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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이상국집 후집 서 — 이함序

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 · 이규보(李奎報) · 1241년 (고려 고종 28) 엮음 · 1251년 고쳐 보탬 · 단락 1 · 한자 327자 · 낭독 3.1분

동국이상국집 후집 서 고려 이규보가 평생 지은 글을 아들 이함이 1241년에 엮어 새기고, 손자 이익배가 1251년에 고쳐 보탠 문집. 시와 부, 임금께 올린 표와 전, 절과 탑에 붙인 기, 비명과 묘지명, 편지와 서문, 그리고 몽골이 쳐들어온 때에 오간 국서까지 담겼다. 고구려 시조를 노래한 「동명왕편」이 전집 권3에 있고, 술과 거문고와 시를 벗 삼아 스스로 백운거사라 한 사람의 하루하루가 후집에 남아 있다. 책은 그가 눈을 앓다 붓을 놓는 마지막 시와, 그가 죽은 뒤 남이 지어 붙인 뇌서·묘지명으로 닫힌다.

嗣子涵謹言,大人平生所著多矣,然本不收蓄,又爲人取去不還,或焚棄之,《前集》有〈焚蒿詩〉,僅存十之二三,故難於編綴。凡大人所嘗遊踐儒家釋院及交游士大夫間,無不搜覓,得詩文凡若干首,分爲四十一卷,編成《前集》,侍郞李需序之。集成之後,又得遺逸及近所著古律詩八百四十七首、雜文五十首,成後集十二卷。噫,脫不幸不傳于世,亦足爲一門子姓傳家之寶矣!大人初登第時,嘗與四五同年,將遊通濟院,聯鞍唱和,公詩一句云:「蹇驢影裏碧山晚,斷鴈聲中紅樹秋。」四韻失三句。聞此詩流入于宋,大爲其宰相所賞。此少年時所賦特一首耳,其賞如此,况得見全集乎?又代琴學士讓官表云:「昔也帶雙學士,有譏越分者幾人,今則兼三大夫,將復置賢於何地?」此亦人所愛誦,而皆不得全篇以附于此,是一恨也。由此觀之,其遺珠漏玉之不見者,非止此而已矣。時辛丑十二月日,知洪州事副使兼勸農使管句學事將仕郞尙食奉御涵,謹序。

뒤를 이은 아들 함(涵)은 삼가 아룁니다. 아버님께서 평생 지으신 글이 많으나 본디 거두어 쌓아 두지 않으셨고, 또 남이 가져가고 돌려주지 않거나 더러 불살라 버리기도 하여 — 『전집』에 「초고를 태우다(焚蒿詩)」라는 시가 있습니다 — 겨우 열에 두셋만 남았으니, 그러므로 엮기가 어려웠습니다.

아버님께서 일찍이 드나드신 선비의 집과 절, 그리고 사귀신 사대부들 사이를 두루 뒤지지 않은 데가 없어 시와 글 얼마를 얻어 마흔한 권으로 나누어 『전집』을 엮었고, 시랑 이수(李需)가 서문을 지었습니다. 문집이 이루어진 뒤에 또 빠졌던 것과 요즈음 지으신 고시와 율시 팔백사십칠 수, 잡문 쉰 편을 얻어 『후집』 열두 권을 이루었습니다.

아, 혹 불행히 세상에 전하지 못하더라도 한 집안 자손이 대대로 전하는 보배가 되기에는 넉넉할 것입니다.

아버님께서 처음 급제하셨을 때 같은 해에 급제한 네댓 사람과 통제원(通濟院)에 놀러 가시며 안장을 나란히 하고 시를 주고받으셨는데, 공의 시 한 구절에 「절뚝이는 나귀 그림자 속에 푸른 산이 저물고, 외기러기 소리 가운데 붉은 나무에 가을이 든다」 하였습니다. 네 운(韻) 가운데 세 구절은 잃었습니다. 들으니 이 시가 송(宋)나라에 흘러 들어가 그 재상에게 크게 칭찬을 받았다 합니다. 이는 젊으실 때 지으신 겨우 한 수일 뿐인데도 그 기림이 이와 같았으니, 하물며 문집 전체를 보았더라면 어떠하였겠습니까.

또 금 학사(琴學士)를 대신하여 지으신 벼슬을 사양하는 표에 「지난날 학사 둘을 아울렀을 때도 분수를 넘었다고 나무라는 이가 몇이나 있었는데, 이제 대부 셋을 겸하게 되니 장차 어진 이를 어느 자리에 두려 하십니까」 하였습니다. 이 또한 사람들이 즐겨 외우는 것이나, 모두 온 편을 얻어 여기에 붙이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한 가지 한입니다.

이로 미루어 보면 빠뜨린 구슬과 새어 나간 옥으로서 보이지 않는 것이 이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때는 신축년 십이월 어느 날, 지홍주사 부사 겸 권농사 관구학사 장사랑 상식봉어 함이 삼가 서문을 씁니다.

협주 1

1241年

124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