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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高句麗

삼국지 동이전 三國志 魏書 烏丸鮮卑東夷傳 · 진수(陳壽), 주석 배송지(裴松之) · 3세기 말 (주는 429년) · 단락 8 · 한자 1,353자 · 낭독 5.4분

「삼국지 동이전」 동이 「고구려」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중국 사람이 둘레 나라를 적은 가장 오래된 기록. 부여·고구려·옥저·읍루·예·삼한·왜인이 여기 처음 나온다. 같은 붓이 북쪽 오환·선비와 서쪽 대진(로마)까지 한 권에 적어, 그때 중국이 남을 어떤 잣대로 갈라 보았는지가 함께 드러난다.

1고구려 — 다섯 부와 책구루

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南與朝鮮、濊貊,東與沃沮,北與夫餘接。都於丸都之下,方可二千里,戶三萬。多大山深谷,無原澤。隨山谷以爲居,食澗水。無良田,雖力佃作,不足以實口腹。其俗節食,好治宮室,於所居之左右立大屋,祭鬼神,又祀靈星、社稷。其人性凶急,善寇鈔。其國有王,其官有相加、對盧、沛者、古雛加、主簿、優台丞、使者、皁衣先人,尊卑各有等級。東夷舊語以爲夫餘別種,言語諸事,多與夫餘同,其性氣衣服有異。本有五族,有涓奴部、絕奴部、順奴部、灌奴部、桂婁部。本涓奴部爲王,稍微弱,今桂婁部代之。漢時賜鼓吹技人,常從玄菟郡受朝服衣幘,高句麗令主其名籍。後稍驕恣,不復詣郡,於東界築小城,置朝服衣幘其中,歲時來取之,今胡猶名此城爲幘溝漊。溝漊者,句麗名城也。其置官,有對盧則不置沛者,有沛者則不置對盧。王之宗族,其大加皆稱古雛加。涓奴部本國主,今雖不爲王,適統大人,得稱古雛加,亦得立宗廟,祠靈星、社稷。

고구려는 요동 동쪽 천 리에 있다. 남으로 조선·예맥, 동으로 옥저, 북으로 부여와 잇대었다. 환도(丸都) 아래에 도읍하였고 사방 이천 리쯤 되며 호가 삼만이다.

큰 산과 깊은 골이 많고 벌판과 못이 없다. 산골짜기를 따라 살며 산골 물을 마신다. 좋은 밭이 없어 비록 힘써 밭을 갈아도 입과 배를 채우기에 넉넉하지 않다. 그 풍속이 먹기를 절약하고 궁실 짓기를 좋아한다. 사는 곳 좌우에 큰 집을 세워 귀신에게 제사하고 또 영성(靈星)과 사직(社稷)에 제사한다. 그 사람들은 성품이 사납고 급하며 도둑질하고 노략하기를 잘한다.

그 나라에 왕이 있고, 벼슬에는 상가(相加)·대로(對盧)·패자(沛者)·고추가(古雛加)·주부(主簿)·우태(優台)·승(丞)·사자(使者)·조의(皁衣)·선인(先人)이 있어 높고 낮음에 각각 등급이 있다.

동이의 옛말에 부여의 별종이라 하는데, 말과 여러 일이 부여와 같은 것이 많으나 성품과 기질과 옷은 다름이 있다.

본디 다섯 겨레가 있으니 연노부(涓奴部)·절노부(絕奴部)·순노부(順奴部)·관노부(灌奴部)·계루부(桂婁部)다. 본디 연노부가 왕이 되었는데 차츰 미약해져 이제는 계루부가 대신한다.

한나라 때에 고취(鼓吹)와 재인(技人)을 내렸고, 늘 현도군에서 조복(朝服)과 옷과 두건을 받았는데 고구려의 영(令)이 그 명적(名籍)을 맡았다. 뒤에 차츰 교만하고 방자해져 다시 군에 나아가지 않고, 동쪽 지경에 작은 성을 쌓아 조복과 옷과 두건을 그 안에 두었다가 해마다 와서 가져갔다. 이제 호(胡)가 오히려 이 성을 책구루(幘溝漊)라 부르니, 구루(溝漊)란 고구려 말로 성이다.

벼슬을 둘 때 대로가 있으면 패자를 두지 않고 패자가 있으면 대로를 두지 않는다. 왕의 종족으로 대가(大加)인 이는 다 고추가라 일컫는다. 연노부는 본디 나라의 주인이었으므로 이제 비록 왕이 되지 못하나 적통을 이은 대인은 고추가라 일컬을 수 있고, 또한 종묘를 세워 영성과 사직에 제사할 수 있다.

2시월에 동맹을 지내고 서옥에 사위를 재운다

絕奴部世與王婚,加古雛之號。諸大加亦自置使者、皁衣先人,名皆達於王,如卿大夫之家臣,會同坐起,不得與王家使者、皁衣先人同列。其國中大家不佃作,坐食者萬餘口,下戶遠擔米糧魚鹽供給之。其民喜歌舞,國中邑落,暮夜男女群聚,相就歌戲。無大倉庫,家家自有小倉,名之爲桴京。其人絜清自喜,喜藏釀。跪拜申一腳,與夫餘異,行步皆走。以十月祭天,國中大會,名曰東盟。其公會,衣服皆錦繡金銀以自飾。大加主簿頭著幘,如幘而無餘,其小加著折風,形如弁。其國東有大穴,名隧穴,十月國中大會,迎隧神還于國東上祭之,置木隧於神坐。無牢獄,有罪諸加評議,便殺之,沒入妻子爲奴婢。其俗作婚姻,言語已定,女家作小屋於大屋後,名婿屋,婿暮至女家戶外,自名跪拜,乞得就女宿,如是者再三,女父母乃聽使就小屋中宿,傍頓錢帛,至生子已長大,乃將婦歸家。其俗淫。

절노부는 대대로 왕과 혼인하므로 고추의 이름을 더한다. 여러 대가도 스스로 사자·조의·선인을 두는데 그 이름을 다 왕에게 알린다. 경대부의 가신과 같아서 모여 앉고 일어설 때 왕가의 사자·조의·선인과 같은 줄에 서지 못한다.

그 나라의 큰 집안은 밭을 갈지 않아 앉아서 먹는 이가 만여 사람이며, 하호가 멀리서 쌀과 양식과 물고기와 소금을 져다가 대어 준다.

그 백성은 노래하고 춤추기를 좋아하여 나라 안 읍락에서 저물녘과 밤에 남녀가 떼 지어 모여 서로 나아가 노래하고 논다. 큰 창고가 없고 집집이 작은 창고를 두는데 이름을 부경(桴京)이라 한다. 그 사람들은 깨끗한 것을 스스로 좋아하고 술 빚어 갈무리하기를 즐긴다. 꿇어 절할 때 한 다리를 펴니 부여와 다르고, 걸음걸이는 다 달리듯 한다.

시월에 하늘에 제사하는데 나라 안이 크게 모이며 이름을 동맹(東盟)이라 한다. 그 공식 모임에서는 옷을 다 비단과 수와 금과 은으로 꾸민다. 대가와 주부는 머리에 두건을 쓰는데 중국의 두건 같으나 뒤가 없고, 소가(小加)는 절풍(折風)을 쓰는데 모양이 변(弁)과 같다.

그 나라 동쪽에 큰 굴이 있어 수혈(隧穴)이라 한다. 시월에 나라 안이 크게 모여 수신(隧神)을 맞아 나라 동쪽 위로 돌아와 제사하며, 나무로 만든 수신을 신좌에 모신다.

감옥이 없고 죄가 있으면 여러 가가 의논하여 곧 죽이며 처자를 몰수하여 종으로 삼는다.

그 풍속에 혼인할 때 말이 이미 정해지면 여자 집에서 큰 집 뒤에 작은 집을 짓고 이름을 서옥(婿屋)이라 한다. 사위가 저물녘에 여자 집 문 밖에 이르러 스스로 이름을 대고 꿇어 절하며 여자와 함께 자기를 빈다. 이렇게 두세 번 하면 여자의 부모가 이에 들어 작은 집에서 자게 하고, 곁에 돈과 비단을 쌓아 둔다. 아들을 낳아 이미 자란 뒤에야 아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 풍속은 음란하다.

3맥궁이 나는 소수맥

男女已嫁娶,便稍作送終之衣。厚葬,金銀財幣,盡於送死,積石爲封,列種松柏。其馬皆小,便登山。國人有氣力,習戰鬥,沃沮、東濊皆屬焉。又有小水貊。句麗作國,依大水而居,西安平縣北有小水,南流入海,句麗別種依小水作國,因名之爲小水貊,出好弓,所謂貊弓是也。

남녀가 이미 혼인하면 곧 조금씩 죽어 보낼 옷을 짓는다. 두터이 장사 지내어 금과 은과 재물을 죽은 이 보내는 데 다 쓰며,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소나무와 잣나무를 벌여 심는다.

그 말은 다 작아 산에 오르기 편하다. 나라 사람이 기운과 힘이 있고 싸움을 익혀 옥저와 동예가 다 여기에 속하였다.

또 소수맥(小水貊)이 있다. 고구려가 나라를 세울 때 큰 물에 기대어 살았는데, 서안평현 북쪽에 작은 물이 있어 남으로 흘러 바다에 든다. 고구려의 별종이 이 작은 물에 기대어 나라를 세웠으므로 소수맥이라 이름하였다. 좋은 활이 나니 이른바 맥궁(貊弓)이 이것이다.

4왕망이 이름을 「하구려」로 고치다

王莽初發高句麗兵以伐胡,不欲行,強迫遣之,皆亡出塞爲寇盜。遼西大尹田譚追擊之,爲所殺。州郡縣歸咎于句麗侯騊,嚴尤奏言:「貊人犯法,罪不起於騊,且宜安慰。今猥被之大罪,恐其遂反。」莽不聽,詔尤擊之。尤誘期句麗侯騊至而斬之,傳送其首詣長安。莽大悅,佈告天下,更名高句麗爲下句麗。當此時爲侯國,漢光武帝八年,高句麗王遣使朝貢,始見稱王。

왕망이 처음에 고구려 군사를 내어 호(胡)를 치려 하였는데 가려 하지 않으매 억지로 다그쳐 보내니, 다 달아나 변새를 나가 도둑이 되었다. 요서대윤 전담이 뒤쫓아 치다가 도리어 죽임을 당하였다.

주와 군과 현이 허물을 고구려후 추(騊)에게 돌렸다. 엄우가 아뢰었다. "맥인(貊人)이 법을 범한 것이지 죄가 추에게서 일어난 것이 아니니 우선 편안히 위로함이 마땅합니다. 이제 함부로 큰 죄를 씌우면 마침내 배반할까 두렵습니다."

왕망이 듣지 않고 엄우에게 조서를 내려 치게 하였다. 엄우가 고구려후 추를 꾀어 만나기로 하고 이르매 베어 그 머리를 장안으로 보냈다. 왕망이 크게 기뻐하여 천하에 널리 알리고 고구려의 이름을 고쳐 하구려(下句麗)라 하였다.

이때에는 후국(侯國)이었는데, 한나라 광무제 팔년에 고구려 왕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매 비로소 왕이라 일컬어졌다.

5왕 궁이 거짓 항복하다

至殤、安之間,句麗王宮數寇遼東,更屬玄菟。遼東太守蔡風、玄菟太守姚光以宮爲二郡害,興師伐之。宮詐降請和,二郡不進。宮密遣軍攻玄菟,焚燒候城,入遼隧,殺吏民。後宮復犯遼東,蔡風輕將吏士追討之,軍敗沒。

상제와 안제 사이에 이르러 고구려 왕 궁(宮)이 여러 번 요동을 도둑질하매 다시 현도에 속하게 하였다. 요동태수 채풍과 현도태수 요광이 궁을 두 군의 해가 된다 하여 군사를 일으켜 쳤다.

궁이 거짓으로 항복하고 화친을 청하매 두 군이 나아가지 않았다. 궁이 몰래 군사를 보내어 현도를 치고 후성(候城)을 불사르며 요수(遼隧)에 들어가 벼슬아치와 백성을 죽였다. 뒤에 궁이 다시 요동을 범하매 채풍이 가벼이 벼슬아치와 군사를 거느리고 뒤쫓아 치다가 군사가 패하여 죽었다.

6백고

宮死,子伯固立。順、桓之間,復犯遼東,寇新安、居鄉,又攻西安平,於道上殺帶方令,略得樂浪太守妻子。靈帝建寧二年,玄菟太守耿臨討之,斬首虜數百級,伯固降,屬遼東。〔熹〕平中,伯固乞屬玄菟。公孫度之雄海東也,伯固遣大加優居、主簿然人等助度擊富山賊,破之。

궁이 죽고 아들 백고가 즉위하였다. 순제와 환제 사이에 다시 요동을 범하여 신안과 거향을 도둑질하고, 또 서안평을 쳐서 길에서 대방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았다.

영제 건녕 이년에 현도태수 경림이 쳐서 목을 베고 사로잡은 것이 몇백 급이었다. 백고가 항복하여 요동에 속하였다. 희평 연간에 백고가 현도에 속하기를 빌었다.

공손도가 해동에서 씩씩할 때 백고가 대가 우거와 주부 연인 등을 보내어 공손도를 도와 부산(富山)의 도둑을 쳐서 깨뜨렸다.

7발기와 이이모

伯固死,有二子,長子拔奇,小子伊夷模。拔奇不肖,國人便共立伊夷模爲王。自伯固時,數寇遼東,又受亡胡五百餘家。建安中,公孫康出軍擊之,破其國,焚燒邑落。拔奇怨爲兄而不得立,與涓奴加各將下戶三萬餘口詣康降,還住沸流水。降胡亦叛伊夷模,伊夷模更作新國,今日所在是也。拔奇遂往遼東,有子留句麗國,今古雛加駮位居是也。其後復擊玄菟,玄菟與遼東合擊,大破之。

백고가 죽었는데 아들 둘이 있어 맏이는 발기요 작은아들은 이이모다. 발기가 어질지 못하매 나라 사람이 곧 함께 이이모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백고 때부터 여러 번 요동을 도둑질하고 또 도망해 온 호(胡) 오백여 집을 받아들였다. 건안 연간에 공손강이 군사를 내어 쳐서 그 나라를 깨뜨리고 읍락을 불살랐다.

발기가 형이면서 서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연노가(涓奴加)와 함께 각각 하호 삼만여 사람을 거느리고 공손강에게 나아가 항복하고, 돌아와 비류수(沸流水)에 살았다. 항복하였던 호도 이이모를 배반하매 이이모가 새 나라를 다시 세웠으니 오늘 있는 곳이 이것이다.

발기는 마침내 요동으로 갔고 아들 하나가 고구려에 남았으니 지금의 고추가 박위거가 이 사람이다. 그 뒤에 다시 현도를 치매 현도가 요동과 합쳐 쳐서 크게 깨뜨렸다.

8나면서 눈을 뜬 위궁

伊夷模無子,淫灌奴部,生子名位宮。伊夷模死,立以爲王,今句麗王宮是也。其曾祖名宮,生能開目視,其國人惡之,及長大,果凶虐,數寇鈔,國見殘破。今王生墮地,亦能開目視人。句麗呼相似爲位,似其祖,故名之爲位宮。位宮有力勇,便鞍馬,善獵射。景初二年,太尉司馬宣王率衆討公孫淵,宮遣主簿大加將數千人助軍。正始三年,宮寇西安平,其五年,爲幽州刺吏毌丘儉所破。語在〈儉傳〉。

이이모가 아들이 없어 관노부와 정을 통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위궁(位宮)이다. 이이모가 죽으매 세워 왕으로 삼았으니 지금 고구려 왕 궁이 이 사람이다.

그 증조의 이름이 궁인데, 나면서 눈을 뜨고 볼 수 있어 그 나라 사람이 미워하였다. 자라매 과연 흉하고 모질어 여러 번 도둑질하고 노략하여 나라가 깨지고 부서졌다. 지금 왕도 나서 땅에 떨어질 때 또한 눈을 뜨고 사람을 볼 수 있었다. 고구려에서는 닮은 것을 「위(位)」라 부르는데 그 증조를 닮았으므로 이름을 위궁이라 하였다.

위궁은 힘과 용맹이 있고 말타기에 익숙하며 사냥과 활쏘기를 잘하였다. 경초 이년에 태위 사마선왕이 무리를 거느리고 공손연을 칠 때, 궁이 주부와 대가를 보내어 몇천 사람을 거느리고 군사를 돕게 하였다. 정시 삼년에 궁이 서안평을 도둑질하고, 그 오년에 유주자사 관구검에게 깨졌다. 이야기는 「관구검전」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