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 › 동국이상국집 › 전집 권36

벽상삼한대광 금자광록대부 수태보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수문전 대학사 판이부사로 물러난 금공의 묘지명壁上三韓大匡金紫光祿大夫守大保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修文殿大學士判吏部事致仕琴公墓誌銘

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 · 이규보(李奎報) · 1241년 (고려 고종 28) 엮음 · 1251년 고쳐 보탬 · 단락 2 · 한자 1,380자 · 낭독 11.8분

동국이상국집 전집 권36 고려 이규보가 평생 지은 글을 아들 이함이 1241년에 엮어 새기고, 손자 이익배가 1251년에 고쳐 보탠 문집. 시와 부, 임금께 올린 표와 전, 절과 탑에 붙인 기, 비명과 묘지명, 편지와 서문, 그리고 몽골이 쳐들어온 때에 오간 국서까지 담겼다. 고구려 시조를 노래한 「동명왕편」이 전집 권3에 있고, 술과 거문고와 시를 벗 삼아 스스로 백운거사라 한 사람의 하루하루가 후집에 남아 있다. 책은 그가 눈을 앓다 붓을 놓는 마지막 시와, 그가 죽은 뒤 남이 지어 붙인 뇌서·묘지명으로 닫힌다.

大抵天之報施。與其角者。不傳之翼。故凡士之得龍頭選。而能遠到者鮮矣。公則不爾。旣首登金榜之科。又極踐黃扉之貴。加之壽考。哀榮終始。俱無缺焉。則此豈無得而然哉。蓋必有天所不得不厚者。而雖取之多焉。天與之不猒者歟。公諱儀。字節之。舊諱克儀。後改爲儀。系出三韓功臣諱容式之世譜。而桂陽之金浦縣。卽其桑梓也。曾祖諱某皇。神虎衛散員贈上將軍。祖諱某皇。檢校大子少保贈左僕射。考諱某皇。昌安宅衙典。以公故贈左僕射。母徐氏皇。檢校軍器監諱淑之女也。以公故贈利川郡大夫人。公少力學工屬文。乙未。入大學。連赴擧。方未第。出理淸道郡。痛礪節淸廉。以剛正不撓爲政。一方號淸道鐵相公。秩滿。旋補入開寶判官。明年。擧春場擢第一。遂籍內侍。上器使之。積官至將作注簿堂後官。遂除拜閣門祗侯。其淸華權要之任。則歷閱尙書吏部員外郞直寶文閣左司郞中起居舍人知制誥刑部郞中大子司經國學直講御史雜端中書舍人史館修撰兵部侍郞翰林侍講學士東宮侍講學士尙書右承右諫議大夫大子贊善大夫。公嘗帶雙學士。至是又兼三大夫。朝廷榮之。公之居諫職也。有非其人而受參官者。公與諸郞執不可。當國者不悅。悉出省郞補他官。公亦例出爲將作監知閣門事執禮。號最難。公雖始試斯任。其進止詳華。踰舊爛熟者。才之無施不可如此。未幾。又拜爲左諫議大夫判祕書省。尋除樞密院右承宣。皆仍諫職制誥學士。循資知奏事知吏部。公累載管喉舌。凡奏對應奉。甚稱上旨。上倚以爲重。政事多所咨。逮壬申。大金使介至。欲入自正門。我朝不許。使重舌人往復詰難。客人猶不肯之。是日大雨。群臣皆霑服立待。上命公往諭。公先問曰。天子之巡狩侯甸。自古有焉。若你國皇帝枉蹕小國。則當入自何門耶。曰。天子所出入。捨中門何自耶。曰。然則人臣而欲入自君之正門可乎。彼大服其言。遂入自西門。其臨機設方略。出人意表皆類此。上大嘉賞之。癸酉。進拜銀靑光祿大夫簽書樞密事左散騎常侍翰林學士承旨。乙亥。入相。金紫光祿大夫政堂文學左僕射寶文閣大學士修國史。丁丑。守太尉中書侍郞平章事。戊寅。門下侍郞修文殿大學士。嘗於八關會。其獸臺之輾動有不如法者。憲臺椽往扼隊正喉衿折辱之。於是軍將呼噪狂顧。遂擲瓦礫于御史臺宴幕。有飛石或過宰相幕次。公大怒。遽下庭特立。厲聲大號曰。若等在君臣上下俱備之國。敢爾耶。苟爲亂。先殺老僕可也。如是者再三。然後軍情稍沮。亂遂不作焉。其臨危不懼亦此類也。公凡廉察春州道。繩吏甚嚴。一切皆革民弊。百姓賴焉。嘗典司馬試及三掌禮闈。所得皆當世聞人。玉筍之盛。近古未有也。庚辰。以壁上三韓大匡守大保門下平章事修文殿大學士判吏部事。解位家居。與舊德元老爲耆老會。日相從宴遨。以遂揮金之樂。庚寅正月二十六日。稍有微恙。然是日使子姓圍棋。觀之至夕。尙從容談笑。及夜寂然而化。雖傍侍者。亦不之覺也。是豈偶然者乎。享年七十八。上聞訃甚悼。命有司襄事。葬于鳳凰山之麓。贈諡曰某公。公之爲人。美風彩。莊重峻整。方妙齡。宋客莊天覺善相人。視之曰後必到宰相矣。果一如其言。性剛果。與人面折無所諱。以是人多憚之。或相謗毀。然心地坦夷。雖當時詬罵。後皆棄之。略不芥滯。故卒能保其身。可謂豁達大度君子也。娶樞密事金諱光軾之女。凡生男子五人女子三人。男曰耆。戶部員外郞。先公歿。曰揆。工部員外郞。曰心正。剃度爲禪師。曰暉。左右衛大將軍。先公歿。曰禧。閤門祗候。亦先沒。曰祺。雜織署令。女一適內侍保勝中郞將尹惟孝。二適戶部郞中李德載。先歿。三適閣門祗候咸景均。子揆等具公之行狀。乞銘甚切。故受而銘之。銘曰。

대저 하늘이 갚아 베푸는 것은 뿔을 준 것에는 날개를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릇 선비가 장원의 뽑힘을 얻고도 멀리까지 이르는 이가 드물다. 공은 그렇지 않았다. 이미 금방(金榜)의 과거에 첫째로 오르고 또 재상의 귀함을 끝까지 밟았다. 게다가 오래 살았고 슬픔과 영화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이지러짐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찌 까닭 없이 그러하겠는가. 아마도 반드시 하늘이 두터이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어, 가진 것이 많아도 하늘이 주기를 싫어하지 않은 것인가.

공의 휘는 의(儀)요 자는 절지(節之)다. 옛 이름은 극의(克儀)였는데 뒤에 의로 고쳤다. 계보는 삼한공신 용식(容式)의 세보에서 나왔고 계양(桂陽)의 김포현(金浦縣)이 곧 그 고향이다. 증조 아무개는 돌아간 신호위 산원으로 상장군을 받았고, 할아버지 아무개는 돌아간 검교 태자소보로 좌복야를 받았다. 아버지 아무개는 돌아간 창안댁(昌安宅)의 아전이었는데 공 때문에 좌복야를 받았다. 어머니 서씨는 돌아간 검교 군기감 숙(淑)의 딸인데 공 때문에 이천군대부인을 받았다.

공은 젊어서 배움에 힘쓰고 글 짓기에 뛰어났다. 을미(乙未)년에 태학에 들어가 잇달아 과거에 나아갔으나 아직 급제하지 못하였다. 나가 청도군(淸道郡)을 다스렸는데, 절개를 몹시 갈고 맑고 깨끗하였으며 굳세고 바르며 굽히지 않음으로 정사를 하니 한 고장이 「청도의 쇠 상공」이라 일컬었다. 임기가 차자 곧 개보(開寶) 판관으로 들어와 보임되었다. 이듬해 봄 과장에 나아가 첫째로 뽑혔고 마침내 내시에 이름을 올렸다.

임금이 그릇으로 여겨 부렸다. 벼슬이 쌓여 장작주부 당후관에 이르렀고 마침내 합문지후에 임명되었다. 맑고 빛나며 권세 있고 종요로운 자리로는 상서 이부원외랑·직보문각·좌사낭중·기거사인 지제고·형부낭중·태자사경·국학 직강·어사잡단·중서사인·사관 수찬·병부시랑·한림 시강학사·동궁 시강학사·상서우승·우간의대부·태자찬선대부를 두루 지냈다. 공은 일찍이 두 학사를 아울러 띠었고 이에 이르러 또 세 대부를 겸하니 조정이 영화롭게 여겼다.

공이 간관의 자리에 있을 때,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면서 참관(參官)을 받은 이가 있었다. 공이 여러 낭관과 함께 안 된다고 버티었다. 나라를 맡은 이가 기뻐하지 않아 성랑(省郞)을 다 내보내 다른 벼슬에 보임하였다. 공도 예에 따라 나가 장작감 지합문사가 되었다. 예를 잡는 일은 가장 어렵다고 일컬어진다. 공이 비록 이 소임을 처음 맡았으나 그 나아가고 멈춤이 자세하고 빛나 오래 익숙한 이를 넘었다. 재주란 베풀어 안 되는 데가 없음이 이와 같다.

얼마 뒤 또 좌간의대부 판비서성에 임명되었고 이어 추밀원 우승선에 임명되었는데, 다 간관과 지제고와 학사를 그대로 지녔다. 차례를 좇아 지주사와 지이부가 되었다. 공이 여러 해 임금의 목구멍과 혀를 맡아, 무릇 아뢰고 대답하고 받들어 응함이 임금의 뜻에 매우 맞았다. 임금이 기대어 무겁게 여겨 정사를 많이 물었다.

임신(壬申)년에 이르러 대금(大金)의 사신이 왔는데 정문으로 들어오려 하였다. 우리 조정이 허락하지 않고 통역을 시켜 오가며 따져 물었으나 손님이 오히려 듣지 않았다. 이날 큰비가 내려 뭇 신하가 다 옷을 적신 채 서서 기다렸다. 임금이 공에게 명하여 가서 타이르게 하였다. 공이 먼저 물었다. 「천자가 제후의 땅을 돌아보는 일은 예부터 있었습니다. 만약 그대 나라 황제께서 작은 나라에 수레를 굽혀 오신다면 마땅히 어느 문으로 드시겠습니까.」 「천자가 드나드는 데 가운뎃문을 버리고 어디로 하겠소.」 「그렇다면 신하로서 임금의 정문으로 들어오려 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저쪽이 그 말에 크게 굴복하여 마침내 서쪽 문으로 들어왔다. 공이 때를 만나 방책을 세워 남의 생각 밖으로 나오는 것이 다 이와 같았다. 임금이 크게 아름다이 여겨 기렸다.

계유(癸酉)년에 은청광록대부 첨서추밀사 좌산기상시 한림학사승지로 나아가 임명되었다. 을해(乙亥)년에 재상에 들어 금자광록대부 정당문학 좌복야 보문각 대학사 수국사가 되었다. 정축(丁丑)년에 수태위 중서시랑 평장사가 되었고, 무인(戊寅)년에 문하시랑 수문전 대학사가 되었다.

일찍이 팔관회에서 짐승 모양 수레를 굴려 움직임이 법대로 되지 않은 것이 있었다. 어사대의 아전이 가서 대정(隊正)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꺾어 욕보였다. 이에 군사의 장수들이 소리치며 미친 듯 둘러보다가 마침내 어사대의 잔치 장막에 기와와 돌을 던졌다. 날아드는 돌이 더러 재상의 장막 자리를 지나가기도 하였다. 공이 크게 노하여 급히 뜰에 내려가 홀로 서서 소리를 높여 크게 외쳤다. 「너희가 임금과 신하, 위와 아래가 다 갖추어진 나라에 있으면서 감히 이러느냐. 진실로 난을 일으키려거든 늙은 나를 먼저 죽여라.」 이같이 하기를 두세 번 한 뒤에야 군사들의 마음이 조금 꺾여 난이 마침내 일어나지 않았다. 그가 위태로움에 다다라 두려워하지 않음이 또한 이와 같았다.

공이 일찍이 춘주도(春州道)를 살필 때 아전을 매우 엄히 다스리고 백성의 폐단을 모두 고치니 백성이 힘입었다. 일찍이 사마시를 맡고 세 번 예위(禮闈)를 주관하였는데 얻은 이가 다 그 시대의 이름난 사람이었다. 빼어난 인재가 줄지어 성한 것이 가까운 옛날에 없던 일이다.

경진(庚辰)년에 벽상삼한대광 수태보 문하평장사 수문전 대학사 판이부사로 자리를 놓고 집에 있었다. 옛 덕 있는 원로들과 기로회를 만들어 날마다 서로 좇아 잔치하고 노닐며 돈을 뿌리는 즐거움을 이루었다.

경인(庚寅)년 정월 스무엿새에 조금 가벼운 병이 있었다. 그러나 이날 자손들에게 바둑을 두게 하고 저녁까지 보았으며 오히려 조용히 이야기하고 웃었다. 밤이 되자 고요히 죽었는데 곁에서 모시던 이도 알아채지 못하였다. 이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누린 나이가 일흔여덟이다. 임금이 부고를 듣고 몹시 슬퍼하여 유사에게 명하여 상을 치르게 하고 봉황산(鳳凰山) 기슭에 장사 지냈으며 아무 공이라 시호를 내렸다.

공의 사람됨은 풍채가 아름답고 무겁고 엄정하였다. 젊은 나이에 송나라 손 장천각(莊天覺)이 사람 보기를 잘하였는데 공을 보고 「뒤에 반드시 재상에 이르리라」 하였다. 과연 그 말과 꼭 같았다. 성품이 굳세고 과단하여 남과 마주하여 꺾기를 꺼리는 바가 없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꺼렸고 더러 서로 헐뜯기도 하였다. 그러나 마음 바탕이 평탄하여 비록 그때는 꾸짖고 욕하였어도 뒤에는 다 버리고 조금도 가슴에 걸어 두지 않았다. 그러므로 마침내 제 몸을 보전할 수 있었으니 툭 트이고 도량 큰 군자라 할 만하다.

추밀사 김광식(金光軾)의 딸에게 장가들어 무릇 아들 다섯과 딸 셋을 낳았다. 아들 기(耆)는 호부원외랑인데 공보다 먼저 죽었고, 규(揆)는 공부원외랑이며, 심정(心正)은 머리를 깎고 선사가 되었고, 휘(暉)는 좌우위 대장군인데 공보다 먼저 죽었고, 희(禧)는 합문지후인데 또한 먼저 죽었으며, 기(祺)는 잡직서령이다. 맏딸은 내시 보승중랑장 윤유효(尹惟孝)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호부낭중 이덕재(李德載)에게 시집갔는데 먼저 죽었으며, 셋째 딸은 합문지후 함경균(咸景均)에게 시집갔다.

아들 규 들이 공의 행장을 갖추어 명을 매우 간절히 빌었다. 그러므로 받아 명을 짓는다. 명에 이른다.

2명

孰相皇朝兮大鳴一國。猗我大保兮寔人之特。步驟臺閣兮奮髥正色。奸吏屛氣兮顚倒蒲北。正門言言兮人莫敢廁。戎使迹穢兮欲蹈其閾。公則往諭兮一言中的。彼雖獸心兮豁然自釋。廟謀密勿兮以手指畫。綠野歸來兮任性閑適。霞輧安往兮雲路遐逖。舊德云亡兮于誰取則。鳳凰之山兮有騫其翼。土肥泉甘兮灌木植植。於焉相攸兮是公之宅。納銘隧道兮流耀罔極。

누가 조정을 도와 한 나라에 크게 울렸던가 아름답다 우리 태보여 참으로 사람 가운데 빼어나셨네 대각에서 걸음을 옮기며 수염을 떨치고 낯빛을 바로 하니 간사한 아전이 숨을 죽이고 엎어져 달아났네 정문이 높고 높아 사람이 감히 끼어들지 못하는데 오랑캐 사신이 발자취를 더럽히며 그 문지방을 밟으려 하였네 공이 가서 타이르니 한마디가 과녁을 맞혔고 저들이 비록 짐승의 마음이나 툭 트여 스스로 풀렸네 조정의 꾀에 부지런히 힘써 손으로 가리키고 그었으며 푸른 들로 돌아와 성품에 맡겨 한가로이 지냈네 노을 수레는 어디로 갔는가 구름 길이 아득하네 옛 덕이 가셨으니 누구에게서 본을 뜨랴 봉황의 산이 그 날개를 들었고 흙이 기름지고 샘이 달아 나무가 빽빽하네 이에 자리를 보니 이곳이 공의 집이라 명을 무덤길에 넣으니 빛이 흘러 끝이 없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