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南行月日記
予嘗欲遊踐四方。凡吾馬足之所到。若有異聞異見。則詩以拾文以採。以爲後日之觀。其意何哉。假得老以至脚衰腰僂。所處不過房櫳之內。所見不出衽席之間。則取吾手集。覩昔少壯時奔馳步驟遊賞之跡。赫赫若前日事。尙足以舒暢其幽鬱也。予詩集中有江南詩若干首。至今讀其詩。則當日之遊。了了然若在眼前矣。後五載。出補全州幕府。二年間凡所遊歷。頗亦多矣。然每遇江山風月。嘯才出吻。而簿書獄訟。來相侵軼。止得一聯一句。而其不能卒就者多。故所得全篇。不過六十餘首。然列郡風土山川形勝。有所可記。而倉卒不能形于歌詠。則草草書于短牋片簡。目爲日錄。雜用方言俗語也。及庚申季冬。入洛閑居。始出而見之。莽莽焉不可讀之。其所自爲而反自笑也。盡取而焚棄之。拾一二可讀者。姑次而記之云。夫全州者。或稱完山。古百濟國也。人物繁浩。屋相櫛比。有故國之風。故其民不椎朴。吏皆若衣冠士人。進止詳審可觀。有中子山者。最蓊鬱。州之雄鎭也。其所謂完山者。特一短峯耳。異哉。一州之以此得號也。距州理一千步。有景福寺。寺有飛來方丈。予自昔聞之。以事叢務劇。不得一訪。一日。因休暇遂往觀焉。所謂飛來方丈者。昔普德大士自盤龍山飛來之堂也。普德字智法。嘗居高句麗盤龍山延福寺。一日。忽謂弟子曰。句麗唯尊道敎。不崇佛法。此國必不久矣。安身避難。有何處所。弟子明德曰。全州高達山。是安住不動之地。乾封二年丁卯三月三日。弟子開戶出見。則堂已移於高達山。距盤龍一千餘里也。明德曰。此山雖奇絶。泉水枯涸。我若知師移來。必幷移舊山之泉矣。崔致遠作傳備詳。故於此略之。十一月己巳。始歷行屬郡。則馬靈,鎭安。山谷間古縣也。其民質野。面如獼猴。杯盤飮食腥膻。有蠻貊風。有所訶詰。則狀若駭鹿然。似將奔遁也。循山繚繞而行。乃得至於雲梯。自雲梯至高山。危峯絶嶺。辟立萬仞。路極窄。下馬而後行。高山於他郡中。頗爲不陋。自高山至禮陽。自禮陽至朗山。皆一宿而去。明日將向金馬郡。求所謂支石者觀之。支石者。俗傳古聖人所支。果有奇迹之異常者。明日。入伊城。民戶凋耗。籬落蕭條。客館亦草覆之。吏之來者。不過纍纍四五人而已。見之惻然可傷。十二月。奉朝勑。課伐木邊山。邊山者。國之材府。修營宮室。靡歲不採。然蔽牛之大。干霄之幹。常不竭矣。以其常督伐木。故呼予曰斫木使。予於路上。戲作詩曰。權在擁軍榮可詑。官呼斫木辱堪知。以類於擔夫樵者之事故也。正月壬辰。初入邊山。層峯複岫。昂伏屈展。其首尾所措。跟肘所極。不知幾許里也。旁俯大海。海中有群山島猬島鳩島。皆朝夕所可至。海人云。得便風直若激箭。則其去中國。亦不遠也。山中尤多栗。一方之人。歲相資以爲食焉。行若干里。有美箭植植立如麻。僅數百步。皆以樊籬障之。絶竹林直下。始得平路。行至一縣。曰保安者也。方潮汐之來。雖平路。忽漫然爲江海。故候潮之進退。以爲行期。予始行也。潮方來。尙去人五十許步。於是促鞭馳馬欲先焉。從者愕然急止之。予不聽猶馳之。俄而崩奔蹴踏而至。其勢若萬軍倍道趨來。穹豐然甚可畏也。予𢥠然急走登山。而後僅得免焉。然亦能追及而蕩馬腹也。其或蒼波翠巘。隱見出沒。陰晴昏旦。每各異狀。雲霞綵翠。浮動乎其上。縹緲如萬疊畫屛。擧目眺賞。恨不與二三子之能詩者齊轡而同吟也。然萬景觸惱。使人情張王。初不思爲詩。不覺率然自作也。嘗過主史浦。明月出嶺。晃映沙渚。意思殊蕭洒。放轡不驅。前望蒼海。沈吟良久。馭者怪之。得詩一首云云。閏十二月丁未。又承朝旨。監諸郡冤獄。先指進禮縣。山極高。入之漸幽奧。如蹈異邦別境。邑邑然意漸無聊。日過午。始入郡舍。令尉皆不在。夜二更許。令尉各自八千步許。皆奔喘而來。以馬縛懸於門柱。戒人不給蒭粟。凡馬之極於馳者不如是。恐斃也。予陽睡而聞之。知二君顧老夫頗誠。故不得已聽置酒。有妓彈琵琶。頗可聽。予於他郡不飮。至是稍痛飮。又聽絃聲。豈以路遠境絶。如入異邦。而觸物易感之然耶。自進禮至南原府。南原。古帶方國也。客館後有竹樓。閑敞可愛。一宿而去。庚申春三月。又沿水課船。凡水村沙戶漁燈鹽市。無不遊閱。入萬頃,臨陂,沃溝。凡留數日而行。將指長沙。有一巖。巖有彌勒像。挺然突立。是因巖鑿出者。距其像若干步。又有巨巖枵然中虛者。自其中入之。地漸寬敞。上忽通豁。屋宇宏麗。像設嚴煥。是兜率寺也。日侵暮。促鞭絶馳。入禪雲寺宿焉。明日入長沙。自長沙到茂松。皆殘敗小郡。事亦無可記者。但沿江問船計艘而已。平昔遇一泉一池。挹酌游泳。愛翫不足者。慕江海而不見故也。今竝海久矣。態於目者。皆水也。聲於耳者。亦水之哮怒也。則倦然已猒見矣。何天之餉人驟過。如使飢者暴飽。而反猒見甘旨耶。是年八月二十日。予先君諱旦也。先一日遂往邊山蘇來寺。壁上有故資玄居士詩。予亦和二首書于壁。明日。與扶寧縣宰李君及餘客六七人至元曉房。有木梯高數十級。疊足凌兢而行。乃得至焉。庭階窓戶。上出林杪。聞往往有虎豹攀緣而未上者。傍有一庵。俗語所云蛇包聖人所昔住也。以元曉來居故。蛇包亦來侍。欲試茶進曉公。病無泉水。此水從巖罅忽湧出。味極甘如乳。因嘗點茶也。元曉房才八尺。有一老闍梨居之。庬眉破衲。道貌高古。障其中爲內外室。內室有佛像元曉眞容。外則一甁雙屨茶瓷經机而已。更無炊具。亦無侍者。但於蘇來寺。日趁一齋耳。予陪吏竊語予曰。此師嘗遇全州。所至恃力橫暴。人皆病之。其後莫知所去。今見之則其師也。予歎曰。夫中下人。其器有常。故滯而莫遷。凡以惡駭人者。器必有異於人。故其反於善。必岌岌超卓如此者。昔有獵將遇牛頭二祖大士。改過修善。卒成宿德。海東明德大士。亦自捉鷹。爲普德聖師之高弟。推此類言之。此師之折節易行。介然有殊行。殊不爲怪也。又問所謂不思議方丈者求觀之。其高險萬倍於曉公方丈。有木梯高可百尺。直倚絶壁。三面皆不測之壑。回身計級而下。乃得至於方丈。一失足則更無可奈何矣。予平日登一臺一樓高不過尋丈者。以頭病故。猶眩眩然不得俯臨。至是益悚然股抃。未入而頭已旋矣。然自昔飽聞勝跡。今幸特來。若不入見其方丈。又不得禮眞表大士之像。則後必悔矣。於是盤桓蒲北而下。足猶在級而若將已墮者。遂入焉。敲石取火。焚香禮律師眞容。律師者。名眞表。碧骨郡大井村人也。年十二。來棲賢戒山不思議巖。賢戒山者。卽此山是已。眞心宴坐。欲見慈氏地藏。踰日不見。乃投身絶壑。有二靑衣童子以手奉之曰。師法力微小。故二聖不見也。於是努力益勤。至三七日。巖前樹上。有慈氏地藏現身授戒。慈氏親授占察經二卷。幷與一百九十九栍。以爲導往之具。其方丈。以鐵索釘巖故不欹。俗傳海龍所爲也。將還。縣宰置酒一巓曰。此望海臺也。吾欲勞君。先使人設席而待。請小休焉。予遂登眺。則大海周廻。距山才百餘步。每一杯一詠。萬景自媚。殊無人世間一點塵思。飄然若蛻俗骨傅羽翰。飛出六合之外。而擧首一望。若將以手招群仙也。坐者十餘人皆醉。以予先君諱日故。但無管絃歌吹耳。凡所歷無可記則不載。夫以京師爲身。以四方爲支。則予所遊者。南道之一偏。而特一支之一指耳。況此錄也皆忘漏剗削之餘。烏足爲後日之觀乎。姑藏之。以待東西南北之窮遊極踐。摠記備錄。然後合爲一通。以爲老境忘憂之資。不亦可乎。辛酉三月日。志。
나는 일찍이 사방을 다니며 밟아 보고자 하였다. 무릇 내 말발굽이 이르는 곳에 만약 남다른 들음과 남다른 봄이 있으면 시로 줍고 글로 캐어 뒷날의 볼거리로 삼으려 하였다. 그 뜻이 무엇인가. 만약 늙어 다리가 쇠하고 허리가 굽어 거처하는 곳이 방 안에 지나지 않고 보는 것이 자리 사이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면, 내가 손수 모은 것을 꺼내 옛날 젊고 씩씩할 때 달리고 걷고 노닐며 즐긴 자취를 보아, 어제 일처럼 뚜렷하여 오히려 그 그윽한 답답함을 펴기에 넉넉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 시집 가운데 「강남시(江南詩)」 몇 수가 있는데, 이제 그 시를 읽으면 그날의 노닒이 뚜렷하여 눈앞에 있는 듯하다. 뒤 다섯 해에 나가서 전주(全州)의 막부(幕府)에 보임되었는데 두 해 사이에 무릇 다니며 겪은 것이 자못 또한 많았다. 그러나 강산과 바람과 달을 만날 때마다 읊는 재주가 입에서 나오려 하면 문서와 옥송이 와서 서로 침노하여, 겨우 한 연 한 구절을 얻고 마침내 이루지 못한 것이 많았다. 그러므로 얻은 온 편이 육십여 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여러 고을의 풍토와 산천의 빼어난 형세로 적을 만한 것이 있는데 창졸간에 노래로 나타내지 못하면, 짧은 종이와 조각 쪽지에 대충 적고 이를 「일록(日錄)」이라 하여 사투리와 속된 말을 섞어 썼다. 경신년 섣달에 서울에 들어와 한가히 지내다가 비로소 꺼내 보니 아득하여 읽을 수 없었다. 제가 지은 것인데도 도리어 스스로 웃었다. 다 가져다 불살라 버리고 한둘 읽을 만한 것을 주워 우선 차례를 매겨 적는다.
무릇 전주라는 곳은 혹 완산(完山)이라고도 하니 옛 백제국이다. 인물이 번성하고 집이 서로 빗살처럼 늘어서 옛 나라의 풍모가 있다. 그러므로 그 백성이 투박하지 않고 아전이 다 의관을 갖춘 선비 같아, 나아가고 물러남이 자세하고 살펴 볼 만하다. 중자산(中子山)이라는 것이 있어 가장 울창하니 고을의 웅장한 진산이다. 그 이른바 완산이라는 것은 다만 짧은 봉우리 하나일 뿐이다. 이상하다, 한 고을이 이것으로 이름을 얻은 것이.
고을 관아에서 천 걸음 떨어진 곳에 경복사(景福寺)가 있고 절에 비래방장(飛來方丈)이 있다. 나는 예로부터 이를 들었으나 일이 많고 사무가 바빠 한 번도 찾지 못했다. 하루는 말미를 얻어 마침내 가서 보았다. 이른바 비래방장이라는 것은 옛날 보덕(普德) 대사가 반룡산(盤龍山)에서 날아온 집이다.
보덕은 자가 지법(智法)이니 일찍이 고구려 반룡산 연복사(延福寺)에 살았다. 하루는 문득 제자에게 말하기를 「고구려가 오직 도교만 높이고 불법을 숭상하지 않으니 이 나라가 반드시 오래가지 못하리라. 몸을 편안히 하고 난을 피하려면 어느 곳이 좋겠는가」 하였다. 제자 명덕(明德)이 말하기를 「전주 고달산(高達山)이 편안히 머물러 움직이지 않을 땅입니다」 하였다. 건봉(乾封) 이년 정묘 삼월 사흗날 제자가 문을 열고 나가 보니 집이 이미 고달산으로 옮겨져 있었는데 반룡산에서 천여 리 떨어진 곳이었다. 명덕이 말하기를 「이 산이 비록 기이하고 빼어나나 샘물이 말랐다. 내가 만약 스님이 옮겨 오시는 것을 알았더라면 반드시 옛 산의 샘도 아울러 옮겼을 것이다」 하였다. 최치원이 전을 지어 자세히 갖추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십일월 기사일에 비로소 딸린 고을들을 두루 다녔다. 마령(馬靈)과 진안(鎭安)은 산골짜기 사이의 옛 고을이다. 그 백성이 질박하고 촌스러워 얼굴이 원숭이 같고, 잔과 소반의 마시고 먹는 것에 비린내가 나며 오랑캐 풍속이 있다. 꾸짖는 바가 있으면 모습이 놀란 사슴 같아 장차 달아날 듯하다.
산을 따라 둘러 가서야 운제(雲梯)에 이를 수 있었다. 운제에서 고산(高山)에 이르기까지 위태로운 봉우리와 끊어진 재가 만 길이나 깎아 서 있고 길이 몹시 좁아, 말에서 내린 뒤에야 갈 수 있었다. 고산은 다른 고을 가운데 자못 누추하지 않다. 고산에서 예양(禮陽)에 이르고 예양에서 낭산(朗山)에 이르기까지 다 하룻밤씩 자고 떠났다.
이튿날 장차 금마군(金馬郡)으로 향하여 이른바 지석(支石)이라는 것을 찾아 보았다. 지석이라는 것은 세속에 옛 성인이 괴어 놓은 것이라 전하는데, 과연 기이한 자취로 예사롭지 않은 것이 있었다.
이튿날 이성(伊城)에 들어가니 민호가 줄어 없어지고 울타리가 쓸쓸하며 객관도 또한 풀로 덮은 것이었다. 오는 아전이 겨우 네댓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보기에 측은하여 마음 상할 만하였다.
십이월에 조정의 명을 받들어 변산(邊山)에서 나무 베는 일을 감독하였다. 변산은 나라의 재목 곳간이다. 궁실을 수리하고 짓느라 해마다 베지 않는 해가 없다. 그러나 소를 가릴 만큼 큰 것과 하늘을 찌를 만한 줄기가 늘 다하지 않는다. 늘 나무 베는 일을 감독하므로 나를 「작목사(斫木使)」라 불렀다. 내가 길 위에서 장난삼아 시를 지었다.
권세는 군사를 거느리는 데 있어 영화를 자랑할 만하나 관가에서 나무 베는 이라 부르니 욕됨을 알 만하네
짐꾼과 나무꾼의 일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정월 임진일에 처음 변산에 들어갔다. 층진 봉우리와 겹친 멧부리가 높았다 낮았다 굽었다 폈다 하여, 그 머리와 꼬리가 놓인 데와 발꿈치와 팔꿈치가 다한 데가 몇 리인지 알지 못하겠다. 곁으로 큰 바다를 굽어보는데 바다 가운데 군산도(群山島)와 위도(猬島)와 구도(鳩島)가 있어 다 아침저녁으로 이를 만하다. 바닷사람이 말하기를 「순한 바람을 얻어 곧바로 쏜 화살처럼 가면 중국에 가는 것도 또한 멀지 않다」 하였다.
산속에 밤나무가 더욱 많아 한 지방 사람이 해마다 서로 이에 의지하여 먹을 것으로 삼는다. 몇 리를 가니 좋은 화살대가 삼처럼 빽빽이 서 있는 것이 겨우 수백 걸음인데 다 울타리로 막아 두었다. 대숲을 끊고 곧바로 내려가서야 비로소 평탄한 길을 얻었다.
가다가 한 고을에 이르니 보안(保安)이라는 곳이다. 바야흐로 밀물이 올 때에는 비록 평탄한 길이라도 문득 넘실넘실 강과 바다가 된다. 그러므로 밀물의 나아가고 물러남을 살펴 갈 때를 삼는다. 내가 처음 갈 때에 밀물이 바야흐로 왔는데 아직 사람에게서 쉰 걸음쯤 떨어져 있었다. 이에 채찍을 재촉해 말을 달려 앞지르려 하니 따르는 이가 놀라 급히 말렸다. 내가 듣지 않고 오히려 달렸다. 이윽고 무너지듯 달려와 짓밟으며 이르는데, 그 형세가 만 군사가 길을 배로 하여 달려오는 것 같아 우뚝하고 넉넉하여 몹시 두려울 만하였다. 나는 두려워 급히 달려 산에 오른 뒤에야 겨우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또한 따라와 말 배를 씻을 수 있었다.
혹 푸른 물결과 푸른 멧부리가 숨었다 나타났다 하고 흐렸다 갰다 어두웠다 밝았다 하여, 매번 각기 다른 모습이었다. 구름과 노을의 채색이 그 위에 떠 움직여 아득하기가 만 겹 그림 병풍 같았다. 눈을 들어 바라보고 즐기며, 시를 잘 짓는 두세 사람과 고삐를 나란히 하고 함께 읊지 못하는 것을 한하였다. 그러나 온갖 경치가 마음을 건드려 사람의 정을 벌여 놓으니, 처음에는 시를 지을 생각이 없다가 나도 모르게 문득 절로 지었다.
일찍이 주사포(主史浦)를 지날 때 밝은 달이 재에서 나와 모래톱에 환히 비쳤다. 뜻이 자못 시원하여 고삐를 놓고 몰지 않으며 앞으로 푸른 바다를 바라보고 한참 읊조리니 마부가 괴이하게 여겼다. 시 한 수를 얻었다.
윤십이월 정미일에 또 조정의 뜻을 받들어 여러 고을의 원통한 옥사를 살폈다. 먼저 진례현(進禮縣)을 향하였다. 산이 몹시 높고 들어갈수록 점점 그윽하고 깊어, 다른 나라 별다른 지경을 밟는 듯하여 답답하게 뜻이 점점 즐겁지 않았다. 해가 낮을 지나서야 비로소 군의 관사에 들어갔는데 영(令)과 위(尉)가 다 없었다. 밤 이경쯤에 영과 위가 각기 팔천 걸음쯤 되는 데서 다 헐떡이며 달려왔다. 말을 문기둥에 묶어 매달고 사람에게 경계하여 꼴과 곡식을 주지 못하게 하였다. 무릇 말이 달리기를 다한 것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죽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내가 짐짓 자는 체하며 이를 듣고 두 사람이 늙은이를 돌보는 정성이 자못 두터운 줄을 알았다. 그러므로 마지못해 술자리 차리는 것을 들어주었다. 기생이 있어 비파를 타는데 자못 들을 만하였다. 내가 다른 고을에서는 마시지 않았는데 여기에 이르러 조금 통쾌히 마시고 또 줄 소리를 들었다. 어찌 길이 멀고 지경이 끊어져 다른 나라에 든 것 같아, 사물에 닿으면 쉬 느끼게 되어 그러한 것인가.
진례에서 남원부(南原府)에 이르렀다. 남원은 옛 대방국(帶方國)이다. 객관 뒤에 대나무 누각이 있어 한가하고 시원하여 사랑스러웠다. 하룻밤을 자고 떠났다.
경신년 봄 삼월에 또 물길을 따라 배 만드는 일을 감독하였다. 무릇 물가 마을과 모래 위 집과 고기잡이 등불과 소금 저자를 노닐며 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만경(萬頃)과 임피(臨陂)와 옥구(沃溝)에 들어가 무릇 며칠을 머물고 떠났다.
장사(長沙)로 향하려 하는데 바위 하나가 있고 바위에 미륵상이 있어 우뚝 솟아 있었다. 이는 바위를 따라 파낸 것이다. 그 상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또 큰 바위가 있어 텅 비어 속이 뚫렸는데, 그 속에서 들어가니 땅이 점점 넓어지고 위가 문득 훤히 트였다. 집이 넓고 화려하며 불상이 엄숙하고 빛나니 이는 도솔사(兜率寺)다.
해가 저물어 채찍을 재촉해 몹시 달려 선운사(禪雲寺)에 들어가 잤다. 이튿날 장사에 들어갔다. 장사에서 무송(茂松)에 이르기까지 다 쇠잔한 작은 고을이라 일도 또한 적을 만한 것이 없었다. 다만 강을 따라 배를 묻고 척수를 셀 뿐이었다.
평소에 샘 하나 못 하나를 만나도 떠서 마시고 헤엄치며 아끼고 즐기기를 다하지 못한 것은, 강과 바다를 사모하되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바다를 낀 지 오래되어 눈에 자태를 보이는 것이 다 물이요 귀에 소리 나는 것도 물이 으르렁대는 것이니, 지쳐서 이미 보기가 물렸다. 어찌 하늘이 사람에게 먹임이 갑작스레 지나쳐, 주린 이를 갑자기 배부르게 하여 도리어 단 맛을 보기 싫어하게 하는가.
이해 팔월 스무날은 내 선친의 기일이다. 하루 앞서 마침내 변산 소래사(蘇來寺)에 갔다. 벽 위에 돌아간 자현거사(資玄居士)의 시가 있어 나도 두 수를 화답하여 벽에 썼다.
이튿날 부령현(扶寧縣)의 원 이군과 나머지 손 예닐곱 사람과 함께 원효방(元曉房)에 이르렀다. 나무 사다리가 있어 높이가 수십 층이라 발을 겹치고 조마조마하게 가서야 이를 수 있었다. 뜰과 섬돌과 창과 문이 위로 숲 끝에 나와 있다. 듣건대 이따금 범과 표범이 붙잡고 오르려다가 오르지 못하는 일이 있다 한다.
곁에 암자 하나가 있는데 속담에 이른바 사포성인(蛇包聖人)이 옛날에 머물던 곳이다. 원효가 와서 살았으므로 사포도 또한 와서 모셨다. 차를 달여 원효공에게 올리려 했으나 샘물이 없어 괴로워하니, 이 물이 바위 틈에서 문득 솟아 나왔는데 맛이 몹시 달아 젖 같았다. 그래서 늘 차를 달였다.
원효방은 겨우 여덟 자다. 늙은 스님 한 분이 살고 있는데 눈썹이 덥수룩하고 누더기가 해졌으며 도인의 모습이 높고 예스러웠다. 그 가운데를 막아 안방과 바깥방으로 하였다. 안방에는 불상과 원효의 진영이 있고, 바깥에는 병 하나와 신 한 켤레와 차 사발과 경 올리는 궤가 있을 뿐이었다. 다시 밥 짓는 기구도 없고 또한 모시는 이도 없었다. 다만 소래사에서 날마다 한 끼 재를 얻어 올 뿐이었다.
나를 모시는 아전이 가만히 내게 말하였다. 「이 스님이 일찍이 전주에서 이르는 곳마다 힘을 믿고 사납게 굴어 사람들이 다 병으로 여겼는데, 그 뒤 간 곳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제 보니 그 스님입니다.」 내가 탄식하여 말하였다. 「무릇 중간과 아래 사람은 그 그릇이 일정하므로 막혀서 옮기지 못한다. 무릇 악으로 남을 놀라게 하는 이는 그릇이 반드시 남과 다른 것이 있으므로, 그가 착한 데로 돌아가면 반드시 이처럼 우뚝하게 뛰어난다. 옛날 어떤 사냥꾼 장수가 우두(牛頭)의 이조(二祖) 대사를 만나 허물을 고치고 착함을 닦아 마침내 오랜 덕을 이루었고, 해동의 명덕 대사도 또한 스스로 매를 잡던 이로서 보덕 성사의 높은 제자가 되었다. 이를 미루어 말하면 이 스님이 절개를 꺾고 행실을 고쳐 꿋꿋이 남다른 행실이 있는 것이 조금도 괴이하지 않다.」
또 이른바 부사의방장(不思議方丈)이라는 것을 물어 보기를 구했다. 그 높고 험함이 원효공의 방장보다 만 배였다. 나무 사다리가 있어 높이가 백 자쯤 되는데 곧바로 절벽에 기대어 있고 세 면이 다 헤아릴 수 없는 골짜기다. 몸을 돌려 층계를 세며 내려가서야 방장에 이를 수 있으니, 한 번 발을 헛디디면 다시 어찌할 수 없다.
내가 평소에 대나 누각 하나를 오를 때에도 높이가 여덟 자를 넘지 않는데 머리 병 때문에 오히려 어질어질하여 굽어보지 못했다. 여기에 이르러 더욱 두려워 다리가 떨려 들어가기도 전에 머리가 이미 돌았다. 그러나 예로부터 빼어난 자취를 실컷 들었고 이제 다행히 특별히 왔으니, 만약 그 방장을 들어가 보지 못하고 또 진표(眞表) 대사의 상에 예를 올리지 못하면 뒤에 반드시 뉘우칠 것이었다. 이에 서성이다가 북쪽으로 내려가는데 발이 아직 층계에 있으면서도 이미 떨어질 듯하였다. 마침내 들어갔다. 돌을 두드려 불을 얻어 향을 사르고 율사(律師)의 진영에 예를 올렸다.
율사는 이름이 진표니 벽골군(碧骨郡) 대정촌(大井村) 사람이다. 나이 열둘에 와서 현계산(賢戒山) 부사의암(不思議巖)에 깃들었다. 현계산이란 곧 이 산이 이것이다. 참된 마음으로 고요히 앉아 미륵과 지장을 뵈려 하였으나 날이 지나도 뵙지 못하자 곧 몸을 끊어진 골짜기에 던졌다. 푸른 옷 입은 두 동자가 손으로 받들며 말하기를 「스님의 법력이 작고 적으므로 두 성인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힘써 더욱 부지런히 하여 스무하루에 이르니, 바위 앞 나무 위에 미륵과 지장이 몸을 나타내어 계를 주었다. 미륵이 몸소 《점찰경(占察經)》 두 권을 주고 아울러 점대 백아흔아홉 개를 주어 나아가게 이끄는 도구로 삼게 하였다. 그 방장은 쇠사슬로 바위에 못 박았으므로 기울지 않는다. 세속에 바다 용이 한 것이라 전한다.
돌아오려 할 때 현의 원이 한 봉우리에 술자리를 차리고 말하였다. 「이는 망해대(望海臺)입니다. 제가 그대를 위로하려 하여 먼저 사람을 시켜 자리를 베풀고 기다리게 했으니 청컨대 조금 쉬십시오.」 내가 마침내 올라 바라보니 큰 바다가 둘러 있어 산에서 겨우 백여 걸음 떨어져 있었다. 한 잔 마시고 한 번 읊을 때마다 온갖 경치가 절로 아양 떨어 인간 세상의 한 점 티끌 생각도 자못 없었다. 나부껴 속된 뼈를 벗고 날개를 단 듯하여 여섯 방위 밖으로 날아 나가, 머리를 들어 한 번 바라보매 손으로 뭇 신선을 부를 듯하였다. 앉은 이 열 몇 사람이 다 취하였다. 내 선친의 기일이므로 다만 관현과 노래와 피리만 없었을 뿐이다.
무릇 거쳐 온 곳으로 적을 만한 것이 없으면 싣지 않았다. 무릇 서울을 몸으로 삼고 사방을 팔다리로 삼는다면, 내가 노닌 곳은 남쪽 지방의 한 귀퉁이요 다만 한 팔다리의 한 손가락일 뿐이다. 하물며 이 기록은 다 잊고 빠뜨리고 깎아 낸 나머지이니 어찌 뒷날의 볼거리가 되기에 넉넉하겠는가. 우선 간직해 두고 동서남북으로 다니기를 다하고 밟기를 다한 뒤에 모두 적고 갖추어 기록하기를 기다려, 그런 뒤에 합하여 한 벌로 만들어 늘그막에 근심을 잊는 밑천으로 삼으면 또한 옳지 않겠는가. 신유년 삼월 아무 날에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