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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권卷二

징비록 懲毖錄 · 류성룡(柳成龍) · 1633년 간행 (임진왜란 뒤 지음) · 단락 25 · 한자 12,795자 · 낭독 115.8분

징비록 권2 임진왜란이 끝난 뒤 영의정 류성룡이 제 눈으로 본 것을 적어 남긴 기록. 「지난 일을 징계하여 뒷근심을 삼간다」는 뜻으로 이름을 붙였다. 전쟁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조정이 무엇을 놓쳤는지를 변명 없이 적었다. 이순신을 천거한 일, 명나라 군사와의 실랑이, 백성이 겪은 참상이 그대로 실렸다.

十二月,天朝大發兵以兵部右侍郞宋應昌爲經略兵部員外郞劉黃裳主事袁黃爲賛畫軍務駐遼東提督李如松爲大將率三營將李如柏張世爵楊元及南將駱尙志吳惟忠王必廸等渡江兵數四萬餘先是沈惟敬旣去倭果歛兵不動旣而過五十日惟敬不至倭疑之聲言歲時將飲馬鴨綠江自賊中逃回者皆言賊大修攻城之具人以益懼十二月初惟敬又至再入城中留數日更相約誓而去所言不聞至是兵至安州下營於城南旌旗器械整肅如神余請見提督白事提督在東軒許入乃欣然丈夫也設椅相對余袖出平壤地圖指示形勢兵所從入之路提督傾聽輒以朱筆點其處且曰倭但恃鳥銃耳我用大炮皆過五六里賊何可當也余旣退提督於扇面題詩寄余云提兵星夜渡江干爲說三韓國未安,明主日懸旌節報微臣夜釋酒杯歡春來殺氣心猶壯此去妖氛骨已寒談笑敢言非勝算夢中常憶跨征鞍時城中漢兵皆滿余在百祥樓夜半忽有唐人持軍中密約三條來示問其姓名不告而去提督使副總兵查大受先往順安紿倭奴曰,天朝已許和沈遊擊且至倭喜玄蘇獻詩曰扶桑息戰服中華四海九州同一家喜氣忽消寰外雪乾坤春早太平花時癸巳春正月初吉也使其小將平好官領二十餘倭出迎沈遊擊于順安查總兵誘與飲酒伏起縱擊之擒平好官斬戮從倭幾盡三人逸馳去賊中始知兵至大擾時大軍已到肅川日暮方下營做飯報至提督彎弓鳴弦卽以數騎馳赴順安諸營陸續進發翌日朝進圍平壤攻普通門七星門賊登城上列堅紅白旗拒戰。天兵以大砲火箭攻之炮聲震地數十里間山岳皆動火箭布空如織烟氣蔽天箭入城中處處火起林木皆焚駱尙志吳惟忠等率親兵蟻附登城前者墜後者升莫有退者賊刀槊下垂城堞如蝟毛。天兵戰益力賊不能支退入內城斬戮焚燒死者甚衆。天兵入城攻內城賊於城上爲土壁多穿孔穴望之如蜂窠從穴中銃丸亂發。天兵多傷提督慮竆寇致死收軍城外以開走路其夜賊乘氷過江遁去先是余在安州聞大兵將出密報黃海道防禦使李時言金敬老使邀其歸路戒之曰兩軍沿道設伏俟賊過躡其後賊飢困遁走無心戀戰可盡就縛時言卽至中和敬老辭以他事余又遣軍官姜德寬督之敬老不得已亦來中和賊退前一日因黃海道巡察使柳永慶關還走載寧時永慶在海州欲自衛而敬老憚與賊戰避去賊將平行長平義智玄蘇平調信等率餘衆連夜遁還氣乏足蠒跛躃而行或匍匐田間指口乞食我國無一人出擊。天兵又不追之獨李時言尾其後不敢逼但斬飢病落後者六十餘級是時倭將之在都城者平秀嘉乃關白姪或言婿也年幼不能主事軍務制在行長而淸正在咸鏡道未還若行長義智玄蘇等就擒則京城之賊自潰京城潰則淸正歸路斷絕軍心汹懼必沿道遁走不能自拔漢江以南賊屯次第瓦解。天兵鳴皷徐行直至釜山痛飲而已俄頃之間海岱肅淸安有數年之紛紛哉一夫不如意事關天下良可痛惜余狀。啓淸斬金敬老蓋余爲平安道體察使敬老非管下故先請之。朝廷遣宣傳官李純一持標售至開城府欲誅之先告于提督提督曰其罪應死然賊未滅一武士可惜姑令白衣從軍使之立功贖罪可也爲咨文授純一而送

십이월, 명나라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병부 우시랑 송응창(宋應昌)을 경략으로 삼고, 병부 원외랑 유황상(劉黃裳)과 주사 원황(袁黃)을 찬획군무로 삼아 요동(遼東)에 머물게 하였다. 제독 이여송(李如松)을 대장으로 삼아 삼영의 장수 이여백(李如柏)·장세작(張世爵)·양원(楊元)과 남쪽 장수 낙상지(駱尙志)·오유충(吳惟忠)·왕필적(王必廸) 들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게 하니, 군사가 사만 남짓이었다.

앞서 심유경(沈惟敬)이 떠난 뒤로 왜는 과연 군사를 거두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쉰 날이 지나도 유경이 오지 않으니 왜가 의심하여, 새해에는 압록강에 말을 먹이겠다고 큰소리쳤다. 적진에서 도망쳐 온 사람들이 모두 적이 성 치는 기구를 크게 손질한다고 하니 사람들이 더욱 두려워하였다. 십이월 초에 유경이 또 와서 다시 성 안으로 들어가 며칠을 묵고 서로 다짐을 새로 하고 갔는데, 무슨 말을 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때 군사가 안주(安州)에 이르러 성 남쪽에 진을 쳤는데, 깃발과 병장기가 신이 내린 듯 가지런하였다. 내가 제독을 뵙고 일을 아뢰기를 청하니 제독이 동헌에 있다가 들어오라 하였는데, 보니 시원스러운 장부였다. 의자를 놓고 마주 앉았다. 내가 소매에서 평양 지도를 꺼내어 지형과 군사가 들어갈 길을 가리켜 보이니, 제독이 귀 기울여 듣고 그때그때 붉은 붓으로 그 자리에 점을 찍었다. 그러고는 말하였다. 「왜는 조총만 믿을 뿐이오. 우리는 대포를 쓰는데 모두 오륙 리를 넘게 나가니 적이 어찌 당하겠소.」

내가 물러난 뒤 제독이 부채에 시를 적어 내게 보내왔다.

군사를 이끌고 별 아래 밤을 새워 강가를 건너니 삼한 땅이 아직 편치 못하다 하기 때문일세 밝으신 임금은 날마다 깃발의 소식을 걸어 두시고 미천한 신하는 밤에도 술잔의 즐거움을 놓았네 봄이 와도 싸우려는 기운에 마음은 오히려 씩씩하고 이 걸음이면 요사한 기운은 벌써 뼈까지 서늘하리라 웃으며 이야기한다 하여 어찌 이길 셈이 없다 하랴 꿈속에서도 늘 싸움터의 안장에 오르는 일을 생각하네

이때 성 안에 명나라 군사가 가득하였고 나는 백상루(百祥樓)에 있었다. 한밤중에 갑자기 명나라 사람 하나가 군중의 비밀 약조 세 조목을 가지고 와서 보이기에 이름을 물었더니 말하지 않고 갔다.

제독이 부총병 사대수(査大受)를 먼저 순안(順安)으로 보내어 왜를 속여 말하게 하였다. 「명나라가 이미 화친을 허락하였고 심 유격이 곧 온다.」 왜가 기뻐하였다. 현소(玄蘇)가 시를 지어 바쳤다.

부상(扶桑)이 싸움을 그치고 중화에 복종하니 사해 구주가 한집안이 되었네 기쁜 기운이 문득 하늘 밖의 눈을 녹이고 하늘과 땅에 봄이 일러 태평의 꽃이 피네

계사년 정월 초하루였다.

왜가 저희 작은 장수 평호관(平好官)에게 왜병 스무남은 명을 거느리고 순안으로 나가 심 유격을 맞게 하였다. 사 총병이 꾀어 함께 술을 마시다가 숨겨 둔 군사를 일으켜 들이치니, 평호관을 사로잡고 따라온 왜를 거의 다 베었으며 세 사람만 빠져 달아났다. 적중에서 비로소 군사가 온 줄 알고 크게 술렁였다.

이때 대군이 이미 숙천(肅川)에 이르러 날이 저물어 막 진을 치고 밥을 짓는데 기별이 닿았다. 제독이 활을 당겨 시위를 울리고는 곧바로 기병 몇을 거느리고 순안으로 달려가니, 여러 진이 잇달아 떠났다. 이튿날 아침에 나아가 평양을 에워싸고 보통문(普通門)과 칠성문(七星門)을 쳤다. 적이 성 위에 올라 붉고 흰 깃발을 굳게 늘여 세우고 맞섰다. 명나라 군사가 대포와 불화살로 치니 포 소리가 땅을 흔들어 수십 리 사이의 산악이 다 움직였다. 불화살이 하늘에 베를 짜듯 깔리고 연기가 하늘을 가렸으며, 화살이 성 안으로 들어가 곳곳에 불이 일어나 숲까지 다 탔다.

낙상지·오유충 들이 제 군사를 거느리고 개미처럼 붙어 성을 오르니, 앞선 자가 떨어지면 뒤엣사람이 올라 물러서는 이가 없었다. 적의 칼과 창이 성가퀴에 고슴도치 털처럼 드리웠다. 명나라 군사가 더욱 힘써 싸우니 적이 버티지 못하고 내성으로 물러났는데, 베고 불사른 끝에 죽은 자가 아주 많았다. 명나라 군사가 성에 들어가 내성을 쳤다. 적이 성 위에 흙벽을 쌓고 구멍을 숱하게 뚫어 놓아 바라보면 벌집 같았는데, 그 구멍에서 총알을 마구 쏘아 명나라 군사가 많이 다쳤다. 제독은 궁지에 몰린 도적이 죽기로 덤빌까 염려하여 군사를 성 밖으로 거두어 달아날 길을 터 주었다. 그날 밤 적이 얼음을 타고 강을 건너 달아났다.

앞서 내가 안주에 있으면서 대군이 곧 나온다는 말을 듣고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李時言)과 김경로(金敬老)에게 몰래 알려 적의 돌아갈 길을 막게 하고 이렇게 일렀다. 「두 군사가 길가에 매복하였다가 적이 지나가기를 기다려 그 뒤를 밟으라. 적은 주리고 지쳐 달아나는 터라 싸울 마음이 없으니 다 묶을 수 있을 것이다.」 시언은 곧 중화(中和)에 이르렀으나 경로는 다른 일을 핑계 대었다. 내가 다시 군관 강덕관(姜德寬)을 보내어 다그치니 경로도 마지못해 중화로 왔다. 그러나 적이 물러나기 하루 전에 황해도 순찰사 유영경(柳永慶)의 공문을 핑계로 재령(載寧)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때 영경은 해주(海州)에 있으면서 제 몸을 지키려 하였고, 경로는 적과 싸우기를 꺼려 피해 간 것이다.

적장 평행장(平行長)·평의지(平義智)·현소·평조신(平調信) 들이 남은 무리를 이끌고 밤을 이어 달아나는데, 기운이 다하고 발이 부르터 절뚝이며 걸었고 더러는 밭 사이를 기면서 입을 가리키며 먹을 것을 빌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사람도 나가 치지 않았고 명나라 군사도 뒤쫓지 않았다. 오직 이시언만이 뒤를 밟았으나 감히 바싹 붙지 못하고, 주리고 병들어 뒤처진 자 예순 남짓을 베었을 뿐이다.

이때 도성에 있던 왜장은 평수가(平秀嘉)로 관백의 조카였는데 사위라고도 한다. 나이가 어려 일을 맡지 못하여 군무는 행장이 쥐고 있었고, 청정(淸正)은 함경도에 있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만일 행장·의지·현소 들을 사로잡았더라면 서울의 적은 저절로 무너졌을 것이요, 서울이 무너지면 청정의 돌아갈 길이 끊겨 군심이 놀라고 두려워 반드시 길을 따라 달아나되 스스로 빠져나가지 못하였을 것이다. 한강 남쪽의 적진도 차례로 무너져, 명나라 군사는 북을 울리며 천천히 나아가 곧장 부산에 이르러 실컷 술이나 마시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잠깐 사이에 바다와 산이 깨끗해졌을 터이니 어찌 몇 해를 어지러웠겠는가. 한 사람이 뜻대로 하지 않아 일이 천하에 걸렸으니 참으로 애석하다.

내가 장계를 올려 김경로를 베기를 청하였다. 나는 평안도 체찰사라 경로가 내 관할이 아니었으므로 먼저 청한 것이다. 조정에서 선전관 이순일(李純一)에게 표신을 들려 개성부로 보내어 그를 베게 하였는데, 먼저 제독에게 알렸다. 제독이 말하였다. 「그 죄는 죽어 마땅하나 적이 아직 없어지지 않았으니 무사 하나가 아깝소. 우선 흰옷으로 군에 따르게 하여 공을 세워 죄를 갚게 함이 좋겠소.」 그러고는 공문(咨文)을 지어 순일에게 주어 보냈다.

遞李鎰巡邊使更以李薲代之平壤之戰。天兵從普通門而入李鎰及金應瑞等從含毬門而入及收兵皆退屯城外夜賊遁去明朝始覺之李提督咎我軍不警守使賊遁去而不知於是。天將之曾往來順安與李薲相熟者爭言鎰非將才獨李薲可提督移咨言狀。朝廷使右相尹斗壽至平壤問鎰罪欲行軍法良久釋之更以薲代鎰選兵三千騎從提督而南

순변사 이일(李鎰)을 갈고 이빈(李薲)으로 대신하였다.

평양 싸움에서 명나라 군사는 보통문으로 들어가고 이일과 김응서(金應瑞) 들은 함구문(含毬門)으로 들어갔다. 군사를 거둘 때에 모두 성 밖으로 물러나 진을 쳤는데, 밤에 적이 달아난 것을 이튿날 아침에야 알았다. 이 제독이 우리 군사가 지키기를 삼가지 않아 적이 달아나는 것도 몰랐다고 허물하였다. 이에 일찍이 순안을 드나들며 이빈과 친하던 명나라 장수들이 다투어 「이일은 장수 될 그릇이 아니고 오직 이빈이라야 한다」고 말하였다. 제독이 공문을 보내어 그 사정을 알리니, 조정에서 우의정 윤두수(尹斗壽)를 평양에 보내어 이일의 죄를 묻고 군법을 쓰려 하다가 한참 만에 풀어 주었다. 그러고는 이빈으로 이일을 대신하게 하고 기병 삼천을 뽑아 제독을 따라 남쪽으로 가게 하였다.

李提督進兵坡州與賊戰於碧蹄南不利還屯開城初平壤旣復大同以南沿道賊屯皆遁去提督欲追賊謂余曰大軍方前進而聞前路無糧草議政旣爲大臣當念國事不可憚勞宜急行準備軍糧勿致疎誤余辭出時。天兵先鋒已過大同江而南筤搶塞路不可行余委曲疾行出軍前夜入中和至黃州已三皷矣時賊兵新退一路荒虛人民未集計無所出急移文于黃海監司柳永慶使之催運又移文于平安監司李元翼調發金應瑞等所率軍人之不堪戰陣者自平壤負戴追隨送至黃州又令船運平安道三縣之穀從靑龍浦輸運於黃海道事非預辦臨時猝急而大軍隨至恐乏軍興爲之勞心焦思永慶頗有儲峙畏賊散置山谷間督民輸至沿途不至闕乏旣而大軍入開城府正月二十四日賊疑我民爲之內應且忿平壤之敗盡殺京城中民庶焚燒公私閭舍殆盡而西路列屯之賊皆會京城謀拒王師余連請提督速進捉督遲回者累日進至坡州翌日副總兵查大受與我將高彥伯領兵數百先行偵探與賊相遇於碧蹄驛南礪石嶺斬獲百餘級提督聞之留大軍獨與家丁騎馬者千餘馳赴之過惠陰嶺馬蹶墮地其下共扶起之時賊匿大衆於礪石嶺後只數百人在嶺上提督望見揮其兵爲兩翼而前賊亦自嶺而下漸相逼後賊從山後遽上山陣幾萬餘。天兵望之心懼而已接刃不可解時提督所領皆北騎無火器只持短劒鈍劣賊用步兵刃皆三四尺精利無比與之突鬪左右揮擊人馬皆靡無敢當其鋒者提督見勢危急徵後軍未至而先軍已敗死傷甚多賊亦收兵不急追日暮提督還坡州雖隱其敗而神氣沮甚夜以家丁親信者戰死痛哭明日欲退軍東坡余與右議政俞泓都元帥金命元帥李薲等至帳下提督出立帳外諸將左右立余力爭曰勝負兵家常事當觀勢更進奈何輕動提督曰吾軍昨日多殺賊無不利事但此地經雨泥濘不便駐軍所以欲還東坡休兵進取耳余及諸人爭之固提督出示己奏本草其中有曰賊兵在都城者二十餘萬衆寡不敵未又言臣病甚請以他人代其任余駭而以手指點曰賊兵甚少何得有二十萬提督曰我豈能知之乃汝國人所言也蓋託辭也諸將中張世爵尤勸都督退兵以余等固爭不退以足蹴巡邊使李薲叱退聲色俱厲是時大雨連日且賊燒道邊諸山皆兀兀無蒿草重以馬疫數日間倒隕者殆將萬匹是日三營還渡臨津陣于東坡驛前明日自東坡又欲還開城府余又力爭曰大軍一退則賊氣愈驕遠近驚懼臨津以北亦不可保願少住觀釁以動提督伴許之余旣退而提督跨馬遂還開城府諸營悉退開城獨副總兵查大受遊擊母承宣軍數百守臨津余猶留東坡日遣人更請進兵提督謾應之曰天晴路乾則當進然實無進意大軍到開城府日久軍糧已盡惟從水路括粟及茭草於江華又船運忠淸全羅道稅糧稍稍而至隨到隨盡其勢愈急一日諸將以糧盡爲辭請提督旋師提督怒呼余及戶曹判書李誠中京畿左監司李延馨跪庭下大聲詰責欲加以軍法余摧謝不已因念國事至此不覺流涕提督愍然更怒諸將曰汝等昔從我征西夏時軍不食累日猶不敢言歸卒成大功今朝鮮偶數日不支糧何敢遽言旋師耶汝輩欲去則去我非滅賊不還惟當以馬革褁尸耳諸將皆頓首謝余出門以放糧不時杖開城經歷沈禮謙繼而糧船數十隻自江華泊後西江僅得無事是夕提督使總兵張世爵召余慰之且論軍事提督還平壤時賊將淸正尙在咸鏡道有人傳言淸正將自咸興踰陽德孟山襲平壤時提督有北還意未得其機因此聲言平壤乃根本若不守大軍無歸路不可不救遂回軍還平壤留王必迪守開城謂接伴使李德馨曰朝鮮之軍勢孤無援宜悉還江北是時全羅巡察使權慄在高陽幸州巡邊使李薲在坡州高彥伯李時言等在蠏踰嶺元帥金命元在臨津南余在東坡提督恐爲賊所乘故云然余使從事官辛慶晉馳見提督陳不可退軍者五。先王墳墓皆在畿甸淪於賊藪神人望切不忍棄去一也京畿以南遺民日望。王師忽聞退去無復固志相率而歸賊二也我國境土尺寸不可容易棄之三也將士雖力弱方欲倚仗。天兵共圖進取一聞撤退之令必皆怨憤離散四也一退而賊乘其後則雖臨津以北亦不可保五也提督默然而去

이 제독이 파주(坡州)로 군사를 내어 벽제(碧蹄) 남쪽에서 적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여 개성으로 돌아와 진을 쳤다.

처음에 평양을 되찾자 대동강 남쪽 길가의 적진이 모두 달아났다. 제독이 적을 쫓으려 하며 내게 말하였다. 「대군이 바야흐로 앞으로 나아가는데 앞길에 양식과 마초가 없다 하오. 의정은 이미 대신이니 마땅히 나랏일을 생각하여 수고를 꺼리지 말고 급히 가서 군량을 갖추어 그르치는 일이 없게 하시오.」

내가 하직하고 나왔다. 그때 명나라 군사의 선봉이 이미 대동강을 건너 남쪽으로 갔는데 어지러운 행렬이 길을 막아 갈 수가 없었다. 나는 굽이굽이 돌아 서둘러 군대 앞으로 나가, 밤에 중화로 들어가 황주(黃州)에 이르니 벌써 삼경이었다. 그때 적병이 갓 물러가 한 길이 다 비고 백성이 모이지 않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급히 황해 감사 유영경에게 공문을 보내어 실어 나르기를 재촉하게 하고, 또 평안 감사 이원익(李元翼)에게 공문을 보내어 김응서 들이 거느린 군사 가운데 싸움에 나설 수 없는 이들을 뽑아 평양에서 짐을 지고 따라와 황주까지 보내게 하였다. 또 평안도 세 고을의 곡식을 배에 실어 청룡포(靑龍浦)에서 황해도로 옮기게 하였다. 일이 미리 마련한 것이 아니라 닥쳐서 갑작스러웠고 대군이 뒤따라 이르니, 군수가 모자랄까 두려워 마음을 태우고 애를 끓였다. 영경이 저축해 둔 것이 제법 있었으나 적을 두려워하여 산골짜기에 흩어 두었던 것을 백성을 다그쳐 실어 오게 하니, 길목마다 모자라지는 않게 되었다.

이윽고 대군이 개성부에 들어왔다. 정월 스무나흗날에 적이 우리 백성이 안에서 내응할까 의심하고 또 평양에서 진 것을 분히 여겨, 서울 안 백성을 다 죽이고 공사의 집을 거의 다 불살랐다. 그리고 서쪽 길에 늘어서 있던 적이 모두 서울에 모여 관군을 막기를 꾀하였다.

내가 잇달아 제독에게 빨리 나아가기를 청하였는데, 제독이 여러 날 머뭇거리다가 파주까지 나아갔다. 이튿날 부총병 사대수가 우리 장수 고언백(高彥伯)과 함께 군사 수백을 거느리고 앞서 가서 적정을 살피다가, 벽제역 남쪽 여석령(礪石嶺)에서 적을 만나 백여 급을 베었다. 제독이 이 말을 듣고 대군은 두고 홀로 말 탄 가정(家丁) 천여 명만 데리고 달려갔다. 혜음령(惠陰嶺)을 지날 때 말이 넘어져 땅에 떨어지니 아랫사람들이 함께 붙들어 일으켰다.

그때 적은 큰 무리를 여석령 뒤에 숨겨 두고 고개 위에는 수백 명만 두었다. 제독이 바라보고 군사를 두 날개로 나누어 나아가게 하니 적도 고개에서 내려와 점점 다가섰다. 그러자 뒤에 있던 적이 산 뒤에서 갑자기 올라와 산에 진을 쳤는데 거의 만 명이나 되었다. 명나라 군사가 바라보고 마음으로 겁을 내었으나 이미 칼날을 맞대어 풀 수가 없었다.

그때 제독이 거느린 군사는 다 북쪽 기병이라 화기가 없고 짧고 무딘 칼만 지녔는데, 적은 보병을 써서 칼날이 다 서너 자에 날카롭기 짝이 없었다. 맞부딪쳐 싸우는데 좌우로 후려치니 사람과 말이 다 쓰러져 그 서슬을 당할 자가 없었다. 제독이 형세가 위태로운 것을 보고 뒷군을 불렀으나 이르기 전에 앞군이 이미 무너져 죽고 다친 자가 아주 많았다. 적도 군사를 거두고 급히 쫓지는 않았다.

날이 저물어 제독이 파주로 돌아왔다. 진 것을 숨기기는 하였으나 기운이 몹시 꺾여, 밤에 믿던 가정들이 싸우다 죽은 일로 통곡하였다.

이튿날 군사를 동파(東坡)로 물리려 하기에, 내가 우의정 유홍(俞泓)과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순변사 이빈 들과 함께 장막 아래에 이르렀다. 제독이 장막 밖에 나와 서고 여러 장수가 좌우에 섰다. 내가 힘써 다투어 말하였다. 「이기고 지는 것은 군사를 부리는 데 흔한 일입니다. 마땅히 형세를 보아 다시 나아가야지 어찌 가벼이 움직이려 하십니까.」 제독이 말하였다. 「우리 군사가 어제 적을 많이 죽였으니 이롭지 못한 일은 없소. 다만 이 땅이 비를 겪어 진창이 되어 군사를 머무르기에 불편하기로, 동파로 돌아가 군사를 쉬게 하였다가 나아가 치려는 것이오.」

나와 여러 사람이 굳이 다투니, 제독이 제가 황제께 올릴 글(奏本)의 초를 내어 보였다. 그 가운데 「도성에 있는 적병이 이십여 만이라 적은 군사로 맞설 수 없다」는 말이 있고, 끝에는 「신은 병이 심하니 다른 사람으로 그 소임을 대신하게 하소서」 하였다. 내가 놀라 손으로 짚어 가리키며 말하였다. 「적병이 아주 적은데 어찌 이십만이 되겠습니까.」 제독이 말하였다. 「내가 어찌 알겠소. 그대 나라 사람이 한 말이오.」 핑계였다.

여러 장수 가운데 장세작이 더욱 도독에게 군사를 물리기를 권하였는데, 우리가 굳이 다투며 물러나지 않으니 순변사 이빈을 발로 차며 물러가라고 꾸짖었다. 목소리와 낯빛이 다 사나웠다.

이때 큰비가 며칠을 이었고, 또 적이 길가를 불살라 여러 산이 다 민둥하여 풀 한 포기 없었다. 게다가 말에 돌림병까지 돌아 며칠 사이에 쓰러져 죽은 것이 거의 만 필에 이르렀다.

이날 삼영이 임진강을 도로 건너 동파역 앞에 진을 쳤다. 이튿날 동파에서 또 개성부로 돌아가려 하기에 내가 다시 힘써 다투었다. 「대군이 한 번 물러나면 적의 기세가 더욱 교만해지고 멀고 가까운 데가 다 놀라 두려워하여 임진강 이북도 지킬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조금 머물러 틈을 보아 움직이소서.」 제독이 짐짓 그러마 하였다. 내가 물러나자 제독은 말에 올라 마침내 개성부로 돌아갔고 여러 진이 다 개성으로 물러났다. 다만 부총병 사대수와 유격 모승선(母承宣)의 군사 수백이 임진을 지켰다.

나는 그대로 동파에 머물면서 날마다 사람을 보내어 다시 나아가기를 청하였다. 제독은 건성으로 응하여 「날이 개고 길이 마르면 마땅히 나아가겠소」 하였으나 실은 나아갈 뜻이 없었다.

대군이 개성부에 이른 지 오래되어 군량이 이미 다하였다. 오직 물길로 강화(江華)에서 좁쌀과 꼴을 긁어 오고, 또 충청도·전라도의 세곡을 배로 실어 조금씩 이르렀으나 닿는 대로 없어져 형세가 더욱 급하였다.

하루는 여러 장수가 군량이 다하였다는 것을 핑계로 제독에게 군사를 돌리기를 청하였다. 제독이 성내어 나와 호조판서 이성중(李誠中), 경기좌감사 이연형(李延馨)을 불러 뜰 아래 꿇리고 큰 소리로 꾸짖으며 군법을 쓰려 하였다. 내가 사죄하기를 그치지 않으면서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을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제독이 가엾이 여기고는 다시 여러 장수에게 성을 내며 말하였다. 「너희가 지난날 나를 따라 서하(西夏)를 칠 때에는 군사가 여러 날 먹지 못하여도 오히려 감히 돌아가자 말하지 않아 마침내 큰 공을 이루었다. 이제 조선이 우연히 며칠 양식을 대지 못하였다 하여 어찌 감히 대뜸 군사를 돌리자 하느냐. 너희가 가려거든 가라. 나는 적을 없애지 않고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니, 말가죽에 시체를 싸일 뿐이다.」 여러 장수가 다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였다.

내가 문을 나와, 양식을 제때에 내지 못하였다 하여 개성 경력 심예겸(沈禮謙)에게 곤장을 쳤다. 이어 양식 실은 배 수십 척이 강화에서 서강(西江) 뒤에 닿아 겨우 무사할 수 있었다. 그날 저녁 제독이 총병 장세작을 시켜 나를 불러 위로하고 또 군사 일을 의논하였다.

제독이 평양으로 돌아갔다. 그때 적장 청정이 아직 함경도에 있었는데, 어떤 이가 청정이 함흥에서 양덕(陽德)·맹산(孟山)을 넘어 평양을 치려 한다고 전하였다. 그때 제독은 북쪽으로 돌아갈 뜻이 있었으나 기회를 얻지 못하던 터라 이를 빌미로 「평양은 근본이니 만일 지키지 못하면 대군이 돌아갈 길이 없다. 구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마침내 군사를 돌려 평양으로 돌아가면서 왕필적에게 개성을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접반사 이덕형(李德馨)에게 「조선 군사는 형세가 외롭고 도움이 없으니 마땅히 다 강 북쪽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이때 전라 순찰사 권율(權慄)은 고양 행주(幸州)에 있고, 순변사 이빈은 파주에, 고언백·이시언 들은 해유령(蠏踰嶺)에, 원수 김명원은 임진에, 나는 동파에 있었다. 제독은 적이 그 틈을 탈까 두려워 그리 말한 것이다.

내가 종사관 신경진(辛慶晉)을 달려 보내어 제독을 뵙고 군사를 물려서는 안 되는 까닭 다섯 가지를 아뢰게 하였다. 「선왕의 무덤이 다 경기 안에 있어 적의 소굴에 빠졌으니 신과 사람이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여 차마 버리고 갈 수 없음이 첫째요, 경기 남쪽에 남은 백성이 날마다 관군을 바라는데 갑자기 물러간다는 말을 들으면 다시 굳게 지킬 뜻이 없어 서로 이끌고 적에게 돌아갈 것이 둘째요, 우리나라 땅은 한 자 한 치도 쉽게 버릴 수 없음이 셋째요, 장수와 군사가 비록 힘이 약하나 바야흐로 명나라 군사에 기대어 함께 나아가기를 꾀하는데 한 번 물러가라는 명을 들으면 반드시 다 원망하고 흩어질 것이 넷째요, 한 번 물러난 뒤에 적이 그 뒤를 타면 임진강 이북도 지킬 수 없음이 다섯째입니다.」 제독은 잠자코 있다가 가 버렸다.

협주 1

저본은 李延馨이다. 임진년에 경기좌도 관찰사를 지낸 이는 흔히 이정형(李廷馨)으로 적는다. 저본을 맞대어 본 뒤에 정한다. ― 옮긴이

全羅道巡察使權慄敗賊于幸州移軍坡州先是慄以光州牧使代李洸爲巡察使率兵勤。王懲李洸等野戰而敗至水原據秃城山城賊不敢攻及聞天兵將入京城渡江陣于幸州山城至是賊從京城大出攻之軍中洶懼欲散而江水在後無走路不得已還入城力戰矢雨下賊分爲三陣迭進皆敗會日暮賊還入京城慄令軍士取賊屍磔裂肢體散掛林木以泄其憤旣而聞賊欲更出期必報甚懼毀營栅率軍至臨津從都元帥金命元余聞之單騎馳去登坡州山城觀形勢以爲當大路之衝而地形斗絕可據卽令權慄與巡邊使李薲合軍據守以遏賊兵西下防禦使高彥伯李時言助防將鄭希立朴名賢等爲遊兵遮蠏踰嶺義兵將朴惟仁尹先正李山輝等從右路伏於。昌敬陵之間各以其兵出沒抄擊賊多出則避而不戰少出則隨處邀擊自是賊不得出城樵採馬死者甚多又令倡義使金千鎰京畿水使李蘋忠淸水使丁傑等乘舟從龍山西江以分賊勢忠淸道巡察使許頊在陽城令還護本道以備賊南衝之勢移文京畿忠淸慶尙官義兵使各在其處從左省邀截賊路楊根郡守李汝讓守龍津凡諸將所斬賊首皆懸掛於開城府南門之外提督參軍呂應鍾見之喜曰朝鮮人今則取賊首如割毬矣一日賊從東門大出搜山自楊州積城至大灘無所得查大受恐賊來襲報余曰有體探人來言賊欲得查總兵柳體察云姑避開城如何余答之曰體探人所言恐無此理賊方疑大軍住近豈敢輕易渡江我等一動則民心必搖不如靜以待之查笑曰此言甚是假令有賊吾與體察死生同之豈敢獨去遂分所率勇士數十餘人來護余雖雨甚達夜警守不暫怠至聞賊入城乃罷其後賊探知權慄在坡州欲報怨率大軍從西路而出至廣灘去山城數里住兵不進自午至未不攻還退後不復出蓋賊知地形見慄所據險絕故耳余移書王必廸言賊方據險固未易攻大兵當進住東坡坡州躡其尾以牽綴之選南兵一萬從江華出於漢南乘賊不意擊破諸屯則京城之賊歸路斷絕必向龍津而走因以後兵覆諸江津可一擧掃滅必迪擊節稱奇策發偵探軍三十六名馳往忠淸道義兵將李山謙陣察賊形勢時賊精兵皆在京城而後屯皆羸疲寡弱偵卒踴躍還報云不須一萬只得二三千可破李提督北將也是役也痛抑南軍恐其成功不許

전라도 순찰사 권율(權慄)이 행주(幸州)에서 적을 깨뜨리고 군사를 파주로 옮겼다.

앞서 권율은 광주 목사로서 이광(李洸)을 대신하여 순찰사가 되어 군사를 이끌고 임금을 도우러 올라왔는데, 이광 들이 들판에서 싸우다 진 것을 거울삼아 수원에 이르러 독성산성(禿城山城)에 웅거하니 적이 감히 치지 못하였다. 명나라 군사가 곧 서울로 들어온다는 말을 듣고는 강을 건너 행주산성에 진을 쳤다. 이때 적이 서울에서 크게 나와 치니 군중이 술렁이며 흩어지려 하였으나, 뒤에 강물이 있어 달아날 길이 없으므로 마지못해 성으로 도로 들어가 힘껏 싸웠다.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적이 세 진으로 나뉘어 번갈아 나왔으나 다 졌다. 마침 날이 저물어 적이 서울로 돌아갔다. 권율이 군사를 시켜 적의 주검을 거두어 팔다리를 찢어 숲의 나무에 흩어 걸게 하여 분을 풀었다.

이윽고 적이 다시 나와 기어이 앙갚음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몹시 두려워, 진의 목책을 헐고 군사를 이끌고 임진으로 가서 도원수 김명원을 따랐다.

내가 이 말을 듣고 홀로 말을 달려가 파주 산성에 올라 형세를 보니, 큰길의 목을 막고 있는 데다 땅이 가팔라 웅거할 만하였다. 곧 권율과 순변사 이빈에게 군사를 합쳐 지켜서 적이 서쪽으로 내려오는 것을 막게 하였다. 방어사 고언백·이시언과 조방장 정희립(鄭希立)·박명현(朴名賢) 들은 유격하는 군사로 삼아 해유령을 막게 하고, 의병장 박유인(朴惟仁)·윤선정(尹先正)·이산휘(李山輝) 들은 오른쪽 길을 따라 창릉(昌陵)과 경릉(敬陵) 사이에 매복하여 저마다 제 군사로 나타났다 숨었다 하며 들이치게 하였다. 적이 많이 나오면 피하고 싸우지 않으며, 적게 나오면 가는 곳마다 맞받아 치게 한 것이다. 이로부터 적이 성을 나와 나무를 할 수 없게 되어 말이 죽은 것이 아주 많았다.

또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경기 수사 이빈(李蘋), 충청 수사 정걸(丁傑) 들에게 배를 타고 용산(龍山)과 서강으로 나아가 적의 세력을 나누게 하였다. 충청도 순찰사 허욱(許頊)은 양성(陽城)에 있었는데, 제 도로 돌아가 지켜서 적이 남쪽으로 치고 드는 형세에 대비하게 하였다. 또 경기·충청·경상의 관군과 의병을 이끄는 이들에게 공문을 보내어 저마다 제자리에 있으면서 좌우에서 적의 길을 막아 끊게 하였다. 양근 군수 이여양(李汝讓)은 용진(龍津)을 지키게 하였다.

여러 장수가 벤 적의 머리는 모두 개성부 남문 밖에 걸었다. 제독의 참군 여응종(呂應鍾)이 보고 기뻐하며 말하였다. 「조선 사람이 이제는 적의 머리 베기를 참외 자르듯 하는구나.」

하루는 적이 동문으로 크게 나와 산을 뒤지며 양주(楊州)·적성(積城)에서 대탄(大灘)까지 갔으나 얻은 것이 없었다. 사대수가 적이 와서 칠까 두려워하여 내게 알려 왔다. 「정탐하는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적이 사 총병과 유 체찰을 잡으려 한다 하오. 잠시 개성으로 피하는 것이 어떻겠소.」 내가 대답하였다. 「정탐하는 사람의 말은 그럴 리가 없을 듯하오. 적은 바야흐로 대군이 가까이 머무는 것을 의심하고 있으니 어찌 감히 가벼이 강을 건너겠소. 우리가 한 번 움직이면 민심이 반드시 흔들릴 것이니 조용히 기다리는 것만 못하오.」 사대수가 웃으며 말하였다. 「그 말이 참 옳소. 설령 적이 온다 한들 나는 체찰과 죽고 삶을 같이할 것이니 어찌 감히 혼자 가겠소.」 그러고는 거느린 용사 수십 명을 나누어 보내어 나를 지키게 하였는데, 비가 몹시 와도 밤새도록 지켜 잠시도 게을리하지 않다가 적이 성으로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서야 그만두었다.

그 뒤에 적이 권율이 파주에 있는 것을 알아내고 앙갚음하려 하여 대군을 이끌고 서쪽 길로 나와 광탄(廣灘)에 이르렀다. 산성에서 몇 리 떨어진 곳인데 군사를 멈추고 나아가지 않았다. 낮부터 저물녘까지 치지 않고 도로 물러갔으며 뒤에는 다시 나오지 않았다. 적이 지형을 알아보고 권율이 웅거한 곳이 험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왕필적에게 글을 보내어 말하였다. 「적이 바야흐로 험한 데 웅거하였으니 참으로 치기 쉽지 않소. 대군은 마땅히 동파와 파주에 나아가 머물며 그 꼬리를 밟아 붙들어 매고, 남쪽 군사 일만을 뽑아 강화에서 한강 남쪽으로 나가 적이 생각하지 못한 틈을 타 여러 진을 쳐부수면, 서울의 적은 돌아갈 길이 끊겨 반드시 용진으로 달아날 것이오. 그때 뒷군으로 여러 나루를 덮치면 한 번에 쓸어 없앨 수 있소.」 왕필적이 무릎을 치며 기이한 계책이라 하고, 정탐꾼 서른여섯 명을 충청도 의병장 이산겸(李山謙)의 진으로 달려 보내어 적의 형세를 살피게 하였다. 그때 적의 날랜 군사는 다 서울에 있고 뒤에 있는 진은 다 여위고 지치고 적었으므로, 정탐꾼들이 뛰듯이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 「일만도 필요 없고 이삼천이면 깨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제독은 북쪽 장수라 이 싸움에서 남쪽 군사를 몹시 억눌렀고, 그들이 공을 이룰까 저어하여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請發軍糧餘粟賑救飢民。許之時賊據京城已二年鋒熖所被千里蕭然百姓不得耕種餓死殆盡城中餘民聞余在東坡扶攜擔負而至者不計其數查總兵於馬山路中見小兒匍匐飲死母乳哀而收之育於軍中謂余曰倭賊未退而人民如此將奈何乃歎息曰天愁地慘矣余聞之不覺流涕時大兵將再至糧船之自南方來者皆列泊江岸不敢他用適全羅道召募官安敏學募得皮穀千石船運而至余喜甚卽狀。啓請以此賑救飢民以前郡守南宮悌爲監賑官取松葉爲層每松屑十分合米屑一合投水以飲之人多穀少所活無幾唐將亦哀之自分所食軍糧三十石賑給百不能及一一日夜大雨飢民在余左右哀吟呻𠿝不可恐聞朝起視之狠藉而死者甚多慶尙右道監司金誠一亦遣前典籍李魯告急于余曰欲糶全羅左道之穀賑濟飢民且爲春耕種子流全羅都事崔鐵堅不肯賑貸時知事金瓉爲體察副使在湖西余卽移文于瓉令馳下全羅自發南原等倉移一萬石于嶺南以救之大抵自京都至南邊賊兵橫貫時方四月人民皆登山入谷無一種麥之處使賊更數月不退則生類盡矣

군량에서 남은 곡식을 내어 주린 백성을 구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셨다.

그때 적이 서울을 차지한 지 이미 두 해라 칼날이 미친 곳이 천 리에 쓸쓸하였고, 백성이 갈고 심지 못하여 굶어 죽은 이가 거의 다였다. 성 안에 남은 백성이 내가 동파에 있다는 말을 듣고 서로 부축하고 이고 지고 오는 이가 헤아릴 수 없었다. 사 총병이 마산(馬山) 길에서 어린아이가 기어가 죽은 어미의 젖을 빠는 것을 보고 가엾이 여겨 거두어 군중에서 기르며 내게 말하였다. 「왜적이 아직 물러가지 않았는데 백성이 이러하니 장차 어찌하겠소.」 그러고는 탄식하며 말하였다. 「하늘이 시름겨워하고 땅이 참혹해하는구나.」 내가 듣고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그때 대군이 다시 오려 하여 남쪽에서 온 양식 배가 다 강가에 늘어서 있었으나 감히 딴 데 쓰지 못하였다. 마침 전라도 소모관 안민학(安敏學)이 겉곡식 천 석을 거두어 배로 실어 왔다. 내가 몹시 기뻐 곧 장계를 올려 이것으로 주린 백성을 구하기를 청하였다. 전 군수 남궁제(南宮悌)를 감진관으로 삼아, 솔잎을 가루로 내어 솔잎 가루 열 몫에 쌀가루 한 몫을 섞고 물에 타서 마시게 하였다. 사람은 많고 곡식은 적어 살린 이가 얼마 되지 않았다. 명나라 장수도 가엾이 여겨 제가 먹을 군량 삼십 석을 덜어 나누어 주었으나 백에 하나도 미치지 못하였다.

하루는 밤에 큰비가 내렸는데, 주린 백성이 내 곁에서 슬피 앓는 소리를 내니 차마 들을 수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여기저기 널브러져 죽은 이가 아주 많았다.

경상우도 감사 김성일(金誠一)도 전 전적 이로(李魯)를 보내어 내게 급함을 알려 왔다. 「전라좌도의 곡식을 풀어 주린 백성을 구하고 또 봄갈이 씨앗으로 삼고자 하는데, 전라 도사 최철견(崔鐵堅)이 꾸어 주려 하지 않습니다.」 그때 지사 김찬(金瓉)이 체찰부사로 호서에 있었으므로, 내가 곧 찬에게 공문을 보내어 전라도로 달려 내려가 남원 등지의 창고를 열어 일만 석을 영남으로 옮겨 구하게 하였다.

대개 서울에서 남쪽 끝까지 적병이 가로질러 꿰뚫고 있었고 때는 바야흐로 사월이었는데, 백성이 다 산에 오르고 골에 들어 보리 한 포기 심은 데가 없었다. 적이 다시 몇 달을 물러가지 않았더라면 살아 있는 것이 다 없어졌을 것이다.

협주 1

저본은 十分이다. 부피가 아니라 비율로 보아 「열 몫」으로 옮겼다. 저본을 맞대어 본 뒤에 확정한다. ― 옮긴이

沈遊擊惟敬再入京城誘賊退兵四月初七日提督率兵自平壤還開城府先是金千鎰陣中有李藎忠者自請入京探候賊情得見二。王子及長溪君黃廷彧等還言賊有講和意旣而賊投書於龍山舟師乞和千鎰送其書於余余念提督已無戰意或欲假此而郤賊則未必不更還開城庶幾了事以其書示查大受查卽使家丁李慶馳報平壤於是提督又使惟敬來金命元見惟敬曰賊忿平壤見欺必有不善意何可更入惟敬曰賊自不速退故敗何預我也遂入在賊中所言雖不聞大槩責還。王子陪臣還軍釜山然後許和賊請奉約束提督遂還開城余呈文提督極言和好非計不如擊之提督批示曰此先得我心之所同然者無聽用意又使遊擊將軍周弘謨往賊營余與金元帥適在權慄陣中遇於坡州弘謨侦余等入參旗牌余日此是入倭營旗牌我何爲參拜且有宋侍郞禁殺賊牌文尤不可承受弘謨强之三四余不答騎馬還東坡弘謨使人于提督言狀提督大怒曰旗牌乃。皇命雖㺚子見輒拜之何爲不拜我行軍法然後回軍接伴使李德馨急報於余曰朝日不可不來謝明日余與金元帥往開城詣門通名提督怒不見金元帥欲退余曰提督應試余姑待之時小雨余二人拱立門外有頃提督之人出門覘視而入者再俄而許入提督立于堂上余就前行禮仍謝曰小的雖甚愚劣豈不知旗牌爲可敬但旗牌傍有牌文不許我國人殺賊私心竊痛之不敢參拜罪無所逃提督有慚色乃曰此言甚是牌文乃宋侍郞令不關吾事因曰此間流言甚多侍郞若聞陪臣不參旗牌我容而不問則必幷責我須爲呈文略辨事情來脫侍郞有間我以此解之不問則置之余二人拜辭而退依所言呈文自是提督遣人往來倭陣相續一日余與元帥往候提督還東坡到天壽亭前遇查將家丁李慶自東坡入開城馬上相揖而過至招賢里有漢人三騎自後馳來喝問體察使安在余應之曰我足也叱回馬一人手持鐵鎖以長鞭亂捶余馬曰走走余不知何事只得回馬向開城而走其人從馬後鞭之不已從者皆落後獨軍官金霽從事辛慶晉盡力追隨過靑郊驛將至土城隅又有一騎自城內走馬而至謂三騎曰云云於是三騎揖余曰可去矣余恍然不測而回翌日因李德馨通示始知之提督信任家丁自外入謂提督曰柳體察不欲講和悉去臨津船隻勿令通使於倭營提督遽發怒欲拿余捆打四十當余之未至也提督瞋目奮臂或坐或起左右皆慄有頃李慶至提督問臨津有船否慶曰有船往來無阻提督卽使人止追余者謂家丁妄言痛打數百氣絕曳出悔其怒余謂人曰若體察使來到吾當何以處之蓋提督常謂余不肯和議素有不平心故纔聞人言不復省察暴怒如此人皆爲余危之後數日提督又使遊擊戚金錢世禎二人以旗牌至東坡招余及金元帥李觀察延馨同坐因從容言賊請出。王子陪臣退還京城而去今當從其所請給賊出城然後行計追勦乃提督使之來探余意肯否也余猶執前議往復不已世禎性躁發怒大罵曰然則爾。國王何以棄城逃避耶余徐曰遷國圖存亦或一道是時戚金但數數視余與世禎微笑而無言世禎等遂回四月十九日提督領大軍至東坡宿于查總兵幕蓋賊已約退兵故將入京城也余詣提督下處候問提督不見謂譯者曰體察使不快於予亦來問耶

유격 심유경이 다시 서울로 들어가 적을 꾀어 군사를 물리게 하였다. 사월 초이렛날 제독이 군사를 이끌고 평양에서 개성부로 돌아왔다.

앞서 김천일의 진중에 이신충(李藎忠)이라는 이가 있어 스스로 서울에 들어가 적정을 살피기를 청하였다. 그가 두 왕자와 장계군 황정욱(黃廷彧) 들을 만나 보고 돌아와 적에게 화친할 뜻이 있다고 말하였다. 이윽고 적이 용산의 수군에게 글을 던져 화친을 빌었고 천일이 그 글을 내게 보내왔다. 나는 제독에게 이미 싸울 뜻이 없으니 혹 이를 빌미로 적을 물리치려 한다면 다시 개성으로 돌아올 수도 있고 그리하여 일이 마무리될지도 모른다고 여겨, 그 글을 사대수에게 보였다. 사대수가 곧 가정 이경(李慶)을 시켜 평양에 달려가 알리게 하였다.

이에 제독이 또 유경을 보냈다. 김명원이 유경을 보고 말하였다. 「적이 평양에서 속은 것을 분히 여기니 반드시 좋지 않은 뜻을 품었을 터인데 어찌 다시 들어가려 하시오.」 유경이 말하였다. 「적이 스스로 빨리 물러나지 않아 진 것이지 나와 무슨 상관이오.」 그러고는 적중에 들어가 있었다. 무슨 말을 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대개 왕자와 배신을 돌려보내고 군사를 부산으로 물린 뒤에야 화친을 허락하겠다고 다그친 것이었다. 적이 그 약속을 받들겠다고 청하였다. 제독이 마침내 개성으로 돌아왔다.

내가 제독에게 글을 올려 화친이 계책이 아니니 치는 것만 못하다고 극진히 말하였다. 제독이 「이는 먼저 내 마음과 같은 바를 얻은 것이오」라고 적어 보였으나 들어 쓸 뜻은 없었다. 또 유격장군 주홍모(周弘謨)를 적진으로 보냈다. 나와 김 원수가 마침 권율의 진중에 있다가 파주에서 그를 만났는데, 홍모가 우리에게 기패(旗牌)에 절하라 하였다. 내가 말하였다. 「이는 왜의 진영에 들어가는 기패인데 내가 어찌 절하겠소. 게다가 송 시랑이 적을 죽이지 말라 한 패문(牌文)까지 붙어 있으니 더욱 받들 수 없소.」 홍모가 서너 번 다그쳤으나 나는 대답하지 않고 말을 타고 동파로 돌아왔다. 홍모가 사람을 보내어 제독에게 알리니 제독이 크게 노하여 말하였다. 「기패는 곧 황제의 명이다. 북쪽 오랑캐(㺚子)라도 보면 절하는 법인데 어찌 절하지 않는가. 내가 군법을 쓴 뒤에 군사를 돌리겠다.」 접반사 이덕형이 급히 내게 알려 왔다. 「내일 와서 사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튿날 나와 김 원수가 개성으로 가서 문에 이르러 이름을 알렸다. 제독이 노하여 보지 않았다. 김 원수가 물러가려 하기에 내가 말하였다. 「제독이 우리를 떠보는 것이니 잠시 기다립시다.」 그때 가는 비가 내렸는데 우리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문 밖에 섰다. 이윽고 제독의 사람이 문에 나와 엿보고 들어가기를 두 번 하더니, 조금 뒤에 들어오라 하였다. 제독이 마루 위에 섰다. 내가 앞으로 나아가 예를 올리고 사죄하여 말하였다. 「소인이 아무리 어리석다 한들 어찌 기패가 공경할 것인 줄 모르겠습니까. 다만 기패 곁에 우리나라 사람이 적을 죽이지 못하게 하는 패문이 있어 마음속으로 아파하다가 감히 절하지 못하였으니 죄를 벗을 길이 없습니다.」 제독이 부끄러운 빛을 띠고 말하였다. 「그 말이 참 옳소. 패문은 송 시랑의 명이라 내 일이 아니오.」 그러고는 말하였다. 「요사이 떠도는 말이 많소. 시랑이 만일 배신이 기패에 절하지 않은 것을 듣고 내가 덮어 두고 묻지 않았다 하면 반드시 나까지 나무랄 것이오. 글을 지어 사정을 대강 밝혀 오시오. 혹 시랑이 나를 흠잡거든 이것으로 풀겠고, 묻지 않으면 그대로 두겠소.」 우리 두 사람은 절하고 물러나 그 말대로 글을 올렸다.

이로부터 제독이 사람을 보내어 왜의 진영을 잇달아 오갔다. 하루는 나와 원수가 제독에게 문안하고 동파로 돌아오다가 천수정(天壽亭) 앞에서 사 장군의 가정 이경이 동파에서 개성으로 들어가는 것을 만나 말 위에서 서로 인사하고 지나쳤다. 초현리(招賢里)에 이르니 명나라 사람 셋이 말을 달려 뒤에서 오며 체찰사가 어디 있느냐고 소리쳐 물었다. 내가 「내가 그 사람이오」 하니, 말을 돌리라고 꾸짖고 한 사람은 손에 쇠사슬을 들고 긴 채찍으로 내 말을 마구 치며 「가자, 가자」 하였다. 나는 무슨 일인지 모른 채 말을 돌려 개성 쪽으로 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이 말 뒤를 따르며 채찍질을 그치지 않았다. 따르던 이들은 다 뒤처지고 군관 김제(金霽)와 종사관 신경진만이 힘을 다해 뒤쫓았다. 청교역(靑郊驛)을 지나 토성 모퉁이에 이르려는데 또 한 사람이 성 안에서 말을 달려 와 세 사람에게 무어라 말하였다. 그러자 세 사람이 내게 읍하며 「가셔도 좋소」 하였다. 나는 어리둥절하여 까닭을 알지 못한 채 돌아왔다.

이튿날 이덕형이 알려 주어 비로소 그 일을 알았다. 제독이 믿고 쓰던 가정이 밖에서 들어와 제독에게 말하기를 「유 체찰이 화친을 바라지 않아 임진의 배를 다 치워 왜의 진영에 사신이 통하지 못하게 합니다」 하였다. 제독이 대뜸 노하여 나를 잡아다 곤장 마흔 대를 치려 한 것이다. 내가 이르기 전에 제독은 눈을 부릅뜨고 팔을 걷어붙이며 앉았다 섰다 하니 좌우가 다 떨었다. 조금 뒤에 이경이 이르자 제독이 임진에 배가 있느냐고 물었다. 경이 「배가 있어 오가는 데 막힘이 없습니다」 하니, 제독이 곧 사람을 보내어 나를 쫓던 자들을 멈추게 하고, 가정이 함부로 말하였다 하여 수백 대를 몹시 쳐서 숨이 끊어지자 끌어내었다. 그리고 제 노여움을 뉘우쳐 사람들에게 「체찰사가 왔더라면 내 어찌 대접하였겠는가」 하였다. 대개 제독은 늘 내가 화의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여 평소 마음이 편치 않았던 터라, 남의 말을 듣자마자 다시 살피지 않고 이처럼 사납게 노한 것이다. 사람들이 다 나를 위태롭게 여겼다.

며칠 뒤에 제독이 또 유격 척금(戚金)과 전세정(錢世禎) 두 사람에게 기패를 들려 동파로 보내어, 나와 김 원수와 관찰사 이연형을 불러 함께 앉히고 조용히 말하였다. 「적이 왕자와 배신을 내놓고 서울에서 물러가겠다 청하오. 이제 그 청을 따라 적에게 성을 나가게 한 뒤에 꾀를 내어 뒤쫓아 치는 것이 좋겠소.」 이는 제독이 그들을 보내어 내 뜻이 어떠한지 떠보게 한 것이었다. 내가 여전히 앞서의 말을 고집하여 주고받기를 그치지 않았다. 세정은 성질이 급하여 노하여 크게 꾸짖었다. 「그렇다면 그대 나라 임금은 어찌하여 성을 버리고 달아나 피하였소.」 내가 천천히 말하였다. 「도읍을 옮겨 나라를 보존하는 것도 한 가지 길이오.」 이때 척금은 그저 나와 세정을 자주 바라보며 빙그레 웃을 뿐 말이 없었다. 세정 들은 마침내 돌아갔다.

사월 열아흐렛날 제독이 대군을 이끌고 동파에 이르러 사 총병의 장막에서 묵었다. 적이 이미 군사를 물리기로 약속하였으므로 서울에 들어가려 한 것이다. 내가 제독이 머무는 곳에 나아가 문안하니 제독이 보지 않고 역관에게 말하였다. 「체찰사가 나를 달가워하지 않는데 문안도 하러 왔는가.」

협주 1

牌文 — 명나라 장수가 내려보내는 공문이다. ― 옮긴이

四月二十日京城復。天兵入城李提督舘於小公主宅前一日賊已出城矣余隨入城見城中遺民百不一存其存者皆飢羸疲困面色如鬼時日氣烘熱人死及馬死者處處暴露臭穢滿城行者揜鼻方過公私廬舍一空獨自崇禮門以東循南山下一帶賊所止舍處稍存。宗廟三闕及鍾樓各司舘學在大街以北者蕩然惟餘灰燼而已小公主宅亦倭將秀嘉所止故見遺余先詣。宗廟痛哭次至提督下處見伺候諸臣號慟良久明朝更詣提督門下問起居且言賊兵纔退去此應不遠願發軍急追提督曰吾意固然所以不急追者以漢江無船故耳余曰如老爺欲追賊卑職當先出江面整備舟艦提督曰甚善余出漢江先是余行文京畿右監司成泳水使李蘋令賊去急收江中大小船母失俱會漢江是時船已到者八十隻余使人報提督船已辦食頃營將李如柏率萬餘兵出江上軍士半渡日已向暮如柏忽稱足疾乃曰當還城中醫疾可進乘轎而回已在漢南軍皆還渡入城余痛心而無如之何蓋提督實無意追賊但以謾辭紿應而已二十三日余遂病臥

사월 스무날에 서울을 되찾았다. 명나라 군사가 성에 들어가고 이 제독은 소공주댁에 묵었다. 하루 전에 적은 이미 성을 나갔다.

내가 따라 성에 들어가 보니 성 안에 남은 백성이 백에 하나도 살아 있지 않았고, 살아 있는 이도 다 주리고 여위고 지쳐 낯빛이 귀신 같았다. 그때 날씨가 찌는 듯 더웠는데 죽은 사람과 죽은 말이 곳곳에 드러나 있어 썩는 냄새가 성에 가득하니, 길 가는 이가 코를 막고 지나갔다. 관가와 사삿집이 모조리 비었고, 다만 숭례문 동쪽에서 남산 아래를 따라 이어진 한 줄기, 적이 머물던 집만 조금 남아 있었다. 종묘와 세 대궐과 종루·각 관아·성균관과 학교로서 큰길 북쪽에 있던 것은 다 무너지고 잿더미만 남았을 뿐이다. 소공주댁도 왜장 수가가 머물던 곳이라 남은 것이다.

나는 먼저 종묘에 나아가 통곡하고, 다음으로 제독이 머무는 곳에 가서 문안하러 온 여러 신하를 만나 한참을 목 놓아 울었다. 이튿날 아침에 다시 제독의 문 아래에 나아가 안부를 여쭙고 말하였다. 「적병이 겨우 물러갔으니 멀리 가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군사를 내어 급히 쫓으소서.」 제독이 말하였다. 「내 뜻도 본래 그렇소. 급히 쫓지 못하는 것은 한강에 배가 없기 때문이오.」 내가 말하였다. 「대인께서 적을 쫓고자 하신다면 제가 먼저 강가로 나가 배를 갖추겠습니다.」 제독이 「아주 좋소」 하였다.

내가 한강으로 나갔다. 앞서 나는 경기 우감사 성영(成泳)과 경기 수사 이빈(李蘋)에게 공문을 보내어, 적이 물러가거든 급히 강에 있는 크고 작은 배를 거두어 잃지 말고 모두 한강에 모으게 하였다. 이때 와 있는 배가 여든 척이었다. 내가 사람을 보내어 제독에게 배가 갖추어졌다고 알렸다. 밥 한 끼 먹을 참이 지나 영장 이여백(李如柏)이 만여 군사를 거느리고 강가로 나왔다. 군사가 반쯤 건넜을 때 날이 이미 저물었는데, 여백이 문득 발이 아프다 하며 「성 안으로 돌아가 병을 고치고 나서 나아가야겠다」 하고는 가마를 타고 돌아갔다. 이미 한강 남쪽에 건너가 있던 군사도 다 도로 건너 성으로 들어갔다. 내가 마음이 아팠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대개 제독은 실로 적을 쫓을 뜻이 없었고 다만 헛말로 건성으로 응하였을 뿐이다. 스무사흗날에 나는 마침내 병이 들어 누웠다.

협주 1

後稱南別宮

뒤에 남별궁이라 불렀다.

五月李提督追賊至聞慶而回宋侍郞始發牌文於提督使之追賊時賊去已數十日侍郞恐人議已縱賊不追故作如此擧止以示之其實畏賊不敢進而回賊在途緩緩而去或留或行我軍之在沿途者皆左右屏跡無敢出擊者賊退分屯於海邊自蔚山西生浦至東萊金海熊川巨濟首尾相連凡十六屯皆依山憑海築城掘塹爲久留計不肯渡海。天朝又使泗川總兵劉綎率福建西蜀南蠻等處召募兵五千繼出屯星州八莒南將吳惟忠屯善山鳳溪李寧祖承訓葛逢夏屯居昌駱尙志王必廸屯慶州環四面而相持不進糧餉取之兩湖踰越險阻散給諸陣民力益困提督又使沈惟敬往諭倭令渡海又使徐一貫謝用榟入郞古耶見關白六月賊始還兩。王子臨海君順和君及宰臣黃延彧黃赫等遣沈惟敬歸報而一面進圍晋州聲言報前年戰敗之怨蓋賊於壬辰圍晋州收使金始敏禦之不克而退故云然也八日而城陷牧使徐禮元判官成守璟倡義使金千鎰本道兵使崔慶會忠淸兵使黃進義兵復讎將高從厚等皆死軍民死者六萬餘人牛馬雞犬不遺賊皆夷城塡壕堙井刋木以快前憤時六月二十八日也初。朝廷聞賊南下連下旨督諸將追賊都元師金命元巡察使權慄以下官義兵皆聚於宜寧慄狃於幸州之捷欲渡岐江前進郭再祐高彥伯曰賊勢方盛我軍多烏合堪戰者少前頭又無糧餉不可輕進他人依違而已李薲從事成好善騃不曉事奮臂責諸將逗遛與權慄議合遂過江進至咸安城空無所得諸軍乏食摘靑柿實以食無復圖心矣明日諜報賊從金海大至衆或言當守咸安或言退守鼎津紛紜不决而已聞賊炮響人人𭰔懼爭出城墮弔橋死者甚多還渡鼎津望見賊兵從水陸來蔽野塞川諸將各自散去權慄金命元李薲崔遠等先向全羅道惟金千鎰崔慶會黃進等入晉州賊隨至圍之牧使徐禮元判官成守璟以唐將支待差使員久在尙州聞賊向本州狠狽而還纔二日矣州城本四面據險壬辰移東面下就平地至是賊立飛樓八座俯瞰城中刈城外竹林作大束環列自蔽以防矢石從其内發鳥銃如雨城中人不敢出頭又千鎰所率皆京城市井召募之徒千鎰又不知兵事而自用太甚且素惡徐禮元主客相猜號令乖違是以甚敗惟黃進守東城戰數日爲飛丸所中死軍人奪氣而外援不至適天雨城壞賊蟻附而入城內人方朿荆投石極力禦之賊幾卻千鎰軍守北門意城已陷先潰賊在山上望見軍潰一擁而登諸軍大亂千鎰在矗石樓與崔慶會攜手痛哭赴江死軍民得脫者數人而已自有倭變以來人死未有如此戰之甚者。朝廷以千鎰死義。贈以崇秩議政府右賛成又以權慄敢戰不畏賊代命元爲元帥劉總兵綎聞晋陷自八莒馳至陝川吳惟忠自鳳溪至草溪以護右道賊亦旣破晉州還釜山聲言待。天朝許和乃渡海云

오월에 이 제독이 적을 쫓아 문경(聞慶)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송 시랑이 그제야 제독에게 패문을 내려 적을 쫓게 하였다. 그때 적이 떠난 지 이미 수십 일이었다. 시랑은 남들이 제가 적을 놓아주고 쫓지 않았다고 말할까 두려워 이렇게 꾸며 보인 것이다. 실은 적을 두려워하여 감히 나아가지 못하고 돌아온 것이다. 적은 길에서 느릿느릿 가며 머물기도 하고 걷기도 하였는데, 길가에 있던 우리 군사는 다 좌우로 자취를 감추고 감히 나가 치는 이가 없었다.

적은 물러가 바닷가에 나뉘어 진을 쳤다. 울산 서생포(西生浦)에서 동래·김해·웅천·거제까지 머리와 꼬리가 서로 이어져 모두 열여섯 진이었는데, 다 산에 기대고 바다를 등지고 성을 쌓고 참호를 파서 오래 머물 셈을 하고 바다를 건너려 하지 않았다.

명나라가 또 사천(四川) 총병 유정(劉綎)에게 복건·서촉·남만 등지에서 모은 군사 오천을 거느리고 잇달아 나오게 하여 성주 팔거(八莒)에 진을 치게 하였다. 남쪽 장수 오유충은 선산 봉계(鳳溪)에, 이녕(李寧)·조승훈(祖承訓)·갈봉하(葛逢夏)는 거창에, 낙상지·왕필적은 경주에 진을 쳐서 사방을 둘러싸고 맞섰으나 나아가지는 않았다. 군량은 호남과 호서에서 가져다가 험한 길을 넘어 여러 진에 나누어 주니 백성의 힘이 더욱 고달팠다.

제독이 또 심유경을 보내어 왜를 타일러 바다를 건너게 하고, 또 서일관(徐一貫)과 사용재(謝用榟)를 낭고야(郞古耶)로 들여보내어 관백을 보게 하였다. 유월에 적이 비로소 두 왕자 임해군(臨海君)·순화군(順和君)과 재신 황정욱·황혁(黃赫) 들을 돌려보내고 심유경을 보내어 알리게 하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나아가 진주를 에워싸고, 지난해 싸움에 진 원한을 갚는다고 큰소리쳤다. 대개 임진년에 적이 진주를 에워쌌을 때 목사 김시민(金時敏)이 막아내어 이기지 못하고 물러갔으므로 그리 말한 것이다.

여드레 만에 성이 떨어졌다. 목사 서예원(徐禮元), 판관 성수경(成守璟), 창의사 김천일, 본도 병사 최경회(崔慶會), 충청 병사 황진(黃進), 의병 복수장 고종후(高從厚) 들이 다 죽고, 죽은 군사와 백성이 육만 남짓이었으며 소·말·닭·개까지 남지 않았다. 적은 성을 헐고 참호를 메우고 우물을 묻고 나무를 베어, 지난날의 분을 풀었다. 유월 스무여드렛날이었다.

처음에 조정이 적이 남쪽으로 내려간다는 말을 듣고 잇달아 교지를 내려 여러 장수에게 적을 쫓기를 다그쳤다. 도원수 김명원과 순찰사 권율 아래로 관군과 의병이 다 의령(宜寧)에 모였다. 권율이 행주에서 이긴 것에 익어 기강(岐江)을 건너 나아가려 하였다. 곽재우(郭再祐)와 고언백이 말하였다. 「적의 형세가 바야흐로 성하고 우리 군사는 오합지졸이 많아 싸울 만한 이가 적으며, 앞에는 또 군량이 없으니 가벼이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다른 이들은 이도 저도 아니었다. 이빈의 종사관 성호선(成好善)이 어리석어 일을 알지 못하면서 팔을 걷어붙이고 여러 장수가 머뭇거린다고 꾸짖으며 권율과 뜻을 맞추었다. 마침내 강을 건너 함안(咸安)에 이르렀으나 성이 비어 얻은 것이 없었다. 여러 군사가 먹을 것이 없어 풋감을 따 먹으니 다시는 싸울 뜻이 없었다.

이튿날 적이 김해에서 크게 몰려온다는 기별이 왔다. 여럿이 함안을 지켜야 한다 하고, 더러는 정진(鼎津)으로 물러나 지켜야 한다 하여 어지러이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그러다 적의 포 소리를 듣자 사람마다 겁을 내어 다투어 성을 나가다가 조교에서 떨어져 죽은 이가 아주 많았다. 정진을 도로 건너 바라보니 적병이 물과 뭍으로 몰려와 들을 덮고 내를 메웠다. 여러 장수가 저마다 흩어져 갔다. 권율·김명원·이빈·최원(崔遠) 들은 먼저 전라도로 향하고, 오직 김천일·최경회·황진 들만 진주로 들어갔다. 적이 뒤따라 이르러 에워쌌다.

목사 서예원과 판관 성수경은 명나라 장수를 치다꺼리하는 차사원으로 오래 상주에 있다가, 적이 제 고을로 향한다는 말을 듣고 낭패하여 돌아왔는데 겨우 이틀 되었을 때였다. 고을 성은 본래 사면이 험한 데 기대었는데, 임진년에 동쪽 면을 아래로 옮겨 평지에 붙였다. 이때 적이 날 듯한 다락 여덟 채를 세워 성 안을 굽어보고, 성 밖 대숲을 베어 큰 단으로 묶어 둘러 세워 몸을 가리고 화살과 돌을 막으면서, 그 안에서 조총을 비 오듯 쏘아 대니 성 안 사람이 감히 머리를 내밀지 못하였다.

또 천일이 거느린 이들은 다 서울 저자에서 모은 무리였고, 천일은 군사 일을 모르면서 제 고집이 너무 세었으며, 평소 서예원을 미워하여 성을 지키던 쪽과 들어온 쪽(主客)이 서로 꺼리고 호령이 어긋났으니 이 때문에 크게 진 것이다. 오직 황진만이 동쪽 성을 지켜 며칠을 싸우다가 날아온 총알에 맞아 죽으니 군사들이 기운을 잃었고 밖에서 돕는 군사도 오지 않았다. 마침 하늘에서 비가 내려 성이 무너지자 적이 개미처럼 붙어 들어왔다. 성 안 사람들이 가시를 묶어 던지고 돌을 던지며 힘껏 막아 적이 거의 물러날 뻔하였다. 그런데 북문을 지키던 천일의 군사가 성이 이미 떨어진 줄 알고 먼저 무너졌다. 산 위에 있던 적이 군사가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고 한꺼번에 몰려 올라오니 여러 군사가 크게 어지러워졌다. 천일이 촉석루(矗石樓)에서 최경회와 손을 잡고 통곡하다가 강에 뛰어들어 죽었다. 군사와 백성 가운데 벗어난 이가 몇 사람뿐이었다. 왜란이 일어난 뒤로 사람이 죽은 것이 이 싸움처럼 심한 적이 없었다.

조정에서는 천일이 의리를 위해 죽었다 하여 의정부 우찬성의 높은 벼슬을 내렸다. 또 권율이 과감히 싸우고 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여 김명원을 대신하여 원수로 삼았다. 총병 유정은 진주가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 팔거에서 합천으로 달려오고, 오유충은 봉계에서 초계로 와서 우도를 지켰다. 적도 진주를 깨뜨리고 나서 부산으로 돌아가, 명나라가 화친을 허락하기를 기다려 바다를 건너겠다고 큰소리쳤다.

十月。車駕還都十二月。天使行人司行人司憲來

시월에 임금의 수레가 서울로 돌아왔다. 십이월에 명나라 사신 사헌(司憲)이 왔다.

협주 1

사헌은 명나라 행인사(行人司)의 행인 벼슬을 지닌 사람이다.

先是沈惟敬挾倭將小西飛持關白降表而歸。天朝疑降表非出於關酋行長等詐爲之又惟敬纔至而晉州見陷納欵之意不誠留小西飛於遼東久不報時提督及諸將皆還去惟劉綎吳惟忠王必廸等萬餘兵駐箚八莒而中外飢甚且困於饋運老弱顚溝壑壯者爲盜賊重以癘疫死亡殆盡至父子夫婦相食暴骨如莾未幾劉軍自八莒移南原又自南原還都城留十餘日逡巡西去而賊猶在海上人心益恐於是經略宋應昌被劾去新經略顧養謙代至遼東遣參將胡澤以箚付來論我群臣其略曰倭奴無端侵爾勢如破竹據王京開城三都會有爾土地人民十八九虜爾。王子陪臣。皇上赫怒興師一戰而破平壤再進而得開城倭奴竟遁王京送還。王子陪臣復地二千餘里所費帑金不貲士馬物故亦不少。朝廷之待屬國恩義止此。皇上罔極之恩亦已過矣今餉已不可再運矣兵已不可再用矣而倭奴亦畏威請降且乞封貢矣。天朝正宜許之封貢容之爲外臣驅倭盡數渡海不復侵爾解棼息兵所以爲爾國久遠計也今爾國糧盡人民相食又何恃而請兵耶旣不與兵餉於爾國又絕封貢於倭奴倭奴必發怒於爾國而爾國必亡安可不早自爲計耶昔句踐之困於會稽也豈不欲食夫差之肉乎而姑忍恥含垢以有待也身且爲臣也妻且爲妾也况爲倭奴請爲臣妾於中國以自寬而徐爲之圖是愈於句踐君臣之謀也此而不能恐是悻悻小丈夫之見耳非復讎雪恥之英雄也爾爲倭請封貢若果得請則倭必益感中國而且德朝鮮必罷兵而去倭去而爾國君臣遂苦心焦思臥薪甞膽以修句踐之業天道好還安知無報倭日也其言縷縷千百大意如此胡澤在舘三月餘朝議不决。聖意愈難之臣時以病在告。啓曰請封義固不可惟當詳具近日事情。奏聞以聽。中朝處置屢啓乃。允於是陳奏使許頊去時顧經略又以人言辭去新經略孫鑛來代兵部奏請收小西飛入京詰以三事一但求封不求貢二一倭不留釜山三永不侵朝鮮如約卽封不如約不可小西飛指天爲誓請遵約束遂令沈惟敬更帶小西飛入倭營宣諭又差李宗誠楊方亨爲上副使往封平秀吉日本國王而使宗誠等留我都城候倭盡撤方行乙未四月宗誠等至漢城連遣使促倭渡海項背相望於是倭先撤熊川數陣及巨濟塲門蘇津浦等諸屯以示信且曰恐如平壤見欺願。天使速入倭營當悉如約八月楊方亨因兵部箚付先到釜山而倭遷延不卽盡撒更請上使人多疑之兵部尙書石星信沈惟敬言意倭無異情又急於退兵屢促宗誠前去雖朝議多異而星奮然以身當之九月宗誠繼至釜山平行長不卽來見又言將往復關白定奪然後迎。天使行長入日本丙申正月始回猶不明言撤兵事沈惟敬留二使又獨與行長先行渡海託言將講定迎使禮節人莫能測惟敬錦衣登舟旗上大書調戢兩國四字立船頭而去旣去久無回報李宗誠乃開國功臣文忠之後以功襲爵紈袴子弟性頗恇㥘或言於宗誠曰倭酋實無受封意將誘致宗誠等拘囚而困辱之宗誠懼甚夜半以微服出營盡棄僕從輜重印節而逃翌朝倭始覺分道追之至梁山石橋不得而回楊方亨獨留倭營撫戢群倭且移文我國令勿驚動宗誠不敢由大路竄入山谷中數日不食從慶州來西去旣而沈惟敬行長始回又撒西生浦竹島等屯其未撒者只釜山四屯乃挾楊副使過海沈惟敬又要我使同行遣其姪沈𢠘時催發。朝廷不肯𢠘時必欲與偕不得已以武臣李逢春等稱跟隨陪臣以應之或謂武人往彼中多失誤宜使文官識事理者往昔黃愼以沈接伴使在倭營就令愼隨行

앞서 심유경이 왜장 소서비(小西飛)를 데리고 관백의 항복 문서를 가지고 돌아갔다. 명나라는 그 항복 문서가 관백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행장 들이 거짓으로 지은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또 유경이 막 이르렀을 때 진주가 떨어진 터라 귀순하겠다는 뜻이 참되지 않다 하여, 소서비를 요동에 붙들어 두고 오래도록 회보하지 않았다.

그때 제독과 여러 장수가 다 돌아가고 오직 유정·오유충·왕필적 들의 군사 만여 명만이 팔거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나라 안팎이 몹시 주리고 또 실어 나르는 일에 시달려, 늙고 약한 이는 도랑에 굴러 죽고 젊은 이는 도적이 되었다. 게다가 돌림병까지 겹쳐 죽은 이가 거의 다였고, 아비와 자식이, 지아비와 아내가 서로 잡아먹기에 이르렀으며 드러난 뼈가 풀숲 같았다.

얼마 안 되어 유정의 군사가 팔거에서 남원으로 옮기고, 다시 남원에서 서울로 돌아와 열흘 남짓 머물다가 머뭇거리며 서쪽으로 가 버렸다. 적은 여전히 바닷가에 있으니 인심이 더욱 두려워하였다.

이때 경략 송응창이 탄핵을 받아 물러나고 새 경략 고양겸(顧養謙)이 대신하여 요동에 이르러, 참장 호택(胡澤)을 보내어 공문(箚付)을 가지고 와서 우리 신하들을 타이르게 하였다. 그 글은 대강 이러하였다.

「왜노가 까닭 없이 그대들을 침노하여 그 기세가 대를 쪼개는 듯하였다. 서울과 개성과 평양 세 도회를 차지하고 그대들의 땅과 백성 열에 여덟아홉을 가졌으며 그대들의 왕자와 배신을 사로잡았다. 황상께서 크게 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한 번 싸워 평양을 깨뜨리고 두 번 나아가 개성을 얻으니 왜노가 마침내 서울에서 달아나 왕자와 배신을 돌려보내고 이천여 리 땅을 되찾았다. 쓴 나라 돈이 헤아릴 수 없고 죽은 군사와 말도 적지 않았다. 조정이 속국을 대접한 은혜와 의리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황상의 끝없는 은혜도 이미 지나치다.

이제 군량은 다시 실어 나를 수 없고 군사도 다시 쓸 수 없는데, 왜노 또한 위엄을 두려워하여 항복을 청하고 봉작과 조공을 빌고 있다. 명나라는 마땅히 봉작과 조공을 허락하여 밖의 신하로 받아들이고, 왜를 몰아 모조리 바다를 건너가 다시는 그대들을 침노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얽힌 것을 풀고 군사를 쉬게 하는 것이 옳다. 이것이 그대 나라를 위한 오랜 계책이다.

이제 그대 나라는 양식이 다하여 백성이 서로 잡아먹는 판인데 또 무엇을 믿고 군사를 청하는가. 이미 그대 나라에 군사와 군량을 주지 않고 또 왜노에게 봉작과 조공을 끊어 버리면, 왜노는 반드시 그대 나라에 노여움을 터뜨릴 것이요 그대 나라는 반드시 망할 것이니 어찌 일찍 스스로 꾀하지 않겠는가.

옛날 구천(句踐)이 회계산(會稽山)에서 곤경에 처하였을 때 어찌 부차(夫差)의 살을 씹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러면서도 잠시 부끄러움을 참고 욕을 머금으며 때를 기다려, 제 몸은 신하가 되고 아내는 첩이 되었다. 하물며 왜노를 위하여 중국에 신하와 첩이 되기를 청하고 그로써 스스로 숨을 돌리며 천천히 도모하는 것은 구천의 임금과 신하가 꾀한 것보다 나은 일이다. 이것도 하지 못한다면 아마 발끈하는 좁은 사내의 소견일 뿐이요 원수를 갚고 부끄러움을 씻는 영웅은 아니다.

그대들이 왜를 위하여 봉작과 조공을 청하여 만일 뜻대로 된다면, 왜는 반드시 중국을 더욱 고맙게 여기고 조선도 은덕으로 알아 반드시 군사를 거두어 갈 것이다. 왜가 간 뒤에 그대 나라 임금과 신하가 마음을 괴롭히고 애를 태우며 섶에 눕고 쓸개를 맛보아 구천의 일을 닦는다면, 하늘의 이치는 돌고 도는 것이니 왜에게 갚을 날이 없으리라고 어찌 알겠는가.」

그 말이 천 마디 백 마디로 늘어졌으나 큰 뜻은 이러하였다.

호택이 객관에 석 달 남짓 머무는 동안 조정의 의논이 정해지지 않았고 임금의 마음은 더욱 어려워하셨다. 나는 그때 병으로 물러나 있었는데, 글을 올려 아뢰었다. 「봉작을 청하는 것은 의리로 보아 참으로 옳지 않습니다. 다만 요사이 사정을 자세히 갖추어 아뢰고 명나라의 처치를 따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여러 번 아뢰어 비로소 윤허를 받았다. 이에 진주사 허욱이 갔다.

그때 고 경략도 남의 말로 물러나고 새 경략 손광(孫鑛)이 와서 대신하였다. 병부에서 아뢰어 소서비를 서울로 불러들여 세 가지 일을 따져 물었다. 첫째는 봉작만 구하고 조공은 구하지 말 것, 둘째는 왜 한 사람도 부산에 남기지 말 것, 셋째는 길이 조선을 침노하지 말 것이었다. 약속대로 하면 곧 봉하고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 하였다. 소서비가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며 약속을 지키겠다 하였다.

마침내 심유경에게 다시 소서비를 데리고 왜의 진영에 들어가 타이르게 하고, 또 이종성(李宗誠)과 양방형(楊方亨)을 상사와 부사로 삼아 평수길을 일본 국왕으로 봉하러 가게 하되, 종성 들은 우리 서울에 머물러 왜가 다 물러가기를 기다린 뒤에 가게 하였다.

을미년 사월에 종성 들이 한성에 이르러 잇달아 사람을 보내어 왜에게 바다를 건너기를 재촉하니 오가는 이가 앞뒤로 이어졌다. 이에 왜가 먼저 웅천의 몇 진과 거제 장문포(塲門浦)·소진포(蘇津浦) 들의 여러 진을 거두어 믿음을 보이고 말하였다. 「평양에서처럼 속을까 두려우니, 바라건대 명나라 사신이 빨리 왜의 진영으로 들어오면 다 약속대로 하겠소.」

팔월에 양방형이 병부의 공문을 받아 먼저 부산에 이르렀는데, 왜가 미루며 곧 다 거두지 않고 다시 상사를 청하니 사람들이 많이 의심하였다. 병부상서 석성(石星)은 심유경의 말을 믿어 왜에게 딴 뜻이 없다고 여겼고, 또 군사를 물리는 데 급하여 여러 번 종성에게 앞으로 나아가기를 재촉하였다. 조정의 의논이 다른 이가 많았으나 석성이 떨쳐 일어나 제 몸으로 맡았다. 구월에 종성이 잇달아 부산에 이르렀는데 평행장이 곧 와서 보지 않고, 또 관백에게 가서 결정을 받은 뒤에 명나라 사신을 맞겠다고 하였다. 행장이 일본에 들어갔다가 병신년 정월에야 돌아왔는데도 군사를 거두는 일은 밝게 말하지 않았다. 심유경은 두 사신을 남겨 두고 또 홀로 행장과 함께 먼저 바다를 건너면서, 사신 맞는 예절을 의논하여 정하겠다고 핑계하니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었다. 유경은 비단옷을 입고 배에 올라 깃발에 「두 나라를 고르게 한다」는 넉 자를 크게 써서 뱃머리에 세우고 갔다.

떠난 뒤에 오래도록 회보가 없었다. 이종성은 개국공신 이문충(李文忠)의 후손으로 조상의 공으로 벼슬을 이은 귀한 집 자제라 성품이 자못 겁이 많았다. 어떤 이가 종성에게 말하였다. 「왜의 괴수는 실로 봉작을 받을 뜻이 없고, 장차 종성 들을 꾀어 붙들어 가두고 욕을 보이려 합니다.」 종성이 몹시 두려워하여 한밤중에 허름한 옷으로 진영을 빠져나가, 종과 짐과 인장과 절월을 다 버리고 달아났다. 이튿날 아침에야 왜가 알고 길을 나누어 쫓아 양산 석교(石橋)까지 갔다가 잡지 못하고 돌아왔다. 양방형만이 왜의 진영에 남아 왜의 무리를 다독이고, 또 우리나라에 공문을 보내어 놀라 움직이지 말라 하였다. 종성은 감히 큰길로 가지 못하고 산골짜기로 숨어들어 며칠을 굶었으며, 경주를 거쳐 서쪽으로 갔다.

이윽고 심유경과 행장이 비로소 돌아와 서생포와 죽도(竹島) 등의 진을 또 거두니, 거두지 않은 것은 부산의 네 진뿐이었다. 그러고는 양 부사를 데리고 바다를 건넜다. 심유경이 또 우리 사신도 함께 가기를 요구하여 제 조카 심무시(沈懋時)를 보내어 떠나기를 재촉하였다. 조정에서 내키지 않아 하였으나 무시가 기어이 함께 가려 하므로, 마지못해 무신 이봉춘(李逢春) 들을 딸려 보내는 배신이라 일컬어 응하였다. 어떤 이가 「무인이 그곳에 가면 그르치는 일이 많을 것이니 사리를 아는 문관을 보내야 한다」 하였다. 그때 황신(黃愼)이 심유경의 접반사로 왜의 진영에 있었으므로 곧 황신에게 따라가게 하였다.

天使楊方亨沈惟敬回自日本先是方亨等至日本關白盛飾舘宇欲迎接會一夜地大震摧倒幾盡遂迎候於他舍與兩使一再會初若受封者然忽大怒曰我放還朝鮮。王子朝鮮當使。王子來謝而使臣秩卑是慢我也黃愼等不得傳。命幷促楊方亨沈惟散等同回亦無謝恩。天朝之禮賊將平行長回釜山浦淸正復率兵繼屯西生浦聲言要。王子來謝始解兵蓋關酋所求甚大不止封貢。中朝但許封不許貢惟敬與平行長相熟欲臨事𦇯縫苟且成事而不以實情聞諸。天朝與我國事竟不諧本國卽遣使馳奏其事於是石星沈惟敬皆得罪而。天兵再出矣

명나라 사신 양방형과 심유경이 일본에서 돌아왔다.

앞서 방형 들이 일본에 이르니 관백이 객관을 잔뜩 꾸며 맞으려 하였는데, 마침 하룻밤 사이에 땅이 크게 흔들려 거의 다 무너졌으므로 다른 집에서 맞았다. 두 사신과 한두 번 만났을 때에는 처음에 봉작을 받을 듯하더니, 문득 크게 노하여 말하였다. 「내가 조선의 왕자를 놓아 보냈으니 조선은 마땅히 왕자를 보내어 사례해야 할 터인데, 사신의 품계가 낮으니 이는 나를 업신여기는 것이다.」

황신 들은 임금의 명을 전하지도 못하였고, 아울러 양방형과 심유경 들을 재촉하여 함께 돌아가게 하였으며 명나라에 은혜를 사례하는 예도 없었다. 적장 평행장은 부산포로 돌아오고 청정은 다시 군사를 이끌고 잇달아 서생포에 진을 치고는, 왕자가 와서 사례해야 군사를 풀겠다고 큰소리쳤다.

대개 왜의 괴수가 바라는 바가 아주 커서 봉작과 조공에 그치지 않았는데, 명나라는 봉작만 허락하고 조공은 허락하지 않았다. 심유경은 평행장과 친하여 일에 닥쳐 얽어 꿰매 어름어름 일을 이루려 하였고, 참된 사정을 명나라와 우리나라에 알리지 않았으므로 일이 끝내 어그러진 것이다. 우리나라가 곧 사신을 보내어 그 일을 달려가 아뢰니, 이에 석성과 심유경이 다 죄를 입고 명나라 군사가 다시 나오게 되었다.

逮水軍統制使李舜臣下獄初元均德舜臣來救相得甚歡旣而爭功漸不相能均性險詖且多連結於中外搆誣舜臣不遺餘力每言舜臣初不欲來因我固請乃至勝敵我爲首功時朝論分岐各有所主薦舜臣初爲余不悅余者與元均合攻舜臣甚力惟右相李元翼明其不然且曰舜臣與元均各有分守之地初不卽進未足深非先是賊將平行長使卒倭要時羅往來慶尙右兵使金應瑞陣致慇懃方淸正欲再出也時羅密言於應瑞曰我將行長言今此和事不成由於淸正吾甚疾之某日淸正當渡海朝鮮善水戰若要諸海中可以敗殺愼母失也應瑞上其事。朝議信之海平君尹根壽尤踊躍以爲機會難失屢。啓之連催舜臣前進舜臣疑賊有詐遲徊者累日至是要時羅又至曰淸正今已下陸朝鮮何不要截佯致恨惜之意事聞延議皆咎舜臣臺諫請拿鞫玄風人前縣監朴惺者亦承望時論。上䟽極言舜臣可斯遂遣義禁府都事拿來元均代爲統制使。上猶疑所聞不盡實特遣成均司成南以信下閑山廉察以信旣入全羅道軍民遮道訟舜臣寃者不可勝數以信不以實聞乃曰清正留海島七日我軍若往可縛來而舜臣逗遛失機舜臣至獄。命大臣議罪獨判中樞府事鄧琢言舜臣名將不可殺軍機利害難可遥度其不進未必無意請寬恕以責後效栲問一次减死削職充軍舜臣老母在牙山聞舜臣下獄憂悸而死舜臣出獄道過牙山成服卽往權慄帳下從軍人聞而悲之

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을 잡아 옥에 가두었다.

처음에 원균(元均)은 순신이 와서 구해 준 것을 고맙게 여겨 서로 아주 기뻐하였으나, 이윽고 공을 다투면서 점점 사이가 나빠졌다. 균은 성품이 음험하고 간사하며 또 나라 안팎으로 이어 댄 데가 많아, 순신을 얽어 모함하는 데 힘을 아끼지 않았다. 늘 말하기를 「순신이 처음에는 오려 하지 않았는데 내가 굳이 청하여 왔으니, 적을 이긴 것은 내가 으뜸 공이다」 하였다.

그때 조정의 의논이 갈려 저마다 두둔하는 데가 있었다. 순신을 천거한 것이 처음에 나였으므로, 나를 좋아하지 않는 이들이 원균과 손잡고 순신을 몹시 공격하였다. 오직 우의정 이원익만이 그렇지 않음을 밝히고 또 말하였다. 「순신과 원균은 저마다 나누어 지키는 땅이 있으니, 처음에 곧 나아가지 않은 것을 깊이 나무랄 것이 못 됩니다.」

앞서 적장 평행장이 졸개 왜인 요시라(要時羅)를 경상우병사 김응서의 진에 드나들게 하여 은근한 뜻을 보였다. 청정이 다시 나오려 할 즈음에 요시라가 응서에게 몰래 말하였다. 「우리 장수 행장이 말하기를, 이번 화친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청정 때문이라 내가 몹시 미워한다 하였소. 아무 날에 청정이 바다를 건널 것이오. 조선은 바다 싸움을 잘하니 바다 가운데서 맞받아치면 이겨 죽일 수 있소. 부디 놓치지 마시오.」

응서가 그 일을 아뢰니 조정의 의논이 믿었다. 해평군 윤근수(尹根壽)가 더욱 뛰듯이 기뻐하며 놓칠 수 없는 기회라 하여 여러 번 아뢰고 잇달아 순신에게 나아가기를 재촉하였다. 순신은 적에게 속임수가 있는가 의심하여 여러 날 머뭇거렸다. 이때 요시라가 또 와서 「청정이 이제 이미 뭍에 내렸는데 조선은 어찌 막아 끊지 않았소」 하며 짐짓 안타까워하는 뜻을 보였다.

이 일이 알려지자 조정의 의논이 다 순신을 허물하였고 대간이 잡아다 국문하기를 청하였다. 현풍 사람 전 현감 박성(朴惺)이라는 이도 그때의 의논에 맞추어 상소를 올려 순신을 베어야 한다고 극언하였다. 마침내 의금부 도사를 보내어 잡아 오고 원균으로 통제사를 삼았다.

임금은 그래도 들리는 말이 다 사실은 아닐 것이라 의심하여, 특별히 성균 사성 남이신(南以信)을 한산도로 내려보내어 살피게 하였다. 이신이 전라도에 들어서자 군사와 백성이 길을 막고 순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런데 이신은 사실대로 아뢰지 않고 이렇게 말하였다. 「청정이 바닷섬에 이레를 머물렀으니 우리 군사가 갔더라면 묶어 올 수 있었을 터인데, 순신이 머뭇거려 기회를 놓쳤습니다.」

순신이 옥에 이르자 대신들에게 죄를 의논하게 하셨다. 오직 판중추부사 정탁(鄭琢)만이 말하였다. 「순신은 이름난 장수이니 죽여서는 안 됩니다. 군사의 기미와 이해는 멀리서 헤아리기 어려우니 그가 나아가지 않은 데에도 반드시 뜻이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너그러이 용서하여 뒷날의 공으로 갚게 하소서.」 한 차례 고문한 뒤에 죽음을 덜어 벼슬을 빼앗고 군에 충당하였다.

순신의 늙은 어머니가 아산에 있었는데 순신이 옥에 갇혔다는 말을 듣고 근심과 놀람으로 세상을 떠났다. 순신은 옥에서 나와 길에 아산을 지나며 상복을 입고, 곧바로 권율의 장막 아래로 가서 군사를 따랐다. 사람들이 듣고 슬퍼하였다.

天朝以兵部尙書郉玠爲總督軍門遼東布政司楊鎬爲經理朝鮮軍務麻貴爲大將楊元劉綎董一元等相繼而出丁酉五月楊元領三千兵先至留京城數日下全羅道駐守南原蓋南原據湖嶺之衝城頗堅完往時駱尙志又增築可守故也城外有蛟龍山城衆議欲守山城楊元以爲本城可守增埤浚濠濠內又設羊馬墻晝夜董役月餘粗完

명나라가 병부상서 형개(邢玠)를 총독군문으로, 요동 포정사 양호(楊鎬)를 조선 군무를 맡은 경리로 삼고, 마귀(麻貴)를 대장으로 삼았으며 양원·유정·동일원(董一元) 들이 잇달아 나왔다.

정유년 오월에 양원이 군사 삼천을 거느리고 먼저 이르러 서울에 며칠 머물다가 전라도로 내려가 남원에 머물러 지켰다. 남원은 호남과 영남이 맞닿는 목을 차지하고 있고 성이 자못 굳고 온전하였으며, 지난날 낙상지가 또 더 쌓아 지킬 만하였기 때문이다. 성 밖에 교룡산성(蛟龍山城)이 있어 여럿이 산성을 지키자고 의논하였으나, 양원은 본성을 지킬 만하다 하여 담을 더 쌓고 해자를 깊이 파고 해자 안에 또 양마장(羊馬墻)을 둘러, 밤낮으로 일을 다그친 지 한 달 남짓에 대강 마쳤다.

八月初七日閑山舟師潰統制使元均全羅右水使李億祺死慶尙右水使裵楔走免初元均旣至閑山盡變舜臣約束凡褊裨士卒稍爲舜臣所任使者皆斥去以李英男詳知已前日奔敗狀尤惡之軍心怨憤舜臣在閑山時作堂名曰運籌日夜處其中與賭將共論兵事雖下卒欲言軍事者許來告以通軍情每將戰悉招褊裨問計謀定而後戰故無敗事均挈愛妾居其堂以重籬隔內外諸將罕見其面又嗜酒日事𨠯怒刑罰無度軍中竊語曰若遇賊惟有走耳諸將私相譏笑亦不復稟畏故號令不行時賊將再入寇平行長又遣要時羅紿金應瑞曰倭船某日當添至朝鮮舟師猶可邀擊都元帥權慄尤信其說且以李舜臣以逗遛已得罪日促元均進兵均亦常言舜臣見賊不進以此陷舜臣而已得代其任至是雖知其勢難而慙無以爲辭只得盡率舟艦進前倭營之在岸上者俯視船行互相傳報均至絕影島風作浪起日已昏船無止泊處望見倭船出沒海中均督諸軍進前舟中人自閑山終日搖櫓不得休息又困飢渴疲不能運船諸船縱橫進退乍前乍郤倭欲疲之與我船相近輒倘佯引避而去不與交鋒夜深風盛我船四散分漂不知去向均艱收餘船還至加德島軍士渴甚爭下船取水倭兵從島中突出揜之失將士四百餘人均又引退至巨濟㓒川島權慄在固城以均無所得檄召均杖之督令更進均還到軍中益忿懣飲酒醉臥諸將欲見均言事不得夜半倭船來襲之軍大潰均走至海邊棄舟登岸欲走而體肥鈍坐松樹下左右皆散或言爲賊所害或言走免終不得其實李億祺從船上投水裴楔先是屢諫均必敗是日又言㓒川島淺窄不利行船宜移陣他處均皆不聽楔私約所領船戒嚴待變見賊來犯奪港先走故其軍獨全楔還至閑山島縱火焚廬舍糧穀軍器徙餘民之留在島中者使避賊而去閑山旣敗賊乘勝西向南海順天次第陷沒賊船至豆恥津下陸進圍南原兩湖大震蓋賊自壬辰入我境惟見敗於舟師平秀吉憤之責行長必取舟師行長佯輪款於金應瑞使李舜臣得罪又誘元均出海中盡得其虛實因行掩襲其計至巧而我悉墮其計中哀哉

팔월 초이렛날에 한산도의 수군이 무너지고 통제사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가 죽었으며,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은 달아나 벗어났다.

처음에 원균이 한산도에 이르자 이순신이 세운 규약을 모조리 뜯어고치고, 거느린 장수들과 군졸 가운데 조금이라도 순신이 부리던 이는 다 물리쳤다. 이영남(李英男)이 원균이 지난날 달아나 진 일을 자세히 안다 하여 더욱 미워하니 군심이 원망하고 분해하였다.

순신이 한산도에 있을 때 집을 짓고 이름을 운주당(運籌堂)이라 하여 밤낮으로 그 안에 있으면서 여러 장수와 함께 군사 일을 의논하였다. 아래 군졸이라도 군사 일을 말하려는 이가 있으면 와서 고하게 하여 군중의 사정을 통하였다. 싸우려 할 때마다 거느린 장수들을 다 불러 계책을 묻고 꾀가 정해진 뒤에 싸웠으므로 지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균은 사랑하는 첩을 데려다 그 집에 살면서 울타리를 겹으로 둘러 안팎을 막으니 여러 장수가 그 얼굴을 보는 일이 드물었다. 또 술을 즐겨 날마다 술주정으로 성을 내고 형벌에 법도가 없었다. 군중에서 몰래 말하기를 「적을 만나면 달아나는 수밖에 없다」 하였고, 여러 장수도 저희끼리 비웃으며 다시 여쭙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으니 호령이 서지 않았다.

그때 적이 다시 쳐들어오려 하면서 평행장이 또 요시라를 보내어 김응서를 속여 말하였다. 「왜의 배가 아무 날에 더 올 것이니 조선 수군이 아직 맞받아 칠 만하오.」 도원수 권율이 그 말을 더욱 믿었고, 또 이순신이 머뭇거렸다 하여 죄를 입은 터라 날마다 원균에게 군사를 내기를 재촉하였다. 균도 늘 순신이 적을 보고도 나아가지 않는다고 말하여 그것으로 순신을 빠뜨리고 제가 그 자리를 대신한 터라, 이때 형세가 어려운 줄 알면서도 부끄러워 할 말이 없어 배를 다 거느리고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언덕 위에 있던 왜의 진영에서 배가 가는 것을 굽어보고 서로 알렸다. 균이 절영도(絕影島)에 이르자 바람이 일고 물결이 일어나는데 날이 이미 저물어 배를 댈 곳이 없었다. 왜의 배가 바다 가운데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을 바라보고 균이 여러 군사를 다그쳐 앞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배 안 사람들은 한산도에서부터 온종일 노를 저어 쉬지 못한 데다 주리고 목말라 지쳐서 배를 움직이지 못하니, 여러 배가 이리저리 나아가고 물러나며 앞섰다 뒤섰다 하였다. 왜는 우리를 지치게 하려고 우리 배가 가까워지면 그때마다 어정거리며 물러나 피하고 칼날을 맞대지 않았다. 밤이 깊어 바람이 거세지자 우리 배는 사방으로 흩어져 떠내려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균이 겨우 남은 배를 거두어 가덕도(加德島)로 돌아왔다. 군사들이 목이 몹시 말라 다투어 배에서 내려 물을 뜨는데, 왜병이 섬 안에서 갑자기 나와 덮치니 장졸 사백여 명을 잃었다. 균이 또 물러나 거제 칠천도(漆川島)에 이르렀다. 권율은 고성에 있다가 균이 얻은 것이 없다 하여 격문으로 불러 곤장을 치고 다시 나아가기를 다그쳤다. 균이 군중에 돌아와 더욱 분하고 답답하여 술을 마시고 취해 누우니, 여러 장수가 균을 보고 일을 말하려 하여도 만날 수 없었다.

한밤중에 왜의 배가 와서 들이치니 군사가 크게 무너졌다. 균은 바닷가로 달아나 배를 버리고 뭍에 올라 달아나려 하였으나 몸이 살쪄 굼떠서 소나무 아래에 앉았는데 좌우가 다 흩어졌다. 적에게 해를 입었다고도 하고 달아나 벗어났다고도 하나 끝내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이억기는 배 위에서 물에 뛰어들었다.

배설은 앞서 여러 번 균에게 반드시 지리라고 간하였고, 이날도 「칠천도는 얕고 좁아 배를 부리기에 이롭지 않으니 마땅히 다른 데로 진을 옮겨야 한다」고 말하였으나 균이 다 듣지 않았다. 설이 제가 거느린 배와 몰래 약속하여 엄히 지키며 변을 기다리다가, 적이 와서 침노하는 것을 보고 포구를 빠져나와 먼저 달아났으므로 그 군사만이 온전하였다. 설이 한산도로 돌아와 집과 곡식과 병장기에 불을 놓아 태우고, 섬 안에 남아 있던 백성을 옮겨 적을 피하게 하고 떠났다.

한산도가 무너지자 적이 이긴 기세를 타고 서쪽으로 향하여 남해와 순천이 차례로 떨어졌다. 적의 배가 두치진(豆恥津)에 이르러 뭍에 내려 나아가 남원을 에워싸니 호남과 호서가 크게 흔들렸다.

대개 적은 임진년에 우리 땅에 들어온 뒤로 오직 수군에게만 졌다. 평수길이 이를 분히 여겨 행장에게 반드시 수군을 잡으라고 다그쳤다. 행장이 김응서에게 거짓으로 정성을 바치는 체하여 이순신이 죄를 입게 하고, 또 원균을 꾀어 바다 가운데로 나오게 하여 그 허실을 다 알아낸 뒤에 덮쳐 친 것이다. 그 꾀가 아주 교묘하였는데 우리는 그 꾀에 모조리 빠졌으니 슬프다.

倭兵陷黃石山城安陰縣監郭䞭前咸安郡守趙宗道死之初體察使李元翼元帥權慄議修道內山城禦賊築公山金烏龍紀富山等城而公山金烏用民力尤多悉收旁郡器械糧餉實其中督守令盡率老弱男婦入守遠近騷然及賊再動淸正自西生浦西向全羅將與行長水路兵會攻南原元帥以下皆望風引去傳令各處山城入守者各散去避兵惟義兵將郭再祐入昌寧火王山城期死守賊到山下仰見形勢斗絕而城內人靜帖不動不攻而去安陰縣監郭䞭入黃石山城前金海府使白士霖亦入城中士霖武人衆心倚以爲重賊兵攻城一日士霖先遁諸軍皆潰賊入城䞭與子履祥履厚皆死䞭女嫁柳文虎文虎爲倭所擄郭氏已出城聞之謂其婢曰父死而不死爲有夫在耳今夫又執吾何生爲自經死趙宗道甞曰吾甞從大夫之後不可與奔竄之徒同死草間死則當明白死耳率妻子入城中作詩曰崆峒山外生猶喜巡遠城中死亦榮遂與䞭同被害

왜병이 황석산성(黃石山城)을 함락하고 안음 현감 곽준(郭䞭)과 전 함안 군수 조종도(趙宗道)가 죽었다.

처음에 체찰사 이원익과 원수 권율이 도 안의 산성을 손질하여 적을 막기로 의논하고 공산(公山)·금오(金烏)·용기(龍紀)·부산(富山) 등의 성을 쌓았다. 그 가운데 공산과 금오에 백성의 힘을 더욱 많이 썼고, 이웃 고을의 병장기와 군량을 다 거두어 그 안에 채웠으며 수령을 다그쳐 늙고 약한 남녀까지 다 이끌고 들어가 지키게 하니 멀고 가까운 데가 술렁였다.

적이 다시 움직이자 청정이 서생포에서 서쪽 전라도로 향하여 행장의 수로 군사와 만나 남원을 치려 하였다. 원수 아래로 다들 소문만 듣고 물러가면서, 곳곳의 산성에 들어가 지키던 이들에게도 저마다 흩어져 적을 피하라고 명을 전하였다. 오직 의병장 곽재우만이 창녕 화왕산성(火旺山城)에 들어가 죽기로 지키려 하였다. 적이 산 아래에 이르러 형세가 가파른 것을 우러러보고, 또 성 안 사람들이 고요히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는 치지 않고 갔다.

안음 현감 곽준이 황석산성에 들어갔고 전 김해 부사 백사림(白士霖)도 성 안에 들어갔다. 사림은 무인이라 뭇사람이 그를 믿고 무겁게 여겼다. 적병이 성을 친 지 하루 만에 사림이 먼저 달아나니 여러 군사가 다 무너지고 적이 성에 들어왔다. 곽준은 아들 이상(履祥)·이후(履厚)와 함께 다 죽었다. 준의 딸은 유문호(柳文虎)에게 시집갔는데 문호가 왜에게 사로잡혔다. 곽씨는 이미 성을 나왔다가 그 말을 듣고 계집종에게 말하였다. 「아버지가 죽어도 따라 죽지 않은 것은 지아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지아비마저 잡혔으니 내가 무엇으로 살겠느냐.」 그러고는 목을 매어 죽었다.

조종도는 일찍이 이렇게 말하였다. 「나도 벼슬한 대부의 뒤를 따랐던 사람이니, 달아나 숨는 무리와 함께 풀숲에서 죽을 수는 없다. 죽으려면 마땅히 떳떳이 죽을 것이다.」 그러고는 아내와 자식을 데리고 성 안에 들어가 시를 지었다.

공동산 밖에서는 사는 것도 오히려 기쁘고 장순과 허원이 지킨 성 안에서는 죽는 것도 또한 영화롭다

마침내 곽준과 함께 해를 입었다.

협주 1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은 당나라 때 수양성(睢陽城)을 끝까지 지키다 죽은 사람이다. 저본은 두 사람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 「순원(巡遠)」이라 하였다.

復起李舜臣爲三道水軍統制使閑山敗報至朝野震駭。上引見備邊諸臣問之群臣惶惑不知所對慶林君金命元兵曹判書李恒福從容。啓曰此元均之罪惟當起李舜臣爲統制使耳。從之時權慄聞元均敗已使李舜臣往收餘兵賊方衝斥舜臣與軍官一人自慶尙道入全羅道晝夜潜行間關達珍島欲收兵禦賊

이순신을 다시 일으켜 삼도 수군통제사로 삼았다.

한산도가 졌다는 기별이 이르자 조정과 민간이 놀라 떨었다. 임금이 비변사의 여러 신하를 불러 보고 물으셨으나 신하들이 어쩔 줄 몰라 대답하지 못하였다. 경림군 김명원과 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이 조용히 아뢰었다. 「이는 원균의 죄입니다. 오직 이순신을 일으켜 통제사로 삼아야 합니다.」 임금이 그대로 따르셨다.

그때 권율은 원균이 졌다는 말을 듣고 이미 이순신에게 가서 남은 군사를 거두게 하였다. 적이 바야흐로 찌르고 내치는 터라, 순신은 군관 한 사람과 함께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들어가 밤낮으로 몰래 다니며 어려운 길을 뚫고 진도(珍島)에 이르러 군사를 거두어 적을 막으려 하였다.

倭兵陷南原府。天將楊元走還全羅兵使李福男南原府使任鉉助防將金敬老光陽縣監李春元唐將接伴使鄭期遠等皆死有軍器寺破陣軍十二人隨楊元入南原皆被兵死獨有金孝義者得脫爲余道城陷事甚詳楊總兵旣至南原增築城一丈許城外羊馬牆多穿炮穴城門安大炮數三坐𮢶深濠塹一二丈閑山旣敗賊從水陸而至報甚急城中洶洶人民逃散獨總兵所領遼東馬軍三千在城內總兵檄召全羅兵使李福男同守福男遷延不至連發夜不收催之不得已乃至而所率纔數百光陽縣監李春元助防將金敬老等繼至八月十三日倭先鋒百餘到城下放鳥銃頃刻而止皆散伏田畝間三三五五作隊旣去復來城上人以勝字小炮應之倭大陣在遠出遊兵交戰疎行迭出故炮發不能中而守城卒往往中賊丸斃旣而倭到城下呌城上人求與語總兵使家丁一人挾通事往倭營以倭書來乃約戰書也十四日倭環城三面結陣以銃炮迭攻如前日先是城南門外民家稠密賊臨至總兵使焚之而石牆土壁猶在賊來依牆壁間自蔽放丸多中城上人十五日望見倭衆刈城外雜草及水田中稻禾作大束無數積牆壁間城中不測時遊擊將軍陳愚衷領三千兵在全州南原軍日望來援而久不至軍心益懼是日晚守堞軍往往交頭耳語準備馬鞍有欲遁色夜一更聞倭陣中囂聲大起略相應和有運物狀而一面衆炮向城亂放飛丸集城上如雨雹城上人縮頸不敢外窺經一二時囂聲止草束已平濠又推積羊馬牆內外頃刻與城齊衆倭蹂躪登城已聞城中大亂云倭入城矣孝義初撥守南門外羊馬牆慌忙入城城上已無人但見城內處處火起走至北門唐軍悉騎馬欲出門門堅閉不可易開馬足如束街路塡塞旣而門開軍馬爭門而出倭兵在城外圍匝數三重各守要路奮長刀亂斫之唐軍俛首受刃適月明得脫者無幾總兵與家丁數人馳馬突出僅以身免或云倭知爲總兵故使逸去也孝義與同伴一人出門一人遇賊死孝義跳入水田伏草中待倭收兵乃逸云蓋楊乃遼將從知禦虜不知禦倭以至於敗亦知平地之城守之甚難詳記孝義之言使後之守禦者知所戒云南原旣陷而全州以北瓦解不可爲矣楊元竟以此伏罪傳首徇示

왜병이 남원부를 함락하니 명나라 장수 양원은 달아나 돌아갔고, 전라 병사 이복남(李福男), 남원 부사 임현(任鉉), 조방장 김경로, 광양 현감 이춘원(李春元), 명나라 장수의 접반사 정기원(鄭期遠) 들이 다 죽었다. 군기시의 파진군 열두 사람이 양원을 따라 남원에 들어갔다가 다 싸움에 죽고, 오직 김효의(金孝義)라는 이가 벗어나 내게 성이 떨어진 일을 아주 자세히 말하였다.

양 총병이 남원에 이르러 성을 한 길쯤 더 쌓고, 성 밖 양마장에 포 쏘는 구멍을 숱하게 뚫었으며, 성문에 큰 포 두어 자리를 앉히고 해자를 한두 길로 깊이 팠다. 한산도가 지고 나서 적이 물과 뭍으로 이르니 기별이 몹시 급하여 성 안이 술렁이고 백성이 달아나 흩어졌으며, 오직 총병이 거느린 요동 기병 삼천만이 성 안에 있었다. 총병이 격문으로 전라 병사 이복남을 불러 함께 지키게 하였으나 복남이 미루며 오지 않았다. 잇달아 밤에도 쉬지 않는 정탐꾼(夜不收)을 보내어 재촉하니 마지못해 왔는데 거느린 군사는 겨우 수백이었다. 광양 현감 이춘원과 조방장 김경로 들이 잇달아 이르렀다.

팔월 열사흗날에 왜의 선봉 백여 명이 성 아래에 이르러 조총을 쏘다가 잠깐 만에 그치고, 다 밭이랑 사이에 흩어져 엎드려 서넛씩 다섯씩 떼를 지어 갔다가는 다시 왔다. 성 위 사람들이 승자소포(勝字小炮)로 맞섰다. 왜의 큰 진은 멀리 있고 유격하는 군사만 나와 싸우되 성기게 늘어서 번갈아 나왔으므로 포를 쏘아도 맞힐 수 없었고, 성을 지키는 군졸은 이따금 적의 총알에 맞아 죽었다.

이윽고 왜가 성 아래에 이르러 성 위 사람을 불러 이야기하기를 청하였다. 총병이 가정 한 사람에게 통사를 데리고 왜의 진영으로 가게 하였는데, 왜의 글을 가지고 돌아왔으니 싸움을 약속하는 글이었다.

열나흗날에 왜가 성 세 면을 둘러 진을 치고 총과 포로 번갈아 치기를 전날처럼 하였다. 앞서 성 남문 밖은 민가가 빽빽하였는데 적이 닥쳐오자 총병이 불살라 버렸다. 그러나 돌담과 흙벽은 그대로 남아 있어 적이 와서 담과 벽 사이에 붙어 몸을 가리고 총알을 쏘니 성 위 사람이 많이 맞았다.

열닷샛날에 바라보니 왜의 무리가 성 밖의 잡풀과 논의 벼를 베어 큰 단으로 묶어 수없이 담과 벽 사이에 쌓았는데, 성 안에서는 무슨 뜻인지 헤아리지 못하였다. 그때 유격장군 진우충(陳愚衷)이 군사 삼천을 거느리고 전주에 있어 남원 군사가 날마다 구원 오기를 바랐으나 오래도록 오지 않으니 군심이 더욱 두려워하였다. 이날 저녁에 성가퀴를 지키던 군사들이 이따금 머리를 맞대고 귓속말을 하며 말안장을 갖추는 등 달아날 기색이 있었다.

밤 초경에 왜의 진중에서 떠드는 소리가 크게 일어 서로 주고받으며 무엇인가 나르는 듯하더니, 한편에서는 뭇 포를 성으로 마구 쏘아 날아드는 총알이 성 위에 우박처럼 쏟아졌다. 성 위 사람들은 목을 움츠리고 감히 밖을 내다보지 못하였다. 한두 시각이 지나 떠드는 소리가 그쳤는데, 풀단이 이미 해자를 메웠고 또 양마장 안팎에 밀어 쌓아 잠깐 사이에 성과 높이가 같아졌다. 뭇 왜가 짓밟고 성에 올랐다. 이윽고 성 안이 크게 어지러워지며 왜가 성에 들어왔다는 소리가 들렸다.

효의는 처음에 남문 밖 양마장을 지키다가 허둥지둥 성으로 들어갔는데, 성 위에는 이미 사람이 없고 다만 성 안 곳곳에 불이 일어나는 것만 보였다. 북문으로 달려가니 명나라 군사가 다 말을 타고 문을 나가려 하는데 문이 굳게 닫혀 쉬 열리지 않아, 말발굽이 묶인 듯하고 거리가 가득 메였다. 이윽고 문이 열려 군사와 말이 다투어 문을 나서니, 왜병이 성 밖을 두세 겹으로 에워싸고 저마다 요긴한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긴 칼을 휘둘러 마구 찍으니 명나라 군사가 고개를 숙이고 칼날을 받았다. 마침 달이 밝아 벗어난 이가 얼마 되지 않았다. 총병은 가정 몇 사람과 말을 달려 뛰쳐나가 겨우 몸만 빠졌는데, 왜가 총병인 줄 알고 일부러 달아나게 하였다고도 한다. 효의는 동무 한 사람과 함께 문을 나섰는데 한 사람은 적을 만나 죽고, 효의는 논에 뛰어들어 풀 속에 엎드려 있다가 왜가 군사를 거둔 뒤에 빠져나왔다고 한다.

대개 양원은 요동 장수라 오랑캐 막는 법만 알고 왜 막는 법은 알지 못하여 지는 데 이른 것이다. 또한 평지의 성은 지키기가 몹시 어렵다는 것도 알겠기에, 효의의 말을 자세히 적어 뒷날 지키는 이들이 경계할 바를 알게 한다. 남원이 떨어지자 전주 이북이 무너져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양원은 마침내 이 일로 죄를 받아 머리를 베어 돌려 보였다.

統制便李舜臣倭破兵于珍島碧波亭下殺其將馬多時舜臣至珍島收拾兵船得十餘隻時沿海人乘船避亂者無數聞舜臣至莫不喜悅舜臣分道招呼遠近雲集使在軍後以助形勢賊將馬多時號善水戰率其船二百餘艘欲犯西海相遇於碧波亭下舜臣以十二船載大炮乘潮至順流攻之賊敗走軍聲大振是時舜臣已有軍八千餘人進駐古今島患乏糧作海路通行帖令曰三道沿海公私船無帖者以奸細論母得通行於是凡避亂乘船者皆來受帖舜臣以船大小差次使納米受帖大船三石中船二石小船一石避亂之人盡載財穀入海故不以納米爲難而以通行無禁爲喜旬日得軍糧萬餘石又募民輸銅鐵鑄大炮伐本造船事事皆辦遠近避兵者往依舜臣結廬造幕販賣爲生島中不能容旣而。天朝水兵都督陳璘出來南下古今島與舜臣合兵璘性暴猛與人多忤人多畏之上餞送于靑坡野余見璘軍人歐辱守令無忌以繩繫察訪李尙規頸曳之流血滿面令譯官勸解不得余謂同坐宰臣曰可惜李舜臣軍又將敗矣與璘同在軍中掣肘矛盾必侵奪將權縱暴軍士逆之則贈怒順之則無厭軍何由不敗衆曰然相與嗟歎而已舜臣聞璘將至令軍人大畋漁得鹿豕海物甚多盛備酒醪而待之璘船入海舜臣備軍儀遠迎旣到大享其軍諸將以下無不沾醉士率傳相告語曰果良將也璘亦心喜不久賊船犯近島舜臣遣兵敗之獲賊首四十級悉以與璘爲功璘益喜過望自是凡事一咨於舜臣出則與舜臣幷轎不敢先行舜臣遂約束唐軍與己軍無間有奪民一縷者皆拿致捆打無敢違令者島中肅然璘上書於。上言統制使有經天緯地之才補天浴日之功蓋心服也

통제사 이순신이 진도 벽파정(碧波亭) 아래에서 왜병을 깨뜨리고 그 장수 마다시(馬多時)를 죽였다.

순신이 진도에 이르러 싸움배를 거두어 모으니 열 척 남짓 되었다. 그때 바닷가 사람으로 배를 타고 난리를 피하는 이가 헤아릴 수 없었는데, 순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순신이 길을 나누어 불러 모으니 멀고 가까운 데서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들을 군사 뒤에 두어 형세를 돕게 하였다.

적장 마다시는 바다 싸움을 잘한다고 이름났는데, 제 배 이백여 척을 거느리고 서해를 침범하려다가 벽파정 아래에서 만났다. 순신이 열두 척에 큰 포를 싣고 조수를 타고 이르러 물길을 따라 치니 적이 져서 달아났고 군사의 소리가 크게 떨쳤다.

이때 순신에게는 이미 군사 팔천여 명이 있었다. 고금도(古今島)로 나아가 머물렀는데 양식이 모자란 것을 걱정하여 바닷길을 다니는 통행첩을 만들고 명하였다. 「삼도 바닷가의 관선과 사삿배로서 통행첩이 없는 것은 간첩으로 다스릴 것이니 다닐 수 없다.」 이에 난리를 피해 배를 탄 이들이 다 와서 첩을 받았다. 순신은 배의 크기로 차례를 매겨 쌀을 바치고 첩을 받게 하되, 큰 배는 세 섬, 가운데 배는 두 섬, 작은 배는 한 섬으로 하였다. 난리를 피하는 사람들은 재물과 곡식을 다 싣고 바다에 들어온 터라 쌀을 바치는 것을 어렵게 여기지 않았고 오히려 막힘없이 다니게 된 것을 기뻐하였다. 열흘 만에 군량 만여 석을 얻었다. 또 백성을 모아 구리와 쇠를 실어 오게 하여 큰 포를 부어 만들고 나무를 베어 배를 지으니 일마다 다 갖추어졌다. 멀고 가까운 데서 난리를 피하는 이들이 순신에게 가서 의지하여 움막을 짓고 장사로 살아가니 섬 안에 다 들이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윽고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陳璘)이 나와 남쪽으로 고금도에 내려가 순신과 군사를 합쳤다. 진린은 성품이 사납고 거칠어 사람들과 자주 어긋나니 다들 그를 두려워하였다. 임금이 청파(靑坡) 들에서 전송하셨는데, 내가 보니 진린의 군사가 거리낌 없이 수령을 때리고 욕하며 찰방 이상규(李尙規)의 목에 노끈을 매어 끌어 얼굴에 피가 가득하였다. 역관을 시켜 말리게 하였으나 되지 않았다. 내가 함께 앉은 재신들에게 말하였다. 「애석하게도 이순신의 군사가 또 지겠구나. 진린과 한 군중에 있으면 하는 일마다 서로 걸리고 어긋날 것이요, 반드시 장수의 권한을 빼앗고 군사들에게 사납게 굴 것이다. 거스르면 노여움이 더하고 따르면 끝이 없을 것이니 군사가 어찌 지지 않겠는가.」 여럿이 「그렇습니다」 하고 서로 탄식할 뿐이었다.

순신은 진린이 온다는 말을 듣고 군사들에게 크게 사냥하고 고기를 잡게 하여 사슴과 멧돼지와 바다의 것을 많이 얻고 술을 넉넉히 갖추어 기다렸다. 진린의 배가 바다로 들어오자 순신이 군의 의장을 갖추어 멀리 나가 맞았고, 이른 뒤에는 그 군사를 크게 대접하니 여러 장수 아래로 취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군졸들이 서로 전하여 말하였다. 「과연 훌륭한 장수다.」 진린도 마음으로 기뻐하였다.

얼마 안 되어 적의 배가 가까운 섬을 침범하자 순신이 군사를 보내어 깨뜨리고 적의 머리 마흔 급을 얻어 모두 진린에게 주어 공으로 삼게 하였다. 진린이 뜻밖의 일에 더욱 기뻐하여, 이때부터 무슨 일이든 한결같이 순신에게 물었고 나갈 때에도 순신과 가마를 나란히 하여 감히 앞서지 않았다. 순신이 마침내 명나라 군사와 제 군사를 사이 없이 단속하여, 백성의 것을 실오라기 하나라도 빼앗는 자가 있으면 다 잡아다 곤장을 치니 감히 명을 어기는 이가 없어 섬 안이 엄숙하였다. 진린이 임금께 글을 올려 「통제사는 하늘과 땅을 날실과 씨실처럼 짜서 다스리는 재주가 있고 하늘을 기우고 해를 씻은 공이 있습니다」 하였으니 마음으로 탄복한 것이다.

賊兵退時賊蹂躪三道所過皆焚燒廬舍殺戮人民凡得我國人悉割其鼻以示威兵至稷山都城人皆奔散九月初九日。內殿避兵西下經理楊鎬提督麻貴在京城而平安道軍五千餘人黃海京畿軍數千徵至分守江灘警守倉庫賊從京畿界還退淸正再屯蔚山行長屯順天沈安頓吾屯泗川首尾七八百里是時都城幾不守朝臣爭獻出避之策知事申磼進言曰。車駕應幸寧邊臣曾爲兵使備諳寧邊事其最可憂者乃無醬也若不預辦何以繼用聞者傳笑曰辛不合醬一大臣言於朝堂曰此賊何足憂久當自息惟當奉。乘輿往安便處耳元帥權慄走至京。上引見問之慄曰當初。車駕不合遽還都城當留駐西方以觀賊勢如何旣而聞賊退慄又下慶尙道臺諫論慄無謀恇㥘不可爲元師。不聽

적병이 물러갔다.

그때 적이 세 도를 짓밟아 지나는 곳마다 집을 불사르고 백성을 죽였으며, 우리나라 사람을 잡으면 다 코를 베어 위엄을 보였다. 적병이 직산(稷山)에 이르자 도성 사람들이 다 달아나 흩어졌다. 구월 초아흐렛날에 내전이 난리를 피해 서쪽으로 내려가셨다. 경리 양호와 제독 마귀가 서울에 있었고, 평안도 군사 오천여 명과 황해·경기 군사 수천을 불러 모아 나누어 강여울을 지키고 창고를 지키게 하였다. 적은 경기 지경에서 도로 물러가 청정은 다시 울산에 진을 치고 행장은 순천에, 심안돈오(沈安頓吾)는 사천(泗川)에 진을 치니 머리와 꼬리가 칠팔백 리였다.

이때 도성을 거의 지키지 못할 지경이라 조정 신하들이 다투어 피해 나갈 계책을 아뢰었다. 지사 신잡(申磼)이 나아가 말하였다. 「임금의 수레는 마땅히 영변으로 가셔야 합니다. 신이 일찍이 병사를 지냈기에 영변 일을 잘 아는데,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간장과 된장이 없는 것입니다. 미리 마련해 두지 않으면 무엇으로 잇대어 쓰겠습니까.」 듣는 이들이 「신씨(申氏)가 아니면 장을 못 담근다더라」 하며 웃음거리로 전하였다.

한 대신은 조당에서 말하였다. 「이 적이 무엇이 걱정이겠소. 오래되면 저절로 그칠 것이오. 다만 임금의 수레를 편안한 곳으로 모실 뿐이오.」

원수 권율이 서울로 달려오니 임금이 불러 보고 물으셨다. 권율이 아뢰었다. 「처음에 임금의 수레가 대뜸 도성으로 돌아오신 것은 옳지 않았습니다. 마땅히 서쪽에 머무시며 적의 형세가 어떠한지 보셔야 하였습니다.」 이윽고 적이 물러갔다는 말을 듣고 권율은 다시 경상도로 내려갔다. 대간이 권율은 꾀가 없고 겁이 많아 원수가 될 수 없다고 논하였으나 임금이 듣지 않으셨다.

협주 1

신잡의 신(申)을 맛을 내는 매울 신(辛)에 빗댄 말놀이다.

十二月楊經理麻提督領騎步兵數萬下慶尙道進攻蔚山賊營時賊將淸正築城於蔚山郡東海邊斗絕處經理提督乘其不意掩之以鐵騎馳擊賊披靡不能支。天兵奪賊外栅賊奔入內城。天兵貪擄獲之利不卽進攻賊閉門固守攻之不克諸營分屯城下圍守十三日賊不出二十九日余自慶州往見經理提督望見賊壘甚靜暇寂無人聲城上不設女牆環四面爲長廊守兵悉在其內外兵若至城下則統丸亂發如雨每日交鋒。天兵與我軍死城下成積賊船從西生浦來援列泊水中如鳬雁島山無水賊每夜出沒城外經理令金應瑞率勇士伏城外泉傍連夜擒百餘人皆飢羸僅屬聲氣諸將言城內糧絕久圍將自潰時天甚寒陰雨士卒手足瘒瘃已而賊又從陸路來援經理恐爲所乘遽旋師正月。天將悉回京師謀再擧

십이월에 양 경리와 마 제독이 기병과 보병 수만을 거느리고 경상도로 내려가 울산의 적 진영을 쳤다.

그때 적장 청정이 울산군 동쪽 바닷가 가파른 곳에 성을 쌓았다. 경리와 제독이 뜻하지 않은 틈을 타 덮쳐 철기로 달려 치니 적이 쓰러져 버티지 못하였다. 명나라 군사가 적의 바깥 목책을 빼앗자 적은 안쪽 성으로 달아나 들어갔다. 명나라 군사가 노획하는 이를 탐내어 곧바로 나아가 치지 않으니, 적이 문을 닫고 굳게 지켜 쳐도 이기지 못하였다. 여러 진이 성 아래에 나뉘어 진을 치고 열사흘을 에워싸 지켰으나 적이 나오지 않았다.

스무아흐렛날에 내가 경주에서 가서 경리와 제독을 뵈었다. 적의 보루를 바라보니 아주 고요하고 한가하여 사람 소리조차 없었다. 성 위에 여장을 두지 않고 사면을 둘러 긴 행랑을 만들어 지키는 군사가 다 그 안에 있다가, 밖의 군사가 성 아래에 이르면 총알을 비 오듯 마구 쏘았다. 날마다 칼날을 맞대어 명나라 군사와 우리 군사가 성 아래에 죽어 쌓였다. 적의 배가 서생포에서 구원하러 와 물 위에 오리와 기러기처럼 늘어서 있었다.

적이 웅거한 그 도산(島山) 성에는 물이 없어 적이 밤마다 성 밖으로 나왔다. 경리가 김응서에게 용사를 거느리고 성 밖 샘 곁에 매복하게 하니 밤을 이어 백여 명을 사로잡았는데, 다 주리고 여위어 겨우 숨만 붙어 있었다. 여러 장수가 「성 안에 양식이 끊겼으니 오래 에워싸면 저절로 무너질 것」이라 하였다. 그때 날씨가 몹시 춥고 궂은비가 내려 군졸의 손발이 얼어 텄다. 이윽고 적이 또 뭍길로 구원하러 오니, 경리가 그 틈을 탈까 두려워 갑자기 군사를 돌렸다. 정월에 명나라 장수들이 다 서울로 돌아와 다시 일을 벌이기를 꾀하였다.

戊戌七月經理楊鎬罷新經理萬世德代之時邢軍門參謀官兵部主事丁應泰劾奏楊鎬欺罔僨事二十餘罪鎬遂罷去。上以鎬於諸經理中銳意討賊卽遣左議政李元翼賫伸救奏馳赴京師八月鎬西去。上送至弘濟院東流涕而別萬世德將出未至

무술년 칠월에 경리 양호가 갈리고 새 경리 만세덕(萬世德)이 대신하였다.

그때 형 군문의 참모관인 병부 주사 정응태(丁應泰)가 양호를 임금을 속이고 일을 그르친 스무남은 가지 죄로 탄핵하여 아뢰니, 양호가 마침내 갈려 갔다. 임금은 양호가 여러 경리 가운데 적 치기에 뜻이 날카로웠다 하여, 곧 좌의정 이원익에게 구원하는 글을 지녀 서울로 달려가게 하셨다. 팔월에 양호가 서쪽으로 가니 임금이 홍제원 동쪽까지 배웅하며 눈물을 흘리고 헤어지셨다. 만세덕은 나오려 하였으나 아직 이르지 않았다.

九月邢玠又分調麻貴主蔚山董一元主泗川劉綎主順天陳璘主水路同時進攻皆不利董軍爲賊所敗死者尤多

구월에 형개가 또 나누어 배치하여 마귀는 울산을, 동일원은 사천을, 유정은 순천을, 진린은 물길을 맡아 한꺼번에 나아가 쳤으나 다 이기지 못하였다. 동일원의 군사는 적에게 져서 죽은 이가 더욱 많았다.

十月劉提督再攻順天賊營統制使李舜臣以舟師大敗其救兵於海中舜臣死之賊將平行長棄城而遁釜山蔚山河東沿海賊屯悉退時行長築城于順天芮橋堅守劉綎以大兵進攻不利還順天旣而復進攻之李舜臣與唐將陳璘扼海又以逼之行長求援於泗川賊沈安頓吾頓吾從水路來援舜臣進擊大破之焚賊船二百餘艘殺獲無算追至南海界舜臣親犯矢石力戰有飛丸中其胷出背後左右扶入帳中舜臣曰戰方急愼勿言我死言訖而絕舜臣兄子莞素有膽量秘其死以舜臣令督戰益急軍中不知也陳璘所乘舟爲賊所圍莞望見揮其兵敎之賊散去璘便人于舜臣謝救已始聞其死從椅上自投於地曰吾意老爺生來救我何故亡耶拊膺大慟一軍皆哭聲震海中行長乘舟師追賊過其營自後逸去先是七月倭酋平秀吉已死故沿海賊屯悉退我軍與唐軍聞舜臣死連營慟哭如哭私親柩行所至人民處處設祭挽車而哭曰公實生我今公棄我何之道路擁塞車不得進行路之人無不流涕。贈議政府右議政邢軍門謂當立祠海上以獎忠魂事竟不行於是海邊之人相率爲祠號曰愍忠以時致祭商賈漁船往來過其下者人人祭之云

시월에 유 제독이 다시 순천의 적 진영을 치고, 통제사 이순신이 수군으로 바다 가운데서 그 구원병을 크게 깨뜨렸다. 순신이 이 싸움에서 죽었다. 적장 평행장이 성을 버리고 달아나니 부산·울산·하동 바닷가의 적 진영이 다 물러갔다.

그때 행장은 순천 예교(芮橋)에 성을 쌓고 굳게 지켰다. 유정이 대군으로 나아가 쳤으나 이기지 못하여 순천으로 돌아왔다가 이윽고 다시 나아가 쳤다. 이순신은 명나라 장수 진린과 함께 바다를 막고 또 다가가 조였다. 행장이 사천의 적 심안돈오에게 구원을 청하니 돈오가 물길로 구원하러 왔다. 순신이 나아가 쳐서 크게 깨뜨리고 적의 배 이백여 척을 불살랐으며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헤아릴 수 없었다. 남해 지경까지 뒤쫓았다.

순신이 몸소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힘껏 싸우는데 날아온 총알이 가슴에 맞아 등 뒤로 나갔다. 좌우가 부축하여 장막 안으로 들이니 순신이 말하였다.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부디 내가 죽었다고 말하지 말라.」 말을 마치고 숨이 끊어졌다.

순신의 조카 완(莞)은 본디 담력이 있어 그 죽음을 숨기고 순신의 명이라 하며 더욱 급히 싸움을 다그치니 군중에서 알지 못하였다. 진린이 탄 배가 적에게 에워싸이자 완이 바라보고 제 군사를 지휘하여 구하니 적이 흩어져 갔다. 진린이 순신에게 사람을 보내어 저를 구해 준 것을 사례하다가 비로소 그 죽음을 듣고, 걸상에서 땅으로 몸을 던지며 말하였다. 「나는 대감이 살아 와서 나를 구해 준 줄 알았는데 어찌하여 돌아가셨소.」 가슴을 치며 크게 통곡하니 온 군사가 다 울어 소리가 바다를 흔들었다. 행장은 수군이 적을 쫓아 제 진영 앞을 지나는 틈을 타 뒤로 빠져나갔다.

앞서 칠월에 왜의 괴수 평수길이 이미 죽었으므로 바닷가의 적 진영이 다 물러간 것이다.

우리 군사와 명나라 군사가 순신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진마다 잇달아 제 어버이를 곡하듯 통곡하였다. 상여가 이르는 곳마다 백성이 곳곳에 제사를 차리고 수레를 붙들고 울며 말하였다. 「공께서 참으로 우리를 살리셨는데 이제 공이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십니까.」 길이 막혀 수레가 나아가지 못하였고 길 가던 사람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의정부 우의정을 내리셨다. 형 군문이 바닷가에 사당을 세워 충혼을 기려야 한다 하였으나 일이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바닷가 사람들이 서로 이끌어 사당을 세우고 민충(愍忠)이라 이름하여 철마다 제사를 지냈고, 장사꾼과 고깃배가 그 아래를 오가며 지날 때마다 사람마다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李舜臣字汝諧德水人其先曰邊官至判府事有直名曾祖曰琚事。成宗燕山在東宮琚爲講官以嚴見憚甞爲掌令彈劾不避百僚憚之有虎掌令之稱祖百祿以門蔭仕父貞不仕舜臣少時英爽不覊與群兒戲削木爲弓矢遊里閭中遇不如意者欲射其目長老或憚之不敢過門及長善射從武擧發身李氏世業儒至舜臣始得武科補權知訓鍊院奉事兵曹判書金貴榮有孽女欲與舜臣爲妾舜臣不肯人問之舜臣曰吾初出仕路豈敢托迹權門媒進耶兵曹正郞徐益有所親在訓鍊院欲越次薦報舜臣以院中掌務官執不可益牌招舜臣詣庭下詰之舜臣辭色不變直辨無撓益大怒盛氣臨之舜臣從容酬答終不少沮益本多氣傲人雖同僚亦憚之難與爭辨是日下吏在階下皆相顧吐舌曰此官敢與本曹抗獨不顧前路耶日暮益愧屈令去識者以此往往知舜臣焉方在獄時事不可測有獄吏密語舜臣兄子芬有賄則可免舜臣聞之怒芬曰死則死耳安可違道求生其有操執如此舜臣爲人寡言笑容貌雅飭如修謹之士而中有瞻氣忘身徇國乃其素所蓄積也兄羲臣堯臣皆先死舜臣撫其遺孤如己子凡嫁娶必先兄子而後及己子有才無命百不一施而死嗚呼惜哉

이순신의 자는 여해(汝諧)요 덕수(德水) 사람이다. 그 선조에 변(邊)이라는 이가 있어 벼슬이 판부사에 이르렀고 곧다는 이름이 있었다. 증조는 거(琚)로 성종을 섬겼다. 연산이 동궁에 있을 때 거가 강관이 되었는데 엄하여 꺼림을 받았다. 일찍이 장령이 되어 탄핵을 피하지 않으니 모든 벼슬아치가 꺼려 「호랑이 장령」이라 불렀다. 할아버지 백록(百祿)은 조상의 덕으로 벼슬하였고 아버지 정(貞)은 벼슬하지 않았다.

순신은 어릴 적에 영특하고 시원스러워 매인 데가 없었다. 아이들과 놀 때 나무를 깎아 활과 화살을 만들어 마을에서 놀다가 뜻에 맞지 않는 이를 만나면 그 눈을 쏘려 하니, 어른들도 더러 꺼려 감히 그 문 앞을 지나지 못하였다. 자라서는 활을 잘 쏘아 무과로 몸을 일으켰다. 이씨는 대대로 유학을 업으로 삼았는데 순신에 이르러 비로소 무과에 올라 권지 훈련원 봉사에 보임되었다.

병조판서 김귀영(金貴榮)이 서녀가 있어 순신에게 첩으로 주려 하였으나 순신이 마다하였다. 사람들이 까닭을 물으니 순신이 말하였다. 「내가 이제 처음 벼슬길에 나섰는데 어찌 감히 권세 있는 집에 발을 붙여 나아가기를 꾀하겠는가.」

병조 정랑 서익(徐益)이 친한 이가 훈련원에 있어 차례를 건너뛰어 천거하려 하였는데, 순신이 훈련원의 장무관으로서 옳지 않다고 고집하였다. 익이 패를 내려 순신을 불러 뜰 아래에 세우고 따져 물었으나, 순신은 말과 낯빛을 바꾸지 않고 굽힘 없이 곧게 따졌다. 익이 크게 노하여 기세를 부리며 내리눌렀으나 순신은 조용히 대답하며 끝내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익은 본래 기가 세어 남에게 오만하여 같은 벼슬아치도 꺼려 다투기 어려워하던 사람이었다. 이날 섬돌 아래 있던 아전들이 다 서로 돌아보며 혀를 내두르고 말하였다. 「이 관원이 감히 본조와 맞서다니, 앞길을 돌아보지 않는구나.」 날이 저물어 익이 부끄러워 굽히고 가게 하였다. 아는 이들이 이 일로 이따금 순신을 알게 되었다.

옥에 갇혔을 때 일이 어찌 될지 알 수 없었는데, 어떤 옥리가 순신의 조카 분(芬)에게 몰래 말하였다. 「뇌물을 쓰면 벗어날 수 있소.」 순신이 듣고 분에게 노하여 말하였다. 「죽으면 죽을 뿐이지 어찌 도리를 어기면서 살기를 구하겠느냐.」 그 지조를 지킴이 이와 같았다.

순신은 사람됨이 말과 웃음이 적고 몸가짐이 단정하여 삼가 닦는 선비 같았으나, 속에는 담력과 기개가 있어 제 몸을 잊고 나라를 위해 죽은 것은 평소에 쌓아 온 바였다. 형 희신(羲臣)과 요신(堯臣)이 다 먼저 죽으니, 순신은 그 남은 아이들을 제 자식처럼 거두어 시집보내고 장가들이는 일을 반드시 형의 아이들을 먼저 하고 제 자식을 뒤로 하였다. 재주가 있으나 명이 없어 백 가지 가운데 하나도 펴지 못하고 죽었으니, 아아 애석하다.

統制在軍晝夜戒嚴未甞解甲在見乃梁與賊相持諸船已下碇夜月色明甚統制帶甲枕皷而臥忽起坐呼左右取燒酒來飲一杯悉呼諸將至前語之曰今夜月甚明賊多詐謀無月時固當襲我月明亦應來襲警備不可不嚴遂吹令角令諸船皆擧碇又傳令斥堠船候卒方熟睡喚起待變久之斥堠奔告賊來時月掛西山山影倒海半邊微陰賊船無數從陰黑中來將近我船於是中軍放大炮吶喊諸船皆應之賊知有備一時放鳥銃聲震海中飛丸落於水中者如雨遂不敢犯退走諸將以爲神

통제사는 군중에 있을 때 밤낮으로 경계를 늦추지 않고 갑옷을 벗은 적이 없었다.

견내량(見乃梁)에서 적과 맞서 있을 때 여러 배가 이미 닻을 내렸다. 밤에 달빛이 아주 밝았는데, 통제사가 갑옷을 입은 채 북을 베고 누웠다가 문득 일어나 앉아 좌우를 불러 소주를 가져오게 하여 한 잔을 마셨다. 그러고는 여러 장수를 다 불러 앞에 이르게 하고 말하였다. 「오늘 밤은 달이 몹시 밝다. 적은 꾀가 많으니 달 없는 때에 우리를 덮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달이 밝아도 반드시 와서 덮칠 것이다. 지키기를 엄히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침내 나발을 불어 여러 배에 다 닻을 올리게 하고, 또 척후선에도 명을 전하였다. 척후하는 군졸이 마침 깊이 잠들었으므로 불러 깨워 변을 기다리게 하였다. 한참 뒤에 척후가 달려와 적이 온다고 알렸다. 그때 달이 서산에 걸려 산 그림자가 바다에 거꾸로 드리워 한쪽이 어슴푸레하였는데, 적의 배가 수없이 그 어두운 데서 나와 우리 배에 가까워지려 하였다. 이에 중군이 큰 포를 놓고 함성을 지르니 여러 배가 다 따라 응하였다. 적은 준비가 있는 줄 알고 한꺼번에 조총을 쏘아 소리가 바다를 흔들고 날아든 총알이 물에 비처럼 떨어졌으나, 마침내 감히 침범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여러 장수가 신령하다고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