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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국河南國

양서 제이전 梁書 諸夷傳 · 요사렴(姚思廉) · 636년 (당 정관 10) · 단락 3 · 한자 575자 · 낭독 2.3분

「양서 제이전」 한 권 「하남국」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남조 양나라가 본 서른여섯 나라. 무령왕이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알린 표문, 신라가 처음 제 이름으로 등장하는 기록, 부처의 머리카락과 아육왕탑 이야기, 그리고 부상국·여인국 같은 바다 끝 전설까지 — 남해에서 서역까지 가장 폭넓은 제이전이다.

1하남왕의 땅

河南王者,其先出自鮮卑慕容氏。初,慕容奕洛干有二子,庶長曰吐谷渾,嫡曰廆。洛干卒,廆嗣位,吐谷渾避之西徙。廆追留之,而牛馬皆西走,不肯還,因遂徙上隴,度枹罕,出涼州西南,至赤水而居之。其地則張掖之南,隴西之西,在河之南,故以爲號。其界東至壘川,西鄰于闐,北接高昌,東北通秦嶺,方千餘里,蓋古之流沙地焉。乏草木,少水潦,四時恒有冰雪,唯六七月雨雹甚盛;若晴則風飄沙礫,常蔽光景。其地有麥無穀。有青海方數百里,放牝馬其側,輒生駒,土人謂之龍種,故其國多善馬。有屋宇,雜以百子帳,卽穹廬也。著小袖袍、小口袴、大頭長裙帽。女子披髮爲辮。

하남왕(河南王)은 그 선조가 선비 모용씨에서 나왔다. 처음 모용혁락간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서출 맏이는 토욕혼이요 적자는 외였다. 낙간이 죽고 외가 자리를 이으니 토욕혼이 피하여 서쪽으로 옮겼다. 외가 뒤쫓아 붙들었으나 소와 말이 다 서쪽으로 달리며 돌아오려 하지 않으므로, 드디어 상롱으로 옮겨 포한을 지나 양주 서남으로 나가 적수에 이르러 살았다. 그 땅은 장액의 남쪽, 농서의 서쪽으로 황하의 남쪽에 있으므로 그로써 이름을 삼았다. 그 지경은 동으로 첩천에 이르고 서로 우전과 이웃하며 북으로 고창에 접하고 동북으로 진령에 통하니 사방 천여 리라, 대개 옛 유사(流沙) 땅이다. 풀과 나무가 모자라고 물이 적으며 사철 늘 얼음과 눈이 있는데 오직 유칠월에 우박이 몹시 심하다. 개면 바람이 모래와 자갈을 날려 늘 볕을 가린다. 그 땅에는 보리가 있고 조가 없다. 청해(靑海)가 있어 사방 수백 리니, 암말을 그 곁에 놓아두면 문득 망아지를 낳으므로 땅 사람들이 용종(龍種)이라 이르니, 그래서 그 나라에 좋은 말이 많다. 집이 있으나 백자장(百子帳)을 섞어 쓰니 곧 궁려(穹廬·천막)다. 작은 소매 도포와 통 좁은 바지에 머리 큰 긴 치마 모자를 쓴다. 여자는 머리를 풀어 땋는다.

2토욕혼의 나라 이름

其後吐谷渾孫葉延,頗識書記,自謂曾祖奕洛干始封昌黎公,吾蓋公孫之子也。禮以王父字爲國氏,因姓吐谷渾,亦爲國號。至其末孫阿豺,始受中國官爵。弟子慕延,宋元嘉末又自號河南王。慕延死,從弟拾寅立,乃用書契,起城池,築宮殿,其小王並立宅。國中有佛法。拾寅死,子度易侯立;易侯死,子休留代立。齊永明中,以代爲使持節、都督西秦、河、沙三州、鎮西將軍、護羌校尉、西秦、河二州刺史。

그 뒤 토욕혼의 손자 엽연이 자못 글을 알아, 스스로 이르기를 증조 혁락간이 처음 창려공에 봉해졌으니 나는 공손(公孫)의 아들이라, 예에 왕부(王父)의 자로 나라 씨를 삼는다 하여 토욕혼을 성으로 삼고 또한 나라 이름으로 하였다. 말손 아시(阿豺)에 이르러 처음 중국의 관작을 받았다. 아우의 아들 모연은 송 원가 말에 또 스스로 하남왕이라 이름하였다. 모연이 죽고 사촌아우 습인이 서니, 이에 문서를 쓰고 성지를 세우고 궁전을 지었으며 그 소왕들도 다 집을 지었다. 나라 안에 불법이 있다. 습인이 죽고 아들 탁역후가 즉위하고, 역후가 죽고 아들 휴류대가 대신 즉위하였다. 제 영명 연간에 대를 사지절·도독서진하사삼주·진서장군·호강교위·서진하이주자사로 삼았다.

3양나라와의 왕래

梁興,進代爲征西將軍。代死,子休運籌襲爵位。天監十三年,遣使獻金裝馬腦鐘二口,又表於益州立九層佛寺,詔許焉。十五年,又遣使獻赤舞龍駒及方物。其使或歲再三至,或再歲一至。其地與益州鄰,常通商賈,民慕其利,多往從之,教其書記,爲之辭譯,稍桀黠矣。普通元年,又奉獻方物。籌死,子呵羅真立。大通三年,詔以爲寧西將軍、護羌校尉、西秦、河二州刺史。真死,子佛輔襲爵位,其世子又遣使獻白龍駒於皇太子。

양나라가 일어나자 대를 정서장군으로 올렸다. 대가 죽고 아들 휴운주가 작위를 이었다. 천감 십삼년에 사신을 보내 금장식 마노 종 두 구를 바치고, 또 표로 익주에 아홉 층 불사를 세우기를 청하니 조서로 허락하였다. 15년에 또 사신을 보내 붉은 춤추는 용마와 방물을 바쳤다. 그 사신이 혹 한 해에 두세 번 이르고 혹 두 해에 한 번 이르렀다. 그 땅은 익주와 이웃하여 늘 장사가 통하니, 백성이 그 이익을 사모하여 많이 가서 따르며 글을 가르치고 통역이 되어 주니 차츰 약아졌다. 보통 원년에 또 방물을 바쳤다. 주가 죽고 아들 가라진이 즉위하였다. 대통 삼년에 조서로 영서장군·호강교위·서진하이주자사로 삼았다. 진이 죽고 아들 불보가 작위를 이으니, 그 세자가 또 사신을 보내 흰 용마 망아지를 황태자께 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