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 › 동국이상국집 › 전집 권37

문 선사를 슬퍼하는 글文禪師哀詞

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 · 이규보(李奎報) · 1241년 (고려 고종 28) 엮음 · 1251년 고쳐 보탬 · 단락 2 · 한자 279자 · 낭독 2.6분

동국이상국집 전집 권37 고려 이규보가 평생 지은 글을 아들 이함이 1241년에 엮어 새기고, 손자 이익배가 1251년에 고쳐 보탠 문집. 시와 부, 임금께 올린 표와 전, 절과 탑에 붙인 기, 비명과 묘지명, 편지와 서문, 그리고 몽골이 쳐들어온 때에 오간 국서까지 담겼다. 고구려 시조를 노래한 「동명왕편」이 전집 권3에 있고, 술과 거문고와 시를 벗 삼아 스스로 백운거사라 한 사람의 하루하루가 후집에 남아 있다. 책은 그가 눈을 앓다 붓을 놓는 마지막 시와, 그가 죽은 뒤 남이 지어 붙인 뇌서·묘지명으로 닫힌다.

吾道友大禪師惠文。字彬彬。俗姓南氏。固城郡人也。某年至京師。落髮禪宗迦智山門。爲名長老。年餘三十。始中空門選。累緇秩至大禪師。越壬辰歲。遙住華岳寺。嘗寄居京師普濟寺傳法。是年。國朝因避虜遷都。師以本寺亦在冠兵屯會之藪。遑遑無所歸。遂至門弟禪師某所住雲門寺。居三年。至閼逢敦牂之歲。感疾而化。師爲人資抗直。一時名士大夫。多從之遊。喜作詩。得山人體。嘗題普賢寺。其略云。路長門外人南北。松老巖頭月古今。人多詠之。因號月松和尙。由是著名。予自弱冠忝交分。聞訃悽悵。爲詞以哀之。

나의 도반 대선사 혜문(惠文)은 자가 빈빈(彬彬)이요 속성은 남씨(南氏)니 고성군(固城郡) 사람이다. 아무 해에 서울에 이르러 선종 가지산문(迦智山門)에서 머리를 깎고 이름난 장로가 되었다. 나이 서른이 넘어 비로소 승과에 뽑혔고 승계를 거듭 올라 대선사에 이르렀다. 임진년에 멀리 화악사(華岳寺)를 맡았고, 일찍이 서울 보제사(普濟寺)에 머물며 법을 전하였다.

그해에 나라가 오랑캐를 피하여 도읍을 옮겼다. 스님은 본사 또한 군사가 모여 진 치는 덤불 속에 있어 허둥지둥 돌아갈 곳이 없었다. 마침내 문하 제자 선사 아무가 머무는 운문사(雲門寺)에 이르러 세 해를 살다가 갑오년에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스님은 사람됨이 꼿꼿하고 곧아 한때의 이름난 사대부가 많이 따라 노닐었다. 시 짓기를 좋아하여 산사람의 체를 얻었다. 일찍이 보현사(普賢寺)에 쓴 시의 한 대목에 「길은 긴데 문밖 사람은 남으로 북으로 가고, 솔은 늙었는데 바위 위 달은 예나 이제나 그대로다」 하였다. 사람들이 많이 읊었으므로 월송화상(月松和尙)이라 불렸고 이로 말미암아 이름이 났다. 나는 스무 살 적부터 외람되이 사귀는 정을 나누었다. 부음을 듣고 슬프고 서글퍼 글을 지어 슬퍼한다.

有髠其首。而僧其衣。服則是矣。心或有非。惟我禪師。是眞大士。旣僧其服。又僧其志。戒行無虧。淸淨心地。餘事爲詩。下茟不怠。至其得意。淸警可愛。門徒索寞。數三沙彌。孰表其隧。孰編其詩。嗟哉我公。已而已而。

머리를 깎고 중의 옷을 입었어도 옷은 그렇거니와 마음은 더러 그르기도 하다. 오직 우리 선사는 참으로 큰 사람이었다. 옷도 중이었고 뜻도 중이었다. 계행에 이지러짐이 없고 마음자리가 맑고 깨끗하였다. 남은 일로 시를 지어 붓 내리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뜻을 얻은 대목에 이르면 맑고 날카로워 사랑스러웠다. 문도는 쓸쓸하여 사미 두엇 셋뿐이다. 누가 그 무덤길에 비를 세우며 누가 그 시를 엮으랴. 아, 우리 공이여. 그만이로다 그만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