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 › 징비록 › 권5 근폭집

평안도 무과 급제자들이 지키러 다니는 폐단을 논한 계論平安道出身防守之弊。啓

징비록 懲毖錄 · 류성룡(柳成龍) · 1633년 간행 (임진왜란 뒤 지음) · 단락 1 · 한자 447자 · 낭독 3.4분

징비록 권5 근폭집 임진왜란이 끝난 뒤 영의정 류성룡이 제 눈으로 본 것을 적어 남긴 기록. 「지난 일을 징계하여 뒷근심을 삼간다」는 뜻으로 이름을 붙였다. 전쟁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조정이 무엇을 놓쳤는지를 변명 없이 적었다. 이순신을 천거한 일, 명나라 군사와의 실랑이, 백성이 겪은 참상이 그대로 실렸다.

從事官韓浚謙牒報內平安道江邊出身前日爲兵之時各有保率備給粮餉且常留在本堡不見防守之苦一自登第之後盡去保率名之曰出身分防之役前後相望旣無元定番次䟽數出於一時之意昌城以下出身則合氷之際分助於境內諸堡解氷之後又令分防於水上諸堡秋冬之交又使移防於滿浦諸鎭一握之米一尺之布皆無出處而親負戎器自備粮餉長立戍所在家無日若此事不早變通則萬無支保之勢云臣前此亦聞平安道出身怨苦之弊已爲。啓請處置矣其後又聞平壤等處出身之人或有自縊者或有掛其紅牌於官門而脫身逃去者所聞駭愕今據韓浚謙牒報則其致此無足恠者大抵道內出身之人皆平日取才軍士也前則各有奉足以備資粮又有番次往來有時一自出身之後無保率可以相資無番次可以遞休一年之內長在於道路防守之役不遑暇食揆之情理極爲矜惻臣求所以處置之䇿而未見便宜不過仍前日更給戶奉足又使徵發之際定其疏數如前日立番次第以休其力則庶可小愒矣如此然後赴防之時爲之計仕以爲去官之階已出六品而爲實職者始免其防戍而收其保率以給他人則民情稍似便宜今日之所以處此者唯此而已請令兵曹急速商議擧行舒邊民倒懸之苦何如

종사관 한준겸(韓浚謙)의 보고에 이렇게 일렀습니다. 「평안도 강변의 출신(出身)들은 지난날 군사였을 때에는 저마다 보인이 있어 양식을 갖추어 주었고, 또 늘 제 보에 머물러 지키러 다니는 괴로움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한 번 과거에 오른 뒤로는 보인을 다 떼어 버리고 이름을 출신이라 하여 나누어 지키는 역이 앞뒤로 잇따르는데, 본디 정한 차례가 없어 성기고 잦음이 그때그때의 뜻에서 나옵니다. 창성 아래 출신들은 얼음이 얼 때면 경내 여러 보에 나누어 돕게 하고, 얼음이 풀린 뒤에는 또 물 위 여러 보에 나누어 지키게 하며, 가을과 겨울이 바뀔 때에는 또 만포의 여러 진으로 옮겨 지키게 합니다. 한 줌 쌀과 한 자 베도 나올 데가 없어 몸소 병기를 지고 제 힘으로 양식을 갖추어 수자리에 오래 서 있느라 집에 있는 날이 없습니다. 이 일을 일찍 변통하지 않으면 견디어 낼 형세가 결코 없습니다.」

신도 전에 평안도 출신들이 원망하고 괴로워하는 폐단을 듣고 이미 아뢰어 처치하기를 청하였습니다. 그 뒤에 또 들으니 평양 등지의 출신 가운데 스스로 목을 맨 자도 있고, 홍패를 관아 문에 걸어 두고 몸을 빼어 달아난 자도 있다 하니 들은 바가 놀랍습니다. 이제 한준겸의 보고를 보니 이 지경에 이른 것도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대개 도 안의 출신들은 다 평소에 재주를 뽑힌 군사입니다. 전에는 저마다 보인이 있어 양식을 갖추었고 또 차례가 있어 오가는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출신이 된 뒤로는 서로 도울 보인도 없고 번갈아 쉴 차례도 없어, 한 해 내내 길 위에서 지키는 역에 매여 밥 먹을 겨를도 없으니 사람의 정리로 헤아리면 몹시 딱합니다.

신이 처치할 계책을 구하였으나 마땅한 것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지난날대로 다시 보인을 주고, 또 불러낼 때 성기고 잦음을 정하기를 지난날 번차를 세우던 차례처럼 하여 그 힘을 쉬게 하면 조금은 나을 것입니다. 이렇게 한 뒤에 지키러 갈 때에는 근무한 날수를 헤아려 벼슬로 나아가는 계제로 삼고, 이미 육품에 올라 실직을 얻은 자는 비로소 지키는 역을 면하게 하며 그 보인을 거두어 다른 사람에게 주면 백성의 마음이 조금 편할 듯합니다. 오늘 이를 처리할 길은 오직 이것뿐입니다. 병조에 급히 의논하여 거행하게 하시어 변방 백성이 거꾸로 매달린 괴로움을 풀게 함이 어떠하겠습니까.

협주 2

出身 — 무과에 올랐으나 아직 벼슬을 받지 못한 이

보인(保人) — 군사 한 사람의 살림을 대 주던 집이다. 저본은 자리마다 保人·奉足·戶奉足으로 갈라 적었을 수 있으나 한 제도이므로 「보인」으로 맞추었다. ― 옮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