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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옥저東沃沮

삼국지 동이전 三國志 魏書 烏丸鮮卑東夷傳 · 진수(陳壽), 주석 배송지(裴松之) · 3세기 말 (주는 429년) · 단락 4 · 한자 713자 · 낭독 2.9분

「삼국지 동이전」 동이 「동옥저」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중국 사람이 둘레 나라를 적은 가장 오래된 기록. 부여·고구려·옥저·읍루·예·삼한·왜인이 여기 처음 나온다. 같은 붓이 북쪽 오환·선비와 서쪽 대진(로마)까지 한 권에 적어, 그때 중국이 남을 어떤 잣대로 갈라 보았는지가 함께 드러난다.

1동옥저 — 고구려에 조세를 바치다

東沃沮在高句麗蓋馬大山之東,濱大海而居。其地形東北狹,西南長,可千里,北與挹婁、夫餘,南與濊貊接。戶五千,無大君王,世世邑落,各有長帥。其言語與句麗大同,時時小異。漢初,燕亡人衛滿王朝鮮,時沃沮皆屬焉。漢武帝元封二年,伐朝鮮,殺滿孫右渠,分其地爲四郡,以沃沮城爲玄菟郡。後爲夷貊所侵,徙郡句麗西北,今所謂玄菟故府是也。沃沮還屬樂浪。漢以土地廣遠,在單單大領之東,分置東部都尉,治不耐城,別主領東七縣,時沃沮亦皆爲縣。漢(光)武六年,省邊郡,都尉由此罷。其後皆以其縣中渠帥爲縣侯,不耐、華麗、沃沮諸縣皆爲侯國。夷狄更相攻伐,唯不耐濊侯至今猶置功曹、主簿諸曹,皆濊民作之。沃沮諸邑落渠帥,皆自稱三老,則故縣國之制也。國小,迫於大國之間,遂臣屬句麗。句麗復置其中大人爲使者,使相主領,又使大加統責其租稅,貊布、魚、鹽、海中食物,千里擔負致之,又送其美女以爲婢妾,遇之如奴僕。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蓋馬大山) 동쪽에 있으며 큰 바다에 잇대어 산다. 그 땅 모양은 동북이 좁고 서남이 길어 천 리쯤 되며, 북으로 읍루·부여, 남으로 예맥과 잇대었다. 호가 오천이다. 큰 임금이 없고 대대로 읍락마다 각각 장수(長帥)가 있다. 그 말은 고구려와 대체로 같으나 때때로 조금 다르다.

한나라 처음에 연나라에서 도망한 사람 위만이 조선에서 왕 노릇 할 때 옥저가 다 그에게 속하였다. 한나라 무제 원봉 이년에 조선을 쳐서 위만의 손자 우거를 죽이고 그 땅을 나누어 네 군으로 삼았는데, 옥저성으로 현도군을 삼았다. 뒤에 이맥(夷貊)에게 침노당하여 군을 고구려 서북으로 옮겼으니 이제 이른바 현도고부(玄菟故府)가 이것이다. 옥저는 도로 낙랑에 속하였다.

한나라가 땅이 넓고 멀며 단단대령(單單大領) 동쪽에 있다 하여 따로 동부도위를 두고 불내성(不耐城)에서 다스리게 하여 영동(領東) 일곱 현을 따로 맡게 하니, 그때 옥저도 다 현이 되었다. 한나라 광무제 육년에 변방의 군을 줄이면서 도위도 이로 말미암아 없앴다.

그 뒤에 다 그 현의 거수를 현후(縣侯)로 삼으니 불내·화려·옥저 여러 현이 다 후국이 되었다. 이적이 서로 치고 쳤는데, 오직 불내예후(不耐濊侯)만은 이제까지 오히려 공조와 주부 등 여러 조(曹)를 두었으니 다 예(濊)의 백성이 맡았다. 옥저 여러 읍락의 거수는 다 스스로 삼로(三老)라 일컬으니 곧 옛 현국(縣國)의 제도다.

나라가 작고 큰 나라 사이에 끼여 다그침을 받아 마침내 고구려에 신하로 속하였다. 고구려가 다시 그 가운데 대인을 사자로 삼아 서로 맡아 거느리게 하고, 또 대가에게 그 조세를 통틀어 물리게 하니, 맥포(貊布)와 물고기와 소금과 바닷속 먹을 것을 천 리 길에 져다 바쳤다. 또 그 미녀를 보내어 계집종과 첩으로 삼게 하고 종처럼 대하였다.

2땅이 기름지고 걸어서 싸운다

其土地肥美,背山向海,宜五穀,善田種。人性質直強勇,少牛馬,便持矛步戰。食飲居處,衣服禮節,有似句麗。

그 땅은 기름지고 좋으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하여 오곡에 알맞고 밭 갈고 씨 뿌리기를 잘한다. 사람의 성품이 질박하고 곧으며 굳세고 용맹하다. 소와 말이 적고 창을 들고 걸어서 싸우기에 익숙하다. 먹고 마시는 것과 사는 곳과 옷과 예절이 고구려와 비슷함이 있다.

3온 집안이 한 덧널을 함께 쓴다

《魏略》曰:其嫁娶之法,女年十歲,已相設許。婿家迎之,長養以爲婦。至成人,更還女家。女家責錢,錢畢,乃復還婿。其葬作大木槨,長十餘丈,開一頭作戶。新死者皆假埋之,才使覆形,皮肉盡,乃取骨置槨中。舉家皆共一槨,刻木如生形,隨死者爲數。又有瓦䥶,置米其中,編縣之於槨戶邊。

위략(魏略)에 이르기를, 그 혼인하는 법은 여자 나이 열 살이면 이미 서로 약속하여 허락한다. 사위 집에서 맞아다가 길러 아내로 삼고, 어른이 되면 다시 여자 집으로 돌려보낸다. 여자 집에서 돈을 물리고 돈을 다 치르면 이에 다시 사위에게 돌려보낸다.

장사에는 큰 나무 덧널을 만드는데 길이가 십여 장이요 한쪽 끝을 열어 문을 만든다. 갓 죽은 이는 다 임시로 묻어 겨우 형체를 덮게 하였다가, 살과 가죽이 다 없어지면 이에 뼈를 가져다 덧널 안에 둔다. 온 집안이 다 한 덧널을 함께 쓰며, 나무를 살았을 때 모습처럼 새기되 죽은 이 수만큼 만든다. 또 오지 솥이 있어 쌀을 그 안에 담고 엮어서 덧널 문 곁에 매단다.

4「바다 동쪽에 또 사람이 있는가」

毌丘儉討句麗,句麗王宮奔沃沮,遂進師擊之。沃沮邑落皆破之,斬獲首虜三千餘級,宮奔北沃沮。北沃沮一名置溝婁,去南沃沮八百餘里,其俗南北皆同,與挹婁接。挹婁喜乘船寇鈔,北沃沮畏之,夏月恆在山岩深穴中爲守備,冬月冰凍,船道不通,乃下居村落。王頎別遣追討宮,盡其東界。問其耆老「海東復有人不」?耆老言國人嘗乘船捕魚,遭風見吹數十日,東得一島,上有人,言語不相曉,其俗常以七月取童女沈海。又言有一國亦在海中,純女無男。又說得一布衣,從海中浮出,其身如中(國)人衣,其兩袖長三丈。又得一破船,隨波出在海岸邊,有一人項中復有面,生得之,與語不相通,不食而死。其域皆在沃沮東大海中。

관구검이 고구려를 칠 때 고구려 왕 궁이 옥저로 달아나매 마침내 군사를 나아가 쳤다. 옥저의 읍락을 다 깨뜨리고 목을 베고 사로잡은 것이 삼천여 급이었다. 궁은 북옥저로 달아났다.

북옥저는 치구루(置溝婁)라고도 하며 남옥저에서 팔백여 리 떨어졌다. 그 풍속은 남북이 다 같고 읍루와 잇대었다. 읍루가 배를 타고 도둑질하고 노략하기를 좋아하므로 북옥저가 이를 두려워하여, 여름철에는 늘 산 바위의 깊은 굴에 있으면서 지키고, 겨울철에 얼음이 얼어 뱃길이 통하지 않으면 이에 내려와 마을에 산다.

왕기가 따로 군사를 보내어 궁을 뒤쫓아 그 동쪽 지경 끝까지 갔다. 그 늙은이에게 "바다 동쪽에 또 사람이 있는가" 물었다.

늙은이가 말하기를, 나라 사람이 일찍이 배를 타고 고기를 잡다가 바람을 만나 몇십 날을 불려 가서 동쪽으로 섬 하나를 얻었는데, 그 위에 사람이 있었으나 말이 서로 통하지 않았고, 그 풍속에 늘 칠월에 계집아이를 골라 바다에 빠뜨린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한 나라가 또한 바다 가운데 있는데 여자만 있고 남자가 없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베옷 하나를 얻었는데 바다에서 떠올랐고 그 몸통은 중국 사람 옷 같은데 두 소매의 길이가 세 장이었다 하였다.

또 깨진 배 하나를 얻었는데 물결을 따라 바닷가에 나와 있었고, 한 사람이 있어 목 가운데 또 얼굴이 있었다. 산 채로 잡았으나 말이 서로 통하지 않았고 먹지 않아 죽었다.

그 지경이 다 옥저 동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