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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에 부치는 글序

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 · 이규보(李奎報) · 1241년 (고려 고종 28) 엮음 · 1251년 고쳐 보탬 · 단락 1 · 한자 564자 · 낭독 5.4분

동국이상국집 전집 서 고려 이규보가 평생 지은 글을 아들 이함이 1241년에 엮어 새기고, 손자 이익배가 1251년에 고쳐 보탠 문집. 시와 부, 임금께 올린 표와 전, 절과 탑에 붙인 기, 비명과 묘지명, 편지와 서문, 그리고 몽골이 쳐들어온 때에 오간 국서까지 담겼다. 고구려 시조를 노래한 「동명왕편」이 전집 권3에 있고, 술과 거문고와 시를 벗 삼아 스스로 백운거사라 한 사람의 하루하루가 후집에 남아 있다. 책은 그가 눈을 앓다 붓을 놓는 마지막 시와, 그가 죽은 뒤 남이 지어 붙인 뇌서·묘지명으로 닫힌다.

公姓李,諱奎報,字春卿。始名仁氐,夢奎星報異瑞因改之。九歲,能屬文,時號奇童。稍長,經史、百家、佛書、道秩,無不遍閱,一覽輒記。爲詩文,略不蹈古人畦徑,以詩捷稱。王公大人聞其能,邀致之請賦難狀之物,令每句唱強韻。若古若律,走筆立成,風檣陣馬,不足況其速也。方未冠時,有吳先生世才者,世所謂名儒,平生小許可人,一見奇之,許以忘年。人或非之曰:「先生長於李三十餘年矣,何媟此頑孺子,使之驕耶?」先生曰:「非爾輩所知也。此子非常人,後必遠到矣。」少放曠,自號爲「白雲居士」。酣飮賦詩爲事,人不以經濟待之。無何,名振海外,獨步三韓,翺翔玉堂,出入鳳池,王言帝誥高文大冊,皆出一手,不十年,位至台鼎,則吳之知人,信矣。何一吳先生知公遠到,而衆莫之知也。當公之擁金紫立朝端,珠瞳雪髭,輝映人物。左右皆指之曰人中龍,其奇資偉望,不類於常者如此。自作相來,屹立爲正直大臣,人無間言者。然則公之初不自檢束,特謔浪翫世耳,晚年,嗜讀洗心經,窮大衍之數,古之人云『通天地曰儒』,公之謂歟。於丁酉歲,固乞退,以金紫光祿大夫、守大保、門下侍郞平章事、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判禮部翰林院事、大子大保致仕。雖家居,外國交聘徵誥文字,皆委之,以是眷遇不衰,每受俸,多小與現官宰輔相等。其平生所著,不蓄一紙,嗣子監察御史涵,收拾萬分之一。得古賦、古律詩、牋表、碑銘、雜文幷若干首,請爲文集,公可其請,分爲四十一卷,號曰《東國李相國文集》。涵又請曰:「集已成矣,不可無序。」於是公乃命予,予固不才,亦諸子之伍,莫敢以冠首爲讓,公命益勤,姑序一二。辛丑八月日,入內侍朝散大夫、尙書禮部侍郞、直寶文閣、太子文學李需,序。

공의 성은 이씨요 이름은 규보(奎報), 자는 춘경(春卿)이다. 처음 이름은 인저(仁氐)였는데 꿈에 규성(奎星)이 남다른 조짐을 알려 준 까닭에 고쳤다. 아홉 살에 글을 지을 줄 알아 그때 사람들이 기동(奇童)이라 불렀다. 조금 자라서는 경서와 사서, 제자백가, 불경과 도가의 책을 두루 읽지 않은 것이 없었고 한 번 보면 곧 외웠다. 시와 글을 지을 때 옛사람이 낸 길을 조금도 밟지 않았고 시를 빨리 짓는 것으로 일컬어졌다. 왕공과 대인들이 그 재주를 듣고 불러들여 형용하기 어려운 것을 읊게 하고 구절마다 어려운 운을 불러 주었다. 고시든 율시든 붓을 달려 그 자리에서 이루니, 바람 받은 돛과 진을 치고 달리는 말로도 그 빠름을 견주기에 모자랐다.

아직 관례를 올리기 전에 오세재(吳世才) 선생이라는 이가 있었다. 세상에서 이름난 선비라 일컫는 이로 평생 남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았는데, 한 번 보고 기이하게 여겨 나이를 잊은 벗으로 삼았다. 어떤 이가 이를 나무라 말하였다. 「선생은 이 아이보다 서른 해 넘게 위이신데 어찌 이 미련한 아이와 스스럼없이 어울려 교만하게 만드십니까.」 선생이 말하였다. 「너희가 알 바가 아니다. 이 아이는 예사 사람이 아니니 뒷날 반드시 멀리 이를 것이다.」

젊어서는 거리낌이 없어 스스로 백운거사(白雲居士)라 하였다. 흠뻑 마시고 시 짓는 것을 일로 삼으니 사람들이 세상을 다스릴 재목으로 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이름이 바다 밖까지 떨쳐 삼한(三韓)에 견줄 이가 없었다. 옥당(玉堂)에 날아오르고 봉지(鳳池)를 드나들며 임금의 말씀과 조서, 높은 글과 큰 문서가 모두 한 손에서 나왔다. 열 해가 못 되어 자리가 재상에 이르렀으니 오 선생이 사람을 알아본 것이 참으로 미더웠다. 어찌하여 오직 오 선생만 공이 멀리 이를 것을 알고 뭇사람은 알지 못하였는가.

공이 금자(金紫)를 두르고 조정의 맨 앞에 섰을 때 구슬 같은 눈동자와 눈처럼 흰 수염이 사람들 가운데 환히 비쳤다. 둘레에서 모두 가리켜 「사람 가운데 용」이라 하였으니, 그 남다른 바탕과 큰 명망이 예사 사람과 같지 않음이 이러하였다. 재상이 된 뒤로는 우뚝 서서 곧은 대신이 되니 헐뜯는 말을 하는 이가 없었다. 그렇다면 공이 처음에 스스로를 단속하지 않은 것은 다만 우스개로 세상을 희롱한 것일 뿐이다. 늘그막에는 세심경(洗心經) 읽기를 즐기고 대연(大衍)의 수를 끝까지 따졌다. 옛사람이 「하늘과 땅에 두루 통하는 이를 유(儒)라 한다」 하였으니 공을 두고 이름인가.

정유년에 굳이 물러나기를 빌어 금자광록대부 수태보 문하시랑 평장사 수문전 대학사 감수국사 판예부한림원사 태자태보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집에 있으면서도 다른 나라와 주고받는 글과 임금이 부르는 조서의 글을 모두 공에게 맡겼다. 그런 까닭에 임금의 돌보심이 시들지 않아 녹을 받을 때마다 그 많고 적음이 지금 자리에 있는 재상들과 같았다.

공이 평생 지은 글은 한 장도 쌓아 두지 않았는데, 대를 이은 아들 감찰어사 함(涵)이 만분의 하나를 거두어 모았다. 고부와 고시·율시, 전과 표, 비명, 잡문 몇 편을 얻어 문집으로 엮기를 청하니 공이 그 청을 들어주었다. 마흔한 권으로 나누고 『동국이상국문집』이라 이름하였다. 함이 또 청하였다. 「문집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서문이 없을 수 없습니다.」 이에 공이 나에게 명하였다. 나는 참으로 재주가 없으나 또한 여러 문인의 축에 드는지라 감히 첫머리 글을 사양하지 못하였고, 공의 분부가 더욱 간곡하여 우선 한둘을 적는다.

신축년 팔월 아무 날, 입내시 조산대부 상서예부시랑 직보문각 태자문학 이수(李需)가 서문을 쓴다.

협주 1

1241年

124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