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 › 동국이상국집 › 전집 권22

일엄(日嚴)의 일을 논함論日嚴事

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 · 이규보(李奎報) · 1241년 (고려 고종 28) 엮음 · 1251년 고쳐 보탬 · 단락 1 · 한자 369자 · 낭독 3.5분

동국이상국집 전집 권22 고려 이규보가 평생 지은 글을 아들 이함이 1241년에 엮어 새기고, 손자 이익배가 1251년에 고쳐 보탠 문집. 시와 부, 임금께 올린 표와 전, 절과 탑에 붙인 기, 비명과 묘지명, 편지와 서문, 그리고 몽골이 쳐들어온 때에 오간 국서까지 담겼다. 고구려 시조를 노래한 「동명왕편」이 전집 권3에 있고, 술과 거문고와 시를 벗 삼아 스스로 백운거사라 한 사람의 하루하루가 후집에 남아 있다. 책은 그가 눈을 앓다 붓을 놓는 마지막 시와, 그가 죽은 뒤 남이 지어 붙인 뇌서·묘지명으로 닫힌다.

明廟。實三十七年大平之主也。終雖被廢。其明智有不可形容者。臣請粗論之。時南國有浮屠日嚴者。自稱世尊。人皆傳能理人疾病。雖至盲聾風癩。無不立愈。京師聞之。皆欲迎致。上重違衆志。先使內臣驗其實。內臣還奏如所聞。上不得已使使迎之。勑置東城外弘法寺。其始來也。冒綵㲲巾。乘駮馬。以綾扇障其面。徒衆不可勝計。遮擁馬首。有不得正視其顔者。京師士庶。日夜會其寺。無慮萬餘人。皆唱阿彌陀佛。聲聞十里。乃至公卿搢紳及其配耦。幽閨處女。其聚如林。皆以髮布其前。藉日嚴之足。凡日嚴飮食之餘。沐浴之水。苟得之。雖涓滴貴如千金。無不飮服。當此之際。上若迎入大內。痛加禮敬。則一國變爲胡風。以至男女雜處。淫亂必甚矣。上漸驗其實。放遣江南。明廟之智如此。至聖子神孫。反正享祚。焉知不以此耶。但恨當時無一諫官如韓文部諫迎佛骨者耳。後驗其事。則其僧先敎人曰。萬法唯心。汝若勤念佛曰我病已愈。則病隨而愈矣。愼勿言疾之不愈。以是盲者妄言已視。聾者亦言已聞。所以令人易惑。是豈國之妖者歟。嗚呼。幾誤一國矣。

명종(明宗)은 실로 서른일곱 해 태평의 임금이시다. 끝내 비록 폐위되었으나 그 밝은 슬기는 형용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신이 청컨대 대강 논하겠다.

그때 남쪽 지방에 일엄이라는 중이 있어 스스로 세존이라 일컬었다. 사람들이 다 그가 사람의 병을 고칠 수 있어 비록 눈멀고 귀먹고 중풍 들고 문둥병에 이르기까지 그 자리에서 낫지 않는 것이 없다고 전하였다. 서울에서 이를 듣고 다들 맞아들이고자 하였다. 임금이 뭇사람의 뜻을 어기기 어려워 먼저 내신을 시켜 그 실상을 살피게 하였는데, 내신이 돌아와 들은 것과 같다고 아뢰었다. 임금이 마지못해 사자를 보내 맞아들이고 동성(東城) 밖 홍법사(弘法寺)에 두라고 명하였다.

그가 처음 올 때에 채색 모직 두건을 쓰고 얼룩말을 타고 비단 부채로 그 얼굴을 가렸다. 무리를 다 셀 수 없어 말 머리를 가려 막으니 그 얼굴을 바로 보지 못하는 이가 있었다. 서울의 벼슬아치와 백성이 밤낮으로 그 절에 모이니 무릇 만여 명이었다. 다들 아미타불을 부르니 소리가 십 리에 들렸다. 공경과 벼슬아치와 그 아내와 깊은 규방의 처녀에 이르기까지 그 모임이 숲 같았다. 다들 머리털을 그 앞에 펴서 일엄의 발을 받쳤다. 무릇 일엄이 먹고 마시고 남은 것과 목욕한 물을 진실로 얻으면, 비록 몇 방울이라도 천금같이 귀하게 여겨 마시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때에 임금이 만약 대궐 안으로 맞아들여 지극히 예로 공경했더라면, 온 나라가 오랑캐 풍속으로 변하여 남녀가 섞여 지내고 음란함이 반드시 심해지는 데 이르렀을 것이다. 임금이 점차 그 실상을 살펴 강남으로 내쫓았다. 명종의 슬기가 이와 같았다. 거룩한 아들과 신묘한 손자가 반정하여 자리를 누린 것이 어찌 이 때문이 아닌 줄 알겠는가. 다만 그때에 한퇴지가 부처 뼈 맞아들이는 것을 간한 것 같은 간관 하나가 없었던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뒤에 그 일을 살펴보니, 그 중이 먼저 사람에게 가르치기를 「만법(萬法)이 오직 마음이다. 너희가 만약 부지런히 염불하며 '내 병이 이미 나았다' 하면 병이 따라서 나을 것이다. 삼가 병이 낫지 않았다고 말하지 말라」 하였다. 이 때문에 눈먼 이는 이미 보인다고 함부로 말하고 귀먹은 이도 이미 들린다고 말했으니 사람을 쉬 홀리게 한 까닭이다. 이것이 어찌 나라의 요괴가 아니겠는가. 아, 하마터면 온 나라를 그르칠 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