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 › 징비록 › 권9 진사록

경기 뒤로 양식을 마련하기 어려운 까닭과 제독이 굶주린 백성을 구하려 한 일을 아뢰다馳。啓京畿以後糧料難辦緣由及提督自欲賑救飢民狀

징비록 懲毖錄 · 류성룡(柳成龍) · 1633년 간행 (임진왜란 뒤 지음) · 단락 1 · 한자 892자 · 낭독 7.7분

징비록 권9 진사록 임진왜란이 끝난 뒤 영의정 류성룡이 제 눈으로 본 것을 적어 남긴 기록. 「지난 일을 징계하여 뒷근심을 삼간다」는 뜻으로 이름을 붙였다. 전쟁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조정이 무엇을 놓쳤는지를 변명 없이 적었다. 이순신을 천거한 일, 명나라 군사와의 실랑이, 백성이 겪은 참상이 그대로 실렸다.

天將聞京城倭賊多聚且軍器未及齊到今曉出令先送精兵三千名馳據龍山吾將起程親到京城觀其形勢云而深以糧草未備爲憂臣欲先往前路親爲檢擧則提督許之有張總兵在傍云大軍方在此處議政先去則凡事恐益難辦不如姑使留此提督曰然臣以此姑爲仍留而京畿之事板蕩尤甚船到後西江者亦難趁時輸入故昨日提督命軍兵往受于其處而馬豆草料尤爲乏絕雖將官之馬不給芻草已累日提督爲人嚴而不苛且於我國之事多所寬護而事勢悶迫日甚一日當初賊兵雖未退而江華等處軍人及避亂之人其數過萬若能先爲知委分部整頓賊退之後卽以其衆一齊收入則事之難處不至於如此之甚而此道號令多門人心渙散平日官家使喚之民盡入於義兵不事官役其餘則巡察使以下各有所率名爲牙兵不卽調發奔走船泊之糓近在三十里之地而無計輸入雖焦心竭力而事未易集臣實罔措南陽水原等處倉糓輸入京城事亦累爲移文項背相望而全羅監司權慄京畿左監司成泳尙不使一介之人來到軍前禀定約束探候師期亦未知何故如使大軍入城而糧草不繼則如臣者雖萬死不足以贖誤事之罪日夜痛憫提督於黃海一路見百姓供頓困苦深加憐愍昨日與鄭同知趙知縣等私語云此邦之民赤立待死其無賑濟之事否譯官對以常時則春初必擧賑恤捄民之政而今則官家無糓兵亂未定故計無所出耳提督憮然曰吾行有三升布千餘疋欲以此貿糓賑恤飢民其可爲乎譯官對曰民間豈有可貿之糓乎提督深加歎愍且曰吾者在寧夏間民有賣妻者召而責問其民云貧不能畜妻故也吾以私銀贖還其妻且給粟二十石使之完保大抵民惟邦本本固邦寧陪臣等其知此意乎凡人要須濟活人命得天陰隲然後福作長遠趙知縣因謂此國刑杖太重路見栲掠人者必於膝腳此人身要緊之處少杖必死與中國之法異矣提督因謂通事曰中國被㺚子搶掠處則人民久不還集今汝國賊退之後民皆來供官役至於兒女皆負戴且無官員一人從賊去者云汝國人心忠厚可嘉且縷縷言民生可憐之意云臣觀黃海一路之民久爲賊所侵害聞。天兵之至率多盡力供頓或有以壺漿斗餅迎候者提督以下將官深加憐愍而其言愛民保國之道綽有古名將之風非但爲摧堅䧟陣之類故敢此陳達而方春賑貸等事雖未暇擧行而慰撫遺民勞來還集之術。朝廷預爲講求十分措置爲當守令多取不經事武臣雖因一時應敵之計而民生以此益困賊退地方必先考其能否有所澄汰然後民政庶幾可擧

명나라 장수가 서울에 왜적이 많이 모였다는 말을 듣고, 또 군기가 아직 다 이르지 못하였으므로 오늘 새벽 영을 내려 먼저 날랜 군사 삼천 명을 보내 용산을 달려가 웅거하게 하고 「나는 길을 떠나 몸소 서울에 이르러 그 형세를 보겠다」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양식과 꼴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을 깊이 걱정하였습니다.

신이 먼저 앞길로 가서 몸소 단속하겠다 하니 제독이 허락하였는데, 곁에 있던 장 총병(張總兵)이 「대군이 바야흐로 이곳에 있는데 의정이 먼저 가면 모든 일이 더욱 마련하기 어려울까 두려우니 우선 여기 머물게 함만 못하다」 하였고 제독도 그렇다 하였습니다. 신은 이 때문에 우선 그대로 머물렀습니다.

경기의 일은 살림이 무너진 것이 더욱 심하여 후서강(後西江)에 이른 배도 제때 실어 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제 제독이 군사에게 명하여 그곳에 가서 받아 오게 하였습니다. 말콩과 꼴은 더욱 떨어져 장수의 말조차 꼴을 주지 못한 지 이미 여러 날입니다. 제독의 사람됨이 엄하되 가혹하지 않고 또 우리나라 일에 너그럽게 감싸 주는 바가 많으나, 형세가 절박하여 날로 더합니다.

처음에 적병이 물러가지 않았을 때에도 강화 등지의 군사와 피란한 사람이 만이 넘었습니다. 만일 미리 알려 부서를 나누어 정돈해 두었다가 적이 물러난 뒤에 곧 그 무리를 한꺼번에 거두어 들였더라면 일의 어려움이 이처럼 심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도는 호령이 여러 문에서 나와 인심이 흩어졌습니다. 평소 관가에서 부리던 백성이 다 의병으로 들어가 나라 일을 하지 않고, 그 나머지는 순찰사 이하가 저마다 거느린 바가 있어 아병(牙兵)이라 이름하여 곧바로 조발하지 못합니다. 배를 대어 둔 곡식이 삼십 리 가까운 곳에 있는데도 실어 들일 계책이 없어, 애를 태우고 힘을 다하여도 일이 쉬 이루어지지 않으니 신은 참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남양·수원 등지 창고 곡식을 서울로 실어 들이는 일도 여러 번 공문을 보내어 잇달았으나, 전라감사 권율(權慄)과 경기좌감사 성영(成泳)은 아직 한 사람도 군전에 보내어 약속을 여쭈어 정하고 군사 갈 때를 살피게 하지 않으니 또한 무슨 까닭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만일 대군이 성에 들어갔는데 양식이 이어지지 않으면 신 같은 자는 만 번 죽어도 일을 그르친 죄를 갚기에 모자라니 밤낮으로 아프고 민망합니다.

제독이 황해 한 길에서 백성이 대접하느라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깊이 가엾이 여겼습니다. 어제 정 동지(鄭同知)·조 지현(趙知縣) 등과 사사로이 말하기를 「이 나라 백성이 맨몸으로 서서 죽기를 기다리는데 진휼하는 일이 없는가」 하니, 역관이 「여느 때라면 봄 초에 반드시 진휼하여 백성을 구하는 정사를 펴지만 지금은 관가에 곡식이 없고 병란이 가라앉지 않아 계책이 나올 데가 없을 뿐입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제독이 서운히 여겨 「내 행중에 삼승포 천여 필이 있으니 이것으로 곡식을 사서 굶주린 백성을 진휼하고자 하는데 될 수 있겠는가」 하니, 역관이 「민간에 어찌 살 만한 곡식이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제독이 깊이 탄식하고 가엾이 여겼습니다.

또 말하기를 「내가 지난번 영하(寧夏)에 있을 때 아내를 파는 백성이 있어 불러 꾸짖어 물으니 그 백성이 가난하여 아내를 거둘 수 없는 까닭이라 하였다. 내가 사사로운 은으로 그 아내를 물러 돌려주고 또 조 스무 섬을 주어 온전히 보전하게 하였다. 대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굳어야 나라가 편안하다. 신하들은 이 뜻을 아는가. 무릇 사람은 모름지기 사람의 목숨을 건져야 하늘의 음덕을 얻은 뒤에 복이 길고 멀다」 하였습니다.

조 지현이 이어 말하기를 「이 나라는 매질하는 벌이 너무 무겁다. 길에서 사람을 매질하는 것을 보니 반드시 무릎과 다리에 하는데, 이는 사람 몸에서 긴한 곳이라 조금만 때려도 반드시 죽으니 중국 법과 다르다」 하였습니다.

제독이 이어 통사에게 말하기를 「중국에서 달자(㺚子)에게 노략질당한 곳은 백성이 오래도록 돌아와 모이지 않는데, 이제 너희 나라는 적이 물러간 뒤에 백성이 다 와서 나라 일을 하고 아이와 여자까지 다 지고 이며, 또 벼슬아치 하나도 적을 따라간 자가 없다 하니 너희 나라 인심이 충후하여 가상하다」 하고, 또 백성의 삶이 가엾다는 뜻을 자세히 말하였습니다.

신이 보니 황해 한 길의 백성이 오래 적에게 침해를 입었으면서도 명나라 군사가 온다는 말을 듣고 대개 힘을 다해 대접하며, 더러는 병에 담은 마실 것과 말에 담은 떡으로 맞이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제독 이하 장수들이 깊이 가엾이 여겼습니다. 그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지키는 도를 말하는 것이 넉넉히 옛 명장의 풍모가 있어 다만 굳센 것을 꺾고 진을 무너뜨리는 무리만은 아니므로 감히 이렇게 아룁니다.

바야흐로 봄에 진대(賑貸)하는 일은 비록 거행할 겨를이 없더라도, 남은 백성을 위무하고 위로하여 돌아와 모이게 하는 방도는 조정에서 미리 강구하여 십분 조치함이 마땅합니다. 수령은 일을 겪지 않은 무신을 쓴 데가 많으니, 비록 한때 적을 막을 계책 때문이라 하나 백성의 삶이 이 때문에 더욱 곤합니다. 적이 물러간 지방은 반드시 먼저 그 능함과 그렇지 못함을 살펴 가려낸 뒤에야 민정이 거의 펴질 것입니다.

협주 1

癸巳正月二十五日

계사년 정월 스무닷샛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