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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百濟

양서 제이전 梁書 諸夷傳 · 요사렴(姚思廉) · 636년 (당 정관 10) · 단락 2 · 한자 544자 · 낭독 2.2분

「양서 제이전」 한 권 「백제」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남조 양나라가 본 서른여섯 나라. 무령왕이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알린 표문, 신라가 처음 제 이름으로 등장하는 기록, 부처의 머리카락과 아육왕탑 이야기, 그리고 부상국·여인국 같은 바다 끝 전설까지 — 남해에서 서역까지 가장 폭넓은 제이전이다.

1백제의 계보

百濟者,其先東夷有三韓國,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弁韓、辰韓各十二國,馬韓有五十四國。大國萬餘家,小國數千家,總十餘萬戶,百濟卽其一也。後漸強大,兼諸小國。其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晉世句驪旣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自置百濟郡。晉太元中,王須;義熙中,王餘映;宋元嘉中,王餘毗;並遣獻生口。餘毗死,立子慶。慶死,子牟都立。都死,立子牟太。齊永明中,除太都督百濟諸軍事、鎮東大將軍、百濟王。天監元年,進太號征東將軍。尋爲高句驪所破,衰弱者累年,遷居南韓地。普通二年,王餘隆始復遣使奉表,稱「累破句驪,今始與通好」,而百濟更爲強國。其年,高祖詔曰:「行都督百濟諸軍事、鎮東大將軍、百濟王餘隆,守籓海外,遠脩貢職,乃誠款到,朕有嘉焉。宜率舊章,授茲榮命。可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百濟王。」五年,隆死,詔復以其子明爲持節、督百濟諸軍事、綏東將軍、百濟王。號所治城曰固麻,謂邑曰簷魯,如中國之言郡縣也。

백제는 그 선조가 동이의 삼한국이니, 하나는 마한, 둘은 진한, 셋은 변한이다. 변한과 진한은 각각 열두 나라요 마한은 쉰네 나라다. 큰 나라는 만여 집, 작은 나라는 수천 집으로 모두 십여만 호니 백제가 곧 그 하나다. 뒤에 차츰 강대해져 여러 작은 나라를 아울렀다. 그 나라는 본디 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에 있었는데, 진(晉)나라 시대에 구려가 요동을 차지하자 백제도 요서·진평 두 군 땅을 차지하고 스스로 백제군을 두었다. 진 태원 연간에 왕 수(근구수왕)가, 의희 연간에 왕 여영(전지왕)이, 송 원가 연간에 왕 여비(비유왕)가 다 생구를 바쳤다. 여비가 죽고 아들 경(개로왕)을 세웠다. 경이 죽고 아들 모도가 서고, 도가 죽고 아들 모태(동성왕)를 세웠다. 제 영명 연간에 태를 도독백제제군사·진동대장군·백제왕에 제수하였다. 천감 원년에 태의 호를 정동장군으로 올렸다. 이윽고 고구려에게 깨져 여러 해 쇠약하더니 남한(南韓) 땅으로 옮겨 살았다. 보통 이년에 왕 여륭(무령왕)이 비로소 다시 사신을 보내 표를 받들어 「여러 번 구려를 깨뜨려 이제 비로소 우호를 통한다」 하니,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었다. 그해에 고조가 조서하였다. 「행도독백제제군사·진동대장군 백제왕 여륭은 바다 밖에서 번국을 지키며 멀리 직공을 닦아 정성이 지극하니 짐이 가상히 여긴다. 마땅히 옛 법을 따라 이 영광된 명을 줄지니,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영동대장군·백제왕으로 삼는다.」 5년에 융이 죽으니 조서로 다시 그 아들 명(성왕)을 지절·독백제제군사·수동장군·백제왕으로 삼았다. 다스리는 성을 고마(固麻)라 부르고 읍을 담로(簷魯)라 이르니 중국말의 군현과 같다.

2스물두 담로와 후경의 난

其國有二十二簷魯,皆以子弟宗族分據之。其人形長,衣服淨潔。其國近倭,頗有文身者。今言語服章略與高驪同,行不張拱、拜不申足則異。呼帽曰冠,襦曰複衫,袴曰褌。其言參諸夏,亦秦、韓之遺俗云。中大通六年、大同七年,累遣使獻方物;幷請《涅盤》等經義、《毛詩》博士,幷工匠、畫師等,敕並給之。太清三年,不知京師寇賊,猶遣使貢獻;旣至,見城闕荒毀,並號慟涕泣。侯景怒,囚執之,及景平,方得還國。

그 나라에 스물두 담로가 있으니 다 자제와 종족을 나누어 웅거하게 한다. 그 사람들은 키가 크고 의복이 깨끗하다. 나라가 왜와 가까워 문신한 이가 제법 있다. 지금 말과 복장은 대략 고려와 같은데, 걸을 때 두 손을 모으지 않고 절할 때 다리를 펴지 않는 것은 다르다. 모자를 관(冠)이라 부르고 저고리를 복삼, 바지를 곤이라 한다. 그 말에는 중국말이 섞였으니 또한 진한·한(秦韓)의 남은 풍속이라 한다. 중대통 육년과 대동 칠년에 거듭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치고, 아울러 열반경 등의 경의(經義)와 모시박사와 공장(工匠)·화사(畫師) 등을 청하니 칙으로 다 주었다. 태청 삼년에 서울에 도적(후경의 난)이 든 줄 모르고 여전히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는데, 이르러 성궐이 황폐한 것을 보고 다 소리 내어 울며 눈물 흘렸다. 후경이 노하여 잡아 가두니, 경이 평정되고서야 나라에 돌아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