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 › 동국이상국집 › 전집 권26

상시 민식(閔湜)께 올리는 글上閔上侍湜書

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 · 이규보(李奎報) · 1241년 (고려 고종 28) 엮음 · 1251년 고쳐 보탬 · 단락 1 · 한자 557자 · 낭독 5.7분

동국이상국집 전집 권26 고려 이규보가 평생 지은 글을 아들 이함이 1241년에 엮어 새기고, 손자 이익배가 1251년에 고쳐 보탠 문집. 시와 부, 임금께 올린 표와 전, 절과 탑에 붙인 기, 비명과 묘지명, 편지와 서문, 그리고 몽골이 쳐들어온 때에 오간 국서까지 담겼다. 고구려 시조를 노래한 「동명왕편」이 전집 권3에 있고, 술과 거문고와 시를 벗 삼아 스스로 백운거사라 한 사람의 하루하루가 후집에 남아 있다. 책은 그가 눈을 앓다 붓을 놓는 마지막 시와, 그가 죽은 뒤 남이 지어 붙인 뇌서·묘지명으로 닫힌다.

月日。某官某奉書于騎省學士閣下。昨者事有必關啓閣下者。造門納謁。蒙閣下欣然迎迓。賜以顔色。尋置酒酣暢。極歡而罷。方從容笑談間。再三目予曰。士當以謙恭畏愼爲志。近世有詩人林椿者。恃才傲物。竟不登一第。至窮餓而死。觀子之才。不後林生。常謙恭卑損。略無怠傲之色。又相貌充澤。必當遠到者。一言慰藉。有重千金。予非木腸。能不感泣。但念僕雖若怠傲者。其呈露于尊長之前。難矣。矧僕嘗竊怪挾文而自傲者曰。夫挾富貴之勢者。赫赫焉堂堂焉。其威足以服衆。其權足以制死生。故人其畏服奔走。俟命之不暇。孰肯議其是非哉。雖驕傲尙可。然要其終未有不自躓者。挾過人之力者。其拳勇足以脅制人物。雖倨且傲。莫有誰何者。然未有恃力而能長且久者也。況文章者。特一小伎耳。雖有錦腸繡肝奇麗之蘊。除知己外。非人人所敬而畏服者也。若以此自負。凌侮人物。必遭歐擊拉折之辱。非特此耳。其陷不測之禍亦審矣。是以。襧衡傲物。終敗身於黃祖。嵇康負氣。果見枉於鐘會。古之人類此者非一二。布在前史。炯若明鏡。然則凡鑑觀古人之成敗者。雖有所負。其謙恭畏愼。固出於自然。而如僕者。環顧一己。無一事可挾以爲怠傲者。雖折項俯地。不敢擡擧。縮縮然常若負大怍。固亦常理。而閣下有以此及予者。豈欲使予益痛折節。終保其身歟。愚雖不敏。敢不佩以周旋。書曰。謙受益慢招損。語曰。恭近於禮。遠恥辱也。此皆自甫學時。未嘗不習於耳熏於心者。加之閣下之曉喻若此。固當銘之座右。朝夕鑑戒。日繩其心而已。其遠到與未。皆天也命也。雖然。苟有知己如閣下者。手插羽翰。假以長風。則路亦何阻耶。不宣。某再拜。

어느 달 어느 날, 아무 벼슬 아무는 기성(騎省) 학사 합하께 글을 올립니다.

지난번 반드시 합하께 아뢰어야 할 일이 있어 문에 나아가 뵙기를 청하였더니, 합하께서 기꺼이 맞아 주시고 낯빛을 펴 대해 주셨습니다. 이어 술자리를 차려 흥겹게 마시고 몹시 즐긴 뒤에 자리를 파하였습니다. 조용히 웃으며 이야기하던 사이에 두세 번 저를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선비는 마땅히 겸손하고 공손하며 두려워하고 삼가는 것을 뜻으로 삼아야 한다. 근래에 시인 임춘(林椿)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재주를 믿고 남을 업신여기다가 마침내 과거에 한 번도 오르지 못하고 궁하고 굶주려 죽기에 이르렀다. 그대의 재주를 보면 임춘에게 뒤지지 않는데, 늘 겸손하고 공손하며 스스로를 낮추어 조금도 게으르고 거만한 낯빛이 없다. 또 얼굴 모습이 넉넉하고 윤택하니 반드시 멀리 이를 사람이다.」

한마디 위로가 천금보다 무거웠습니다. 저도 나무 속창이 아니니 어찌 느껴 울지 않겠습니까. 다만 생각하기에, 제가 비록 게으르고 거만한 자라 해도 그것을 높은 어른 앞에 드러내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더구나 저는 일찍이 글을 끼고 스스로 거만한 자를 마음속으로 이상히 여겨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부귀한 세력을 끼고 있는 이는 빛나고 당당하여 그 위엄이 뭇 사람을 누르기에 넉넉하고 그 권세가 죽고 사는 것을 주장하기에 넉넉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두려워 굽히고 달려와 분부를 기다리기에 바쁘니 누가 그 옳고 그름을 따지려 하겠습니까. 비록 교만하고 거만해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끝을 따져 보면 스스로 넘어지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남보다 뛰어난 힘을 끼고 있는 이는 그 주먹과 용맹이 사람을 위협하여 누르기에 넉넉하니, 비록 뻣뻣하고 거만해도 누가 무엇이라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힘을 믿고 길게 오래간 이는 없습니다.

하물며 글이란 한갓 작은 재주일 뿐입니다. 비단 같은 속과 수놓은 간을 지녀 기이하고 아름다운 것을 쌓았다 해도, 저를 알아주는 이를 빼면 사람마다 공경하고 두려워 굽히는 바가 아닙니다. 만일 이것으로 스스로 자랑하여 남을 업신여기면 반드시 때리고 꺾이는 욕을 당할 것이요, 이뿐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재앙에 떨어지는 것도 뻔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형(禰衡)은 남을 업신여기다가 마침내 황조(黃祖)에게 몸을 잃었고, 혜강(嵇康)은 기운을 자부하다가 마침내 종회(鍾會)에게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옛사람 가운데 이런 이가 한둘이 아니어서 지난 사서에 널려 있으니 밝은 거울처럼 환합니다.

그렇다면 옛사람의 이룸과 무너짐을 거울삼아 보는 이는 비록 자부할 것이 있어도 겸손하고 공손하며 두려워하고 삼가는 것이 본디 저절로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저 같은 자는 제 한 몸을 둘러보아도 끼고서 게으르고 거만할 만한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목을 꺾어 땅을 굽어보며 감히 들지 못하고, 움츠러들어 늘 큰 부끄러움을 진 듯한 것이 본디 또 예사로운 일입니다. 그런데도 합하께서 이 말씀을 저에게 미치신 것은, 저로 하여금 더욱 힘써 절개를 굽혀 마침내 그 몸을 보전하게 하려 하심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비록 총명하지 못하나 어찌 차고 다니며 따르지 않겠습니까.

「서경」에 「겸손하면 더함을 받고 거만하면 덜림을 부른다」 하였고, 옛말에 「공손함은 예에 가까우니 부끄러움과 욕됨을 멀리한다」 하였습니다. 이는 다 처음 배울 때부터 귀에 익고 마음에 젖지 않은 적이 없던 말입니다. 거기에 합하께서 이처럼 일러 주시니, 마땅히 앉은 자리 오른쪽에 새겨 두고 아침저녁으로 거울삼아 조심하며 날마다 그 마음을 바로잡을 뿐입니다.

멀리 이르는 것과 이르지 못하는 것은 다 하늘이요 운명입니다. 그러하오나 합하 같은 저를 알아주는 이가 있어 손으로 날개를 꽂아 주고 긴 바람을 빌려 주신다면, 길이 또 무엇으로 막히겠습니까.

이만 그칩니다. 아무는 두 번 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