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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선생전(麴先生傳)麴先生傳

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 · 이규보(李奎報) · 1241년 (고려 고종 28) 엮음 · 1251년 고쳐 보탬 · 단락 2 · 한자 828자 · 낭독 9분

동국이상국집 전집 권20 고려 이규보가 평생 지은 글을 아들 이함이 1241년에 엮어 새기고, 손자 이익배가 1251년에 고쳐 보탠 문집. 시와 부, 임금께 올린 표와 전, 절과 탑에 붙인 기, 비명과 묘지명, 편지와 서문, 그리고 몽골이 쳐들어온 때에 오간 국서까지 담겼다. 고구려 시조를 노래한 「동명왕편」이 전집 권3에 있고, 술과 거문고와 시를 벗 삼아 스스로 백운거사라 한 사람의 하루하루가 후집에 남아 있다. 책은 그가 눈을 앓다 붓을 놓는 마지막 시와, 그가 죽은 뒤 남이 지어 붙인 뇌서·묘지명으로 닫힌다.

麴聖字中之。酒泉郡人也。少爲徐邈所愛。邈名而字之。遠祖本溫人。恒力農自給。鄭伐周。獲以歸。故其子孫或布於鄭。曾祖。史失其名。祖牟徙酒泉因家焉。遂爲酒泉郡人。至父醝始仕爲平原督郵。娶司農卿穀氏女。生聖。聖自爲兒時。已有沈深局量。客詣父目愛曰。此兒心器當汪汪若萬頃之波。澄之不淸。撓之不濁。與卿談。不若與阿聖樂。及長。與中山劉伶,潯陽陶潛爲友。二人嘗謂曰。一日不見此子。鄙吝萌矣。每見。移日忘疲。輒心醉而歸。州辟糟丘掾。未及就。又徵爲靑州從事。公卿交口薦進。上令待詔公車。居無何。召見目送曰。此酒泉麴生耶。朕飮香名久矣。先是。太史奏酒旗星大有光。未幾聖至。帝亦以是益奇焉。卽拜爲主客郞中。尋轉爲國子祭酒。兼禮儀使。凡掌朝會宴饗宗廟蒸嘗酌獻之禮。無不稱旨。上器之。擢置喉舌。待以優禮。每入謁。命舁而升殿。呼麴先生而不名。上心有不懌。及聖入見。上始大笑。凡見愛皆此類也。性醞籍。日親近。與上無小忤。由是益貴幸。從上遊宴無節。子酷,䤖,醳。倚父寵頗橫恣。中書令毛穎上疏劾奏曰。倖臣擅寵。天下所病。今麴聖以斗筲之用。幸登朝級。位列三品。內深賊。喜中傷人。故萬人呶號。疾首痛心。此非醫國之忠臣。乃實毒民之賊夫。聖之三子。憑恃父寵。橫行放肆。爲人所苦。請陛下幷賜死以塞衆口。書奏。子酷等卽日飮酖自殺。聖坐廢爲庶人。鴟夷子亦嘗善聖。故亦墮車自死。初。鴟夷子以滑稽見幸。與麴聖相友。每上出入。託於屬車。鴟夷子嘗困臥。聖戲曰。卿腹雖大。空洞何有。答曰。足容卿輩數百。其相戲謔如此。聖旣免。齊郡鬲州間。盜賊群起。上欲命討。難其人。復起聖爲元帥。聖持軍嚴。與士卒同甘苦。灌愁城一戰而拔。築長樂阪而還。帝以功封爲湘東侯。一年。上疏乞退曰。臣本甕牖之子。少貧賤。爲人轉賣。偶逢聖主虛心優納。拯於沈溺。容若江湖。有忝洪造。無潤國體。前以不謹。退安鄕里。雖薄露之垂盡。幸餘滴之得存。敢欣日月之明。更發醘鷄之覆。且器盈則覆。物之常理。今臣遇痟渴之病。命迫浮漚。庶一吐兪音。使退保餘生。帝優詔不允。遣中使齎松桂菖蒲等藥物。就其第省病。聖累表固辭。上不得已許之。遂歸老故鄕。以壽終。弟賢官至二千石。子䣧,酘,𨠗,醂。服桃花汁學仙。族子𨡑,䤍,□〔⿰酉貪〕。皆籍屬萍氏云。

국성(麴聖)은 자가 중지(中之)요 주천군(酒泉郡) 사람이다. 어려서 서막(徐邈)에게 사랑을 받아 서막이 이름과 자를 지어 주었다. 먼 조상은 본디 온(溫) 땅 사람이다. 늘 농사에 힘써 스스로 살았는데 정(鄭)나라가 주(周)나라를 쳐서 사로잡아 돌아갔다. 그래서 그 자손이 혹 정나라에 퍼졌다. 증조는 역사에 그 이름이 빠졌다. 할아버지 모(牟)가 주천으로 옮겨 그곳에 집을 삼아 마침내 주천군 사람이 되었다. 아버지 차(醝)에 이르러 비로소 벼슬하여 평원독우(平原督郵)가 되었고, 사농경(司農卿) 곡씨(穀氏)의 딸에게 장가들어 성(聖)을 낳았다.

성은 어릴 때부터 이미 깊고 그윽한 도량이 있었다. 손이 그 아버지를 찾아왔다가 눈여겨보고 사랑하여 말하였다. 「이 아이의 마음 그릇이 마땅히 넘실넘실 만 이랑의 물결 같아, 맑히려 해도 맑아지지 않고 흔들어도 흐려지지 않겠다. 그대와 이야기하는 것이 아성(阿聖)과 즐기는 것만 못하다.」

자라서는 중산(中山)의 유령(劉伶), 심양(潯陽)의 도잠(陶潛)과 벗이 되었다. 두 사람이 일찍이 말하기를 「하루라도 이 사람을 보지 못하면 비루하고 인색한 마음이 싹튼다」 하고, 볼 때마다 날이 가도록 지치는 줄 몰랐으며 문득 마음이 취해 돌아갔다.

고을에서 조구연(糟丘掾)으로 불렀으나 미처 나아가지 못했고, 또 청주종사(靑州從事)로 불렀다. 공경들이 입을 모아 천거하니 임금이 공거(公車)에서 조서를 기다리게 하였다. 얼마 안 되어 불러 보고 눈으로 배웅하며 말하였다. 「이가 주천의 국생(麴生)인가. 짐이 그 향기로운 이름을 마신 지 오래다.」 이보다 앞서 태사(太史)가 「주기성(酒旗星)이 크게 빛난다」고 아뢰었는데 얼마 뒤에 성이 이르니, 임금이 또한 이 때문에 더욱 기이하게 여겼다. 곧 주객낭중(主客郞中)에 임명하고 이윽고 국자좨주(國子祭酒) 겸 예의사(禮儀使)로 옮겼다. 무릇 조회와 잔치와 종묘의 제사에 술을 따라 올리는 예를 맡아 임금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임금이 그를 그릇으로 여겨 뽑아 목구멍과 혀 같은 자리에 두고 두터운 예로 대하였다. 들어와 뵐 때마다 가마에 태워 전각에 오르게 하고 「국선생」이라 부르며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임금이 마음에 즐겁지 않다가도 성이 들어와 뵈면 임금이 비로소 크게 웃었다. 무릇 사랑받은 것이 다 이와 같았다.

성품이 너그럽고 도량이 있어 날로 가까이하되 임금과 조금도 거스름이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더욱 귀하고 총애받아 임금을 따라 노닐고 잔치하는 데 절도가 없었다. 아들 혹(酷)·포(䤖)·역(醳)이 아버지의 총애를 믿고 자못 함부로 굴었다.

중서령 모영(毛穎)이 상소하여 탄핵해 아뢰었다. 「총애받는 신하가 은총을 독차지하는 것은 천하가 병으로 여기는 바입니다. 이제 국성은 말 되만 한 쓰임으로 요행히 조정의 반열에 올라 지위가 삼품에 벌였습니다. 속으로는 몹시 해치고 남을 중상하기를 좋아하므로 만인이 아우성치며 머리를 앓고 마음을 아파합니다. 이는 나라를 고치는 충신이 아니라 실로 백성을 해치는 도적입니다. 성의 세 아들은 아버지의 총애를 믿고 방자하게 굴어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바입니다. 청하건대 폐하께서는 아울러 죽음을 내리시어 뭇사람의 입을 막으소서.」

글이 아뢰어지자 아들 혹 등이 그날로 짐주(酖酒)를 마시고 스스로 죽었고, 성은 그에 연좌되어 폐하여 서인이 되었다. 치이자(鴟夷子) 또한 일찍이 성과 사이가 좋았으므로 또한 수레에서 떨어져 스스로 죽었다. 처음에 치이자는 익살로 총애를 받아 국성과 서로 벗이 되었다. 임금이 드나들 때마다 딸린 수레에 몸을 맡겼다. 치이자가 일찍이 곤하게 누워 있으니 성이 놀리기를 「그대의 배가 비록 크나 속이 텅 비었으니 무엇이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그대 같은 이 수백은 넉넉히 담을 수 있다」 하였다. 그들이 서로 놀리는 것이 이와 같았다.

성이 벼슬에서 물러난 뒤 제군(齊郡)과 격주(鬲州) 사이에 도적이 떼 지어 일어났다. 임금이 치려 하였으나 그 사람을 얻기 어려워 다시 성을 일으켜 원수로 삼았다. 성은 군사를 엄히 거느리고 사졸과 달고 씀을 같이하여, 수성(愁城)에 물을 대어 한 번 싸움에 함락시키고 장락판(長樂阪)을 쌓고 돌아왔다. 임금이 공으로 상동후(湘東侯)에 봉하였다.

한 해 뒤에 상소하여 물러나기를 청하였다. 「신은 본디 독 구멍으로 창을 낸 집의 자식이라 어려서 가난하고 천하여 남에게 이리저리 팔렸습니다. 우연히 거룩한 임금을 만나 마음을 비우고 너그러이 거두어 주시어 빠진 데서 건지시고 강과 호수처럼 감싸 주셨습니다. 큰 지으심을 더럽혔을 뿐 나라의 체모를 윤택하게 하지 못하였고, 앞서는 삼가지 못하여 물러나 고향에 편히 있었습니다. 비록 엷은 이슬이 다하려 하나 다행히 남은 방울이 남아 있어, 감히 해와 달의 밝음을 기뻐하여 다시 초파리가 덮인 것을 열었습니다. 또 그릇이 차면 엎어지는 것이 사물의 떳떳한 이치입니다. 이제 신은 소갈(痟渴)의 병을 만나 목숨이 뜬 거품에 다가섰습니다. 바라건대 한 번 윤허하시는 말씀을 내리시어 물러나 남은 삶을 보전하게 하소서.」

임금이 너그러운 조서로 윤허하지 않고, 내시를 보내어 솔과 계수와 창포 같은 약재를 가지고 그 집에 나아가 병을 살피게 하였다. 성이 여러 번 표를 올려 굳이 사양하니 임금이 마지못해 허락하였다.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가 늙어 수를 누리고 마쳤다.

아우 현(賢)은 벼슬이 이천석에 이르렀다. 아들 임(䣧)·두(酘)·염(𨠗)·남(醂)은 복사꽃 즙을 마시며 신선을 배웠고, 조카 주(𨡑)·미(䤍)·□〔⿰酉貪〕은 다 평씨(萍氏)에 적을 붙였다 한다.

협주 1

酒有三品。

술에 세 가지 품등이 있다.

2사신의 말

史臣曰。麴氏世本農家。聖以醇德淸才。作王心腹。斟酌國政。有沃帝心。幾致大平。旣醉之功。盛哉。及其泰寵。幾亂國經。雖禍及於子。無憾。然晚節知足自退。能以壽終。易曰見幾而作。聖庶幾焉。

사신(史臣)은 말한다. 국씨는 대대로 본디 농사짓는 집안이었다. 성은 순수한 덕과 맑은 재주로 임금의 심복이 되어 나랏일을 짐작하고 임금의 마음을 적셔 거의 태평을 이루었으니, 「이미 취했다」는 공이 성대하다. 그러나 총애가 지나침에 이르러서는 거의 나라의 법도를 어지럽혔으니, 비록 화가 아들에게 미쳤어도 서운할 것이 없다. 그러나 늘그막에 만족할 줄 알아 스스로 물러나 수를 누리고 마칠 수 있었다. 《주역》에 「기미를 보고 일어난다」 하였으니 성이 거의 그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