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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목에서 새로 새긴 《동파문집》 발문全州牧新雕東坡文集跋尾

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 · 이규보(李奎報) · 1241년 (고려 고종 28) 엮음 · 1251년 고쳐 보탬 · 단락 1 · 한자 398자 · 낭독 3.2분

동국이상국집 전집 권21 고려 이규보가 평생 지은 글을 아들 이함이 1241년에 엮어 새기고, 손자 이익배가 1251년에 고쳐 보탠 문집. 시와 부, 임금께 올린 표와 전, 절과 탑에 붙인 기, 비명과 묘지명, 편지와 서문, 그리고 몽골이 쳐들어온 때에 오간 국서까지 담겼다. 고구려 시조를 노래한 「동명왕편」이 전집 권3에 있고, 술과 거문고와 시를 벗 삼아 스스로 백운거사라 한 사람의 하루하루가 후집에 남아 있다. 책은 그가 눈을 앓다 붓을 놓는 마지막 시와, 그가 죽은 뒤 남이 지어 붙인 뇌서·묘지명으로 닫힌다.

夫文集之行乎世。亦各一時所尙而已。然今古已來。未若東坡之盛行。尤爲人所嗜者也。豈以屬辭富贍。用事恢博。滋液之及人也。周而不匱故歟。自士大夫至于新進後學。未嘗斯須離其手。咀嚼餘芳者皆是。其摹本舊在尙州。不幸爲虜兵所焚滅。了無孑遺矣。完山守禮部郞中崔君址。好學樂善君子人也。聞之慨然。方有重刻之志。時胡騎倏來忽往。間不容毫。州郡騷然。略無寧歲。則似若未遑於文事。而太守以爲古之人。尙有臨戎雅歌。投戈講藝者。文之不可廢如此。以是邑之大也。此一段幺麽事。咄嗟可辦。而若以彼區區戎醜之故。將姑息以俟太平。庸詎知後之來者又因循姑息。便不成吾志耶。遂直斷聞于上。上亦好文。欣然允可。於是當虜之未來。間農之未作。使之雕鏤。不日迺畢。費不煩而力有餘矣。非夫幹事貞固。綽有餘裕者。孰於此時成大事如此其敏耶。其爲政之大體。亦可知已。君於予爲門人。故託以標識。予亦嘉君之以他邑之亡書。以爲私憂。移之其邑。汲汲於補益學子。是以粗書本末。以跋其尾云。時龍集柔兆㴫灘辜月日。金紫光祿大夫參知政事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判戶部事大子大保臣李奎報序。

무릇 문집이 세상에 행해지는 것도 또한 각기 한때에 숭상하는 바일 뿐이다. 그러나 예나 이제나 동파처럼 성하게 행해져 더욱 사람들이 즐기는 이는 없었다. 어찌 말을 엮음이 넉넉하고 옛일을 씀이 넓어, 그 적셔 주는 것이 사람에게 미침이 두루 하고 모자라지 않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사대부로부터 새로 나아가는 후학에 이르기까지 잠시도 손에서 놓지 않고 남은 향기를 씹는 이가 다 그러하다.

그 판본이 예전에 상주(尙州)에 있었는데 불행히 오랑캐 군사에게 불타 없어져 조금도 남은 것이 없었다. 완산 수령 예부낭중 최군 지(崔君址)는 배우기를 좋아하고 착함을 즐기는 군자다. 이를 듣고 개연히 다시 새길 뜻을 두었다.

그때 오랑캐 기병이 갑자기 왔다 홀연히 가니 사이에 터럭 하나 들일 틈이 없었고, 주와 군이 어수선하여 조금도 편안한 해가 없었다. 그러니 글 짓는 일에는 겨를이 없을 듯하였다. 그런데 태수가 이렇게 여겼다. 「옛사람 가운데 오히려 싸움에 임하여 바른 노래를 부르고 창을 던지고 학예를 강론한 이가 있었으니 글을 폐할 수 없음이 이와 같다. 이 고을이 크니 이 자잘한 일쯤은 눈 깜짝할 사이에 해낼 수 있다. 만약 저 하찮은 오랑캐 때문에 구차히 미루며 태평을 기다린다면, 뒤에 오는 이가 또 미루고 미루어 곧 내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될 줄 어찌 알겠는가.」 마침내 곧바로 결단하여 임금께 아뢰니 임금 또한 글을 좋아하시어 기꺼이 허락하셨다. 이에 오랑캐가 오지 않은 때와 농사가 일지 않은 틈을 타 새기게 하여 며칠 안 되어 마쳤다. 비용이 번거롭지 않고 힘이 남았다.

일을 주간함이 곧고 굳으며 넉넉함이 있는 이가 아니면, 누가 이런 때에 큰일을 이루기를 이처럼 민첩하게 하겠는가. 그 정사를 하는 큰 체모를 또한 알 만하다.

군은 나에게 문인이 되므로 표지를 부탁하였다. 나 또한 군이 다른 고을에서 없어진 책을 제 근심으로 삼아 그것을 제 고을로 옮기고, 배우는 이들에게 보태 주기에 부지런한 것을 아름답게 여긴다. 이 때문에 대강 본말을 적어 그 끝에 발문을 붙인다. 때는 병신년 십일월 아무 날, 금자광록대부 참지정사 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판호부사 태자태보 신 이규보가 서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