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의 굴富窟
동국이상국집 전집 권4 고려 이규보가 평생 지은 글을 아들 이함이 1241년에 엮어 새기고, 손자 이익배가 1251년에 고쳐 보탠 문집. 시와 부, 임금께 올린 표와 전, 절과 탑에 붙인 기, 비명과 묘지명, 편지와 서문, 그리고 몽골이 쳐들어온 때에 오간 국서까지 담겼다. 고구려 시조를 노래한 「동명왕편」이 전집 권3에 있고, 술과 거문고와 시를 벗 삼아 스스로 백운거사라 한 사람의 하루하루가 후집에 남아 있다. 책은 그가 눈을 앓다 붓을 놓는 마지막 시와, 그가 죽은 뒤 남이 지어 붙인 뇌서·묘지명으로 닫힌다.
遺事曰。王元寶。都中巨豪也。常以金銀爲屋。壁以紅泥泥之。又於宅中。置一禮賢堂。以沈檀爲軒檻。以碔砆甃池面。以錦文石爲柱礎。又以銅線穿錢。甃於後園花徑中。貴其泥雨不滑也。四方賓客。所至如歸。故時人號曰王家富窟也。
『유사』에 이르기를, 왕원보(王元寶)는 서울의 큰 부자였다. 늘 금과 은으로 집을 짓고 벽은 붉은 진흙으로 발랐다. 또 집 안에 예현당(禮賢堂) 하나를 두어 침향목과 박달나무로 난간을 하고 무부(碔砆)로 못 바닥을 깔고 비단 무늬 돌로 주춧돌을 삼았다. 또 구리줄에 돈을 꿰어 뒤뜰 꽃길에 깔았으니 진창이 되어도 미끄럽지 않게 함을 귀히 여긴 것이다. 사방의 손이 이르면 제집에 온 듯하였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왕가의 부굴(富窟)이라 불렀다.
王郞富窟眞奢僭。鄧氏銅山敢抗當。惟有一端堪採處。箇中兼置禮賢堂。
왕랑의 부굴은 참으로 사치가 분수에 넘쳐 등씨(鄧氏)의 구리 산도 감히 맞서 보았다 오직 한 가지 취할 만한 데가 있으니 그 가운데 예현당을 아울러 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