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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태보 금자광록대부 문하시랑 평장사 수문전 대학사 감수국사 판예부사 한림원사 태자태보로 물러나 문순공 시호를 받은 분의 묘지명守大保金紫光祿大夫門下侍郞平章事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判禮部事翰林院事太子大保致仕。贈諡文順公墓誌銘。

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 · 이규보(李奎報) · 1241년 (고려 고종 28) 엮음 · 1251년 고쳐 보탬 · 단락 2 · 한자 1,382자 · 낭독 12.4분

동국이상국집 후집 권 끝 고려 이규보가 평생 지은 글을 아들 이함이 1241년에 엮어 새기고, 손자 이익배가 1251년에 고쳐 보탠 문집. 시와 부, 임금께 올린 표와 전, 절과 탑에 붙인 기, 비명과 묘지명, 편지와 서문, 그리고 몽골이 쳐들어온 때에 오간 국서까지 담겼다. 고구려 시조를 노래한 「동명왕편」이 전집 권3에 있고, 술과 거문고와 시를 벗 삼아 스스로 백운거사라 한 사람의 하루하루가 후집에 남아 있다. 책은 그가 눈을 앓다 붓을 놓는 마지막 시와, 그가 죽은 뒤 남이 지어 붙인 뇌서·묘지명으로 닫힌다.

公姓李。諱奎報。字春卿。黃驪縣人也。皇考諱允綏。戶部郞中。母金氏。金壤縣人也。以公故封金蘭郡君。蔚珍縣尉諱施政之女也。公九歲。能屬文。至十五六。洽聞強記。凡著述。不倣古人陳語。平生不自名唐白。時人指之曰。走筆李唐白。歲己酉。於名宰相柳公權座下。中司馬試第一。明年。赴禮部試。於三場試日。貢擧員重其名。令飮宣醞數四杯。稍酣。下筆未精。其科稍劣。欲辭之更擧。以嚴君切責。亦無舊例。辭不得。謂賀客曰。科第雖下。豈不是三四度鑄門生者乎。丁巳。冢宰趙公永仁等文儒四相。聯名上箚子。薦公於闕下。箚子。爲不平者所竊遂寢。登第之十年。出補全州管記。屢抑通判不法。因被訴解職。後館翰等儒官薦人。每以公爲之首。故於丁卯。權補翰林院。明年。卽眞。壬申正月。除千牛衛錄事參軍事出院。六月。以兼直復院。十二月。不踐七品。爲司宰丞。仍兼直院。乙亥。直拜右正言。歷左右司諫。己卯。出爲桂陽府副使。一年。以禮部郞中起居注見召。自後歷大僕少卿寶文閣待制將作國子監祭酒翰林侍講學士判衛尉事。於九年之間。其遷轉如此。庚寅。以無妄流于猬島。其時以同罪被流者三人。皆正直敢言之達官也。辛卯。蒙宥還京師。時達旦來侵。公以散官。凡講和文字。皆任之。壬辰四月。起爲正議大夫判祕書省事寶文閣學士慶成府詹事。自入參至於是職。除補外一年。皆兼典誥。癸巳六月。拜銀靑光祿大夫樞密院副使右散騎常侍寶文閣學士。十二月。入相爲金紫光祿大夫知門下省事戶部尙書集賢殿大學士判禮部事。乙未十二月。爲參知政事修文殿大學士判戶部事太子大保。冬十月。上表乞退。上遣近臣敦諭令復起。公不得已起視事。又乞退固切。上重違其志。以守大保門下侍郞平章事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判禮部事翰林院事太子大保致仕。嘗一典成均。三闢禮闈。所選多韻士。自解位來。以詩酒自娛。尙讀楞嚴。頌在九卷。亦國有大冊異朝書表等事。無所不爲。越辛丑七月。得微恙。時之當國大臣。連遣名醫問診。取公所著文集。命工彫刻。欲令公眼見。事巨未畢。至九月初二日。卒于私第。享年七十四。上哀悼。勑有司令百官會葬。贈諡曰文順公。噫。公之官爵次序。旣列於前。其瑞應行事之跡。敢闕于後。公之生數月。惡瘡滿身。面目皆爛。乳嫗出置門外。有一老父過視之曰。此兒不啻萬金。宜善護養。嫗走報家君。君疑其神人。數路追之不得。此神物護公於襁褓中也。公之欲赴司馬試。夢見着碪鍊緇布衣人群飮堂上。傍人曰。此二十八宿也。公驚悚再拜。問今年試席捷否。有一人指一人曰。彼乃奎星。宜就問之。公就問。未聞其言而窹。俄復夢。其人來報子必占魁頭。此天機。但勿洩耳。前名仁底。因改今名。赴試果中第一。此靈曜之攝公於名敎中也。壬戌。東京叛。遣三軍討之。軍幕欲以散官及第充修制員。戰者危事。皆以計避之。公獨慨然曰。予雖儒怯。避國難非人也。遂從軍。此公之勇於義也。戊寅。於八關會侍御宴。禮數未半。有一宰相促罷之。公曰。君賜也。不可取次處分。雖因此被流。此公之執法不撓也。所謂達旦者。頑如禽獸。奏之以鈞天廣樂。而不足以開其胸。投之以隋珠和璧。而▣▣▣▣顔。及聞公之文字事意。惻然有感。所諭皆從。此公之至諴能動無情者也。娶大府卿晉昇第二女。生四男二女。長曰灌。先公沒。曰涵。今爲知洪州事副使。曰澄。慶仙店錄事。曰濟。西大悲院錄事。女長適入內侍掖庭內謁者監李惟信。次適內侍慶禧宮錄事高伯梴。於戲。墓銘之作尙矣。其功名顯顯爲世所尙。然後爲之。蓋將使後之人知曠世之上。有雄偉不常者矣。雖其人雄偉不常。而銘不得其人。則不若無之之爲愈也。予拙於爲文。公於平日從容之際。每稱吾之沒也。子其銘乎。其嗣子涵述公之意。書來請銘。不得已銘之曰。

공의 성은 이씨요 휘는 규보(奎報)며 자는 춘경(春卿)이니 황려현(黃驪縣) 사람이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휘는 윤수(允綏)로 호부낭중이었다. 어머니는 김씨로 금양현(金壤縣) 사람인데 공으로 말미암아 금란군군에 봉해졌으니 울진현위 시정(施政)의 딸이다.

공은 아홉 살에 글을 지을 줄 알았고 열대여섯에 이르러서는 들은 것이 넉넉하고 기억이 굳세었다. 무릇 지을 때에 옛사람의 케케묵은 말을 본뜨지 않았다. 평생 스스로 당백(唐白)이라 이름한 적이 없건만 그때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붓을 달리는 이당백」이라 하였다.

기유년에 이름난 재상 유공권(柳公權)의 자리 아래에서 사마시에 첫째로 붙었다. 이듬해 예부의 시험에 나아갔는데 삼장을 보던 날 과거를 맡은 이들이 그 이름을 무겁게 여겨 임금이 내린 술을 서너 잔 마시게 하였다. 얼근해져서 붓을 내림이 정밀하지 못하여 그 등급이 조금 낮았다. 사양하고 다시 과거를 보려 하였으나 아버지가 간절히 꾸짖고 또 옛 전례도 없어 사양하지 못하였다. 하례하는 손에게 말하였다. 「과거 등급은 비록 낮으나 서너 번은 문생을 길러 낼 사람이 아니겠는가.」

정사년에 재상의 으뜸인 조영인(趙永仁) 등 글하는 재상 넷이 이름을 잇달아 차자(箚子)를 올려 공을 대궐에 천거하였는데, 그 차자를 불평하는 이가 훔쳐 가 마침내 묻히고 말았다. 급제한 지 열 해 만에 나가 전주 서기로 보임되었는데, 통판의 법 아닌 일을 여러 번 억눌렀다가 이로 말미암아 고소를 입어 직에서 풀렸다. 뒤에 관각과 한림의 유관들이 사람을 천거할 때마다 늘 공을 첫머리로 삼았다. 그리하여 정묘년에 한림원에 임시로 보임되었고 이듬해 정식 벼슬이 되었다.

임신년 정월에 천우위 녹사참군사에 임명되어 한림원을 나왔다가 유월에 겸직으로 다시 들어갔다. 십이월에 칠품을 밟지 않고 사재승이 되었고 그대로 한림원의 겸직을 지녔다. 을해년에 곧바로 우정언에 임명되고 좌사간과 우사간을 거쳤다. 기묘년에 나가 계양부 부사가 되었고 한 해 만에 예부낭중 기거주로 부름을 받았다. 그 뒤로 태복소경, 보문각 대제, 장작감, 국자감 좨주, 한림시강학사, 판위위사를 거쳤으니 아홉 해 사이에 그 옮겨 다님이 이와 같았다.

경인년에 애먼 일로 위도(猬島)에 귀양 갔다. 그때 같은 죄로 귀양 간 이가 셋인데 다 곧고 바르며 감히 말하는 높은 벼슬아치였다. 신묘년에 용서를 입어 서울로 돌아왔다. 그때 달단(達旦)이 쳐들어오매 공이 산관의 몸으로 무릇 화친을 의논하는 글을 다 맡았다.

임진년 사월에 일어나 정의대부 판비서성사 보문각 학사 경성부 첨사가 되었다. 처음 벼슬에 든 뒤로 이 자리에 이르기까지 바깥으로 나가 있던 한 해를 빼고는 다 조서 짓는 일을 겸하였다. 계사년 유월에 은청광록대부 추밀원 부사 우산기상시 보문각 학사에 임명되었고, 십이월에 재상으로 들어가 금자광록대부 지문하성사 호부상서 집현전 대학사 판예부사가 되었다. 을미년 십이월에 참지정사 수문전 대학사 판호부사 태자태보가 되었다.

겨울 시월에 표를 올려 물러나기를 빌었으나 임금이 가까운 신하를 보내어 도타이 타일러 다시 일어나게 하니 공이 마지못하여 일어나 일을 보았다. 또 물러나기를 굳고 간절히 비니 임금이 그 뜻을 어기기 어려이 여겨, 수태보 문하시랑 평장사 수문전 대학사 감수국사 판예부사 한림원사 태자태보로 벼슬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일찍이 한 번 성균의 시험을 맡고 세 번 예부의 시험을 열었는데 뽑은 이에 운치 있는 선비가 많았다. 벼슬을 푼 뒤로는 시와 술로 스스로 즐겼고 오히려 능엄경을 읽었으니 그 게송이 아홉 권에 있다. 또 나라에 큰 책이나 다른 나라에 보내는 글과 표 따위의 일이 있으면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신축년 칠월에 가벼운 병을 얻었다. 그때 나라를 맡은 대신들이 잇달아 이름난 의원을 보내어 병을 묻고 살피게 하였다. 공이 지은 문집을 가져다 장인에게 명하여 새기게 하고 공이 눈으로 보게 하려 하였으나 일이 커서 마치지 못하였다. 구월 초이틀에 사삿집에서 돌아가시니 누린 나이 일흔넷이었다. 임금이 슬퍼하여 유사에게 명해 온 벼슬아치가 모여 장사 지내게 하고 문순공(文順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아. 공의 벼슬과 품계의 차례는 이미 앞에 벌여 놓았으니 그 상서가 응한 일과 행적을 어찌 감히 뒤에 빠뜨리겠는가.

공이 난 지 몇 달 만에 모진 부스럼이 온몸에 퍼져 얼굴과 눈이 다 헐었다. 젖어미가 문밖에 내어 두었는데 한 늙은이가 지나다 보고 말하였다. 「이 아이는 만금보다 더 귀하니 마땅히 잘 보살펴 기르라.」 젖어미가 달려가 아버지께 알리니 아버지가 신인(神人)인가 의심하여 여러 길로 뒤쫓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이는 신령한 것이 강보 속의 공을 지킨 것이다.

공이 사마시에 나아가려 할 때 꿈에 다듬이질한 검은 베옷을 입은 사람들이 마루 위에서 무리 지어 마시는 것을 보았다. 곁의 사람이 말하였다. 「이들은 스물여덟 별자리다.」 공이 놀라 두려워하며 두 번 절하고 올해 시험 자리에서 붙을지를 물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저이가 곧 규성이니 마땅히 나아가 물으라.」 공이 나아가 물었으나 그 말을 듣지 못하고 깨었다. 이윽고 다시 꿈을 꾸니 그 사람이 와서 알렸다. 「그대는 반드시 으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이는 하늘의 기밀이니 다만 새어 나가지 않게 하라.」 앞서의 이름은 인저(仁底)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이제의 이름으로 고쳤고, 시험에 나아가 과연 첫째로 붙었다. 이는 신령한 별이 공을 유교의 길로 이끈 것이다.

임술년에 경주가 배반하매 삼군을 보내어 쳤는데, 군막이 산관으로 급제한 이를 뽑아 글 짓는 자리를 채우려 하였다. 싸움은 위태로운 일이라 다들 꾀를 내어 피하였다. 공만이 홀로 개연히 말하였다. 「내가 비록 선비라 겁이 많으나 나라의 어려움을 피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마침내 군사를 따라갔다. 이는 공이 의로움에 용감한 것이다.

무인년 팔관회 때 임금의 잔치를 모셨는데 예가 반도 지나지 않아 한 재상이 파하기를 재촉하였다. 공이 말하였다. 「임금께서 내리신 것이니 함부로 처분할 수 없다.」 비록 이로 말미암아 귀양을 갔으나 이는 공이 법을 잡아 굽히지 않은 것이다.

이른바 달단이라는 것들은 완악하기가 새와 짐승 같다. 하늘의 성대한 풍악을 들려주어도 그 가슴을 열기에 넉넉하지 못하고, 수후의 구슬과 화씨의 구슬을 던져 주어도 ▣▣▣▣ 낯빛이었다. 그러다가 공의 글과 사연의 뜻을 듣고서는 마음이 움직여 느끼는 바가 있어 타이른 것을 다 따랐다. 이는 공의 지극한 정성이 정 없는 것까지 움직인 것이다.

대부경 진승(晉昇)의 둘째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넷과 딸 둘을 낳았다. 맏이는 관(灌)인데 공보다 먼저 죽었고, 함(涵)은 이제 지홍주사 부사가 되었으며, 징(澄)은 경선점 녹사요, 제(濟)는 서대비원 녹사다. 맏딸은 입내시 액정 내알자감 이유신(李惟信)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내시 경희궁 녹사 고백천(高伯梴)에게 시집갔다.

아. 묘지명을 짓는 일은 오래되었다. 그 공과 이름이 뚜렷하여 세상이 높이 여긴 뒤에라야 짓는 것이니, 대개 뒷사람으로 하여금 아득한 세상 위에 웅장하고 예사롭지 않은 이가 있었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비록 그 사람이 웅장하고 예사롭지 않더라도 명을 지을 사람을 얻지 못한다면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다. 나는 글 짓기에 서툴다. 그런데도 공이 평소 조용할 때마다 늘 말하였다. 「내가 죽거든 그대가 명을 지으라.」 그 맏아들 함이 공의 뜻을 전하여 글로 명을 청하니 마지못하여 명을 지어 이른다.

협주 3

幷序○侍郞李需述

서를 아우른다. 시랑 이수(李需)가 지었다.

저본은 「管記」이나 장서기(書記)와 같은 자리로 봄.

달단(達旦)은 몽골을 이른다. 이 글의 「몽고」와 같은 무리다. ― 옮긴이

江左汾陽。海東孔子。溫良恭儉。哀榮終始。七十已前。與世爲賢。玉樓作記。於公細事。斡旋元氣。是公之位。七十已後。爲天所有。人望未厭。天取不廉。天奪其眞。地得厥身。焉得爲二。在天在地。其人茫茫。所留文章。亦恐六丁。雷電取將。鳩集工徒。勒之金石。一鏡云亡。天子憫惻。爰命有司。宅名山側。原野畇畇。峯巒翼翼。山旣靈兮。子孫萬億。

강좌의 분양이요 해동의 공자로다 따뜻하고 어질고 공손하고 검소하여 슬픔과 영화가 처음부터 끝까지 갖추어졌네 일흔 이전에는 세상과 더불어 어짊이 되었고 옥루에 기문을 짓는 일도 공에게는 자잘한 일이었네 으뜸 기운을 돌리는 것이 곧 공의 자리였네 일흔 뒤로는 하늘이 가진 바가 되었네 사람들의 바람은 아직 물리지 않았는데 하늘이 가져감은 염치없구나 하늘이 그 참을 빼앗고 땅이 그 몸을 얻었으니 어찌 둘이 될 수 있으랴 하늘에 있고 땅에 있네 그 사람은 아득한데 남은 것은 글이로다 또한 육정(六丁)이 우레와 번개로 가져갈까 두려워 장인들을 불러 모아 쇠와 돌에 새겼네 한 거울이 없어졌다 하니 천자께서 가엾이 여기시어 이에 유사에게 명하여 이름난 산 곁에 자리 잡게 하셨네 들판은 반반하고 멧부리는 날개를 편 듯하네 산이 이미 신령하니 자손이 만억으로 번성하리

협주 4

江左汾陽 — 강좌(江左)는 강남 땅이요 분양(汾陽)은 당나라 분양왕 곽자의(郭子儀)를 이른다. ― 옮긴이

玉樓作記 — 당나라 이하(李賀)가 죽을 때 하늘의 백옥루(白玉樓)가 이루어졌으니 기문을 지으러 오라는 부름을 받았다는 옛일이다. ― 옮긴이

六丁 — 도가에서 불을 맡은 여섯 신령으로, 하늘의 글을 거두어 간다고 한다. ― 옮긴이

一鏡云亡 — 거울같이 맑던 이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는 말이다. ― 옮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