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보의 한평생東國李相國文集年譜
戊子
무자년.
公生於是年十二月十六日癸卯。諱奎報。字春卿。黃驪縣人也。考諱允綏官至戶部郞中。母金氏。金壤郡人。考諱仲權。後改施政。中古名儒也。擢高第。官至蔚珍縣尉。公始生三月。惡瘇滿身。衆藥不理。嚴君憤之。詣松岳祠宇。擲筴卜生死。曰生。問藥理與否。曰勿藥理。自是不復傅藥。皮皆爛。未辨面目。乳嫗常以白麪鋪兩臂。然後抱持之。一日。乳嫗抱出門外。有一老父過曰。此兒千金之子。何棄之如此。宜善護養。乳嫗走白嚴君。君疑其神人。使人追之。以路有三歧。遣三人追之。皆不見而還。始諱仁底。己酉歲。將赴司馬試。夢有人類村甿。皆着緇布衣。群飮堂上者。旁人曰。此二十八宿也。公驚悚再拜。問今年試席捷否。有一人指一人曰。彼奎星乃知之。公卽就問。未及聞其言而寤。恨未終其夢。俄復夢。其人來報曰。子必占狀元。勿慮也。此天機。但莫洩耳。因改今名赴試。果中第一。
공은 이해 십이월 십육일 계묘일에 났다. 이름은 규보(奎報), 자는 춘경(春卿)이며 황려현(黃驪縣) 사람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윤수(允綏)로 벼슬이 호부낭중에 이르렀다. 어머니는 김씨로 금양군(金壤郡) 사람이다. 그 아버지의 이름은 중권(仲權)인데 뒤에 시정(施政)으로 고쳤다. 가까운 옛적의 이름난 선비로 높은 등수로 급제하여 벼슬이 울진현위에 이르렀다.
공이 난 지 석 달 만에 모진 종기가 온몸에 돋아 온갖 약으로도 낫지 않았다. 아버지가 애가 타서 송악(松岳) 사당에 나아가 산가지를 던져 살고 죽음을 점치니 산다고 하였다. 약으로 나을지를 물으니 약을 쓰지 말아야 낫는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다시 약을 붙이지 않았다. 살갗이 다 헐어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젖어미는 늘 두 팔에 밀가루를 펴고서야 안았다.
하루는 젖어미가 안고 문밖에 나갔는데 한 늙은이가 지나며 말하였다. 「이 아이는 천금 같은 아들이다. 어찌 이렇게 버려 두는가. 잘 보살펴 길러야 한다.」 젖어미가 달려가 아버지께 아뢰니 아버지는 신인(神人)이 아닌가 하여 사람을 시켜 뒤쫓게 하였다. 길이 세 갈래여서 세 사람을 보내 쫓게 하였으나 모두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처음 이름은 인저(仁底)였다. 기유년에 사마시에 나아가려 할 때 꿈을 꾸었다. 시골 백성 같은 이들이 모두 검은 베옷을 입고 마루 위에서 무리 지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곁의 사람이 말하였다. 「이들은 스물여덟 별자리다.」 공이 놀라고 두려워 두 번 절하고 올해 시험에 붙을지를 물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저 규성(奎星)이 그것을 안다.」 공이 곧 나아가 물었으나 그 말을 듣기 전에 깨니 꿈을 끝까지 꾸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이윽고 다시 꿈을 꾸니 그 사람이 와서 알렸다. 「그대는 반드시 장원을 차지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 이는 하늘의 기틀이니 다만 새어 나가게 하지 말라.」 그래서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시험에 나아가 과연 첫째로 붙었다.
己丑
기축년.
庚寅
경인년.
辛卯
신묘년.
是年。嚴君出倅成州。隨之任。
이해에 아버지가 성주(成州) 원으로 나가니 따라서 임지로 갔다.
壬辰
임진년.
협주 1
大金大定十二年
대금(大金) 대정(大定) 십이년이다.
癸巳
계사년.
협주 1
大定十三年
대정 십삼년이다.
甲午
갑오년.
협주 1
大定十四年
대정 십사년이다.
是年。嚴君以內侍被召。隨至京師。
이해에 아버지가 내시로 부름을 받으니 따라서 서울에 이르렀다.
乙未
을미년.
협주 1
大定十五年
대정 십오년이다.
丙申
병신년.
협주 1
大定十六年
대정 십육년이다.
丁酉
정유년.
협주 1
大定十七年
대정 십칠년이다.
戊戌公年十一
무술년. 공의 나이 열한 살.
협주 1
大定十八年
대정 십팔년이다.
是年。叔父直門下省李富誇於省郞曰。吾猶子年可若干。能屬文。召試之可乎。諸郞欣然使迎之。命爲聯句。時方受外郡貢紙。以紙字占之。公應聲唱曰。紙路長行毛學士。諸郞手書之。又令爲對。卽曰。盃心常在麴先生。郞皆嘆伏。號奇童。慰勉遣之。
이해에 작은아버지인 직문하성 이부(李富)가 성의 낭관들에게 자랑하며 말하였다. 「내 조카가 나이는 얼마 되지 않으나 글을 지을 줄 안다. 불러 시험해 보면 어떻겠는가.」 낭관들이 기꺼이 맞아 오게 하고 연구(聯句)를 짓게 하였다. 그때 마침 바깥 고을에서 바친 종이를 받고 있던 터라 「지(紙)」 자를 운으로 집었다. 공이 소리에 응하여 읊었다. 「종이 길로 길이 가는 모학사(毛學士)여.」 낭관들이 손수 받아 적고 또 대구를 짓게 하니 곧 읊었다. 「술잔 속에 늘 있는 국선생(麴先生)이라.」 낭관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기동(奇童)이라 부르고 위로하고 북돋아 보냈다.
己亥
기해년.
협주 1
大定十九年
대정 십구년이다.
庚子
경자년.
협주 1
大定二十年
대정 이십년이다.
辛丑公年十四
신축년. 공의 나이 열네 살.
협주 1
大定二十一年
대정 이십일년이다.
是年。始籍文憲公徒誠明齋肄業。每夏課。先達輩會諸生。刻燭占韻賦詩。名曰急作。公連中榜頭。諸儒始奇之。
이해에 처음으로 문헌공도(文憲公徒)의 성명재(誠明齋)에 이름을 올려 공부하였다. 여름 공부 때마다 먼저 급제한 이들이 학생들을 모아 놓고 초에 금을 그어 시간을 재며 운을 집어 시를 짓게 하였는데 이를 급작(急作)이라 하였다. 공이 잇달아 첫머리에 뽑히니 여러 선비가 비로소 기이하게 여겼다.
壬寅公年十五
임인년. 공의 나이 열다섯 살.
협주 1
大定二十二年
대정 이십이년이다.
是年六月。又於夏課急作。適有齋中拜翰林者。以內直玉堂爲題占韻。公詩曰。獨直偏知殿閣涼。金蓮花燭炤華堂。露凝仙掌驚秋冷。月透紗窓信夜長。七寶床前宮漏永。九華帳裏御爐香。詞頭草罷銀河曙。喜見高天瑞日光。先達咸淳等皆嘆賞不已。升爲第一一等唯置公。示其異也。
이해 유월 여름 공부의 급작에서, 마침 재 안에 한림이 된 이가 있어 「옥당에 홀로 숙직하다」를 제목으로 삼고 운을 집었다. 공의 시는 이러하였다.
홀로 숙직하니 전각의 서늘함을 더욱 알겠고 금빛 연꽃 등촉이 화려한 집을 비춘다 이슬이 선인의 손바닥에 엉기니 가을 추위에 놀라고 달이 비단 창을 뚫으니 밤이 긴 줄을 알겠다 칠보 평상 앞에 궁궐 물시계는 길고 구화 휘장 안에 임금의 향로가 향기롭다 조서의 첫머리를 초잡아 마치니 은하수가 밝아 오고 높은 하늘에 상서로운 햇빛을 기쁘게 본다
먼저 급제한 함순(咸淳) 들이 모두 감탄하여 마지않았다. 첫째 등급으로 올리되 그 등급에 공만을 두었으니 남다름을 보인 것이다.
협주 1
此詩少時所作。不載集中。
이 시는 어릴 때 지은 것이라 문집에는 싣지 않았다.
癸卯公年十六
계묘년. 공의 나이 열여섯 살.
협주 1
大定二十三年
대정 이십삼년이다.
春。嚴君出守水州。公留赴司馬試不捷。秋。之水州覲省。
봄에 아버지가 수주(水州) 원으로 나갔다. 공은 남아 사마시에 나아갔으나 붙지 못하였다. 가을에 수주로 가서 부모를 뵈었다.
甲辰公年十七
갑진년. 공의 나이 열일곱 살.
협주 1
大定二十四年
대정 이십사년이다.
乙巳公年十八
을사년. 공의 나이 열여덟 살.
협주 1
大定二十五年
대정 이십오년이다.
春。自水州至。遂赴司馬試不捷。秋還。
봄에 수주에서 올라와 사마시에 나아갔으나 붙지 못하였다. 가을에 돌아갔다.
丙午公年十九
병오년. 공의 나이 열아홉 살.
협주 1
大定二十六年
대정 이십육년이다.
春。嚴君見代。隨至京師。
봄에 아버지가 갈리니 따라서 서울에 이르렀다.
丁未公年二十
정미년. 공의 나이 스무 살.
협주 1
大定二十七年
대정 이십칠년이다.
是年春。又赴司馬試不捷。公自四五年來。使酒放曠不自檢。唯以風月爲事。略不習科擧之文。故連赴試不中。
이해 봄에 또 사마시에 나아갔으나 붙지 못하였다. 공은 너덧 해 전부터 술에 몸을 맡겨 거리낌 없이 굴며 스스로를 단속하지 않고 오직 시 짓기를 일로 삼아 과거 글은 조금도 익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잇달아 시험에 나아가고도 붙지 못하였다.
戊申公年二十一
무신년. 공의 나이 스물한 살.
협주 1
大定二十八年
대정 이십팔년이다.
己酉公年二十二
기유년. 공의 나이 스물두 살.
협주 1
大定二十九年
대정 이십구년이다.
是年春。擧司馬試。中第一。以十韻詩賦之。其題。先王制軒冕。著貴賤不求美。公破題云。太古無軒冕。誰分貴賤流。制之然後著。美也不曾求。又一句云。始造聞黃帝。徒行豈孔丘。座主柳公嗟賞不已。遂擢第一。
이해 봄에 사마시에 응시하여 첫째로 붙었다. 십운시로 지었는데 그 제목은 「선왕이 수레와 면류관을 만들어 귀하고 천함을 드러내되 아름다움을 구하지 않았다」였다. 공이 첫머리를 떼어 읊었다.
아득한 옛날에는 수레와 면류관이 없었으니 누가 귀한 무리와 천한 무리를 갈랐으랴 이를 만든 뒤에야 드러났으니 아름다움은 일찍이 구한 바가 아니었네
또 한 구절은 이러하였다.
처음 만든 이는 황제(黃帝)라 들었거니와 걸어서 다니기를 어찌 공구(孔丘)가 하였으랴
좌주 유공(柳公)이 감탄하여 마지않아 마침내 첫째로 뽑았다.
庚戌公年二十三
경술년. 공의 나이 스물세 살.
협주 1
大定三十年
대정 삼십년이다.
六月。赴禮部試。擢第同進士。公嫌其科劣。欲辭之。以嚴君切責。且無舊例。不得辭。因大醉。謂賀客等曰。予科第雖下。豈不是三四度陶鑄門生者乎。坐客掩口竊笑。公旣不事科擧之文。其作賦荒蕪。不合格律。又試圍內奉命承宣朴純。與座主受宣醞。次召公飮以一觥。卽大醉亂書。欲裂棄之。傍座孫得之奪而呈之。其詩題。戴君若鼇冠靈山。公詩第四句云。壯似支三聳。憂无釣六逃。第五句云。奉天呈屹屹。負岳出滔滔。知貢擧李諱知命愛此句。遂不擯之。
유월에 예부시에 나아가 동진사(同進士)로 뽑혔다. 공이 그 등급이 낮은 것을 싫어하여 사양하려 하였으나 아버지가 몹시 꾸짖고 또 그런 전례가 없어 사양하지 못하였다. 그러고는 크게 취하여 축하하러 온 이들에게 말하였다. 「내 과거 등수가 비록 낮으나 어찌 서너 번은 문생을 길러 낼 사람이 아니겠는가.」 자리에 있던 이들이 입을 가리고 몰래 웃었다.
공은 본디 과거 글에 힘쓰지 않았으므로 지은 부가 거칠어 격식과 운율에 맞지 않았다. 또 시험장 안에서 임금의 명을 받든 승선 박순(朴純)이 좌주와 함께 임금이 내린 술을 받고 이어 공을 불러 한 잔을 마시게 하니, 곧 크게 취하여 어지러이 써 놓고는 찢어 버리려 하였다. 곁에 앉았던 손득지(孫得之)가 빼앗아 바쳤다. 그 시의 제목은 「임금을 받듦이 자라가 신령한 산을 머리에 인 듯하다」였다. 공의 시 넷째 구는 이러하였다.
장하기는 세 산을 떠받쳐 솟은 듯하고 여섯 자라를 낚아 달아날 걱정이 없다
다섯째 구는 이러하였다.
하늘을 받들어 우뚝우뚝 드러내고 산을 지고 넘실넘실 솟아난다
지공거 이지명(李知命)이 이 구절을 아껴 마침내 물리치지 않았다.
辛亥公年二十四
신해년. 공의 나이 스물네 살.
협주 1
大金明昌二年
대금 명창(明昌) 이년이다.
秋八月。丁父憂。寓居天磨山。自稱白雲居士。作天磨山詩。失之不錄前集。後追覓之。載後集初卷。首句云。世人但取山崔巍。乃以天磨而號之者是也。後常遊此山作詩。若北山雜題重遊北山者是也。
가을 팔월에 아버지 상을 당하였다. 천마산(天磨山)에 붙어 살며 스스로 백운거사(白雲居士)라 일컫고 「천마산 시」를 지었다. 이 시는 잃어버려 전집에 싣지 못하였다가 뒤에 찾아내어 후집 첫 권에 실었다. 첫 구에 「세상 사람은 다만 산이 높은 것만 취한다」 하고 이어 천마라 이름한 까닭을 말한 것이 그것이다. 뒤에도 늘 이 산에 노닐며 시를 지었으니 「북산 잡제」와 「북산에 다시 노닐다」 같은 것이 그것이다.
壬子公年二十五
임자년. 공의 나이 스물다섯 살.
협주 1
明昌三年
명창 삼년이다.
是年。著白雲居士語錄及傳。自敍己之行止。
이해에 「백운거사 어록」과 「백운거사 전」을 지어 자기가 살아온 자취를 스스로 적었다.
癸丑公年二十六
계축년. 공의 나이 스물여섯 살.
협주 1
明昌四年
명창 사년이다.
是年。作百韻詩。呈張侍郞自牧。張公厚遇。每謁。常置酒與飮。四月。得舊三國史。見東明王事奇之。作古詩以紀其異。
이해에 백 운의 시를 지어 시랑 장자목(張自牧)에게 바쳤다. 장공이 두터이 대접하여 찾아갈 때마다 늘 술을 놓고 함께 마셨다. 사월에 옛 『삼국사』를 얻어 동명왕(東明王)의 일을 보고 기이하게 여겨 고시를 지어 그 남다름을 적었다.
甲寅公年二十七
갑인년. 공의 나이 스물일곱 살.
협주 1
明昌五年
명창 오년이다.
是年。作論潮水書。呈吳東閣世文。作天寶詠史詩四十三首。皆挾注。又作理小園記。
이해에 「조수를 논하는 글」을 지어 동각 오세문(吳世文)에게 바쳤다. 「천보 영사시」 마흔세 수를 지었는데 모두 주를 끼워 넣었다. 또 「작은 동산을 가꾼 기」를 지었다.
乙卯公年二十八
을묘년. 공의 나이 스물여덟 살.
협주 1
明昌六年
명창 육년이다.
是年。著和吳東閣三百韻詩。
이해에 동각 오세문에게 화답한 삼백 운의 시를 지었다.
丙辰公年二十九
병진년. 공의 나이 스물아홉 살.
협주 1
明昌七年
명창 칠년이다.
四月。京師亂。姊夫南流黃驪。五月。公携姊氏往焉。是年春。母家後壻出守尙州。六月。自黃驪赴尙州覲省。得寒熱病。數月不愈。至十月方還。詩集中有南遊詩。無慮九十餘首。是黃驪尙州所著也。
사월에 서울에 난리가 났다. 매부가 남쪽 황려로 귀양 가고 오월에 공이 누이를 데리고 그리로 갔다. 이해 봄에 어머니 집안의 뒷사위가 상주(尙州) 원으로 나갔으므로 유월에 황려에서 상주로 가서 어머니를 뵈었다. 한열병을 얻어 몇 달이 지나도 낫지 않다가 시월에야 돌아왔다. 시집에 있는 남쪽에 노닐며 지은 시 아흔 몇 수가 황려와 상주에서 지은 것이다.
丁巳公年三十
정사년. 공의 나이 서른 살.
협주 1
承安二年
승안(承安) 이년이다.
冬十二月日。冢宰趙任相國崔相國崔相國聯名上箚子。薦公請補外寄。以備將來文翰之任。上遂允可。掌奏承宣某。以嘗有微憾。至是奪箚子。不付天曹。佯稱忽失。冢宰亦以箚子不付爲解。便不調之。詩集有上趙令公詩云。昔見銀盃嘗羽化。今聞箚子忽登仙。士林莫不嘆之。又作上趙大尉書。追訴其由。
겨울 십이월 아무 날, 총재 조공과 임 상국, 최 상국, 최 상국이 이름을 나란히 적어 차자(箚子)를 올렸다. 공을 천거하여 바깥 고을 자리에 보하고 앞으로 글 짓는 소임에 대비하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마침내 윤허하였다. 아뢰는 일을 맡은 승선 아무개가 일찍이 작은 유감이 있던 터라 이때에 차자를 빼앗아 이부에 넘기지 않고 문득 잃어버렸다고 거짓으로 일컬었다. 총재도 차자가 넘어가지 않은 것을 핑계로 삼아 곧 벼슬을 주지 않았다.
시집에 「조 영공께 올린다」는 시가 있어 이르기를
지난날 은잔이 날개 돋아 사라짐을 보았더니 이제 차자가 홀연 신선이 되어 올랐다 듣는다
하였으니 선비들이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또 「조 태위께 올리는 글」을 지어 그 까닭을 뒤미처 호소하였다.
협주 4
永仁
이름은 영인(永仁)이다.
濡
이름은 유(濡)다.
詵
이름은 선(詵)이다.
讜。
이름은 당(讜)이다.
戊午公年三十一
무오년. 공의 나이 서른한 살.
협주 1
承安三年
승안 삼년이다.
己未公年三十二
기미년. 공의 나이 서른두 살.
협주 1
承安四年
승안 사년이다.
五月。知奏事相公宅。千葉榴花盛開。召賓客賞之。因致詩人。李仁老,咸淳,李湛之及公賦之後。一日偶謂左右曰。聞文儒四相國薦某不遂。又有奪箚子者。因曰文人相嫉如此。於是始有用公之意。夏六月。頒政。補全州牧司錄兼掌書記。秋九月。赴全州。是年所著。无慮古律十五六首。
오월에 지주사 상공의 집에 천엽 석류꽃이 활짝 피어 손님을 불러 구경하게 하고 이어 시인들을 불렀다. 이인로(李仁老)·함순·이담지(李湛之)와 공이 시를 지었다.
그 뒤 하루는 상공이 문득 좌우에게 말하였다. 「듣건대 글하는 네 상국이 아무개를 천거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고 또 차자를 빼앗은 자가 있다 한다.」 이어 말하였다. 「글하는 사람끼리 시기함이 이와 같구나.」 이에 비로소 공을 쓸 뜻이 생겼다. 여름 유월 인사에서 전주목 사록 겸 장서기에 보임되었다. 가을 구월에 전주로 갔다. 이해에 지은 것은 고시와 율시 열대여섯 수다.
협주 1
後爲晉康公。
뒤에 진강공(晉康公)이 되었다.
庚申公年三十三
경신년. 공의 나이 서른세 살.
협주 1
承安五年
승안 오년이다.
是年所著。无慮三十餘首。冬十二月。被廢發全州。初公之理州也。通判郞將某。貪且偃肆。公不屈。因公事屢激怒之。通判不勝其憤。又欲自專。遂搆貝錦之詞。行次廣州。適値守歲。妻兄晉公度爲書記。迎到其居守歲。贈詩一首。其首句云。偶霑微祿官江南是已。
이해에 지은 것은 서른 몇 수다. 겨울 십이월에 파직되어 전주를 떠났다. 처음 공이 고을을 다스릴 때 통판 낭장 아무개가 탐욕스럽고 또 거만하고 방자하였다. 공이 굽히지 않고 공무로 여러 번 그를 성나게 하였다. 통판이 그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또 제 마음대로 하고자 하여 마침내 없는 죄를 비단 짜듯 얽어 참소하는 말을 꾸몄다.
길이 광주(廣州)에 이르렀을 때 마침 섣달그믐을 맞았다. 아내의 오라비 진공도(晉公度)가 서기로 있어 맞아들여 제 집에서 밤을 지새웠다. 시 한 수를 주었는데 그 첫 구에 「우연히 적은 녹을 적시어 강남에서 벼슬하였네」 한 것이 이것이다.
辛酉公年三十四
신유년. 공의 나이 서른네 살.
협주 1
承安六年
승안 육년이다.
春正月。至自廣州。夏四月。之竹州迎母至京師。先是。姊壻自黃驪補竹州監務。姊與母之其任居焉。是年四月。母求還京師。公迎侍而至。有遊竹州萬善寺詩是也。五月。作四輪亭記。六月。作南行記及自竹州與母赴長安詩是也。
봄 정월에 광주에서 돌아왔다. 여름 사월에 죽주(竹州)로 가서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로 왔다. 이에 앞서 매부가 황려에서 죽주 감무로 보임되어 누이와 어머니가 그 임지에 가서 살았다. 이해 사월에 어머니가 서울로 돌아가기를 바라니 공이 모시고 온 것이다. 「죽주 만선사에 노닐다」라는 시가 그것이다. 오월에 「사륜정기」를 지었다. 유월에 「남행기」와 「죽주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로 가며」라는 시를 지었으니 그것이다.
壬戌公年三十五
임술년. 공의 나이 서른다섯 살.
협주 1
泰和二年
태화(泰和) 이년이다.
夏五月。丁母憂。冬十二月。東京叛。與雲門山賊黨擧兵。朝廷出三軍征之。軍幕逼散官及第等。充修製員。歷三人。皆以計避不就至公慨然曰。予雖懦怯。亦國民也。避國難非夫也。遂從軍。於是幕府欣然。奏爲兵馬錄事兼修製。盖暢其情也。是月。行次淸州。作幕中書懷古詩十八韻。呈同營諸公。又次尙州作觀金上人草書古詩十五韻。
여름 오월에 어머니 상을 당하였다. 겨울 십이월에 동경(東京)이 반란을 일으켜 운문산 도적 무리와 함께 군사를 일으키니 조정이 삼군을 내어 쳤다. 군막에서 산관과 급제한 이들을 다그쳐 수제원으로 채우려 하였는데, 세 사람을 거치도록 모두 꾀를 내어 피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공에 이르자 공이 개연히 말하였다. 「내가 비록 나약하고 겁이 많으나 또한 나라의 백성이다. 나라의 어려움을 피하는 것은 사내가 아니다.」 마침내 군사를 따라갔다. 이에 막부가 기뻐하여 병마녹사 겸 수제로 삼기를 아뢰었으니 그 뜻을 펴 준 것이다.
이달에 길이 청주(淸州)에 이르러 「막사 안에서 회포를 적다」라는 고시 열여덟 운을 지어 같은 진영의 여러 공에게 바쳤다. 또 상주에 이르러 「금 상인의 초서를 보고」라는 고시 열다섯 운을 지었다.
癸亥公年三十六
계해년. 공의 나이 서른여섯 살.
협주 1
泰和三年
태화 삼년이다.
公在東京軍幕。二月。作上都統副使書。論葬戰亡人事。作古律詩无慮十餘首。
공이 동경 군막에 있었다. 이월에 「도통부사께 올리는 글」을 지어 싸우다 죽은 이를 묻는 일을 논하였다. 고시와 율시 열 몇 수를 지었다.
甲子公年三十七
갑자년. 공의 나이 서른일곱 살.
협주 1
泰和四年
태화 사년이다.
三月。兵馬凱還。公隨至京師。詩集有獵罷論功誰第一。至今不記指縱人。軍士多受賞。公獨未尒。故不能无情。有是作。
삼월에 군사가 이기고 돌아오니 공도 따라 서울에 이르렀다. 시집에
사냥이 끝나 공을 따질 때 누가 첫째인가 이제껏 개를 풀어 가리킨 사람은 기억해 주지 않는다
하는 구절이 있다. 군사들은 상을 많이 받았으나 공만 그렇지 못하였으므로 감회가 없을 수 없어 이 시를 지었다.
乙丑公年三十八
을축년. 공의 나이 서른여덟 살.
협주 1
泰和五年
태화 오년이다.
是年。作上崔相國書求官。
이해에 「최 상국께 올리는 글」을 지어 벼슬을 구하였다.
협주 1
詵
최 상국은 이름이 선(詵)이다.
丙寅公年三十九
병인년. 공의 나이 서른아홉 살.
협주 1
泰和六年
태화 육년이다.
丁卯公年四十
정묘년. 공의 나이 마흔 살.
협주 1
泰和七年
태화 칠년이다.
冬十二月。權補直翰林院。公旣陸沈。杜門不出。然每歲史館翰院國學等儒官薦人。常以公爲首。又左右多有揄揚者。晉康侯重違衆志。有用之之意。嫌其無因。時方搆茅亭。命李仁老,李元老,李允甫及公作記。仍使儒官宰相四者科。公爲第一。獨上板釘壁。至十二月。補是官。作初入翰林詩二首。又作止止軒記。
겨울 십이월에 임시로 직한림원에 보임되었다. 공은 이미 세상에 묻혀 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해마다 사관과 한림원과 국학의 유관들이 사람을 천거할 때면 늘 공을 첫머리에 두었고 또 둘레에 기려 말하는 이가 많았다. 진강후가 뭇사람의 뜻을 거스르기 어려워 쓸 뜻이 있었으나 마땅한 계제가 없는 것을 꺼렸다.
그때 마침 띠 정자를 짓고 있어 이인로·이원로(李元老)·이윤보(李允甫)와 공에게 기(記)를 짓게 하였다. 이어 유관과 재상에게 네 편의 등수를 매기게 하니 공이 첫째가 되어 홀로 판에 올려 벽에 걸렸다. 십이월에 이르러 이 벼슬에 보임되었다. 「처음 한림에 들어가서」라는 시 두 수를 짓고 또 「지지헌기」를 지었다.
戊辰公年四十一
무진년. 공의 나이 마흔한 살.
협주 1
泰和八年
태화 팔년이다.
夏六月。翰林除權卽眞。
여름 유월에 한림의 임시 직함을 떼고 정식으로 임명되었다.
己巳公年四十二
기사년. 공의 나이 마흔두 살.
협주 1
泰和九年
태화 구년이다.
庚午公年四十三
경오년. 공의 나이 마흔세 살.
협주 1
大安二年
대안(大安) 이년이다.
辛未公年四十四
신미년. 공의 나이 마흔네 살.
협주 1
大安三年
대안 삼년이다.
壬申公年四十五
임신년. 공의 나이 마흔다섯 살.
협주 1
大安四年
대안 사년이다.
正月。除千牛衛錄事參軍事。六月。有翰林兼官闕員。不待頒政。除兼直翰林院。仍本官。作再入玉堂詩二首。
정월에 천우위 녹사참군사에 임명되었다. 유월에 한림 겸관에 빈자리가 생기자 인사를 기다리지 않고 겸직으로 직한림원에 임명되었으며 본디 벼슬은 그대로 두었다. 「다시 옥당에 들어가서」라는 시 두 수를 지었다.
癸酉公年四十六
계유년. 공의 나이 마흔여섯 살.
협주 1
崇慶二年
숭경(崇慶) 이년이다.
十二月。晉康侯嗣子相國。大設夜宴。召搢紳貴介赴座。公獨以八品微官蒙召預焉。及夜半。相國謂曰。聞君走筆。未之見也。今日試之何如。因使李仁老唱韻。多至四十餘韻。以燭爲題。命名歧研墨。及成。相國大嗟賞不已。明日。將其詩詣府。白於侯。請召試其能。侯初不肯之。再三白之。然後召之。及到。相國曰。此子不飮。則不得如意。卽命捷步者往其宅取酒來。未及到。侯已置酒觴之。相國又曰。此子醒醉得中然後可也。乃計盞飮之。至醺乃率詣侯前。侯前有筆匣。筆有十餘事。相國親擇善者授之。時庭中有孔崔遊戱。侯以其崔爲題。使琴相國唱韻。多至四十餘韻。筆不容一瞬。侯嘆息至垂涕。及欲退。侯曰。子若望官。卽言所志。公曰。吾今八品。除七品則足矣。相國屢目之。意欲令直望參官。其日相國還第。召讓曰。子之望官何劣也。何不以參官爲望耶。公曰。予志也。及十二月頒政。越七品除司宰丞。
십이월에 진강후의 대를 이은 아들 상국이 밤 잔치를 크게 열고 벼슬아치와 귀한 이들을 불러 자리에 나오게 하였다. 공은 홀로 팔품의 낮은 벼슬로 부름을 받아 끼었다. 밤이 깊자 상국이 말하였다. 「그대가 붓을 달린다는 말은 들었으나 아직 보지 못하였다. 오늘 시험해 보면 어떻겠는가.」 그러고는 이인로에게 운을 부르게 하니 마흔 몇 운에 이르렀다. 촛불을 제목으로 삼고 이름난 기생에게 먹을 갈게 하였다. 다 이루자 상국이 크게 감탄하여 마지않았다.
이튿날 그 시를 가지고 부에 나아가 후에게 아뢰고 불러서 그 재주를 시험해 보기를 청하였다. 후가 처음에는 즐겨 하지 않다가 두세 번 아뢴 뒤에야 불렀다. 공이 이르자 상국이 말하였다. 「이 사람은 마시지 않으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곧 발 빠른 이를 시켜 그 집에 가서 술을 가져오게 하였는데, 미처 오기 전에 후가 이미 술을 놓고 잔을 권하였다. 상국이 또 말하였다. 「이 사람은 깨어 있음과 취함이 알맞아야 됩니다.」 이에 잔을 세어 가며 마시게 하고 거나해지자 이끌어 후 앞에 나아갔다.
후 앞에 붓갑이 있어 붓이 열 몇 자루였다. 상국이 몸소 좋은 것을 골라 주었다. 그때 뜰에 공작이 놀고 있어 후가 그 공작을 제목으로 삼고 금 상국에게 운을 부르게 하니 마흔 몇 운에 이르렀다. 붓이 눈 깜박할 틈도 두지 않았다. 후가 탄식하다가 눈물까지 흘렸다. 물러나려 할 때 후가 말하였다. 「그대가 벼슬을 바란다면 곧 뜻하는 바를 말하라.」 공이 말하였다. 「제가 지금 팔품이니 칠품을 주시면 넉넉합니다.」 상국이 여러 번 눈짓하였으니 곧바로 참관을 바라게 하려는 뜻이었다.
그날 상국이 집에 돌아와 공을 불러 나무랐다. 「그대가 바란 벼슬이 어찌 그리 낮은가. 어찌 참관을 바라지 않았는가.」 공이 말하였다. 「제 뜻입니다.」 십이월 인사에 이르러 칠품을 건너뛰어 사재승에 임명되었다.
甲戌公年四十七
갑술년. 공의 나이 마흔일곱 살.
협주 1
貞祐二年
정우(貞祐) 이년이다.
乙亥公年四十八
을해년. 공의 나이 마흔여덟 살.
협주 1
貞祐三年
정우 삼년이다.
夏六月。公作詩求參職階梯。晉康侯將其詩出示其府典籤宋恂曰。此子志高者也。應不以階梯爲望。權屈而言之耳。若奏上直除參官。則想其志謂何也。恂曰。然則其喜不可言。亦衆望也。及下批。爲右正言知制誥。七月。作初拜正言詩。十月。作朝享大廟頌。
여름 유월에 공이 시를 지어 참직에 오를 계제를 구하였다. 진강후가 그 시를 가져다 부의 전첨 송순(宋恂)에게 보이며 말하였다. 「이 사람은 뜻이 높은 자다. 계제를 바라지는 않을 터인데 잠시 굽혀 말한 것일 뿐이다. 만약 아뢰어 바로 참관에 임명한다면 그 뜻이 어떠하겠는가.」 송순이 말하였다. 「그렇게 되면 그 기쁨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뭇사람이 바라는 바입니다.」
사령이 내리자 우정언 지제고가 되었다. 칠월에 「처음 정언에 임명되어」라는 시를 지었다. 시월에 「태묘에 제향하는 송」을 지었다.
丙子公年四十九
병자년. 공의 나이 마흔아홉 살.
협주 1
貞祐四年
정우 사년이다.
丁丑公年五十
정축년. 공의 나이 쉰 살.
협주 1
貞祐五年
정우 오년이다.
春二月。除右司諫知制誥。賜紫金魚袋。是年秋。以公事停。公作上晉康侯書。
봄 이월에 우사간 지제고에 임명되고 자금어대를 받았다. 이해 가을에 공무로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니 공이 「진강후께 올리는 글」을 지었다.
戊寅公年五十一
무인년. 공의 나이 쉰한 살.
협주 1
貞祐六年
정우 육년이다.
春正月。遷左司諫。餘如故。
봄 정월에 좌사간으로 옮기고 나머지는 그대로였다.
己卯公年五十二
기묘년. 공의 나이 쉰두 살.
협주 1
貞祐七年
정우 칠년이다.
春。公被劾免官。前年十二月日。外方八關賀表有不及進呈者。公欲彈之。琴相國固止之。至是月。晉康侯考其由。卽劾相國及公。相國見原而公獨免官。四月。出爲桂陽都護府副使兵馬鈐轄。五月。赴桂陽。
봄에 공이 탄핵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났다. 지난해 십이월 아무 날, 바깥 고을에서 올린 팔관회 하례 표 가운데 미처 올리지 못한 것이 있었다. 공이 이를 탄핵하려 하였으나 금 상국이 굳이 말렸다. 이달에 이르러 진강후가 그 까닭을 따져 곧 상국과 공을 탄핵하니 상국은 용서받고 공만 벼슬에서 물러났다. 사월에 계양도호부 부사 병마검할로 나갔다. 오월에 계양으로 갔다.
庚辰公年五十三
경진년. 공의 나이 쉰세 살.
협주 1
貞祐八年
정우 팔년이다.
夏六月。以試禮部郞中起居注知制誥見召。七月。至自桂陽。前年九月。晉康公薨。嗣子相國代秉政權。故有是命。十二月。遷試太僕少卿。仍起居注。作謝表。
여름 유월에 시예부낭중 기거주 지제고로 부름을 받았다. 칠월에 계양에서 돌아왔다. 지난해 구월에 진강공이 세상을 떠나고 대를 이은 아들 상국이 대신 정권을 잡았으므로 이 명이 있었다. 십이월에 시태복소경으로 옮기고 기거주는 그대로였다. 사례하는 표를 지었다.
辛巳公年五十四
신사년. 공의 나이 쉰네 살.
협주 1
貞祐九年
정우 구년이다.
夏六月。除寶文閣待制知制誥。作讓謝表。
여름 유월에 보문각 대제 지제고에 임명되었다. 사양하며 사례하는 표를 지었다.
壬午公年五十五
임오년. 공의 나이 쉰다섯 살.
협주 1
貞祐十年
정우 십년이다.
夏六月。太僕少卿卽眞。
여름 유월에 태복소경에 정식으로 임명되었다.
癸未公年五十六
계미년. 공의 나이 쉰여섯 살.
협주 1
貞祐十一年
정우 십일년이다.
冬十二月。除朝散大夫。試將作監。仍待制。
겨울 십이월에 조산대부에 임명되고 시장작감이 되었으며 대제는 그대로였다.
甲申公年五十七
갑신년. 공의 나이 쉰일곱 살.
夏六月。將作監卽眞。冬十二月。爲明年司馬試座主。作讓謝表。十二月。拜朝議大夫。試國子祭酒翰林侍講學士。仍知制誥。作讓謝表。
여름 유월에 장작감에 정식으로 임명되었다. 겨울 십이월에 이듬해 사마시의 좌주가 되어 사양하며 사례하는 표를 지었다. 십이월에 조의대부에 임명되고 시국자좨주 한림시강학사가 되었으며 지제고는 그대로였다. 사양하며 사례하는 표를 지었다.
乙酉公年五十八
을유년. 공의 나이 쉰여덟 살.
春二月。閱司馬試。詩賦得李惟信等一十六人。十音詩得安謙一等五十人。明經得康得希等三人。奏御放牓。冬十二月。拜左諫議大夫。餘仍舊。作讓謝表。是年。作王輪寺丈六靈驗記。又受勑作太倉泥庫上梁文。
봄 이월에 사마시를 주관하였다. 시부에서 이유신(李惟信) 들 열여섯 사람, 십운시에서 안겸일(安謙一) 들 쉰 사람, 명경에서 강득희(康得希) 들 세 사람을 뽑아 임금께 아뢰고 방을 냈다. 겨울 십이월에 좌간의대부에 임명되고 나머지는 그대로였다. 사양하며 사례하는 표를 지었다. 이해에 「왕륜사 장륙 영험기」를 짓고 또 임금의 명을 받아 「태창 흙창고 상량문」을 지었다.
丙戌公年五十九
병술년. 공의 나이 쉰아홉 살.
冬十二月。祭酒卽眞。
겨울 십이월에 좨주에 정식으로 임명되었다.
丁亥公年六十
정해년. 공의 나이 예순 살.
戊子公年六十一
무자년. 공의 나이 예순한 살.
春正月。除中散大夫判衛尉事。餘仍。夏五月。以同知貢擧閱春場。得李敦等三十一人。明經得鞠受圭等四人。奏御放牓。
봄 정월에 중산대부 판위위사에 임명되고 나머지는 그대로였다. 여름 오월에 동지공거로 봄 과장을 주관하여 이돈(李敦) 들 서른한 사람과 명경에서 국수규(鞠受圭) 들 네 사람을 뽑아 임금께 아뢰고 방을 냈다.
己丑公年六十二
기축년. 공의 나이 예순두 살.
庚寅公年六十三
경인년. 공의 나이 예순세 살.
冬十一月二十一日。長流于猬島。是年八關會侍宴次事有戾於舊例者。是樞密車公所使也。知御史臺事王猷怒叱執事者不從。車公誤以王猷訶宰相愬之。時公及宋左丞恂夾座。故疑其助揚之。皆流于遠島。是日出宿靑郊驛。十二月。至保安縣。留待順風二十六日。入猬島。
겨울 십일월 이십일일에 위도(猬島)로 멀리 귀양 갔다. 이해 팔관회 잔치에서 임금을 모시던 차에 옛 규례에 어긋난 일이 있었는데 이는 추밀 차공이 시킨 것이었다. 지어사대사 왕유(王猷)가 성내어 일 맡은 이를 꾸짖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차공이 왕유가 재상을 꾸짖었다고 잘못 아뢰었다. 그때 공과 좌승 송순이 곁자리에 있었으므로 그 일을 거들어 부추겼다고 의심받아 모두 먼 섬으로 귀양 갔다.
이날 나가 청교역(靑郊驛)에서 묵었다. 십이월에 보안현(保安縣)에 이르러 순풍을 기다리며 스무엿새를 머물렀다가 위도로 들어갔다.
辛卯公年六十四
신묘년. 공의 나이 예순네 살.
春正月十五日。量移桑梓黃驪縣。二十二日。行次竹州。寓宿萬善寺。公曾於辛酉歲。客遊此寺。和板上諸公詩。落句云。好在靑山色。休官欲重尋。今落職重來。是幾於詩讖也。復和二首云。秋七月。自黃驪至京師。九月。仍備胡兵。以白衣守保定門。詩集有猶勝炎州嵐瘴地。折腰甘向海村民是也。公在散官。凡達旦通和書表文牒。皆委之。
봄 정월 십오일에 벌을 덜어 고향인 황려현으로 옮겨졌다. 이십이일에 길이 죽주에 이르러 만선사(萬善寺)에 묵었다. 공이 일찍이 신유년에 나그네로 이 절에 노닐며 판에 걸린 여러 공의 시에 화답한 적이 있는데 그 끝 구가
푸른 산빛이여 잘 있거라 벼슬을 놓고 다시 찾고자 하노라
였다. 이제 벼슬에서 떨어져 다시 왔으니 시가 미리 맞춘 것이나 다름없다. 다시 두 수를 화답하여 지었다.
가을 칠월에 황려에서 서울에 이르렀다. 구월에 오랑캐 군사에 대비하느라 벼슬 없는 몸으로 보정문(保定門)을 지켰다. 시집에
그래도 무더운 고을 안개와 독한 기운 서린 땅보다는 낫구나 허리를 굽혀 바닷가 마을 백성을 기꺼이 마주하네
한 것이 이것이다. 공이 벼슬 없이 있었으나 무릇 달단(達旦)과 화친하는 글과 표와 문첩을 모두 공에게 맡겼다.
壬辰公年六十五
임진년. 공의 나이 예순다섯 살.
歲己丑。王師薨。至是年。門人等聞于上。命公作碑銘。夏四月。復舊除。拜正議大夫判祕書省事寶文閣學士慶成府右詹事知制誥。六月。移都。公於此京未搆屋。借河陰客舍西廊居之。作詩二首。秋九月。爲留守中軍知兵馬事。
기축년에 왕사(王師)가 세상을 떠났다. 이해에 이르러 문인들이 임금께 아뢰니 공에게 비명을 짓게 하였다. 여름 사월에 옛 벼슬을 되찾아 정의대부 판비서성사 보문각 학사 경성부 우첨사 지제고에 임명되었다. 유월에 도읍을 옮겼다. 공은 이 서울에 집을 짓지 못하여 하음(河陰) 객사의 서쪽 행랑을 빌려 살며 시 두 수를 지었다. 가을 구월에 유수 중군 지병마사가 되었다.
癸巳公年六十六
계사년. 공의 나이 예순여섯 살.
夏六月。拜銀靑光祿大夫樞密院副使左散騎常侍翰林學士承旨。嗣子涵爲直翰林院。故以親嫌改爲寶文閣學士。八月。直樞院。作詩四首。寄內省金相國冬十二月。拜金紫光祿大夫知門下省事戶部尙書集賢殿大學士判禮部事。又作讓謝表。
여름 유월에 은청광록대부 추밀원 부사 좌산기상시 한림학사 승지에 임명되었다. 대를 이은 아들 함이 직한림원이 되었으므로 가까운 사이를 피하여 보문각 학사로 고쳤다. 팔월에 추밀원에 숙직하며 시 네 수를 지어 내성의 김 상국에게 부쳤다. 겨울 십이월에 금자광록대부 지문하성사 호부상서 집현전 대학사 판예부사에 임명되었다. 또 사양하며 사례하는 표를 지었다.
협주 1
仁鏡。
김 상국은 이름이 인경(仁鏡)이다.
甲午公年六十七
갑오년. 공의 나이 예순일곱 살.
夏五月。以春場知貢擧閱試。得金諫成等三十一人。明經得李邦秀等二人放牓。冬十二月。拜政堂文學監修國史。受勑作松廣社主法眞覺國師碑銘。
여름 오월에 봄 과장의 지공거로 시험을 주관하여 김간성(金諫成) 들 서른한 사람과 명경에서 이방수(李邦秀) 들 두 사람을 뽑아 방을 냈다. 겨울 십이월에 정당문학 감수국사에 임명되었다. 임금의 명을 받아 「송광사 사주 진각국사 비명」을 지었다.
乙未公年六十八
을미년. 공의 나이 예순여덟 살.
春正月。拜太子少傅。冬十二月。拜參知政事修文殿大學士判戶部事太子大保。
봄 정월에 태자소부에 임명되었다. 겨울 십이월에 참지정사 수문전 대학사 판호부사 태자태보에 임명되었다.
丙申公年六十九
병신년. 공의 나이 예순아홉 살.
夏五月。以知貢擧閱春場。得朴曦等二十九人。明經李克松等三人放牓。冬十二月。上表乞退。上留其表於內。遣內侍金永貂。敦諭令復起。公稱病篤。晉陽侯亦以戶籍縮歲爲辭。勉留之。公不得已至十一月起視事。然惶恐不自安。屢作詩見其意。公殊不以縮歲爲幸。以實陳之。乞退固切。然猶不得謝常有詩云。有面不敢擡。慙愧已不少是也。十二月。拜守大尉。
여름 오월에 지공거로 봄 과장을 주관하여 박희(朴曦) 들 스물아홉 사람과 명경에서 이극송(李克松) 들 세 사람을 뽑아 방을 냈다. 겨울 십이월에 표를 올려 물러나기를 빌었다. 임금이 그 표를 안에 두고 내시 김영초(金永貂)를 보내 간곡히 타일러 다시 나오게 하였다. 공이 병이 깊다고 하니 진양후도 호적의 나이가 줄어 적혀 있음을 들어 힘써 붙들었다.
공이 마지못하여 십일월에 이르러 일을 보러 나왔다. 그러나 두렵고 스스로 편치 않아 여러 번 시를 지어 그 뜻을 보였다. 공은 나이가 줄어 적힌 것을 조금도 다행으로 여기지 않고 사실대로 아뢰며 물러나기를 굳이 간절히 빌었다. 그러나 오히려 물러나지 못하여 늘 시를 지어
낯이 있어도 감히 들지 못하니 부끄러움이 이미 적지 않구나
한 것이 이것이다. 십이월에 수태위에 임명되었다.
丁酉公年七十
정유년. 공의 나이 일흔 살.
秋七月。奉勑作東宮妃主謚哀冊。公又上表乞退甚懇。冬十二月。以金紫光祿大夫守大保門下侍郞平章事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判禮部事翰林院事太子大保致仕。是年。又承勑作大藏經刻板君臣祈告文。
가을 칠월에 임금의 명을 받들어 「동궁 비주의 시호 애책」을 지었다. 공이 또 표를 올려 물러나기를 매우 간절히 빌었다. 겨울 십이월에 금자광록대부 수태보 문하시랑 평장사 수문전 대학사 감수국사 판예부사 판한림원사 태자태보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이해에 또 임금의 명을 받아 「대장경 판을 새기며 임금과 신하가 비는 글」을 지었다.
戊戌公年七十一
무술년. 공의 나이 일흔한 살.
冬十二月。承勑作上蒙古皇帝表狀及送晉卿唐古官人書。
겨울 십이월에 임금의 명을 받아 「몽고 황제께 올리는 표장」과 「진경(晉卿)과 당고(唐古) 관인에게 보내는 글」을 지었다.
己亥公年七十二
기해년. 공의 나이 일흔두 살.
承勑作蒙古皇帝上表狀。冬十二月。又作同前表狀及送晉卿書。
임금의 명을 받아 「몽고 황제께 올리는 표장」을 지었다. 겨울 십이월에 또 앞과 같은 표장과 「진경에게 보내는 글」을 지었다.
庚子公年七十三
경자년. 공의 나이 일흔세 살.
辛丑公年七十四
신축년. 공의 나이 일흔네 살.
公雖解位家居。於國朝有高文大冊及異朝往來書表等事。無所不爲。秋七月。寢疾。晉陽公聞之。遣名醫等問診不絶。乃取公平生所著前後文集凡五十三卷。募工雕印。其督役甚急。欲及公之眼見。以慰其情也。然以役巨未能告畢。越九月初二日。忽離常寢。向西而臥。以右脅著於席。至夜翛然而化。上聞訃震悼。命有司庀喪事。又令邇臣作誄書以美終。仍贈謚曰文順公。十二月初六日庚寅。葬于鎭江山東麓。公於平生。不營產業。常以詩酒自娛。雖在蟻床。猶不絶於諷詠。又嗜讀楞嚴。至背經輒誦。及臨大期。屛妻息等勿令喧擾。自然拋世。可謂豁達眞人君子也歟。噫。涵時出守於洪州。未及見其終也。其平生傷悼。曷可容言。
공이 비록 벼슬을 놓고 집에 있었으나, 나라의 높은 글과 큰 문서며 다른 나라와 주고받는 글과 표 같은 일은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가을 칠월에 병으로 누웠다. 진양공이 이를 듣고 이름난 의원들을 보내 끊임없이 병을 묻고 살피게 하였다. 이에 공이 평생 지은 앞뒤 문집 쉰세 권을 가져다 장인을 모아 판에 새겨 찍게 하였다. 그 일을 몹시 급히 재촉하였으니 공이 눈으로 보는 데에 미치게 하여 그 마음을 위로하려 함이었다. 그러나 일이 커서 마치지 못하였다.
구월 초이틀에 이르러 문득 늘 눕던 자리를 떠나 서쪽을 향하여 누우며 오른쪽 옆구리를 자리에 붙였다. 밤에 이르러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임금이 부고를 듣고 몹시 슬퍼하여 유사에게 상사를 갖추게 하였다. 또 가까운 신하에게 뇌사(誄辭)를 지어 그 끝을 아름답게 기리게 하였다. 이어 시호를 내려 문순공(文順公)이라 하였다. 십이월 초엿새 경인일에 진강산(鎭江山) 동쪽 기슭에 묻었다.
공은 평생 살림을 돌보지 않고 늘 시와 술로 스스로 즐겼다. 비록 자리에 누워서도 오히려 읊조리기를 그치지 않았다. 또 「능엄경」 읽기를 즐겨 경을 등지고도 곧 외웠다. 임종에 다다라서는 아내와 자식들을 물리쳐 시끄럽게 하지 못하게 하고 저절로 세상을 놓았으니, 탁 트인 참사람이요 군자라 이를 만하다.
아, 나 함은 그때 홍주(洪州) 원으로 나가 있어 그 마지막을 보지 못하였다. 평생의 슬픔을 어찌 말로 다 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