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 › 동국이상국집 › 전집 권27

이윤보(李允甫)에게 답하는 글答李允甫手書

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 · 이규보(李奎報) · 1241년 (고려 고종 28) 엮음 · 1251년 고쳐 보탬 · 단락 1 · 한자 332자 · 낭독 3.3분

동국이상국집 전집 권27 고려 이규보가 평생 지은 글을 아들 이함이 1241년에 엮어 새기고, 손자 이익배가 1251년에 고쳐 보탠 문집. 시와 부, 임금께 올린 표와 전, 절과 탑에 붙인 기, 비명과 묘지명, 편지와 서문, 그리고 몽골이 쳐들어온 때에 오간 국서까지 담겼다. 고구려 시조를 노래한 「동명왕편」이 전집 권3에 있고, 술과 거문고와 시를 벗 삼아 스스로 백운거사라 한 사람의 하루하루가 후집에 남아 있다. 책은 그가 눈을 앓다 붓을 놓는 마지막 시와, 그가 죽은 뒤 남이 지어 붙인 뇌서·묘지명으로 닫힌다.

某啓。辱書敎。并示古賦一首古詩十首。噫。風雅楚詞不作久矣。不意復見於今矣。非惟格韻警絶。其所諷興。足以激時俗反之正者已。僕短於文。不爲時所推許。雖後生莫有袖其文而來贄者。足下於僕。頗有一日之長。可謂先輩也。過自貶損。垂示所著。以至求相磨琢。是何卑遜下人若是之多耶。足下之辭。較古人罕比。僕得見爲榮。更敢磨琢之是冀耶。來敎。又推褒大過。兼及玉堂高步之語。此亦非僕所敢當也。僕曩在全州幕府。緣愚暗不更事變。徒以己之無益之淸。凌侮長官爭公事忤意。每掁觸虎尾。反爲讒搆所中。自入洛來。率杜門不出。謝絶交遊。圖全身尙不暇。又敢望仕宦高選之地耶。夫官署。非以自高。以人而高耳。凡稱翰林曰玉堂。或號紅綃署者。蓋以才賢之所翔集。侈其名以寵之也。若以僕充此選。則夫所謂玉堂者。得不愧其名耶。如僕假得一馬曹。亦足矣。何必玉堂哉。詩曰。豈其食魚。必河之魴。蓋此意也。請勿以非分之語及之。惶恐。不宣頓首。

아무가 아룁니다. 글월을 보내 주시고 아울러 고부(古賦) 한 편과 고시 열 편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 「풍(風)」과 「아(雅)」와 「초사(楚辭)」 같은 글이 지어지지 않은 지 오랜데 뜻밖에 오늘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격조와 운치가 빼어날 뿐 아니라, 그 풍자하고 일으킨 뜻이 넉넉히 시속을 흔들어 바른 데로 돌이킬 만합니다.

저는 글에 짧아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후배들 가운데에도 제게 글을 소매에 넣어 와 보이며 가르침을 청하는 이가 없습니다. 족하는 저보다 자못 나이가 위이니 선배라 할 만합니다. 그런데 지나치게 스스로를 낮추어 지으신 글을 보여 주시고, 서로 갈고 다듬기를 구하는 데까지 이르셨습니다. 어찌 이토록 자신을 낮추어 남의 아래에 서심이 많으십니까.

족하의 글은 옛사람에 견주어도 짝할 이가 드뭅니다. 저는 보게 된 것만도 영광인데 다시 감히 갈고 다듬어 드리기를 바라겠습니까.

보내신 글월에서 또 지나치게 기려 주시고, 아울러 옥당(玉堂)에 높이 오르리라는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이 또한 제가 감히 감당할 바가 아닙니다.

저는 지난날 전주(全州) 막부에 있을 때, 어리석고 어두워 일의 변화를 겪지 못한 채 다만 저의 아무 이로움 없는 맑음만 믿고 장관을 업신여기며 공사를 다투어 뜻을 거슬렀습니다. 늘 범의 꼬리를 건드린 셈이어서 도리어 헐뜯고 얽는 말에 맞았습니다. 서울에 들어온 뒤로는 대개 문을 닫고 나가지 않으며 사귐을 끊었습니다. 몸을 온전히 하기를 꾀하기에도 겨를이 없는데 또 감히 벼슬의 높이 뽑히는 자리를 바라겠습니까.

무릇 관청이란 스스로 높은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말미암아 높아질 뿐입니다. 한림을 옥당이라 부르고 더러 홍초서(紅綃署)라 이르는 것은, 대개 재주 있고 어진 이들이 날아 모이는 곳이라 그 이름을 크게 하여 기리는 것입니다. 만일 저로 이 자리를 채운다면 이른바 옥당이라는 것이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저 같은 사람은 말 맡은 자리 하나만 얻어도 넉넉합니다. 어찌 반드시 옥당이겠습니까. 「시경」에 「어찌 고기를 먹는 데 반드시 황하의 방어라야 하랴」 하였으니 대개 이 뜻입니다. 분수에 넘치는 말씀은 하지 마시기를 청합니다. 두렵습니다. 이만 줄이고 머리를 조아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