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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夫餘

삼국지 동이전 三國志 魏書 烏丸鮮卑東夷傳 · 진수(陳壽), 주석 배송지(裴松之) · 3세기 말 (주는 429년) · 단락 5 · 한자 919자 · 낭독 3.7분

「삼국지 동이전」 동이 「부여」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중국 사람이 둘레 나라를 적은 가장 오래된 기록. 부여·고구려·옥저·읍루·예·삼한·왜인이 여기 처음 나온다. 같은 붓이 북쪽 오환·선비와 서쪽 대진(로마)까지 한 권에 적어, 그때 중국이 남을 어떤 잣대로 갈라 보았는지가 함께 드러난다.

1부여 — 사방 이천 리, 호 팔만

夫餘在長城之北,去玄菟千里,南與高句麗,東與挹婁,西與鮮卑接,北有弱水,方可二千里。戶八萬,其民土著,有宮室、倉庫、牢獄。多山陵、廣澤,於東夷之域最平敞。土地宜五穀,不生五果。其人粗大,性強勇謹厚,不寇鈔。國有君王,皆以六畜名官,有馬加、牛加、豬加、狗加、大使、大使者、使者。邑落有豪民,名下戶皆爲奴僕。諸加別主四出,道大者主數千家,小者數百家。食飲皆用俎豆,會同、拜爵、洗爵,揖讓升降。以殷正月祭天,國中大會,連日飲食歌舞,名曰迎鼓,於是時斷刑獄,解囚徒。在國衣尚白,白布大袂,袍、袴,履革鞜。出國則尚繒繡錦罽,大人加狐狸、狖白、黑貂之裘,以金銀飾帽。譯人傳辭,皆跪,手據地竊語。用刑嚴急,殺人者死,沒其家人爲奴婢。竊盜一責十二。男女淫,婦人妒,皆殺之。尤憎妒,已殺,屍之國南山上,至腐爛。女家欲得,輸牛馬乃與之。兄死妻嫂,與匈奴同俗。其國善養牲,出名馬、赤玉、貂狖、美珠。

부여는 장성 북쪽에 있다. 현도에서 천 리 떨어졌고 남으로 고구려, 동으로 읍루, 서로 선비와 잇대었으며 북에 약수(弱水)가 있다. 사방 이천 리쯤 되고 호가 팔만이다. 그 백성은 붙박이로 살며 궁실과 창고와 감옥이 있다. 산과 언덕과 넓은 못이 많아 동이의 지경에서 가장 평평하고 트였다. 땅은 오곡에 알맞으나 다섯 가지 과일은 나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몸이 크고 굵으며 성품이 굳세고 용맹하며 삼가고 두터워 도둑질하거나 노략하지 않는다.

나라에 임금이 있고 벼슬 이름은 다 여섯 가축으로 지으니, 마가(馬加)·우가(牛加)·저가(豬加)·구가(狗加)와 대사(大使)·대사자(大使者)·사자(使者)가 있다. 읍락에 호민(豪民)이 있고 하호(下戶)라 하는 이는 다 종이 된다. 여러 가(加)가 따로 사출도(四出道)를 맡는데, 큰 도는 몇천 집을 맡고 작은 것은 몇백 집을 맡는다.

먹고 마실 때 다 조두(俎豆)를 쓰며, 모여 만나 잔을 올리고 잔을 씻으며 읍하고 사양하며 오르내린다. 은나라 정월로 하늘에 제사하는데 나라 안이 크게 모여 며칠을 잇달아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니 이름을 영고(迎鼓)라 한다. 이때에 형옥을 끊고 죄수를 풀어 준다.

나라 안에 있을 때는 흰 옷을 숭상하여 흰 베로 소매가 큰 도포와 바지를 지어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 나라 밖에 나갈 때는 비단과 수와 모직을 숭상하며, 대인은 여우와 살쾡이와 흰 원숭이와 검은 담비의 갖옷을 더 입고 금과 은으로 모자를 꾸민다. 통역이 말을 전할 때는 다 꿇어앉아 손을 땅에 짚고 나직이 말한다.

형벌 쓰기가 엄하고 급하여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이고 그 집안사람을 몰수하여 종으로 삼는다. 도둑질하면 하나에 열둘을 물린다. 사내와 계집이 음란하거나 부인이 투기하면 다 죽인다. 특히 투기를 미워하여 죽인 뒤에 나라 남쪽 산 위에 주검을 두어 썩어 문드러지게 한다. 친정에서 얻고자 하면 소와 말을 바쳐야 준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으니 흉노와 풍속이 같다.

그 나라는 가축을 잘 길러 이름난 말과 붉은 옥과 담비와 원숭이 가죽과 아름다운 구슬이 난다.

2소 발굽으로 길흉을 점치다

珠大者如酸棗。以弓矢刀矛爲兵,家家自有鎧仗。國之耆老自說古之亡人。作城柵皆員,有似牢獄。行道晝夜無老幼皆歌,通日聲不絕。有軍事亦祭天,殺牛觀蹄以占吉凶,蹄解者爲凶,合者爲吉。有敵,諸加自戰,下戶俱擔糧飲食之。其死,夏月皆用冰。殺人徇葬,多者百數。厚葬,有槨無棺。

구슬 큰 것은 멧대추만 하다. 활과 화살과 칼과 창을 병기로 삼고 집집이 스스로 갑옷과 무기를 갖추었다. 나라의 늙은이들은 스스로 옛적에 도망해 온 사람이라 말한다. 성책을 만든 것이 다 둥글어 감옥과 비슷하다.

길을 갈 때는 밤낮으로 늙은이 어린이 없이 다 노래하여 온종일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군사 일이 있으면 또한 하늘에 제사하고 소를 죽여 발굽을 보아 길흉을 점치는데, 발굽이 갈라지면 흉하고 붙으면 길하다. 적이 있으면 여러 가가 스스로 싸우고 하호는 다 양식을 져다가 먹인다.

사람이 죽으면 여름철에는 다 얼음을 쓴다. 사람을 죽여 함께 묻는데 많으면 백을 헤아린다. 두터이 장사 지내며 덧널은 있으나 널은 없다.

3상을 다섯 달 멈추어 둔다

《魏略》曰:其俗停喪五月,以久爲榮。其祭亡者,有生有熟。喪主不欲速而他人強之,常諍引以此爲節。其居喪,男女皆純白,婦人著布面衣,去環珮,大體與中國相仿佛也。

위략(魏略)에 이르기를, 그 풍속에 상(喪)을 다섯 달 멈추어 두고 오래 두는 것을 영광으로 여긴다. 죽은 이에게 제사할 때 날것도 있고 익은 것도 있다. 상주는 빨리 하려 하지 않는데 다른 사람이 억지로 권하니, 늘 다투어 끌기를 이로써 예절로 삼는다. 상중에는 사내와 계집이 다 순백을 입고 부인은 베로 만든 얼굴 가리개를 쓰며 고리와 패옥을 벗으니, 대체로 중국과 서로 비슷하다.

4도장에 「예왕지인」이라 새겨져 있다

夫餘本屬玄菟。漢末,公孫度雄張海東,威服外夷,夫餘王尉仇台更屬遼東。時句麗、鮮卑強,度以夫餘在二虜之間,妻以宗女。尉仇台死,簡位居立。無適子,有孽子麻餘。位居死,諸加共立麻餘。牛加兄子名位居,爲大使,輕財善施,國人附之,歲歲遣使詣京都貢獻。正始中,幽州刺史毌丘儉討句麗,遣玄菟太守王頎詣夫餘,位居遣大加郊迎,供軍糧。季父牛加有二心,位居殺季父父子,籍沒財物,遣使簿斂送官。舊夫餘俗,水旱不調,五穀不熟,輒歸咎於王,或言當易,或言當殺。麻餘死,其子依慮年六歲,立以爲王。漢時,夫餘王葬用玉匣,常豫以付玄菟郡,王死則迎取以葬。公孫淵伏誅,玄菟庫猶有玉匣一具。今夫餘庫有玉璧、珪、瓚數代之物,傳世以爲寶,耆老言先代之所賜也。其印文言「濊王之印」,國有故城名濊城,蓋本濊貊之地,而夫餘王其中,自謂「亡人」,抑有(似)也。

부여는 본디 현도에 속하였다. 한나라 말에 공손도가 해동에서 씩씩하게 뻗어 밖의 이(夷)를 위엄으로 복종시키매, 부여 왕 위구태가 다시 요동에 속하였다. 그때 고구려와 선비가 강하였으므로 공손도가 부여는 두 오랑캐 사이에 있다 하여 종실의 딸을 아내로 주었다.

위구태가 죽고 간위거가 즉위하였다. 적자가 없고 서자 마여가 있었다. 간위거가 죽으매 여러 가가 함께 마여를 세웠다. 우가의 형의 아들로 이름이 위거인 이가 대사가 되었는데,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베풀기를 좋아하여 나라 사람이 붙었다. 해마다 사신을 서울에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정시 연간에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칠 때 현도태수 왕기를 부여에 보내매, 위거가 대가를 보내어 들 밖에서 맞고 군량을 대었다. 작은아버지 우가가 두 마음을 품으매 위거가 작은아버지 부자를 죽이고 재물을 적어 몰수하여, 사신을 보내어 장부에 적어 관에 보냈다.

옛 부여 풍속에 장마와 가뭄이 고르지 않아 오곡이 익지 않으면 그때마다 허물을 왕에게 돌려, 더러는 바꾸어야 한다 하고 더러는 죽여야 한다 하였다. 마여가 죽으매 그 아들 의려가 나이 여섯인데 세워 왕으로 삼았다.

한나라 때에 부여 왕은 장사에 옥갑(玉匣)을 썼는데, 늘 미리 현도군에 맡겨 두었다가 왕이 죽으면 맞아다가 장사 지냈다. 공손연이 베임을 당하였을 때 현도의 곳간에 아직 옥갑 한 벌이 있었다. 지금 부여의 곳간에는 옥벽(玉璧)과 규(珪)와 찬(瓚) 등 여러 대의 물건이 있어 대를 물려 보배로 삼는데, 늙은이들이 앞선 대에 내려 준 것이라 말한다.

그 도장의 글에 「예왕지인(濊王之印)」이라 하였고 나라에 예성(濊城)이라는 옛 성이 있으니, 아마 본디 예맥의 땅인데 부여가 그 가운데서 왕 노릇 한 것이며, 스스로 「도망해 온 사람」이라 하는 것도 그럴듯하다.

협주 1

《魏略》曰:其國殷富,自先世以來,未嘗破壞。

위략에 이르기를, 그 나라는 넉넉하고 가멸어 앞선 대 이래로 한 번도 깨진 적이 없다.

5동명이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가 다리가 되었다

《魏略》曰:舊志又言,昔北方有高離之國者,其王者侍婢有身,王欲殺之,婢云:「有氣如雞子來下,我故有身。」後生子,王捐之於溷中,豬以喙噓之,徙至馬閑,馬以氣噓之,不死。王疑以爲天子也,乃令其母收畜之,名曰東明,常令牧馬。東明善射,王恐奪其國也,欲殺之。東明走,南至施掩水,以弓擊水,魚鱉浮爲橋,東明得度,魚鱉乃解散,追兵不得渡。東明因都王夫餘之地。

위략에 이르기를, 옛 기록에 또 말하기를, 예전에 북쪽에 고리(高離)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 왕의 시비가 아이를 배매 왕이 죽이려 하였다.

시비가 말하였다. "달걀만 한 기운이 내려와 제게 들어왔으므로 아이를 배었습니다."

뒤에 아들을 낳으매 왕이 돼지우리에 버렸는데 돼지가 주둥이로 김을 불어 주었고, 마구간으로 옮기니 말이 김을 불어 주어 죽지 않았다. 왕이 하늘의 아들인가 의심하여 이에 그 어미에게 거두어 기르게 하고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며 늘 말을 치게 하였다.

동명이 활을 잘 쏘매 왕이 제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워 죽이려 하였다. 동명이 달아나 남으로 시엄수(施掩水)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가 되었다. 동명이 건너매 물고기와 자라가 곧 흩어져 뒤쫓던 군사는 건너지 못하였다. 동명이 이로 인하여 도읍하고 부여 땅에서 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