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 상인(赫上人)의 능파정기(凌波亭記)赫上人凌波亭記
或曰。權豪貴人之有喜爲亭榭游觀之樂。人猶或非之。況浮屠而務爲此者。其無奈幾於夸浮羨侈而戾於道耶。予曰。非也。且人情之皆欲至於靑蓮佛界白玉仙臺者。無他焉。蓋以其地之淸淨無塵故耳。夫地之淸淨。則心亦爾也。未有心淸淨而爲濁惡熱惱之所乘者也。由是觀之。雖在人間世上。苟得値地之淸淨。而有以汰其心慮。則是亦佛界也仙臺也。何羨於彼哉。由是而習焉。其蹈佛仙境界。亦其漸也。三岳山人宗赫者。本曹溪韻士也。嘗放浪方外。浮雲其迹者久矣。越貞祐某年。偶得古院於壽春郡之坤維號德興者。以其山水可愛。故因駐錫焉。其棟宇之欹仄者悉更之。垣墻之頽圮者亦新之。乃至恢拓舊制。以廣其群髡棲集之地。然後意以爲有賓客之經由。吾不可不供其位。廢應接之禮矣。雖然。於佛宇中。亦不可置其放情肆體遊賞宴喜之所矣。於是選寺之傍地有水之泓碧漣漪者。遂植礎波底。跨亭於其上。以茅覆之。遠而望之。若輕舟畫舫浮在滄浪然也。有遊讌其上。則凡坐賓之俯仰屈伸一嚬一笑之態。與夫柸盤几席樽壺棋局之影。瀉在波面。若從明鏡中見人物什器之羅列映澈者。至如春水漫淥。日光涵明。有魚可數百尾遊泳族戲。俯鑑之了了然可數。或涼秋八九月時。木葉半脫。霜落水淸。丹楓夾岸。倒映波上。爛然若濯錦江中。此皆水亭所以爲勝也。雖大略如此。至絶異處又不可得而名言矣。見之者心自知耳。若傳夸於人。則口不能如眼也。畫之者。狀其粗耳。丹靑不能似其眞也。噫。以此餉客。其誰謂浮屠不宜有亭榭游觀之樂乎。自皇華星節。至于行旅之東西者。莫不遊踐。方其逍遙盤薄也。意若控靑彎跨白鶴。出乎八極之表矣。何白玉仙臺之足導哉。遊者尙爾。如吾禪老之常宴坐飽淸景者。想已與靑蓮佛界爲隣矣。何謂戾於道耶。赫公素喜文。憑予友韓鴻傳乞予爲記。欲爲亭之飾而傳之後。予不頷凡二年。韓君不能無慍色。然後粗志其一二。而因署其額曰凌波。蓋以亭之拔水斗起也。嗚戲。僕亦老矣。異日當掛冠高謝。以幅巾藜杖。往遊其中。作風月主人。而於一篇一詠。盡瀉無窮之景。以償予今日之懸懸傾佇也。湖山有靈。姑需焉。貞祐十一年。白雲居士待制典誥李春卿誌。
어떤 이가 말하였다. 「권세 있고 호탕하고 귀한 이가 정자와 누각의 노닐며 구경하는 즐거움을 즐겨 짓는 것도 사람들이 오히려 혹 그르다 한다. 하물며 중으로서 이런 일에 힘쓰는 이는 자랑하고 들뜨고 부러워하고 사치하는 데 가까워 도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말하였다. 「아니다. 또 사람의 정이 다 푸른 연꽃의 부처 세계와 흰 옥의 신선 누대에 이르고자 하는 것은 다른 까닭이 없다. 대개 그 땅이 맑고 깨끗하여 티끌이 없기 때문일 뿐이다. 무릇 땅이 맑고 깨끗하면 마음도 또한 그러하다. 마음이 맑고 깨끗한데 흐리고 악하고 뜨거운 번뇌에 타는 이는 있지 않다. 이로 보건대 비록 인간 세상에 있어도 진실로 땅의 맑고 깨끗함을 만나 그 마음과 생각을 씻을 수 있다면, 이 또한 부처 세계요 신선 누대다. 어찌 저것을 부러워하겠는가. 이로 말미암아 익히면 부처와 신선의 경계를 밟는 것도 또한 차츰함이다.」
삼악산인(三岳山人) 종혁(宗赫)이라는 이는 본디 조계(曹溪)의 운치 있는 선비다. 일찍이 세상 밖을 떠돌며 그 자취를 뜬구름으로 삼은 지 오래였다. 정우 아무 해에 우연히 춘천군(壽春郡) 서남쪽의 덕흥(德興)이라 부르는 옛 원(院)을 얻었다. 그 산수가 사랑스러우므로 이로 인해 지팡이를 머물렀다.
그 마룻대와 처마가 기운 것을 다 고치고 담이 무너진 것도 또한 새롭게 하였다. 이에 옛 제도를 넓혀 뭇 중이 깃들어 모일 자리를 넓혔다. 그런 뒤에 뜻하기를 「손님이 지나가는 일이 있으면 내가 그 자리를 마련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응접하는 예를 폐하게 된다. 그렇기는 하나 불당 가운데 또한 정을 놓고 몸을 펴 노닐며 즐기고 잔치하며 기뻐하는 곳을 둘 수 없다」 하였다.
이에 절 곁의 땅에 물이 깊고 푸르며 잔물결 이는 곳을 가려, 마침내 물결 밑에 주춧돌을 심고 그 위에 정자를 걸치고 띠로 덮었다. 멀리서 바라보면 가벼운 배와 그림 그린 배가 푸른 물결에 떠 있는 듯하다.
그 위에서 노닐며 잔치하면, 무릇 앉은 손이 굽어보고 우러르고 굽히고 펴며 한 번 찡그리고 한 번 웃는 자태와, 잔과 소반과 안석과 자리와 술동이와 병과 바둑판의 그림자가 물결 낯에 쏟아진다. 밝은 거울 속에서 사람과 물건과 세간이 벌여 서서 환히 비치는 것을 보는 듯하다. 봄물이 넘실넘실 푸르고 햇빛이 잠겨 밝을 때에 이르면, 물고기 수백 마리가 헤엄치며 무리 지어 노는 것을 굽어보면 또렷또렷하여 셀 수 있다. 혹 서늘한 가을 팔구월에 나뭇잎이 반쯤 떨어지고 서리가 내려 물이 맑으며, 붉은 단풍이 언덕을 끼고 물결 위에 거꾸로 비치면 찬란하기가 비단을 강 가운데서 빠는 듯하다. 이는 다 물가 정자가 빼어남이 되는 까닭이다.
비록 대략이 이와 같으나 지극히 남다른 곳에 이르러서는 또 이름 붙여 말할 수 없다. 보는 이가 마음으로 절로 알 뿐이다. 만약 남에게 전하여 자랑하려 하면 입이 눈만 못하고, 그리는 이는 그 거친 것을 그릴 뿐 단청이 그 참됨을 닮게 하지 못한다.
아, 이것으로 손을 먹이니 누가 중에게 정자와 누각의 노닐며 구경하는 즐거움이 마땅하지 않다 하겠는가. 임금의 빛나는 사자로부터 동서로 다니는 나그네에 이르기까지 노닐어 밟지 않는 이가 없다. 바야흐로 거닐고 자리 잡을 때에는 뜻이 푸른 난새를 당기고 흰 학에 걸터앉아 팔극 밖으로 나가는 듯하다. 어찌 흰 옥의 신선 누대를 이끌 것이 있겠는가. 노니는 이도 오히려 그러한데, 우리 선사처럼 늘 고요히 앉아 맑은 경치를 실컷 누리는 이야 생각건대 이미 푸른 연꽃의 부처 세계와 이웃이 되었을 것이다. 어찌 도에 어긋난다 하겠는가.
혁공은 본디 글을 좋아하여 내 벗 한홍전(韓鴻傳)에게 의지하여 내게 기를 지어 달라 빌었다. 정자의 꾸밈으로 삼아 뒤에 전하려 한 것이다. 내가 무릇 두 해를 끄덕이지 않으니 한군이 성난 낯빛이 없을 수 없었다. 그런 뒤에야 그 한둘을 대충 적고, 이로 인해 그 이마에 「능파(凌波)」라 써 붙였다. 대개 정자가 물에서 빼어나 우뚝 일어났기 때문이다.
아, 나도 또한 늙었다. 뒷날 마땅히 갓을 걸고 높이 사양하고 폭건(幅巾)과 명아주 지팡이로 그 가운데 가서 노닐며 바람과 달의 주인이 되리라. 그리하여 한 편의 시와 한 번의 읊음에 끝없는 경치를 다 쏟아, 오늘 내가 애타게 기울여 바라던 것을 갚으리라. 호수와 산에 신령이 있거든 잠시 기다리라. 정우 십일년, 백운거사 대제 전고 이춘경이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