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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적이 달아난 형편을 아뢰다平壤賊遁形止狀

징비록 懲毖錄 · 류성룡(柳成龍) · 1633년 간행 (임진왜란 뒤 지음) · 단락 1 · 한자 418자 · 낭독 3.2분

징비록 권9 진사록 임진왜란이 끝난 뒤 영의정 류성룡이 제 눈으로 본 것을 적어 남긴 기록. 「지난 일을 징계하여 뒷근심을 삼간다」는 뜻으로 이름을 붙였다. 전쟁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조정이 무엇을 놓쳤는지를 변명 없이 적었다. 이순신을 천거한 일, 명나라 군사와의 실랑이, 백성이 겪은 참상이 그대로 실렸다.

卽見都元帥金命元傳通平壤入窟之賊全數逃遁兵使及。天兵次第進去都巡察使李元翼馳報內夜中倭人自土窟全數逃去。天將曉來始覺甚怒我軍不爲候望而亦未卽發軍追逐午初始爲發軍出去當初我軍在城下兵使則結陣於牡丹峯之北左防禦使之軍在林原坪右防禦使之軍在含毬門外而中和祥原諸陣及曹好益之軍結陣於大同江越邊四面合勢中間李鎰因唐將之令與左右防禦使俱在含毬門外八日之戰先自含毬門入與賊相戰賊奔北我軍進至玄福站唐兵自七星門密德而下驅出我軍便不得在於城中李鎰之軍則有唐將一人率軍士四人監制進退而旣無譯官語言不得相通進退之際少違其意輙以劔背歐打使不得任意故我軍凡有所獲亦爲被奪云云但軍中之事制在主將不可全聽唐將號令而不爲指揮李鎰雖退陣於普通門外而若留防禦使一軍在詠歸樓近處遮遏南下之賊則不至於全然無獲而處置未免踈濶使籠中之兎得尋生路其爲痛心莫此爲甚黃海一路糧餉接濟事臣已屢爲移文本道且令傳通於京畿江原道官軍義兵使之紏合兵馬合勢勦捕而別無體察他道之命未敢擅便指揮只待。朝延處置

곧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의 통문을 보니, 평양 토굴에 든 적이 모두 달아나 병사와 명나라 군사가 차례로 나아갔다 합니다.

도순찰사 이원익(李元翼)의 급한 보고에는, 밤중에 왜인이 토굴에서 모두 달아났는데 명나라 장수가 새벽에야 비로소 알고 우리 군사가 망보지 않은 것을 몹시 성내었으며, 또한 곧 군사를 내어 뒤쫓지 못하고 낮이 되어서야 비로소 군사를 내어 나갔다 하였습니다.

처음에 우리 군사가 성 아래 있을 때 병사는 모란봉 북쪽에 진을 치고, 좌방어사의 군사는 임원평에 있고, 우방어사의 군사는 함구문 밖에 있었으며, 중화·상원의 여러 진과 조호익(曺好益)의 군사는 대동강 건너편에 진을 쳐 사면으로 힘을 합하였습니다. 그 사이 이일(李鎰)은 명나라 장수의 영을 따라 좌·우방어사와 함께 함구문 밖에 있었는데, 여드렛날 싸움에 먼저 함구문으로 들어가 적과 싸우니 적이 달아났습니다. 우리 군사가 현복참(玄福站)까지 나아갔는데 명나라 군사가 칠성문과 밀덕(密德)에서 내려와 우리 군사를 몰아내어 성 안에 있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일의 군사에는 명나라 장수 하나가 군사 넷을 거느리고 나아가고 물러남을 감독하였는데, 역관이 없어 말이 서로 통하지 않아 나아가고 물러날 즈음 그 뜻에 조금만 어긋나도 곧 칼등으로 때려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군사가 얻은 것이 있어도 다 빼앗겼다 합니다.

다만 군중의 일은 주장(主將)에게 달렸으니 명나라 장수의 호령만 온전히 좇아 지휘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이일이 비록 보통문 밖으로 물러나 진을 쳤더라도, 만일 방어사의 한 군사를 영귀루(詠歸樓) 가까운 곳에 두어 남쪽으로 내려가는 적을 막았더라면 아주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조치가 허술함을 면하지 못하여 우리 안의 토끼가 살길을 찾게 하였으니 마음 아픔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황해 한 길의 군량 대는 일은 신이 이미 그 도에 여러 번 공문을 보냈고, 또 경기·강원도의 관군과 의병에게 알려 군마를 모아 힘을 합쳐 잡아 없애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도를 체찰하라는 명이 따로 없어 감히 마음대로 지휘하지 못하고 다만 조정의 조치를 기다립니다.

협주 1

저본은 朝延이나 朝廷의 잘못으로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