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 › 징비록 › 권7 진사록

북도 소식과 남쪽의 살대를 가져다 싸움에 쓰기를 청한 일을 달려 아뢴 장계馳。啓北道聲息且請取來南方箭竹以備戰用狀

징비록 懲毖錄 · 류성룡(柳成龍) · 1633년 간행 (임진왜란 뒤 지음) · 단락 1 · 한자 936자 · 낭독 8.2분

징비록 권7 진사록 임진왜란이 끝난 뒤 영의정 류성룡이 제 눈으로 본 것을 적어 남긴 기록. 「지난 일을 징계하여 뒷근심을 삼간다」는 뜻으로 이름을 붙였다. 전쟁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조정이 무엇을 놓쳤는지를 변명 없이 적었다. 이순신을 천거한 일, 명나라 군사와의 실랑이, 백성이 겪은 참상이 그대로 실렸다.

臣欲詳知北道聲息而患無哨探之人以山谷道路僧人所熟知募得僧人二十二名分六運次次發送今日先去僧靈俊及軍官數人自北還來略言北道事情云橫城倉則黃燦聚軍一百五十餘名有旅首金無敵者導僧同行至咸興白土峴路阻不達而回有定平品官及衙前都訓導等十餘人露聚山谷之間見僧所持公文爭問。車駕所在皆爲涕泣自言定平無府使若新府使來到則遺民多欲相聚討賊又言近日賊乘小船向永興爲村民所邀殺幾二十餘名高原人遇賊三名射殺二賊一賊脫去招引其類來殺村民七十餘人以故民皆畏㥘深藏弓矢不敢發射賊令村民每戶納白米一斗田米則一斗五升旣納則與佩賊牌不佩之民遇賊輒死故民之佩持賊牌者比比有之監司柳永立隱匿於咸興白雲山其女壻及判官則幷其家屬散伏諸處我民潜引賊兵圍抱皆被陷沒囚在倉中賊之在咸興者二百餘名有賊籠鷹子八連載馬向鐵嶺還來留在之賊見其賊聞其言相與呼哭有村民之納米者問其由賊不答但云近日吾輩劒鐔生澁此不祥之兆我輩恐死又於城中屯聚處皆作土室木栅云此則僧非親見其得於村民者如此賊兵所到之處無人傳說或云已到利城端川或云已入北道而三水甲山亦皆爲賊所陷云云大略如此其詳當待後運體探人可知而巡察使宋言愼必已狀啓矣臣竊念賊勢滔天日益熾張此當以計取之若以烏合之卒浪戰不已取敗無疑今日爲將者率多庸才全無計策今賊兵怠惰已甚我民出入無間此其可乘之機不一而足苟能暫設方略詗知動靜內外相應如疾雷不及揜耳則一夜之間殲賊必多一挫之後隨處抄擊破竹之勢迎刃自解今之爲將者徒觀目前全不念及於遠圖如北道之賊無人呵禁已踰數月窟穴漸成歸附日衆不及今早爲之計恐有難圖之患且聞頃日北道來報賊變人金順乞金世武姜克成等臣卽送空名告身使之傳給以勸其後今聞黃璨以不告於己而擅自來報以得賞職爲非皆爲决杖順乞等退縮不出而欲來者還止云璨之處置乖刺如此不勝恠歎臣又有所慮不敢不達觀此事勢賊雖平復難在時月之內而遠近諸處弓箭蕩然此處則收合江邊遺在者雖時未乏絕而有難繼之憂至如黃海江原咸鏡道則兵民皆持空拳何事可爲臣初到此聞寧邊有箭竹散失之餘只有三百餘部令評事李尙哲督造長片箭又逢全羅道體察使鄭澈之行相議俾於到界之初卽載送箭竹猶恐其稽緩又行移于金信元令發三縣之船數隻往忠淸道海島箭竹所產處刈取滿載以來此乃急切之務措備不可不急若自。朝廷别遣一人登時取來分送諸邑多造數萬餘部散于各道以爲禦賊之用尤爲便益

신이 북도 소식을 자세히 알고자 하나 정탐할 사람이 없는 것이 걱정이었습니다. 산골 길은 중이 익히 아는 바이므로 중 스물두 명을 모아 여섯 패로 나누어 차례차례 보냈는데, 오늘 먼저 갔던 중 영준(靈俊)과 군관 몇 사람이 북쪽에서 돌아와 북도 사정을 대략 말하였습니다.

횡성창(橫城倉)에는 황찬(黃燦)이 군사 백오십여 명을 모았고, 여수(旅首) 김무적(金無敵)이란 자가 중을 이끌고 함께 가 함흥 백토현(白土峴)에 이르렀으나 길이 막혀 다다르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정평(定平)의 품관과 아전·도훈도 들 십여 명이 산골 사이에 한데 모여 있다가 중이 지닌 공문을 보고 다투어 어가 계신 곳을 물으며 다 눈물을 흘렸습니다. 스스로 말하기를 「정평에 부사가 없으니 만일 새 부사가 와 닿으면 남은 백성이 많이 서로 모여 적을 치려 한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요사이 적이 작은 배를 타고 영흥(永興)으로 가다가 마을 백성에게 길목에서 맞아 죽은 이가 거의 스무남은 명이며, 고원(高原) 사람이 적 세 명을 만나 둘을 쏘아 죽였는데 한 적이 벗어나 달아나 그 무리를 불러 와서 마을 백성 칠십여 명을 죽였다 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백성이 다 두려워하여 활과 화살을 깊이 감추고 감히 쏘지 못합니다.

적은 마을 백성에게 집마다 흰쌀 한 말을, 밭쌀이면 한 말 닷 되를 바치게 하고, 바치면 적의 패를 차게 해 줍니다. 차지 않은 백성은 적을 만나면 곧 죽으므로 적의 패를 차고 다니는 백성이 곳곳에 있습니다. 감사 유영립(柳永立)은 함흥 백운산에 숨었고, 그 사위와 판관은 그 식구까지 아울러 곳곳에 흩어져 엎드렸는데, 우리 백성이 몰래 적병을 이끌어 에워싸는 바람에 다 붙잡혀 창고 안에 갇혀 있습니다.

함흥에 있는 적은 이백여 명입니다. 그 가운데 매 여덟 마리를 농에 넣어 말에 잇달아 싣고 철령(鐵嶺)으로 갔다가 돌아온 자가 있는데, 머물러 있던 적이 그를 보고 그 말을 듣더니 서로 부르짖어 울었습니다. 쌀을 바치러 온 마을 백성이 그 까닭을 물으니 적은 대답하지 않고 다만 「요사이 우리 칼코등이가 녹슬어 껄끄러우니 이는 상서롭지 못한 조짐이다. 우리는 죽을까 두렵다」 하였습니다. 또 성안 둔쳐 모인 곳에는 다 흙집과 목책을 만들었다 합니다. 이는 중이 몸소 본 것이 아니라 마을 백성에게 들은 바가 이러합니다.

적병이 이른 곳은 전하여 말하는 사람이 없어, 혹 이미 이성(利城)·단천(端川)에 이르렀다고도 하고, 혹 이미 북도에 들어가 삼수(三水)·갑산(甲山)도 다 적에게 떨어졌다고도 하니 대략 이러합니다. 자세한 것은 뒤 패의 정탐꾼을 기다려야 알 수 있겠으나, 순찰사 송언신(宋言愼)이 반드시 이미 장계하였을 것입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적의 형세가 하늘에 닿을 듯 날로 더욱 드세어지니 마땅히 꾀로 잡아야 합니다. 만일 오합지졸로 함부로 싸우기를 그치지 않으면 패하기 틀림없습니다. 오늘날 장수 된 이는 대개 재주가 용렬하여 도무지 계책이 없습니다. 지금 적병은 게으름이 이미 심하고 우리 백성은 드나드는 데 막힘이 없으니 탈 만한 틈이 하나둘이 아닙니다. 진실로 잠깐이라도 방략을 세워 움직임을 알아내고 안팎이 서로 응하기를, 벼락이 쳐서 귀를 막을 겨를도 없듯 한다면 하룻밤 사이에 적을 죽이는 것이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한 번 꺾은 뒤에 곳곳에서 기습해 치면 대를 쪼개는 형세라 칼날을 맞아 절로 풀릴 것입니다.

지금 장수 된 이는 다만 눈앞만 보고 먼 앞일에는 도무지 생각이 미치지 않습니다. 북도의 적 같은 것은 꾸짖어 막는 사람이 없이 이미 두어 달이 넘어 소굴이 점점 이루어지고 붙좇는 이가 날로 많아지니, 지금 일찍 계책을 세우지 않으면 도모하기 어려운 근심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또 들으니, 지난날 북도에서 적의 변고를 알려 온 김순걸(金順乞)·김세무(金世武)·강극성(姜克成) 들에게 신이 곧 이름을 비워 둔 고신(告身)을 보내어 전하여 주게 하여 그 뒤를 권하였는데, 이제 들으니 황찬(黃璨)이 「제게 고하지 않고 제멋대로 와서 알려 상으로 벼슬을 얻은 것은 그르다」 하여 다 곤장을 쳤다 합니다. 그래서 순걸 들이 움츠러들어 나오지 않고 오려던 이도 도로 그쳤다 합니다. 황찬의 처사가 이처럼 어그러졌으니 괴이하고 한탄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신이 또 염려되는 바가 있어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형세를 보면 적이 비록 평정된다 하여도 한두 달 안에 되기는 어려운데, 멀고 가까운 곳마다 활과 화살이 다 없어졌습니다. 이곳은 강변에 남아 있는 것을 거두어 모아 아직 떨어지지는 않았으나 이어 대기 어려운 걱정이 있습니다. 황해·강원·함경도 같은 데에 이르러서는 군사와 백성이 다 빈주먹만 쥐었으니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처음 이곳에 이르러 영변(寧邊)에 살대가 있다는 말을 들었으나 흩어져 없어지고 남은 것이 삼백여 부뿐이라, 평사 이상철(李尙哲)에게 장전과 편전을 만들도록 독촉하게 하였습니다. 또 전라도 체찰사 정철(鄭澈)이 가는 길에 만나 의논하여, 경계에 이르는 대로 곧 살대를 실어 보내게 하였습니다. 그래도 늦어질까 염려되어 또 김신원(金信元)에게 공문을 보내어 세 고을의 배 두어 척을 내어 충청도 바다 섬 가운데 살대가 나는 곳으로 가서 베어 가득 싣고 오게 하였습니다.

이는 급하고 절박한 일이라 마련하기를 급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조정에서 따로 한 사람을 보내어 그 자리에서 가져다가 여러 고을에 나누어 보내고 수만여 부를 많이 만들어 각 도에 흩어 적을 막는 데 쓰게 하시면 더욱 편하고 이로울 것입니다.

협주 2

고신은 벼슬을 내리는 임명장이다.

여수(旅首) — 군사 한 여(旅)의 우두머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