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 하나卷一
萬曆丙戌間。日本國使橘康廣。以其國王平秀吉書來。始日本國王源氏。立國於洪武初。與我修隣好殆二百年。其初我國亦甞遣使修慶弔禮。申叔舟以書狀往來。卽其一也。後叔舟臨卒。成宗問所欲言。叔舟對曰。願國家。毋與日本失和。成廟感其言。命副提學李亨元。書狀官金訢修睦。到對馬島。使臣以風水驚疑得疾。上書言狀。成廟命致書幣於島主而回。自是不復遣使。每其國信使至。依禮接待而已。至是平秀吉。代源氏爲王。秀吉者。或云華人。流入倭國。負薪爲生。一日國王出遇於路中。異其爲人。招補軍伍。勇力善鬪。積功至大官因得權。竟奪源氏而代之。或曰。源氏爲他人所弑。秀吉又殺其人而奪國云。用兵平定諸島。域內六十六州。合而爲一。遂有外侵之志。乃曰。我使每往朝鮮。而朝鮮使不至。是鄙我也。遂使康廣。來求通信。書辭甚倨。有今天下歸朕一握之語。蓋源氏之亡。已十餘年。諸島倭歲往來我國。而畏其令嚴不泄。故朝廷不知也。康廣時年五十餘。容貌傀偉。鬚髮半白。所經舘驛。必舍上室。擧止倨傲。與平時倭使絕異。人頗恠之。故事。一路郡邑。凡遇倭使。發境內民夫。執槍夾道。以示軍威。康廣過仁同。睨視執槍者笑曰。汝輩槍竿太短矣。到尙州。牧使宋應泂享之。妓樂成列。康廣見應泂衰白。使譯官語之曰。老夫數年在干戈中。鬚髮盡白。使君處聲妓之間。百無所憂。而猶爲皓白何哉。蓋諷之也。及至。禮曹判書押宴。酒酣。康廣散胡椒於筵上。妓工爭取之。無復倫次。康廣回所舘歎息語譯曰。汝國亡矣。紀綱已毀。不亡何待。及還。朝廷但報其書。辭以水路迷昧。不許遣使。康廣歸報。秀吉大怒。殺康廣又滅族。蓋康廣。與其兄康年。自源氏時。來朝我國受職名。其言頗爲我國地。故爲秀吉所害云。
만력(萬曆) 병술년 무렵에 일본국 사신 귤강광(橘康廣)이 그 나라 왕 평수길(平秀吉)의 글을 가지고 왔다.
처음에 일본 국왕 원씨(源氏)는 홍무(洪武) 초년에 나라를 세워 우리와 이웃의 정을 닦은 지 거의 이백 년이었다. 그 처음에는 우리나라도 일찍이 사신을 보내어 경사와 조상(弔喪)의 예를 닦았으니, 신숙주(申叔舟)가 서장관으로 오간 것이 곧 그 하나다. 뒤에 숙주가 죽음에 임하매 성종(成宗)이 하고 싶은 말을 물으니 숙주가 대답하였다.
「원컨대 나라에서 일본과 화친을 잃지 마소서.」
성종께서 그 말에 감동하여 부제학 이형원(李亨元)과 서장관 김흔(金訢)에게 명하여 화목을 닦게 하였다. 대마도(對馬島)에 이르러 사신이 바람과 물결에 놀라고 의심하다가 병을 얻었으므로 글을 올려 사정을 아뢰니, 성종께서 도주에게 글과 폐백을 전하고 돌아오게 하였다. 이로부터 다시는 사신을 보내지 않고, 그 나라 사신이 올 때마다 예에 따라 접대할 뿐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평수길이 원씨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 수길은 혹 중국 사람으로 왜국에 흘러들어 나무를 팔아 살았다고도 한다. 하루는 국왕이 나왔다가 길에서 만나 그 사람됨을 기이하게 여겨 불러 군사 대오(軍伍)에 넣으니, 용맹하고 힘이 세어 잘 싸웠다. 공을 쌓아 큰 벼슬에 이르고 그로 인해 권세를 얻어 마침내 원씨를 빼앗고 대신하였다. 혹은 원씨가 다른 사람에게 시해되자 수길이 또 그 사람을 죽이고 나라를 빼앗았다고도 한다. 군사를 써서 여러 섬을 평정하여 나라 안 예순여섯 주를 합해 하나로 만들고, 드디어 밖을 침노할 뜻을 품었다. 이에 말하였다.
「우리 사신은 늘 조선에 가는데 조선 사신은 오지 않으니 이는 우리를 얕보는 것이다.」
드디어 강광을 보내어 통신하기를 구하였는데 글 말이 몹시 거만하여 「이제 천하가 짐의 한 손아귀에 돌아온다」는 말까지 있었다. 대개 원씨가 망한 지 이미 십여 년인데, 여러 섬의 왜인이 해마다 우리나라에 오갔으나 그 명령이 엄함을 두려워하여 누설하지 않았으므로 조정이 알지 못하였다.
강광은 그때 나이 오십여 세로 얼굴이 크고 늠름하며 수염과 머리가 반쯤 희었다. 지나는 관역마다 반드시 윗방에 들고 몸가짐이 거만하여 평시의 왜 사신과는 아주 달랐으므로 사람들이 자못 괴이하게 여겼다. 옛 법에 길가의 고을에서는 왜 사신을 만나면 경내의 백성을 내어 창을 잡고 길 양쪽에 늘어세워 군사의 위엄을 보였다. 강광이 인동(仁同)을 지나다가 창 잡은 자들을 흘겨보고 웃으며 말하였다.
「너희 창자루가 너무 짧구나.」
상주(尙州)에 이르니 목사 송응형(宋應泂)이 잔치를 베풀어 기생과 풍악이 줄지어 늘어섰다. 강광이 응형의 머리가 세어 쇠한 것을 보고 역관을 시켜 말하였다.
「이 늙은이는 여러 해를 싸움 속에 있어 수염과 머리가 다 세었거니와, 사군(使君)은 노래와 기생 사이에 있어 아무 근심이 없는데도 오히려 이토록 희니 어찌된 일인가.」
대개 넌지시 찌른 것이다. 서울에 이르러 예조판서가 잔치를 주관하였는데, 술이 무르익자 강광이 후추를 자리에 흩뿌렸다. 기생과 악공들이 다투어 줍느라 차례가 없었다. 강광이 묵는 집(舍館)으로 돌아와 탄식하며 역관에게 말하였다.
「너희 나라는 망하겠다. 기강이 이미 무너졌으니 망하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겠는가.」
돌아갈 때에 조정은 다만 그 글에 답하면서 물길이 아득하다는 것으로 사양하고 사신 보내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강광이 돌아가 아뢰니 수길이 크게 노하여 강광을 죽이고 또 그 일족을 멸하였다. 대개 강광은 그 형 강년(康年)과 더불어 원씨 때부터 우리나라에 와서 벼슬 이름을 받았고 그 말이 자못 우리나라를 위한 것이었으므로 수길에게 해를 입었다고 한다.
日本國使平義智來。秀吉旣殺橘康廣。令義智來求信使。義智者。其國主兵大將平行長女婿也。爲秀吉腹心。對馬島太守宗盛長。世守馬島。服事我國。時秀吉去宗氏。使義智代主島務。以我國不諳海道爲辭。拒通信。詐言義智。乃島主子。熟海路。與之偕行。便欲使我。無辭以拒。因又窺覘我虛實。平調信僧玄蘇等同至。義智年少精悍。他倭皆畏之。俯伏膝行。不敢仰視。久留東平舘。必邀我使與俱。朝議依違而已。數年前。倭寇全羅道損竹島。殺邊將李太源。捕得生口。言我國邊氓沙乙背同者。叛入倭中。導倭爲冦。朝廷憤之。至是人或言。宜令日本。刷還叛民。然後議通信。以觀誠否。使舘客諷之。義智曰。此不難。卽遣平調信歸報其國。不數月。悉捕我民之在其國者十餘人來獻。上御仁政殿。大陳兵威。鎖沙乙背同等。入庭詰問。斬於城外。賞義智內廐馬一匹。後引見倭使一行賜宴。義智玄蘇等。皆入殿內。以次進爵。時余判禮曹。亦宴倭使於曹中。然通信之議久未決。余爲大提學。將撰國書。啓請速定議。勿致生釁。明日朝講。知事邊協等亦啓宜遣使報答。且見彼中動靜而來。非失計也。於是朝議始定。命擇可使者。大臣以僉知黃允吉。司成金誠一。爲上副使。典籍許筬。爲書狀官。庚寅三月。遂與義智等同發。時義智獻二孔雀及鳥銃槍刀等物。命放孔雀於南陽海島。下鳥銃於軍器寺。我國之有鳥銃始此。
일본국 사신 평의지(平義智)가 왔다. 수길이 이미 귤강광을 죽이고 의지를 시켜 와서 통신사를 구하게 한 것이다. 의지는 그 나라 군사를 맡은 대장 평행장(平行長)의 사위로 수길의 심복이었다. 대마도 태수 종성장(宗盛長)이 대대로 대마도를 지키며 우리나라를 섬겨 왔는데, 이때 수길이 종씨(宗氏)를 물리치고 의지로 하여금 대신 섬의 일을 맡게 하였다. 우리나라가 바닷길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것을 구실로 통신을 거절하자, 의지가 곧 도주의 아들이라 바닷길에 익으니 그와 함께 가라고 속여 말하여, 우리로 하여금 거절할 말이 없게 하고 아울러 우리 허실을 엿보려 한 것이다. 평조신(平調信)과 중 현소(玄蘇) 등이 함께 왔다.
의지는 나이가 젊고 사납고 굳세어 다른 왜인들이 다 그를 두려워하여 엎드려 무릎으로 기며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다. 동평관(東平舘)에 오래 머무르면서 반드시 우리 사신을 맞아 함께 가고자 하였으나 조정의 의논은 이러쿵저러쿵할 뿐이었다.
몇 해 전에 왜구가 전라도 손죽도(損竹島)를 침노하여 변장 이태원(李太源)을 죽였는데, 사로잡은 자가 말하기를 우리나라 변방 백성 사을배동(沙乙背同)이라는 자가 왜에 들어가 배반하고 왜를 이끌어 도적질하였다 하므로 조정이 분하게 여겼다. 이때에 이르러 어떤 이가 마땅히 일본으로 하여금 배반한 백성을 찾아 돌려보내게 한 뒤에 통신을 의논하여 그 정성 여부를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객관에 있는 손에게 넌지시 이르게 하니 의지가 말하였다.
「이는 어렵지 않다.」
곧 평조신을 보내어 제 나라에 알렸는데, 몇 달이 못 되어 제 나라에 있던 우리 백성 십여 인을 다 잡아 와서 바쳤다.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와 군사의 위엄을 크게 벌이고 사을배동 등을 결박하여 뜰에 들여 꾸짖어 묻고 성 밖에서 목을 베었다. 의지에게 내구마 한 필을 상으로 주었다. 뒤에 왜 사신 일행을 인견하고 잔치를 내리니 의지와 현소 등이 다 전각 안에 들어와 차례로 잔을 올렸다. 그때 나는 예조를 맡고 있어 또한 예조에서 왜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그러나 통신하는 의논이 오래도록 결정되지 않았다. 나는 대제학으로서 장차 국서를 지어야 하므로 빨리 의논을 정하여 틈이 생기지 않게 하기를 아뢰어 청하였다. 이튿날 조강에서 지사 변협(邊協) 등도 사신을 보내어 답하고 또 저들의 움직임을 보고 오는 것이 잘못된 계책은 아니라고 아뢰었다. 이에 조정의 의논이 비로소 정해져 사신 될 만한 이를 가리게 하니, 대신이 첨지 황윤길(黃允吉)과 사성 김성일(金誠一)을 상사와 부사로, 전적 허성(許筬)을 서장관으로 삼았다. 경인년 삼월에 드디어 의지 등과 함께 떠났다.
그때 의지가 공작 두 마리와 조총·창·칼 따위를 바쳤다. 공작은 남양(南陽) 바다 섬에 놓아 주게 하고 조총은 군기시에 내렸다. 우리나라에 조총이 있게 된 것은 이때부터다.
辛卯春。通信使黃允吉金誠一等。回自日本。倭人平調信玄蘇偕來。初允吉等。上年四月二十九日。自釜山浦乘船抵對馬島。留一月。又自馬島。水行四十餘里。到一岐島。歷博多州長門州浪古耶。至七月二十二日。始至國都。蓋倭人故迂廻其路。且處處留滯。故累月乃至。其在對馬島。平義智請使臣宴山寺中。使臣已在座。義智乘轎入門。至階方下。金誠一怒曰。對馬島。乃我國藩臣。使臣奉命至。豈敢慢侮如此。吾不可受此宴。卽起出。許筬等繼出。義智歸咎於擔轎者殺之。奉其首來謝。自是倭人。敬憚誠一。待之加禮。望見下馬。到其國。館於大刹。適平秀吉往擊東山道。留數月。秀吉回。又託以修治宮室。不卽受國書。前後留舘五月。始傳命。其國尊其天皇。自秀吉以下。皆以臣禮處之。秀吉在國中不稱王。但稱關白。或稱博陸侯。所謂關白者。取霍光凡事皆先關白之語。而稱之也。其接我使也。許乘轎入其宮。以笳角前導。陞堂行禮。秀吉容貌矮陋面色黧黑無異表。但微覺目光閃閃射人云。設三重席。南向地坐。戴紗帽穿黑袍。諸臣數人列坐。引我使就席。不設宴具。前置一卓。中有熟餅一器。以瓦甌行酒。酒亦濁。其禮極簡。數巡而罷。無拜揖酬酢之節。有頃。秀吉忽起入內。在席者皆不動。俄而。有人便服。抱小兒從內出。徘徊堂中。視之乃秀吉也。坐中俯伏而已。已而出臨楹外。招我國樂工。盛奏衆樂而聽之。小兒遺溺衣上。秀吉笑呼侍者。一女倭應聲走出。授其兒更他衣。皆肆意自得。傍若無人。使臣辭出。其後不得再見。與上副使銀四百兩。書狀通事以下有差。我使將回。不時裁答書令先行。誠一曰。吾爲使臣。奉國書來。若無報書。與委命於草莽同。允吉懼見留。遽發至界濱待之。答書始來。而辭意悖慢。非我所望也。誠一不受。改定數次然後行。凡所經由。諸倭贈遺。誠一皆郤之。允吉還泊釜山。馳啓情形。以爲必有兵禍。旣復命。上引見而問之。允吉對如前。誠一曰。臣不見其有是。因言允吉搖動人心非宜。於是議者。或主允吉。或主誠一。余問誠一曰。君言與黃使不同。萬一有兵。將奈何。曰吾亦豈能必倭終不動。但黃言太重。中外驚惑。故解之耳。
신묘년 봄에 통신사 황윤길·김성일 등이 일본에서 돌아왔다. 왜인 평조신과 현소가 함께 왔다.
처음에 윤길 등은 지난해 사월 스무아흐렛날 부산포에서 배를 타고 대마도에 이르러 한 달을 머물렀다. 또 대마도에서 물길로 사십여 리를 가 일기섬(一岐島)에 이르고, 박다주(博多州)·장문주(長門州)·낭고야(浪古耶)를 거쳐 칠월 스무이튿날에야 비로소 그 나라 도읍에 이르렀다. 대개 왜인이 일부러 그 길을 멀리 돌게 하고 또 곳곳에서 머무르게 하였으므로 여러 달 만에 이른 것이다.
대마도에 있을 때 평의지가 사신을 산속 절 잔치에 청하였다. 사신이 이미 자리에 앉았는데 의지가 가마를 타고 문에 들어와 섬돌에 이르러서야 내렸다. 김성일이 노하여 말하였다.
「대마도는 곧 우리나라의 울타리 신하다. 사신이 명을 받들고 왔거늘 어찌 감히 이토록 업신여기는가. 나는 이 잔치를 받을 수 없다.」
곧 일어나 나가니 허성 등이 뒤따라 나갔다. 의지가 허물을 가마 멘 자에게 돌려 죽이고 그 머리를 받들고 와서 사죄하였다. 이로부터 왜인이 성일을 공경하고 꺼려 예를 더하여 대접하고 멀리서 바라보고도 말에서 내렸다.
그 나라에 이르러 큰 절에 묵었다. 마침 평수길이 동산도(東山道)를 치러 가서 몇 달을 머물렀고, 수길이 돌아와서도 또 궁실을 고쳐 짓는다는 핑계로 곧 국서를 받지 않아, 앞뒤로 다섯 달을 객관에 머문 뒤에야 비로소 명을 전하였다. 그 나라는 천황을 높여 수길 이하가 다 신하의 예로 처하였다. 수길은 나라 안에서 왕이라 일컫지 않고 다만 관백(關白)이라 하거나 박륙후(博陸侯)라 하였다. 이른바 관백이란 곽광(霍光)의 「모든 일을 다 먼저 관백한다」는 말을 따서 일컬은 것이다.
우리 사신을 접할 때에는 가마를 타고 그 궁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고 갈잎피리와 뿔피리로 앞을 인도하게 하여 마루에 올라 예를 행하게 하였다. 수길은 얼굴이 작고 추하며 낯빛이 검어 남다른 겉모습이 없었고, 다만 눈빛이 번쩍번쩍하여 사람을 쏘는 듯함을 조금 느꼈다고 한다. 세 겹 자리를 깔고 남쪽을 향하여 땅에 앉았는데 사모를 쓰고 검은 도포를 입었으며 여러 신하 몇 사람이 벌여 앉았다. 우리 사신을 이끌어 자리에 나아가게 하였으나 잔치 기구는 차리지 않고 앞에 상 하나를 놓았는데 가운데 익힌 떡 한 그릇이 있었고, 질그릇 사발로 술을 돌렸는데 술 또한 흐렸다. 그 예가 지극히 간략하여 몇 순배에 그쳤고 절하고 읍하며 서로 잔을 권하는 절차가 없었다.
얼마 있다가 수길이 문득 일어나 안으로 들어갔는데 자리에 있던 이들은 다 움직이지 않았다. 이윽고 어떤 사람이 평상복으로 어린아이를 안고 안에서 나와 마루 가운데를 거닐었다. 보니 곧 수길이었다. 자리에 앉은 이들은 엎드릴 뿐이었다. 이윽고 나와 기둥 밖에 임하여 우리나라 악공을 불러 온갖 풍악을 성대히 아뢰게 하고 들었다. 어린아이가 옷 위에 오줌을 누니 수길이 웃으며 시중드는 이를 불렀다. 한 왜 여자가 소리에 응하여 달려 나와 그 아이를 받아 다른 옷으로 갈아입혔다. 다들 제 뜻대로 하여 곁에 사람이 없는 듯하였다. 사신이 하직하고 나온 뒤로는 다시 보지 못하였다. 상사와 부사에게 은 사백 냥을 주고 서장관과 통사 이하에게도 차등이 있었다.
우리 사신이 돌아오려 할 때 제때에 답서를 만들어 주지 않고 먼저 가라 하였다. 성일이 말하였다.
「내가 사신이 되어 국서를 받들고 왔는데 답서가 없다면 이는 명을 풀숲에 버리는 것과 같다.」
윤길은 머물러 있게 될까 두려워하여 서둘러 떠나 계빈(界濱)에 이르러 기다렸다. 답서가 비로소 왔는데 말뜻이 거슬리고 거만하여 우리가 바라던 바가 아니었다. 성일이 받지 않고 몇 차례 고치게 한 뒤에야 떠났다. 무릇 지나는 곳마다 여러 왜인이 준 물건을 성일은 다 물리쳤다.
윤길이 돌아와 부산에 배를 대고 사정을 급히 아뢰어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이라 하였다. 복명한 뒤에 임금이 인견하고 물으니 윤길이 앞서와 같이 대답하였다. 김성일은 말하였다.
「신은 그런 낌새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윤길이 인심을 흔드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말하였다. 이에 의논하는 이들이 혹은 윤길을 주장하고 혹은 성일을 주장하였다. 내가 성일에게 물었다.
「그대 말이 황 사신과 다르니 만일 병란이 있으면 장차 어찌하려는가.」
말하였다.
「나인들 어찌 왜가 끝내 움직이지 않으리라고 단정하겠는가. 다만 황의 말이 너무 무거워 안팎이 놀라고 의혹하므로 그것을 풀려 한 것뿐이다.」
時倭書。有率兵超入大明之語。余謂當卽具由奏聞天朝。首相以爲。恐皇朝罪我私通倭國。不如諱之。余曰。因事往來隣邦。有國之所不免。成化間。日本亦甞因我。求貢中國。卽據實奏聞天朝。降勅回諭。前事已然。非獨今日。今諱不聞奏。於大義不可。况賊若實有犯順之謀。從他處奏聞。而天朝反疑我國。同心隱諱。則其罪不止於通信而已也。朝廷多是余議者。遂遣金應南等馳奏。時福建人許儀後陳申等。被擄在倭中。已密報倭情。及琉球國世子尙寧。連遣使報聲息。獨我使未至。天朝疑我貳於倭。論議藉藉閣老許國曾使我國獨言朝鮮至誠事大。必不與倭叛。姑待之未久。應南等賫奏至。許公大喜而朝議始釋然云。
그때 왜의 글에 군사를 거느리고 명나라로 뛰어들겠다는 말이 있었다. 나는 마땅히 곧 사유를 갖추어 천조(天朝)에 아뢰어야 한다고 하였다. 수상은 황조가 우리더러 사사로이 왜국과 통하였다고 죄줄까 두려우니 숨기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 나는 말하였다.
「일로 인하여 이웃 나라와 오가는 것은 나라를 가진 이가 면할 수 없는 바다. 성화(成化) 연간에 일본이 또한 일찍이 우리를 통하여 중국에 조공하기를 구하매 곧 사실대로 천조에 아뢰니 칙서를 내려 타일렀다. 앞선 일이 이미 그러하였으니 오늘만이 아니다. 이제 숨기고 아뢰지 않음은 대의에 옳지 않다. 하물며 적이 실로 윗나라를 침범할 꾀를 가졌는데 다른 데서 아뢰어 천조가 도리어 우리나라가 한마음으로 숨겼다고 의심한다면 그 죄가 통신한 데 그치지 않을 것이다.」
조정에 내 의논을 옳다 하는 이가 많아 드디어 김응남(金應南) 등을 보내어 달려가 아뢰게 하였다. 그때 복건(福建) 사람 허의후(許儀後)·진신(陳申) 등이 사로잡혀 왜에 있으면서 이미 왜의 실정을 몰래 알렸고, 유구국(琉球國) 세자 상녕(尙寧)도 잇달아 사신을 보내어 소식을 알렸는데 유독 우리 사신만 이르지 않았으므로 천조가 우리를 왜에 두 마음을 품었다 의심하여 의논이 자자하였다. 각로(閣老) 허국(許國)은 일찍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온 적이 있어 홀로 「조선은 지성으로 큰 나라를 섬기니 반드시 왜와 더불어 배반하지 않을 것이다. 잠시 기다리자」 하였다. 오래지 않아 응남 등이 주문을 가지고 이르니 허공이 크게 기뻐하고 조정의 의논이 비로소 풀렸다고 한다.
朝廷憂倭。擇知邊事宰臣。巡察下三道以備之。金晬爲慶尙監司。李洸爲全羅監司。尹先覺爲忠淸監司。令備器械修城池。慶尙道築城尤多。如永川淸道三嘉大邱星州釜山東萊晋州安東尙州左右兵營。或新築或增修。時昇平旣久。中外狃安民以勞役爲憚。怨聲載路。余同年前典籍李魯。陜川人。貽書余言。築城非計。且曰。三嘉前阻鼎津。倭能飛渡乎。何爲浪築勞民。夫以萬里滄溟。猶不能禦倭。而欲限一衣帶水。必倭之不能渡。其亦踈矣。而一時人議如此。弘文館亦上箚論之。然兩南所築。皆不得形勢。且以濶大容衆爲務。如晋州城。本據險可守。至是以爲小。移東面下就平地。其後賊由此入城。城遂不保。大抵城以堅小爲貴。而猶恐其不廣。亦時論然也。至於軍政之本擇將之要組練之方。百不一擧。以至於敗。
조정이 왜를 걱정하여 변방 일을 아는 재신을 가려 아래 세 도를 돌아보며 대비하게 하였다. 김수(金睟)를 경상감사로, 이광(李洸)을 전라감사로, 윤선각(尹先覺)을 충청감사로 삼아 무기를 갖추고 성과 해자를 손질하게 하였다. 경상도에 쌓은 성이 더욱 많아 영천·청도·삼가·대구·성주·부산·동래·진주·안동·상주와 좌우 병영을 혹 새로 쌓고 혹 더 손질하였다.
그때 태평이 이미 오래라 안팎이 편안함에 익어 백성이 부역을 꺼려 원망하는 소리가 길에 가득하였다. 나와 같은 해에 과거에 오른 전 전적 이로(李魯)는 합천 사람인데 나에게 글을 보내어 성 쌓는 것은 계책이 아니라 하고 또 말하였다.
「삼가는 앞이 정진(鼎津)에 막혔으니 왜가 날아 건널 수 있겠는가. 어찌하여 부질없이 쌓아 백성을 괴롭히는가.」
무릇 만 리 푸른 바다로도 오히려 왜를 막지 못하는데 한 옷 띠만 한 물이 왜를 건너지 못하게 하리라 여겼으니 그 또한 어설프다. 그런데도 한때 사람들의 의논이 이와 같았고 홍문관도 차자를 올려 그것을 논하였다.
그러나 두 남도에 쌓은 것은 다 형세를 얻지 못하였고, 또 넓고 커서 많은 사람을 들이는 것만 힘썼다. 진주성 같은 것은 본디 험한 데를 의지하여 지킬 만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작다 하여 동쪽 면을 옮겨 평지로 내려왔다. 그 뒤에 적이 이리로 성에 들어와 성이 마침내 보전되지 못하였다. 대저 성은 굳고 작은 것을 귀하게 여기는데 오히려 넓지 못할까 걱정하였으니 이 또한 그때 의논이 그러하였다. 군정의 근본과 장수를 가리는 요체와 군사를 짜서 익히는 방도에 이르러서는 백에 하나도 거행하지 못하여 마침내 패하기에 이르렀다.
擢井邑縣監李舜臣。爲全羅左道水軍節度使。舜臣有膽略善騎射。甞爲造山萬戶。時北邊多事。舜臣以計誘致叛胡于乙其乃。縛送兵營斬之。虜患遂息。巡察使鄭彥信。令舜臣護鹿屯島屯田。一日大霧。軍人盡出收禾。栅中但有十餘人。俄而。虜騎四集。舜臣閉栅門。自以柳葉箭。從栅內連射賊數十墮馬。虜驚駭退走。舜臣開門。單騎大呼逐之。虜衆大奔。盡奪所掠而還。然朝無推挽者。登第十餘年不調。始爲井邑縣監。是時倭聲日急。上命備邊司。各薦才堪將帥者。余擧舜臣。遂自井邑。超拜水使。人或疑其驟。時在朝武將中。唯申砬李鎰。最有名。慶尙右兵使曹大坤。年老無勇。衆憂不堪閫寄。余於經席。啓請以鎰代大坤。兵曹判書洪汝諄曰。名將當在京都。鎰不可遣。余再啓曰。凡事貴預。况治兵禦賊。尤不可猝辦。一朝有變。鎰終不得不遣。等遣之。寧早往一日。使預備待變。庶或有益。不然倉卒之際。以客將馳下。旣不諳本道形勢。又不識軍士勇㤼。此兵家所忌。必有後悔。不答。余又出備邊司。與諸人議啓。請修祖宗鎭管之法。大略以爲。國初各道軍兵。皆分屬鎭管。有事則鎭管統率屬邑。鱗次整頓。以待主將號令。以慶尙道言之。則金海大丘尙州慶州安東晉州是爲六鎭管。脫有敵兵。一鎭之軍。雖或失利。他鎭次第嚴兵堅守。不至於靡然奔潰。往在乙卯變後。金秀文在全羅道。始改分軍法。割道內諸邑。散屬於巡邊使防禦使助防將都元帥及本道兵水使。名曰制勝方略。諸道皆效之。於是鎭管之名雖存。而其實不相維繫。一有警急。則必將遠近俱動。使無將之軍。先聚於原野之中。以待將帥於千里之外。將不時至。而賊鋒已逼。則軍心驚懼。此必潰之道也。大衆一潰。難可復合。此時將帥雖至。誰與爲戰。不如更修祖宗鎭管之制。平時易於訓鍊。有事得以調集。且使前後相應。內外相倚。不至於土崩瓦解。於事爲便。事下本道。慶尙監司金睟以爲。制勝方略。行用已久。不可猝變。議遂寢。
정읍현감 이순신(李舜臣)을 뽑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삼았다.
순신은 담력과 지략이 있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다. 일찍이 조산만호(造山萬戶)가 되었는데 그때 북쪽 변방에 일이 많았다. 순신이 꾀로 배반한 오랑캐 우을기내(于乙其乃)를 꾀어 들여 결박하여 병영으로 보내어 목을 베니 오랑캐의 걱정이 드디어 그쳤다. 순찰사 정언신(鄭彥信)이 순신에게 녹둔도(鹿屯島)의 둔전을 지키게 하였다. 하루는 안개가 크게 끼어 군사들이 다 나가 벼를 거두고 목책 안에는 다만 십여 인이 있었다. 이윽고 오랑캐 기병이 사방에서 모여드니 순신이 목책 문을 닫고 스스로 버들잎 화살(柳葉箭)로 목책 안에서 잇달아 쏘아 적 수십을 말에서 떨어뜨렸다. 오랑캐가 놀라 물러가 달아나자 순신이 문을 열고 홀로 말을 달려 크게 외치며 쫓으니 오랑캐 무리가 크게 달아났고, 빼앗겼던 것을 다 되찾아 돌아왔다. 그러나 조정에 밀어 주는 이가 없어 과거에 오른 지 십여 년에 자리를 얻지 못하다가 비로소 정읍현감이 되었다.
이때 왜의 기별이 날로 급하므로 임금이 비변사에 명하여 저마다 장수 될 만한 재주 있는 이를 천거하게 하였다. 내가 순신을 천거하니 드디어 정읍에서 뛰어올라 수사에 임명되었다. 사람들은 혹 그 빠름을 의심하였다.
그때 조정에 있는 무장 가운데 오직 신립(申砬)과 이일(李鎰)이 가장 이름이 있었다. 경상우병사 조대곤(曺大坤)은 나이 늙고 용맹이 없어 여럿이 그가 변방의 소임을 감당하지 못할까 걱정하였다. 내가 경연 자리에서 이일로 대곤을 대신하게 하기를 아뢰어 청하니 병조판서 홍여순(洪汝諄)이 말하였다.
「이름난 장수는 마땅히 서울에 있어야 하니 이일을 보낼 수 없습니다.」
내가 다시 아뢰었다.
「무릇 일은 미리 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거늘 하물며 군사를 다스려 적을 막는 일은 더욱 갑자기 마련할 수 없습니다. 하루아침에 변이 있으면 이일을 끝내 보내지 않을 수 없으니, 같이 보낼 바에는 차라리 하루라도 일찍 가서 미리 갖추고 변을 기다리게 함이 혹 보탬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창졸간에 손님 같은 장수가 달려 내려가면 이미 그 도의 형세를 알지 못하고 또 군사의 용맹하고 겁 많음도 알지 못하니, 이는 병가에서 꺼리는 바라 반드시 뒷날 뉘우침이 있을 것입니다.」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또 비변사에 나가 여러 사람과 의논하여 아뢰어 조종의 진관(鎭管) 법을 다시 닦기를 청하였다. 대략 이러하였다.
「나라 처음에 각 도의 군병이 다 진관에 나뉘어 붙어, 일이 있으면 진관이 딸린 고을을 거느려 비늘처럼 차례로 정돈하여 주장의 호령을 기다렸습니다. 경상도로 말하면 김해·대구·상주·경주·안동·진주가 곧 여섯 진관입니다. 설혹 적병이 있어 한 진의 군사가 혹 이기지 못하더라도 다른 진이 차례로 군사를 엄히 하여 굳게 지키니 한꺼번에 무너져 달아나는 데 이르지 않습니다. 지난 을묘년 변란 뒤에 김수문(金秀文)이 전라도에 있으면서 비로소 군사 나누는 법을 고쳐 도내 여러 고을을 갈라 순변사·방어사·조방장·도원수와 본도 병사·수사에게 흩어 붙이고 이름을 제승방략(制勝方略)이라 하니 여러 도가 다 본받았습니다. 이에 진관의 이름은 비록 남았으나 실상은 서로 얽매이지 않아, 한번 급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멀고 가까운 데가 함께 움직여 장수 없는 군사를 먼저 들판 가운데 모아 놓고 천 리 밖의 장수를 기다리게 됩니다. 장수가 제때에 이르지 않았는데 적의 칼끝이 이미 다가오면 군사의 마음이 놀라고 두려워하니 이는 반드시 무너지는 길입니다. 큰 무리가 한번 무너지면 다시 모으기 어려우니 이때 장수가 비록 이른들 누구와 더불어 싸우겠습니까. 조종의 진관 제도를 다시 닦아 평시에는 훈련하기 쉽고 일이 있으면 불러 모을 수 있게 하며, 또 앞뒤가 서로 응하고 안팎이 서로 의지하여 흙이 무너지고 기와가 깨지듯 되지 않게 함만 못하니 일에 편합니다.」
일을 본도에 내리니 경상감사 김수는 제승방략을 쓴 지 이미 오래라 갑자기 바꿀 수 없다 하여 의논이 드디어 그쳤다.
壬辰春。分遣申砬李鎰。巡視邊備。鎰往忠淸全羅道。砬往京畿黃海道。皆閱月而還。所點者弓矢槍刀而已。郡邑率以文具避法。無他備禦長策。砬素有殘暴之名。所至殺人立威。守令畏之。發民治道。供帳極侈。雖大臣之行不如也。旣復命。四月一日。砬來見余于私第。余問早晩有變。公當任之。公料今日賊勢難易如何。砬甚輕之。以爲不足憂。余曰不然。往者倭但恃短兵。今則兼有鳥銃長技。不可輕視。砬遽曰。雖有鳥銃。豈能盡中。余曰。國家昇平久。士卒怯弱。果然有急。極難支吾。意數年後。人頗習兵。或還收拾未可知。其初則吾甚憂之。砬都不省悟而去。蓋砬於癸未。爲穩城府使。叛胡圍鍾城。砬馳往救之。以十餘騎突擊。虜解去。朝廷以砬才堪大將。陞爲北兵使平安兵使。未久。階資憲。至欲以爲兵曹判書。意氣方銳。正如趙括輕秦。略無臨事以懼之意。識者憂焉。
임진년 봄에 신립과 이일을 나누어 보내어 변방 방비를 돌아보게 하였다. 이일은 충청도와 전라도로 가고 신립은 경기도와 황해도로 가서 다 한 달 남짓 만에 돌아왔다. 점검한 것은 활과 화살과 창과 칼뿐이었고, 고을은 대개 문서만 갖추어 법을 피하였으며 달리 막아 지킬 좋은 계책이 없었다. 신립은 본디 모질고 사납다는 이름이 있어 이르는 곳마다 사람을 죽여 위엄을 세우니 수령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백성을 내어 길을 닦고 장막을 차려 받드는 것이 지극히 사치스러워 비록 대신의 행차라도 이만 못하였다.
복명한 뒤 사월 초하룻날 신립이 내 집으로 나를 보러 왔다. 내가 물었다.
「머지않아 변이 있으면 공이 마땅히 그 일을 맡을 터인데, 공은 오늘 적의 형세가 어렵고 쉬움을 어떻게 헤아리는가.」
신립은 몹시 가볍게 여겨 걱정할 것이 못 된다 하였다. 내가 말하였다.
「그렇지 않다. 지난날 왜는 다만 짧은 병기만 믿었으나 이제는 조총이라는 긴 재주를 겸하였으니 가볍게 볼 수 없다.」
신립이 대뜸 말하였다.
「비록 조총이 있은들 어찌 다 맞힐 수 있겠습니까.」
내가 말하였다.
「나라가 태평한 지 오래라 군사가 겁 많고 약하니 참으로 급한 일이 있으면 버티기가 지극히 어려울 것이다. 몇 해 뒤라면 사람들이 자못 군사에 익어 혹 수습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나, 그 처음은 내가 몹시 걱정한다.」
신립은 도무지 깨닫지 못하고 갔다.
대개 신립은 계미년에 온성부사가 되었는데 배반한 오랑캐가 종성을 에워싸자 신립이 달려가 구원하여 십여 기로 돌격하니 오랑캐가 에움을 풀고 갔다. 조정이 신립을 대장의 재목이라 하여 북병사와 평안병사로 올리고 오래지 않아 자헌대부에 올렸으며 병조판서로 삼고자 하기까지 하였다. 의기가 바야흐로 날카로워 마치 조괄(趙括)이 진(秦)나라를 가볍게 본 것과 같아 일에 임하여 두려워하는 뜻이 조금도 없으니 아는 이들이 걱정하였다.
遞慶尙右兵使曹大坤。特旨以承旨金誠一代之。備邊司啓誠一儒臣也。不合此時邊帥之任。不允。誠一遂拜辭而行。四月十三日。倭兵犯境。陷釜山浦。僉使鄭撥死。先是倭平調信玄蘇等。與通信使偕來。舘於東平舘。備邊司請令黃允吉金誠一等。私以酒饌往慰。因從容問其國事。鉤察情形。以備策應。許之。誠一至舘。玄蘇果密語曰。中國久絕日本。不通朝貢。平秀吉以此心懷憤恥。欲起兵端。朝鮮先爲奏聞。使貢路得達。則必無事。而日本六十六州之民。亦免兵革之勞矣。誠一等因以大義責諭之。玄蘇又曰。昔高魔導元兵擊日本。日本以此報怨於朝鮮。勢所宜然。其言漸悖。自是再不復問。而調信玄蘇自回。辛卯夏。平義智又到釜山浦。爲邊將言。日本欲通大明。若朝鮮爲之奏聞。則幸甚。不然。兩國將失和氣。此乃大事。故來告。邊將以聞。時朝議方咎通信。且怒其悖慢不報。義智泊船十餘日。怏怏而去。是後倭人不復至。釜山浦留舘倭。常有數十餘人。稍稍入歸。一舘幾空。人怪之。是日倭船自對馬島。蔽海而來。望之不見其際。釜山僉使鄭撥。出獵絕影島。狼狽入城。倭兵隨至登陸。四面雲集。不移時城陷。左水使朴泓。見賊勢大。不敢出兵棄城逃。倭分兵陷西平浦多大浦。多大僉使尹興信。力戰被殺。左兵使李珏。聞聲息。自兵營入東萊。及釜山陷。珏恇撓失措。託言欲在外掎角。出城退陣于蘇山驛。府使宋象賢。留與同守。珏不從。十五日。倭進迫東萊。象賢登城南門。督戰半日而城陷。象賢。堅坐受刃而死。倭人嘉其死守。棺歛之埋於城外。立標以識之。於是郡縣望風奔潰。密陽府使朴晋。自東萊奔還。欲阻鵲院隘路以禦之。賊陷梁山至鵲院。見其守兵。從山後乘高。蟻附散漫而至。守隘者望之皆散。晉馳還密陽。縱火焚軍器倉庫。棄城入山。李珏奔還兵營。先出其妾。城中洶洶。軍一夜四五驚。珏乘曉亦脫身遁去。衆軍大潰。賊分道長驅。連陷諸邑。無一人敢拒者。金海府使徐禮元。閉門城守。賊刈城外麥禾塡壕。頃刻與城齊。因踰城。草溪郡守李某先遁。禮元繼出。城遂陷。巡察使金晬。初在晋州聞變。馳向東萊。至中路。聞賊兵已近。不能前還走右道。不知所爲。但檄列邑。諭民避賊。由是道內皆空。愈不可爲矣。龍宮縣監禹伏龍。領邑軍赴兵營。食永川路邊。有河陽軍數百。屬防禦使向上道。過其前。伏龍怒軍士不下馬。拘之責以欲叛。河陽軍。出兵使公文示之。方自辨。伏龍目其軍圍而殺之皆盡。積尸滿野。巡察使以功聞。伏龍爲通政。代鄭熙績爲安東府使。後河陽人孤兒寡妻。每逢使臣之來。遮馬首號寃。伏龍有時名。故無伸理者云。
경상우병사 조대곤을 갈고 특별한 분부로 승지 김성일로 대신하게 하였다. 비변사가 「성일은 선비인 신하라 이때 변방 장수의 소임에 맞지 않습니다」 하고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으니 성일이 드디어 하직하고 떠났다.
사월 열사흗날 왜병이 국경을 침범하여 부산포를 함락하니 첨사 정발(鄭撥)이 죽었다.
이보다 앞서 왜인 평조신과 현소 등이 통신사와 함께 와서 동평관에 묵었다. 비변사가 황윤길과 김성일 등으로 하여금 사사로이 술과 안주를 가지고 가서 위로하고 그 틈에 조용히 그 나라 일을 물어 실정을 살펴 대책에 대비하기를 청하니 허락하였다. 성일이 객관에 이르자 현소가 과연 은밀히 말하였다.
「중국이 일본을 끊은 지 오래라 조공이 통하지 않으니 평수길이 이 때문에 마음에 분함과 부끄러움을 품어 군사를 일으키려 합니다. 조선이 먼저 아뢰어 조공 길이 통하게 하면 반드시 일이 없을 것이요, 일본 예순여섯 주의 백성도 싸움의 수고를 면할 것입니다.」
성일 등이 대의로 꾸짖어 타이르니 현소가 또 말하였다.
「옛날 고려가 원나라 군사를 이끌어 일본을 쳤으니 일본이 이 때문에 조선에 원한을 갚으려는 것은 형세가 마땅히 그러합니다.」
그 말이 점점 도리에 어그러지므로 이로부터 다시 묻지 않았고 조신과 현소도 스스로 돌아갔다.
신묘년 여름에 평의지가 또 부산포에 이르러 변장에게 말하였다.
「일본이 명나라와 통하려 하니 조선이 이를 아뢰어 주면 다행이겠거니와, 그러지 않으면 두 나라가 장차 화기를 잃을 것이다. 이는 곧 큰일이므로 와서 알린다.」
변장이 이를 아뢰었으나 그때 조정의 의논이 바야흐로 통신한 일을 허물하고 또 그 거만함에 노하여 답하지 않았다. 의지가 배를 댄 채 십여 일을 있다가 앙앙하여 떠났다. 이 뒤로 왜인이 다시 오지 않았다. 부산포 객관에 머무는 왜인이 늘 수십여 인이었는데 조금씩 제 나라로 들어가 객관이 거의 비니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겼다.
이날 왜선이 대마도에서 바다를 덮고 오니 바라보아도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부산첨사 정발은 절영도에 사냥을 나갔다가 낭패하여 성에 들어왔다. 왜병이 뒤따라 이르러 뭍에 올라 사면에서 구름처럼 모여드니 얼마 되지 않아 성이 함락되었다. 좌수사 박홍(朴泓)은 적의 형세가 큰 것을 보고 감히 군사를 내지 못한 채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왜가 군사를 나누어 서평포와 다대포를 함락하니 다대첨사 윤흥신(尹興信)이 힘껏 싸우다 죽임을 당하였다. 좌병사 이각(李珏)은 기별을 듣고 병영에서 동래로 들어왔다가 부산이 함락되자 놀라고 어지러워 어쩔 줄 모르더니, 밖에 있으면서 앞뒤로 견제하겠다는 핑계로 성을 나가 소산역으로 물러가 진을 쳤다. 부사 송상현(宋象賢)이 머물러 함께 지키기를 청하였으나 이각은 따르지 않았다.
열닷샛날 왜가 나아가 동래에 다가오니 상현이 성 남문에 올라 반나절을 싸움을 독려하다가 성이 함락되었다. 상현은 굳게 앉은 채 칼을 받고 죽었다. 왜인이 그가 죽음으로 지킨 것을 가상히 여겨 관에 넣어 성 밖에 묻고 표를 세워 알아보게 하였다.
이에 고을들이 적의 기세만 보고도(望風) 무너져 달아났다. 밀양부사 박진(朴晉)은 동래에서 달아나 돌아와 작원(鵲院)의 좁은 길을 막아 적을 막고자 하였다. 적이 양산을 함락하고 작원에 이르러 지키는 군사를 보고는 산 뒤에서 높은 데를 타고 개미 붙듯 흩어져 다가오니 좁은 길을 지키던 이들이 바라보고 다 흩어졌다. 박진이 밀양으로 달려 돌아와 불을 놓아 무기와 창고를 태우고 성을 버린 채 산으로 들어갔다.
이각은 병영으로 달아나 돌아와 먼저 제 첩을 내보내니 성안이 흉흉하여 군사가 하룻밤에 네댓 번 놀랐다. 이각이 새벽을 타 또한 몸을 빼어 달아나니 뭇 군사가 크게 무너졌다. 적이 길을 나누어 멀리 몰아 여러 고을을 잇달아 함락하는데 감히 막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김해부사 서예원(徐禮元)이 문을 닫고 성을 지키니 적이 성 밖의 보리를 베어 해자를 메워 잠깐 사이에 성과 나란해지자 그것을 밟고 성을 넘었다. 초계군수 아무개가 먼저 달아나고 예원이 뒤이어 나가니 성이 마침내 함락되었다.
순찰사 김수는 처음에 진주에 있다가 변을 듣고 동래로 달려가다가 중도에서 적병이 이미 가까이 왔음을 듣고 나아가지 못하고 우도로 돌아와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다만 여러 고을에 격문을 보내어 백성에게 적을 피하라 타일렀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도내가 다 비어 더욱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용궁현감 우복룡(禹伏龍)이 고을 군사를 거느리고 병영으로 가다가 영천 길가에서 밥을 먹는데, 하양 군사 수백이 방어사에 딸려 윗길로 가느라 그 앞을 지나갔다. 복룡이 군사들이 말에서 내리지 않은 것에 노하여 붙잡아 두고 배반하려 한다고 꾸짖었다. 하양 군사가 병사의 공문을 내어 보이며 바야흐로 스스로 밝히려 하는데, 복룡이 제 군사에게 눈짓하여 에워싸고 죽여 다 없애니 쌓인 주검이 들에 가득하였다. 순찰사가 이를 공으로 아뢰어 복룡은 통정대부가 되고 정희적(鄭熙績)을 대신하여 안동부사가 되었다. 뒤에 하양 사람의 외로운 아이와 홀로 된 아내가 사신이 올 때마다 말머리를 막고 원통함을 부르짖었으나, 복룡이 그때 이름이 있었으므로 펴 주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十七日早朝。邊報始至。乃左水使朴泓狀啓也。大臣備邊司會賓廳請對。不許。卽啓請以李鎰爲巡邊使。下中路。成應吉爲左防禦使。下左道。趙儆爲右防禦使。下西路。劉克良爲助防將。守竹嶺。邊璣爲助防將。守鳥嶺。以慶州府尹尹仁涵。儒臣懦㤼。起復前江界府使邊應星。爲慶州府尹。皆令自擇軍官以去。俄而釜山陷報又至。時釜山受圍。人不能通。泓狀啓但云。登高以望。赤旗滿城中。以此知城陷。李鎰欲率京中精兵三百名去。取兵曹選兵案視之。皆閭閻市井白徒。胥吏儒生居半。臨時點閱。儒生具冠服持試卷。吏戴平頂巾。自愬求免者。充滿於庭。無可遣者。鎰受命三日不發。不得已令鎰先行。使別將俞沃。隨後領去。余啓兵曹判書洪汝諄。不能治任。且軍士多怨可遞。於是金應南。代爲判書。沈忠謙爲參判。臺諫啓請。宜使大臣。爲體察使。檢督諸將。首相以余應命。余請以金應南爲副。以前義州牧使金汝岉有武略。時汝岉坐事繫獄啓請貸罪自隨募武士可堪裨將者得八十餘人旣而急報絡繹聞賊鋒已過密陽大丘將近嶺下余謂應南及申砬曰寇深事已急矣將若之何砬曰鎰以孤軍在前而無後繼體察使雖下去非戰將何不使猛將星馳先下爲鎰策應耶觀砬意欲自行援鎰余與應南請對啓如砬言上卽召申砬問之遂以砬爲都巡邊使砬出闕門外自行招募武士無願從者時余在中樞府治行事砬至余所見階庭間應募者簇立色甚怒指金判書謂余曰如此公者大監帶去安用小人願爲副使而去余知砬怒武士不從己笑曰同是國事何分彼此令公旣行急吾所得軍官可先帶行吾當別募隨行因以軍官單子授之砬遂回顧庭中武士曰來乃引之而出諸人皆憮然而去金汝岉亦同去意甚不樂砬臨行上引見賜寶劍曰李鎰以下不用命者用此劒砬辭出又詣賓廳見大臣將下階頭上紗帽忽落在地上見者失色到龍仁啓事狀中不署其名人或疑其心亂逮慶尙右兵使金誠一下獄未至還以爲招諭使以咸安郡守柳崇仁爲兵使初誠一到尙州聞賊已犯境晝夜馳赴本營遇曹大坤於路中交印節時賊已陷金海分掠右道諸邑誠一進與賊遌將士欲走誠一下馬踞胡床不動呼軍官李宗仁曰汝勇士也不可見賊先退有一賊著金假面揮刃突進宗仁馳馬而出一箭迎射殪之諸賊却走不敢前誠一收召離散移檄郡縣以爲牽綴之計。上以誠一前使日本。言賊未易至。解人心誤國事。命遣義禁府都事拿來。事將不測。監司金晬。聞誠一被逮。出別於路上。誠一辭氣慷慨。無一語及已事。惟勉晬以盡力討賊。老吏河自溶歎曰。己死之不恤。而惟國事是憂。眞忠臣也。誠一行至稷山。上怒霽。且知誠一得本道士民心。命赦其罪。爲右道招諭使。使諭道內人民。起兵討賊。時柳崇仁有戰功。故超拜兵使。
열이렛날 이른 아침에 변방의 보고가 비로소 이르렀으니 곧 좌수사 박홍의 장계였다. 대신과 비변사가 빈청에 모여 임금 뵙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곧 아뢰어 이일을 순변사로 삼아 가운뎃길로 내려가게 하고, 성응길(成應吉)을 좌방어사로 삼아 좌도로, 조경(趙儆)을 우방어사로 삼아 서쪽 길로 내려가게 하며, 유극량(劉克良)을 조방장으로 삼아 죽령을 지키게 하고, 변기(邊璣)를 조방장으로 삼아 조령을 지키게 하기를 청하였다. 경주부윤 윤인함(尹仁涵)은 선비인 신하라 나약하고 겁이 많다 하여 전 강계부사 변응성(邊應星)을 거상 중에 불러내어(起復) 경주부윤으로 삼았다. 다들 스스로 군관을 가려 데리고 가게 하였다.
이윽고 부산이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또 이르렀다. 그때 부산은 에워싸여 사람이 통할 수 없었으므로 박홍의 장계에는 다만 이렇게 적혀 있었다.
「높은 데 올라 바라보니 붉은 깃발이 성안에 가득합니다. 이로써 성이 함락된 줄 압니다.」
이일이 서울의 정병 삼백 명을 거느리고 가려 하여 병조에서 뽑아 둔 군사 명부를 가져다 보니 다 여염과 저자의 훈련 없는 무리요 아전과 유생이 반을 차지하였다. 때에 임하여 점검하니 유생은 관복을 갖추고 시험지를 들었으며 아전은 평정건을 썼는데, 스스로 하소연하여 면하기를 구하는 이가 뜰에 가득하여 보낼 만한 이가 없었다. 이일이 명을 받은 지 사흘이 되도록 떠나지 못하매, 부득이 이일을 먼저 가게 하고 별장 유옥(俞沃)으로 하여금 뒤따라 거느려 가게 하였다.
내가 아뢰어 병조판서 홍여순은 일을 다스리지 못하고 또 군사들이 원망함이 많으니 갈 만하다고 하였다. 이에 김응남이 대신 판서가 되고 심충겸(沈忠謙)이 참판이 되었다. 대간이 아뢰어 마땅히 대신으로 체찰사를 삼아 여러 장수를 단속하게 하기를 청하니 수상이 나를 천거하여 명에 응하게 하였다. 나는 김응남을 부사로 삼기를 청하였다. 전 의주목사 김여물(金汝岉)이 무략이 있는데 그때 일에 걸려 옥에 갇혀 있으므로 아뢰어 그 죄를 늦추고 데려가기를 청하였다. 비장이 될 만한 무사를 모집하여 팔십여 인을 얻었다.
이윽고 급한 보고가 잇달아 적의 칼끝이 이미 밀양과 대구를 지나 장차 조령 아래에 가까웠다 하였다. 내가 응남과 신립에게 말하였다.
「적이 깊이 들어와 일이 이미 급하니 장차 어찌하겠는가.」
신립이 말하였다.
「이일이 외로운 군사로 앞에 있고 뒤를 잇는 이가 없으니, 체찰사가 비록 내려간들 싸우는 장수가 아닙니다. 어찌 사나운 장수를 별똥별처럼 달려 먼저 내려보내어 이일을 도와 응하게 하지 않습니까.」
나는 신립의 뜻이 스스로 가서 이일을 도우려는 데 있음을 알았다. 내가 응남과 더불어 임금 뵙기를 청하여 신립의 말대로 아뢰니, 임금이 곧 신립을 불러 물으시고 드디어 신립을 도순변사로 삼으셨다.
신립이 대궐 문 밖에 나와 스스로 무사를 불러 모았으나 따르기를 원하는 이가 없었다. 그때 나는 중추부에 있으면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는데, 신립이 내 있는 데 이르러 섬돌과 뜰 사이에 응모한 이들이 빽빽이 선 것을 보고 낯빛이 몹시 노하여 김 판서를 가리키며 나에게 말하였다.
「이 같은 공을 대감이 데리고 간들 어디에 쓰겠습니까. 소인이 부사가 되어 가기를 원합니다.」
나는 신립이 무사들이 저를 따르지 않음에 노한 줄 알고 웃으며 말하였다.
「다 같은 나라 일인데 어찌 네 것 내 것을 가리겠는가. 영공이 이미 떠나니 급하다. 내가 얻은 군관을 먼저 데리고 가라. 나는 마땅히 따로 모집하여 데리고 가겠다.」
그리고 군관 명단을 주었다. 신립이 드디어 뜰 가운데 무사들을 돌아보며 「오라」 하고 이끌고 나가니 여러 사람이 다 낙담하여 갔다. 김여물도 함께 갔는데 마음이 몹시 즐겁지 않았다.
신립이 떠날 때 임금이 인견하고 보검을 내리며 말씀하셨다.
「이일 이하로 명을 따르지 않는 자는 이 칼을 쓰라.」
신립이 하직하고 나와 또 빈청에 나아가 대신을 뵙고 섬돌을 내려가려는데 머리 위의 사모가 홀연히 땅에 떨어지니 보던 이들이 낯빛을 잃었다. 용인에 이르러 일을 아뢴 장계에 제 이름을 쓰지 않으니 사람들이 혹 그 마음이 어지러운가 의심하였다.
경상우병사 김성일을 잡아 옥에 내리라 하였다가 이르기 전에 도로 초유사로 삼고, 함안군수 유숭인(柳崇仁)으로 병사를 삼았다. 처음에 성일이 상주에 이르러 적이 이미 국경을 침범하였음을 듣고 밤낮으로 본영으로 달려가다가 길에서 조대곤을 만나 인신과 병부를 주고받았다. 그때 적이 이미 김해를 함락하고 우도의 여러 고을을 나누어 노략질하였다. 성일이 나아가 적과 마주치니 장수와 군사가 달아나려 하였다. 성일이 말에서 내려 호상에 걸터앉아 움직이지 않고 군관 이종인(李宗仁)을 불러 말하였다.
「너는 용사다. 적을 보고 먼저 물러날 수 없다.」
한 적이 금빛 가면을 쓰고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자 종인이 말을 달려 나가 화살 하나로 맞받아 쏘아 죽이니, 여러 적이 물러나 달아나 감히 앞서지 못하였다. 성일이 흩어진 이들을 거두어 부르고 고을에 격문을 옮겨 적을 얽어매는 계책으로 삼았다.
임금은 성일이 지난해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적이 쉬 오지 않으리라 말하여 인심을 풀어 놓고 나랏일을 그르쳤다 하여 의금부도사를 보내어 잡아 오라 명하시니 일이 장차 헤아릴 수 없게 되었다. 감사 김수가 성일이 잡혀 온다는 말을 듣고 길 위에 나와 작별하였다. 성일은 말과 기운이 강개하여 한마디도 제 일에 미치지 않고 오직 김수에게 힘을 다하여 적을 치라고 권면하였다. 늙은 아전 하자용(河自溶)이 탄식하며 말하였다.
「제 죽음은 걱정하지 않고 오직 나랏일만 근심하니 참된 충신이다.」
성일의 행차가 직산에 이르렀을 때 임금의 노여움이 풀렸고, 또 성일이 본도 사민의 마음을 얻은 줄 아시어 그 죄를 용서하고 우도초유사로 삼아 도내 인민을 타일러 군사를 일으켜 적을 치게 하라 명하셨다. 그때 유숭인은 싸운 공이 있었으므로 뛰어올라 병사에 임명된 것이다.
以僉知金玏。爲慶尙左道安集使。時監司金晬在右道。而賊兵橫貫中路。與左道聲聞不通。守令皆棄官逃走。民心解散。朝廷聞之。以金玏榮川人。詳知本道民情。可以安集。故白遣之。玏旣至。左道之民。始聞朝廷之令。稍稍還集。榮川豐基二邑。賊幸不至。而義兵頗起云。
첨지 김륵(金玏)을 경상좌도 안집사로 삼았다. 그때 감사 김수는 우도에 있고 적병이 가운뎃길을 가로질러 좌도와는 소식이 통하지 않았다. 수령들이 다 벼슬을 버리고 달아나 민심이 흩어졌다. 조정이 이를 듣고, 김륵은 영천(榮川) 사람이라 본도의 민정을 자세히 알아 편안히 모을 수 있다 하여 아뢰어 보냈다. 김륵이 이르자 좌도 백성이 비로소 조정의 명령을 듣고 조금씩 돌아와 모였다. 영천과 풍기 두 고을은 다행히 적이 이르지 않았고 의병이 자못 일어났다고 한다.
賊陷尙州。巡邊使李鎰。兵敗奔還忠州。初慶尙道巡察使金晬。聞賊變。卽依方略分軍。移文列邑。各率所屬。屯聚信地。以待京將之至。聞慶以下守令。皆引其軍赴大丘。露次川邊。待巡邊使旣數日。巡邊使未及來。而賊漸近。衆軍自相驚動。會大雨。衣裝沾濕。糧餉不繼。夜中皆潰散。守令悉以單騎奔還。巡邊使入聞慶。縣中已空。不見一人。自發倉穀。餉所率人。而過歷咸昌至尙州。牧使金澥。託以支待巡邊使于出站。遁入山中。獨判官權吉守邑。鎰以無兵責吉。曳之庭欲斬之。吉哀告願自出招呼。達夜搜索村落間。詰朝得數百人以至。皆農民也。鎰留尙州一日。發倉開糶。誘出散民。從山谷中。介介而來。又數百餘人。倉卒編伍爲軍。無一堪戰者。時賊已至善山。暮有開寧縣人。來報賊近。鎰以爲惑衆將斬之。其人呼曰。願姑囚我。明早賊未至。死未晚也。是夜賊兵屯長川。距尙州二十里。而鎰軍無斥候。故賊來不知。翌朝。鎰猶謂無賊。出開寧人於獄。斬以徇衆。因率所得民軍。合京來將士。僅八九百。習陣于州北川邊。依山爲陣。陣中立大將旗。鎰被甲立馬大旗下。從事官尹暹朴箎及判官權吉。沙斤察訪金宗武等。皆下馬在鎰馬後。有頃。有數人從林木間出。徘徊眺望而回。衆疑爲賊候。而懲開寧人不敢告。旣又望見城中。數處煙起。鎰始使軍官一人往探。軍官跨馬。二驛卒執鞚緩緩去。倭先伏橋下。以鳥銃中軍官墜馬。斬首而去。我軍望見奪氣。俄而賊大至。以鳥銃十餘衝之。中者卽斃。鎰急呼軍人發射矢。數十步輒墜。不能傷賊。賊已分出左右翼。持旗幟繞軍後。圍抱而來。鎰知事急。撥回馬向北走。軍大亂。各自逃命。得脫者無幾。從事以下未及上馬者。悉爲賊所害。賊追鎰急。鎰棄馬脫衣服披髮赤體而走到聞慶。索紙筆馳啓敗狀。欲退守鳥嶺。聞申砬在忠州。遂趨忠州。
적이 상주를 함락하니 순변사 이일이 싸움에 져서 충주로 달아나 돌아왔다.
처음에 경상도순찰사 김수는 적의 변을 듣고 곧 제승방략에 따라 군사를 나누고 여러 고을에 글을 옮겨, 저마다 딸린 군사를 거느리고 정해진 자리에 모여 서울 장수가 오기를 기다리게 하였다. 문경 아래의 수령들이 다 그 군사를 이끌고 대구로 가서 냇가에 한데서 묵으며 순변사를 기다린 지 며칠이 되었다. 순변사는 미처 오지 않았는데 적이 점점 가까워지자 뭇 군사가 저희끼리 놀라 술렁였다. 마침 큰비가 내려 옷과 차림이 젖고 군량이 잇대지 못하니 밤중에 다 무너져 흩어졌고, 수령들은 죄다 홀몸으로 말을 달려 돌아갔다.
순변사가 문경에 들어가니 고을이 이미 비어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스스로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내어 거느린 이들을 먹이고, 함창을 지나 상주에 이르렀다. 목사 김해(金澥)는 순변사를 맞이해 대접한다는 핑계로 참에 나갔다가 산속으로 달아나 숨고, 홀로 판관 권길(權吉)이 고을을 지키고 있었다. 이일이 군사가 없다고 권길을 꾸짖어 뜰에 끌어내어 목을 베려 하니, 권길이 슬피 고하여 스스로 나가 불러 모으기를 원하였다. 밤새도록 마을을 뒤져 이튿날 아침에 수백 인을 얻어 왔는데 다 농민이었다. 이일이 상주에 하루를 머물러 창고를 열어 곡식을 풀어 흩어진 백성을 꾀어 내니 산골짜기에서 하나씩 둘씩 나와 또 수백여 인이 되었다. 창졸간에 대오를 엮어 군사로 삼았으나 싸움을 감당할 만한 이가 하나도 없었다.
그때 적이 이미 선산에 이르렀다. 저물녘에 개령 사람이 와서 적이 가까이 왔다고 알리니 이일이 뭇사람을 미혹하게 한다 하여 목을 베려 하였다. 그 사람이 부르짖었다.
「원컨대 나를 잠시 가두어 두소서. 내일 아침까지 적이 이르지 않거든 죽어도 늦지 않습니다.」
이날 밤 적병이 장천에 진을 쳤으니 상주와 이십 리 떨어진 곳이었으나, 이일의 군사에 척후가 없었으므로 적이 온 것을 알지 못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이일은 오히려 적이 없다 하여 개령 사람을 옥에서 내어 목을 베어 뭇사람에게 돌려 보였다. 그리고 얻은 백성 군사에 서울에서 온 장수와 군사를 합하여 겨우 팔구백으로 고을 북쪽 냇가에서 진 치는 법을 익혔는데, 산을 의지하여 진을 삼고 진 가운데 대장기를 세웠다. 이일이 갑옷을 입고 큰 기 아래 말을 세웠으며, 종사관 윤섬(尹暹)·박호(朴箎)와 판관 권길, 사근찰방 김종무(金宗武) 등이 다 말에서 내려 이일의 말 뒤에 있었다.
얼마 있다가 몇 사람이 수풀 사이에서 나와 서성이며 바라보고 돌아갔다. 여럿이 적의 척후라 의심하였으나 개령 사람의 일에 데어 감히 알리지 못하였다. 이윽고 또 성안 두어 곳에서 연기가 오르는 것이 보이므로 이일이 비로소 군관 한 사람을 보내어 살피게 하였다. 군관이 말에 걸터앉고 역졸 둘이 재갈을 잡아 천천히 가는데, 왜가 먼저 다리 밑에 엎드려 있다가 조총으로 군관을 맞히니 말에서 떨어졌다. 왜가 머리를 베어 갔다. 우리 군사가 바라보고 기운을 잃었다.
이윽고 적이 크게 이르러 조총 십여 자루로 들이치니 맞은 이는 곧 죽었다. 이일이 급히 군사를 불러 화살을 쏘게 하였으나 수십 걸음에 문득 떨어져 적을 상하게 하지 못하였다. 적은 이미 좌우 날개로 나뉘어 나와 깃발을 들고 군사 뒤를 돌아 에워싸며 다가왔다. 이일이 일이 급한 줄 알고 말을 돌려 북쪽으로 달아나니 군사가 크게 어지러워 저마다 목숨을 건지려 달아났고, 벗어난 이는 얼마 되지 않았다. 종사관 이하 미처 말에 오르지 못한 이들은 다 적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적이 이일을 급히 쫓으니 이일이 말을 버리고 옷을 벗고 머리를 풀어헤친 채 벗은 몸으로 달아나 문경에 이르러, 종이와 붓을 찾아 진 사정을 급히 아뢰었다. 물러가 조령을 지키려 하다가 신립이 충주에 있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충주로 달려갔다.
以右相李陽元。爲守城大將。李戩邊彥琇。爲京城左右衛將。商山君朴忠侃。爲京城巡檢使。使修都城。起復金命元。爲都元帥守漢江。時李鎰敗報已至。人心洶洶。內間有去邠之意。外庭不知。理馬金應壽。到賓廳。與首相耳語。去而復來。觀者疑之。蓋首相時爲司僕提調故也。都承旨李恒福。於掌中。書立馬永康門內六字示我。臺諫劾首相誤國請罷。不允。宗親聚閤門外痛哭。請勿棄城。領府事金貴榮。尤憤憤與諸大臣入對。請固守京城。且曰倡議棄城者。乃小人也。上敎曰。宗社在此。予將何適。衆遂退。然事不可爲矣。抄發坊里民及公私賤胥吏三醫司。分守城堞。計堞三萬餘。而守城人口僅七千。率皆烏合。皆有縋城逃散之心。上番軍士。雖屬於兵曹。而與下吏相與爲奸。受賂私放者甚多。官員不問去留。臨急皆不可用。軍政解弛。一至於此。
우의정 이양원(李陽元)을 수성대장으로 삼고, 이전(李戩)과 변언수(邊彥琇)를 경성 좌위장과 우위장으로, 상산군 박충간(朴忠侃)을 경성순검사로 삼아 도성을 손질하게 하였다. 김명원(金命元)을 거상 중에 불러내어 도원수로 삼아 한강을 지키게 하였다.
그때 이일이 졌다는 보고가 이미 이르러 인심이 흉흉하였다. 대궐 안에서는 도성을 떠날 뜻이 있었으나 바깥 조정은 알지 못하였다. 사복시에서 말을 맡은 이마(理馬) 김응수(金應壽)가 빈청에 이르러 수상과 귀엣말을 하고 갔다가 다시 오니 보는 이들이 의심하였다. 대개 수상이 그때 사복시 제조였던 까닭이다. 도승지 이항복(李恒福)이 손바닥에 「말을 영강문 안에 세워 두라」는 여섯 자를 써서 나에게 보였다.
대간이 수상이 나라를 그르쳤다고 탄핵하여 파직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종친들이 합문 밖에 모여 통곡하며 성을 버리지 마시기를 청하였다. 영부사 김귀영(金貴榮)이 더욱 분하여 여러 대신과 함께 들어가 뵙고 서울을 굳게 지키기를 청하고 또 말하였다.
「성을 버리자고 앞장서 의논하는 자는 곧 소인입니다.」
임금이 말씀하셨다.
「종묘사직이 여기 있으니 내 장차 어디로 가겠는가.」
여럿이 드디어 물러났다. 그러나 일은 어찌할 수 없었다. 동네와 마을의 백성과 공사의 천인과 아전과 세 의사(醫司)를 뽑아 내어 성가퀴를 나누어 지키게 하였는데, 성가퀴를 헤아리니 삼만여인데 성을 지킬 사람은 겨우 칠천이요 거의 다 오합지졸이라 다들 성을 타고 내려 달아날 마음을 품었다. 번을 서는 군사가 비록 병조에 딸렸으나 아래 아전들과 서로 간사한 짓을 하여 뇌물을 받고 사사로이 놓아 준 이가 몹시 많았다. 관원은 가고 머무는 것을 묻지 않아 급한 때에 임하여 다 쓸 수 없었으니, 군정이 풀어짐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大臣請建儲。以繫人心。從之。
대신이 세자 세우기를 청하여 인심을 매어 두게 하니 그대로 따르셨다.
遣同知事李德馨。使倭軍。尙州之敗。有倭學通事景應舜者。在李鎰軍中。爲賊所獲。倭將平行長。以平秀吉書契及送禮曹公文一道。授應舜出送。且曰在東萊時。生得蔚山郡守。傳送書契。而至今未報。朝鮮若有意講和可令李德馨。於二十八日。會我於忠州。蓋德馨。往年甞爲宣慰使。接待倭使。故行長欲見之。應舜至京。時事急。計無所出。意或因此緩兵。德馨亦自請行。令禮曹裁答書。挾應舜而去。熒惑犯南斗。徵京畿江原黃海平安咸鏡等道兵。入援京師。以吏曹判書李元翼。爲平安道都巡察使。知事崔興源。爲黃海道都巡察使。皆卽日發遣。以將有西狩之議。而元翼曾爲安州牧使。興源爲黃海監司。皆有惠政。爲民心所喜。故使之先往。撫諭軍民。以備巡幸。
동지사 이덕형(李德馨)을 보내어 왜군에게 사신 가게 하였다.
상주의 패전 때에 왜학 통사 경응순(景應舜)이라는 이가 이일의 군중에 있다가 적에게 사로잡혔다. 왜장 평행장이 평수길의 서계와 예조에 보내는 공문 한 통을 응순에게 주어 내보내며 또 말하였다.
「동래에 있을 때 울산군수를 산 채로 얻어 서계를 전해 보냈는데 이제까지 답이 없다. 조선이 만일 강화할 뜻이 있거든 이덕형으로 하여금 스물여드렛날 충주에서 나를 만나게 하라.」
대개 덕형은 지난해에 일찍이 선위사가 되어 왜 사신을 접대하였으므로 행장이 그를 보고자 한 것이다. 응순이 서울에 이르렀는데 그때 일이 급하여 계책이 나올 데가 없었고, 혹 이로 인하여 군사를 늦출까 하였다. 덕형도 스스로 가기를 청하므로 예조로 하여금 답서를 짓게 하여 응순을 데리고 갔다.
형혹성이 남두를 범하였다.
경기·강원·황해·평안·함경 등 여러 도의 군사를 불러 서울로 들어와 돕게 하였다. 이조판서 이원익(李元翼)을 평안도 도순찰사로, 지사 최흥원(崔興源)을 황해도 도순찰사로 삼아 다 그날로 떠나보냈다. 장차 서쪽으로 거둥할 의논이 있었는데, 원익은 일찍이 안주목사였고 흥원은 황해감사였는데 다 은혜로운 정사가 있어 민심이 기뻐하던 바이므로 먼저 가서 군사와 백성을 어루만져 타일러 거둥에 대비하게 한 것이다.
협주 2
郡守卽李彥誠自賊中回而畏得罪自云逃來隱其書不傳故朝廷不知也
울산군수는 곧 이언성(李彥誠)인데 적 가운데서 돌아와 죄를 얻을까 두려워 스스로 도망쳐 왔다 하고 그 글을 숨겨 전하지 않았으므로 조정이 알지 못하였다.
德馨在道聞忠州已陷先使應舜往探應舜爲賊將淸正所殺德馨遂從中路還復命於平壤
덕형이 길에서 충주가 이미 함락되었음을 듣고 먼저 응순을 보내어 알아보게 하였는데 응순이 적장 청정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덕형은 드디어 가운뎃길로 돌아와 평양에서 복명하였다.
賊兵入忠州。申砬迎戰敗績而死。諸軍大潰。砬至忠州。忠淸道郡縣兵來會者八千餘人。砬欲保鳥嶺。聞鎰敗膽落。還忠州。且召李鎰邊璣等。俱到忠州。棄險不守。號令煩擾。見者知必敗。有所親軍官。密報賊已踰嶺。乃二十七日初昏也。砬忽跳出城。軍中擾擾。不知砬所在。夜深潜還客舍。明朝。謂軍官妄言。引出斬之。狀啓猶云。賊未離尙州。不知賊兵已在十里內也。因率軍出陣于彈琴臺前兩水間。其地左右多稻田。水草交雜。不便馳驅。少頃。賊從丹月驛。分路而至。勢如風雨。一路循山而東。一路沿江而下。炮響震地。塵埃接天。砬不知所爲。鞭馬欲親自突陣者再。不得入。還赴江沒于水中而死。諸軍悉赴江中。屍蔽江而下。金汝岉亦死亂兵中。李鎰從東邊山谷間脫走。初朝廷聞賊兵盛。憂李鎰獨力難支。以申砬一時名將。士卒畏服。使引重兵隨其後。欲兩將協勢。庶幾捍賊。計未失也。不幸本道水陸將皆恇㤼。其在海中也。左水使朴泓。一兵不出。右水使元均雖水路稍遠。所領舟艦旣多。且賊兵非一日俱至。可悉衆前進。耀兵相持。幸而一捷。則賊當有後顧慮。未必遽深入。而乃望風遠避。不一交兵。及賊登陸。左右兵使李珏曹大坤。或遁或遞。賊鳴皷橫行。蹈數百里無人之地。晝夜北上。無一處敢齟齬少緩其勢者。不十日。已至尙州。李鎰。客將無軍。猝與相角。勢固不敵。砬未至忠州。而鎰先敗。進退失據。事是以大謬。嗚呼痛哉。後聞賊入尙州。猶以過險爲憚。聞慶縣南十餘里。有古城。曰姑母。據左右道交會處。兩峽如束。中盤大川。路出其下。賊恐有守兵。使人再三覘覷。知無兵。乃歌舞而過云。其後天將李提督如松。追賊過鳥嶺。歎曰有險如此。而不知守。申總兵。可謂無謀矣。蓋砬雖輕銳得時名。籌略非其所長。古人云。將不知兵。以其國與敵。今雖悔之無及。猶可爲後日之戒。故備著云。
적병이 충주에 들어오니 신립이 맞아 싸우다가 크게 져서 죽고 여러 군사가 크게 무너졌다.
신립이 충주에 이르니 충청도 고을의 군사로 와서 모인 이가 팔천여 인이었다. 신립은 조령을 지키려 하다가 이일이 졌다는 말을 듣고 담이 떨어져 충주로 돌아왔다. 또 이일과 변기 등을 불러 다 충주에 이르게 하고는 험한 데를 버리고 지키지 않았으며 호령이 번거롭고 어지러우니 보는 이가 반드시 패할 줄 알았다.
가까이 지내던 군관이 적이 이미 조령을 넘었다고 몰래 알렸으니 곧 스무이렛날 초저녁이다. 신립이 홀연 성을 뛰쳐나가니 군중이 술렁이며 신립이 있는 데를 알지 못하였다. 밤이 깊어서야 가만히 객사로 돌아왔고, 이튿날 아침에 군관이 망령된 말을 하였다 하여 끌어내어 목을 베었다. 장계에는 오히려 적이 아직 상주를 떠나지 않았다고 하였으니, 적병이 이미 십 리 안에 있음을 알지 못한 것이다.
이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탄금대 앞 두 물 사이에 진을 쳤다. 그 땅은 좌우에 논이 많고 물과 풀이 섞여 말을 달리기에 편하지 않았다. 조금 있다가 적이 단월역에서 길을 나누어 이르니 형세가 비바람 같았다. 한 길은 산을 따라 동쪽으로 오고 한 길은 강을 따라 내려오는데, 총소리가 땅을 흔들고 먼지가 하늘에 닿았다. 신립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말에 채찍질하여 스스로 적진에 부딪치려 한 것이 두 번이었으나 들어가지 못하고, 돌이켜 강으로 달려가 물에 빠져 죽었다. 여러 군사가 다 강으로 뛰어들어 주검이 강을 덮고 떠내려갔다. 김여물도 어지러운 군사 가운데서 죽고, 이일은 동쪽 산골짜기 사이로 벗어나 달아났다.
처음에 조정은 적병이 성하다는 말을 듣고 이일이 홀로 버티기 어려울까 걱정하여, 신립이 한때의 이름난 장수로 군사들이 두려워 복종하므로 무거운 군사를 이끌고 그 뒤를 따르게 하여 두 장수가 힘을 아울러 적을 막기를 바랐으니 계책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불행히 본도의 물과 뭍의 장수가 다 겁이 많았다. 바다에 있어서는 좌수사 박홍이 한 명의 군사도 내지 않았고, 우수사 원균(元均)은 비록 물길이 조금 멀었으나 거느린 배가 이미 많았고 또 적병이 하루에 다 이른 것이 아니니, 무리를 다 이끌고 앞으로 나아가 군사를 드러내어 서로 버티다가 다행히 한 번 이겼더라면 적이 뒤를 돌아볼 걱정이 있어 반드시 갑자기 깊이 들어오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적의 기세만 보고도 멀리 피하여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
적이 뭍에 오르매 좌우 병사 이각과 조대곤이 혹 달아나고 혹 갈리니, 적이 북을 울리며 거리낌 없이 다녀 수백 리 사람 없는 땅을 밟고 밤낮으로 북으로 올라오는데 한 곳도 감히 어긋맞서 그 기세를 조금이라도 늦추는 데가 없었다. 열흘이 못 되어 이미 상주에 이르렀다. 이일은 손님 같은 장수로 군사 없이 갑자기 더불어 겨루었으니 형세가 참으로 대적할 수 없었고, 신립이 충주에 이르기 전에 이일이 먼저 졌으므로 나아가고 물러남에 의지할 데를 잃어 일이 이로써 크게 그르쳐졌다. 아아, 애통하다.
뒤에 들으니 적이 상주에 들어와서도 오히려 험한 데를 지나는 것을 꺼렸다 한다. 문경현 남쪽 십여 리에 옛 성이 있어 고모성(姑母城)이라 하는데, 좌도와 우도가 만나는 자리를 웅거하여 두 산골짜기가 묶은 듯하고 가운데 큰 내가 서려 길이 그 아래로 난다. 적이 지키는 군사가 있을까 두려워 사람을 시켜 두세 번 엿보게 하고, 군사가 없음을 안 뒤에야 노래하고 춤추며 지나갔다고 한다.
그 뒤에 명나라 장수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적을 쫓아 조령을 지나다가 탄식하였다.
「이 같은 험한 데가 있는데 지킬 줄 몰랐으니 신 총병은 꾀가 없었다 할 만하다.」
대개 신립은 비록 날래고 사나워 그때 이름을 얻었으나 헤아리는 계략은 그의 장기가 아니었다. 옛사람이 「장수가 군사를 알지 못하면 그 나라를 적에게 준다」 하였으니, 이제 뉘우친들 미칠 수 없으나 오히려 뒷날의 경계가 될 만하므로 갖추어 적는다.
四月三十日曉。車駕西巡。申砬旣去。都人日望捷報。前日夕。有氈笠三人。走馬入崇仁門。城內人。爭問軍前消息。答曰。我乃巡邊使軍官奴僕。昨日巡邊使敗死於忠州。諸軍大潰。俺等脫身獨來。欲歸報家人避兵耳。聞者大驚。所過傳相告語。不移時。滿城俱震。初昏。召宰執議出避。上御東厢地坐張燈燭。宗室河源君河陵君等侍坐。大臣啓。事勢至此。車駕暫出幸平壤。請兵天朝。以圖收復。掌令權悏請對。造膝大聲呼。請固守京城。語囂甚。余謂曰。雖危亂之際。君臣之禮。不可如是。可少退以啓。悏連呼曰。左相亦爲此言耶。然則京城可棄乎。余啓曰。權悏言甚忠。但事勢不得不然。因請分遣王子諸道。使呼召勤王。世子隨駕定議。大臣出在閤門外得旨。臨海君可往咸鏡道。領府事金貴榮。㓒溪君尹卓然從。順和君可往江原道。長溪君黃廷彧護軍黃赫。同知李墍從。盖赫女爲順和夫人。而李墍爲原州人。故幷遣之。時右相爲留將。領相幷宰臣數十人。以扈從點出。余無所命。政院啓扈從。不可無柳某。於是令扈行。內醫趙英璇。政院吏申德麟十餘人。大呼言。京都不可棄。俄而李鎰狀啓至。而宮中衛士盡散。更漏不鳴。得火炬於宣傳官廳。發狀啓讀之。內云。賊今明日當入都城。狀入良久。駕出。三廳禁軍奔竄。昏黑中互相扺觸。適羽林衛池貴壽過前。余認之。責令扈從。貴壽曰。敢不盡力。幷呼其類二人而至。過景福宮前。市街兩邊。哭聲相聞。承文院書員李守謙。執余馬鞚問曰。院中文書當如何。余令收拾其緊關者追來。守謙哭而去。出敦義門到沙峴。東方向明。回視城中。南大門內大倉火起。烟焰已騰空矣。踰沙峴至石橋。雨作。京畿監司權徵。追至扈從。至碧蹄驛。雨甚。一行皆沾濕。上入驛少頃卽出。衆官自此多還入都城者。侍從臺諫。往往多落後不至。過惠陰嶺。雨如注。宮人騎弱馬。以物蒙面號哭而行。過馬山驛。有人在田間。望之痛哭曰。國家棄我去。我輩何恃而生也。至臨津雨不止。上御舟中。召首相及臣入對。旣渡。已向昏不能辨色。臨津南麓。舊有丞廳。恐賊取材作筏橋以濟。命焚之。火光照江北。得尋路而行。初更到東坡驛。坡州牧使許晋。長湍府使具孝淵。以支待差使員在其處。略設御厨。扈衛人。終日飢來。亂入厨中。搶奪以食。將闕上供。晉孝淵。懼而逃。五月初一日朝。引見大臣。問南方巡察使有能勤王者否。日晚。乘輿欲發向開城。而京畿吏卒逃散。無扈衛人。適黃海監司趙仁得。率本道兵將入援。瑞興府使南嶷。先到。有軍數百人。馬五六十匹。以此始發。臨行。司鑰崔彥俊出曰。宮中人昨日不食。今又未食。得少米𩟔飢可行。索南嶷軍人所持糧。雜大少米二三斗以入。午至招賢站。趙仁得來朝。設帳幕於路中以迎之百官始得食。夕次于開城府。御南門外公署。臺諫交章劾首相交結誤國等罪。不允。二日。臺諫仍啓首相罷。余陞爲之。崔興源爲左相。尹斗壽爲右相。咸鏡北道兵使申硈遞來。是日午。上御南城門樓。慰諭人民。有旨令各陳所懷。有一人出行俯伏。問何言。對曰。願召鄭政承。蓋鄭澈時竄在江界故云然。上曰知道。卽命召澈赴行在。夕還宮。余以罪罷。俞泓爲右相。崔興源尹斗壽以次而陞。聞賊尙未至京城。衆議皆咎去邠之失。使承旨申磼。還入京城。察形勢。初三日。賊入京城。留都將李陽元。元帥金命元皆走。初賊自東萊分三路以進。一路由梁山密陽淸道大丘仁同善山。至尙州敗李鎰軍。一路由左道長鬐機張。陷左兵營蔚山慶州永川新寧義興軍威比安。渡龍宮河豐津。出聞慶。與中路兵合。踰鳥嶺入忠州。又自忠州。分兩路。一趨驪州渡江。由楊根渡龍津。出於京城東。一趨竹山龍仁。至漢江之南。又一路由金海從星州茂溪縣渡江。歷知禮金山。出忠淸道永同。進陷淸州向京畿。旌旗劒㦸。千里相連。炮聲相聞。所過或十里或五六十里。皆據險設營栅。留兵以守。夜則擧火相應。都元帥金命元。在濟川亭。望見賊至。不敢戰。悉沉軍器火炮器械于江中。變服以逃。從事官沈友正。固止不從。李陽元在城中。聞漢江軍已散。知城不可守。亦出走楊州。江原道助防將元豪初率兵數百。守驪州北岸與賊相持。賊不能渡者數日。旣而江原道巡察使柳永吉。檄召元豪歸本道。賊毀閭里民家及官舍。取屋材聯爲長筏以渡。中流爲水所漂。死者甚多。而豪旣去。江上無一守者。故累日畢渡。於是賊三路兵皆入京城。城中之民。先已散去。無一人矣。金命元旣失漢江。欲向行在。至臨津狀啓言狀。命更徵京畿黃海兵守臨津。且命申硈同守。以遏賊西下之路。是日車駕發開城。次于金郊驛。余雖罷散。不敢後。從行四日。車駕過興義金巖平山府。次于寶山驛。初出開城時。倉卒留宗廟神主于穆淸殿。有宗室一人。號泣啓不當委神主於賊所。於是達夜馳至開城奉還云。五日車駕過安城龍泉劒水驛。次于鳳山郡。六日。進次黃州。七日過中和入平壤。
사월 그믐날 새벽에 임금의 수레가 서쪽으로 거둥하였다.
신립이 떠난 뒤로 도성 사람들은 날마다 이겼다는 기별을 바랐다. 전날 저녁에 전립 쓴 세 사람이 말을 달려 숭인문으로 들어오니 성안 사람들이 다투어 싸움터 소식을 물었다. 대답하였다.
「우리는 순변사 군관의 종이다. 어제 순변사가 충주에서 져서 죽고 여러 군사가 크게 무너졌다. 우리는 몸을 빼어 홀로 왔으니 집사람에게 알려 군사를 피하게 하려는 것뿐이다.」
듣는 이들이 크게 놀라 지나는 데마다 서로 전하여 말하니 얼마 되지 않아 온 성안이 다 떨었다.
초저녁에 재상들을 불러 피하여 나갈 일을 의논하였다. 임금이 동쪽 행랑에 나와 땅에 앉으시고 등촉을 밝혔으며 종실인 하원군과 하릉군 등이 모시고 앉았다. 대신이 아뢰었다.
「일의 형세가 이에 이르렀으니 수레를 잠시 평양으로 옮기시고 천조에 군사를 청하여 되찾기를 꾀하소서.」
장령 권협(權悏)이 뵙기를 청하여 무릎 앞까지 나아와 큰 소리로 서울을 굳게 지키기를 청하는데 말이 몹시 시끄러웠다. 내가 일렀다.
「비록 위태롭고 어지러운 때라도 임금과 신하의 예가 이와 같아서는 안 되니 조금 물러나 아뢰라.」
권협이 잇달아 부르짖었다.
「좌상도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러면 서울을 버려도 좋다는 말입니까.」
내가 아뢰었다.
「권협의 말은 몹시 충성스럽습니다. 다만 일의 형세가 그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어 왕자를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어 근왕하는 군사를 불러 모으게 하고 세자는 수레를 따르게 하기를 청하여 의논이 정해졌다. 대신이 나와 합문 밖에서 분부를 받으니, 임해군은 함경도로 가되 영부사 김귀영과 칠계군 윤탁연(尹卓然)이 따르고, 순화군은 강원도로 가되 장계군 황정욱(黃廷彧)과 호군 황혁(黃赫)과 동지 이기(李墍)가 따르게 되었다. 대개 황혁의 딸이 순화군의 부인이 되고 이기는 원주 사람이었으므로 아울러 보낸 것이다.
그때 우의정은 도성에 머무는 장수가 되고 영의정과 재신 수십 인이 호종으로 뽑혔는데 나에게는 아무 명이 없었다. 승정원이 「호종에 유 아무개가 없을 수 없습니다」 하고 아뢰니 이에 따라가게 하였다. 내의원 의원 조영선(趙英璇)과 승정원 아전 신덕린(申德麟) 등 십여 인이 큰 소리로 「서울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이윽고 이일의 장계가 이르렀는데 궁중의 위사가 다 흩어지고 물시계도 울리지 않았다. 선전관청에서 횃불을 얻어 장계를 펴 읽으니 그 안에 「적이 오늘 내일 사이에 도성에 들어올 것입니다」 하였다.
장계가 들어간 지 한참 만에 수레가 나갔다. 삼청의 금군이 달아나 숨어 어두운 가운데 서로 부딪쳤다. 마침 우림위 지귀수(池貴壽)가 앞을 지나기에 내가 알아보고 꾸짖어 호종하게 하니 귀수가 「어찌 감히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제 무리 둘을 불러 함께 왔다. 경복궁 앞을 지나는데 저잣거리 양쪽에서 곡하는 소리가 들렸다. 승문원 서원 이수겸(李守謙)이 내 말고삐를 잡고 물었다.
「승문원 안의 문서는 어찌하리이까.」
내가 그 긴한 것을 거두어 뒤따라오라 하니 수겸이 울며 갔다.
돈의문을 나와 사현에 이르니 동쪽 하늘이 밝아 왔다. 성안을 돌아보니 남대문 안 큰 창고에서 불이 일어나 연기와 불길이 이미 하늘에 솟았다. 사현을 넘어 석교에 이르자 비가 내렸다. 경기감사 권징(權徵)이 뒤따라 와서 호종하였다. 벽제역에 이르니 비가 심하여 일행이 다 젖었다. 임금이 역에 드셨다가 조금 있다 곧 나오셨다. 여러 관원 가운데 이로부터 도성으로 돌아 들어간 이가 많았고 시종과 대간도 이따금 뒤처져 이르지 않았다. 혜음령을 지나매 비가 퍼붓듯 하였다. 궁인들은 약한 말을 타고 물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부르짖어 울며 갔다. 마산역을 지나는데 밭 사이에 있던 사람이 바라보고 통곡하였다.
「나라가 우리를 버리고 가니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살겠는가.」
임진에 이르러도 비가 그치지 않았다. 임금이 배 안에 계시면서 수상과 신을 불러 뵙게 하셨다. 건너고 나니 이미 저물어 빛을 분별할 수 없었다. 임진 남쪽 기슭에 예부터 승청(丞廳)이 있었는데, 적이 그 재목을 가져다 뗏목 다리를 만들어 건널까 두려워 불사르라 명하시니 불빛이 강 북쪽을 비추어 길을 찾아 갈 수 있었다.
초경에 동파역에 이르렀다. 파주목사 허진(許晉)과 장단부사 구효연(具孝淵)이 임금 행차를 받드는 차사원(支待差使員)으로 그곳에 있어 임금의 수라를 대략 차렸는데, 호위하던 사람들이 종일 굶주려 온 터라 부엌에 난입하여 빼앗아 먹었다. 위에 올릴 것이 모자랄까 하여 허진과 구효연이 두려워 달아났다.
오월 초하루 아침에 대신을 인견하고 남방의 순찰사 가운데 능히 근왕할 이가 있는지 물으셨다. 날이 늦어 수레가 개성으로 향하려 하는데 경기의 아전과 군졸이 달아나 흩어져 호위할 사람이 없었다. 마침 황해감사 조인득(趙仁得)이 본도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 도우러 오는데 서흥부사 남의(南嶷)가 먼저 이르러 군사 수백과 말 오륙십 필이 있었으므로 이로써 비로소 떠날 수 있었다. 떠나려 할 때 대궐 문 열쇠를 맡은 사약(司鑰) 최언준(崔彥俊)이 나와 말하였다.
「궁중 사람들이 어제도 먹지 못하였고 오늘 또 먹지 못하였습니다. 쌀을 조금 얻어 주림을 요기하여야 갈 수 있습니다.」
남의의 군사가 지닌 양식을 찾아 굵은 쌀과 잔 쌀 두세 말을 섞어 들였다.
낮에 초현참에 이르니 조인득이 와서 뵈었다. 길 가운데 장막을 치고 맞이하니 백관이 비로소 밥을 먹었다. 저녁에 개성부에 묵으며 남문 밖 공서에 드셨다. 대간이 번갈아 글을 올려 수상이 사귀어 맺어 나라를 그르친 죄 따위를 탄핵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으셨다.
이튿날 대간이 거듭 아뢰어 수상이 파직되고 내가 올라 그 자리에 앉았으며 최흥원이 좌의정, 윤두수(尹斗壽)가 우의정이 되고 함경북도 병사 신할(申硈)이 갈려 왔다.
이날 낮에 임금이 남쪽 성문 다락에 나와 인민을 위로하시고 저마다 품은 바를 아뢰라 하셨다. 한 사람이 나와 엎드리기에 무슨 말이냐 물으니 대답하였다.
「원컨대 정 정승을 부르소서.」
대개 정철(鄭澈)이 그때 강계에 귀양 가 있었으므로 그리 말한 것이다. 임금이 「알겠다」 하시고 곧 정철을 불러 행재소로 오게 하셨다. 저녁에 궁으로 돌아오셨다. 나는 죄로 파직되고 유홍(俞泓)이 우의정이 되었으며 최흥원과 윤두수가 차례로 올랐다.
적이 아직 서울에 이르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뭇 의논이 다 도성을 떠난 것이 잘못이라 허물하므로, 승지 신잡(申磼)을 서울로 돌려보내어 형세를 살피게 하였다.
초사흗날 적이 서울에 들어오니 도성에 머물던 장수 이양원과 원수 김명원이 다 달아났다.
처음에 적이 동래에서 세 길로 나뉘어 나아갔다. 한 길은 양산·밀양·청도·대구·인동·선산을 거쳐 상주에 이르러 이일의 군사를 깨뜨렸고, 한 길은 좌도의 장기·기장을 거쳐 좌병영과 울산·경주·영천·신녕·의흥·군위·비안을 함락하고 용궁 하풍진을 건너 문경으로 나와 가운뎃길 군사와 합하여 조령을 넘어 충주에 들어왔다. 또 충주에서 두 길로 나뉘어 하나는 여주로 달려 강을 건너 양근을 거쳐 용진을 건너 서울 동쪽으로 나오고, 하나는 죽산·용인으로 달려 한강 남쪽에 이르렀다. 또 한 길은 김해에서 성주 무계현을 거쳐 강을 건너 지례·금산을 지나 충청도 영동으로 나와 청주를 쳐서 함락하고 경기로 향하였다. 깃발과 칼과 창이 천 리에 이어지고 총소리가 서로 들렸으며, 지나는 데마다 혹 십 리 혹 오륙십 리에 다 험한 데를 웅거하여 진영과 목책을 세우고 군사를 남겨 지키게 하며 밤에는 불을 들어 서로 응하였다.
도원수 김명원은 제천정에 있다가 적이 이르는 것을 바라보고 감히 싸우지 못한 채 무기와 화포와 기계를 다 강에 가라앉히고 옷을 바꾸어 입고 달아났다. 종사관 심우정(沈友正)이 굳이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이양원은 성안에 있다가 한강의 군사가 이미 흩어졌다는 말을 듣고 성을 지킬 수 없음을 알고 또한 양주로 달아났다.
강원도 조방장 원호(元豪)가 처음에 군사 수백을 거느리고 여주 북쪽 기슭을 지켜 적과 버티니 적이 며칠을 건너지 못하였다. 이윽고 강원도순찰사 유영길(柳永吉)이 격문으로 원호를 불러 본도로 돌아가게 하였다. 적이 마을과 민가와 관사를 헐어 그 재목을 가져다 잇대어 긴 뗏목을 만들어 건너는데 물 가운데서 떠내려가 죽은 이가 몹시 많았다. 그러나 원호가 이미 가서 강가에 지키는 이가 하나도 없었으므로 여러 날에 걸쳐 다 건넜다. 이에 적의 세 길 군사가 다 서울에 들어왔는데 성안 백성은 먼저 이미 흩어져 한 사람도 없었다.
김명원은 한강을 잃은 뒤 행재소로 가려다가 임진에 이르러 장계로 사정을 아뢰니, 경기와 황해의 군사를 다시 징발하여 임진을 지키게 하고 또 신할에게 함께 지켜 적이 서쪽으로 내려오는 길을 막으라 명하셨다.
이날 수레가 개성을 떠나 금교역에 묵었다. 나는 비록 파직되었으나 감히 뒤처지지 못하고 따라갔다.
초나흗날 수레가 흥의·금암·평산부를 지나 보산역에 묵었다. 처음 개성을 나올 때 창졸간에 종묘의 신주를 목청전에 두고 왔는데, 종실 한 사람이 부르짖어 울며 신주를 적이 있는 곳에 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고 아뢰니, 이에 밤새 달려 개성에 이르러 받들어 돌아왔다고 한다.
초닷샛날 수레가 안성·용천·검수역을 지나 봉산군에 묵고, 엿샛날 황주에 나아가 묵고, 이렛날 중화를 지나 평양에 들어갔다.
三道巡察使之軍。潰於龍仁。初全羅道巡察使李洸。率本道兵入援。聞車駕西狩。京城已陷。收兵還全州。道內人。咎洸不戰而回。多憤惋不平者。洸不自安。更調兵。與忠淸道巡察使尹國馨。合軍而進。慶尙巡察使金晬。亦自其道。率軍官數十餘人來會。兵總五萬餘。至龍仁。望見北斗門山上有賊小壘。洸易之。先使勇士白光彥李時禮等甞賊。光彥等。率先鋒登山。去賊壘十餘步。下馬發射。賊不出。日晚。賊見光彦等稍解。發白刃大呼突出。光彦等。倉皇索馬。欲走不及。皆爲賊所害。諸軍聞之震懼。時三巡察。皆文人。不閑兵務。軍數雖多。而號令不一且不據險備。眞古人所謂。軍行如春遊。安得不敗者也。明日。賊知我軍心怯。數人揮刃賈勇而前。三道軍望之大潰。聲如崩山。委棄軍資器械。無數塞路。人不能行。賊悉聚而焚之。洸還全羅。國馨還公州。晬還慶尙右道。
세 도 순찰사의 군사가 용인에서 무너졌다.
처음에 전라도순찰사 이광이 본도 군사를 거느리고 도우러 들어오다가, 임금의 수레가 서쪽으로 가고 서울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거두어 전주로 돌아갔다. 도내 사람들이 이광이 싸우지도 않고 돌아온 것을 허물하여 분하고 서운해하는 이가 많으니 이광이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여 다시 군사를 조발하였다. 충청도순찰사 윤국형(尹國馨)과 군사를 합하여 나아가고, 경상순찰사 김수도 제 도에서 군관 수십여 인을 거느리고 와서 모이니 군사가 모두 오만여였다.
용인에 이르러 북두문산 위에 적의 작은 보루가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광이 가볍게 여겨 먼저 용사 백광언(白光彥)과 이시례(李時禮) 등을 시켜 적을 떠보게 하였다. 광언 등이 선봉을 이끌고 산에 올라 적의 보루에서 십여 걸음 되는 데서 말에서 내려 활을 쏘았으나 적이 나오지 않았다. 날이 저물어 적이 광언 등의 마음이 조금 풀린 것을 보고 흰 칼날을 뽑아 크게 외치며 돌진하니, 광언 등이 허둥지둥 말을 찾아 달아나려 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여 다 적에게 죽었다. 여러 군사가 이를 듣고 놀라 두려워하였다.
그때 세 순찰사가 다 글하는 사람이라 군사 일에 익숙하지 못하여, 군사 수는 비록 많으나 호령이 하나로 되지 않고 또 험한 데를 웅거하여 대비하지도 않았으니, 참으로 옛사람이 이른바 「군사 가는 것이 봄놀이 같다」는 것이라 어찌 패하지 않겠는가.
이튿날 적이 우리 군사의 마음이 겁먹은 줄 알고 몇 사람이 칼을 휘두르며 용맹을 팔아 앞으로 나오니, 세 도의 군사가 이를 바라보고 크게 무너지는데 소리가 산이 무너지는 듯하였다. 버리고 간 군수품과 병기(器械)가 수없이 길을 막아 사람이 다닐 수 없었다. 적이 다 모아 불살랐다. 이광은 전라도로, 국형은 공주로, 김수는 경상우도로 돌아갔다.
협주 1
충청도순찰사 윤국형은 앞에 나온 충청감사 윤선각과 한 사람이다. 뒤에 이름을 고쳤다. ― 옮긴이
副元帥申恪。與賊戰于楊州敗之。斬首六十餘級。遣宣傳官。卽軍中斬之。恪初從金命元爲副。漢江之潰。恪不從命元。隨李陽元于楊州。時咸鏡南道兵使李渾兵適至。恪合兵遇賊自京城出散掠閭閻。邀擊破之。自倭入我國。始有此捷。人皆踊躍。金命元在臨津。狀啓恪擅自他適。不從號令。右相俞泓。遽請誅之。宣傳官旣行。而捷報至。朝廷使人追止不及。恪雖武人。而素淸慎。甞爲延安府使。修城浚壕。多備軍器。後李廷馣守延安全城。人以爲恪之功。死非其罪。且有九十歲老母。聞者莫不痛之。遣知事韓應寅。帥平安道江邊精兵三千人。赴臨津擊賊。令勿受金命元節制。時應寅赴京新回。尹左相言於衆曰。斯人狀貌有福氣。必能辦事。遂行。
부원수 신각(申恪)이 양주에서 적과 싸워 이겨 목 벤 것이 육십여 급이었는데, 선전관을 보내어 곧 군중에서 목을 베었다.
신각은 처음에 김명원을 따라 부원수가 되었는데, 한강이 무너질 때 명원을 따르지 않고 이양원을 따라 양주로 갔다. 그때 함경남도 병사 이혼(李渾)의 군사가 마침 이르매 신각이 군사를 합하여, 서울에서 나와 여염을 흩어 노략질하던 적을 만나 맞받아 쳐 깨뜨렸다. 왜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뒤로 처음 있는 승첩이라 사람들이 다 뛰며 기뻐하였다.
김명원이 임진에 있으면서 「신각이 제멋대로 다른 데로 가서 호령을 따르지 않았다」고 장계하니 우의정 유홍이 대뜸 죽이기를 청하였다. 선전관이 이미 떠난 뒤에 이겼다는 보고가 이르매 조정이 사람을 보내어 뒤쫓아 그치게 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신각은 비록 무인이나 본디 맑고 삼갔다. 일찍이 연안부사가 되어 성을 손질하고 해자를 파고 군기를 많이 갖추었으므로, 뒤에 이정암(李廷馣)이 연안을 지켜 성을 온전히 한 것을 사람들이 신각의 공이라 하였다. 죽음이 그 죄가 아니었고 또 아흔 살 된 늙은 어미가 있었으므로 듣는 이가 아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지사 한응인(韓應寅)을 보내어 평안도 강변의 정병 삼천 인을 거느리고 임진으로 가서 적을 치게 하되 김명원의 절제를 받지 말라 명하였다. 그때 응인이 서울에 갔다가 막 돌아왔는데, 윤 좌상이 여럿에게 「이 사람은 생김새에 복된 기운이 있으니 반드시 일을 해낼 것이다」 하였으므로 드디어 보낸 것이다.
韓應寅金命元之師潰于臨津。賊渡江。初命元在臨津北。分付諸軍。列守江灘。歛江中船隻。悉在北岸。賊結陣于臨津南。無船可渡。但出遊兵。隔江交戰。相持十餘日。賊終不能渡。一日賊焚江上廬幕。撤帷帳載軍器。爲退遁狀。以誘我軍。申硈素輕銳無謀。以爲賊實遁。欲渡江追躡。京畿監司權徵。與硈合。命元不能禁。是日應寅亦至。將悉衆追賊。應寅所將。皆江邊健兒。與北虜近。備諳戰陣形勢。吿應寅曰。軍士遠來罷弊。尙未食。器械未整。後軍亦未齊到。且賊之情僞。未可知。願少休。明日觀勢進戰。應寅以爲逗遛。斬數人。命元以應寅。新自朝廷來。且令勿受己節制。故雖知不可。而不敢言。別將劉克良。年老習兵。力言不宜輕進。申硈欲斬之。克良曰。吾結髮從軍。豈以避死爲心。所以云云者。恐誤國事耳。憤憤而出。率其屬先渡。我軍旣入險地。賊果伏精兵於山後。一時俱起。諸軍奔潰。克良下馬坐地曰。此吾死所也。彎弓射賊數人。爲賊所害。申硈亦死。軍士奔至江岸不得渡。從巖石上自投入江。如風中亂葉。其未及投江者。賊從後奮長刀斫之。皆匍匐受刃。無敢拒者。命元應寅。在江北望之喪氣。商山君朴忠侃。適在軍中。騎馬先走。衆望之以爲命元。皆呼曰元帥去矣。諸守灘軍。應聲皆散。命元應寅。還行在。朝廷不問。京畿監司權徵。入加平郡避亂。賊遂乘勝西下。不可復止矣。
한응인과 김명원의 군사가 임진에서 무너지고 적이 강을 건넜다.
처음에 김명원이 임진 북쪽에 있으면서 여러 군사에게 나누어 맡겨 강여울을 벌여 지키게 하고, 강 가운데 배를 거두어 다 북쪽 기슭에 두었다. 적이 임진 남쪽에 진을 쳤으나 건널 배가 없어 다만 유격하는 군사를 내어 강을 사이에 두고 싸울 뿐, 서로 버틴 지 십여 일에 적이 끝내 건너지 못하였다.
하루는 적이 강가의 여막을 불사르고 장막을 걷고 군기를 실어 물러가 달아나는 모양을 지어 우리 군사를 꾀었다. 신할은 본디 날래되 꾀가 없어 적이 참으로 달아나는 줄 알고 강을 건너 뒤쫓고자 하였다. 경기감사 권징이 신할과 뜻을 같이하니 명원이 막지 못하였다. 이날 응인도 이르러 장차 군사를 다 이끌고 적을 쫓으려 하였다.
응인이 거느린 이들은 다 강변의 씩씩한 군사로 북쪽 오랑캐와 가까워 싸움의 형세를 갖추 아는 이들이었다. 응인에게 고하였다.
「군사가 멀리 와서 지치고 아직 먹지도 못하였으며 병기도 정돈되지 않았고 뒤의 군사도 다 이르지 않았습니다. 또 적의 참과 거짓을 알 수 없으니 원컨대 조금 쉬었다가 내일 형세를 보아 나아가 싸우소서.」
응인은 머뭇거린다 하여 몇 사람을 목 베었다. 명원은 응인이 새로 조정에서 내려왔고 또 제 절제를 받지 말라는 명이 있었으므로, 비록 옳지 않은 줄 알면서도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별장 유극량은 나이 많고 군사에 익어 가볍게 나아가서는 안 된다고 힘써 말하니 신할이 그를 목 베려 하였다. 극량이 말하였다.
「내가 머리를 묶은 뒤로 군사를 따랐는데 어찌 죽음을 피할 마음을 먹겠는가.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까닭은 나랏일을 그르칠까 두려워서일 뿐이다.」
분해하며 나가 제 무리를 거느리고 먼저 건넜다. 우리 군사가 이미 험한 땅에 들어가니 적이 과연 산 뒤에 정병을 숨겨 두었다가 한꺼번에 일어나므로 여러 군사가 달아나 무너졌다. 극량이 말에서 내려 땅에 앉아 말하였다.
「여기가 내가 죽을 자리다.」
활을 당겨 적 몇을 쏘고 적에게 죽었다. 신할도 죽었다.
군사들이 달아나 강 언덕에 이르렀으나 건너지 못하여 바위 위에서 스스로 강에 몸을 던지니 바람에 날리는 어지러운 잎 같았고, 미처 강에 뛰어들지 못한 이들은 적이 뒤에서 긴 칼을 휘둘러 베니 다 엎드려 칼을 받을 뿐 감히 막는 이가 없었다. 명원과 응인은 강 북쪽에서 이를 바라보고 기운을 잃었다.
상산군 박충간이 마침 군중에 있다가 말을 타고 먼저 달아나니 여럿이 바라보고 명원인 줄 알고 다 「원수가 갔다」고 외쳤다. 여울을 지키던 군사들이 그 소리에 응하여 다 흩어졌다. 명원과 응인은 행재소로 돌아갔으나 조정이 묻지 않았다. 경기감사 권징은 가평군으로 들어가 난을 피하였다. 적이 드디어 이긴 기세를 타고 서쪽으로 내려오니 다시 막을 수 없게 되었다.
賊兵入咸鏡道。兩王子陷賊中。從臣金貴榮黃廷彧黃赫。及本道監司柳永立。北兵使韓克諴等。皆被執。南兵使李渾。走至甲山。爲我民所害。南北道郡縣皆沒于賊。有倭學通事咸廷虎者。在京城。爲賊將淸正所得。因隨淸正入北道賊退後逃還京城。見余言北道事頗詳。淸正在賊將中。尤勇悍善鬪。與平行長同渡臨津。至黃海道安城驛。謀分搶兩界。各議所向未决。二賊拈鬮。行長得平安道。淸正得咸鏡道。於是淸正擒安城居民二人。使向導。二人辭以生長此地不諳北路。淸正卽斬之。一人懼請先導。從谷山地踰老里峴。出於鐵嶺北。日行數百里。勢如風雨。北道兵使韓克諴。率六鎭兵。相遇於海汀倉。北兵善騎射。地又平衍。乃左右迭出。且馳且射。賊不能支。退入倉中。時日已暮。軍士欲少休俟賊出。明日復戰。克諴不聽。揮其軍圍之。賊出倉中糓石。列置爲城。以避矢石。從其內多發鳥銃。我軍櫛比而立。重疊如束。中必貫穿。或一丸斃三四人。軍遂潰。克諴收兵退屯嶺上。欲天明更戰。夜賊潜行。環我軍散伏于草間。朝大霧。我軍猶意賊在山下。忽一聲炮響。從四面大呼突起。皆賊兵也。軍遂驚潰。將士向無賊處奔走。悉陷泥澤中。賊追至芟刈。死者無數。克諴遁入鏡城。遂被擒。兩王子臨海君順和君。俱至會寧府。蓋順和君。初在江原道。賊兵入江原道。故轉向北道。是時賊窮追王子。會寧吏鞠景仁。率其類叛。先縛王子及從臣以迎賊。賊將淸正。解其縛留置軍中。還屯咸興。獨漆溪君尹卓然。路中稱病從他路。深入別害堡。同知李墍。不從王子。留江原道。皆免執。柳永立拘賊中數日。賊以爲文官。防禁少懈。永立乘間脫走。還行在。
적병이 함경도에 들어가 두 왕자가 적 가운데 떨어지고, 따라간 신하 김귀영·황정욱·황혁과 본도 감사 유영립(柳永立), 북병사 한극함(韓克諴) 등이 다 사로잡혔다. 남병사 이혼은 갑산으로 달아났다가 우리 백성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남도와 북도의 고을이 다 적에게 떨어졌다.
왜학 통사 함정호(咸廷虎)라는 이가 서울에 있다가 적장 청정(淸正)에게 붙잡혀 청정을 따라 북도에 들어갔다가 적이 물러간 뒤 서울로 도망해 돌아왔는데, 나를 보고 북도 일을 자못 자세히 말하였다.
청정은 적장 가운데 더욱 날래고 사나워 잘 싸웠다. 평행장과 함께 임진을 건너 황해도 안성역에 이르러 두 도를 나누어 치기를 꾀하였는데, 저마다 향할 곳을 의논하여 정하지 못하자 두 적이 제비를 뽑아 행장은 평안도를 얻고 청정은 함경도를 얻었다. 이에 청정이 안성에 사는 백성 둘을 붙잡아 길을 인도하게 하니,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나고 자라 북쪽 길을 알지 못한다고 사양하였다. 청정이 곧 하나를 목 베니 남은 하나가 두려워하여 앞서 인도하기를 청하였다. 곡산 땅에서 노리현을 넘어 철령 북쪽으로 나오는데 하루에 수백 리를 가니 형세가 비바람 같았다.
북도 병사 한극함이 육진의 군사를 거느리고 해정창에서 마주쳤다. 북도 군사는 말 타고 활 쏘기를 잘하고 땅 또한 평평하고 넓어, 좌우로 번갈아 나와 달리며 쏘니 적이 버티지 못하고 물러나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날이 이미 저물어 군사들이 조금 쉬고 적이 나오기를 기다려 이튿날 다시 싸우고자 하였으나, 극함이 듣지 않고 그 군사를 휘몰아 에워쌌다. 적이 창고 안의 곡식 섬을 내어 벌여 놓아 성을 삼고 화살과 돌을 피하면서 그 안에서 조총을 많이 쏘았다. 우리 군사는 빗살처럼 늘어서고 겹겹이 묶은 듯하였으므로 맞으면 반드시 꿰뚫렸고 혹 한 알에 서넛이 죽었다. 군사가 드디어 무너졌다.
극함이 군사를 거두어 고개 위로 물러나 진을 치고 날이 밝으면 다시 싸우려 하였는데, 밤에 적이 가만히 다녀 우리 군사를 둘러 풀 사이에 흩어져 엎드렸다. 아침에 안개가 크게 끼어 우리 군사는 오히려 적이 산 아래 있으려니 하였는데, 홀연 한 소리 총성이 나며 사면에서 크게 외치고 솟아나니 다 적병이었다. 군사가 드디어 놀라 무너져 장수와 군사가 적 없는 데를 향하여 달아나다가 다 진펄에 빠졌다. 적이 쫓아와 풀 베듯 하니 죽은 이가 수없었다. 극함은 경성으로 달아났다가 마침내 사로잡혔다.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이 다 회령부에 이르렀다. 대개 순화군은 처음에 강원도에 있었는데 적병이 강원도에 들어왔으므로 북도로 옮겨 간 것이다. 이때 적이 왕자를 끝까지 쫓으니 회령의 아전 국경인(鞠景仁)이 제 무리를 거느리고 배반하여 먼저 왕자와 따라간 신하를 결박하고 적을 맞았다. 적장 청정이 그 결박을 풀어 군중에 머물러 두고 함흥으로 돌아와 진을 쳤다.
홀로 칠계군 윤탁연은 길에서 병을 핑계하고 다른 길을 따라 별해보로 깊이 들어갔고, 동지 이기는 왕자를 따르지 않고 강원도에 머물러 다 사로잡힘을 면하였다. 유영립은 적 가운데 며칠 갇혀 있었는데 적이 글하는 관원이라 하여 막고 지키는 것이 조금 느슨하므로 영립이 틈을 타 벗어나 달아나 행재소로 돌아왔다.
李鎰至平壤。鎰旣敗于忠州。渡江入江原道界。輾轉至行在。時諸將自京城南下。或走或死。無一人扈駕者。聞賊將至。人心益懼。鎰於武將中。素有重名。雖奔敗之餘。而人聞其來。無不喜悅。鎰旣屢敗。竄荆棘中。戴平凉子穿白布衫草屨而至。形容憔悴。觀者歎息。余語之曰。此處人。將倚君爲重。而槁枯如此。何以慰衆。索行槖得藍色紗帖裏與之。於是諸宰。或與騣笠。或與銀頂子彩纓。當面改換。服飾一新。獨無有脫靴與之者。猶著草屨。余笑曰。錦衣草屨不相稱矣。左右皆笑。俄而碧潼土兵任旭景。探報賊已至鳳山。余謂尹相曰。賊之斥候。應已至江外。此間詠歸樓下江水。岐而爲二。水淺可涉。萬一賊得我民嚮導。而暗渡猝至。則城危矣。何不急遣鎰往把淺灘。以防不測乎。尹公曰然。卽遣鎰。時鎰所率江原道軍。僅數十餘人。益以他軍。鎰坐含毬門點兵。不卽行。余念事急。遣人視之。猶在門上。余連語尹公使催之。鎰始去。旣出城。無指路者。誤向江西路。遇平壤座首金乃胤自外來。問之使前。引馳至萬頃臺下。距城纔十餘里。望見江南岸。賊兵來聚者。已數百。江中小島居民。驚呼奔散。鎰急令武士十餘人。入島中射之。軍士畏不卽進。鎰拔劒欲斬之。然後乃進。賊已在水中多近岸。我軍急以强弓射之。連斃六七。而賊遂退。鎰仍留守渡口。
이일이 평양에 이르렀다.
이일은 충주에서 진 뒤에 강을 건너 강원도 지경으로 들어갔다가 이리저리 옮겨 다닌 끝에 행재소에 이르렀다. 그때 여러 장수가 서울에서 남쪽으로 내려가 혹 달아나고 혹 죽어 한 사람도 수레를 호위하는 이가 없었는데, 적이 장차 이른다는 말을 들어 인심이 더욱 두려워하였다. 이일은 무장 가운데 본디 무거운 이름이 있었으므로, 비록 패하여 달아난 나머지라도 사람들이 그가 온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일은 여러 번 지고 가시덤불 속에 숨어 지낸 터라 평량자를 쓰고 흰 베적삼을 입고 짚신을 신은 채 이르렀는데 모습이 초췌하니 보는 이가 탄식하였다. 내가 말하였다.
「이곳 사람들이 그대를 의지하여 무겁게 여기려 하는데 마르고 시들기가 이러하니 무엇으로 여럿을 위로하겠는가.」
행장을 뒤져 남빛 비단 철릭(帖裏)을 얻어 주니, 이에 여러 재상이 혹 말총 갓(騣笠)을 주고 혹 갓 위에 다는 은장식(銀頂子)과 채색 갓끈을 주어 그 자리에서 갈아입히니 옷차림이 온통 새로워졌다. 다만 신을 벗어 주는 이가 없어 오히려 짚신을 신고 있었다. 내가 웃으며 말하였다.
「비단옷에 짚신은 서로 걸맞지 않구려.」
곁에 있던 이들이 다 웃었다.
이윽고 벽동의 토병 임욱경(任旭景)이 적이 이미 봉산에 이르렀다고 알려 왔다. 내가 윤 정승에게 말하였다.
「적의 척후가 응당 이미 강 밖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이 사이 영귀루 아래 강물이 갈라져 둘이 되는데 물이 얕아 건널 만합니다. 만일 적이 우리 백성을 얻어 길을 인도하게 하여 몰래 건너 갑자기 이르면 성이 위태롭습니다. 어찌 급히 이일을 보내어 얕은 여울을 지켜 뜻밖의 일을 막게 하지 않습니까.」
윤공이 옳다 하여 곧 이일을 보냈다. 그때 이일이 거느린 강원도 군사는 겨우 수십여 인이라 다른 군사를 더해 주었는데, 이일이 함구문에 앉아 군사를 점고하며 곧 떠나지 않았다. 내가 일이 급함을 생각하여 사람을 보내어 보게 하니 아직도 문 위에 있었다. 내가 잇달아 윤공에게 말하여 재촉하게 한 뒤에야 이일이 비로소 떠났다.
성을 나선 뒤에는 길을 가리키는 이가 없어 잘못 강서 쪽 길로 향하다가, 평양 좌수 김내윤(金乃胤)이 밖에서 오는 것을 만나 물어 앞세우고 말을 달려 만경대 아래에 이르니 성에서 겨우 십여 리였다. 강 남쪽 기슭을 바라보니 와서 모인 적병이 이미 수백이요, 강 가운데 작은 섬에 사는 백성들이 놀라 부르짖으며 흩어져 달아났다. 이일이 급히 무사 십여 인에게 섬으로 들어가 쏘게 하였으나 군사들이 두려워하여 곧 나아가지 않으니, 이일이 칼을 뽑아 베려 한 뒤에야 나아갔다. 적이 이미 물 가운데 있어 기슭에 가까이 온 이가 많았는데, 우리 군사가 급히 강한 활로 쏘아 잇달아 예닐곱을 죽이니 적이 드디어 물러갔다. 이일은 그대로 머물러 나루를 지켰다.
遼東都司。使鎭撫林世祿。來探倭情。上接見于大同舘。余自五月罷。六月初一日收叙。是日承命接待唐將。時遼東聞倭犯我國。未久。又聞都城不守。車駕西遷。旣又聞倭兵已至平壤。甚疑之。以爲倭變雖急。不應猝遽如此。或云我國爲倭先導。世祿之來。余與之同上練光亭。望察形勢。有一倭從江東林木間。乍見乍隱。已而。二三倭繼出。或坐或立。意態安閒。若行路休息之狀。余指示世祿曰。此倭候也。世祿倚柱而望。殊有不信之色曰。倭兵何其少也。余曰。倭巧詐。雖大兵在後。而先來偵探者。不過數輩。若見其少而忽之。則必陷於賊術矣。世祿唯唯。亟求回咨馳去。命左相尹斗壽。率都元帥金命元。巡察使李元翼等。守平壤。數日前。城中人聞車駕欲出避。各自逃散。閭里幾空。上命世子。出大同舘門。集城中父老。諭以堅守之意。父老進前曰。但聞東宮之令。民心不信。必得聖上親諭乃可。明日上不得已。御舘門。令承旨曉諭如昨。父老數十人。拜伏痛哭。承命而退。遂各分出招呼。悉追老弱男婦子弟之竄伏山谷者入城。城中皆滿。及賊見形於大同江邊。宰臣盧稷等。奉廟社位版。幷護宮人先出。於是城中吏民作亂。挺刃橫路縱擊之。墜廟社主路中。指從行宰臣大罵曰。汝等平日。偸食國祿。今乃誤國欺民乃爾耶。余自練光亭。赴行宮。路上見婦女幼稚。皆怒髮上指。相與號呼曰。旣欲棄城。何故紿我輩入城。獨使魚肉於賊手耶。至宮門。亂民塞街。皆袒臂持兵杖。遇人輒擊。紛囂雜沓。不可禁。諸宰在門內朝堂者。皆失色起立於庭中。余恐亂民入宮門。出立門外階上。見其中有年長多髯者。以手招之。其人卽至。乃土官也。余諭之曰。汝輩欲竭力守城。不願車駕出城。爲國之忠則至矣。但因此作亂。至於驚擾宮門。事甚可駭。且朝廷方啓請堅守。上已許之。汝輩何事乃爾。觀汝貌樣。乃有識人。須以此意。曉諭衆人而退。不爾則汝輩將陷重罪。不可赦也。其人卽棄杖歛手曰。小民聞欲棄城。不勝憤氣。妄動如此。今聞此言。小人雖迷劣。胷中卽豁然矣。遂揮其而散。蓋前此朝臣。聞賊兵將近。皆請出避。兩司弘文舘。連日伏閤力請寅城府院君鄭澈尤主避出之議余曰今日事勢與前在京城時有異京城則軍民崩潰雖欲守之未由也此城前阻江水而民心頗固且近中原地方若堅守數日。天兵必來救猶可藉以卻賊不然從此至義州更無可據之地勢必至於亡國左相尹斗壽同余議余又請鄭澈曰平時每意公慷慨不避難易不圖今日之議如此也尹相詠文山詩曰我欲借劒斬侫臣寅城大怒奮袂而起平壤人亦聞余爲守議故是日聞余言頗順從而退夕召監司宋言愼責以不能鎭定亂民言愼摘發其倡首者三人斬於大同門內餘皆散去時已定出城而不知所適朝臣多言北道地僻路險可以避兵蓋是時賊兵已犯咸鏡道而道路不通且無報變者故。朝廷不知也於是以同知李希得曾爲永興府使有惠政得民心以爲咸鏡道巡檢使兵曹佐郞金義元爲從事官往北道而。內殿及宮嬪以下先出向北臣固爭曰。車駕西狩本欲倚仗。天兵以圖興復耳今旣請兵于。天朝而顧深入北道中間賊兵限隔。天朝聲問亦無可通之路况望恢復乎且賊散出諸道安知北道必無賊兵若不幸旣入其處而賊兵隨至則他無去路只有北虜而已何處可依其爲危迫不亦甚乎今朝臣家屬多避亂于北道故各顧私計皆言向北便臣有老母亦聞東出避亂雖不知在處而必流入於江原咸鏡之間臣亦以私計言之則豈無向北之情哉只以國家大計不與人臣同故敢此懇陳耳因嗚咽流涕。上惻然曰卿母安在予之故矣旣退知事韓準又獨請對力言向北之便於是。中殿遂向咸鏡道時賊至大同江已三日矣余輩在練光亭望見越邊有一倭以木末懸小紙揷江沙上令火炮匠金生麗棹小舟往取之倭不帶兵器與生麗握手拊背極款狎附書以送書至尹相欲不開見余曰開見何妨開視則書面云上朝鮮國禮曹判書李公閤下蓋與李德馨書而平調信玄蘇所裁也大㮣欲見德馨議講解德馨以扁舟會平調信玄蘇于江中相勞問如平日玄蘇言日本欲借道朝貢中原而朝鮮不許故事至此今亦借一條路使日本達中原則無事矣德馨責以負約且令退兵後議講解調信等語頗不遜遂各罷去夕賊數千結陣於江東岸上
요동도사가 진무 임세록(林世祿)을 보내어 왜의 실정을 살피게 하니 임금이 대동관에서 접견하셨다.
나는 오월에 파직되었다가 유월 초하룻날 다시 서용되어 이날 명을 받들어 명나라 장수를 접대하였다. 그때 요동에서는 왜가 우리나라를 침범하였다는 말을 듣고 오래지 않아 또 서울을 지키지 못하여 수레가 서쪽으로 옮겼다는 말을 들었으며, 이윽고 왜병이 이미 평양에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몹시 의심하였다. 왜의 변이 비록 급하기로 이처럼 갑작스러울 수 없다 하고, 혹은 우리나라가 왜의 앞잡이가 되었다고도 하였다.
세록이 오매 내가 그와 함께 연광정에 올라 형세를 바라보았다. 한 왜가 강 동쪽 수풀 사이로 잠깐 보였다 숨었다 하더니, 이윽고 두세 왜가 잇달아 나와 혹 앉고 혹 서는데 뜻과 모양이 한가로워 마치 길 가다 쉬는 모양 같았다. 내가 세록에게 가리켜 보이며 말하였다.
「이것이 왜의 척후입니다.」
세록이 기둥에 기대어 바라보더니 자못 믿지 못하는 빛으로 말하였다.
「왜병이 어찌 이리 적은가.」
내가 말하였다.
「왜는 교묘하고 속임이 많아 비록 큰 군사가 뒤에 있어도 먼저 와서 엿보는 자는 몇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일 그 적음을 보고 소홀히 여기면 반드시 적의 꾀에 빠질 것입니다.」
세록이 그렇다 하고 급히 회답 공문을 구하여 달려갔다.
좌의정 윤두수에게 도원수 김명원과 순찰사 이원익 등을 거느리고 평양을 지키라 명하셨다. 며칠 전에 성안 사람들이 수레가 나가 피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저마다 도망해 흩어져 마을이 거의 비었다. 임금이 세자에게 명하여 대동관 문에 나가 성안 부로를 모아 굳게 지킬 뜻으로 타이르게 하시니 부로들이 앞에 나와 말하였다.
「다만 동궁의 명만 듣고는 백성의 마음이 믿지 않습니다. 반드시 임금께서 친히 타이르셔야 됩니다.」
이튿날 임금이 부득이 관문에 나오시어 승지에게 어제처럼 타이르게 하시니, 부로 수십 인이 절하고 엎드려 통곡하며 명을 받들고 물러갔다. 드디어 저마다 나뉘어 나가 불러 모아, 산골짜기에 숨어 있던 늙은이와 어린이와 남녀와 자제들을 다 좇아 성에 들이니 성안이 가득 찼다.
적이 대동강 가에 모습을 드러내자 재신 노직(盧稷) 등이 종묘사직의 위판을 받들고 아울러 궁인을 호위하여 먼저 나갔다. 이에 성안의 아전과 백성이 난을 일으켜 칼을 빼어 들고 길을 가로막아 마구 치며, 종묘사직의 신주를 길 가운데 떨어뜨리고 따라가는 재신들을 가리키며 크게 꾸짖었다.
「너희가 평소에 나라의 녹을 훔쳐 먹고 이제는 나라를 그르치고 백성을 속임이 이와 같으냐.」
내가 연광정에서 행궁으로 가는데 길 위에서 부녀와 어린아이를 보니 다 성난 머리털이 위로 곤두서서 서로 부르짖었다.
「이미 성을 버리려 하면서 무슨 까닭으로 우리를 속여 성에 들여놓고 홀로 적의 손에 고기가 되게 하는가.」
궁문에 이르니 어지러운 백성이 거리를 메웠는데 다 팔을 걷고 병장기를 들고 사람을 만나면 문득 치니 시끄럽고 뒤엉켜 금할 수 없었다. 문 안 조당에 있던 여러 재상이 다 낯빛을 잃고 뜰 가운데 일어서 있었다. 나는 어지러운 백성이 궁문으로 들어올까 두려워 문 밖 섬돌 위에 나가 서서, 그 가운데 나이가 많고 수염이 많은 이를 보고 손으로 부르니 그 사람이 곧 왔다. 곧 그 고장 사람으로 벼슬한 토관(土官)이었다. 내가 타일렀다.
「너희가 힘을 다하여 성을 지키고자 하고 수레가 성을 나가는 것을 바라지 않으니 나라를 위하는 충성은 지극하다. 다만 이로 인하여 난을 일으켜 궁문을 놀라게 하고 어지럽히기에 이르렀으니 일이 몹시 놀랍다. 또 조정이 바야흐로 굳게 지키기를 아뢰어 청하고 임금께서 이미 허락하셨는데 너희가 무슨 일로 이러느냐. 네 모양을 보니 아는 것이 있는 사람이다. 모름지기 이 뜻으로 여러 사람을 타일러 물러가게 하라. 그러지 않으면 너희가 장차 무거운 죄에 빠져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그 사람이 곧 몽둥이를 버리고 손을 모으고 말하였다.
「소민이 성을 버리려 한다는 말을 듣고 분한 기운을 이기지 못하여 망령되이 움직인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이제 이 말씀을 들으니 소인이 비록 미욱하고 못났으나 가슴속이 곧 환해졌습니다.」
드디어 무리를 휘저어 흩어 보냈다.
대개 이보다 앞서 조정 신하들이 적병이 장차 가까이 온다는 말을 듣고 다 나가 피하기를 청하였고, 사헌부와 사간원과 홍문관이 날마다 합문에 엎드려 힘써 청하였으며, 인성부원군 정철이 더욱 피하여 나가자는 의논을 주장하였다. 내가 말하였다.
「오늘 일의 형세는 앞서 서울에 있을 때와 다릅니다. 서울은 군사와 백성이 무너져 흩어졌으니 비록 지키고자 하여도 말미암을 데가 없었거니와, 이 성은 앞이 강물에 막혔고 민심이 자못 굳으며 또 중국 땅과 가깝습니다. 만일 며칠을 굳게 지키면 명나라 군사가 반드시 와서 구원할 것이니 오히려 그것을 의지하여 적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여기서 의주에 이르기까지 다시 의거할 만한 땅이 없으니 형세가 반드시 나라가 망하는 데 이를 것입니다.」
좌의정 윤두수가 내 의논과 같았다. 내가 또 정철에게 청하였다.
「평시에 늘 공은 강개하여 어렵고 쉬움을 피하지 않는다고 여겼는데, 오늘의 의논이 이러할 줄은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윤 정승이 문산(文山)의 시 「내 칼을 빌려 아첨하는 신하를 베고 싶다」를 읊으니 인성부원군이 크게 노하여 소매를 떨치고 일어났다.
평양 사람들도 내가 지키자는 의논을 낸 줄 들었으므로 이날 내 말을 듣고 자못 순순히 따라 물러갔다. 저녁에 감사 송언신(宋言愼)을 불러 어지러운 백성을 진정시키지 못하였다고 꾸짖으니, 언신이 앞장선 세 사람을 가려내어 대동문 안에서 목을 베자 나머지는 다 흩어져 갔다.
그때 이미 성을 나가기로 정하였으나 갈 곳을 알지 못하였다. 조정 신하 가운데 북도는 땅이 후미지고 길이 험하여 군사를 피할 만하다고 말하는 이가 많았다. 대개 이때 적병이 이미 함경도를 침범하였으나 길이 통하지 않고 또 변을 알리는 이가 없었으므로 조정이 알지 못한 것이다. 이에 동지 이희득(李希得)이 일찍이 영흥부사가 되어 은혜로운 정사가 있어 민심을 얻었다 하여 함경도순검사로 삼고, 병조좌랑 김의원(金義元)을 종사관으로 삼아 북도로 가게 하였다. 그리고 내전과 궁빈 이하가 먼저 나가 북쪽으로 향하였다. 신이 굳이 다투어 아뢰었다.
「수레가 서쪽으로 거둥하신 것은 본디 명나라 군사를 의지하여 다시 일으키기를 꾀하려 함입니다. 이제 이미 천조에 군사를 청하고서 도리어 북도로 깊이 들어가면 중간에 적병이 가로막아 천조와 소식조차 통할 길이 없을 것이니 하물며 되찾기를 바라겠습니까. 또 적이 여러 도에 흩어져 나왔으니 북도에 반드시 적병이 없으리라고 어찌 알겠습니까. 만일 불행히 이미 그곳에 들어갔는데 적병이 뒤따라 이르면 다른 데는 갈 길이 없고 다만 북쪽 오랑캐가 있을 뿐이니 어느 곳을 의지하겠습니까. 그 위태롭고 급박함이 또한 심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조정 신하의 집안 식구가 북도로 난을 피한 이가 많으므로 저마다 사사로운 계책을 돌아보아 다 북쪽으로 향함이 편하다 합니다. 신에게도 늙은 어미가 있어 또한 동쪽으로 나가 난을 피하였다 하니 비록 있는 데를 알지 못하나 반드시 강원도와 함경도 사이로 흘러들었을 것입니다. 신도 사사로운 계책으로 말한다면 어찌 북쪽으로 향하고 싶은 정이 없겠습니까. 다만 나라의 큰 계책은 남의 신하 된 이의 사사로움과 같지 않으므로 감히 이렇게 간절히 아뢸 뿐입니다.」
그리고 목이 메어 눈물을 흘렸다. 임금이 측은히 여겨 말씀하셨다.
「경의 어미는 어디 있는가. 나 때문이로다.」
물러난 뒤에 지사 한준(韓準)이 또 홀로 뵙기를 청하여 북쪽으로 향함이 편하다고 힘써 말하니, 이에 중전이 드디어 함경도로 향하였다.
그때 적이 대동강에 이른 지 이미 사흘이었다. 우리가 연광정에 있다가 건너편에 한 왜가 나뭇가지 끝에 작은 종이를 매어 강 모래 위에 꽂아 놓은 것을 바라보고, 화포장 김생려(金生麗)에게 작은 배를 저어 가서 가져오게 하였다. 왜는 병기를 지니지 않고 생려와 손을 잡고 등을 두드리며 몹시 친한 체하고 글을 붙여 보냈다. 글이 이르매 윤 정승이 펴 보지 않으려 하므로 내가 말하였다.
「펴 본들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펴 보니 겉면에 「조선국 예조판서 이공 합하께 올린다」 하였으니, 대개 이덕형에게 보낸 글로 평조신과 현소가 지은 것이었다. 대강은 덕형을 만나 강화를 의논하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덕형이 작은 배로 강 가운데서 평조신·현소와 만나 평일처럼 서로 위로하며 안부를 물었다. 현소가 말하였다.
「일본이 길을 빌려 중국에 조공하려 하였는데 조선이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일이 이에 이르렀습니다. 이제라도 한 가닥 길을 빌려 일본으로 하여금 중국에 닿게 하면 일이 없을 것입니다.」
덕형이 약속을 저버린 것을 꾸짖고 또 군사를 물린 뒤에 강화를 의논하라 하니 조신 등의 말이 자못 공손하지 않았다. 드디어 저마다 헤어져 갔다. 저녁에 적 수천이 강 동쪽 기슭 위에 진을 쳤다.
六月十一日。車駕出平壤向寧邊大臣崔興源俞泓鄭澈等。扈從左相興金元帥李巡察元翼留守平壤余亦以接待唐將留是日賊攻城左相元帥巡察及余在練光亭本道監司宋言愼守大同城門樓兵使李潤德守浮碧樓以上江灘慈山郡守尹裕後等守長慶門城中士卒民夫合三四千分配城堞而部伍不明城上人或疎或密或人上有人肩背相磨或連數垜無一人散掛衣服於乙密臺近處松樹間名曰疑兵隔江望賊兵亦不甚多東大院岸上排作一字陣列堅紅白旗如我國挽章於出十餘騎向羊角島入江中水沒馬腹皆按轡列立示將渡江之狀其餘往來江上者或一二或三四荷大劒日光下射閃閃如電或云非眞劒以木爲之沃以白鑞以眩人眼者然遠不可辨又六七賊持鳥銃到江邊向城放聲響甚壯丸過江入城遠者入大同舘散落瓦上幾千餘步或中城樓柱深入數寸有紅衣賊見練光亭上諸公會坐知爲將帥挾鳥統邪睨漸進至沙渚上放丸中亭上二人然遠故不重傷余令軍官姜士益從防牌內以片箭射之矢及沙上賊逡巡而卻元師發善射者乘快船中流射賊船稍近東岸賊亦退避我軍從船上發玄字銃火箭如椽過江倭衆仰視皆呌噪而散箭落地爭聚觀之是日以不卽整兵船斬工吏房一人時久不雨江水日縮曾分遣宰臣禱雨檀君箕子東明王廟猶不雨余謂尹相曰此處水深無船賊終不能渡惟水上多淺灘早晚賊必由此渡渡則城不可守何不嚴備金元帥性緩但曰已命李潤德守之矣余曰潤德輩何可倚仗指李巡察曰公等會坐一處如宴集無益於事不可往護江灘耶李曰若令往見敢不盡力於是尹相謂李曰公可往李起出余時承。命只應接唐將不參軍務默念必敗不如早迎唐將於中路速進一步來敎庶可有濟日暮遂與從事官洪宗祿辛慶晋出城夜深到順安路中逢李陽元從事官金廷睦自淮陽來聞賊兵至鐵嶺矣明日過肅川至安州遼東鎭撫林世祿又來接受咨文送。行在翌日聞。車駕已離寧邊次博川余馳詣博川。上御東軒引見臣問平壤可守乎臣對曰人心頗固似可守但援兵不可不速進故臣爲此以來欲迎着。天兵請速馳援而至今未見兵至玆以爲憫。上手取尹斗壽狀。啓示臣曰昨日已令老弱出城云人心必搖何以能守臣對曰誠如。聖慮臣在彼時未見此事大槪觀其處形勢賊必由淺灘以渡宜多布菱鐵於水中以備之。上使問此縣亦有菱鐵否對有數千介。上曰急募人送之平壤臣又。啓曰平壤以西江西龍岡甑山咸從等邑倉穀多人民衆聞賊兵已近則必驚駭散失宜急遣侍從一人自此馳去鎭撫之且收兵爲平壤繼援便。上曰誰人可去對曰兵曹正郞李幼澄有計慮可遣又。啓臣事急不可遲滯當達夜馳去以迎見唐將爲期遂辭退出見李幼澄言。上前所達幼澄愕然曰此乃賊藪何可進余貴之曰食祿不避難臣子之義今。國事危急如此雖湯火不可避顧以此一行爲攤乎幼澄默然有恨色余旣拜辭出至大定江邊日已平西矣回望廣通院野有散卒絡繹而來疑平壤失守使軍官數輩馳往收之得十九人而至乃義州龍川等處之軍而往平壤守江灘者也言昨日賊已從王城灘渡江江上軍潰兵使李潤德遁走余大驚卽於路中爲書狀遣軍官崔允元馳報。行在夜入嘉山郡是日夕。內殿至博川蓋在路聞賊兵已入北道故不前而回通川郡守鄭逑遣使進物膳
유월 열하룻날 수레가 평양을 떠나 영변으로 향하였다. 대신 최흥원·유홍·정철 등이 호종하고, 좌의정 윤두수와 김 원수와 이 순찰사 원익이 평양에 머물러 지키게 되었으며, 나도 명나라 장수를 접대하는 일로 머물렀다.
이날 적이 성을 쳤다. 좌의정과 원수와 순찰사와 내가 연광정에 있고, 본도 감사 송언신이 대동성 문루를 지키고 병사 이윤덕(李潤德)이 부벽루 위쪽 강여울을 지키고 자산군수 윤유후(尹裕後) 등이 장경문을 지켰다. 성안의 군사와 백성과 부역하는 이를 합하여 서너 천을 성가퀴에 나누어 붙였으나 대오가 분명하지 않아, 성 위의 사람이 혹 성기고 혹 빽빽하여 어떤 데는 사람 위에 사람이 있어 어깨와 등이 서로 닿고 어떤 데는 여러 성가퀴가 잇대어 한 사람도 없었다. 을밀대 가까운 솔숲 사이에 옷을 흩어 걸어 두고 헛군사로 삼았다.
강 건너로 적병을 바라보니 또한 그리 많지 않았다. 동대원 기슭 위에 한 일 자로 진을 치고 붉고 흰 기를 세웠는데 우리나라 만장 같았다. 십여 기가 양각도로 향하여 강에 들어가니 물이 말 배에 닿았는데 다 고삐를 잡고 벌여 서서 장차 강을 건널 듯한 모양을 보였다. 그 나머지 강 위를 오가는 이가 혹 한둘이요 혹 서넛인데 큰 칼을 메었으니 햇빛에 번쩍여 번개 같았다. 혹은 참 칼이 아니요 나무로 만들어 백랍을 입혀 사람의 눈을 어지럽히는 것이라고도 하였으나 멀어서 분간할 수 없었다.
또 예닐곱 적이 조총을 가지고 강가에 이르러 성을 향하여 쏘니 소리가 몹시 크고 탄환이 강을 지나 성에 들어와 먼 것은 대동관에 들어가 기와 위에 흩어져 떨어지니 거의 천여 걸음이었고, 혹 성루 기둥에 맞아 몇 치나 깊이 박혔다. 붉은 옷 입은 적이 연광정 위에 여러 공이 모여 앉은 것을 보고 장수인 줄 알고 조총을 끼고 곁눈질하며 점점 나아가 모래톱 위에 이르러 쏘니 정자 위의 두 사람이 맞았으나 멀었으므로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내가 군관 강사익(姜士益)에게 방패 안에서 편전으로 쏘게 하니 화살이 모래 위까지 미치매 적이 머뭇거리며 물러갔다.
원수가 활 잘 쏘는 이를 뽑아 빠른 배를 타고 물 가운데서 적을 쏘게 하니, 배가 동쪽 기슭에 조금 가까워지자 적도 물러나 피하였다. 우리 군사가 배 위에서 현자총을 쏘니 불화살이 서까래 같아 강을 지나가매 왜의 무리가 우러러보고 다 소리치며 흩어졌다가, 화살이 땅에 떨어지자 다투어 모여 구경하였다. 이날 배를 제때에 정돈하지 못하였다 하여 공방 아전 하나를 목 베었다.
그때 오래 비가 오지 않아 강물이 날로 줄었다. 일찍이 재신을 나누어 보내어 단군과 기자와 동명왕 사당에 비를 빌었으나 오히려 비가 오지 않았다. 내가 윤 정승에게 말하였다.
「이곳은 물이 깊고 배가 없어 적이 끝내 건너지 못하겠으나, 오직 상류에 얕은 여울이 많으니 머지않아 적이 반드시 이리로 건널 것입니다. 건너면 성을 지킬 수 없으니 어찌 엄히 대비하지 않습니까.」
김 원수는 성품이 느긋하여 다만 「이미 이윤덕에게 지키라 명하였습니다」 할 뿐이었다. 내가 말하였다.
「윤덕 같은 이를 어찌 믿겠습니까.」
이 순찰사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공들이 한곳에 모여 앉은 것이 잔치 자리 같아 일에 보탬이 없으니, 가서 강여울을 지키지 않겠습니까.」
이공이 말하였다.
「가서 보라 하시면 어찌 감히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윤 정승이 이공에게 「공이 가시오」 하니 이공이 일어나 나갔다. 나는 그때 명을 받들어 다만 명나라 장수를 응접할 뿐 군무에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반드시 패하리라 잠자코 생각하고 일찍 중도에서 명나라 장수를 맞아 한 걸음이라도 빨리 나아오게 하는 것만 못하다 여겼다.
날이 저물어 드디어 종사관 홍종록(洪宗祿)·신경진(辛慶晉)과 함께 성을 나가 밤이 깊어 순안에 이르렀다. 길에서 이양원의 종사관 김정목(金廷睦)이 회양에서 오는 것을 만나 적병이 철령에 이르렀음을 들었다. 이튿날 숙천을 지나 안주에 이르니 요동 진무 임세록이 또 왔으므로 맞아 자문을 받아 행재소로 보냈다.
다음 날 수레가 이미 영변을 떠나 박천에 묵으신다는 말을 듣고 내가 박천으로 달려가 뵈니, 임금이 동헌에 나와 신을 인견하고 물으셨다.
「평양은 지킬 만한가.」
신이 대답하였다.
「인심이 자못 굳어 지킬 만한 듯합니다. 다만 원병이 빨리 나아오지 않을 수 없으므로 신이 이 때문에 와서 명나라 군사를 맞아 급히 달려와 구원하기를 청하려 하였으나, 이제까지 군사가 이르는 것을 보지 못하여 이로써 민망합니다.」
임금이 손수 윤두수의 장계를 집어 신에게 보이며 말씀하셨다.
「어제 이미 늙고 약한 이들을 성 밖으로 내보냈다 하니 인심이 반드시 흔들릴 터인데 어찌 지킬 수 있겠는가.」
신이 대답하였다.
「참으로 임금의 염려하심과 같습니다. 신이 그곳에 있을 때에는 이 일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대개 그곳 형세를 보면 적이 반드시 얕은 여울로 건널 것이니 마름쇠를 물속에 많이 깔아 대비함이 마땅합니다.」
임금이 이 고을에도 마름쇠가 있는지 묻게 하시니 수천 개가 있다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말씀하셨다.
「급히 사람을 모아 평양으로 보내라.」
신이 또 아뢰었다.
「평양 서쪽 강서·용강·증산·함종 등 고을은 창고의 곡식이 많고 백성이 많은데, 적병이 이미 가까이 왔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놀라 흩어질 것입니다. 마땅히 급히 시종 한 사람을 이곳에서 달려 보내어 진무하게 하고 또 군사를 거두어 평양의 뒤이은 구원으로 삼음이 편합니다.」
임금이 「누가 갈 만한가」 하시기에 대답하였다.
「병조정랑 이유징(李幼澄)이 계책과 생각이 있으니 보낼 만합니다.」
또 아뢰었다.
「신의 일이 급하여 지체할 수 없으니 마땅히 밤새 달려가 명나라 장수를 맞아 보기로 기약하겠습니다.」
드디어 하직하고 물러나와 이유징을 보고 임금 앞에서 아뢴 바를 말하니 유징이 깜짝 놀라 말하였다.
「그곳은 곧 적의 소굴인데 어찌 나아가겠습니까.」
내가 꾸짖어 말하였다.
「녹을 먹으면 어려움을 피하지 않는 것이 신하의 의리다. 이제 나랏일이 위급함이 이와 같으니 비록 끓는 물과 불이라도 피할 수 없거늘, 도리어 이 한 번 가는 것을 어렵게 여기는가.」
유징이 잠자코 원망하는 빛이 있었다.
내가 하직하고 나와 대정강 가에 이르니 해가 이미 서쪽으로 기울었다. 광통원 들을 돌아보니 흩어진 군졸이 잇달아 오므로 평양을 지키지 못한 것인가 의심하여 군관 몇을 달려 보내어 거두게 하니 열아홉 사람을 얻어 왔다. 곧 의주와 용천 등지의 군사로 평양에 가서 강여울을 지키던 이들이었는데, 어제 적이 이미 왕성탄에서 강을 건너 강가의 군사가 무너지고 병사 이윤덕은 달아났다고 하였다. 내가 크게 놀라 곧 길에서 글을 지어 군관 최윤원(崔允元)을 보내어 행재소에 달려가 알리게 하고, 밤에 가산군으로 들어갔다.
이날 저녁 내전이 박천에 이르렀다. 대개 길에서 적병이 이미 북도에 들어갔다는 말을 들었으므로 앞으로 가지 못하고 돌아온 것이다. 통천군수 정구(鄭逑)가 사람을 보내어 음식을 올렸다.
平壤陷。車駕次于嘉山。東宮奉。廟社主自博川入山郡初賊兵分駐江沙上作十餘屯結草爲幕旣累日不得渡江警備頗怠金命元等自城上望見以爲可乘夜掩襲抄擇精兵使高彥伯等領之從浮碧樓下綾羅渡潜以船渡軍初約三更擧事失時刻旣渡已昧爽矣見諸幕中賊猶未起遂前突第一陣賊驚擾我軍多射殺賊土兵任旭景先登力戰爲賊所害奪賊馬三百餘匹俄而列屯賊悉起大至我軍退走還趨船船上人見賊已迫後中流不敢艤船淹死者甚衆餘軍又從王城灘亂流而渡賊始知水淺可涉是日暮擧衆由灘以濟我軍守攤者不敢發一矢皆散走賊旣波猶疑城中有備遲回不前是夜尹斗壽金命元開城門盡出城中人沉軍器火炮于風月樓池水中斗壽等由普通門而出至順安賊無追躡者從事官金信元獨出大同門乘船順流向江西明日賊至城外登牧丹峰良久觀望知城空無人乃入城始。車駕至平壤廷議皆以糧餉爲憂盡取列邑田稅輸到平壤及城陷幷本倉穀十餘萬石皆爲賊所有時余狀報至博川父巡察使李元翼從事官李好閔亦自平壤來言賊渡江狀夜。車駕及。內殿發向嘉山。命世子奉。廟社別由他路使之收召四方以圖興復分臣僚從行領議政崔興源以。命從世子右議政俞泓亦自請隨。世子。上不答。駕旣出泓伏路邊辭去內官屢。啓右相俞泓請辭。上終不答泓遂從。東宮時尹斗壽在平壤未還。行在無大臣惟鄭澈以舊相從。駕至嘉山已五皷矣
평양이 함락되고 수레가 가산에 묵었다. 동궁이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박천에서 산군으로 들어갔다.
처음에 적병이 강 모래 위에 나뉘어 주둔하여 열여 둔을 짓고 풀을 엮어 막을 만들었는데, 여러 날 강을 건너지 못하자 경계가 자못 게을러졌다. 김명원 등이 성 위에서 바라보고 밤을 타 갑자기 엄습할 만하다 하여 정병을 뽑아 고언백(高彥伯) 등에게 거느리게 하고, 부벽루 아래 능라도 나루에서 가만히 배로 군사를 건넸다. 처음에 삼경에 일을 일으키기로 약속하였으나 시각을 놓쳐 건너고 나니 이미 새벽이었다.
여러 막사 안의 적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을 보고 드디어 앞으로 나아가 첫째 진을 들이치니 적이 놀라 술렁였고 우리 군사가 많이 쏘아 죽였다. 토병 임욱경이 먼저 올라 힘껏 싸우다가 적에게 죽었다. 적의 말 삼백여 필을 빼앗았다. 이윽고 벌여 있던 둔의 적이 다 일어나 크게 이르매 우리 군사가 물러 달아나 도로 배로 달려갔는데, 배 위의 사람들이 적이 이미 뒤에 다가온 것을 보고 물 가운데서 감히 배를 대지 못하여 물에 빠져 죽은 이가 몹시 많았다. 남은 군사는 또 왕성탄으로 어지러이 물을 건넜다. 적이 비로소 물이 얕아 건널 만한 줄 알았다.
이날 저물녘에 적이 무리를 들어 여울로 건너니, 우리 여울을 지키던 군사가 감히 화살 한 대 쏘지 못하고 다 흩어져 달아났다. 적이 건넌 뒤에도 오히려 성안에 대비가 있을까 의심하여 머뭇거리며 나아가지 않았다.
이날 밤 윤두수와 김명원이 성문을 열어 성안 사람을 다 내보내고, 군기와 화포를 풍월루 못물 속에 가라앉혔다. 두수 등이 보통문으로 나와 순안에 이르렀으나 뒤쫓는 적이 없었다. 종사관 김신원(金信元)만이 홀로 대동문으로 나와 배를 타고 물을 따라 강서로 향하였다.
이튿날 적이 성 밖에 이르러 모란봉에 올라 한참 바라보고 성이 비어 사람이 없음을 안 뒤에야 성에 들어왔다.
처음에 수레가 평양에 이르렀을 때 조정의 의논이 다 군량을 걱정하여 여러 고을의 전세를 다 거두어 평양으로 실어 왔는데, 성이 함락되자 본디 있던 창고 곡식과 아울러 십여만 섬이 다 적의 것이 되었다.
그때 내 장계가 박천에 이르렀고, 순찰사 이원익과 종사관 이호민(李好閔)도 평양에서 와서 적이 강을 건넌 정황을 말하였다. 밤에 수레와 내전이 떠나 가산으로 향하였다. 세자에게 명하여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따로 다른 길로 가서 사방을 불러 모아 다시 일으키기를 꾀하게 하시고 신료를 나누어 따라가게 하시니, 영의정 최흥원이 명을 받아 세자를 따랐다. 우의정 유홍도 스스로 세자를 따르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대답하지 않으셨다. 수레가 이미 떠나매 유홍이 길가에 엎드려 하직하고 가니, 내관이 여러 번 「우의정 유홍이 하직을 청합니다」 하고 아뢰었으나 임금이 끝내 대답하지 않으셨다. 유홍이 드디어 동궁을 따라갔다.
그때 윤두수는 평양에 있어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행재소에 대신이 없고 오직 정철이 옛 정승으로 수레를 따랐다. 가산에 이르니 이미 오경이었다.
車駕次于定州自。駕出平壤人心崩遺所過亂民輒入倉庫搶掠穀物順安肅川安州寧邊博川以次皆敗是日。駕發嘉山郡守沈信謙謂余曰此郡糧穀頗優官廳亦有白米一千石欲以此餉。天兵不幸事至於此公若少留鎭定則邑人不敢動不然亂作小人亦不敢留此將向海邊躲避矣時信謙已不能令其下矣獨余所帶軍官六人及路中所收潰卒十九人余約束使之自隨故各帶弓箭在傍信謙欲藉此自護故云然余不忍遽發少坐大門日已過午更念無。上命而擅留不行於義未安遂與信謙別行上曉星嶺回望嘉山則郡中已亂矣信謙盡失倉穀而逃翌日。車駕出定州向宣川。命臣留定州州人已四散避亂獨老吏白鶴松等數人在城中而已余伏路邊送。駕出城掩泣坐延薰樓下軍官數人在左右階下所收潰卒十九人猶不去繫馬路邊柳本相環而坐向晚見南門有執杖者自外連絡而來向左邊去使軍官視之聚於倉下者已數百余念已所率寡弱若亂民益多而與之爭鬪則難制不如先攻弱者使之驚散爲可於是視城門又有繼至者十餘人余急呼軍官從十九卒馳捕之其人望見奔走追及捕九人而至卽令披髮反接而赤脫之徇于倉邊道路十餘本隨其後大呼曰擒㥘倉賊將行刑梟首城中人見之於是已聚倉下者望而惶駭悉從西門散去由是定州倉穀僅全而龍川宣川鐵山等邑刧倉者亦絕定州判官金榮一武人也自平壤奔還置其妻子於海邊偸出倉穀欲送之余聞而數之曰汝爲武將敗軍不死其罪可誅又敢偸出官穀耶此穀將餉。天兵非汝所得私者杖之六十旣而尹左相金元帥武將李薲等自平壤皆至定州。上出定州時有。命左相若來亦留駐定州及尹至余傳。上命尹不答直向。行在余亦留金命元李薲等守定州追及。乘輿於龍川時郡邑人民聞平壤陷意賊隨後至盡竄山谷路上不見一人聞江邊列邑如江界等地皆然余行至郭山山城下見有岐路問下卒曰此向何處路曰此走龜城路也余駐馬呼從事官洪宗祿曰沿途倉儲一空。天兵雖來何以接濟此間惟龜城一邑儲峙頗優而亦聞吏民盡散輸運無策君久在龜城其處人如聞君至雖隱山谷中必有來見欲聞賊勢者君從此急去龜城諭之曰賊入平壤尙不出。天兵方大至收復不遠所患一路糧𥹝不足耳爾輩無論品官人吏悉一境之力輸運軍糧不乏軍興則後日必有重賞若此則庶幾同心協力輸到定州嘉山可以濟事宗祿慨然應諾分路而去余自向龍川蓋宗祿坐己丑獄謫在龜城。車駕至平壤後始收叙爲司饔正爲人忠實有忘身徇國不避夷險之志
수레가 정주에 묵었다.
수레가 평양을 떠난 뒤로 인심이 무너져, 지나는 데마다 어지러운 백성이 문득 창고에 들어가 곡물을 노략질하니 순안·숙천·안주·영변·박천이 차례로 다 무너졌다.
이날 수레가 떠나매 가산군수 심신겸(沈信謙)이 나에게 말하였다.
「이 고을은 양곡이 자못 넉넉하고 관청에도 흰쌀 일천 섬이 있어 이것으로 명나라 군사를 먹이려 하였는데 불행히 일이 이에 이르렀습니다. 공이 만일 조금 머물러 진정시키면 고을 사람이 감히 움직이지 못하려니와, 그러지 않으면 난이 일어날 것이니 소인도 감히 여기 머물지 못하고 장차 바닷가로 향하여 피하겠습니다.」
그때 심신겸은 이미 제 아랫사람을 부리지 못하였다. 홀로 내가 데린 군관 여섯과 길에서 거둔 무너진 군졸 열아홉이 있었는데, 내가 단속하여 저를 따르게 하였으므로 저마다 활과 화살을 지니고 곁에 있었다. 심신겸이 이를 의지하여 스스로 지키려 하였으므로 그리 말한 것이다.
내가 차마 갑자기 떠나지 못하여 한참 큰 문에 앉았으니 해가 이미 낮을 지났다. 다시 생각하니 임금의 명 없이 제멋대로 머물러 가지 않음이 의리에 편안하지 않으므로 드디어 신겸과 작별하고 떠났다. 효성령에 올라 가산을 돌아보니 고을 안이 이미 어지러웠다. 신겸은 창고 곡식을 다 잃고 달아났다.
이튿날 수레가 정주를 떠나 선천으로 향하며 신에게 정주에 머물라 명하셨다. 고을 사람들이 이미 사방으로 흩어져 난을 피하고 홀로 늙은 아전 백학송(白鶴松) 등 몇 사람이 성안에 있을 뿐이었다. 내가 길가에 엎드려 수레를 보내고 성을 나와 눈물을 닦으며 연훈루 아래 앉으니, 군관 몇이 좌우 섬돌 아래 있고 거둔 무너진 군졸 열아홉도 오히려 가지 않고 말을 길가 버드나무에 매고 둘러앉았다.
저물녘에 남문에 몽둥이를 든 이들이 밖에서 잇달아 들어와 왼편으로 가는 것이 보였다. 군관을 시켜 살피게 하니 창고 아래 모인 이가 이미 수백이었다. 나는 내가 거느린 이가 적고 약하여, 만일 어지러운 백성이 더 많아진 뒤에 다투면 누르기 어려우니 먼저 약한 이를 쳐서 놀라 흩어지게 함만 못하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성문을 보니 또 뒤이어 오는 이가 십여 인이므로, 내가 급히 군관을 불러 열아홉 군졸을 데리고 달려가 잡게 하였다. 그 사람들이 바라보고 달아나므로 뒤쫓아 아홉을 잡아 오니, 곧 머리를 풀어헤치고 손을 뒤로 묶고 벗겨 창고 가 길에서 조리돌리게 하고 열아홉 군졸이 그 뒤를 따르며 크게 외치게 하였다.
「창고를 털려던 도둑을 잡았다. 장차 형을 행하여 머리를 매달 것이다.」
성안 사람들이 이를 보매, 이미 창고 아래 모였던 이들이 바라보고 두려워하여 다 서문으로 흩어져 갔다. 이로 말미암아 정주의 창고 곡식이 겨우 온전하였고 용천·선천·철산 등 고을에서 창고를 겁탈하는 일도 끊어졌다.
정주판관 김영일(金榮一)은 무인이다. 평양에서 달아나 돌아와 제 처자를 바닷가에 두고 창고 곡식을 훔쳐 내어 보내려 하였다. 내가 듣고 꾸짖었다.
「네가 무장이 되어 군사를 패하고도 죽지 않았으니 그 죄가 베일 만한데, 또 감히 관곡을 훔쳐 내는가. 이 곡식은 장차 명나라 군사를 먹일 것이지 네가 사사로이 할 바가 아니다.」
그리고 곤장 예순 대를 쳤다.
이윽고 윤 좌상과 김 원수와 무장 이빈(李薲) 등이 평양에서 다 정주에 이르렀다. 임금이 정주를 떠나실 때 좌상이 오거든 또한 정주에 머물러 있게 하라는 명이 있었으므로, 윤공이 이르매 내가 임금의 명을 전하였으나 윤공은 대답하지 않고 바로 행재소로 향하였다. 나도 김명원과 이빈 등을 머물러 정주를 지키게 하고 용천에서 수레를 뒤따라 미쳤다.
그때 고을 인민이 평양이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적이 뒤따라 이르리라 여겨 다 산골짜기로 숨어 길 위에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고, 강변의 여러 고을 강계 같은 데도 다 그러하다고 들었다.
내가 곽산 산성 아래에 이르러 갈림길이 있는 것을 보고 아래 군졸에게 「이것은 어디로 향하는 길인가」 물으니 「이는 구성으로 가는 길입니다」 하였다. 내가 말을 멈추고 종사관 홍종록을 불러 말하였다.
「길을 따라 창고가 다 비었으니 명나라 군사가 온들 무엇으로 이어 대겠는가. 이 사이 오직 구성 한 고을만 쌓아 둔 것이 자못 넉넉하나 또한 아전과 백성이 다 흩어져 실어 나를 계책이 없다 한다. 그대가 오래 구성에 있었으니 그곳 사람들이 그대가 왔다는 말을 들으면 비록 산골짜기에 숨었더라도 반드시 와서 보고 적의 형세를 들으려는 이가 있을 것이다. 그대는 여기서 급히 구성으로 가서 이렇게 타이르라. 『적이 평양에 들어와 아직 나오지 않았고 명나라 군사가 바야흐로 크게 이르니 되찾을 날이 멀지 않다. 걱정하는 바는 다만 한 길의 군량이 넉넉하지 못한 것뿐이다. 너희는 품관이든 아전이든 가리지 말고 온 고을의 힘을 다하여 군량을 실어 날라 군사 일으킴에 모자람이 없게 하라. 그러면 뒷날 반드시 무거운 상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하면 아마도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아울러 정주와 가산까지 실어 와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종록이 개연히 응낙하고 길을 나누어 갔다. 나는 용천으로 향하였다. 대개 종록은 기축년 옥사에 걸려 구성에 귀양 가 있다가 수레가 평양에 이른 뒤에야 비로소 서용되어 사옹정이 되었는데, 사람됨이 충실하여 몸을 잊고 나라에 따르며 평탄함과 험함을 가리지 않는 뜻이 있었다.
車駕至義州。天將參將戴某遊擊將軍史儒各領一枝兵向平壤至林畔驛聞平壤已陷亦還駐義州天期賜犒軍銀二萬兩唐官領到義州先是遼東聞我國有賊變卽。奏聞而朝議多異同甚或疑我爲賊向導獨兵部尙書石星銳意救援時我使申點在玉河舘尙書呼至庭出遼東報變文書示之點卽號慟與一行朝夕大臨先請援兵尙書。奏發二枝兵往衛。國王及請賜銀點回至通州而告意使鄭崑壽繼至尙書引入火房親問事狀或至流涕云至是連遣使至遼東告急請援且乞內附蓋賊已陷平壤則勢如建瓴意謂朝夕當至鴨綠江事之危急如此故至欲內附幸賊旣入平壤歛跡城中延至數月雖順安永柔去平壤咫尺而猶不來犯以此人心稍定收拾餘燼導迎。天兵終致恢復之功此實天也非人力之所及也
수레가 의주에 이르렀다.
명나라 장수 참장 대(戴) 아무개와 유격장군 사유(史儒)가 저마다 한 갈래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으로 향하다가 임반역에 이르러 평양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또한 의주로 돌아와 머물렀다. 명나라 황제가 군사를 먹일 은 이만 냥을 내리니 명나라 관원이 의주로 가지고 왔다.
이보다 앞서 요동에서 우리나라에 적의 변이 있음을 듣고 곧 아뢰었으나 명나라 조정의 의논이 자못 어긋나 심하게는 우리가 적의 앞잡이가 되었다고 의심하는 이도 있었다. 홀로 병부상서 석성(石星)이 굳은 뜻으로 구원하려 하였다. 그때 우리 사신 신점(申點)이 옥하관에 있었는데, 상서가 뜰로 불러 요동에서 변을 알린 문서를 내어 보이니 신점이 곧 부르짖어 통곡하고 일행과 더불어 아침저녁으로 크게 곡하며 먼저 원병을 청하였다. 상서가 아뢰어 두 갈래 군사를 내어 가서 국왕을 호위하게 하고 또 은 내리기를 청하였다. 신점이 돌아와 통주에 이르렀을 때 고급사 정곤수(鄭崑壽)가 뒤이어 이르니, 상서가 이끌어 화방에 들여 친히 사정을 물으며 더러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이때에 이르러 잇달아 사신을 요동에 보내어 급함을 알리고 원병을 청하며 또 명나라에 들어가 붙기를 빌었다. 대개 적이 이미 평양을 함락하였으니 형세가 물동이를 지붕에서 쏟는 듯하여 아침저녁으로 압록강에 이르리라 여겼다. 일의 위급함이 이와 같았으므로 명나라에 붙으려고까지 한 것이다. 다행히 적이 평양에 들어간 뒤로 성안에 자취를 감추고 두어 달을 끌어, 순안과 영유가 평양과 지척인데도 오히려 와서 침범하지 않았다. 이로써 인심이 조금 정해지고 남은 불씨를 수습하여 명나라 군사를 인도해 맞아 마침내 되찾는 공을 이루었으니, 이는 실로 하늘이요 사람의 힘이 미칠 바가 아니었다.
七月遼東副總兵祖承訓率兵五千來援報先至時余病痔苦甚臥不能起上令左相出治沿道軍食余使從事辛慶晉。啓曰。行在時任大自只有斗壽一人不可出臣已受接待唐將之。命雖病猶可自力一行。上許之初七日力疾詣。行宮拜辭蒙引對匍匐以入。啓曰一路自所串以南至定州嘉山則五千兵經過時一二日食可辦安州肅川順安三邑蕩無所儲。天兵過此宜先持三日糧以備安州以南之食若兵至平壤卽日收復則城中粟多可以接濟雖圍城累日平壤西三縣穀亦可竭力輸到軍前不至闕乏此等曲折請令在此諸臣與唐將相議𤄃狹相濟便宜施行。上曰然旣出。內賜熊膽臘藥內醫院僕龍雲者送余于城門外五里痛哭余登箭門嶺哭聲猶聞夕至所串驛吏卒逃散不見形影使軍官往探村落間得數人而至余勉諭曰。國家平日撫養汝輩用在今日何忍逃避且。天兵方至國事正急此乃汝輩效勞立功之秋也因出空册子一卷先書來見者姓名示之曰後日當以此等第功勞。啓聞論賞其不在此錄者事定一一查覈行罰不可免也旣而來者相續皆曰小人因事暫出豈敢避役願書名于册余知人心可合卽移文各處使例置考功册書功勞多少以憑轉報施行於是聞令者爭出搬運柴草架造房屋排設釜鼎數日之間凡事稍集余以爲亂離之民不可用急伹至誠曉諭未甞鞭撻一人進至定州洪宗祿盡起龜城人輸運馬豆及小米到定州嘉山者已二千餘石矣余猶以安州以後爲憂適忠淸道牙山倉稅米全一千二百石載船將向。行在到泊於定州立嵒余喜甚卽馳。啓曰遠穀適至如期似是天賛中興之運請幷取以補軍餉令守門將姜士雄馳去立嵒分運二百石定州二百石嘉山八百石於安州安州則以近賊姑令停船水中以待之宣沙浦僉使張佑成造大定江浮橋老江僉使閔繼仲造晴川江浮橋擬渡。天兵余前往安州調度時賊入平壤久不出巡察使李元翼與兵使李薲駐順安都元帥金命元在肅川余在安州
칠월에 요동 부총병 조승훈(祖承訓)이 군사 오천을 거느리고 구원하러 온다는 기별이 먼저 이르렀다.
그때 나는 치질을 앓아 괴로움이 심하여 누워 일어나지 못하였다. 임금이 좌의정에게 길을 따라 군량을 다스리라 명하시니, 내가 종사관 신경진을 시켜 아뢰게 하였다.
「행재소에 지금 있는 대신은 다만 윤두수 한 사람뿐이니 나가게 할 수 없습니다. 신이 이미 명나라 장수를 접대하라는 명을 받았으니 비록 병들었으나 오히려 스스로 힘쓸 수 있습니다.」
한 행렬을 임금이 허락하셨다. 초이렛날 병을 무릅쓰고 행궁에 나아가 하직하니 인견하심을 입어 기어서 들어가 아뢰었다.
「한 길에 소곶 이남에서 정주와 가산까지는 오천 군사가 지날 때 하루 이틀 먹을 것을 마련할 수 있으나, 안주·숙천·순안 세 고을은 쓸어낸 듯 쌓아 둔 것이 없습니다. 명나라 군사가 여기를 지날 때에는 마땅히 먼저 사흘 양식을 지녀 안주 이남의 먹을 것에 대비하게 하소서. 만일 군사가 평양에 이르러 그날로 되찾으면 성안에 곡식이 많으니 이어 댈 수 있고, 비록 성을 여러 날 에워싸더라도 평양 서쪽 세 고을의 곡식을 또한 힘을 다하여 군영 앞까지 실어 올 수 있으니 모자라는 데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곡절은 여기 있는 여러 신하로 하여금 명나라 장수와 서로 의논하여 넉넉하고 모자람을 서로 도와 편의한 대로 시행하게 하소서.」
임금이 「그렇게 하라」 하셨다. 나온 뒤에 웅담과 섣달에 지어 내리던 상비약(臘藥)을 내리셨다. 내의원 종 용운(龍雲)이라는 이가 나를 성문 밖 오 리까지 바래다주며 통곡하니, 내가 전문령에 오를 때까지 그 곡소리가 들렸다.
저녁에 소곶역에 이르니 아전과 군졸이 도망해 흩어져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군관을 시켜 마을 사이를 뒤지게 하여 몇 사람을 얻어 오매 내가 힘써 타일렀다.
「나라가 평시에 너희를 어루만져 기른 것은 오늘에 쓰려 함인데 어찌 차마 달아나 피하는가. 또 명나라 군사가 바야흐로 이르고 나랏일이 한창 급하니, 이야말로 너희가 힘을 바쳐 공을 세울 때다.」
그리고 빈 책 한 권을 내어 먼저 와서 보는 이의 이름을 적어 보이며 말하였다.
「뒷날 마땅히 이로써 공로의 등급을 매겨 아뢰어 상을 논할 것이다. 이 기록에 들지 않은 이는 일이 정해진 뒤에 하나하나 조사하여 벌을 행할 것이니 면할 수 없다.」
이윽고 오는 이가 잇달아 다들 말하였다.
「소인은 일이 있어 잠시 나갔던 것이니 어찌 감히 부역을 피하겠습니까. 원컨대 책에 이름을 적어 주소서.」
나는 인심을 모을 수 있음을 알고 곧 각처에 글을 옮겨, 으레 공을 살피는 책을 두어 공로의 많고 적음을 적어 이에 의지하여 전하여 알려 시행하게 하였다. 이에 명령을 들은 이들이 다투어 나와 땔감과 꼴을 나르고 집을 얽어 짓고 솥과 가마를 벌여 놓으니 며칠 사이에 모든 일이 조금씩 갖추어졌다. 나는 난리를 만난 백성은 급히 다룰 수 없다 여겨 다만 지성으로 타이르고 한 사람도 매질한 적이 없었다.
정주에 나아가니 홍종록이 구성 사람을 다 일으켜 실어 나른 말먹이 콩과 좁쌀로 정주와 가산에 이른 것이 이미 이천여 섬이었다. 나는 오히려 안주 이후를 걱정하였는데, 마침 충청도 아산 창고의 세미 일천이백 섬을 배에 싣고 행재소로 향하다가 정주 입암에 와 닿았다. 내가 몹시 기뻐 곧 달려가 아뢰었다.
「먼 데 곡식이 때맞추어 이르렀으니 하늘이 중흥의 운수를 도우심인 듯합니다. 청컨대 아울러 가져다 군량에 보태게 하소서.」
수문장 강사웅(姜士雄)을 시켜 입암으로 달려가 이백 섬은 정주로, 이백 섬은 가산으로, 팔백 섬은 안주로 나누어 옮기게 하였는데, 안주는 적과 가까우므로 아직 배를 물 위에 멈추어 두고 기다리게 하였다.
선사포첨사 장우성(張佑成)은 대정강에 뜬다리를 만들고 노강첨사 민계중(閔繼仲)은 청천강에 뜬다리를 만들어 명나라 군사가 건널 것에 대비하게 하였다. 나는 앞서 안주로 가서 여러 가지를 마련하였다. 그때 적이 평양에 들어간 뒤 오래 나오지 않으니, 순찰사 이원익과 병사 이빈은 순안에 머물고 도원수 김명원은 숙천에 있었으며 나는 안주에 있었다.
十九日祖總兵軍攻平壤不利而退史遊擊戰死先是祖承訓至義州史儒以其軍爲先鋒祖乃遼左勇將累與北虜戰有功是行謂倭必可取至嘉山問我人日平壤賊無乃已走耶曰不退承訓擧酒仰天祝之曰賊猶在必天使我成大功也是日自順安三更發軍進攻平壤適大雨城上無賊守兵。天兵從七星門入城內路狹多委港馬足不可展賊依險阨亂發鳥銃史遊擊中丸卽斃軍馬多死祖遂退軍賊不急追後軍陷泥潦中不能自拔者悉爲賊所害承訓引餘兵還過順安肅川夜中至安州城外立馬呼譯官朴義儉曰吾軍今日多殺賊不幸史遊擊傷死天時又不利大雨泥濘不能殱賊當添兵更進耳語汝宰相毋動浮橋亦不可撤言畢馳渡兩江駐軍於控江亭蓋承訓戰敗膽㥘恐賊追躡欲前阻二江故疾急如此余使辛從事往慰且載送糧饌承訓留控江亭二日連日夜大雨諸軍露處野中衣甲盡濕皆怨承訓已而退還遼東余恐人心動搖。啓請仍留安州以待後軍之至
열아흐렛날 조 총병의 군사가 평양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여 물러가고 사 유격이 싸우다 죽었다.
이보다 앞서 조승훈이 의주에 이르렀을 때 사유가 그 군사로 선봉이 되었다. 조승훈은 요동 왼편의 용맹한 장수로 여러 번 북쪽 오랑캐와 싸워 공이 있었으므로, 이번 걸음에 왜를 반드시 잡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가산에 이르러 우리 사람에게 물었다.
「평양의 적이 이미 달아나지는 않았는가.」
물러가지 않았다고 하니 승훈이 잔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빌었다.
「적이 아직 있으니 반드시 하늘이 나로 하여금 큰 공을 이루게 하심이다.」
이날 순안에서 삼경에 군사를 내어 나아가 평양을 쳤다. 마침 큰비가 내려 성 위에 적의 지키는 군사가 없었다. 명나라 군사가 칠성문으로 성에 들어갔는데 안의 길이 좁고 굽은 골목이 많아 말발굽을 펼 수 없었다. 적이 험하고 좁은 데를 의지하여 조총을 어지러이 쏘니 사 유격이 탄환에 맞아 곧 죽고 군사와 말이 많이 죽었다. 조승훈이 드디어 군사를 물리매 적이 급히 쫓지는 않았으나, 뒤의 군사가 진창에 빠져 스스로 헤어나지 못한 이들은 다 적에게 죽었다.
승훈이 남은 군사를 이끌고 돌아와 순안과 숙천을 지나 밤중에 안주 성 밖에 이르러 말을 세우고 역관 박의검(朴義儉)을 불러 말하였다.
「우리 군사가 오늘 적을 많이 죽였으나 불행히 사 유격이 다쳐 죽었고 하늘 때도 이롭지 못하여 큰비에 진창이 되어 적을 다 없애지 못하였다. 마땅히 군사를 더하여 다시 나아갈 것이니 너희 재상에게 일러 움직이지 말게 하고 뜬다리도 걷지 말게 하라.」
말을 마치자 달려 두 강을 건너 공강정에 군사를 머물렀다. 대개 승훈은 싸움에 져서 담이 겁을 먹어 적이 뒤쫓을까 두려워 앞에 두 강을 두려 하였으므로 이토록 급히 서두른 것이다.
내가 신 종사관을 보내어 위로하고 또 양식과 반찬을 실어 보냈다. 승훈이 공강정에 이틀을 머무는데 밤낮으로 큰비가 내려 여러 군사가 들에서 한데 지내며 옷과 갑옷이 다 젖으니 다들 승훈을 원망하였다. 이윽고 물러나 요동으로 돌아갔다. 나는 인심이 흔들릴까 두려워 그대로 안주에 머물러 뒤의 군사가 오기를 기다리기를 아뢰어 청하였다.
全羅水軍節度使李舜臣與慶尙右水使元均全羅右水使李億祺等大破賊兵于巨濟洋中初賊旣登陸均見賊勢大不敢出擊悉沉其戰船百餘艘及火炮軍器於海中獨與手下裨將李英男李雲龍等乘四船奔至昆陽海口欲下陸避賊於是水軍萬餘人皆潰英男諫曰公受。命爲水軍節度今棄軍下陸後日朝廷按罪何以自解不如請兵於全羅道與賊一戰不勝然後逃未晚也均然之使英男往舜臣請援舜臣辭以各有分界非。朝廷之命豈宜擅自越境均又使英男往請凡往返至五六不已每英男回均坐船頭望見痛哭旣而舜臣率板屋船四十艘幷約億祺到巨濟與均合兵進與賊船遇於見乃梁舜臣曰此地海狹水淺難於回旋不如佯退誘賊至海闊處相戰也均乘憤欲直前搏戰舜臣曰公不知兵如此必敗遂以旗揮其船退賊大喜爭乘之旣出隘口舜臣鳴皷一聲諸船一齊回棹擺列於海中正與賊船撞着相距數十步先是舜臣創造龜船以板鋪其上其形穹窿如龜戰士櫂夫皆在其內左右前後多載火炮縱橫出入如梭遇賊船連以大炮碎之諸船一時合攻烟熖漲天焚賊船無數有賊將在樓船高數丈上施樓櫓以紅段彩氈圍其外亦爲大炮所破賊悉赴水死其後賊連戰皆敗遂遁入釜山巨濟不復出一日方督戰流丸中舜臣左肩血流至踵舜臣不言戰罷始以刀割肉出丸深入數寸觀者色墨而舜臣談笑自若捷聞。朝廷大喜。上欲加舜臣以一品言者以爲大濫陞正憲億祺均陞嘉善先是賊將平行長到平壤投書曰日本舟師十餘萬又從西海來未知。大王龍御自此何之蓋賊本欲水陸合勢西下賴此一戰遂斷賊一臂行長雖得平壤而勢孤不敢更進國家得保全羅忠淸以及黃海平安沿海一帶調度軍食傳通號令以濟中興而遼東金復海蓋與天津等地不被震驚使。天兵從陸路來援以致卻賊者皆此一戰之功嗚呼豈非天哉舜臣因率三道舟師留屯于閑山島以遏賊西犯之路
전라수군절도사 이순신이 경상우수사 원균,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등과 더불어 거제 바다 가운데서 적병을 크게 깨뜨렸다.
처음에 적이 뭍에 오르매 원균은 적의 형세가 큰 것을 보고 감히 나가 치지 못한 채 그 싸움배 백여 척과 화포와 군기를 다 바다에 가라앉히고, 홀로 수하의 비장 이영남(李英男)·이운룡(李雲龍) 등과 더불어 네 척 배를 타고 곤양 바다 어귀로 달아나 뭍에 내려 적을 피하고자 하였다. 이에 수군 만여 인이 다 무너졌다. 이영남이 간하였다.
「공이 명을 받아 수군절도사가 되었는데 이제 군사를 버리고 뭍에 내리면 뒷날 조정이 죄를 물을 때 무엇으로 스스로 밝히겠습니까. 전라도에 군사를 청하여 적과 한번 싸워 보고, 이기지 못한 뒤에 달아나도 늦지 않습니다.」
원균이 그렇게 여겨 영남을 보내어 순신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순신은 저마다 맡은 경계가 있으니 조정의 명이 아니면 어찌 제멋대로 경계를 넘겠느냐고 사양하였다. 원균이 또 영남을 보내어 청하여 오간 것이 대여섯 번에 이르러 그치지 않았고, 영남이 돌아올 때마다 원균은 뱃머리에 앉아 바라보며 통곡하였다.
이윽고 순신이 판옥선 마흔 척을 거느리고 이억기와도 약속하여 거제에 이르러 원균과 군사를 합하여 나아가다가 견내량에서 적선과 마주쳤다. 순신이 말하였다.
「이곳은 바다가 좁고 물이 얕아 돌리기 어려우니, 거짓 물러나 적을 꾀어 바다 넓은 데 이르러 싸움만 못하다.」
원균이 분함을 타고 바로 나아가 치려 하니 순신이 말하였다.
「공이 군사를 알지 못함이 이와 같으니 반드시 패할 것이다.」
드디어 기로 그 배들을 지휘하여 물러나니 적이 크게 기뻐하여 다투어 뒤를 탔다. 좁은 어귀를 벗어나자 순신이 북을 한 번 울리매 여러 배가 일제히 노를 돌려 바다 가운데 벌여 서니, 바로 적선과 부딪쳐 서로 떨어지기가 수십 걸음이었다.
이보다 앞서 순신이 거북선을 만들었는데, 널로 그 위를 덮어 그 모양이 불룩하여 거북 같고 싸우는 군사와 노 젓는 이가 다 그 안에 있으며 좌우와 앞뒤에 화포를 많이 실었다. 베틀 북이 드나들 듯 가로세로 오가며 적선을 만나면 잇달아 큰 포로 부수었다. 여러 배가 한꺼번에 어우러져 치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넘쳐 적선을 태운 것이 수없었다. 적장이 높이 두어 길 되는 다락배에 있어 위에 누각을 얹고 붉은 비단과 채색 모직으로 그 밖을 둘렀는데 또한 큰 포에 부수어졌다. 적이 다 물에 빠져 죽었다.
그 뒤로 적이 잇달아 싸워 다 져서 드디어 부산과 거제로 달아나 들어가 다시 나오지 않았다.
하루는 바야흐로 싸움을 독려하는데 흐르는 탄환이 순신의 왼쪽 어깨에 맞아 피가 발꿈치까지 흘렀다. 순신이 말하지 않다가 싸움이 끝난 뒤에야 비로소 칼로 살을 갈라 탄환을 꺼내니 두어 치나 깊이 박혀 있었다. 보는 이는 낯빛이 검게 질렸으나 순신은 말하고 웃기를 태연히 하였다.
이긴 소식이 알려지매 조정이 크게 기뻐하였다. 임금이 순신에게 일품 벼슬을 더하려 하셨으나 말하는 이가 너무 지나치다 하여 정헌대부로 올리고 억기와 원균은 가선대부로 올렸다.
이보다 앞서 적장 평행장이 평양에 이르러 글을 던져 말하였다.
「일본의 수군 십여만이 또 서쪽 바다로 오는데, 대왕의 수레가 이제 어디로 가시려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대개 적은 본디 물과 뭍으로 세력을 합하여 서쪽으로 내려오려 하였다. 이 한 싸움에 힘입어 드디어 적의 한 팔을 끊었으므로, 행장이 비록 평양을 얻었으나 형세가 외로워 감히 다시 나아가지 못하였다. 나라가 전라도와 충청도를 보전하고 황해도와 평안도 바닷가 한 자락까지 지켜 군량을 마련하고 호령을 전하여 중흥을 이룰 수 있었으며, 요동의 금주·복주·해주·개주와 천진 등지가 놀라는 일을 입지 않아 명나라 군사가 뭍길로 와서 구원하여 적을 물리치게 된 것이 다 이 한 싸움의 공이다. 아아, 어찌 하늘이 아니겠는가.
순신이 이어 세 도의 수군을 거느리고 한산도에 머물러 진을 쳐 적이 서쪽으로 침범하는 길을 막았다.
前義禁府都事曹好益募兵江東討賊好益昌原人有志行爲人所誣全家徙江東貧困敎授生徒以得食幾二十餘年厲操愈堅。車駕至平壤赦其罪召拜義禁府都事及平壤被圍好益往江東募兵欲救平壤旣而平壤陷軍民皆潰好益還赴。行在余遇於良策驛語之曰。天兵將至子母往義州可還江東仍行召募與。天兵會平壤以助軍勢好益從之余遂狀。啓其由爲起兵文移授好益且助以軍器好益去聚兵得數百人出陣祥原邀賊多斬獲好益書生不閑弓馬徒以忠義激厲士心冬至日率其士卒望。行在四拜終夜痛哭一軍爲之流涕
전 의금부도사 조호익(曺好益)이 강동에서 군사를 모아 적을 쳤다.
호익은 창원 사람으로 뜻과 행실이 있었는데 남에게 무고를 입어 온 집안이 강동으로 옮겨졌다. 가난하고 어려워 생도를 가르쳐 밥을 얻은 지 거의 이십여 년이었으나 지조가 더욱 굳었다. 수레가 평양에 이르렀을 때 그 죄를 용서하고 불러 의금부도사로 삼았다.
평양이 에워싸이매 호익이 강동으로 가서 군사를 모아 평양을 구하려 하였는데, 이윽고 평양이 함락되고 군사와 백성이 다 무너지매 호익이 행재소로 돌아왔다. 내가 양책역에서 만나 말하였다.
「명나라 군사가 장차 이를 것이니 그대는 의주로 가지 말고 강동으로 돌아가 그대로 불러 모아 명나라 군사와 평양에서 만나 군사의 기세를 도우라.」
호익이 그 말을 따랐다. 내가 드디어 그 사유를 장계하고 군사를 일으키는 공문을 만들어 호익에게 주고 또 군기를 도와주었다. 호익이 가서 군사를 모아 수백 인을 얻어 상원에 나가 진을 치고 적을 맞아 쳐서 벤 것이 많았다.
호익은 글 읽는 선비라 활과 말에 익숙하지 않았으나 다만 충의로 군사들의 마음을 격려하였다. 동짓날에 그 군사를 거느리고 행재소를 바라보며 네 번 절하고 밤새 통곡하니 온 군사가 이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
賊兵犯全羅道金堤郡守鄭湛海南縣監邊應井力戰死之時賊從慶尙右道入全州界湛應非等禦之於熊嶺爲木栅橫斷山路督將士終日大戰射殺賊兵無算賊欲退會日暮矢盡賊更進攻之二人俱死軍遂潰明日賊至全州官吏欲走州人前典籍李廷鸞入城倡吏民固守時賊精銳多死於熊嶺氣已索監司李洸又設疑兵於城外晝則多張旗幟夜則列炬滿山賊到城下環視數周不敢攻而去悉聚熊嶺戰死者屍埋路邊作數大塜立木其上書曰弔期鮮國忠肝義膽蓋嘉其力戰也由是全羅一道獨全
적병이 전라도를 침범하니 김제군수 정담(鄭湛)과 해남현감 변응정(邊應井)이 힘껏 싸우다 죽었다.
그때 적이 경상우도에서 전주 지경으로 들어오니 정담과 변응정 등이 웅령에서 막았다. 나무 목책을 만들어 산길을 가로막고 장수와 군사를 독려하여 종일 크게 싸워 적병을 쏘아 죽인 것이 수없었다. 적이 물러가려 하였는데 마침 날이 저물고 화살이 다하였다. 적이 다시 나아가 치니 두 사람이 다 죽고 군사가 드디어 무너졌다.
이튿날 적이 전주에 이르니 관리들이 달아나려 하였다. 전주 사람 전 전적 이정란(李廷鸞)이 성에 들어가 아전과 백성을 이끌어 굳게 지켰다. 그때 적의 정예가 웅령에서 많이 죽어 기운이 이미 다하였고, 감사 이광이 또 성 밖에 헛군사를 벌여 놓아 낮에는 기치를 많이 벌이고 밤에는 횃불을 산에 가득 늘어놓았다. 적이 성 아래 이르러 몇 바퀴 둘러보고 감히 치지 못하고 갔다.
웅령에서 싸우다 죽은 이들의 주검을 다 모아 길가에 묻어 큰 무덤 몇을 만들고 그 위에 나무를 세워 이렇게 썼다.
「조선국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넋을 조상한다.」
대개 그 힘껏 싸움을 가상히 여긴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전라도 한 도가 홀로 온전하였다.
八月初一日巡察使李元翼巡邊使李薲等率兵進攻平壤不利而退時元翼與薲將數千人往順安別將金應瑞等率龍岡三和甑山江西四邑之軍作二十餘屯在平壤之西金億秋率水軍在大同江下流以爲掎角之勢是日元翼等從平壤城北進兵遇賊先鋒射中二十餘賊旣而賊大至軍士驚潰江邊勇力之士多折傷遂還屯順安
팔월 초하룻날 순찰사 이원익과 순변사 이빈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평양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여 물러났다.
그때 원익과 이빈이 군사 수천을 거느리고 순안으로 가고, 별장 김응서(金應瑞) 등이 용강·삼화·증산·강서 네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십여 둔을 지어 평양 서쪽에 있었으며, 김억추(金億秋)가 수군을 거느리고 대동강 아래쪽에 있어 앞뒤로 견제하는 형세를 이루었다.
이날 원익 등이 평양성 북쪽에서 군사를 나아가게 하여 적의 선봉을 만나 이십여 적을 쏘아 맞혔다. 이윽고 적이 크게 이르매 군사가 놀라 무너지고 강변의 날래고 힘센 군사가 많이 꺾여 다쳤다. 드디어 순안으로 돌아와 진을 쳤다.
九月。天朝遊擊將軍沈惟敬來初祖承訓旣敗賊愈驕投書我軍有羣羊攻一虎之語半喩。天兵虎以自詑聲言朝夕將西下義州人皆荷擔而立惟敬本浙民石尙書以爲素諳倭情假遊擊將軍號出送旣至順安馳書倭將以聖旨責問朝鮮有何虧負於日本日本如何撞興師旅時倭變猝發且殘毒甚人人惴恐莫敢有窺其營者惟敬以黃袝褁書使家丁一人背負騎馬直馳田普通門而入倭將行長見其書卽回報求面見議事惟敬將往人皆危之多勸止者惟敬笑曰彼焉能害我也從三四家丁赴之行長平義智玄蘇等盛陳兵威出會于城北十里外降福山下我軍登大興山頭望見倭軍甚多劒㦸如雪惟敬下馬入倭陣中群倭四面圍繞疑被拘執日暮惟敬還倭衆送之甚恭翌日行長遣書馳問且曰大人在白刃中顏色不變雖日本人無以加也惟敬答之曰爾不聞唐朝有郭令公者乎單騎人回紇萬軍中曾不畏懾吾何畏爾也因與倭約曰吾歸報。聖皇當有處分以五十日爲期倭衆無得出平壤西北十里外搶掠朝鮮人母入十里內與倭鬪乃於地界立本爲禁標而我國人皆莫測
구월에 명나라 유격장군 심유경(沈惟敬)이 왔다.
처음에 조승훈이 진 뒤로 적이 더욱 교만하여 우리 군사에게 글을 던졌는데 「양 떼가 범 하나를 친다」는 말이 있었으니, 대개 명나라 군사를 양에 견주고 범으로 스스로 자랑한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장차 서쪽으로 내려가겠다고 소리치니 의주 사람들이 다 짐을 지고 섰다.
유경은 본디 절강 백성인데 석 상서가 그가 본디 왜의 실정을 안다 하여 유격장군의 이름을 빌려 내보냈다. 순안에 이르자 왜장에게 글을 달려 보내어 황제의 뜻으로 「조선이 일본에 무슨 저버린 것이 있기에 일본이 어찌하여 함부로 군사를 일으켰는가」 하고 꾸짖어 물었다.
그때 왜의 변이 갑자기 일어나고 또 모질고 독함이 심하여 사람마다 두려워 떨며 감히 그 진영을 엿보는 이가 없었다. 유경은 누런 보에 글을 싸서 집종 하나에게 등에 지우고 말을 타고 곧장 보통문으로 달려 들어갔다. 왜장 행장이 그 글을 보고 곧 회답하여 얼굴을 맞대고 일을 의논하기를 청하였다. 유경이 가려 하매 사람들이 다 위태롭게 여겨 말리는 이가 많으니 유경이 웃으며 말하였다.
「저들이 어찌 나를 해치겠는가.」
집종 서넛을 데리고 갔다. 행장과 평의지와 현소 등이 군사의 위엄을 크게 벌이고 성 북쪽 십 리 밖 강복산 아래에 나와 만났다. 우리 군사가 대흥산 마루에 올라 바라보니 왜군이 몹시 많고 칼과 창이 눈 같았다. 유경이 말에서 내려 왜의 진 가운데로 들어가니 뭇 왜가 사면으로 에워싸므로 붙잡힌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날이 저물어 유경이 돌아오는데 왜의 무리가 몹시 공손히 보내 주었다.
이튿날 행장이 글을 보내어 안부를 묻고 또 말하였다.
「대인이 흰 칼날 가운데 있으면서 낯빛이 변하지 않으니 비록 일본 사람이라도 더할 수 없습니다.」
유경이 답하였다.
「너는 당나라에 곽 영공(郭令公)이라는 이가 있어 홀로 말을 타고 회흘의 만 군사 가운데 들어가서도 일찍이 두려워하지 않았음을 듣지 못하였느냐. 내가 어찌 너를 두려워하겠느냐.」
이어 왜와 약속하였다.
「내가 돌아가 황제께 아뢰면 마땅히 처분이 있을 것이니 쉰 날로 기약을 삼는다. 왜의 무리는 평양 서북 십 리 밖으로 나와 노략질하지 말고, 조선 사람은 십 리 안에 들어가 왜와 싸우지 말라.」
이에 땅 경계에 나무를 세워 금하는 표를 삼으니 우리나라 사람은 다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京畿監司沈岱爲賊所襲死於朔寧岱爲人慷慨自雙後常憤憤奉使出入不避夷險是年秋代權徵爲京畿監司從。行朝赴任所路出安州見余于百祥樓上語國難慨然觀其意直欲親犯矢石以角賊余戒之曰古人不云乎耕當問奴君書生臨陣終非所能其處有楊州牧使高彥伯者勇力善鬪君但收拾軍兵使彥伯將之可有功愼勿自將也岱唯唯而不甚然之余又見其孤行入賊中分軍官善射者義州人張某與俱岱旣去數月間每有京畿人。啓事行朝經過安州者未甞不致書問余也余輒親問其人京畿賊勢及監司何爲對曰畿甸創殘甚他道賊曰出焚掠無乾淨地前監司及守令以下悉從深僻處躱避减去儀從微服潜行或屢遷徙不定厥居以防賊患今監司殊不畏賊每巡行先文知委如平日建旗鳴角而行余聞而甚憂之申書戒勅如前岱不變旣乃聚集軍兵悉以自隨聲言欲復京城日遣人入城中召募約爲內應城中人恐事定後以附賊獲罪連名結狀出赴監司自言能內應者日以千百數名曰聽約束曰輸軍器曰報賊情人人往來無阻其間亦有爲賊耳目來察動靜者多出沒相雜而岱信之不疑至是岱在朔寧郡賊詗知之潜波大灘夜襲之岱驚起披衣走出賊追害之軍官張姓者亦同死賊去京畿人權殯于朔寧郡中數日賊復出取其首懸於鍾樓街上積五六十日面色如生京城人哀其忠義相與率財物路守倭贖出之凾送于江華賊退後與尸身還葬故山岱靑松人字公望子大復。朝廷以岱故官之至縣監
경기감사 심대(沈岱)가 적의 습격을 받아 삭녕에서 죽었다.
심대는 사람됨이 강개하여 난리를 만난 뒤로 늘 분해하였고, 사명을 받들어 드나들 때 평탄함과 험함을 가리지 않았다. 이해 가을에 권징을 대신하여 경기감사가 되어 행재소에서 임지로 가는 길에 안주를 지나다가 백상루 위에서 나를 보았다. 나라의 어려움을 말하며 개연하였는데 그 뜻을 보니 바로 몸소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적과 겨루고자 하였다. 내가 경계하여 말하였다.
「옛사람이 이르지 않았는가, 밭 가는 일은 마땅히 종에게 물으라 하였네. 그대는 글하는 선비라 진에 임하는 것은 끝내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그곳에 양주목사 고언백이 있어 용맹하고 힘이 있으며 잘 싸우니, 그대는 다만 군사를 거두어 언백에게 거느리게 하면 공이 있을 것이다. 부디 스스로 거느리지 말라.」
심대는 예예 하였으나 그리 여기지는 않았다. 나는 또 그가 홀로 적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활 잘 쏘는 군관 의주 사람 장 아무개를 나누어 함께 가게 하였다.
심대가 간 뒤 몇 달 사이에 경기 사람으로 행조에 일을 아뢰러 안주를 지나는 이가 있을 때마다 나에게 글을 보내어 안부를 묻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나는 늘 그 사람에게 경기의 적 형세와 감사가 무엇을 하는지 친히 물었다. 대답하였다.
「경기 땅은 헐고 상함이 다른 도보다 심하여 적이 날마다 나와 불사르고 노략질하니 깨끗한 데가 없습니다. 앞서의 감사와 수령 이하는 다 깊고 후미진 곳을 좇아 숨고 거느리는 행차를 줄이고 미복으로 몰래 다니며 혹 여러 번 옮겨 거처를 정하지 않음으로써 적의 걱정을 막았는데, 지금 감사는 자못 적을 두려워하지 않아 순행할 때마다 앞서 글을 보내어 알리기를 평일처럼 하고 기를 세우고 뿔피리를 불며 다닙니다.」
내가 듣고 몹시 걱정하여 거듭 글을 보내어 앞서처럼 경계하였으나 심대는 고치지 않았다.
이윽고 군사를 모아 다 스스로 거느리고 서울을 되찾겠다고 소리치며, 날마다 사람을 성안에 들여보내어 불러 모아 안에서 응하기를 약속하였다. 성안 사람들은 일이 정해진 뒤에 적에게 붙었다 하여 죄를 얻을까 두려워 이름을 잇대어 문서를 맺어 감사에게 나아가, 스스로 안에서 응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가 날마다 천백으로 헤아렸다. 혹은 약속을 듣겠다 하고 혹은 군기를 실어 오겠다 하고 혹은 적의 실정을 알리겠다 하여 사람마다 오가는 데 막힘이 없었는데, 그 사이에 적의 귀와 눈이 되어 움직임을 살피러 온 이도 있어 많이 드나들며 서로 섞였다. 그런데도 심대는 이를 믿고 의심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심대가 삭녕군에 있었는데 적이 엿보아 알고 가만히 대탄을 건너 밤에 습격하였다. 심대가 놀라 일어나 옷을 걸치고 달아나 나가니 적이 쫓아와 해쳤고, 장씨 성의 군관도 함께 죽었다.
적이 간 뒤에 경기 사람들이 삭녕군 안에 임시로 묻었는데, 며칠 뒤 적이 다시 나와 그 머리를 가져다 종루 거리에 매달았다. 오륙십 일이 쌓이도록 낯빛이 산 사람 같으니 서울 사람들이 그 충의를 슬퍼하여 서로 재물을 모아 지키는 왜에게 주고 사서 내어 함에 담아 강화로 보냈다. 적이 물러간 뒤에 주검과 함께 고향 산에 돌려 묻었다.
심대는 청송 사람으로 자는 공망(公望)이요 아들 대복(大復)은 조정이 심대의 일로 벼슬을 주어 현감에 이르렀다.
江原道助防將元豪擊賊于龜尾浦殲之又戰于春川兵敗而死時賊大陣在忠州及原州連營達于京都其在忠州者取路竹山陽智龍仁往來其在原州者欲從砥平楊根楊州廣州抵京元豪擊殲于驪州龜尾浦利川府使邊應星又船載射手乘霧邀賊於驪州之馬灘殺賊頗多由是原州賊路遂斷悉由忠州之路而利川驪州楊根砥平等邑之民見遺於賊鋒者人以爲豪之功也巡察使柳永吉又催豪擊春川賊豪旣勝頗有輕敵之意賊知豪將至設伏以待豪不知而進伏發遂爲所殺於是江原一道無禦賊者
강원도 조방장 원호가 구미포에서 적을 쳐 무찌르고, 또 춘천에서 싸우다가 군사가 져서 죽었다.
그때 적의 큰 진이 충주와 원주에 있어 진영이 이어져 서울에 닿았다. 충주에 있는 적은 죽산·양지·용인으로 길을 잡아 오가고, 원주에 있는 적은 지평·양근·양주·광주를 거쳐 서울에 이르려 하였다. 원호가 여주 구미포에서 쳐서 무찌르고, 이천부사 변응성(邊應星)이 또 사수를 배에 싣고 안개를 타 여주 마탄에서 적을 맞아 쳐 적을 자못 많이 죽였다. 이로 말미암아 원주 쪽 적의 길이 드디어 끊겨 다 충주 길로만 다녔으니, 이천·여주·양근·지평 등 고을의 백성이 적의 칼끝에서 남겨진 것을 사람들은 원호의 공이라 하였다.
순찰사 유영길이 또 원호를 재촉하여 춘천의 적을 치게 하였다. 원호는 이미 이긴 뒤라 자못 적을 가볍게 여기는 뜻이 있었다. 적이 원호가 장차 오는 줄 알고 복병을 두어 기다렸는데 원호가 알지 못하고 나아가다가 복병이 일어나 드디어 죽임을 당하였다. 이에 강원도 한 도에 적을 막을 이가 없게 되었다.
訓鍊副奉事權應銖鄭大任等以鄉兵擊永川賊破之遂復永川應銖永川人有膽勇與大任率鄕兵千餘人圍賊于永川軍士畏賊不進應銖斬數人士卒爭奮踰城而入與賊巷擊賊不勝奔入倉中或上明遠樓我軍以火攻之悉燒死臭聞數里餘賊數十遁歸慶州自是新寧義興義城安東等處賊皆聚一路而左道郡邑得保永川一戰之功也
훈련부봉사 권응수(權應銖)와 정대임(鄭大任) 등이 고을 군사로 영천의 적을 쳐서 깨뜨리고 드디어 영천을 되찾았다.
응수는 영천 사람으로 담력과 용맹이 있었다. 대임과 더불어 고을 군사 천여 인을 거느리고 영천에서 적을 에워쌌는데 군사들이 적을 두려워하여 나아가지 않으니, 응수가 몇 사람을 목 베매 군사들이 다투어 떨쳐 성을 넘어 들어가 적과 골목에서 쳤다. 적이 이기지 못하고 창고 안으로 달아나 들어가거나 혹 명원루에 올랐다. 우리 군사가 불로 치니 다 타 죽어 냄새가 몇 리까지 풍겼다. 남은 적 수십이 경주로 달아나 돌아갔다.
이로부터 신녕·의흥·의성·안동 등지의 적이 다 한 길로 모였고, 좌도의 고을들이 보전될 수 있었으니 영천 한 싸움의 공이다.
左兵使朴晋收復慶州晋初自密陽奔入山中。朝廷以前兵使李珏棄城逃走卽其所在誅之以晉代爲兵使時賊兵充滿。行朝聲聞不通南方已久人心摇動不知所出及聞晋爲兵使於是散民稍集而守令往往從山谷中復出莅事始知有。朝廷矣及權應銖復永川晋率左道兵萬餘進薄慶州城下賊潜出北門掩軍後晋奔還安康夜又使人潜伏城下發飛擊震天雷入城中墮於客舍庭中賊不曉其制爭聚觀之相與推轉而諦視之俄而炮自中而發聲震天地鐵片星碎中仆卽斃者三十餘人未中者亦顚仆良久而起莫不驚懼不測其制皆以爲神明日遂擧衆葉城遁歸西生浦晋遂入慶州得餘穀萬餘石事聞陞晋嘉善應銖通政大任醴泉郡守震天雷飛擊古無其制有軍器寺火炮匠李長孫者創出取震天雷以大碗口發之能飛至五六百步墜地良久火自內發賊最畏此物
좌병사 박진(朴晉)이 경주를 되찾았다.
박진은 처음에 밀양에서 산속으로 달아나 들어갔다. 조정이 앞서의 병사 이각이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하여 곧 그 있는 데서 목 베고 박진으로 대신 병사를 삼았다. 그때 적병이 가득 차 행조와 남쪽의 소식이 통하지 않은 지 이미 오래라 인심이 흔들려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박진이 병사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이에 흩어졌던 백성이 조금씩 모이고 수령들도 이따금 산골짜기에서 다시 나와 일을 보니, 비로소 조정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권응수가 영천을 되찾자 박진이 좌도 군사 만여를 거느리고 나아가 경주 성 아래에 다가갔다. 적이 가만히 북문으로 나와 군사 뒤를 엄습하매 박진이 안강으로 달아나 돌아왔다. 밤에 또 사람을 시켜 성 아래에 가만히 엎드렸다가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쏘아 성안에 들여보내니 객사 뜰 가운데 떨어졌다. 적이 그 만든 법을 알지 못하여 다투어 모여 구경하며 서로 굴려 자세히 보았는데, 이윽고 포탄이 안에서 터져 소리가 하늘과 땅을 흔들고 쇳조각이 별처럼 부서졌다. 맞아 쓰러져 곧 죽은 이가 삼십여 인이요 맞지 않은 이도 넘어졌다가 한참 만에 일어났으니, 놀라고 두려워하며 그 만든 법을 헤아리지 못하여 다들 신기하다 하였다.
이튿날 드디어 무리를 들어 성을 버리고 서생포로 달아나 돌아가니 박진이 드디어 경주에 들어가 남은 곡식 만여 섬을 얻었다. 일이 알려져 박진은 가선대부로, 응수는 통정대부로 오르고 대임은 예천군수가 되었다.
진천뢰는 예부터 그 만든 법이 없었는데, 군기시 화포장 이장손(李長孫)이라는 이가 처음 만들어 내었다. 진천뢰를 대완구로 쏘면 능히 오륙백 걸음을 날아가 땅에 떨어졌다가 한참 뒤에 불이 안에서 일어나니 적이 이 물건을 가장 두려워하였다.
時各道起義兵討賊者甚衆在全羅道者前判决事金千鎰僉知高敬命前寧海府使崔慶會千鎰宇士重率兵先至京畿。朝廷嘉之賜其軍號曰倡義已而不能軍入江華敬命字而順孟英之子有文才亦率鄕兵移檄郡縣討賊與賊職敗死其子從厚代領其衆名曰復讎軍慶會後爲慶尙右兵使死於晋州其在慶尙道者玄風人郭再祐高靈人前佐郞金沔陜川人前掌令鄭仁弘禮安人前翰林金垓校書正字柳宗介草溪人李大期軍威校生張士珍再祐越之子頗有才略累與賊戰賊憚之固守鼎津使賊不得入宜寧界人以爲再祐之功沔故武將世文之子禦賊于居昌牛脊峴累卻賊事聞擢爲右兵使病卒於軍中宗介起兵未久遇賊而死。朝廷嘉其志。贈禮曹參議士珍前後射殺賊兵甚多賊稱爲張將軍不敢入軍威界一日賊設伏誘之士珍竆追陷伏中猶大呼力戰矢盡賊擊斷士珍一臂士珍獨以一臂𡚒擊未已遂死事聞贈水軍節度使其在忠淸道者僧人靈主前提督官趙憲前淸州牧使金弘敏庶孽李山謙士人朴春茂忠州人趙德恭內禁衛趙雄淸州人李逢靈圭勇力善鬪與憲復淸州後爲賊所敗皆死雄尤勇敢能馬上立馳殺賊頗多戰死其在京畿者前司諫禹性傳前正鄭叔夏水原人崔屹高陽人進士李魯李山輝前牧使南彥經幼學金琢前正郞俞大進忠義衛李軼庶孽洪季男士人王玉季男最驍勇其餘各聚鄕里或百餘人或數十餘人以義爲名者不可勝數而無可紀之績皆遷徙日闋而已又有僧人惟政在金剛山表訓寺賊入山中寺僧皆走惟政不動賊不敢逼或合掌致敬而去余在安州移文四方使各起兵赴難文至山中惟政展佛卓上呼諸僧讀之流涕遂起僧軍西赴勤。王比至平壤衆千餘人屯平壤城東與順安軍作爲形勢又有宗室湖城監率百餘人赴。行在朝廷陞秩爲湖城都正使屯順安與大軍合勢其在北道者評事鄭文孚訓戎僉使高敬民功最多云
그때 여러 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적을 치는 이가 몹시 많았다.
전라도에 있는 이는 전 판결사 김천일(金千鎰), 첨지 고경명(高敬命), 전 영해부사 최경회(崔慶會)였다. 천일은 자가 사중(士重)인데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경기에 이르니 조정이 가상히 여겨 그 군사에 창의(倡義)라는 이름을 내렸으나, 이윽고 군사를 이루지 못하고 강화로 들어갔다. 경명은 자가 이순(而順)이요 맹영(孟英)의 아들로 글재주가 있었는데, 또한 고을 군사를 거느리고 여러 고을에 격문을 옮겨 적을 치다가 적과 싸워 져서 죽었다. 그 아들 종후(從厚)가 대신 그 무리를 거느리고 이름을 복수군(復讎軍)이라 하였다. 경회는 뒤에 경상우병사가 되어 진주에서 죽었다.
경상도에 있는 이는 현풍 사람 곽재우(郭再祐), 고령 사람 전 좌랑 김면(金沔), 합천 사람 전 장령 정인홍(鄭仁弘), 예안 사람 전 한림 김해(金垓), 교서정자 유종개(柳宗介), 초계 사람 이대기(李大期), 군위 교생 장사진(張士珍)이었다. 재우는 월(越)의 아들로 자못 재주와 꾀가 있어 여러 번 적과 싸우니 적이 그를 꺼렸다. 정진을 굳게 지켜 적이 의령 지경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으니 사람들이 재우의 공이라 하였다. 면은 옛 무장 세문(世文)의 아들인데 거창 우척현에서 적을 막아 여러 번 물리쳤다. 일이 알려져 우병사로 뽑혔으나 군중에서 병으로 죽었다. 종개는 군사를 일으킨 지 오래지 않아 적을 만나 죽으니 조정이 그 뜻을 가상히 여겨 예조참의를 주었다. 사진은 앞뒤로 적병을 쏘아 죽인 것이 몹시 많아 적이 장 장군이라 일컫고 감히 군위 지경에 들어오지 못하였다. 하루는 적이 복병을 두고 꾀니 사진이 끝까지 쫓다가 복병 가운데 빠졌는데, 오히려 크게 외치며 힘껏 싸우다 화살이 다하였다. 적이 사진의 한 팔을 쳐서 끊으니 사진이 홀로 한 팔로 떨쳐 치기를 그치지 않다가 드디어 죽었다. 일이 알려져 수군절도사를 주었다.
충청도에 있는 이는 승려 영규(靈圭), 전 제독관 조헌(趙憲), 전 청주목사 김홍민(金弘敏), 서얼 이산겸(李山謙), 선비 박춘무(朴春茂), 충주 사람 조덕공(趙德恭), 내금위 조웅(趙雄), 청주 사람 이봉(李逢)이었다. 영규는 용맹하고 힘이 있어 잘 싸웠는데 조헌과 더불어 청주를 되찾고 뒤에 적에게 패하여 다 죽었다. 조웅은 더욱 용감하여 능히 말 위에 서서 달리며 적을 자못 많이 죽였는데 싸우다 죽었다.
경기에 있는 이는 전 사간 우성전(禹性傳), 전 정 정숙하(鄭叔夏), 수원 사람 최흘(崔屹), 고양 사람 진사 이로(李魯)와 이산휘(李山輝), 전 목사 남언경(南彥經), 유학 김탁(金琢), 전 정랑 유대진(兪大進), 충의위 이질(李軼), 서얼 홍계남(洪季男), 선비 왕옥(王玉)이었다. 계남이 가장 날래고 용맹하였다.
그 나머지도 저마다 고을에서 모여 혹 백여 인, 혹 수십여 인으로 의로움을 이름 삼은 이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으나 적을 만한 자취는 없고 다 옮겨 다니며 날을 보냈을 뿐이다.
또 승려 유정(惟政)이 금강산 표훈사에 있었는데 적이 산에 들어오자 절의 승려가 다 달아났으나 유정은 움직이지 않으니 적이 감히 가까이하지 못하고 혹 손을 모아 공경을 표하고 갔다. 내가 안주에 있으면서 사방에 글을 옮겨 저마다 군사를 일으켜 어려움에 나아오게 하였는데, 글이 산속에 이르매 유정이 부처의 탁자 위에 펴 놓고 여러 승려를 불러 읽으며 눈물을 흘렸다. 드디어 승군을 일으켜 서쪽으로 나아가 임금을 도우니 평양에 이를 무렵에는 무리가 천여 인이었다. 평양성 동쪽에 진을 쳐 순안의 군사와 더불어 형세를 이루었다.
또 종실 호성감(湖城監)이 백여 인을 거느리고 행재소에 나아오니 조정이 품계를 올려 호성도정으로 삼고 순안에 진을 쳐 큰 군사와 세력을 합하게 하였다.
북도에 있는 이는 평사 정문부(鄭文孚)와 훈융첨사 고경민(高敬民)의 공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以李鎰爲巡邊使。召李薲還。行在鎰初守江灘平壤旣陷渡江而南入黃海道從安岳至海州又自海州至江原道伊川從。世子募得兵數百聞賊入平壤久不出而。天兵將至遂還平壤結陣于林原坪在平壤東北十餘里與義兵將高忠卿等連勢頗有斬獲而李薲在順安每進兵輒北撫軍司從官皆欲以鎰代薲元帥金命元獨主李薲與撫軍司論議不協頗有相激之端。朝廷使余往順安軍中使之鎭定調輯旣而朝議皆言鎰勝薲又聞。天兵將出恐薲不勝任遂以鎰代之朴名賢代領鎰軍而薲還。行在
이일을 순변사로 삼고 이빈을 불러 행재소로 돌아오게 하였다.
이일은 처음에 강여울을 지켰는데 평양이 함락되자 강을 건너 남쪽으로 황해도에 들어가 안악에서 해주에 이르고, 또 해주에서 강원도 이천에 이르러 세자를 따라 군사 수백을 모아 얻었다. 적이 평양에 들어간 뒤 오래 나오지 않고 명나라 군사가 장차 이른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평양으로 돌아와 임원평에 진을 쳤으니 평양 동북 십여 리에 있는 곳이다. 의병장 고충경(高忠卿) 등과 세력을 이어 자못 베어 얻은 것이 있었다.
한편 이빈은 순안에 있으면서 군사를 나아가게 할 때마다 문득 졌으므로, 무군사의 종관들이 다 이일로 이빈을 대신하게 하려 하였다. 원수 김명원만이 홀로 이빈을 주장하여 무군사와 의논이 맞지 않아 자못 서로 부딪치는 실마리가 있었다. 조정이 나를 순안 군중으로 보내어 진정시키고 고르게 하였다. 이윽고 조정의 의논이 다 이일이 이빈보다 낫다 하고, 또 명나라 군사가 장차 나온다는 말을 들어 이빈이 소임을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워 드디어 이일로 대신하게 하고, 박명현(朴名賢)이 이일의 군사를 대신 거느리고 이빈은 행재소로 돌아왔다.
獲賊諜金順良余自安州遣軍官成男持傳命密約進取事子水軍將金億秋時十二月初二日也戒曰六日內回繳過期不繳追成男詰之成男云已使江西軍人金順良還納又捕順良來問傳令安在其人故作迷罔狀言辭流遁成男曰此人持傳令出數日還軍中牽一牛來與同伴屠食人問牛何來順良答曰吾牛而寄養於族人家故還取耳今聞其言蹤跡可疑余始令栲掠而嚴鞫之乃吐實曰小人爲賊間其日受傳令及秘密公文直入平壤示賊賊將置傳令案上公文則見卽扯裂賞一牛同爲間者徐漢龍賞紬五疋約更探外事期十五日來報故聽出矣余問爲間者獨汝乎更有幾人對曰凡四十餘輩每散出順安江西諸陣以至肅川安州義州無不貫穿行走隨事輒報余大駭卽狀。啓又按名急通諸陣捕之或得或逸斬順良於城外不久。天兵至而賊不知蓋其類駭散故耳玆亦事機之偶然者莫非天也
적의 첩자 김순량(金順良)을 잡았다.
내가 안주에서 군관 성남(成男)을 보내어 전령을 가지고 수군장 김억추에게 나아가 칠 일을 은밀히 약속하게 하였으니, 때는 십이월 초이틀이었다. 경계하여 말하였다.
「엿새 안에 전령을 도로 바치라. 기한이 지나 바치지 않으면 죄를 물을 것이다.」
기한이 지나도록 바치지 않으므로 성남을 꾸짖어 물으니 성남이 말하였다.
「이미 강서 군인 김순량을 시켜 도로 바치게 하였습니다.」
또 순량을 잡아 와서 전령이 어디 있느냐 물으니 그 사람이 짐짓 어리둥절한 모양을 지으며 말이 이리저리 흘렀다. 성남이 말하였다.
「이 사람이 전령을 가지고 나간 지 며칠 만에 군중으로 돌아오면서 소 한 마리를 끌고 와 동무들과 잡아먹었습니다. 사람들이 소가 어디서 났느냐 물으니 순량이 『내 소를 겨레붙이 집에 맡겨 길렀으므로 도로 찾아온 것이다』 하였는데, 이제 그 말을 들으니 자취가 의심스럽습니다.」
내가 비로소 매를 때려 엄히 국문하게 하니 이에 사실을 토하였다.
「소인은 적의 간자가 되었습니다. 그날 전령과 비밀 공문을 받아 바로 평양에 들어가 적에게 보였습니다. 적장이 전령은 책상 위에 두고 공문은 보는 즉시 찢어 버리고 소 한 마리를 상으로 주었으며, 함께 간자가 된 서한룡(徐漢龍)에게는 명주 다섯 필을 상으로 주었습니다. 다시 바깥일을 엿보아 보름날 와서 알리기로 기약하였으므로 놓아주어 나왔습니다.」
내가 물었다.
「간자가 된 이가 너뿐이냐, 다시 몇 사람이 있느냐.」
대답하였다.
「모두 사십여 무리인데, 늘 순안과 강서의 여러 진에 흩어져 나가고 숙천·안주·의주에 이르기까지 꿰뚫어 다니지 않는 데가 없어 일이 있을 때마다 문득 알립니다.」
내가 크게 놀라 곧 장계하고 또 이름을 살펴 여러 진에 급히 알려 잡게 하니 혹 잡고 혹 놓쳤다. 순량은 성 밖에서 목을 베었다.
오래지 않아 명나라 군사가 이르렀는데 적이 알지 못하였으니, 대개 그 무리가 놀라 흩어진 까닭이다. 이 또한 일의 기틀이 우연히 맞은 것이니 하늘이 아닌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