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高句驪
1동명에서 나온 나라
高句驪者,其先出自東明。東明本北夷橐離王之子。離王出行,其侍兒於後任娠,離王還,欲殺之。侍兒曰:「前見天上有氣如大雞子,來降我,因以有娠。」王囚之,後遂生男。王置之豕牢,豕以口氣噓之,不死,王以爲神,乃聽收養。長而善射,王忌其猛,復欲殺之,東明乃奔走,南至淹滯水,以弓擊水,魚鱉皆浮爲橋,東明乘之得渡,至夫餘而王焉。其後支別爲句驪種也。其國,漢之玄菟郡也,在遼東之東,去遼東千里。漢、魏世,南與朝鮮、穢貃,東與沃沮,北與夫餘接。漢武帝元封四年,滅朝鮮,置玄菟郡,以高句驪爲縣以屬之。
고구려는 그 선조가 동명에게서 나왔다. 동명은 본디 북이(北夷) 탁리왕의 아들이다. 리왕이 출행한 사이 모시는 아이가 뒤에서 아기를 배니, 리왕이 돌아와 죽이려 하였다. 아이가 「지난번 하늘 위에 큰 달걀 같은 기운이 있어 내게 내려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로 인해 아기를 배었습니다」 하니, 왕이 가두었는데 뒤에 드디어 아들을 낳았다. 왕이 돼지우리에 두니 돼지가 입김을 불어 죽지 않으매, 왕이 신령하다 여겨 거두어 기르기를 들어주었다. 자라서 활을 잘 쏘니 왕이 그 용맹을 꺼려 다시 죽이려 하매, 동명이 이에 달아나 남으로 엄체수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다 떠올라 다리가 되어, 동명이 타고 건너 부여에 이르러 왕 노릇 하였다. 그 뒤 갈래가 나뉜 것이 구려의 씨족이다. 그 나라는 한나라의 현도군이니 요동의 동쪽에 있어 요동에서 천 리다. 한·위 시대에 남으로 조선·예맥, 동으로 옥저, 북으로 부여와 접하였다. 한 무제 원봉 사년에 조선을 멸하고 현도군을 두어 고구려를 현으로 삼아 붙였다.
2환도 아래의 나라
句驪地方可二千里,中有遼山,遼水所出。其王都於丸都之下,多大山深谷,無原澤,百姓依之以居,食澗水。雖土著,無良田,故其俗節食。好治宮室,于所居之左立大屋,祭鬼神,又祠零星、社稷。人性凶急,喜寇抄。其官,有相加、對盧、沛者、古鄒加、主簿、優臺、使者、皁衣先人,尊卑各有等級。言語諸事,多與夫餘同,其性氣、衣服有異。本有五族,有消奴部、絕奴部、慎奴部、雚奴部、桂婁部。本消奴部爲王,微弱,桂婁部代之。漢時賜衣幘、朝服、鼓吹,常從玄菟郡受之。後稍驕,不復詣郡,但於東界築小城以受之,至今猶名此城爲幘溝婁。「溝婁」者,句驪名「城」也。其置官,有對盧則不置沛者,有沛者則不置對盧。其俗喜歌儛,國中邑落男女,每夜羣聚歌戲。其人潔清自喜,善藏釀,跪拜申一腳,行步皆走。以十月祭天大會,名曰「東明」。其公會衣服,皆錦繡金銀以自飾。大加、主簿頭所著似幘而無後;其小加著折風,形如弁。
구려는 땅이 사방 이천 리쯤이요 가운데 요산이 있으니 요수가 나오는 곳이다. 그 왕은 환도 아래 도읍한다. 큰 산과 깊은 골이 많고 벌판과 못이 없어, 백성이 산골에 의지해 살며 시냇물을 마신다. 토착하나 좋은 밭이 없으므로 그 풍속에 먹기를 아낀다. 궁실 꾸미기를 좋아하여, 사는 곳 왼쪽에 큰 집을 세워 귀신에게 제사하고 또 영성과 사직에 제사한다. 사람들 성질이 사납고 급하며 노략질을 즐긴다. 벼슬에 상가·대로·패자·고추가·주부·우태·사자·조의선인이 있어 높낮이에 저마다 등급이 있다. 말과 여러 일이 부여와 같은 것이 많은데 성질과 기질과 옷은 다름이 있다. 본디 다섯 족속이 있으니 소노부·절노부·신노부·관노부·계루부다. 본디 소노부가 왕 노릇 했는데 미약해져 계루부가 대신하였다. 한나라 때 옷과 두건과 조복과 고취를 내리면 늘 현도군에서 받았는데, 뒤에 차츰 교만해져 다시 군에 가지 않고 동쪽 지경에 작은 성을 쌓아 받으니, 지금도 이 성을 책구루라 이름한다. 「구루」란 구려말로 성이다. 벼슬을 둘 때 대로가 있으면 패자를 두지 않고 패자가 있으면 대로를 두지 않는다. 풍속이 노래와 춤을 즐겨 나라 안 읍락의 남녀가 밤마다 떼 지어 모여 노래하며 논다. 사람들이 깨끗함을 스스로 즐기고 술 빚어 갈무리하기를 잘한다. 꿇어 절할 때 한 다리를 펴며, 걸음걸이는 다 달음질이다. 시월에 하늘에 제사하는 큰 모임을 「동맹(東明)」이라 이름한다. 공적인 모임의 의복은 다 비단과 금은으로 스스로 꾸민다. 대가와 주부는 머리에 두건 비슷하나 뒤가 없는 것을 쓰고, 소가는 절풍을 쓰니 모양이 고깔 같다.
3감옥 없는 법
其國無牢獄,有罪者,則會諸加評議殺之,沒入妻子。其俗好淫,男女多相奔誘。已嫁娶,便稍作送終之衣。其死葬,有槨無棺。好厚葬,金銀財幣盡於送死。積石爲封,列植松柏。兄死妻嫂。其馬皆小,便登山。國人尚氣力,便弓矢刀矛。有鎧甲,習戰鬬,沃沮、東穢皆屬焉。
그 나라에는 감옥이 없어, 죄 있는 자는 제가(諸加)들이 모여 평의하여 죽이고 처자를 몰수한다. 풍속이 음란함을 좋아하여 남녀가 서로 어울려 꾀는 일이 많다. 혼인을 마치면 곧 조금씩 죽어서 입고 갈 옷을 짓는다. 장사에는 곽은 있고 관은 없다. 후하게 장사하기를 좋아하여 금은 재물을 죽은 이 보내는 데 다 쓴다. 돌을 쌓아 봉분을 하고 소나무 잣나무를 줄지어 심는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다. 말은 다 작아 산에 오르기 좋다. 나라 사람들이 기력을 숭상하며 활·화살·칼·창에 익숙하고 갑옷이 있어 싸움을 익히니, 옥저와 동예가 다 붙었다.
4한나라에서 위나라까지
王莽初,發高驪兵以伐胡,不欲行,強迫遣之,皆亡出塞爲寇盜。州郡歸咎於句驪侯騶,嚴尤誘而斬之,王莽大悅,更名高句驪爲下句驪,當此時爲侯矣。光武八年,高句驪王遣使朝貢,始稱王。至殤、安之間,其王名宮,數寇遼東,玄菟太守蔡風討之不能禁。宮死,子伯固立。順、和之間,復數犯遼東寇抄。靈帝建寧二年,玄菟太守耿臨討之,斬首虜數百級,伯固乃降屬遼東。公孫度之雄海東也,伯固與之通好。伯固死,子伊夷摸立。伊夷摸自伯固時已數寇遼東,又受亡胡五百餘戶。建安中,公孫康出軍擊之,破其國,焚燒邑落,降胡亦叛伊夷摸,伊夷摸更作新國。其後伊夷摸復擊玄菟,玄菟與遼東合擊,大破之。
왕망 초에 고려 군사를 내어 호를 치게 했는데 가려 하지 않으니 억지로 보내매 다 도망해 새외로 나가 도적이 되었다. 주군이 허물을 구려후 추에게 돌리니 엄우가 꾀어 목을 베었다. 왕망이 크게 기뻐하며 고구려를 하구려로 이름을 고치니, 이때는 후(侯)였다. 광무제 8년에 고구려왕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비로소 왕을 일컬었다. 상제·안제 사이에 그 왕 궁이 자주 요동을 노략하니 현도태수 채풍이 쳤으나 막지 못했다. 궁이 죽고 아들 백고가 즉위하였다. 순제·환제 사이에 다시 자주 요동을 범해 노략하였다. 영제 건녕 이년에 현도태수 경림이 쳐서 수백 급을 베니 백고가 이에 항복해 요동에 붙었다. 공손탁이 해동에서 웅거하자 백고가 통호하였다. 백고가 죽고 아들 이이모가 즉위하였다. 이이모는 백고 때부터 이미 자주 요동을 노략했고 또 도망한 호 오백여 호를 받아들였다. 건안 연간에 공손강이 군사를 내어 쳐서 그 나라를 깨뜨리고 읍락을 불사르니, 항복했던 호도 이이모를 배반하매 이이모가 새 나라를 다시 세웠다. 그 뒤 이이모가 다시 현도를 치니 현도가 요동과 합쳐 쳐서 크게 깨뜨렸다.
5위궁과 관구검
伊夷摸死,子位宮立。位宮有勇力,便鞍馬,善射獵。魏景初二年,遣太傅司馬宣王率衆討公孫淵,位宮遣主簿、大加將兵千人助軍。正始三年,位宮寇西安、嘉平。五年,幽州刺史母丘儉將萬人出玄菟討位宮,位宮將步騎二萬人逆軍,大戰於沸流。位宮敗走,儉軍追至峴,懸車束馬,登丸都山,屠其所都,斬首虜萬餘級。位宮單將妻息遠竄。六年,儉復討之,位宮輕將諸加奔沃沮,儉使將軍王頎追之,絕沃沮千餘里,到肅慎南界,刻石紀功;又到丸都山,銘不耐城而還。其後,復通中夏。
이이모가 죽고 아들 위궁이 즉위하였다. 위궁은 용력이 있고 말타기에 익숙하며 사냥을 잘하였다. 위 경초 이년에 태부 사마선왕을 보내 무리를 거느리고 공손연을 치니, 위궁이 주부와 대가에게 군사 천 명을 거느리고 군사를 돕게 하였다. 정시 삼년에 위궁이 서안평을 노략하고, 5년에 유주자사 관구검이 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로 나와 위궁을 치니, 위궁이 보병과 기병 이만으로 맞아 비류에서 크게 싸웠다. 위궁이 패해 달아나니 검의 군사가 재까지 쫓아가 수레를 매달고 말을 묶어 환도산에 올라 그 도읍을 도륙하고 만여 급을 베고 사로잡았다. 위궁이 홀로 처자를 데리고 멀리 달아났다. 6년에 검이 다시 치니 위궁이 가벼운 차림으로 제가를 거느리고 옥저로 달아나매, 검이 장군 왕기를 시켜 쫓아 옥저를 천여 리 지나 숙신 남쪽 지경에 이르러 돌에 공을 새기고, 또 환도산에 이르러 불내성에 새기고 돌아왔다. 그 뒤 다시 중하와 통했다.
6고련 백 년과 양나라
晉永嘉亂,鮮卑慕容廆據昌黎大棘城,元帝授平州刺史。句驪王乙弗利頻寇遼東,廆不能制。弗利死,子釗代立。康帝建元元年,慕容廆子晃率兵伐之,釗與戰,大敗,單馬奔走。晃乘勝追至丸都,焚其宮室,掠男子五萬餘口以歸。孝武太元十年,句驪攻遼東、玄菟郡,後燕慕容垂遣弟農伐句驪,復二郡。垂死,子寶立,以句驪王安爲平州牧,封遼東、帶方二國王。安始置長史、司馬、參軍官,後略有遼東郡。至孫高璉,晉安帝義熙中,始奉表通貢職,歷宋、齊並授爵位,年百餘歲死。子雲,齊隆昌中,以爲使持節、散騎常侍、都督營、平二州、征東大將軍、樂浪公。高祖卽位,進雲車騎大將軍。天監七年,詔曰:「高驪王樂浪郡公雲,乃誠款著,貢驛相尋,宜隆秩命,式弘朝典。可撫東大將軍、開府儀同三司,持節、常侍、都督、王並如故。」十一年、十五年,累遣使貢獻。十七年,雲死,子安立。普通元年,詔安纂襲封爵,持節、督營、平二州諸軍事、寧東將軍。七年,安卒,子延立,遣使貢獻,詔以延襲爵。中大通四年、六年,大同元年、七年,累奉表獻方物。太清二年,延卒,詔以其子襲延爵位。
진 영가의 난에 선비 모용외가 창려 대극성에 웅거하니 원제가 평주자사를 주었다. 구려왕 을불리가 자주 요동을 노략했으나 외가 제어하지 못했다. 불리가 죽고 아들 쇠가 대신 즉위하였다. 강제 건원 원년에 모용외의 아들 황이 군사를 거느리고 치니, 쇠가 싸우다 크게 패해 홑말로 달아났다. 황이 이긴 김에 환도까지 쫓아가 궁실을 불사르고 남자 오만여 명을 노략해 돌아갔다. 효무제 태원 십년에 구려가 요동·현도군을 치니, 후연 모용수가 아우 농을 보내 구려를 쳐서 두 군을 회복하였다. 수가 죽고 아들 보가 서서 구려왕 안을 평주목으로 삼고 요동·대방 두 나라 왕에 봉하였다. 안이 처음 장사·사마·참군 벼슬을 두고 뒤에 요동군을 차지하였다. 손자 고련(장수왕)에 이르러 진 안제 의희 연간에 처음 표를 받들어 공직을 통하니, 송·제를 지나며 다 작위를 받았고 나이 백여 살에 죽었다. 아들 운(문자명왕)은 제 융창 연간에 사지절·산기상시·도독영평이주·정동대장군·낙랑공으로 삼았다. 고조가 즉위하여 운을 거기대장군으로 올리고, 천감 칠년에 조서하였다. 「고려왕 낙랑군공 운은 정성이 드러나고 공물 사신이 잇달으니, 마땅히 벼슬을 높여 조정의 법도를 넓힐지라, 무동대장군·개부의동삼사로 삼고 지절·상시·도독·왕은 다 예전대로 한다.」 11년과 15년에 거듭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17년에 운이 죽고 아들 안(안장왕)이 즉위하였다. 보통 원년에 조서로 안이 봉작을 이어받게 하고 지절·독영평이주제군사·영동장군으로 삼았다. 7년에 안이 죽고 아들 연(안원왕)이 서서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니 조서로 연이 작위를 잇게 하였다. 중대통 사년·6년, 대동 원년·7년에 거듭 표를 받들고 방물을 바쳤다. 태청 이년에 연이 죽으니 조서로 그 아들이 연의 작위를 잇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