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 › 동국이상국집 › 전집 권26

수재 김회영(金懷英)에게 보낸 글與金秀才懷英書

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 · 이규보(李奎報) · 1241년 (고려 고종 28) 엮음 · 1251년 고쳐 보탬 · 단락 1 · 한자 685자 · 낭독 6.2분

동국이상국집 전집 권26 고려 이규보가 평생 지은 글을 아들 이함이 1241년에 엮어 새기고, 손자 이익배가 1251년에 고쳐 보탠 문집. 시와 부, 임금께 올린 표와 전, 절과 탑에 붙인 기, 비명과 묘지명, 편지와 서문, 그리고 몽골이 쳐들어온 때에 오간 국서까지 담겼다. 고구려 시조를 노래한 「동명왕편」이 전집 권3에 있고, 술과 거문고와 시를 벗 삼아 스스로 백운거사라 한 사람의 하루하루가 후집에 남아 있다. 책은 그가 눈을 앓다 붓을 놓는 마지막 시와, 그가 죽은 뒤 남이 지어 붙인 뇌서·묘지명으로 닫힌다.

某啓。昔者方僕與足下未第時。寄洪圓六十餘日同學相磨。子尙記否。其後興王寺月師方丈。寫肝膽誓神交。吾今念之。子亦豈忘也否。足下淹貫史家。說唐漢事。如昨所覩。吾久已服之矣。僕所著作。子亦未敢多排。必不以僕爲乏於文者。蒙前月某日所辱啓事。不得修答。又蒙今月日啓事。復不能答。想足下必不以僕乏於文而不能修答。殆謂倨慢不遜。頑然不爲禮節。則計已獲罪左右。然僕之不答。亦必有謂。夫啓者。欲與人有所賀謝陳請。或敍情而爲之者。與表牋同體。獻於上則曰表。於太子王侯則曰牋。贄於搢紳士大夫則曰啓。因高卑別其名耳。要其體未始不同。今之人。於表牋則頗或倣古人體。於啓事則率張大其詞。多用古人之文之長且蔓者爲屬對。然後謂佳。不爾。必唾而棄之矣。此習。林宗庇始倡之矣。故林公獻某官啓曰。落落高才。崑崙岡上千金難價之美玉。昂昂勁節。峨嵋山西萬歲不長之孤松。此則不甚長蔓。而詞亦信美。其多至二十許字。而詰屈難句斷者亦衆矣。古人亦曰。古事無有不對者。有若雍齒且侯。吾屬何患。則已對以劉蕡不第。我輩登科。信哉斯言也。若暇日於書史中。努力不倦。收拾捃掇。則何有不對者乎。是亦詩之集句之比也。且百家衣體。亦非古人所甚尙。唯王荊公喜爲之。但貴卽席中急就者耳。迨曠日搜索古人詩集。然後爲之。何有不可乎。今人所以作啓。久已成習。不可克革。苟必用本文與古事。編列成章。則其所自創於心者。能有幾耶。僕欲反之。必爲所笑。若倣而爲之。必爲後世君子所笑。後世之笑。甚於今人之笑。寧被笑於今人。無爲後人所笑。又反覆思之。則所以投文於人者。欲求媚耳。反爲所笑。如勿投之。然則今人亦不可不懼。爲吾計者。不若皆輟而不作。俱免前後人所笑。是故。非有不得已干於王公大人者。則不爲也。故平生所著啓事甚些小。後當覓而見也。幸吾子勿至深訝而疑僕之倨也。吾輩親密間。若以詩或以手書往復亦可。何吾子再辱啓事。若後生新進之求之於長者之禮耶。初暑。伏惟萬萬自愛云云。

아무는 아룁니다. 옛날 내가 족하와 함께 아직 과거에 오르지 못하였을 때, 홍원사(洪圓寺)에 붙어 예순 날 남짓 함께 배우며 서로 갈았습니다. 그대는 아직 기억하십니까. 그 뒤 흥왕사(興王寺) 월 스님의 방장에서 간과 쓸개를 쏟아 놓고 마음으로 사귀기를 맹세하였습니다. 내 이제 그것을 생각하는데, 그대도 어찌 잊었겠습니까.

족하는 사서에 두루 밝아 당과 한의 일을 말하는 것이 어제 본 듯하니, 나는 오래전부터 이미 탄복해 왔습니다. 내가 지은 것을 그대도 감히 많이 밀어내지 않았으니, 반드시 나를 글이 모자란 자라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난달 아무 날 보내 주신 계사(啓事)를 받고 답을 닦지 못하였고, 또 이달 계사를 받고 다시 답하지 못하였습니다. 생각하기에 족하는 내가 글이 모자라 답을 닦지 못한다 여기지는 않고, 아마 거만하고 겸손하지 않아 뻣뻣이 예절을 지키지 않는다 하실 터이니, 헤아려 보면 이미 그대에게 죄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답하지 않은 데는 또한 반드시 까닭이 있습니다.

무릇 계(啓)라는 것은 남에게 축하하거나 사례하거나 아뢰어 청할 일이 있을 때, 또는 정을 펴려 할 때 짓는 것이니 표(表)와 전(牋)과 같은 체입니다. 임금께 올리면 표라 하고, 태자와 왕·제후에게는 전이라 하고, 벼슬아치와 사대부에게 드리면 계라 합니다. 높고 낮음에 따라 이름을 가른 것일 뿐이요, 그 체는 애초에 다르지 않습니다.

요즘 사람은 표와 전에서는 더러 옛사람의 체를 본뜨나, 계사에서는 대개 그 말을 벌려 크게 하고 옛사람의 글 가운데 길고 덩굴진 것을 많이 끌어와 짝을 맞춘 뒤에야 좋다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침을 뱉고 버립니다. 이 버릇은 임종비(林宗庇)가 처음 부른 것입니다. 그래서 임공이 아무 벼슬에게 올린 계에 이르기를 「우뚝한 높은 재주는 곤륜산 언덕 위 천금으로도 값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옥이요, 꿋꿋한 굳센 절개는 아미산 서쪽 만년을 자라지 않는 외로운 솔이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리 길고 덩굴지지 않았으며 말도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많게는 스무 자에 이르러 뒤엉켜 구를 끊기 어려운 것도 또한 많습니다.

옛사람도 「옛일에는 짝하지 못할 것이 없다」 하였습니다. 「옹치(雍齒)도 제후가 되었으니 우리 무리가 무엇을 근심하랴」 같은 것에는 이미 「유분(劉蕡)이 과거에 오르지 못하였는데 우리 무리는 과거에 올랐다」로 짝하였으니, 참으로 그 말이 맞습니다. 만일 한가한 날에 글과 사서 가운데서 게으르지 않게 힘써 주워 모으면 짝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또한 시에서 남의 구를 모아 잇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또 여러 집의 글을 이어 붙인 체도 옛사람이 몹시 받든 것은 아니요, 오직 왕형공(王荊公)이 즐겨 지었습니다. 다만 그 자리에서 급히 짓는 것을 귀하게 여길 뿐입니다. 여러 날을 들여 옛사람의 시집을 뒤진 뒤에 짓는다면 못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요즘 사람이 계를 짓는 법은 오래되어 이미 버릇이 되어 뜯어 고칠 수 없습니다. 만일 반드시 본문과 옛일을 써서 엮어 늘어놓아 글을 이룬다면, 스스로 마음에서 지어낸 것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내가 그것을 뒤집으려 하면 반드시 웃음거리가 되고, 본떠서 지으면 반드시 뒷세상 군자의 웃음거리가 됩니다. 뒷세상의 웃음은 요즘 사람의 웃음보다 심합니다. 차라리 요즘 사람에게 웃음을 받고 뒷사람에게 웃음거리가 되지는 않겠습니다. 또 되풀이 생각하면, 남에게 글을 던지는 것은 잘 보이기를 구하는 일인데 도리어 웃음거리가 된다면 던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요즘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 계책으로는 다 그쳐 짓지 않아 앞뒤 사람의 웃음을 함께 면하는 것만 못합니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왕공과 대인에게 구할 일이 아니면 짓지 않습니다. 그래서 평생 지은 계사가 매우 적으니, 뒤에 마땅히 찾아보십시오. 바라건대 그대는 깊이 이상히 여겨 내가 거만하다 의심하지 마십시오. 우리처럼 가까운 사이에는 시로든 손수 쓴 글로든 주고받아도 좋습니다. 어찌 그대가 두 번이나 계사를 보내어, 뒤에 난 새 사람이 어른에게 구하는 예처럼 하십니까.

첫더위입니다. 삼가 만 번 만 번 스스로를 아끼소서. 운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