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쪽 적이 모두 서울로 모인 일과 우리 군사가 매복하여 끊어 죽인 경위, 그리고 군량이 떨어진 일을 아뢰는 장계馳。啓北賊盡聚京城我軍設伏截殺緣由及糧餉乏絕狀
近日北賊自淮陽鐵原連續上京臣前日移文于李時言及助防將鐵原府使金𫏶使率平康伊川鐵原安峽之軍沿途遮截相機邀擊又令京畿防禦使高彥伯分兵設伏于楊州之境以待賊至出擊事約束矣本月二十六日高彥伯馳報內軍官盧松領軍設伏於典農峴倭賊十餘騎步倭二十餘名出來橫行我軍不意突出接戰斬倭五級又二十九日高彥伯馳報內伏兵將閔海一十七日沙彌里伏兵待變未明時北賊無數入京巳時至流入軍官愼朞具忠卿等幷力合擊射殺不知其數又一時到付高彥伯馳報內祝石伏兵將俞鑚馳報内二十八日賊始自抱川上京自豆驗川至長水院處處作陣從後倭三十餘名上來諸將一時突出尾擊幾於盡殺又據江原防禦使李時言馳報內賊兵二十二日鐵原地長林廣野二息程許金化地遍滿道路數日留屯防禦使率兵設伏二十五日賊先鋒踰加乙嶺後軍未到之前突出掩擊賊驚惶奔散我軍乘勝追擊斬首九級又軍官李桓與金化縣監合兵勦擊多數射中斬頭二級云云據此諸報參商事勢北賊已爲盡入京城間間留在抱川等地盤桓不進必有奸謀而積城朔寧漣川等地蕩然空虛無一卒把守而京畿義兵官軍自初托以。天兵支待已盡散去今雖欲聚合以爲把截江華而軍糧乏絕勢難措手當初平壤戰勝之後賊皆奪氣其在京都者太半南逃若能乘此機會及其北賊未來之前皷行勦滅其勢甚易不幸。天將一跌於碧蹄遽爲旋師我軍則坐待。天兵遲留過時使難得之機容易蹉過極爲痛心今高彥伯只以飢疲殘卒數百往來於坡州楊州之間僅斬一二零賊巡邊使李薲之軍雖有千六百餘名而饑贏困頓難以進取其他義兵等徒有聚軍之名而實無所用忠淸巡察使許頊當初來在陽川亦以賊兵充斥於安城稷山之間不得已退守其處以護南方糧道而惟全羅巡察使權慄駐軍坡州山城地形險絕稍可自守全羅兵使宣居怡調度御史邊以中之軍時留秃城忠淸水使丁傑率舟師往來於龍山之下欲以牽掣賊兵使不得肆意西下大槪軍食不足則雖有百萬之軍無所用之今艱收各處糧糓萬餘石留泊江口以爲。天兵之需不敢他用此外京畿各官些少之糓亦皆擬辦唐糧不肯分餉我軍而右道則無一處有餘糓百計千思誠不知何以爲計
요사이 북쪽 적이 회양(淮陽)과 철원(鐵原)에서 잇달아 서울로 올라오므로, 신이 일전에 이시언(李時言)과 조방장 철원부사 김(金𫏶)에게 공문을 보내어 평강·이천·철원·안협의 군사를 거느리고 길을 따라 막아 끊으며 기미를 보아 맞받아 치게 하였습니다. 또 경기방어사 고언백(高彥伯)에게 군사를 나누어 양주 지경에 매복하고 적이 오기를 기다려 치도록 약속하였습니다.
이달 스무엿샛날 고언백이 알리기를, 「군관 노송(盧松)이 군사를 거느리고 전농현(典農峴)에 매복하였는데, 왜적 십여 기와 걸어오는 왜 스무남은 명이 나와 멋대로 다니므로 우리 군사가 뜻밖에 뛰쳐나가 맞붙어 싸워 왜의 머리 다섯을 베었다」 하였습니다.
또 스무아흐렛날 고언백이 알리기를, 「복병장 민해일(閔海一)이 열이렛날 사미리에 매복하여 변을 기다렸는데, 날이 새기 전에 북쪽 적이 수없이 서울로 들어가고 사시까지 흘러들므로 군관 신기(愼朞)와 구충경(具忠卿) 등이 힘을 합해 쳐서 쏘아 죽인 수를 알 수 없다」 하였습니다.
또 한꺼번에 이른 고언백의 보고에 축석(祝石) 복병장 유찬(俞鑚)이 알리기를, 「스무여드렛날 적이 비로소 포천에서 서울로 올라가며 두험천에서 장수원까지 곳곳에 진을 쳤는데, 뒤따라 왜 서른 남짓이 올라오므로 여러 장수가 한꺼번에 뛰쳐나가 그 뒤끝을 쳐서 거의 다 죽였다」 하였습니다.
또 강원방어사 이시언이 알린 데 따르면, 「적병이 스무이튿날 철원 땅 장림 넓은 들에서 육십 리쯤 되는 금화 땅에 길을 가득 메우고 며칠을 머물러 둔쳤다. 방어사가 군사를 거느리고 매복하였다가 스무닷샛날 적의 선봉이 가을령(加乙嶺)을 넘고 뒷군사가 이르기 전에 뛰쳐나가 덮쳐 치니 적이 놀라 흩어져 달아났고, 우리 군사가 이긴 기세를 타고 쫓아 쳐서 아홉 머리를 베었다. 또 군관 이환(李桓)이 금화현감과 군사를 합하여 무찔러 쏘아 맞힌 것이 많고 두 머리를 베었다」 하였습니다.
이 여러 보고에 따라 형세를 헤아려 보면, 북쪽 적은 이미 다 서울로 들어갔고 사이사이 포천 등지에 머물러 서성이며 나아가지 않으니 반드시 간사한 꾀가 있습니다. 그런데 적성·삭녕·연천 등지는 텅 비어 한 군사도 지키는 이가 없고, 경기의 의병과 관군은 처음부터 명나라 군사 뒷바라지를 핑계로 이미 다 흩어져 갔습니다. 이제 다시 모아 강화를 막아 지키게 하려 하여도 군량이 떨어져 손을 쓰기 어렵습니다.
처음 평양에서 이긴 뒤에 적이 다 기가 꺾여 서울에 있던 자가 절반 넘게 남쪽으로 달아났으니, 만일 이 기회를 타고 북쪽 적이 오기 전에 북을 치며 나아가 무찔렀다면 그 형세가 매우 쉬웠을 것입니다. 불행히 명나라 장수가 벽제에서 한 번 넘어지자 갑자기 군사를 돌렸고, 우리 군사는 앉아서 명나라 군사만 기다리며 때를 넘겨 머물러, 얻기 어려운 기회를 쉽게 놓쳤으니 몹시 마음 아픕니다.
이제 고언백은 굶주리고 지친 남은 군사 수백 명만으로 파주와 양주 사이를 오가며 겨우 한둘 흩어진 적을 벨 뿐입니다. 순변사 이빈(李薲)의 군사는 천육백여 명이 있으나 굶주리고 고달파 나아가 치기 어렵습니다. 그 밖의 의병들은 군사를 모았다는 이름만 있고 실로 쓸 데가 없습니다. 충청순찰사 허욱(許頊)은 처음 양천에 와 있었으나, 적병이 안성과 직산 사이에 가득하므로 부득이 그곳으로 물러나 지켜 남쪽 군량 길을 보호합니다. 오직 전라순찰사 권율(權慄)만이 파주 산성에 군사를 머물렀는데 땅 형세가 험하여 그런대로 스스로 지킬 만합니다. 전라병사 선거이(宣居怡)와 조도어사 변이중(邊以中)의 군사는 지금 독성에 머물고, 충청수사 정걸(丁傑)은 수군을 거느리고 용산 아래를 오가며 적병을 끌어 잡아 마음대로 서쪽으로 내려가지 못하게 하려 합니다.
대개 군사의 먹을 것이 넉넉하지 못하면 백만 군사가 있어도 쓸 데가 없습니다. 이제 여러 곳에서 어렵게 거둔 곡식 만여 석을 강어귀에 대어 두고 명나라 군사의 쓸 것으로 삼아 감히 달리 쓰지 못합니다. 이 밖에 경기 여러 고을의 적은 곡식도 다 명나라 군량으로 마련하기로 하여 우리 군사에게는 나누어 먹이려 하지 않는데, 우도에는 한 곳도 남은 곡식이 없습니다. 온갖 생각을 다 하여도 참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협주 2
癸巳二月十三日
계사년 이월 열사흗날
저본은 二息 — 한 息은 삼십 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