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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남국扶南國

양서 제이전 梁書 諸夷傳 · 요사렴(姚思廉) · 636년 (당 정관 10) · 단락 19 · 한자 3,103자 · 낭독 12.4분

「양서 제이전」 한 권 「부남국」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남조 양나라가 본 서른여섯 나라. 무령왕이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알린 표문, 신라가 처음 제 이름으로 등장하는 기록, 부처의 머리카락과 아육왕탑 이야기, 그리고 부상국·여인국 같은 바다 끝 전설까지 — 남해에서 서역까지 가장 폭넓은 제이전이다.

1부남의 땅

扶南國,在日南郡之南海西大灣中,去日南可七千里,在林邑西南三千餘里。城去海五百里。有大江廣十里,西北流,東入於海。其國輪廣三千餘里,土地洿下而平博,氣候風俗大較與林邑同。出金、銀、銅、錫、沉木香、象牙、孔翠、五色鸚鵡。

부남국은 일남군 남쪽 바다 서쪽 큰 만 가운데 있으니, 일남에서 칠천 리쯤이요 임읍 서남 삼천여 리다. 성은 바다에서 오백 리다. 너비 십 리의 큰 강이 있어 서북에서 흘러 동으로 바다에 든다. 그 나라는 둘레 삼천여 리에 토지가 낮고 평평하고 너르며, 기후와 풍속은 대략 임읍과 같다. 금·은·구리·주석·침목향·상아·공작과 물총새·오색 앵무가 난다.

2돈손국

其南界三千餘里有頓遜國,在海崎上,地方千里,城去海十里。有五王,並羈屬扶南。頓遜之東界通交州,其西界接天竺、安息徼外諸國,往還交市。所以然者,頓遜回入海中千餘里,漲海無崖岸,船舶未曾得徑過也。其市,東西交會,日有萬餘人。珍物寶貨,無所不有。又有酒樹,似安石榴,采其花汁停甕中,數日成酒。

그 남쪽 지경 삼천여 리에 돈손국(頓遜國)이 있으니 바다 벼랑 위에 있어 땅이 사방 천 리요 성은 바다에서 십 리다. 다섯 왕이 있어 다 부남에 매여 속한다. 돈손의 동쪽 지경은 교주와 통하고 서쪽 지경은 천축·안식의 변경 밖 여러 나라와 접해 오가며 교역한다. 그러한 까닭은, 돈손이 바다 가운데로 천여 리나 굽어 들어갔는데 창해(漲海)는 끝 간 데 없이 넓어 배가 곧장 지나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 저자는 동서가 만나 모이니 날마다 만여 명이라, 진기한 물건과 보화가 없는 것이 없다. 또 술나무가 있으니 석류 비슷한데, 그 꽃 즙을 받아 독에 담아 두면 며칠 만에 술이 된다.

3목 긴 왕의 비건국

頓遜之外,大海洲中,又有毗騫國,去扶南八千里。傳其王身長丈二,頭長三尺,自古來不死,莫知其年。王神聖,國中人善惡及將來事,王皆知之,是以無敢欺者。南方號曰長頸王。國俗,有室屋、衣服,噉粳米。其人言語,小異扶南。有山出金,金露生石上,無所限也。國法刑罪人,並于王前噉其肉。國內不受估客,有往者亦殺而噉之,是以商旅不敢至。王常樓居,不血食,不事鬼神。其子孫生死如常人,唯王不死。扶南王數遣使與書相報答,常遺扶南王純金五十人食器,形如圓盤,又如瓦塸,名爲多羅,受五升,又如碗者,受一升。王亦能作天竺書,書可三千言,說其宿命所由,與佛經相似,並論善事。

돈손 밖 큰 바다 섬 가운데 또 비건국(毗騫國)이 있으니 부남에서 팔천 리다. 전하기를 그 왕은 키가 열두 자에 머리 길이가 석 자며, 예로부터 죽지 않아 나이를 알 수 없다 한다. 왕이 신성하여 나라 사람들의 선악과 앞일을 다 아니, 그래서 감히 속이는 자가 없다. 남방에서 장경왕(長頸王·목 긴 왕)이라 부른다. 나라 풍속은 집과 의복이 있고 멥쌀을 먹는다. 말은 부남과 조금 다르다. 금이 나는 산이 있어 금이 바위 위에 드러나 나니 한이 없다. 나라 법에 죄인을 벌할 때 다 왕 앞에서 그 살을 먹으며, 나라 안에 장사꾼을 받지 않아 가는 자가 있으면 역시 죽여 먹으니 상인들이 감히 이르지 못한다. 왕은 늘 다락에 살며 피 있는 것을 먹지 않고 귀신도 섬기지 않는다. 그 자손은 나고 죽음이 보통 사람 같은데 오직 왕만 죽지 않는다. 부남왕이 자주 사신과 글을 보내 서로 답하는데, 늘 부남왕에게 순금 오십인분 식기를 보내니, 모양이 둥근 소반 같고 또 기와 사발 같은 것은 이름을 다라(多羅)라 하여 닷 되가 들고, 주발 같은 것은 한 되가 든다. 왕은 또 천축 글을 지을 줄 아니 글이 삼천 마디쯤이라, 제 숙명의 유래를 말하는데 불경과 비슷하며 아울러 착한 일을 논한다.

4불 속에 자라는 나무

又傳扶南東界卽大漲海,海中有大洲,洲上有諸薄國,國東有馬五洲。復東行漲海千餘里,至自然大洲。其上有樹生火中,洲左近人剝取其皮,紡績作布,極得數尺以爲手巾,與焦麻無異而色微青黑;若小垢洿,則投火中,復更精潔。或作燈炷,用之不知盡。

또 전하기를 부남 동쪽 지경은 곧 큰 창해요, 바다에 큰 섬이 있고 섬 위에 제박국(諸薄國)이 있으며, 나라 동쪽에 마오주가 있다 한다. 다시 동으로 창해 천여 리를 가면 자연대주(自然大洲)에 이르니, 그 위에 불 속에서 자라는 나무가 있어, 섬 곁 사람들이 그 껍질을 벗겨 자아서 베를 짜니 두어 자면 수건을 만든다. 초마(蕉麻)와 다름없는데 빛이 조금 검푸르며, 조금 때가 타면 불 속에 던지면 다시 정갈해진다. 혹 등잔 심지를 만들면 써도 다할 줄 모른다.

5유엽과 혼전

扶南國俗本裸體,文身被髮,不制衣裳。以女人爲王,號曰柳葉。年少壯健,有似男子。其南有徼國,有事鬼神者字混填,夢神賜之弓,乘賈人舶入海。混填晨起卽詣廟,於神樹下得弓,便依夢乘船入海,遂入扶南外邑。柳葉人衆見舶至,欲取之,混填卽張弓射其舶,穿度一面,矢及侍者,柳葉大懼,舉衆降混填。混填乃教柳葉穿布貫頭,形不復露,遂治其國,納柳葉爲妻,生子分王七邑。其後王混盤況以詐力間諸邑,令相疑阻,因舉兵攻幷之,乃遣子孫中分治諸邑,號曰小王。

부남국 풍속은 본디 벌거벗고 문신하며 머리를 풀고 옷을 짓지 않았다. 여인을 왕으로 삼으니 이름이 유엽(柳葉)이라, 나이 젊고 씩씩하여 남자 같았다. 그 남쪽에 요국(徼國)이 있어 귀신 섬기는 자 혼전(混塡)이 꿈에 신이 활을 내리고 장삿배를 타고 바다에 들라 하니, 혼전이 새벽에 사당에 나아가 신의 나무 아래서 활을 얻고, 곧 꿈대로 배를 타고 바다에 들어 드디어 부남 바깥 읍에 들어갔다. 유엽의 무리가 배가 이른 것을 보고 빼앗으려 하니, 혼전이 곧 활을 당겨 그 배를 쏘아 한 면을 꿰뚫으니 화살이 모시는 자에게 미쳤다. 유엽이 크게 두려워 무리를 들어 혼전에게 항복하였다. 혼전이 이에 유엽에게 베에 구멍을 내어 머리를 꿰게 하니 몸이 다시 드러나지 않았고, 드디어 그 나라를 다스리며 유엽을 아내로 맞아 아들을 낳아 일곱 읍에 나누어 왕 노릇 하게 하였다. 그 뒤 왕 혼반황이 속임수와 힘으로 여러 읍을 이간해 서로 의심하게 하고, 군사를 들어 쳐서 아우른 뒤 자손을 보내 여러 읍을 갈라 다스리게 하니 소왕(小王)이라 불렀다.

6범만의 정복과 신판

盤況年九十餘乃死,立中子盤盤,以國事委其大將范蔓。盤盤立三年死,國人共舉蔓爲王。蔓勇健有權略,復以兵威攻伐旁國,咸服屬之,自號扶南大王。乃治作大船,窮漲海,攻屈都昆、九稚、典孫等十餘國,開地五六千里。次當伐金鄰國,蔓遇疾,遣太子金生代行。蔓姊子旃,時爲二千人將,因篡蔓自立,遣人詐金生而殺之。蔓死時,有乳下兒名長,在民間,至年二十,乃結國中壯士襲殺旃,旃大將范尋又殺長而自立。更繕治國內,起觀閣遊戲之,朝旦中晡三四見客。民人以焦蔗龜鳥爲禮。國法無牢獄。有罪者,先齋戒三日,乃燒斧極赤,令訟者捧行七步。又以金鐶、雞卵投沸湯中,令探取之,若無實者,手卽焦爛,有理者則不。又於城溝中養鰐魚,門外圈猛獸,有罪者,輒以喂猛獸及鰐魚,魚獸不食爲無罪,三日乃放之。鰐大者長二丈餘,狀如鼉,有四足,喙長六七尺,兩邊有齒,利如刀劍,常食魚,遇得麞鹿及人亦噉之,蒼梧以南及外國皆有之。

반황이 아흔 남짓에 죽으니 가운데 아들 반반을 세우고 나랏일을 대장 범만(范蔓)에게 맡겼다. 반반이 선 지 세 해에 죽으니 나라 사람들이 함께 만을 들어 왕으로 삼았다. 만은 용감하고 굳세며 권모가 있어 다시 군사의 위엄으로 곁 나라들을 쳐서 다 복속시키고 스스로 부남대왕이라 이름하였다. 이에 큰 배를 지어 창해를 끝까지 다니며 굴도곤·구치·전손 등 십여 나라를 쳐서 땅을 오륙천 리 열었다. 다음으로 금린국을 치려는데 만이 병들어 태자 금생을 대신 보냈다. 만의 누이 아들 전(旃)이 그때 이천 명 장수였는데, 이에 만을 찬탈해 스스로 서고 사람을 보내 금생을 속여 죽였다. 만이 죽을 때 젖먹이 아들 장(長)이 민간에 있었는데, 스무 살이 되자 나라 안 장사를 모아 전을 습격해 죽이니, 전의 대장 범심(范尋)이 또 장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나라 안을 다시 정비하고 관각을 지어 노닐며 아침·낮·저녁으로 서너 번 손님을 보았다. 백성은 바나나·사탕수수·거북·새를 예물로 하였다. 나라 법에 감옥이 없고, 죄 있는 자는 먼저 사흘을 재계한 뒤 도끼를 벌겋게 달구어 송사하는 자에게 들려 일곱 걸음을 걷게 한다. 또 금가락지와 달걀을 끓는 물에 던져 더듬어 꺼내게 하니, 진실이 없는 자는 손이 곧 문드러지고 이치가 있는 자는 그렇지 않다. 또 성 해자에 악어를 기르고 문밖에 맹수를 가두어, 죄 있는 자를 문득 맹수와 악어에게 먹이니, 물고기와 짐승이 먹지 않으면 무죄라 하여 사흘 만에 놓아준다. 악어는 큰 것이 두 길이 넘어 모양이 자라 같고 네 발이 있으며, 주둥이가 예닐곱 자에 양쪽에 이가 있어 칼날같이 날카로우니, 늘 물고기를 먹지만 노루나 사람을 만나면 또한 삼키니, 창오 남쪽과 바깥 나라에 다 있다.

7가로폭 옷의 유래

吳時,遣中郎康泰、宣化從事朱應使於尋國,國人猶裸,唯婦人著貫頭。泰、應謂曰:「國中實佳,但人褻露可怪耳。」尋始令國內男子著橫幅。橫幅,今干漫也。大家乃截錦爲之,貧者乃用布。

오나라 때 중랑 강태와 선화종사 주응을 범심의 나라에 사신 보냈는데, 나라 사람들이 아직 벌거벗고 오직 부인만 머리 꿰는 옷을 입었다. 태와 응이 「나라가 참 좋은데 사람들이 드러낸 것이 괴이할 뿐이오」 하니, 심이 비로소 나라 안 남자에게 가로폭 천을 입게 하였다. 가로폭은 지금의 간만이다. 큰 집은 비단을 잘라 만들고 가난한 자는 베를 썼다.

8교진여의 새 법

晉武帝太康中,尋始遣使貢獻。穆帝升平元年,王竺旃檀奉表獻馴象。詔曰:「此物勞費不少,駐令勿送。」其後王憍陳如,本天竺婆羅門也。有神語曰「應王扶南」,憍陳如心悅,南至盤盤,扶南人聞之,舉國欣戴,迎而立焉。復改制度,用天竺法。憍陳如死,後王持梨陁跋摩,宋文帝世奉表獻方物。齊永明中,王闍邪跋摩遣使貢獻。

진 무제 태강 연간에 심이 처음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목제 승평 원년에 왕 축전단이 표를 받들고 길들인 코끼리를 바치니, 조서로 「이 물건은 수고와 비용이 적지 않으니 보내지 말게 하라」 하였다. 그 뒤 왕 교진여(憍陳如)는 본디 천축의 바라문인데, 신이 「마땅히 부남에 왕 노릇 하리라」 말하니 교진여가 마음으로 기뻐하며 남으로 반반에 이르렀고, 부남 사람들이 듣고 온 나라가 기뻐 떠받들어 맞아 세웠다. 다시 제도를 고쳐 천축의 법을 썼다. 교진여가 죽고 뒤의 왕 지리타발마가 송 문제 시대에 표를 받들고 방물을 바쳤다. 제 영명 연간에 왕 사야발마가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9안남장군 부남왕

天監二年,跋摩復遣使送珊瑚佛像,幷獻方物。詔曰:「扶南王憍陳如闍邪跋摩,介居海表,世纂南服,厥誠遠著,重譯獻賝。宜蒙酬納,班以榮號。可安南將軍、扶南王。」

천감 이년에 발마가 다시 사신을 보내 산호 불상을 보내고 아울러 방물을 바치니 조서하였다. 「부남왕 교진여 사야발마는 바다 밖에 살면서 대대로 남쪽 복속을 이어, 그 정성이 멀리 드러나고 겹통역으로 보물을 바친다. 마땅히 보답으로 받아들여 영광된 칭호를 반포할지니, 안남장군·부남왕으로 삼는다.」

10부남의 풍속

今其國人皆醜黑,拳髮。所居不穿井,數十家共一池引汲之。俗事天神,天神以銅爲像,二面者四手,四面者八手,手各有所持,或小兒,或鳥獸,或日月。其王出入乘象,嬪侍亦然。王坐則偏踞翹膝,垂左膝至地,以白疊敷前,設金盆香爐於其上。國俗,居喪則剃除鬚髮。死者有四葬:水葬則投之江流,火葬則焚爲灰燼,土葬則瘞埋之,鳥葬則棄之中野。人性貪吝,無禮義,男女恣其奔隨。

지금 그 나라 사람들은 다 못생기고 검으며 곱슬머리다. 사는 데 우물을 파지 않고 수십 집이 못 하나를 함께 써서 길어 마신다. 풍속이 하늘 신을 섬기니, 하늘 신은 구리로 상을 만드는데 얼굴 둘에 손이 넷이거나 얼굴 넷에 손이 여덟이며, 손마다 쥔 것이 있으니 혹 어린아이, 혹 새와 짐승, 혹 해와 달이다. 그 왕은 드나들 때 코끼리를 타며 빈첩과 시종도 그렇다. 왕이 앉을 때는 한쪽으로 걸터앉아 무릎을 세우고 왼 무릎을 땅에 드리우며, 흰 천을 앞에 펴고 금 대야와 향로를 그 위에 놓는다. 나라 풍속에 상을 입으면 수염과 머리를 깎는다. 죽은 이는 네 가지 장사가 있으니, 수장은 강물에 던지고, 화장은 태워 재를 만들고, 토장은 묻고, 조장은 들 가운데 버린다. 사람들 성질이 탐욕스럽고 인색하며 예의가 없고, 남녀가 제멋대로 어울린다.

11부처의 머리카락

十年、十三年,跋摩累遣使貢獻。其年死,庶子留陁跋摩殺其嫡弟自立。十六年,遣使竺當抱老奉表貢獻。十八年,復遣使送天竺旃檀瑞像、婆羅樹葉,幷獻火齊珠、鬱金、蘇合等香。普通元年、中大通二年、大同元年,累遣使瑞獻方物。五年,復遣使獻生犀。又言其國有佛髮,長一丈二尺,詔遣沙門釋雲寶隨使往迎之。

10년과 13년에 발마가 거듭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그해에 죽으니 서자 유타발마가 적통 아우를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16년에 사신 축당포로를 보내 표를 받들고 공물을 바쳤다. 18년에 다시 사신을 보내 천축 전단서상과 바라수 잎을 보내고 아울러 화제주와 울금·소합 등 향을 바쳤다. 보통 원년, 중대통 이년, 대동 원년에 거듭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5년에 다시 사신을 보내 살아 있는 무소를 바치고, 또 그 나라에 부처의 머리카락이 있는데 길이가 한 길 두 자라 말하니, 조서로 사문 석운보를 보내 사신을 따라가 맞아 오게 하였다.

12고조가 얻은 불발

先是,三年八月,高祖改造阿育王寺塔,出舊塔下舍利及佛爪髮。髮青紺色,衆僧以手伸之,隨手長短,放之則旋屈爲蠡形。案《僧伽經》云:「佛髮青而細,猶如藕莖絲。」《佛三昧經》云:「我昔在宮沐頭,以尺量髮,長一丈二尺,放已右旋,還成蠡文。」則與高祖所得同也。

이보다 앞서 3년 8월에 고조가 아육왕사 탑을 고쳐 지으며 옛 탑 아래의 사리와 부처의 손톱과 머리카락을 꺼냈다. 머리카락은 검푸른 빛깔인데, 뭇 승려가 손으로 펴면 손 따라 길고 짧아지고 놓으면 도로 돌아 소라 모양이 되었다. 승가경을 상고하면 「부처의 머리카락은 푸르고 가늘어 연 줄기의 실 같다」 하였고, 불삼매경에 「내 옛날 궁에서 머리를 감고 자로 재니 길이가 한 길 두 자라, 놓으면 오른쪽으로 돌아 도로 소라 무늬가 되었다」 하니, 고조가 얻은 것과 같다.

13아육왕탑의 유래

阿育王卽鐵輪王,王閻浮提,一天下,佛滅度後,一日一夜,役鬼神造八萬四千塔,此卽其一也。吳時有尼居其地,爲小精舍,孫綝尋毀除之,塔亦同泯。吳平後,諸道人復於舊處建立焉。晉中宗初渡江,更脩飾之。至簡文咸安中,使沙門安法師程造小塔,未及成而亡,弟子僧顯繼而修立。至孝武太元九年,上金相輪及承露。

아육왕은 곧 철륜왕이니 염부제 한 천하에 왕 노릇 하였다. 부처가 멸도한 뒤 하루 낮 하룻밤에 귀신을 부려 팔만 사천 탑을 지으니 이것이 그 하나다. 오나라 때 여승이 그 땅에 살며 작은 정사를 지었는데 손침이 이윽고 헐어 없애니 탑도 함께 사라졌다. 오나라가 평정된 뒤 도인들이 다시 옛터에 세웠다. 진 중종(원제)이 처음 강을 건너와 다시 고쳐 꾸몄다. 간문제 함안 연간에 사문 안법사를 시켜 길에서 작은 탑을 짓게 했는데, 미처 이루기 전에 죽으니 제자 승현이 이어 세웠다. 효무제 태원 구년에 이르러 금상륜과 승로를 올렸다.

14혜달이 찾은 사리

其後西河離石縣有胡人劉薩何遇疾暴亡,而心下猶暖,其家未敢便殯,經十日更蘇。說云:「有兩吏見錄,向西北行,不測遠近,至十八地獄,隨報重輕,受諸楚毒。見觀世音語云:『汝緣未盡,若得活,可作沙門。洛下、齊城、丹陽、會稽並有阿育王塔,可往禮拜。若壽終,則不墮地獄。』語竟,如墮高岩,忽然醒寤。」因此出家,名慧達。遊行禮塔,次至丹陽,未知塔處,乃登越城四望,見長千里有異氣色,因就禮拜,果是阿育王塔所,屢放光明。由是定知必有舍利,乃集衆就掘之,入一丈,得三石碑,並長六尺。中一碑有鐵函,函中有銀函,函中又有金函,盛三舍利及爪髮各一枚,髮長數尺。卽遷舍利近北,對簡文所造塔西,造一層塔。十六年,又使沙門僧尚伽爲三層,卽高祖所開者也。初穿土四尺,得龍窟及昔人所舍金銀鐶釧釵鑷等諸雜寶物。可深九尺許,方至石磉,磉下有石函,函內有鐵壺,以盛銀坩,坩內有金鏤罌,盛三舍利,如粟粒大,圓正光潔。

그 뒤 서하 이석현에 유살하라는 호인(胡人)이 병들어 갑자기 죽었는데 심장 밑이 아직 따뜻하여 집에서 감히 염하지 못하더니 열흘 만에 다시 깨어나 말하였다. 「두 아전이 와서 잡아가기에 서북으로 얼마나 먼지 모르게 가서 열여덟 지옥에 이르니, 업보의 무겁고 가벼움에 따라 온갖 고초를 받고 있었다. 관세음을 뵈니 이르시기를 〈네 인연이 아직 다하지 않았으니 살아나거든 사문이 되어라. 낙양·제성·단양·회계에 다 아육왕탑이 있으니 가서 예배하라. 그러면 수명이 다해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으리라〉 하시고, 말씀이 끝나자 높은 바위에서 떨어지듯 하다가 문득 깨어났다.」 이로 인해 출가하니 이름이 혜달(慧達)이다. 다니며 탑에 예배하다가 단양에 이르렀는데 탑 있는 곳을 몰라 월성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니, 장간(長干) 마을에 남다른 기색이 있으므로 나아가 예배하니 과연 아육왕탑 자리라 여러 번 빛을 놓았다. 이로써 반드시 사리가 있는 줄 확실히 알고 무리를 모아 파니, 한 길을 들어가 돌비석 셋을 얻으니 다 길이 여섯 자였다. 가운데 비석에 쇠함이 있고 함 속에 은함, 은함 속에 또 금함이 있어 사리 셋과 손톱과 머리카락 각 하나씩을 담았는데 머리카락 길이가 여러 자였다. 곧 사리를 북쪽 가까이 간문제가 지은 탑 서쪽에 옮겨 한 층 탑을 지었다. 16년에 또 사문 승상가를 시켜 세 층으로 만드니 곧 고조가 연 것이다. 처음 흙을 넉 자 파서 용굴과 옛사람이 시주한 금은 가락지·팔찌·비녀 등 온갖 보물을 얻었다. 아홉 자쯤 깊이에 이르러서야 돌 주춧돌에 닿으니, 주춧돌 아래 돌함이 있고 함 안에 쇠 항아리가 있어 은 단지를 담고, 단지 안에 금실 아로새긴 병이 있어 사리 셋을 담았으니, 좁쌀알만 하고 둥글고 반듯하며 빛나고 깨끗하였다.

15장간사의 사리

函內又有琉璃碗,內得四舍利及髮爪,爪有四枚,並爲沉香色。至其月二十七日,高祖又到寺禮拜,設無导大會,大赦天下。是日,以金缽盛水泛舍利,其最小者隱缽不出,高祖禮數十拜,舍利乃於缽內放光,旋回久之,乃當缽中而止。高祖問大僧正慧念:「今日見不可思議事不?」慧念答曰:「法身常住,湛然不動。」高祖曰:「弟子欲請一舍利還臺供養。」至九月五日,又於寺設無导大會,遣皇太子王侯朝貴等奉迎。是日,風景明和,京師傾屬,觀者百數十萬人。所設金銀供具等物,並留寺供養,並施錢一千萬爲寺基業。至四年九月十五日,高祖又至寺設無导大會,豎二刹,各以金罌,次玉罌,重盛舍利及爪髮,內七寶塔中。又以石函盛寶塔,分入兩刹下,及王侯妃主百姓富室所舍金、銀、鐶、釧等珍寶充積。

함 안에 또 유리 주발이 있어 사리 넷과 머리카락과 손톱을 얻으니, 손톱은 네 개로 다 침향 빛깔이었다. 그달 스무이레에 고조가 또 절에 이르러 예배하고 무애대회를 베풀고 천하에 대사면을 내렸다. 이날 금 주발에 물을 담아 사리를 띄우니 가장 작은 것이 주발에 숨어 나오지 않으므로, 고조가 수십 번 절하니 사리가 이에 주발 안에서 빛을 놓으며 한참을 돌다가 주발 한가운데 멈추었다. 고조가 대승정 혜념에게 「오늘 불가사의한 일을 보았는가」 물으니, 혜념이 「법신은 상주하여 맑아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답하였다. 고조가 「제자는 사리 하나를 청해 대궐에 돌아가 공양하고자 한다」 하였다. 9월 초닷새에 또 절에서 무애대회를 베풀고 황태자와 왕후와 조정 귀인들을 보내 받들어 맞으니, 이날 바람과 볕이 맑고 화창하여 서울이 다 쏠려 구경하는 이가 백수십만이었다. 차린 금은 공양 그릇들은 다 절에 남겨 공양하고 아울러 돈 일천만을 시주해 절의 기업으로 삼았다. 4년 9월 보름에 고조가 또 절에 이르러 무애대회를 베풀고 두 찰(刹)을 세우니, 각각 금 병에 다음 옥 병을 포개어 사리와 손톱·머리카락을 담아 칠보탑 안에 넣고, 또 돌함에 보탑을 담아 두 찰 아래 나누어 넣으니, 왕후와 비주와 백성 부잣집이 시주한 금·은·가락지·팔찌 등 진보가 가득 쌓였다.

16반야경의 방광

十一年十一月二日,寺僧又請高祖于寺發《般若經》題,爾夕二塔俱放光明,敕鎮東將軍邵陵王綸制寺《大功德碑》文。

11년 11월 초이틀에 절 승려들이 또 고조를 청해 절에서 반야경 제목을 강설하게 하니, 그날 저녁 두 탑이 함께 빛을 놓았다. 칙으로 진동장군 소릉왕 륜에게 절의 대공덕비 글을 짓게 하였다.

17무현탑

先是,二年,改造會稽鄮縣塔,開舊塔出舍利,遣光宅寺釋敬脫等四僧及舍人孫照暫迎還台,高祖禮拜竟,卽送還縣,入新塔下,此縣塔亦是劉薩何所得也。

이보다 앞서 2년에 회계 무현탑을 고쳐 지으며 옛 탑을 열어 사리를 꺼내니, 광택사 석경탈 등 네 승려와 사인 손조를 보내 잠시 대궐로 맞아 왔다가, 고조가 예배를 마치자 곧 현으로 돌려보내 새 탑 아래 넣었다. 이 현의 탑도 유살하가 얻은 것이다.

18장간사 금상

晉咸和中,丹陽尹高悝行至張侯橋,見浦中五色光長數尺,不知何怪,乃令人於光處掊視之,得金像,未有光趺。悝乃下車,載像還,至長幹巷首,牛不肯進,悝乃令馭人任牛所之。牛徑牽車至寺,悝因留像付寺僧。每至中夜,常放光明,又聞空中有金石之響。經一歲,捕魚人張係世,於海口忽見有銅花趺浮出水上,係世取送縣,縣以送臺,乃施像足,宛然合。會簡文咸安元年,交州合浦人董宗之采珠沒水,於底得佛光豔,交州押送臺,以施像,又合焉。自咸和中得像,至咸安初,歷三十餘年,光趺始具。

진 함화 연간에 단양윤 고회가 장후교에 이르렀다가 개펄 속 다섯 빛깔 빛이 여러 자 뻗치는 것을 보고, 무슨 괴이인가 하여 사람을 시켜 빛나는 곳을 파 보게 하니 금상(金像)을 얻었는데 광배와 대좌가 없었다. 회가 수레에서 내려 상을 싣고 돌아오는데, 장간 골목 어귀에 이르자 소가 나아가려 하지 않으므로 회가 마부에게 소 가는 대로 맡기게 하니, 소가 수레를 곧장 절로 끌고 갔다. 회가 이에 상을 절 승려에게 맡겼다. 한밤중마다 늘 빛을 놓고 또 공중에서 금석(金石)의 울림이 들렸다. 한 해가 지나 고기잡이 장계세가 바다 어귀에서 문득 구리 꽃 대좌가 물 위에 떠오른 것을 보고 건져 현에 보내니, 현이 대성으로 보내 상의 발에 맞추어 보매 꼭 맞았다. 간문제 함안 원년에 이르러 교주 합포 사람 동종지가 진주를 캐다 물에 잠겨 바닥에서 부처 광배를 얻으니, 교주가 대성으로 압송해 상에 맞추니 또 맞았다. 함화 연간에 상을 얻은 때부터 함안 초까지 삼십여 년 만에 광배와 대좌가 비로소 갖추어졌다.

19다섯 호승과 불상

初,高悝得像後,西域胡僧五人來詣悝,曰:「昔於天竺得阿育王造像,來至鄴下,值胡亂,埋像于河邊,今尋覔失所。」五人嘗一夜俱夢見像曰:「已出江東,爲高悝所得。」悝乃送此五僧至寺,見像噓欷涕泣,像便放光,照燭殿宇。又瓦官寺慧邃欲模寫像形,寺主僧尚慮虧損金色,謂邃曰:「若能令像放光,回身西向,乃可相許。」慧邃便懇到拜請,其夜像卽轉坐放光,回身西向,明旦便許模之。像趺先有外國書,莫有識者,後有三藏𨚗求跋摩識之,云是阿育王爲第四女所造也。及大同中,出舊塔舍利,敕市寺側數百家宅地,以廣寺域,造諸堂殿並瑞像周回閤等,窮於輪奐焉。其圖諸經變,並吳人張繇運手。繇丹青之工,一時冠絕。

처음 고회가 상을 얻은 뒤 서역 호승 다섯 사람이 회를 찾아와 말하였다. 「옛날 천축에서 아육왕이 지은 상을 얻어 업 땅에 이르렀다가 호(胡)의 난을 만나 상을 강가에 묻었는데, 이제 찾으니 자리를 잃었습니다.」 다섯 사람이 일찍이 한밤 꿈에 상이 「이미 강동에 나와 고회가 얻은 바 되었다」 하는 것을 다 함께 보았다는 것이다. 회가 이에 다섯 승려를 절로 데려가니, 상을 보고 흐느껴 눈물 흘리매 상이 곧 빛을 놓아 전각을 비추었다. 또 와관사 혜수가 상의 모습을 본떠 그리려 하니, 주지 승상이 금빛이 상할까 염려하여 「상이 빛을 놓고 몸을 돌려 서쪽을 향하게 할 수 있다면 허락하마」 하니, 혜수가 간곡히 절하며 청하니 그 밤에 상이 곧 자리를 돌려 빛을 놓으며 몸을 돌려 서쪽을 향하므로, 이튿날 아침 본뜨기를 허락하였다. 상의 대좌에 본디 외국 글이 있어 아는 이가 없더니, 뒤에 삼장 나구발마가 알아보고 아육왕이 넷째 딸을 위해 지은 것이라 하였다. 대동 연간에 이르러 옛 탑 사리를 꺼내고, 칙으로 절 곁 수백 집의 집터를 사서 절 지경을 넓히고 여러 당전과 서상 주회각 등을 지으니 아름다움이 지극하였다. 여러 경변(經變)을 그린 것은 다 오나라 사람 장요의 솜씨니, 요의 그림 솜씨는 한때의 으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