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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개동기(天開洞記)天開洞記

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 · 이규보(李奎報) · 1241년 (고려 고종 28) 엮음 · 1251년 고쳐 보탬 · 단락 1 · 한자 356자 · 낭독 3.2분

동국이상국집 전집 권24 고려 이규보가 평생 지은 글을 아들 이함이 1241년에 엮어 새기고, 손자 이익배가 1251년에 고쳐 보탠 문집. 시와 부, 임금께 올린 표와 전, 절과 탑에 붙인 기, 비명과 묘지명, 편지와 서문, 그리고 몽골이 쳐들어온 때에 오간 국서까지 담겼다. 고구려 시조를 노래한 「동명왕편」이 전집 권3에 있고, 술과 거문고와 시를 벗 삼아 스스로 백운거사라 한 사람의 하루하루가 후집에 남아 있다. 책은 그가 눈을 앓다 붓을 놓는 마지막 시와, 그가 죽은 뒤 남이 지어 붙인 뇌서·묘지명으로 닫힌다.

泰和二年壬戌歲。予去城東之舊居。卜遷于城南安申之里。有冷泉潺湲。出於洞之左趾之巖竇。洞深地奧。如山村野居。蕭洒可愛。予居之甚樂。但洞名塞。雖吾亦不喜其名。後數載。有白秀才廷珪者來卜隣。其嚴君右承宣翰林學士某。或來寓居。往往嘗謂予曰。洞名殊未佳。子盍改之耶。予對曰。業已呼之久矣。非特此洞。擧一國皆呼之。予雖名之。豈盡戶曉。使皆導耶。矧微者所名。孰從之耶。遂不改至于今。然予之卜居是洞。今已二十餘年矣。自始來不數載。得除拜翰林。驟歷華要。今已踐四品矣。白君亦如之。自卜居于此。始得仕。累遷至侍御史。自爾美官豐祿者。衮衮來居。鬱乎騶騎之旁午。則予以爲天將大啓玆洞矣。夫否極則泰。塞久則通。是陰陽常數。洞之將啓也。予不可以不新其名。以答天意。於是。乃名之曰天開。今雖未使人導吾所名者。安知後世不有人能喩萬人。使皆得導玆名耶。人雖不呼之。天若知所以名之之意。則洞之益啓也無疑矣。況始之名塞者。人猶從之。若玆名豈終廢者耶。貞祐十一年癸未歲記。

태화(泰和) 이년 임술년에 내가 성 동쪽의 옛집을 떠나 성 남쪽 안신리(安申里)로 옮겨 자리를 잡았다. 찬 샘이 졸졸 골짜기 왼쪽 기슭의 바위 구멍에서 나온다. 골짜기가 깊고 땅이 그윽하여 산골 마을이나 들집 같아 시원하고 사랑스러웠다. 내가 살면서 몹시 즐거웠다. 다만 골짜기 이름이 「색(塞)」이라 비록 나도 그 이름을 좋아하지 않았다.

몇 해 뒤 백 수재 정규(白秀才廷珪)라는 이가 와서 이웃에 자리를 잡았다. 그 아버지인 우승선 한림학사 아무개가 혹 와서 붙어 살았는데 이따금 내게 말하였다. 「골짜기 이름이 자못 아름답지 못하니 그대가 어찌 고치지 않는가.」 내가 대답하였다. 「이미 부른 지 오래입니다. 이 골짜기뿐 아니라 온 나라가 다 그렇게 부릅니다. 제가 비록 이름을 짓는다 한들 어찌 집집이 다 깨우쳐 다들 그렇게 부르게 하겠습니까. 하물며 하찮은 이가 지은 이름을 누가 좇겠습니까.」 마침내 고치지 않고 지금에 이르렀다.

그러나 내가 이 골짜기에 자리 잡아 산 지 이제 이미 스무 해 남짓이다. 처음 온 뒤 몇 해 되지 않아 한림에 임명되고 빠르게 화려하고 요긴한 자리를 거쳐 이제 이미 사품을 밟았다. 백군도 또한 그러하여 여기에 자리 잡은 뒤로 비로소 벼슬하여 여러 번 옮겨 시어사에 이르렀다. 이로부터 아름다운 벼슬과 넉넉한 녹을 받는 이가 끊임없이 와서 살아, 말 탄 하인이 사방으로 오가는 것이 성하다.

그래서 나는 하늘이 장차 이 골짜기를 크게 열려 하는 것이라 여긴다. 무릇 막힘이 다하면 트이고 막힌 지 오래면 통하니 이는 음양의 떳떳한 이치다. 골짜기가 장차 열리려 하니 내가 그 이름을 새로 하여 하늘의 뜻에 답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곧 「천개(天開)」라 이름하였다.

이제 비록 사람들에게 내가 지은 이름을 부르게 하지 못하나, 후세에 능히 만 사람을 깨우쳐 다들 이 이름을 부르게 할 이가 없을 줄 어찌 알겠는가. 사람이 비록 부르지 않아도 하늘이 만약 이름 지은 뜻을 안다면 골짜기가 더욱 열릴 것이 의심할 바 없다. 하물며 처음에 「색」이라 이름한 것도 사람들이 오히려 좇았으니, 이 이름 같은 것이 어찌 끝내 폐하겠는가. 정우 십일년 계미년에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