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자광록대부 수사공 상서좌복야 태자빈객 전공의 묘지명金紫光祿大夫守司空尙書左僕射太子賓客田公墓誌銘
夫士方未顯。喜議駮朝廷大臣之出處去就。及身居其地。有不能如其言矣。況官高而志益卑。富貴而能知足者。實今古賢士大夫所難。而非喋喋議駮者之所到也。誰其有之。吾於僕射府君田公見之矣。公諱元均。字眞精。全州泰山郡人也。曾祖諱某。祖某。皆爲郡司戶。至考諱寵文。始入朝。仕至朝散大夫神虎衛大將軍兼禮賓卿。以公貴追贈尙書左僕射。母許氏。亦系出泰山。以公故累封至泰山郡大夫人。公生而穎異。自童年已有老成體。人固已奇之矣。年十七。擧成均試中之。後因門蔭入仕。嘗以不第爲恨。然博古綴文。自老儒宿學。皆自以爲不及。庚寅。明宗卽祚。召入內侍。凡指使皆稱旨。上才之。屢以賞寵之。大定二十年。拜權知閣門祗候。壬寅。以殿中內給事賜緋。出知陜州。淸廉不受苞苴。其撫細民。未嘗不拊循哀惻。實出由誠。及繩猾吏。鋤理甚威。發姦摘伏如神。一州敬憚。決獄尤詳審。雖受棒楚者。皆曰田君決之。吾何怨之有。入爲試閣門祗候。遷監察御史。俄拜左司員外郞。尋改吏部員外郞。時怙權橫恣者。求其子入仕。理有不可。公竟不聽。其人深憾之。後遇道上。怒罵歐擊。至蹴墮溝中。雖憲司佯若不聽。然聞者不以爲辱。而壯公之守正不橈也。累歷侍御史刑部左司郞中。皆賜金紫。未幾拜將作少監。明年。以戶部侍郞。出知西京留守。西都劇邑稱難理。公抑強扶弱。威愛相濟。闔都稱頌。無有敢欺。自近世司鑰未有出公之右者。秩未滿。拜爲衛尉少卿。凡按廉春州全羅慶尙等三道。褒淸發贓。皆物議所歸允。凡有興利除害者。無不勇爲之。輒疏聞之。上皆允可。歷御史雜端刑部侍郞。泰和二年冬十一月。東京義庇之黨。與草賊巨魁勃尤等起兵。多殘敗州縣。將有犯順之意。上命三軍分道討之。選公爲中軍兵馬副使。凡幕中計畫。多出公之謀議。故中軍之擒斬賊魁義庇勃尤及名賊。不可勝數。公實有力焉。嘗屯雲門山也。公獨完葺廳事。施曲欄倚檻。蒔瓜其側。無慮百本。或告以爲此非種瓜之所。公笑不答。人莫知其故。公密謂幕佐曰。賊忌官軍之先據要險。利其速徙。屢驚擾之。故將示以毋動。以絶賊望也。其方略皆此類。終賊滅。竟軍雲門山自固。癸亥。在軍中。就加吏部侍郞。明年。凱還京師。除拜判將作監兼大子中舍人。乙丑。出爲西北面兵馬使。北俗性剛悍難化。自公下車。略不敢干紀。上嘉之。擢爲樞密院右承宣兼大子庶子。特遣內侍閔瑄。宣召赴闕。丁卯。因公事見劾。出樞密院。爲光祿大夫判大僕事知御史臺事。知臺勢埒承宣。人愈榮之。而公亦不以爲慊。戊辰。進拜銀靑光祿大夫樞密院副使御史大夫大子賓客。以親嫌改臺銜。爲左散騎常侍。未幾。遷知院事吏部尙書。大安三年。拜金紫光祿大夫守司空尙書左僕射。司空。一品也。公自登是職。嘗喟然嘆曰。吾起平微。無文華虎功有以輔相官家。徒以刀筆吏。官至一品。此已足矣。留之何待。遂引年稱疾。告退甚篤。上不得已允之。公得謝然後欣然肆意。退居于城西之莊。葛巾野服。逍遙偃傲。每與親舊置酒盡歡。以遂揮金之樂。越戊寅某月日。感疾卒于第。享年七十有五。公性愼密。凡政事施爲。其機張鍵閇。人莫窺測。及設而後知之。無敢更議者。敦篤忠信。嘗以卑謙自牧。與人言。開豁坦蕩。莫有畦畛。人樂而忘倦。然內強毅。臨大節。有確然不可奪者。娶某官桂氏女。凡生四男四女。男曰甫龍。登進士第。爲內侍大官署令。曰得良。祝髮爲僧。緇秩至三重大師。曰甫龜。爲金吾衛郞將。曰甫麟。爲管絃坊判官中軍錄事。女一適內侍弓箭庫判官安某。一適內侍開城牧監直文某。一適守宮署丞李某。一適隊正李某。皆衣冠搢紳之嗣也。甫龍等旣卜兆于某山。先葬日。具公之行狀。屬予爲銘。蓋以予嘗從公于征東幕府。得公之詳。故以爲託。而予可辭乎。敢灑泣濡翰而銘之曰。世薄民偸。天嗇賢士。假如生之。不假以位。道屈莫信。民未蒙利。獨於司空。豁斷厥意。載爵輦祿。悉輟以畀。公受而有。如荷重器。畏盈忌滿。若擎盤水。翼翼忘勞。服勤王事。旣肥其國。顧瘠其已。南符西綬。民受其賜。出入臺閣。爲邦之紀。品登一品。猶背負刺。軒裳得釋。四體方肆。退逸于莊。城西之里。幅巾以遊。一杖雙履。願言圖形。寫眞孰似。身沒名芳。輝映靑史。公死猶生。吾不謂死。新宮之寧。子孫其熾。勒銘貞珉。與山終始。
무릇 선비가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 때에는 조정 대신이 나아가고 물러남을 따지고 헐뜯기를 즐긴다. 그러나 제 몸이 그 자리에 있게 되면 제 말대로 하지 못하는 일이 있다. 하물며 벼슬이 높아질수록 뜻은 더욱 낮추고, 부귀하면서 넉넉함을 아는 이는 참으로 예나 이제나 어진 사대부도 어려워하는 바요 재잘거리며 따지는 이가 미칠 바가 아니다. 누가 그러한가. 나는 복야 부군 전공(田公)에게서 그것을 보았다.
공의 휘는 원균(元均)이요 자는 진정(眞精)이니 전주 태산군(泰山郡) 사람이다. 증조의 휘는 아무요 할아버지는 아무인데 다 고을의 사호가 되었다. 아버지 휘 총문(寵文)에 이르러 비로소 조정에 들어가 벼슬이 조산대부 신호위 대장군 겸 예빈경에 이르렀고, 공이 귀해짐으로써 상서좌복야를 추증받았다. 어머니 허씨(許氏)도 계통이 태산에서 나왔는데 공 때문에 여러 번 봉해져 태산군대부인에 이르렀다.
공은 나면서 뛰어나 어릴 때부터 이미 어른스러운 몸가짐이 있어 사람들이 진작 기이하게 여겼다. 열일곱에 성균시에 응시하여 뽑혔고 뒤에 문음으로 벼슬에 들었다. 일찍이 급제하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겼다. 그러나 옛일에 널리 밝고 글을 엮으니 늙은 선비와 오랜 학자들도 다 스스로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경인년에 명종이 즉위하여 내시로 불러들였다. 시키는 일마다 다 뜻에 맞으니 임금이 재주 있다 하여 여러 번 상으로 은총을 베풀었다. 대정(大定) 이십년에 권지각문지후에 임명되었다. 임인년에 전중내급사로 비어대를 받고 나가 합주(陜州)를 맡았다. 청렴하여 뇌물을 받지 않았다. 작은 백성을 어루만짐에 다독이고 가엾이 여기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참으로 정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교활한 아전을 다잡음에 이르러서는 김매듯 다스리기가 매우 위엄스러웠고 간사한 것을 들추고 숨은 것을 집어내기가 귀신같았다. 온 고을이 공경하고 두려워하였다. 옥사를 판결함이 더욱 자세하고 살펴워, 매를 맞은 이들조차 다 「전군이 판결한 것이니 내 무슨 원망이 있으랴」 하였다.
들어와 시각문지후가 되고 감찰어사로 옮겼으며, 얼마 뒤 좌사원외랑에 임명되고 이어 이부원외랑으로 고쳤다. 그때 권세를 믿고 함부로 구는 이가 제 아들을 벼슬에 들이려 하였으나 이치에 옳지 않은 바가 있어 공이 끝내 듣지 않았다. 그 사람이 깊이 한을 품었다. 뒤에 길에서 만나 성내어 꾸짖고 때리며 발로 차 도랑에 떨어뜨리기까지 하였다. 헌사가 못 들은 체하였으나 듣는 이들은 욕으로 여기지 않고 공이 바름을 지켜 굽히지 않은 것을 장하게 여겼다.
여러 번 시어사와 형부·좌사 낭중을 거쳐 다 금자를 받았다. 얼마 뒤 장작소감에 임명되고 이듬해 호부시랑으로 나가 서경유수를 맡았다. 서도는 번잡한 고을이라 다스리기 어렵다 일컬어졌다. 공이 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붙들어 위엄과 사랑이 서로 도우니 온 도읍이 기리고 감히 속이는 이가 없었다. 근세의 유수 가운데 공보다 나은 이가 없었다.
임기가 차기 전에 위위소경에 임명되었다. 춘주·전라·경상 세 도를 안렴하면서 맑은 이를 기리고 장물을 들추니 다 여론이 옳다고 돌아가는 바였다. 이익을 일으키고 해를 없앨 일이 있으면 용감히 하지 않는 것이 없었고 문득 글을 올려 아뢰니 임금이 다 옳다 하였다.
어사잡단과 형부시랑을 거쳤다. 태화(泰和) 이년 겨울 십일월에 동경(東京)의 의비(義庇) 무리가 들도적의 큰 괴수 발우(勃尤) 등과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 주현을 많이 무너뜨리고 장차 반역할 뜻이 있었다. 임금이 삼군에 명하여 길을 나누어 치게 하고 공을 뽑아 중군 병마부사로 삼았다. 막부의 계획이 대개 공의 꾀에서 나왔다. 그러므로 중군이 도적의 괴수 의비와 발우와 이름난 도적을 사로잡고 벤 것이 이루 셀 수 없었으니 공이 실로 힘이 있었다.
일찍이 운문산(雲門山)에 진 쳤을 때 공이 홀로 청사를 온전히 고쳐 굽은 난간과 기댈 난간을 베풀고, 그 곁에 오이를 심으니 줄잡아 백 포기였다. 어떤 이가 여기는 오이를 심을 곳이 아니라고 일렀으나 공은 웃고 답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알지 못하였다. 공이 가만히 막좌에게 말하였다. 「도적은 관군이 먼저 험한 요지를 차지한 것을 꺼려 우리가 빨리 옮기기를 이로이 여기므로 여러 번 놀라게 하여 어지럽힌다. 그러므로 움직이지 않을 뜻을 보여 도적의 바람을 끊으려는 것이다.」 그 방략이 다 이런 따위였다. 마침내 도적이 멸할 때까지 끝내 운문산에 군사를 두어 스스로 굳게 지켰다.
계해년에 군중에 있으면서 이부시랑을 더하였다. 이듬해 이겨 서울로 돌아와 판장작감 겸 태자중사인에 임명되었다. 을축년에 나가 서북면 병마사가 되었다. 북쪽 풍속은 성품이 굳세고 사나워 교화하기 어려웠는데, 공이 부임한 뒤로는 조금도 감히 기강을 범하지 않았다. 임금이 아름답게 여겨 추밀원 우승선 겸 태자서자로 뽑고, 특별히 내시 민선(閔瑄)을 보내어 불러 대궐로 나아오게 하였다.
정묘년에 공사로 탄핵을 받아 추밀원에서 나와 광록대부 판태복사 지어사대사가 되었다. 지대의 세력이 승선과 맞먹어 사람들이 더욱 영화롭게 여겼고 공도 서운하게 여기지 않았다. 무진년에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 어사대부 태자빈객으로 올려 임명되었다. 친척의 혐의로 어사대 직함을 고쳐 좌산기상시가 되었고, 얼마 뒤 지원사 이부상서로 옮겼다. 대안(大安) 삼년에 금자광록대부 수사공 상서좌복야에 임명되었다. 사공은 일품이다.
공이 이 자리에 오른 뒤로 일찍이 한숨지어 탄식하였다. 「내가 낮고 미천한 데서 일어나 나라를 도울 만한 글도 무공도 없이 한갓 문서나 다루는 아전으로 벼슬이 일품에 이르렀으니 이만하면 넉넉하다. 더 머물러 무엇을 기다리랴.」 드디어 나이를 끌어 병을 핑계하고 물러나기를 간절히 청하니 임금이 마지못해 허락하였다.
공은 물러남을 얻은 뒤에 기뻐하여 뜻대로 하였다. 성 서쪽 별장에 물러나 살며 칡 두건에 들옷 차림으로 거닐고 누워 지냈다. 늘 벗들과 술을 차려 즐거움을 다하여 돈 뿌리는 즐거움을 이루었다. 무인년 아무 달 아무 날에 병을 얻어 집에서 죽으니 나이 일흔다섯이었다.
공의 성품은 삼가고 촘촘하였다. 정사를 베풀 때 그 기틀을 펴고 빗장을 닫는 것을 사람이 엿보아 헤아리지 못하였고 베푼 뒤에야 알아 감히 다시 의논하는 이가 없었다. 충성과 미쁨에 도탑고 낮추고 겸손함으로 스스로를 기르곤 하였다. 남과 말할 때에는 트이고 너그러워 두둑과 경계가 없으니 사람들이 즐거워 게으름을 잊었다. 그러나 속은 굳세고 꿋꿋하여 큰 절개에 다다르면 확고하여 빼앗을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아무 벼슬 계씨(桂氏)의 딸에게 장가들어 네 아들과 네 딸을 낳았다. 아들은 보룡(甫龍)으로 진사에 급제하여 내시 대관서령이 되었고, 득량(得良)은 머리를 깎아 중이 되어 승계가 삼중대사에 이르렀으며, 보구(甫龜)는 금오위 낭장이 되었고, 보린(甫麟)은 관현방 판관 중군 녹사가 되었다. 딸 하나는 내시 궁전고 판관 안(安) 아무에게, 하나는 내시 개성 목감직 문(文) 아무에게, 하나는 수궁서승 이(李) 아무에게, 하나는 대정 이 아무에게 시집갔으니 다 벼슬아치의 자손이다.
보룡 등이 이미 아무 산에 무덤 자리를 잡았다. 장사 지내기 전날에 공의 행장을 갖추어 내게 명을 지으라 부탁하였다. 대개 내가 일찍이 동쪽을 치는 막부에서 공을 따라 공의 자세함을 알았으므로 부탁한 것이니 내가 사양할 수 있으랴. 감히 눈물을 뿌리고 붓을 적셔 명을 짓는다.
세상이 엷고 백성이 각박하니 하늘이 어진 선비를 아꼈다. 설령 낳아 준다 해도 자리는 주지 않았다. 도가 굽어 펴이지 못하니 백성이 이로움을 입지 못하였다. 오직 사공에게만은 그 뜻을 시원히 끊어 주었다. 벼슬을 싣고 녹을 실어 다 덜어서 주었다. 공은 받아 지니되 무거운 그릇을 인 듯하였다. 가득 참을 두려워하고 넘침을 꺼려 쟁반의 물을 받쳐 든 듯하였다. 삼가고 삼가 수고로움을 잊고 나랏일에 부지런히 힘썼다. 나라를 살찌우고 도리어 제 몸은 여위게 하였다. 남쪽의 부절과 서쪽의 인끈에 백성이 그 은혜를 받았다. 대각을 드나들며 나라의 벼리가 되었다. 품계가 일품에 올랐으나 오히려 등에 가시를 진 듯하였다. 수레와 옷을 벗고 나서야 네 활개가 비로소 펴졌다. 별장에 물러나 한가하니 성 서쪽 마을이다. 폭건 쓰고 노니니 지팡이 하나에 신 한 켤레다. 그 모습을 그리고자 하나 참모습을 누가 비슷하게 그리랴. 몸은 죽어도 이름은 꽃다워 푸른 역사에 빛난다. 공은 죽어도 오히려 살았으니 나는 죽었다 하지 않는다. 새 집이 편안하니 자손이 번성하리라. 곧은 돌에 명을 새기니 산과 더불어 처음과 끝을 함께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