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 › 징비록 › 권9 진사록

이 제독이 벽제에서 이기지 못하여 동파로 물러난 일과 명나라 양식을 실어 오기를 청하다馳報李提督進軍碧蹄不利還駐東坡及請輸運唐糧以濟大事狀

징비록 懲毖錄 · 류성룡(柳成龍) · 1633년 간행 (임진왜란 뒤 지음) · 단락 1 · 한자 944자 · 낭독 8분

징비록 권9 진사록 임진왜란이 끝난 뒤 영의정 류성룡이 제 눈으로 본 것을 적어 남긴 기록. 「지난 일을 징계하여 뒷근심을 삼간다」는 뜻으로 이름을 붙였다. 전쟁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조정이 무엇을 놓쳤는지를 변명 없이 적었다. 이순신을 천거한 일, 명나라 군사와의 실랑이, 백성이 겪은 참상이 그대로 실렸다.

二十六日提督由開城府過東坡水渡臨津淺灘駐兵于坡州二十七日提督及李都督率家丁百餘名馳向碧蹄將欲自體探于京城諸軍皆不動是日曉頭查總兵與防禦使高彥伯馳到昌陵近處賊多設伏兵于山谷間先出數百餘人誘引總兵揮軍掩擊賊披靡散走斬獲殆盡欲引退之際賊後隊大兵繼至提督行到惠陰嶺聞有賊兵馳馬突進路中馬蹶墮落頰微傷良久而起因前突賊陣賊衆多於。天兵先鋒數倍而。天兵之繼進者未及到。天兵因爲賊所逐提督殿後而退大軍鱗次退來還駐坡州天兵死傷者數百餘人提督家丁親信者一人亦死提督馬上痛哭到坡州夜間亦哭臣等卽爲問安提督答云將官見敵先退故以此還來云因令諸軍嚴設警守二十八日早朝欲退駐東坡臣與都元帥金命元接待使李德馨戶曹判書李誠中都巡察使權徵等同進極陳不可退軍之事反覆懇陳提督出立庭中請將環列左右招臣等語之曰吾軍昨目勝捷別無敗北之事今之欲駐東坡非有他意只緣此處馬草絕乏後有江水火炮器械南方義兵亦未齊到以此欲還駐東坡休兵數日更爲整齊以進臣等齊跪極陳不可大要以爲大兵已進若退一步賊氣乘勝民心動搖此機甚關且南方義兵及各處將官聞大兵之到皆至漢江軍糧連續輸到老爺豈可不念此而遽卽退軍乎此處遺民聞。王師之來各自扶攜來尋舊基今又棄去必盡爲賊所害何可忍此提督云吾之初意本欲體探而來今之還駐非有他計只欲休兵更來臣等力爭不已提督手持報兵奏文以示大要以爲賊兵之在京城者幾二十萬而唐兵只數萬且多死傷因請添兵運糧末端又言身有病患之事臣以手指點告曰倭賊之在城中者多不過萬餘緣何得至二十萬提督曰爾國文書中所言如此矣臣又曰賊兵豈有二十萬之理本國文書中安有此語提督曰文書有之不然吾豈知之臣又曰此大事願老爺更加三思節度使李薲又直前跪請將官以下皆揮斥而其中張總兵世爵尤主退駐之說至於聲色俱厲使之速退而提督溫言譬曉反覆不已臣不得已還退旣而三道體察使俞泓繼至令譯官傳告不可退歸之意則以爲已定云卽爲行軍還駐東坡京畿糧餉當初輸運遲緩艱困萬狀至於馬草則乏絕不繼且路傍原野賊皆焚蕩四山焚盡寸草不遺坡州一境尤甚百里之內無復村落所見慘酷。天兵所過馬死者相望於道其餘亦皆瘦瘠不堪馳驅種種悶迫非止一端京畿巡察使權徵監司李廷馨等全委措置體察使俞泓又爲檢擧非不盡力而事多未集大軍在道而糧草俱竭臣雖扣心而無可措之勢蓋緣此道久爲賊藪致此狼狽今到急迫計無所出唐糧未知今到何地急速催促不分晝夜輸到軍前以濟大事

스무엿샛날 제독이 개성부에서 동파를 지나 임진강 여울을 건너 파주에 군사를 머물렀습니다. 스무이렛날 제독과 이 도독(李都督)이 친병(家丁) 백여 명을 거느리고 벽제로 달려가 몸소 서울을 살피려 하였고, 여러 군사는 다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이날 새벽 사 총병(査總兵)이 방어사 고언백(高彥伯)과 창릉 가까운 곳에 달려 이르렀는데, 적이 산골에 복병을 많이 두고 먼저 수백여 명을 내어 꾀었습니다. 총병이 군사를 지휘하여 덮쳐 치니 적이 무너져 흩어져 달아났고 베고 잡은 것이 거의 다였습니다. 물러가려 할 즈음 적의 뒷부대 큰 군사가 잇달아 이르렀습니다.

제독이 혜음령에 이르러 적병이 있다는 말을 듣고 말을 달려 돌진하다가 길에서 말이 넘어져 떨어져 뺨을 조금 다쳤으나, 한참 만에 일어나 이어 앞으로 적진에 부딪쳤습니다. 적의 무리가 명나라 군사 선봉보다 몇 곱절 많은데 잇달아 나아갈 명나라 군사는 미처 이르지 못하여, 명나라 군사가 적에게 쫓기게 되니 제독이 뒤를 맡아 물러났습니다. 대군이 차례로 물러와 파주에 도로 머물렀습니다. 명나라 군사로 죽고 다친 자가 수백여 명이고, 제독의 친병 가운데 가까이 믿던 하나도 죽었습니다. 제독이 말 위에서 통곡하고 파주에 이르러 밤에도 울었습니다. 신들이 곧 문안하니 제독이 「장수가 적을 보고 먼저 물러났으므로 이 때문에 돌아왔다」 하고, 이어 여러 군사에게 엄히 경계하여 지키게 하였습니다.

스무여드렛날 이른 아침에 동파로 물러가 머물려 하기에, 신이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접대사 이덕형(李德馨), 호조판서 이성중(李誠中), 도순찰사 권징(權徵) 등과 함께 나아가 군사를 물려서는 안 될 일을 거듭 간절히 아뢰었습니다. 제독이 뜰 가운데 나와 서고 여러 장수가 좌우에 둘러선 가운데 신들을 불러 말하기를 「우리 군사가 어제 이겼고 따로 패한 일이 없다. 이제 동파에 머물려는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다. 다만 이곳에 말먹이 꼴이 끊어져 없고 뒤에 강물이 있으며, 화포와 싸움 연장과 남쪽 의병도 아직 다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동파로 도로 물러가 며칠 군사를 쉬게 하고 다시 정돈하여 나아가려 한다」 하였습니다.

신들이 나란히 꿇어앉아 안 된다고 힘껏 아뢰었는데, 그 요지는 이러합니다. 대군이 이미 나아갔는데 만일 한 걸음 물러나면 적의 기세가 이긴 것을 타고 민심이 흔들릴 것이니 이 기회가 몹시 중합니다. 또 남쪽 의병과 곳곳 장수가 대군이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다 한강에 이르렀고 군량도 잇달아 실려 옵니다. 노야께서 어찌 이를 생각지 않고 갑자기 군사를 물리십니까. 이곳 남은 백성이 왕사가 온다는 말을 듣고 저마다 붙들고 이끌고 옛터를 찾아왔는데, 이제 또 버리고 가면 반드시 다 적에게 해를 입을 것이니 어찌 이를 참겠습니까.

제독이 「내 처음 뜻은 본디 살피러 온 것이요, 이제 물러가 머무는 것도 다른 계책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군사를 쉬게 하고 다시 오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들이 힘껏 다투기를 그치지 않으니 제독이 손에 병부에 알리는 글을 들어 보였습니다. 그 요지는 서울에 있는 적병이 거의 이십만인데 명나라 군사는 겨우 몇 만이고 또 죽고 다친 자가 많다 하고, 이어 군사를 더하고 양식을 나르기를 청하였으며, 끝에는 또 몸에 병이 있다는 일을 말하였습니다.

신이 손으로 짚어 가리키며 「성 안에 있는 왜적이 많아야 만여 명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 이십만에 이르겠습니까」 하니, 제독이 「너희 나라 문서에 이렇게 말하였다」 하였습니다. 신이 또 「적병이 어찌 이십만일 리가 있겠으며, 본국 문서에 어찌 이런 말이 있겠습니까」 하니, 제독이 「문서에 있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어찌 알겠느냐」 하였습니다. 신이 또 「이는 큰일이니 노야께서 다시 세 번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였습니다.

절도사 이빈(李薲)도 곧장 앞으로 나아가 꿇어앉아 청하니 장수들 이하가 다 손을 내저어 물리쳤고, 그 가운데 총병 장세작(張世爵)이 더욱 물러가 머물자는 말을 주장하여 목소리와 낯빛이 다 사나워져 빨리 물러가라 하였으며, 제독은 부드러운 말로 타이르기를 거듭 그치지 않았습니다. 신은 하는 수 없이 물러났습니다. 이윽고 삼도체찰사 유홍(俞泓)이 잇달아 이르러 역관을 시켜 물러가서는 안 된다는 뜻을 전하게 하였으나 이미 정해졌다 하고, 곧 군사를 옮겨 동파로 물러가 머물렀습니다.

경기의 군량은 처음부터 실어 나르기가 더디어 어려움이 만 가지였습니다. 말먹이 꼴에 이르러서는 떨어져 이어지지 않습니다. 또 길가 들판을 적이 다 불태워 사방 산이 타 버려 한 치 풀도 남지 않았고, 파주 한 지경이 더욱 심하여 백 리 안에 마을이 다시 없으니 보이는 것이 참혹합니다. 명나라 군사가 지나는 곳에 죽은 말이 길에 서로 바라보이고, 나머지도 다 여위어 달리기를 견디지 못합니다. 가지가지 절박함이 한 가지에 그치지 않습니다.

경기순찰사 권징과 감사 이정형(李廷馨) 등이 오로지 맡아 조치하고 체찰사 유홍이 또 단속하여 힘을 다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많습니다. 대군이 길에 있는데 양식과 꼴이 다 말랐습니다. 신이 가슴을 두드려도 조치할 형세가 없습니다. 대개 이 도가 오래 적의 소굴이 되었던 까닭에 이런 낭패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급박함에 이르러 계책이 나올 데가 없습니다. 명나라 양식이 지금 어디에 이르렀는지 알지 못하니, 급히 재촉하여 밤낮을 가리지 말고 군전에 실어 와 큰일을 이루게 하소서.

협주 2

正月二十九日

정월 스무아흐렛날

저본은 성과 벼슬과 이름을 섞어 적었다. 한 사람이므로 「총병 장세작」으로 맞추었다. ― 옮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