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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東夷

삼국지 동이전 三國志 魏書 烏丸鮮卑東夷傳 · 진수(陳壽), 주석 배송지(裴松之) · 3세기 말 (주는 429년) · 단락 1 · 한자 330자 · 낭독 1.3분

「삼국지 동이전」 「동이」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중국 사람이 둘레 나라를 적은 가장 오래된 기록. 부여·고구려·옥저·읍루·예·삼한·왜인이 여기 처음 나온다. 같은 붓이 북쪽 오환·선비와 서쪽 대진(로마)까지 한 권에 적어, 그때 중국이 남을 어떤 잣대로 갈라 보았는지가 함께 드러난다.

1동이전 서문 — 「중국이 예를 잃으면 사이에서 구한다」

《書》稱「東漸於海,西被於流沙」。其九服之制,可得而言也。然荒域之外,重譯而至,非足跡車軌所及,未有知其國俗殊方者也。自虞暨周,西戎有白環之獻,東夷有肅慎之貢,皆曠世而至,其遐遠也如此。及漢氏遣張騫使西域,窮河源,經歷諸國,遂置都護以總領之,然後西域之事具存,故史官得詳載焉。魏興,西域雖不能盡至,其大國龜茲、于寘、康居、烏孫、疏勒、月氏、鄯善、車師之屬,無歲不奉朝貢,略如漢氏故事。而公孫淵仍父祖三世有遼東,天子爲其絕域,委以海外之事,遂隔斷東夷,不得通於諸夏。景初中,大興師旅,誅淵,又潛軍浮海,收樂浪、帶方之郡,而後海表謐然,東夷屈服。其後高句麗背叛,又遣偏師致討,窮追極遠,逾烏丸、骨都,過沃沮,踐肅慎之庭,東臨大海。長老說有異面之人,近日之所出,遂周觀諸國,采其法俗,小大區別,各有名號,可得詳紀。雖夷狄之邦,而俎豆之象存。中國失禮,求之四夷,猶信。故撰次其國,列其同異,以接前史之所未備焉。

『서경』에 「동으로 바다에 젖어 들고 서로 흐르는 모래에 미친다」 하였으니, 그 구복(九服)의 제도는 말할 만하다. 그러나 거친 지경 밖에서 통역을 거듭하여 이르는 곳은 발자취와 수레바퀴가 미치는 데가 아니어서, 그 나라의 풍속과 다른 고장을 아는 이가 없었다.

우(虞)에서 주(周)에 이르기까지 서융에는 백환(白環)을 바친 일이 있고 동이에는 숙신(肅慎)의 공물이 있었으나, 다 세월을 건너뛰어 이르렀으니 그 멀고 아득함이 이와 같았다.

한나라가 장건을 서역에 사신으로 보내어 황하의 근원을 다하고 여러 나라를 두루 거친 뒤 마침내 도호(都護)를 두어 거느리게 하니, 그런 뒤에야 서역의 일이 갖추어 남아 사관이 자세히 실을 수 있었다. 위나라가 일어나매 서역이 비록 다 이르지는 못하였으나, 그 큰 나라인 구자·우전·강거·오손·소륵·월지·선선·차사 따위가 조공을 받들지 않는 해가 없어 대략 한나라 때의 옛일과 같았다.

그런데 공손연이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이어 세 대 동안 요동을 차지하니, 천자가 그곳을 아주 먼 지경이라 하여 바다 밖 일을 맡겼다. 마침내 동이를 가로막아 끊어 여러 하(夏)와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경초 연간에 크게 군사를 일으켜 공손연을 베고, 또 군사를 숨겨 바다에 띄워 낙랑과 대방의 군을 거두니, 그런 뒤에 바다 밖이 고요해지고 동이가 굽혀 복종하였다.

그 뒤에 고구려가 등지고 배반하매 또 한 갈래 군사를 보내어 쳤다. 끝까지 뒤쫓아 지극히 먼 데까지 가서 오환과 골도를 넘고 옥저를 지나 숙신의 뜰을 밟고 동으로 큰 바다에 다다랐다. 늙은이들이 얼굴이 다른 사람이 있으니 해 뜨는 데 가깝다고 말하였다. 마침내 여러 나라를 두루 보고 그 법과 풍속을 캐어 작고 큰 것을 갈라 두니, 각각 이름이 있어 자세히 적을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이적의 나라이나 조두(俎豆)의 모습이 남아 있다. 중국이 예를 잃으면 사이(四夷)에서 구한다 하였으니 참으로 미더운 말이다. 그러므로 그 나라들을 차례로 엮고 같고 다름을 벌여 놓아, 앞선 역사가 갖추지 못한 데를 잇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