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사에 머물던 왕사 정인대선사를 정각국사로 추봉한 비명故華藏寺住持王師定印大禪師追封靜覺國師碑銘
夫道本自如。孰抑揚是。要之世與人而已矣。蓋人能弘道。非道弘人。人固難得。而閱千百世。儻一値焉。則世與人二者相須。而後道行焉。況道之最者曰禪。非若膠於文句者。而直見自家所有一靈印耳。降及叔世。妄執鉗固。不知佛是吾物。捨而之外。認賊爲子者多矣。道不終否。世將復古。於是乎有眞人出焉。與道吻合。得正法眼藏。陶鑄生靈者。繄我國師是已。國師姓田氏。諱志謙。字讓之。系出靈光郡太祖功臣雲騎將軍諱宗會。而光廟朝。擢第龍頭。官至樞密院使諱拱之之六代孫也。皇曾祖諱漑。檢校大子詹事。皇祖諱德普。大倉署令。皇考諱毅。檢校大子詹事。皇妣南宮氏。良醞令榮之女也。母夢梵僧至家請寄宿。因而有娠。及生。骨相峻爽。機神英邁。弱不好弄。常若有思念者。忽遇異僧曰。此子塵中無着處。師自是斷葷腥。年甫九歲。懇求出家。十一。就禪師嗣忠祝髮。明年。就金山寺戒壇受具。師天資警悟。淹貫外典。以此潤色。故凡於問對詞辯。捷疾如機發箭激。不可遏已。一時公卿名儒韻士。想望風彩。願與之交焉。自少已有宿望如此。明廟卽祚元年。始擧禪選。時內侍鄭仲壺掌選。夢神人告曰。明日得王者師。是日師中焉。舊諱學敦。是年。遊三角山。宿道峯寺。夢山神告曰。和尙名志謙。何用今名。遂改焉。大定己酉。始住登高寺。明昌四年。批除三重大師。七年。加禪師。泰和四年。又加大禪師。師旣名聞四方。凡內外有開禪會。輒請師主盟。師亦以荷擔宗乘。傳法度人爲己任。承安四年。移住郁錦寺。是年。進禮郡設禪會。請指南者。上命師赴焉。是會也。縣令李中敏夢。天人告曰。淨佛國土。何囹圄不空耶。及覺。遍體流汗。躬至獄門。罪無輕重。皆原之。聞者莫不驚歎。泰和戊辰。旱甚。上迎入內道場說法。至五日不雨。師憤之。乃禱佛曰。佛法不自行。須憑國主。今若不雨。靈應何存。無幾何。甘澍霶霈。時號和尙雨。師至孝。凡得檀施。苟有異饌。先送孀母。然後敢自食。一日聞母亡。遂於帝釋前禱曰。母若算窮。願以子壽代之。未幾。家僮馳報夫人已起。時以爲孝感所致。泰安辛未。移住國淸寺。崇慶二年。康王卽祚。循祖宗舊例。欲得釋門重望爲師。時晉康公當國。爲上遴選。凡於兩宗五敎。求可以承當大任者。無出師右。遂以師薦焉。上遣重臣。請行摳衣之禮。師上表固讓。上復遣使。敦諭至再三。師不獲已受請。上特遣上將軍盧元崇等兩使。就所寓普濟寺。備禮封崇。受冊訖。遂入大內。親受師禮。上以廣明寺近帝闕。請住焉。申以居頓寺爲本寺。充香火之費。秋八月。上不豫。師亦發背疽。門人等請禱。師厲色曰。上體不安。而子幸有疾。切欲移之身。汝將禱耶。上升遐。今上嗣位。以寧考師。復崇師禮。恩遇益縟。晉康公亦割捨愛子。剃度爲門人。其餘士大夫亦爾。門弟之盛。近古未之有也。貞祐五年。忽謂門人曰。吾起寒門。至爲王者師。於分足矣。豈可貪冒恩寵。久留輦轂耶。遂上書乞退甚篤。上不得已允之。以花藏寺境地淸勝。薪水贍足。請下安於此。將行也。晉康公邀餞。公出拜。親扶腋上階。及上道。贈寶馬。又遣門客等衛行。師雖在千里。上之眷意不已。屢遣近臣問安。其贐餉亦無虛月矣。下寺之十三年己丑六月十五日。震雷暴作。大石崩落。是日。師示微疾。七月二日。晨起盥洗。召門人玄源。裁書三道。囑國王及今相國晉陽公高僧松廣社主。告以長邁。寫訖良久曰。今日行未便。迨後日迺別。遂就寢至八日。忽起告衆曰。定光寂寂。慧日明明。法界塵寰。臍輪頓現。有僧問故人云。後夜月初明。吾將獨自行。作麽生是和尙獨行處。答曰。蒼海闊白雲閑。莫將毫髮着其間。言訖。叉手當胸。翛然坐逝。顔如傅粉。脣色丹潤。遠近無不奔赴瞻禮。上聞訃震悼。命近臣將作少監趙光就及日官等監護喪事。遂茶毗于寺之西岡。拾靈骨葬于登禪山之麓。仍降制贈諡靜覺國師。享年八十五。僧臘七十五。國師爲人。略無緣飾。因性循理而已。雖歷住大伽藍。每至齋時。先衆而出。手擎鉢立待。麤食淡羹。與衆均味。而未曾別開饌食。其精勤佛事。雖盛寒酷熱。略無欹傾倦怠之色。此皆老境所難而能行之。嗚呼。眞化身菩薩歟。其感應靈異之事。則雖或多焉。皆道境之細。而又恐後人以爲怪誕。故於此不載。門人大禪師廓雲等聞于上曰。師沒久。碑猶未立。是臣等所深疚。請爲文者鑱諸石。以永其傳。上命小臣文之。仍賜額曰某碑。臣未敢辭避。謹再拜銘之曰。
무릇 도는 본디 스스로 그러하니 누가 이를 누르고 올리겠는가. 요컨대 세상과 사람에 달렸을 뿐이다. 대개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참으로 얻기 어려워 천백 세를 지나야 혹 한 번 만난다. 그러니 세상과 사람 둘이 서로 기다린 뒤에야 도가 행해진다.
하물며 도 가운데 으뜸가는 것을 선(禪)이라 한다. 글귀에 붙어 굳는 것과 달라, 제 집에 지닌 하나의 신령한 도장을 곧바로 보는 것일 뿐이다. 말세에 내려와서는 망령되이 붙들어 집게처럼 굳게 잡고, 부처가 곧 내 것인 줄 알지 못하여 버리고 밖으로 나아가 도둑을 제 자식으로 아는 이가 많아졌다. 도는 끝내 막히지 않고 세상은 장차 옛으로 돌아가려 한다. 이에 참사람이 나와 도와 꼭 들어맞아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얻고 뭇 목숨을 빚어 기르니, 바로 우리 국사가 그분이다.
국사는 성이 전씨(田氏)요 휘는 지겸(志謙), 자는 양지(讓之)다. 계통은 영광군(靈光郡)에서 나왔으니 태조의 공신 운기장군 휘 종회(宗會)의 후손이요, 광종 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추밀원사에 이른 휘 공지(拱之)의 육대손이다. 증조의 휘는 개(漑)로 검교태자첨사요, 할아버지의 휘는 덕보(德普)로 대창서령이며, 아버지의 휘는 의(毅)로 검교태자첨사다. 어머니는 남궁씨(南宮氏)로 양온령 영(榮)의 딸이다.
어머니가 꿈에 서역 중이 집에 와 묵기를 청하는 것을 보고 태기가 있었다. 낳고 보니 골격이 빼어나고 시원하며 타고난 정신이 뛰어났다. 어려서도 장난을 좋아하지 않고 늘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였다. 문득 기이한 중을 만났는데 「이 아이는 티끌세상에 붙일 곳이 없다」 하였다. 스님은 이때부터 비리고 냄새나는 것을 끊었다.
나이 겨우 아홉에 간절히 출가하기를 구하였고, 열하나에 선사 사충(嗣忠)에게 나아가 머리를 깎았다. 이듬해 금산사(金山寺) 계단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스님은 타고난 바탕이 밝고 깨달음이 빨라 바깥 글까지 두루 꿰뚫었고 이로써 문채를 더하였다. 그러므로 묻고 답하는 말솜씨가 쇠뇌가 튀고 화살이 내닫듯 빨라 막을 수 없었다. 한때의 공경과 이름난 선비와 운치 있는 이들이 그 풍채를 그리워하여 사귀기를 바랐다. 젊어서부터 이미 이처럼 오래 쌓인 명망이 있었다.
명종이 즉위한 첫해에 처음으로 선선(禪選)을 열었다. 그때 내시 정중호(鄭仲壺)가 선발을 맡았는데 꿈에 신인이 「내일 임금의 스승 될 이를 얻으리라」 하였다. 이날 스님이 뽑혔다. 옛 휘는 학돈(學敦)이었다. 이해에 삼각산(三角山)에 노닐다 도봉사(道峯寺)에 묵었는데, 꿈에 산신이 「화상의 이름은 지겸이니 어찌 지금 이름을 쓰는가」 하였다. 그래서 고쳤다.
대정(大定) 기유년에 처음으로 등고사(登高寺)에 머물렀다. 명창(明昌) 사년에 삼중대사를 제수받고, 칠년에 선사를 더하고, 태화(泰和) 사년에 또 대선사를 더하였다. 스님의 이름이 이미 사방에 들리니 안팎에서 선회를 열 때면 문득 스님에게 맹주 되기를 청하였다. 스님도 종문의 가르침을 짊어지고 법을 전하여 사람을 건지는 일을 제 소임으로 삼았다.
승안(承安) 사년에 욱금사(郁錦寺)로 옮겨 머물렀다. 이해에 진례군(進禮郡)에서 선회를 베풀고 길잡이 될 이를 청하니 임금이 스님에게 가라 명하였다. 이 모임에서 현령 이중민(李中敏)이 꿈을 꾸었는데, 천인이 「부처의 나라를 깨끗이 한다면서 어찌 옥이 비지 않았는가」 하였다. 깨어 보니 온몸에 땀이 흘렀다. 몸소 옥문에 이르러 죄의 무겁고 가벼움을 가리지 않고 모두 용서하였다. 듣는 이가 놀라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태화 무진년에 가뭄이 심하였다. 임금이 맞아들여 내도량에서 법을 설하게 하였는데 닷새에 이르도록 비가 오지 않았다. 스님이 분히 여겨 부처께 빌었다. 「불법은 스스로 행해지지 않고 반드시 나라 임금에 기대야 합니다. 이제 비가 오지 않으면 신령한 응함이 어디 있겠습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단비가 쏟아졌다. 그때 사람들이 화상비(和尙雨)라 불렀다.
스님은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시주를 받아 남다른 음식이 있으면 먼저 홀어머니께 보내고 그런 뒤에야 감히 제가 먹었다. 하루는 어머니가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제석 앞에 빌었다. 「어머니의 목숨이 다하였다면 아들의 목숨으로 대신하기를 바랍니다.」 얼마 안 되어 집종이 달려와 부인이 이미 일어났다고 알렸다. 그때 사람들은 효성이 감응한 것이라 하였다.
태안(泰安) 신미년에 국청사(國淸寺)로 옮겨 머물렀다. 숭경(崇慶) 이년에 강종이 즉위하여 조종의 옛 예를 따라 불문에서 명망이 두터운 이를 얻어 스승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때 진강공(晉康公)이 나랏일을 맡아 임금을 위하여 가려 뽑았다. 두 종파와 다섯 교문에서 큰 소임을 감당할 만한 이를 구하니 스님보다 나은 이가 없었다. 마침내 스님을 천거하였다.
임금이 중신을 보내어 옷자락을 여미는 예를 행하기를 청하였다. 스님이 표를 올려 굳이 사양하니 임금이 다시 사신을 보내어 두세 번에 이르도록 간곡히 타일렀다. 스님은 마지못해 청을 받았다. 임금이 특별히 상장군 노원숭(盧元崇) 등 두 사신을 보내어 머물던 보제사(普濟寺)로 나아가 예를 갖추어 높이 봉하였다. 책명을 받고 나서 곧 대궐에 들어가니 임금이 몸소 스승의 예를 올렸다. 임금이 광명사(廣明寺)가 대궐에 가깝다 하여 거기 머물기를 청하고, 거듭 거돈사(居頓寺)를 본사로 삼아 향화의 비용에 충당하게 하였다.
가을 팔월에 임금이 편찮았고 스님도 등창이 났다. 문인들이 빌기를 청하니 스님이 낯빛을 엄히 하여 말하였다. 「임금의 몸이 편치 않은데 내게 다행히 병이 있으니 간절히 그것을 내 몸으로 옮기고자 한다. 그런데 너희가 빌겠다는 것이냐.」
임금이 돌아가고 지금 임금이 자리를 이었다. 선왕의 스승이라 하여 다시 스승의 예로 높이니 은혜로운 대우가 더욱 두터웠다. 진강공도 아끼는 아들을 떼어 내어 머리를 깎여 문인으로 삼았고 그 밖의 사대부들도 그러하였다. 문하 제자의 성함은 가까운 옛적에 없던 일이다.
정우(貞祐) 오년에 문득 문인에게 말하였다. 「내가 가난한 집에서 일어나 임금의 스승이 되기에 이르렀으니 분수에 넘친다. 어찌 은총을 탐하여 오래 서울에 머물겠는가.」 드디어 글을 올려 물러나기를 간절히 빌었다. 임금이 마지못해 허락하고, 화장사(花藏寺)가 경치가 맑고 빼어나며 땔감과 물이 넉넉하다 하여 여기 내려가 편히 지내기를 청하였다.
떠나려 할 때 진강공이 맞아 전별하였다. 공이 나와 절하고 몸소 겨드랑이를 붙들어 섬돌에 오르게 하였다. 길에 오르자 좋은 말을 주고 또 문객들을 보내어 호위하여 가게 하였다. 스님이 비록 천 리 밖에 있었으나 임금의 돌보는 뜻은 그치지 않았다. 여러 번 가까운 신하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고 보내는 선물도 거르는 달이 없었다.
절로 내려온 지 열세 해째인 기축년 유월 보름에 우레가 사납게 치며 큰 돌이 무너져 떨어졌다. 이날 스님이 가벼운 병을 보였다. 칠월 이일 새벽에 일어나 낯을 씻고 문인 현원(玄源)을 불러 편지 세 통을 쓰게 하여, 임금과 지금 상국 진양공(晉陽公)과 고승 송광사 사주에게 부치고 멀리 떠남을 알렸다. 다 쓰고 한참 있다가 말하였다. 「오늘 가기는 편치 않으니 뒷날에 이르러 헤어지리라.」 드디어 자리에 누워 팔일에 이르렀다.
문득 일어나 대중에게 일렀다. 「선정의 빛은 고요하고 지혜의 해는 밝고 밝다. 법계와 티끌세상이 배꼽 바퀴에 문득 나타난다.」 어떤 중이 「옛사람이 『밤 깊어 달이 처음 밝을 제 나는 홀로 가리라』 하였으니, 어떤 것이 화상께서 홀로 가시는 곳입니까」 하고 물었다. 대답하였다. 「푸른 바다는 넓고 흰 구름은 한가하다. 터럭만큼도 그 사이에 붙이지 말라.」 말을 마치고 손을 가슴에 모으고는 훌쩍 앉은 채로 돌아갔다. 낯빛은 분을 바른 듯하고 입술빛은 붉고 윤이 났다. 멀고 가까운 이들이 달려와 우러러 절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임금이 부고를 듣고 몹시 슬퍼하여 가까운 신하 장작소감 조광취(趙光就)와 일관들에게 상사를 살피게 하였다. 마침내 절 서쪽 언덕에서 다비하고 신령한 뼈를 거두어 등선산(登禪山) 기슭에 묻었다. 이어 제서를 내려 정각국사(靜覺國師)라 시호를 주었다. 나이 여든다섯이요 승랍은 일흔다섯이다.
국사의 사람됨은 조금도 꾸밈이 없어 성품을 따르고 이치를 좇을 뿐이었다. 큰 절에 두루 머물렀으나 재를 올릴 때면 늘 대중보다 먼저 나와 손에 바리를 받쳐 들고 서서 기다렸다. 거친 밥과 묽은 국을 대중과 같이 맛보았고 따로 음식을 차린 적이 없었다. 불사에 부지런하기가 심한 추위와 모진 더위에도 조금도 기울거나 게으른 낯이 없었다. 이는 다 늘그막에 어려운 일인데도 능히 행하였다. 아, 참으로 몸을 바꾸어 오신 보살인가. 감응하고 신령히 기이한 일은 비록 많으나 다 도의 경계에서는 자잘한 것이요, 또 뒷사람이 괴이하고 헛되다 여길까 두려워 여기 싣지 않는다.
문인 대선사 확운(廓雲) 등이 임금께 아뢰었다. 「스님이 돌아간 지 오래인데 비가 아직 서지 못하였으니 신들이 깊이 마음 아파하는 바입니다. 글 지을 이에게 돌에 새기게 하여 길이 전하게 하소서.」 임금이 소신에게 글을 지으라 명하고, 이어 현판을 내려 아무 비라 하였다. 신은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두 번 절하고 명을 지어 이른다.
협주 2
奉宣述
임금의 명을 받들어 지었다.
저본은 「康王卽祚」로 강왕이라 하였으나, 잇달아 실린 비명의 「康廟」와 같은 고려 강종이므로 한 이름으로 맞추었다. ― 옮긴이
達摩傳心兮靈光東曜。後學倒見兮背鏡求照。焯焯國師兮揭日以行。一廓煙氛兮昏矇皆𣈑。法王出世兮祖月重暉。覺路司南兮學者知歸。門弟林林兮親哺以乳。又翼其鷇兮放之使飛。種福滋久兮流潤罔極。天子屈尊兮北面請益。生爲帝範兮卒作國師。龜鑑斯亡兮安所取則。上命小臣兮期以不晦。臣拜刻銘兮與山作配。來者去者兮騎行則下。寧不拜佛兮惟碑是拜。
달마가 마음을 전하니 신령한 빛이 동녘에 빛났다. 뒷사람이 거꾸로 보아 거울을 등지고 비추기를 구하였다. 빛나고 빛나는 국사가 해를 들고 나아가니 한 번 안개 기운을 걷어 어둡고 흐린 것이 다 밝아졌다. 법왕이 세상에 나오니 조사의 달이 거듭 빛났다. 깨달음의 길에 길잡이가 되니 배우는 이가 돌아갈 곳을 알았다. 문하 제자가 수풀처럼 많아 몸소 젖을 먹였다. 또 그 새끼에게 날개를 돋게 하여 놓아 날게 하였다. 복을 심어 오래 불리니 흐르는 은택이 끝이 없었다. 천자가 높음을 굽혀 북면하여 가르침을 청하였다. 살아서는 임금의 본보기가 되고 죽어서는 국사가 되었다. 거울 삼을 이가 이렇게 갔으니 어디서 법을 취하랴. 임금이 소신에게 명하여 묻히지 않게 하기를 기약하였다. 신이 절하고 명을 새겨 산과 짝하게 한다. 오는 이 가는 이여, 말 타고 가거든 내리라. 차라리 부처께 절하지 않을지언정 이 비에는 절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