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덕전 선생을 슬퍼하는 글吳先生德全哀詞
濮陽先生吳世才。字德全。中古名學士諱學麟之孫也。家世以儒顯。兄弟三人。曰世功。曰世文。公其季也。世功世文。皆當世名儒。而公實白眉之良。二兄亦自以爲不及。學士李知深以女妻之。間或負氣偃蹇。李公愛其才。不敢訾焉。尤精力耽六經。盡誦周易。餘經雖不期於誦。其背文而誦者亦幾乎半。蓋熟於口而不覺出吻故耳。嘗手寫六經。謂人曰。百讀不如一寫之存心。爲詩文。得韓杜體。雖牛童走卒。無有不知名者。少疏雋小檢。晚節登科第。始折節刻勵。恂恂然禮法君子也。尙不容於世。蹇躓不振。嘗以書干趙,柳兩公。其辭哀切悲壯。抑揚婉轉。眞有古人風。讀之不覺涕下。然而猶不得被薦。則甚矣世之迫隘之如此也。先生度終不爲世用。於是有長往之志。東京。外祖所出也。意欲歸老。以路遠難於徒步。遂求爲祭告使祝史。乘驛而往。因留之不復京師。東都亦無有力護者。卒以窮困死。前死日。有友人夢見公乘白鶴盤旋者。明日謁之。先生已化矣。嗚呼。昔屈原,賈誼雖被疏斥。其始莫不被君寵遇。頗伸蘊蓄。李太白亦爾。杜甫雖窮。亦得爲員郞。公獨卒不霑一命而死。天耶命耶。果天也。其忍使才賢薄命如此。是何理耶。昔公之未東也。始訪予於城西之莊。留浹辰論懷款密。予年方十八。猶未冠。公已五十三矣。予欲以丈人行事之。公不肯焉。許以忘年曰。古之人論交。但論志之何如耳。不必以齒。吾才雖不及嵇康。以子爲阮籍可矣。自是嘗與遊詩酒間。每於名流廣會中。以得予爲誇。或譏以爲先生老大師儒也。安用此孺子爲友而驕其心耶。公輒曰。非子輩所知也。此公之所以賞予於頭角未露時者也。從遊僅三稔。雖不能盡襲蘭芳。其漬餘膏亦多矣。昔陶潛死。門人私贈諡曰靖節先生。予之以稚齒。被先生斵墁。不啻若門人。以是私贈諡曰玄靜先生。遂爲哀詞曰。
복양선생(濮陽先生) 오세재(吳世才)는 자가 덕전(德全)이니 중고의 이름난 학사 휘 학린(學麟)의 손자다. 집안이 대대로 선비로 드러났다. 형제가 셋이니 세공(世功)과 세문(世文)이요 공은 그 막내다. 세공과 세문이 다 당대의 이름난 선비였으나 공이 실로 그 가운데 가장 뛰어나 두 형도 스스로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학사 이지심(李知深)이 딸을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다. 이따금 기개를 믿고 거만하게 굴었으나 이공이 그 재주를 아껴 감히 나무라지 않았다.
더욱 힘을 기울여 육경에 빠져 「주역」을 다 외웠다. 나머지 경전은 외우기를 기약하지 않았으나 글을 보지 않고 외는 것이 또한 거의 절반이었다. 입에 익어 저도 모르게 입술 밖으로 나온 것이다. 일찍이 손수 육경을 베껴 쓰고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백 번 읽는 것이 한 번 베껴 마음에 남기는 것만 못하다.」 시와 글을 지으매 한유와 두보의 체를 얻었으니 소 치는 아이와 심부름꾼까지도 그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젊어서는 거침없고 빼어났으나 몸가짐을 단속하지 않았는데, 늘그막에 과거에 오르고서야 비로소 뜻을 꺾고 각고하여 조심스러운 예법의 군자가 되었다. 그런데도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못하여 절뚝이며 떨치지 못하였다. 일찍이 글을 조공과 유공 두 분에게 올렸는데 그 말이 애절하고 비장하며 오르내리고 굽이돌아 참으로 옛사람의 풍이 있어 읽으면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그런데도 끝내 천거되지 못하였으니 세상이 이토록 각박한 것이 심하다.
선생은 끝내 세상에 쓰이지 못할 것을 헤아리고 이에 멀리 떠날 뜻을 두었다. 동경(東京)은 외조부가 난 곳이다. 돌아가 늙으려 하였으나 길이 멀어 걸어가기 어려웠다. 마침내 제고사의 축사 자리를 구하여 역마를 타고 가서는 그대로 머물러 서울로 돌아오지 않았다. 동도에도 힘써 돌보아 주는 이가 없어 마침내 궁하고 곤하게 죽었다. 죽기 전날 어떤 벗이 공이 흰 학을 타고 빙 도는 것을 꿈에 보았다. 이튿날 찾아가니 선생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아, 옛날 굴원(屈原)과 가의(賈誼)가 비록 멀리 내쳐졌으나 처음에는 다 임금의 총애를 입어 품은 것을 자못 폈다. 이태백(李太白)도 그러하였고 두보(杜甫)는 궁하였어도 원외랑은 되었다. 공만은 끝내 벼슬 한자리도 얻지 못하고 죽었다. 하늘인가 운명인가. 참으로 하늘이라면 어찌 차마 재주 있고 어진 이의 명을 이토록 얇게 하는가. 이것이 무슨 이치인가.
옛날 공이 아직 동경으로 가기 전에 성 서쪽 별장으로 나를 처음 찾아와 열이틀을 묵으며 회포를 도탑게 나누었다. 내 나이 열여덟에 아직 관례도 하지 않았고 공은 이미 쉰셋이었다. 내가 어른으로 섬기려 하였으나 공은 마다하였다. 나이를 잊은 벗으로 허락하며 말하였다. 「옛사람이 사귐을 논할 때는 다만 뜻이 어떠한가를 논하였을 뿐 나이로 하지 않았다. 내 재주가 비록 혜강(嵇康)에게 미치지 못하나 그대를 완적(阮籍)으로 삼으면 되겠다.」
이로부터 시와 술 사이에서 함께 노닐었고, 이름난 이들이 많이 모인 자리마다 나를 얻은 것을 자랑하였다. 어떤 이가 「선생은 늙고 큰 스승인데 어찌 이 어린아이를 벗으로 삼아 그 마음을 뽐내는가」 하고 나무라면 공은 곧 「그대들이 알 바가 아니다」 하였다. 이것이 공이 내 뿔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 때 나를 알아준 까닭이다. 따라 노닌 것이 겨우 세 해라 난초 향을 다 옮겨 받지는 못하였으나 남은 기름에 젖은 것은 또한 많았다.
옛날 도잠(陶潛)이 죽자 문인들이 사사로이 시호를 올려 정절선생(靖節先生)이라 하였다. 나는 어린 나이에 선생의 다듬음을 입은 것이 문인만 못하지 않다. 그래서 사사로이 시호를 올려 현정선생(玄靜先生)이라 하고, 이어 애사를 지어 이렇게 말한다.
협주 1
幷序
서문을 아울러 싣는다.
有猗夫子。器涵涵兮。鳶肩方口。頎而髥兮。文詞游刃。有餘銛兮。六經粹奧。窅搜探兮。人難有一。公獨兼兮。胸中恢廣。混包含兮。文場虎攫。視耽耽兮。李杜爲敵。一接殲兮。抱寶不售。分固甘兮。塊然獨居。守窮閻兮。獵纓正色。貌矜嚴兮。高官豐祿。豈不足擔兮。鰌鱓得水。躍江潭兮。戢鱗泥淖。龍晦潛兮。刻畫自媚。盡無鹽兮。西施布袂。衣不縑兮。朝臣不薦。得無慙兮。有吻莫啓。孰弛鉗兮。才賢蹇躓。其視恬兮。朱門煌煌。勢徒炎兮。屈平賈誼。雖被讒兮。始於國政。無不參兮。嗟若先生。老窮巖兮。才恩滴澤。猶不霑兮。崎嶇世味。備嘗諳兮。奮然獨往。天之南兮。江湖卑濕。不可淹兮。想昇碧落。鶴爲驂兮。不爾逍遙。鼇岫三兮。縹霞紅霧。擁仙龕兮。欲往從遊。予骨凡兮。安得輕擧。挹子衫兮。綴芳薦諡。欲寄緘兮。翩翩靑鳥。倘來銜兮。
아름답도다 부자여, 그릇이 넘실넘실하였다. 솔개 어깨에 모난 입, 훤칠하고 수염이 길었다. 글솜씨는 칼날을 놀리듯 하여 날카로움이 남았다. 육경의 순수하고 깊은 데를 아득히 뒤져 찾았다. 남은 하나도 갖기 어려운 것을 공은 홀로 아울렀다. 가슴속이 넓고 넓어 뒤섞어 다 품었다. 글 마당에서는 범이 채듯 노려보았다. 이백과 두보를 맞수로 삼아 한 번 붙으면 무찔렀다. 보배를 안고도 팔지 못하였으나 제 분수로 달게 여겼다. 덩그러니 홀로 살며 궁한 골목을 지켰다. 갓끈을 바로잡고 낯빛을 바루니 모습이 엄정하였다. 높은 벼슬과 두터운 녹인들 어찌 짊어지지 못하였으랴. 미꾸라지와 두렁허리는 물을 얻어 강과 못에서 뛰논다. 용은 비늘을 거두고 진흙에 잠겨 몸을 숨긴다. 새기고 그려 스스로 아양 떠는 것은 다 무염(無鹽) 같은 이다. 서시(西施)는 베 소매를 걸치고 비단옷을 입지 않았다. 조정 신하들이 천거하지 않았으니 부끄럽지 않겠는가. 입이 있어도 열지 못하니 누가 그 재갈을 풀어 주랴. 재주 있고 어진 이가 절뚝이는데도 태연히 보고만 있었다. 붉은 대문은 번쩍이고 세도가들만 뜨거웠다. 굴평(屈平)과 가의(賈誼)는 비록 참소를 입었으나 처음에는 나라 정사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아, 선생 같은 이는 궁한 바위 밑에서 늙었다. 재주에 내리는 은혜의 물방울조차 적시지 못하였다. 험한 세상 맛을 두루 겪어 다 알았다. 떨치고 일어나 홀로 하늘 남쪽으로 갔다. 강호는 낮고 축축하여 오래 머물 곳이 아니다. 푸른 하늘로 올라 학을 곁마로 삼았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자라 등에 얹힌 세 봉우리에서 노닐리라. 엷은 노을과 붉은 안개가 신선의 감실을 둘렀으리라. 가서 따라 노닐고 싶으나 내 뼈가 범상하다. 어찌하면 가벼이 올라 그대의 옷자락을 잡으랴. 꽃다운 글을 엮어 시호를 올리며 봉한 글을 부치고자 한다. 훨훨 나는 파랑새가 혹 와서 물어 가 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