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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강사자현부전(淸江使者玄夫傳)淸江使者玄夫傳

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 · 이규보(李奎報) · 1241년 (고려 고종 28) 엮음 · 1251년 고쳐 보탬 · 단락 2 · 한자 685자 · 낭독 6.8분

동국이상국집 전집 권20 고려 이규보가 평생 지은 글을 아들 이함이 1241년에 엮어 새기고, 손자 이익배가 1251년에 고쳐 보탠 문집. 시와 부, 임금께 올린 표와 전, 절과 탑에 붙인 기, 비명과 묘지명, 편지와 서문, 그리고 몽골이 쳐들어온 때에 오간 국서까지 담겼다. 고구려 시조를 노래한 「동명왕편」이 전집 권3에 있고, 술과 거문고와 시를 벗 삼아 스스로 백운거사라 한 사람의 하루하루가 후집에 남아 있다. 책은 그가 눈을 앓다 붓을 놓는 마지막 시와, 그가 죽은 뒤 남이 지어 붙인 뇌서·묘지명으로 닫힌다.

玄夫不知何許人也。或曰。其先神人也。兄弟十五人。皆體巨絶有力焉。天帝所命扶五山海中者是已。至子孫。形寢小。亦無以力聞者。唯以卜筮爲業。相地之利害。不常厥居。故其鄕里世系。不得詳焉。遠祖文甲。堯時隱居洛濱。帝聞其賢。聘以白璧。文甲負奇圖來獻。帝嘉之。因封洛水侯。曾祖自言上帝使者。不言其名。擔洪範九疇。授伯禹者是也。祖白若。夏后時鑄鼎於昆吾。與翁難乙致力有功。父重光。生而有文在左脅。曰月子重光。得我者。匹夫爲諸侯。諸侯爲帝王。因採其文名之。玄夫尤沈邃。其母夢。瑤光星入懷。因而有娠。始生。相者曰。背法盤丘。文成列宿。必神聖之相乎。及壯。覃研曆緯。凡天地日月陰陽寒暑風雨晦明災祥禍福之變。無不逆知。又學神仙行氣導引不死之方。性尙虎。常介而行。上聞其名。使使聘焉。玄夫傲然不顧。乃歌曰。泥塗之游。其樂無涯。巾笥之寵。寧吾所期。笑而不答。由是不能致。其後宋元王時。豫且強逼之。將致於王。未及謁。夢有人玄服輜車而來告曰。我淸江使者也。將見於王。明日。豫且果以玄夫來謁。王大悅。欲爵之。玄夫曰。臣爲豫且所強。且聞王有德。故來見耳。爵祿非本志。王豈欲留而不遣耶。王欲放遣。因衛平密諫乃止。卽調爲水衡丞。又遷授都水使者。俄擢爲大史令。凡國之施爲注措動作興亡。事無大小。莫不咨而後行。上嘗戲曰。子神明之後。且明吉凶。不早自圖。落豫且之謀。爲寡人所獲。何也。玄夫曰。明有所不見。智有所不及故爾。王笑之。其後莫知所終。至今搢紳間。有慕其德。用黃金鑄像而佩之者。胄子曰。元緖爲人所烹。臨死歎曰。行不擇日。今而見烹。雖然。盡南山之樵。不能潰我。其慷慨如此。次子曰元宁。浪遊吳越間。自號洞玄先生。次子。史失其名。形極小不能卜。唯升木捕蟬。亦爲人所烹。其族屬或有得道。至千歲不死。所在有靑雲覆之者。或隱於吏。世號玄衣督郵云。

현부(玄夫)는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그 조상은 신인(神人)이다. 형제 열다섯 사람이 다 몸이 크고 힘이 뛰어났다. 천제가 명하여 바다 가운데 다섯 산을 떠받치게 한 이들이 그들이다」 한다. 자손에 이르러서는 모습이 점점 작아지고 또 힘으로 이름난 이가 없어 오직 점치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땅의 이로움과 해로움을 살펴 그 사는 곳을 늘 옮겼으므로 그 고향과 세계(世系)를 자세히 알 수 없다.

먼 조상 문갑(文甲)은 요임금 때 낙수 가에 숨어 살았다. 임금이 그 어짊을 듣고 흰 구슬로 초빙하니 문갑이 기이한 그림을 지고 와서 바쳤다. 임금이 아름답게 여겨 낙수후(洛水侯)에 봉하였다. 증조는 스스로 상제의 사자라 하고 그 이름을 말하지 않았는데,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지고 와서 백우(伯禹)에게 준 이가 그이다. 할아버지 백약(白若)은 하후씨 때 곤오(昆吾)에서 솥을 부을 때 옹난을(翁難乙)과 더불어 힘을 다해 공이 있었다. 아버지 중광(重光)은 나면서 왼쪽 옆구리에 글이 있어 「달의 아들 중광이니, 나를 얻는 이는 필부면 제후가 되고 제후면 제왕이 되리라」 하였다. 그 글을 따서 이름을 지었다.

현부는 더욱 깊고 그윽하였다. 그 어머니가 꿈에 요광성(瑤光星)이 품에 드는 것을 보고 임신하였다. 처음 났을 때 관상 보는 이가 말하기를 「등은 반구(盤丘)를 본떴고 무늬는 별자리를 이루었으니 반드시 신성한 상이다」 하였다. 자라서는 역법과 위서(緯書)를 깊이 연구하여, 무릇 하늘과 땅과 해와 달과 음양과 추위와 더위와 바람과 비와 어둠과 밝음과 재앙과 상서와 화와 복의 변화를 미리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또 신선의 기운을 다스리고 도인(導引)하여 죽지 않는 방법을 배웠다. 성품이 조심스러움을 숭상하여 늘 껍질을 두르고 다녔다.

임금이 그 이름을 듣고 사자를 보내어 초빙하였다. 현부는 오만하게 돌아보지 않고 이렇게 노래하였다. 「진흙 속에 노는 것이 그 즐거움이 끝이 없네. 수건 상자에 담기는 총애야 어찌 내가 바라는 바이랴.」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부를 수 없었다.

그 뒤 송(宋)나라 원왕(元王) 때 예저(豫且)가 억지로 그를 잡아 왕에게 보내려 하였다. 미처 뵙기 전에 왕의 꿈에 어떤 사람이 검은 옷에 짐수레를 타고 와서 고하기를 「나는 청강의 사자입니다. 장차 왕을 뵈려 합니다」 하였다. 이튿날 예저가 과연 현부를 데리고 와서 뵈니 왕이 크게 기뻐하여 벼슬을 주려 하였다. 현부가 말하였다. 「신은 예저에게 강요당했고 또 왕에게 덕이 있다는 말을 들었으므로 와서 뵐 뿐입니다. 벼슬과 녹은 본디 뜻이 아닙니다. 왕께서 어찌 붙들어 두고 보내지 않으려 하십니까.」 왕이 놓아 보내려 하였으나 위평(衛平)이 은밀히 간하여 그만두었다. 곧 수형승(水衡丞)에 임명하고 또 도수사자(都水使者)로 옮겼다가 이윽고 태사령(大史令)으로 뽑았다. 무릇 나라의 시행과 조치와 움직임과 흥망이 일의 크고 작음을 가리지 않고 그에게 물은 뒤에 행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임금이 일찍이 놀리며 말하였다. 「그대는 신명의 후손이요 또 길흉에 밝은데, 일찍 스스로 꾀하지 못하고 예저의 꾀에 떨어져 과인에게 잡힌 것은 어찌 된 일인가.」 현부가 말하였다. 「밝음에도 보지 못하는 바가 있고 슬기에도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왕이 웃었다. 그 뒤로 어디서 마쳤는지 알지 못한다. 지금도 벼슬아치들 사이에 그 덕을 사모하여 황금으로 상을 부어 차고 다니는 이가 있다.

맏아들은 원서(元緖)라 하는데 남에게 삶겨 죽을 때 탄식하며 말하기를 「다니는 데 날을 가리지 않아 이제 삶기는구나. 그러나 남산의 나무를 다 때어도 나를 문드러지게 하지는 못하리라」 하였다. 그 강개함이 이와 같았다. 다음 아들은 원저(元宁)라 하는데 오나라와 월나라 사이를 떠돌며 스스로 동현선생(洞玄先生)이라 하였다. 다음 아들은 역사에 그 이름이 빠졌는데, 모습이 몹시 작아 점을 치지 못하고 오직 나무에 올라 매미를 잡다가 또한 남에게 삶겼다. 그 겨레 가운데 혹 도를 얻어 천 년에 이르도록 죽지 않은 이가 있는데 있는 곳에 푸른 구름이 덮는다 하고, 혹은 아전 노릇에 숨어 세상에서 현의독우(玄衣督郵)라 부른다 한다.

협주 1

玄中記曰。鼇。巨龜也。

《현중기(玄中記)》에 「오(鼇)는 큰 거북이다」라고 했다.

2사신의 말

史臣曰。察至微防未兆。聖人容或有差。以玄夫之智。不能杜豫且之謀。又不救二子之烹。況其餘哉。昔仲尼厄於匡。又使門人子路未免於醢。嗚呼。可不愼乎。

사신은 말한다. 지극히 은미한 것을 살피고 조짐이 없는 것을 막는 데는 성인도 혹 어긋남이 있을 수 있다. 현부의 슬기로도 예저의 꾀를 막지 못했고 또 두 아들이 삶기는 것을 구하지 못했으니 하물며 그 나머지랴. 옛날 중니(仲尼)도 광(匡) 땅에서 곤욕을 당했고 또 제자 자로(子路)가 젓 담기는 것을 면하지 못하게 하였다. 아, 삼가지 않을 수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