마시며 잔치한다. 그 짐승 가운데 중국과 다른 것은 들말과 원양(羱羊)과 단우(端牛)다. 단우의 뿔로 활을 만드니 세상에서 각단(角端)이라 하는 것이다. 또 담비와 눌(豽)과 혼자(鼲子)가 있는데 가죽과 털이 부드러워 천하가 이름난 갖옷으로 여긴다.

선비는 묵특에게 깨진 뒤로 요동 변새 밖으로 멀리 달아나 다른 나라와 힘을 겨루지 않았고, 한나라에 이름이 통한 적이 없었으며 다만 오환과 서로 잇대어 있었다. 광무제 때에 이르러 남선우와 북선우가 서로 치고 쳐서 흉노가 축나매 선비가 마침내 성해졌다.

건무 삼십년에 선비의 대인 어구분이 제 겨레를 거느리고 대궐에 나아가 조공하매 어구분을 왕으로 봉하였다.

영평 연간에 제융이 요동태수가 되어 선비를 꾀고 뇌물을 주어 배반한 오환 흠지분 등의 목을 베게 하였다. 이에 선비 가운데 돈황과 주천에서 동쪽에 있는 읍락의 대인이 다 요동에 나아가 상을 받았는데, 청주와 서주 두 주에서 돈을 대어 해마다 이억 칠천만을 내는 것이 늘 그러하였다.

화제 때에 선비 대도호교위 외(廆)가 부의 무리를 거느리고 오환교위 임상을 따라 배반한 자를 치매 교위 외를 솔중왕으로 봉하였다. 상제 연평 연간에 선비가 이에 동으로 변새에 들어와 어양태수 장현을 죽였다. 안제 때에 선비의 대인 연려양이 조회에 들어오매, 한나라가 선비 왕의 인수와 붉은 수레와 세 마리가 끄는 멍에를 내리고 오환교위가 다스리는 영성(寗城) 아래에 머물게 하였다.

3우박을 삼키고 낳은 아이

通胡市,築南北兩部質宮,受邑落質者二十部。是後或反或降,或與匈奴、烏丸相攻擊。安帝末,發緣邊步騎二萬餘人,屯列衝要。後鮮卑八九千騎穿代郡及馬城塞入害長吏,漢遣度遼將軍鄧遵、中郎將馬續出塞追破之。鮮卑大人烏倫、其至鞬等七千餘人詣遵降,封烏倫爲王,其至鞬爲侯,賜采帛。遵去後,其至鞬復反,圍烏丸校尉於馬城,度遼將軍耿夔及幽州刺史救解之。其至鞬遂盛,控弦數萬騎,數道入塞,趣五原寧貊,攻匈奴南單于,殺左奧鞬日逐王。順帝時,復入塞,殺代郡太守。漢遣黎陽營兵屯中山,緣邊郡兵屯塞下,調五營弩帥令教戰射,南單于將步騎萬餘人助漢擊却之。後烏丸校尉耿曄將率衆王出塞擊鮮卑,多斬首虜,於是鮮卑三萬餘落詣遼東降。匈奴及北單于遁逃後,餘種十餘萬落詣遼東雜處,皆自號鮮卑兵。投鹿侯從匈奴軍三年,其妻在家,有子。

호시(胡市)를 통하게 하고 남북 두 부에 질궁(質宮)을 지어 읍락의 볼모를 받은 것이 스무 부였다. 이 뒤로 더러는 배반하고 더러는 항복하며, 더러는 흉노·오환과 서로 쳤다.

안제 말에 변방의 보병과 기병 이만여 사람을 내어 요긴한 목에 벌여 둔쳤다. 뒤에 선비 팔구천 기병이 대군과 마성의 변새를 뚫고 들어와 장리(長吏)를 해치매, 한나라가 도료장군 등준과 중랑장 마속을 보내어 변새를 나가 뒤쫓아 깨뜨렸다. 선비의 대인 오륜과 기지건 등 칠천여 사람이 등준에게 나아가 항복하매 오륜을 왕으로 기지건을 후로 봉하고 채색 비단을 내렸다.

등준이 떠난 뒤에 기지건이 다시 배반하여 마성에서 오환교위를 에워싸매, 도료장군 경기와 유주자사가 구원하여 풀었다. 기지건이 마침내 성해져 활 당기는 기병 몇만으로 여러 길로 변새에 들어와 오원 영맥으로 달려가 흉노 남선우를 치고 좌오건일축왕을 죽였다.

순제 때에 다시 변새에 들어와 대군태수를 죽였다. 한나라가 여양 영병을 보내어 중산에 둔치게 하고 변방 군의 군사를 변새 아래 둔치게 하며, 다섯 영의 쇠뇌 장수를 뽑아 싸움과 활쏘기를 가르치게 하니, 남선우가 보병과 기병 만여 사람을 거느려 한나라를 도와 쳐서 물리쳤다.

뒤에 오환교위 경엽이 솔중왕을 거느리고 변새를 나가 선비를 쳐서 목을 베고 사로잡은 것이 많으매, 이에 선비 삼만여 락이 요동에 나아가 항복하였다. 흉노와 북선우가 달아난 뒤에 남은 겨레 십여만 락이 요동에 나아가 섞여 살면서 다 스스로 선비의 군사라 일컬었다.

투록후(投鹿侯)가 흉노의 군사를 따라 세 해를 있었는데 그 아내가 집에 있으면서 아들을 낳았다.

4단석괴가 흉노의 옛 땅을 다 차지하다

投鹿侯歸,怪欲殺之。妻言:「嘗晝行聞雷震,仰天視而雹入其口,因吞之,遂姙身,十月而產,此子必有奇異,且長之。」投鹿侯固不信。妻乃語家,令收養焉,號檀石槐,長大勇健,智畧絕衆。年十四五,異部大人卜賁邑鈔取其外家牛羊,檀石槐策騎追擊,所向無前,悉還得所亡。由是部落畏服,施法禁,平曲直,莫敢犯者,遂推以爲大人。檀石槐旣立,乃爲庭於高柳北三百餘里彈汗山啜仇水上,東西部大人皆歸焉。兵馬甚盛,南鈔漢邊,北拒丁令,東却夫餘,西擊烏孫,盡據匈奴故地,東西萬二千餘里,南北七千餘里,罔羅山川、水澤、鹽池甚廣。漢患之,桓帝時使匈奴中郎將張奐征之,不克。乃更遣使者齎印綬,即封檀石槐爲王,欲與和親。檀石槐拒不肯受,寇鈔滋甚。乃分其地爲中東西三部。從右北平以東至遼,東接夫餘、濊貊爲東部,二十餘邑,其大人曰彌加、闕機、素利、槐頭。從右北平以西至上谷爲中部,十餘邑,其大人曰柯最、闕居、慕容等,爲大帥。

투록후가 돌아와 괴이하게 여겨 죽이려 하였다. 아내가 말하였다. "일찍이 낮에 길을 가다 우레 소리를 듣고 하늘을 우러러보는데 우박이 입에 들어와 삼켰더니 마침내 아이를 배어 열 달 만에 낳았습니다. 이 아이는 반드시 기이함이 있을 터이니 우선 기르십시오."

투록후가 굳이 믿지 않았다. 아내가 이에 친정에 말하여 거두어 기르게 하고 단석괴(檀石槐)라 불렀다. 자라서 용맹하고 굳세며 슬기와 꾀가 무리에 뛰어났다.

나이 열넷다섯에 다른 부의 대인 복분읍이 그 외갓집 소와 양을 노략해 가매, 단석괴가 말을 채찍질하여 뒤쫓아 치니 향하는 곳마다 앞을 막을 이가 없어 잃은 것을 다 되찾았다. 이로 말미암아 부락이 두려워 복종하였다. 법과 금함을 베풀고 굽고 곧은 것을 고르게 하니 감히 어기는 자가 없어 마침내 밀어 대인으로 삼았다.

단석괴가 서고 나서 고류 북쪽 삼백여 리 탄한산 철구수 가에 뜰(庭)을 두니 동부와 서부의 대인이 다 돌아와 붙었다. 군사와 말이 몹시 성하여 남으로 한나라 변방을 노략하고 북으로 정령을 막고 동으로 부여를 물리치고 서로 오손을 쳐서 흉노의 옛 땅을 다 차지하니, 동서로 만 이천여 리요 남북으로 칠천여 리라, 산천과 못과 소금밭을 그물처럼 아우른 것이 몹시 넓었다.

한나라가 이를 근심하여 환제 때에 흉노중랑장 장환을 시켜 쳤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이에 다시 사자를 보내어 인수를 가지고 가서 곧 단석괴를 왕으로 봉하고 화친하려 하였다. 단석괴가 물리치고 받으려 하지 않으며 도둑질과 노략이 더욱 심하였다.

이에 그 땅을 나누어 가운데와 동과 서 세 부로 삼았다. 우북평에서 동으로 요수에 이르고 동으로 부여·예맥에 닿는 데가 동부이니 스무여 읍이요, 그 대인은 미가·궐기·소리·괴두라 한다. 우북평에서 서로 상곡에 이르는 데가 중부이니 십여 읍이요, 그 대인은 가최·궐거·모용 등인데 대수(大帥)가 되었다.

5단석괴가 죽은 뒤

從上谷以西至燉煌,西接烏孫爲西部,二十餘邑,其大人曰置鞬落羅、曰律推演、宴荔游等,皆爲大帥,而制屬檀石槐。至靈帝時,大鈔畧幽、并二州。緣邊諸郡無歲不被其毒。熹平六年,遣護烏丸校尉夏育,破鮮卑中郎將田晏,匈奴中郎將臧旻與南單于出鴈門塞,三道並進,徑二千餘里征之。檀石槐帥部衆逆擊,旻等敗走,兵馬還者什一而己。鮮卑衆日多,田畜射獵,不足給食。後檀石槐乃案行烏侯秦水,廣袤數百里,停不流,中有魚而不能得。聞汗人善捕魚,於是檀石槐東擊汗國,得千餘家,徙置烏侯秦水上,使捕魚以助糧。至于今,烏侯秦水上有汗人數百戶。檀石槐年四十五死,子和連代立。和連材力不及父,而貪淫,斷法不平,衆叛者半。靈帝末年數爲寇鈔,攻北地,北地庶人善弩射者射中和連,和連即死。其子騫曼小,兄子魁頭代立。魁頭旣立後,騫曼長大,與魁頭爭國,衆遂離散。魁頭死,弟步度根代立。自檀石槐死後,諸大人遂世相襲也。

상곡에서 서로 돈황에 이르고 서로 오손에 닿는 데가 서부이니 스무여 읍이요, 그 대인은 치건락라·왈률추연·연려유 등인데 다 대수가 되어 단석괴에게 매여 있었다.

영제 때에 이르러 유주와 병주 두 주를 크게 노략하니 변방의 여러 군이 그 독을 입지 않는 해가 없었다. 희평 육년에 호오환교위 하육과 파선비중랑장 전안과 흉노중랑장 장민을 보내어 남선우와 함께 안문 변새를 나가 세 길로 아울러 나아가 이천여 리를 곧바로 가서 쳤다. 단석괴가 부의 무리를 거느리고 맞아 치니 장민 등이 패하여 달아났고 군사와 말은 열에 하나만 돌아왔다.

선비의 무리가 날로 많아져 밭 갈고 가축 치고 활 쏘아 사냥하는 것으로는 먹이기에 넉넉하지 않았다. 뒤에 단석괴가 오후진수(烏侯秦水)를 살펴보니 너비와 길이가 몇백 리인데 괴어 흐르지 않고 그 안에 물고기가 있으나 잡지 못하였다. 한인(汗人)이 물고기를 잘 잡는다는 말을 듣고 이에 동으로 한국(汗國)을 쳐서 천여 집을 얻어 오후진수 가에 옮겨 두고 물고기를 잡아 양식을 돕게 하였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오후진수 가에 한인 몇백 호가 있다.

단석괴가 나이 마흔다섯에 죽고 아들 화련이 대신 즉위하였다. 화련은 재주와 힘이 아비에 미치지 못하면서 탐하고 음란하며 법 가르기가 고르지 못하여 무리 가운데 배반한 자가 반이었다. 영제 말년에 여러 번 도둑질하고 노략하다가 북지(北地)를 치는데, 북지의 백성 가운데 쇠뇌를 잘 쏘는 자가 화련을 맞히니 화련이 곧 죽었다.

그 아들 건만이 어리므로 형의 아들 괴두가 대신 즉위하였다. 괴두가 선 뒤에 건만이 자라 괴두와 나라를 다투니 무리가 마침내 흩어졌다. 괴두가 죽고 아우 보도근이 대신 즉위하였다. 단석괴가 죽은 뒤로 여러 대인이 마침내 대를 이어 서로 물려받았다.

6가비능이 모임 자리에서 부라한을 죽이다

步度根旣立,衆稍衰弱,中兄扶羅韓亦別擁衆數萬爲大人。建安中,太祖定幽州,步度根與軻比能等因烏丸校尉閻柔上貢獻。後代郡烏丸能臣氐等叛,求屬扶羅韓,扶羅韓將萬餘騎迎之。到桑乾,氏等議,以爲扶羅韓部威禁寬緩,恐不見濟,更遣人呼軻比能。比能即將萬餘騎到,當共盟誓。比能便於會上殺扶羅韓,扶羅韓子泄歸泥及部衆悉屬比能。比能自以殺歸泥父,特又善遇之。步度根由是怨比能。

보도근이 서고 나서 무리가 차츰 쇠약해졌고, 가운데 형 부라한도 따로 무리 몇만을 거느려 대인이 되었다. 건안 연간에 태조가 유주를 평정하매 보도근과 가비능 등이 오환교위 염유를 통하여 공물을 올렸다.

뒤에 대군 오환의 능신저 등이 배반하여 부라한에게 붙기를 구하매 부라한이 만여 기병을 거느리고 맞으러 갔다. 상건에 이르러 능신저 등이 의논하기를, 부라한의 부는 위엄과 금함이 너그럽고 느슨하여 건짐을 받지 못할까 두렵다 하여, 다시 사람을 보내어 가비능을 불렀다.

가비능이 곧 만여 기병을 거느리고 이르러 함께 맹세하려 하였는데, 가비능이 곧 모임 자리에서 부라한을 죽이니 부라한의 아들 설귀니와 부의 무리가 다 가비능에게 붙었다. 가비능은 스스로 설귀니의 아비를 죽였다 하여 특별히 또 잘 대접하였다. 보도근이 이로 말미암아 가비능을 원망하였다.

7보도근이 가비능에게 죽다

文帝踐阼,田豫爲烏丸校尉,持節并護鮮卑,屯昌平。步度根遣使獻馬,帝拜爲王。後數與軻比能更相攻擊,步度根部衆稍寡弱,將其衆萬餘落保太原、鴈門郡。步度根乃使人招呼泄歸泥曰:「汝父爲比能所殺,不念報仇,反屬怨家。今雖厚待汝,是欲殺汝計也。不如還我,我與汝是骨肉至親,豈與仇等?」由是歸泥將其部落逃歸步度根,比能追之弗及。至黃初五年,步度根詣闕貢獻,厚加賞賜,是後一心守邊,不爲寇害,而軻比能衆遂彊盛。明帝即位,務欲綏和戎狄,以息征伐,羈縻兩部而已。至青龍元年,比能誘步度根深結和親,於是步度根將泄歸泥及部衆悉保比能,寇鈔并州,殺略吏民。帝遣驍騎將軍秦朗征之,歸泥叛比能,將其部衆降,拜歸義王,賜幢麾、曲蓋、鼓吹,居并州如故。步度根爲比能所殺。

문제가 자리에 오르매 전예를 오환교위로 삼고 부절을 지녀 선비까지 아울러 지키게 하고 창평에 둔치게 하였다. 보도근이 사신을 보내어 말을 바치매 황제가 왕으로 삼았다.

뒤에 여러 번 가비능과 서로 치고 쳐서 보도근의 부는 무리가 차츰 적고 약해지매, 그 무리 만여 락을 거느리고 태원과 안문군을 지켰다.

보도근이 이에 사람을 시켜 설귀니를 불러 말하였다. "네 아비가 가비능에게 죽었는데 원수 갚을 것은 생각지 않고 도리어 원수의 집에 붙었다. 이제 비록 너를 두터이 대접하나 이는 너를 죽이려는 꾀다. 나에게 돌아옴만 못하다. 나와 너는 살붙이 지친이니 어찌 원수와 같겠느냐."

이로 말미암아 설귀니가 그 부락을 거느리고 달아나 보도근에게 돌아가니 가비능이 뒤쫓았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황초 오년에 이르러 보도근이 대궐에 나아가 공물을 바치매 두터이 상을 더하니, 이 뒤로 한마음으로 변방을 지켜 도둑질하여 해를 끼치지 않았고, 가비능의 무리가 마침내 강성해졌다.

명제가 자리에 오르매 융적(戎狄)을 어루만져 화하게 하여 정벌을 그치기를 힘써, 두 부를 굴레 씌워 매어 둘 뿐이었다. 청룡 원년에 이르러 가비능이 보도근을 꾀어 깊이 화친을 맺으매, 이에 보도근이 설귀니와 부의 무리를 거느리고 다 가비능에게 붙어 병주를 도둑질하고 노략하며 벼슬아치와 백성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황제가 효기장군 진랑을 보내어 치매 설귀니가 가비능을 배반하고 그 부의 무리를 거느려 항복하니, 귀의왕(歸義王)으로 삼고 당휘(幢麾)와 곡개(曲蓋)와 고취(鼓吹)를 내리며 예전처럼 병주에 살게 하였다. 보도근은 가비능에게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