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 › 징비록 › 권9 진사록

분부를 받든 뒤 군량을 마련한 경위를 달려 아뢰는 장계有。旨祇受後馳報糧料措置緣由狀

징비록 懲毖錄 · 류성룡(柳成龍) · 1633년 간행 (임진왜란 뒤 지음) · 단락 1 · 한자 458자 · 낭독 3.4분

징비록 권9 진사록 임진왜란이 끝난 뒤 영의정 류성룡이 제 눈으로 본 것을 적어 남긴 기록. 「지난 일을 징계하여 뒷근심을 삼간다」는 뜻으로 이름을 붙였다. 전쟁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조정이 무엇을 놓쳤는지를 변명 없이 적었다. 이순신을 천거한 일, 명나라 군사와의 실랑이, 백성이 겪은 참상이 그대로 실렸다.

二月初九日右副承旨成貼有。旨書狀臣在東坡酒祗受凡糧料草若非本處積在則必須用力運轉及其期限然後可以接濟大軍如使轉輸不時則雖萬石之糓在於相望之地而軍行未免飢餓當初自開城以上非徒賊兵未退而一年焚蕩之餘公私殫竭更無辦出之路故自前年船運南方之糓置諸江華以待軍興其數至於數萬餘石若能先期整齊船隻收拾人夫聞大軍臨到以船輸泊于後西江而又以所收人夫登時運入至於芻草則一路亦無可辦之勢若預爲收取於延安江華通津豐德等處多聚公私船隻趁時輸到則似不至於狼狽而事未預措但於賊退一日之內招呼開城一府渙散之民奔走轉輸彼此不及一日二日之間軍已告飢馬已疲頓臨時雖竭心焦唇亦無奈何自平安道以來各官之中不能理事之狀開城府爲最其致。天將之責怒無足怪也今則戶曹判書李誠中與運糧使權徵兼留守李延馨留在開城府分戶曹判書朴忠侃留東坡檢察糧草而東坡則時方遺在米六千九百餘石豆二千一百六十餘石其自忠淸全羅道載船而來到者亦且數千餘石而平賊之期未知何日坐食之軍處處屯聚事勢悶迫罔知所措唐糧八萬石其數甚多卽今水路氷解船行無礙而大同江下流多有船隻急時收合別遣勤幹之人領來朝廷別爲善處

이월 초아흐렛날 우부승지가 적어 내린 분부의 글을 신이 동파에서 받들었습니다.

무릇 군량과 꼴은 그곳에 쌓여 있는 것이 아니면 반드시 힘을 들여 옮겨 날라 기한에 대어야 큰 군사를 이어 댈 수 있습니다. 만일 실어 나르는 것이 때를 놓치면 만 석 곡식이 바라보이는 땅에 있더라도 행군하는 군사는 굶주림을 면치 못합니다.

처음 개성 위쪽은 적병이 물러가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한 해 불타고 쓸린 나머지 관가와 민간이 다 말라 다시 마련해 낼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지난해부터 남쪽 곡식을 배로 날라 강화에 두고 군사 일어날 때를 기다렸으니 그 수가 수만여 석에 이릅니다. 만일 미리 배를 갖추고 인부를 거두었다가, 큰 군사가 이른다는 말을 듣고 배로 후서강(後西江)에 실어다 대고 거두어 둔 인부로 곧 날라 들였다면 되었을 것입니다. 꼴은 이 길에서도 마련할 형세가 없으니, 만일 연안·강화·통진·풍덕 등지에서 미리 거두고 관가와 민간의 배를 많이 모아 제때 실어 왔더라면 낭패에 이르지는 않았을 듯합니다.

그런데 일을 미리 조처하지 못하고, 적이 물러난 하루 안에 개성 한 고을의 흩어진 백성을 불러 바삐 실어 날랐으나 이쪽저쪽이 미치지 못하여, 하루 이틀 사이에 군사는 이미 굶주림을 고하고 말은 이미 지쳤습니다. 그때 가서 마음을 태우고 입술이 마르도록 하였으나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평안도로부터 여러 고을 가운데 일을 다스리지 못한 모양은 개성부가 으뜸이니, 명나라 장수의 꾸짖음과 노여움을 산 것도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이제는 호조판서 이성중(李誠中)과 운량사 권징(權徵), 겸유수 이연형(李延馨)이 개성부에 머물고 분호조판서 박충간(朴忠侃)이 동파에 머물러 군량과 꼴을 살핍니다. 동파에는 지금 남아 있는 쌀이 육천구백여 석, 콩이 이천백육십여 석이며,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배에 실어 온 것도 수천여 석입니다. 그러나 적을 평정할 날은 언제일지 모르는데 앉아서 먹는 군사가 곳곳에 모여 있으니, 사세가 딱하여 조처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명나라 군량 팔만 석은 그 수가 매우 많은데, 지금 물길의 얼음이 풀려 배 다니기에 막힘이 없고 대동강 아래쪽에 배가 많이 있습니다. 급히 거두어 모으고 부지런하며 일 잘하는 사람을 따로 보내어 거느려 오게 하시기를, 조정에서 따로 잘 처리하소서.

협주 2

二月二十一日

이월 스무하룻날

저본은 李延馨이다. 같은 무렵 개성 쪽 일을 맡은 감사 이정형(李廷馨)과 한 사람일 수 있다. 저본을 맞대어 본 뒤에 정한다. ― 옮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