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서》에 최치원의 열전을 세우지 않은 것에 대한 의논唐書不立崔致遠列傳議
按唐書藝文志。載崔致遠四六一卷又桂苑筆耕二十卷。自注云。高麗人。賓貢及第。爲高騈淮南從事。予讀之。未嘗不嘉其中國之曠蕩無外。不以外國人爲之輕重。而旣令文集行於世。又載史如此者。然於文藝列傳。不爲致遠特立其傳。予未知其意也。若以爲其行事不足以立傳。則崔孤雲年十二。渡海入中華游學。一擧甲科及第。遂爲高騈從事。檄黃巢。巢頗沮氣。後官至都統巡官侍御史。及將還本國。同年顧雲贈儒仙歌。其略曰。十二乘船過海來。文章感動中華國。其迹章章如此。以之立傳。則固與文藝所載沈佺期,柳幷,崔元翰,李頻輩之半紙列傳有間矣。若以外國人。則已見于志矣。又於藩鎭虎勇。則李正己,黑齒常之等。皆高麗人也。各列其傳。書其事備矣。奈何於文藝。獨不爲孤雲立其傳耶。予以私意揣之。古之人於文章。不得不相嫌忌。況致遠以外國孤生入中朝。躪躒時之名輩。是近於中國之嫌者也。若立傳直其筆。恐涉其嫌。故略之歟。是予所未知者也。
《당서》 예문지(藝文志)를 살펴보면 최치원의 《사륙(四六)》 한 권과 또 《계원필경(桂苑筆耕)》 스무 권이 실려 있고, 스스로 주를 달아 「고려 사람이다.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여 고변(高騈)의 회남종사(淮南從事)가 되었다」 하였다. 내가 이를 읽고, 중국의 넓고 큼이 바깥을 두지 않아 외국 사람이라 하여 가볍게 여기거나 무겁게 여기지 않고 이미 문집을 세상에 행하게 하고 또 역사에 이처럼 실은 것을 아름답게 여기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러나 문예 열전에 최치원을 위해 따로 그 전을 세우지 않았으니 나는 그 뜻을 알지 못하겠다. 만약 그 행적이 전을 세우기에 넉넉하지 않다고 여긴다면, 최고운은 나이 열둘에 바다를 건너 중국에 들어가 유학하여 한 번에 갑과에 급제하고 마침내 고변의 종사가 되었다. 황소(黃巢)에게 격문을 보내니 황소가 자못 기가 꺾였다. 뒤에 벼슬이 도통순관 시어사(都統巡官侍御史)에 이르렀다. 본국으로 돌아가려 할 때 동년(同年) 고운(顧雲)이 「유선가(儒仙歌)」를 지어 주었는데, 그 대략에 「열두 살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 문장이 중화의 나라를 감동시켰다」 하였다. 그 자취가 이처럼 뚜렷하다.
이로써 전을 세운다면 참으로 문예에 실린 심전기·유병(柳幷)·최원한(崔元翰)·이빈(李頻) 무리의 반 장짜리 열전과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만약 외국 사람이라 해서라면 이미 지(志)에 보인다. 또 번진(藩鎭)의 용맹한 이로는 이정기(李正己)와 흑치상지(黑齒常之) 등이 다 고려 사람인데 각기 그 전을 벌이고 그 일을 갖추어 적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문예에서만 유독 고운을 위해 그 전을 세우지 않았는가.
내가 사사로운 뜻으로 헤아려 보건대, 옛사람은 문장에 대해 서로 꺼리고 시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물며 최치원은 외국의 외로운 서생으로 중조에 들어가 그때의 이름난 무리를 짓밟았으니 이는 중국의 꺼림에 가깝다. 만약 전을 세워 그 붓을 곧게 한다면 그 꺼림에 걸릴까 두려워 그래서 생략한 것인가. 이것이 내가 알지 못하는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