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 › 동국이상국집 › 전집 권35

조계산 제이세 단속사에 머물던 수선사 사주에게 진각국사라 시호를 내린 비명曹溪山第二世故斷俗寺住持修禪社主贈諡眞覺國師碑銘

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 · 이규보(李奎報) · 1241년 (고려 고종 28) 엮음 · 1251년 고쳐 보탬 · 단락 1 · 한자 1,871자 · 낭독 17.6분

동국이상국집 전집 권35 고려 이규보가 평생 지은 글을 아들 이함이 1241년에 엮어 새기고, 손자 이익배가 1251년에 고쳐 보탠 문집. 시와 부, 임금께 올린 표와 전, 절과 탑에 붙인 기, 비명과 묘지명, 편지와 서문, 그리고 몽골이 쳐들어온 때에 오간 국서까지 담겼다. 고구려 시조를 노래한 「동명왕편」이 전집 권3에 있고, 술과 거문고와 시를 벗 삼아 스스로 백운거사라 한 사람의 하루하루가 후집에 남아 있다. 책은 그가 눈을 앓다 붓을 놓는 마지막 시와, 그가 죽은 뒤 남이 지어 붙인 뇌서·묘지명으로 닫힌다.

夫自有心法已來。凡衲子之鼻孔遼天者。原其靈臺。孰不欲與霜月爭潔耶。然至於宗門之名品升降。則有不能大忘情者。於是有以此爲嫌。遂深遁巖谷。潛修心要。切不欲嬰其名累。而名自逼逐者孰是歟。如我國師當之矣。況自妙齡。業已從事於文章。未幾旋擢賢關。則學非不精也。命非不偶也。若小忍須臾。便登桂籍。長驅前途。不失爲名士大夫。而反割棄垂就之名。猶以不早落染爲恨。其超然出世之心。亦於此可驗。求之於古。蓋法融天然之比也。國師諱惠諶。字永乙。自號無衣子。俗姓崔氏。名寔。羅州和順縣人也。考諱琬。鄕貢進士。母裴氏夢天門豁開。又夢被震者三。因而有娠。凡十有二月乃生焉。其胞重纏。又如荷袈裟狀。及拆。兩目俱瞑。經七日乃開。每飮乳後。輒轉身背母而臥。父母怪之。父早薨。從母乞出家。母不許。勉令業儒。然常念經持呪。久乃得力。喜毁斥淫巫祅祠。或往往救人病有效。承安六年辛酉。擧司馬試中之。是年入大學。聞母病。遂還鄕侍疾於族兄裴光漢家。斂念入觀佛三昧。母夢諸佛菩薩遍現四方。覺而病愈。裴氏夫婦。亦同此夢。明年。母卽世。時普照國師在曹溪山。新開修禪社。道化方盛。師徑造參禮。請營齋薦母。因乞剃度。國師許之。是夜。阿舅夢師之亡母升天。始師之謁國師也。國師見之以爲僧。更見則非也。先是。國師夢雪竇顯禪師入院。心異之。明日師來參。由是益奇焉。師嘗居蜈山。坐一磐石。晝夜常習定。每至五更唱偈。其厲聲聞十許里。略不失時。聞者以此候旦。又居智異山金臺庵。宴坐臺上。雪積沒頂。猶兀坐如枯株不動。衆疑其死。撼之不應。其刻苦如此。非夫與道凝精。外生死遺形骸者。孰至是哉。乙丑秋。國師在億寶山。師與禪者數人方往謁。憩山下。距庵千餘步。遙聞國師在庵中喚侍者聲作偈。其略云。呼兒響落松蘿霧。煮茗香傳石徑風。及參禮。擧似此話。國師頷之。以手中扇授之。師呈偈曰。昔在師翁手裏。今來弟子掌中。若遇熱忙狂走。不妨打起淸風。國師益器之。又一日隨國師行。國師指一破鞋云。鞋在遮裏。人在什麽處。答曰。何不其時相見。國師大悅。又擧趙州狗子無佛性話。因續擧大慧杲老十種病問之。衆無對。師對曰。三種病人。方解斯旨。國師曰。三種病人。向什麽處出氣。師以手打窓一下。國師呵呵大笑。及歸方丈。更密召與話。乃喜曰。吾旣得汝。死無恨矣。汝當以佛法自任。不替本願也。泰和戊辰。欲命師嗣席。卽退安圭峯。師固辭。遂去智異山。絶跡滅影者數載。大安庚午。國師入寂。門徒聞于上。承勑繼住。師不獲已入院開堂。於是四方學者及道俗高人逸老。雲奔影騖。無不臻赴。社頗隘。康廟聞之。命有司增構。屢遣中使督役。遂闢而廣之。又遣使就賜滿繡袈裟磨衲各一領幷茶香寶瓶。因求法要。師撰心要以進。今行于世。自是公卿貴戚四岳邦伯。聞風慕道。或遙禮爲師。或親趨下風者。不可勝紀。凡禪講之負氣屈強。自謂莫己若者。及一見。莫不愕然改容。猶師事之不暇也。今門下侍中晉陽崔公聆師風韻。傾渴不已。屢欲邀致京輦。師竟不至焉。然千里相契。宛如對面。復遣二子參侍。凡師之常住資具。莫不盡力營辦。至於茶香藥餌珍羞名菓及道具法服。常以時餉遺。連亘不絶。今上卽位。制授禪師。又加大禪師。其不經選席。直登緇秩。自師始也。參政崔公洪胤。於未相時。嘗掌司馬試。師出其門下。未幾公入相。師住曹溪。相國稱弟子。願登名社裏。以書致意。其略曰。佛光樂與於白學士親授大乘。嵩岳欣迎於賀祕書。密傳妙旨。師答之。其略曰。我昔居公門下。公今入我社中。互爲賓主。換作師資。聞者傳以爲勝事。貞祐己卯。詔住斷俗寺。累辭不允。明年入院。然以本社爲常棲之所。癸巳仲冬。在本社示疾。晉陽公聞之大驚。遂聞于上。遣御醫某診視。春。徙處月登寺。麻谷入室。師曰。老漢今日痛甚。谷曰。爲甚麽如此。國師以偈答曰。衆苦不到處。別有一乾坤。且問是何處。大寂涅槃門。師豎起拳頭云。遮箇拳頭也解說禪。汝等信否。遂展掌云。開則五指參差。握拳云。合則混成一塊。開合自在。一多無礙。雖然。如是未是拳頭本分說話。怎生是本分說話。卽以拳頭打窓一下。呵呵大笑。甲午六月二十六日。召門人囑事。謂麻谷曰。老漢今日痛忙。答曰。未審導什麽。師云老漢今日痛忙。谷茫然。師微笑跏趺而化。明日茶毗於月燈寺之北峯。拾靈骨還本山。上聞之震悼。贈諡眞覺國師。乙未仲炎。葬于廣原寺之北。遂立浮圖。上賜額曰圓炤之塔。享壽五十七。臘三十有二。自師之示疾。生緣處山石崩落。又群雀滿洞。飛鳴者十餘日。嗚呼其異哉。其平生冥感神異。則有龜受戒。蟾聽法。慈烏含籌。特牛跪途等事。皆世所傳。門徒所記。又非儒者所說。故於此不詳云。師性沖和碩實。旣自儒之釋。凡內外經書。無不淹貫。故至於談楊佛乘。撰著偈頌。則恢恢乎游刃有餘地矣。不如是。安能迹不踐京都。而坐享一國所仰若是哉。噫。眞可謂禪門正眼。肉身菩薩者歟。嗣法禪老夢如。亦法王也。請逸庵居士鄭君奮草具行錄以立碑。請於晉陽公。公曰。和尙住世利人多矣。樂石不可不立。遂聞于上。上命小臣爲之銘。其詞曰。微笑已後。傳心者誰。於我三韓。國師得之。生荷袈裟。其兆已奇。果得正眼。超視當時。自見是性。傳人曰辭。不有傳法。迷者何資。上堂擧話。亹亹其說。舌是佛心。心是佛舌。默固自然。談亦可悅。身遁深巖。名從何洩。學者趁追。雲蒸丈下。左右扣之。應接靡暇。曾不放我。片時閉坐。五敎來參。熏染般若。列岳躬趨。痛求入社。王公遙挹。謂若親炙。三十二臘。膏液所及。有許多人。飽飫周洽。法棟云摧。萬眼同泉。上甚哀悼。玉色慘然。贈終孔縟。寵典靡諐。仍命小臣。豐碑是鐫。此山寧騫。此石不遷。

무릇 마음의 법이 있은 뒤로, 콧구멍이 하늘에 닿은 납자라면 그 마음자리를 캐어 보아 누군들 서리 맞은 달과 맑음을 다투고자 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종문의 이름과 품계가 오르내리는 데 이르러서는 마음을 크게 잊지 못하는 이가 있다. 이에 이것을 꺼려 깊이 바위 골짜기에 숨어 마음의 요체를 남몰래 닦으며 이름의 얽매임에 걸리지 않으려 애썼는데도, 이름이 스스로 다가와 쫓아온 이는 누구인가. 우리 국사가 바로 그분이다.

더구나 젊은 나이부터 이미 글에 힘썼고 오래지 않아 성균의 문에 뽑혔으니, 배움이 정밀하지 않은 것도 아니요 운수가 맞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만일 잠깐만 참았더라면 곧 과거에 오르고 앞길을 멀리 달려 이름난 사대부가 되기를 잃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도리어 거의 이룬 이름을 떼어 버리고, 오히려 일찍 물들여 머리 깎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겼다. 세상을 벗어난 그 뛰어난 마음을 여기서도 알 수 있다. 옛적에서 찾는다면 대개 법융(法融)과 천연(天然)에 견줄 만하다.

국사의 휘는 혜심(惠諶)이요 자는 영을(永乙)이며 스스로 무의자(無衣子)라 불렀다. 속성은 최씨(崔氏)요 이름은 식(寔)이니 나주 화순현(和順縣) 사람이다. 아버지의 휘는 완(琬)으로 향공진사였다. 어머니 배씨(裴氏)가 꿈에 하늘 문이 활짝 열리는 것을 보고, 또 세 번 벼락 맞는 꿈을 꾸고 태기가 있었다. 열두 달 만에야 낳았다. 태가 겹겹이 얽혀 마치 가사를 걸친 모양 같았다. 태를 가르니 두 눈이 다 감겨 이레가 지나서야 떴다. 젖을 먹고 나면 문득 몸을 돌려 어머니를 등지고 누우니 부모가 괴이하게 여겼다.

아버지가 일찍 죽었다. 어머니에게 출가하기를 빌었으나 어머니가 허락하지 않고 유학에 힘쓰게 하였다. 그러나 늘 경을 외고 주문을 지녀 오래되니 힘을 얻었다. 음란한 무당과 요사한 사당 헐기를 즐겼고 이따금 남의 병을 고쳐 효험이 있었다.

승안(承安) 육년 신유에 사마시에 응시하여 뽑혔다. 이해에 태학에 들어갔는데 어머니가 병들었다는 말을 듣고 고향에 돌아가 겨레 형 배광한(裴光漢)의 집에서 병시중을 들었다. 생각을 거두어 관불삼매에 들었더니, 어머니가 꿈에 여러 부처와 보살이 사방에 두루 나타나는 것을 보고 깨어나자 병이 나았다. 배씨 부부도 같은 꿈을 꾸었다.

이듬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그때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조계산(曹溪山)에 있으면서 수선사(修禪社)를 새로 열어 도의 교화가 한창 성하였다. 스님이 곧바로 나아가 뵙고 재를 올려 어머니를 천도하기를 청하고, 이어 머리 깎기를 빌었다. 국사가 허락하였다. 이날 밤 외숙이 꿈에 스님의 돌아간 어머니가 하늘로 오르는 것을 보았다. 처음 스님이 국사를 뵐 때 국사가 보고 중인가 하였는데 다시 보니 아니었다. 이에 앞서 국사가 꿈에 설두 중현 선사(雪竇顯禪師)가 절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마음에 기이하게 여겼다. 이튿날 스님이 와서 뵈니 이로 말미암아 더욱 기이하게 여겼다.

스님이 일찍이 오산(蜈山)에 살면서 한 너럭바위에 앉아 밤낮으로 늘 선정을 익혔다. 오경마다 게를 외니 그 높은 소리가 십 리쯤에 들렸고 조금도 때를 어기지 않았다. 듣는 이들이 이로써 새벽을 가늠하였다. 또 지리산(智異山) 금대암(金臺庵)에 살며 대 위에 고요히 앉았는데, 눈이 쌓여 정수리를 묻어도 오히려 마른 등걸처럼 우뚝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대중이 죽은 줄 알고 흔들어도 응하지 않았다. 그 고행이 이와 같았으니, 도와 더불어 정신을 엉기게 하여 삶과 죽음을 밖으로 하고 몸뚱이를 잊은 이가 아니라면 누가 여기에 이르겠는가.

을축년 가을에 국사가 억보산(億寶山)에 있었다. 스님이 선객 몇 사람과 뵈러 가다가 산 아래서 쉬었는데 암자와는 천여 걸음 떨어졌다. 멀리 국사가 암자 안에서 시자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게를 지었다. 그 대강은 「아이 부르는 소리는 솔 담쟁이 안개에 떨어지고, 차 달이는 향기는 돌길 바람에 전한다」 하였다. 뵙고 나서 이 말을 들어 보이니 국사가 고개를 끄덕이고 손에 든 부채를 주었다. 스님이 게를 올렸다. 「예전엔 스승님 손안에 있더니 이제는 제자의 손바닥 가운데 왔습니다. 만일 더위에 바빠 미친 듯 달리는 이를 만나거든 맑은 바람 일으켜 준들 무엇이 해로우리.」 국사가 더욱 그릇으로 여겼다.

또 하루는 국사를 따라 가는데 국사가 해진 신 하나를 가리키며 「신은 여기 있는데 사람은 어디 있는가」 하였다. 「어찌 그때 서로 보지 않았습니까」 하고 대답하니 국사가 크게 기뻐하였다. 또 조주(趙州)의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고, 이어 대혜 고(大慧杲) 노인의 열 가지 병을 들어 물었다. 대중이 대답하지 못하는데 스님이 대답하였다. 「세 가지 병든 사람이라야 비로소 이 뜻을 압니다.」 국사가 「세 가지 병든 사람은 어느 곳을 향해 숨을 내쉬는가」 하였다. 스님이 손으로 창을 한 번 치니 국사가 껄껄 크게 웃었다. 방장에 돌아와 다시 가만히 불러 이야기하고는 기뻐 말하였다. 「내가 이미 너를 얻었으니 죽어도 한이 없다. 너는 마땅히 불법을 제 소임으로 삼아 본디 서원을 저버리지 말라.」

태화(泰和) 무진에 스님에게 자리를 잇게 하고 자신은 규봉(圭峯)으로 물러나 편히 지내려 하였다. 스님이 굳이 사양하고 마침내 지리산으로 가서 자취와 그림자를 끊은 지 몇 해였다. 대안(大安) 경오에 국사가 입적하였다. 문도들이 임금께 아뢰어 조칙을 받들어 뒤를 잇게 하니 스님이 마지못해 절에 들어가 법좌를 열었다.

이에 사방의 배우는 이와 승속의 높은 이와 숨은 늙은이들이 구름처럼 달리고 그림자처럼 내달아 이르지 않는 이가 없었다. 절이 자못 좁으니 강종이 듣고 유사에게 더 짓게 하고 여러 번 중사를 보내어 공사를 재촉하여 마침내 헐어 넓혔다. 또 사신을 보내어 수놓은 가사와 마납 각 한 벌과 차와 향과 보배 병을 내리고 이어 법의 요체를 구하였다. 스님이 「심요(心要)」를 지어 올리니 지금 세상에 퍼져 있다.

이때부터 공경과 귀한 겨레와 지방의 방백들이 풍문을 듣고 도를 사모하여, 멀리서 예를 올려 스승으로 삼거나 몸소 아랫자리로 나아가 가르침을 받은 이를 이루 적을 수 없었다. 선과 강에서 기운을 믿고 뻣뻣하여 스스로 제만 한 이가 없다 하던 이들도 한 번 보고 나면 놀라 낯빛을 고치고 오히려 스승으로 섬기기에 겨를이 없었다.

지금 문하시중 진양 최공(晉陽崔公)이 스님의 풍모를 듣고 우러러 목말라하기를 그치지 않아 여러 번 서울로 맞아들이려 하였으나 스님은 끝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천 리에 서로 맞음이 완연히 얼굴을 마주한 듯하였다. 다시 두 아들을 보내어 곁에서 모시게 하였다. 스님이 늘 머무는 데 쓰는 물건은 힘을 다해 마련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차와 향과 약과 귀한 음식과 이름난 과일과 도구와 법복에 이르기까지 늘 때맞추어 보내어 끊이지 않았다.

지금 임금이 즉위하여 제서로 선사를 주고 또 대선사를 더하였다. 선발하는 자리를 거치지 않고 바로 승계에 오른 것은 스님에게서 비롯되었다. 참정 최홍윤(崔洪胤) 공이 재상이 되기 전에 사마시를 맡았는데 스님이 그 문하에서 나왔다. 오래지 않아 공이 재상에 들고 스님이 조계에 머무니, 상국이 제자라 일컫고 사(社)에 이름 올리기를 바라며 글로 뜻을 전하였다. 그 대강은 이러하였다. 「불광(佛光)은 백 학사(白學士)와 더불기를 즐겨 몸소 대승을 주었고, 숭악(嵩岳)은 하 비서(賀祕書)를 기쁘게 맞아 묘한 뜻을 가만히 전하였습니다.」 스님이 답한 대강은 이러하였다. 「내 예전엔 공의 문하에 있었고 공은 이제 내 사 안에 들었으니, 서로 손과 주인이 되고 스승과 제자를 바꾸어 지은 것입니다.」 듣는 이들이 전하여 아름다운 일로 삼았다.

정우(貞祐) 기묘에 조서로 단속사(斷俗寺)에 머물게 하였다.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아 이듬해 절에 들어갔다. 그러나 본사를 늘 깃드는 곳으로 삼았다. 계사년 한겨울에 본사에서 병을 보였다. 진양공이 듣고 크게 놀라 임금께 아뢰니 어의 아무를 보내어 진찰하게 하였다. 봄에 월등사(月登寺)로 옮겨 지냈다.

마곡(麻谷)이 방에 들자 스님이 「늙은이가 오늘 몹시 아프다」 하였다. 마곡이 「어찌하여 이러하십니까」 하니 국사가 게로 답하였다. 「뭇 괴로움이 이르지 않는 곳에 따로 한 하늘땅이 있다. 또 묻거니와 이것이 어느 곳인가. 크게 고요한 열반의 문이다.」 스님이 주먹을 세워 들고 「이 주먹도 선을 설할 줄 안다. 너희는 믿느냐」 하였다. 이어 손바닥을 펴며 「펴면 다섯 손가락이 들쭉날쭉하다」 하고, 주먹을 쥐며 「합하면 섞여서 한 덩이가 된다」 하였다. 「펴고 쥠이 마음대로요 하나와 여럿이 걸림 없다. 그렇기는 하나 이것은 주먹의 본분에 맞는 말이 아니다. 어떤 것이 본분의 말인가.」 곧 주먹으로 창을 한 번 치고 껄껄 크게 웃었다.

갑오년 유월 스무엿새에 문인을 불러 일을 부탁하고 마곡에게 「늙은이가 오늘 몹시 바쁘다」 하였다. 「무엇을 이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스님이 「늙은이가 오늘 몹시 바쁘다」 하였다. 마곡이 아득해하였다. 스님은 빙그레 웃고 가부좌한 채 돌아갔다. 이튿날 월등사 북쪽 봉우리에서 다비하고 신령한 뼈를 거두어 본산으로 돌아왔다. 임금이 듣고 몹시 슬퍼하여 진각국사(眞覺國師)라 시호를 주었다. 을미년 한여름에 광원사(廣原寺) 북쪽에 묻고 부도를 세웠다. 임금이 현판을 내려 원소지탑(圓炤之塔)이라 하였다. 나이 쉰일곱이요 승랍은 서른둘이다.

스님이 병을 보인 뒤로 태어난 고장의 산돌이 무너져 내리고, 또 참새 떼가 골짜기에 가득하여 날며 우는 것이 열흘 남짓이었다. 아, 기이하다. 평생의 그윽한 감응과 신령한 기이함으로는 거북이 계를 받고, 두꺼비가 법을 듣고, 까마귀가 산가지를 물고, 황소가 길에 꿇은 따위의 일이 있다. 다 세상에 전하는 것이요 문도가 기록한 것이며, 또 유자가 말할 바가 아니므로 여기서는 자세히 적지 않는다.

스님의 성품은 화하고 두터우며 실하였다. 이미 유학에서 불교로 갔으므로 안팎의 경서를 두루 꿰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불승을 말하여 드날리고 게송을 지음에 이르러서는 넉넉하여 칼날을 놀릴 자리가 남았다. 이렇지 않았다면 어찌 서울 땅을 밟지 않고 앉아서 온 나라의 우러름을 이와 같이 누릴 수 있었겠는가. 아, 참으로 선문의 바른 눈이요 육신보살이라 이를 만하다.

법을 이은 선로 몽여(夢如)도 법왕이다. 일암거사 정분(鄭奮)에게 청하여 행록을 갖추어 짓고 비를 세우려 진양공에게 청하였다. 공이 「화상이 세상에 머물며 사람을 이롭게 한 것이 많으니 비석을 세우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임금께 아뢰었다. 임금이 소신에게 명을 지으라 명하니 그 말은 이러하다.

빙그레 웃으신 뒤로 마음을 전한 이 누구인가. 우리 삼한에서 국사가 그것을 얻었다. 날 때 가사를 걸쳤으니 그 조짐이 이미 기이하다. 과연 바른 눈을 얻어 그때 사람들보다 뛰어나게 보았다. 스스로 이 성품을 보았으니 남에게 전하는 것을 말이라 한다. 법을 전함이 없다면 헤매는 이는 무엇에 의지하랴. 당에 올라 화두를 드니 그 말씀이 끝없었다. 혀가 곧 부처의 마음이요 마음이 곧 부처의 혀다. 잠잠함도 본디 그러하거니와 말함도 또한 기쁘다. 몸은 깊은 바위에 숨었는데 이름은 어디로 새었는가. 배우는 이가 뒤쫓아 방장 아래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좌우에서 두드리니 맞아 응하기에 겨를이 없었다. 일찍이 나를 놓아 잠시도 문 닫고 앉게 하지 않았다. 다섯 교문이 와서 참례하여 반야에 물들었다. 여러 방백이 몸소 달려와 간절히 사에 들기를 구하였다. 왕공이 멀리서 우러르며 몸소 가까이한 듯이 여겼다. 서른두 해 승랍에 기름진 젖이 미친 바로 허다한 사람이 배불리 먹고 두루 젖었다. 법의 기둥이 꺾이니 만 사람의 눈이 함께 샘이 되었다. 임금이 몹시 슬퍼하여 옥 같은 낯빛이 참담하였다. 보내는 예가 매우 두터워 은전에 어그러짐이 없었다. 이어 소신에게 명하여 큰 비를 새기게 하였다. 이 산이 차라리 이지러질지언정 이 돌은 옮기지 않으리라.

협주 1

幷序○奉宣述刻石次以地窄請删。於此仍故。二本不同。

서를 아울렀다. 임금의 명을 받들어 지었다. 돌에 새길 때 자리가 좁다 하여 덜기를 청하였으나 여기서는 예전대로 두었다. 두 본이 서로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