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 상인의 대나무 집 기幻上人竹齋記
吾嘗觀人各有嗜。非一揆也。衆人之嗜。特滋味而已。君子之嗜。有異於是。目寓淸賞。有所留意。亦名曰嗜。以是古之賢達有嗜書嗜畫者。有嗜石嗜水嗜竹者。其所謂竹也。往往多爲高人釋子尤所嗜愛者。何哉。蓋相對而觀之也。亦足以虛其心地。圓通無礙。抑又生法師所謂盡是眞如之觀。於是乎存焉。亦於法門。究竟堅固。如竹之四時一色。不移其守。斯可尙已。有幻上人者。性或愛竹。先是。嘗使畫家名手韓某。摹白衣觀音像。其傍所立雙竹。則不令其人畫之。迺就丁學士而安。固乞掃焉。又於丁君。求得墨竹二本。裝成簇子。常寶之。蓋丁公墨竹。妙絶一時故爾。復於松家島普門精舍之側。別立一齋寓焉。皆以竹搆之。因號竹齋。於其宴息偃臥之中。見榱桷棟桴。皆呈竹色。上人以此爲樂。或曰。苟如是。其種而養之。觀玉立蕭洒。天然自態。何有不可。而傳之於墨。已是失眞。復以枯竿死幹。營此區區者耶。曰。夫所謂浮屠者。萍其迹雲其身。遊學無方者也。此竹齋。乃一蘧廬耳。今日在西。明日東北。又何處不辦作一齋耶。畫能隨身。齋因地有。不曰可乎。若種而觀之。安知不有類桑下之戀耶。齋成。固乞予爲記。爲略標之。上人名了幻。字而誰。於沙門可與爲道友者。
내가 일찍이 보니 사람마다 즐기는 것이 있어 한 가지가 아니었다. 뭇사람이 즐기는 것은 다만 맛있는 것뿐이다. 군자가 즐기는 것은 이와 달라, 눈을 맑은 구경에 붙여 마음 두는 바가 있으니 이 또한 즐김이라 이른다. 그러므로 옛 어질고 통달한 이 가운데 글씨를 즐기고 그림을 즐긴 이가 있고, 돌을 즐기고 물을 즐기고 대나무를 즐긴 이가 있었다.
그 이른바 대나무라는 것은 이따금 높은 이와 승려들이 더욱 즐겨 아끼는 바가 되니 어째서인가. 대개 마주 보노라면 또한 그 마음자리를 비울 수 있어 두루 통하여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 또 생법사(生法師)가 이른바 「다 이것이 참 그대로다」 하던 그 보는 눈이 여기에 있다. 또한 법문에 있어 끝까지 굳세기가, 대나무가 네 철에 한 빛이어서 그 지킴을 옮기지 않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높일 만하다.
환 상인(幻上人)이라는 이가 있어 성품이 자못 대나무를 사랑한다. 이에 앞서 일찍이 그림 잘 그리는 한(韓) 아무개에게 흰옷 입은 관음의 모습을 그리게 하면서, 그 곁에 선 두 그루 대나무만은 그 사람에게 그리게 하지 않고 정 학사 이안(丁而安)에게 나아가 굳이 쳐 달라 하였다. 또 정군에게 먹으로 친 대나무 두 폭을 얻어 족자로 꾸며 늘 보배로 여겼으니, 대개 정공이 먹으로 그린 대가 한 시절에 빼어나게 묘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송가도(松家島) 보문정사(普門精舍) 곁에 따로 집 한 채를 세워 붙여 살면서 모두 대나무로 지었으므로 대나무 집, 곧 죽재(竹齋)라 이름하였다. 그 쉬고 눕는 가운데에도 서까래와 마룻대와 들보가 모두 대 빛을 드러내니, 상인이 이로써 즐거움을 삼는다.
어떤 이가 말하였다. 「정말 그렇다면 심어 기르며 옥처럼 서서 맑고 시원한, 절로 그러한 모습을 보면 어찌 안 될 것이 있겠는가. 먹으로 옮긴 것도 이미 참을 잃은 것인데, 다시 마른 줄기와 죽은 대로 이 자질구레한 것을 꾸미는가.」
말하였다. 「무릇 이른바 중이라는 것은 그 자취를 부평초로 삼고 그 몸을 구름으로 삼아 어디든 가리지 않고 떠돌며 배우는 이다. 이 죽재는 곧 하룻밤 묵는 집일 뿐이다. 오늘은 서쪽에 있고 내일은 동북에 있으리니, 또 어느 곳에선들 집 한 채를 마련하지 못하겠는가. 그림은 몸을 따를 수 있고 집은 땅을 따라 있는 것이니 옳다 하지 않겠는가. 만약 심어 놓고 본다면 한곳에 얽매이는 그리움 같은 것이 없으리라고 어찌 알겠는가.」
집이 다 되자 굳이 나에게 기문을 지어 달라 하기에 대략 이를 적는다. 상인의 이름은 요환(了幻)이요 자는 이수(而誰)이니, 중 가운데 더불어 도를 벗할 만한 이다.
협주 1
桑下之戀 — 중이 한 뽕나무 아래에 사흘을 묵으면 그곳에 애착이 생긴다는 옛말이다. ― 옮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