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 › 징비록 › 권10 진사록

분부를 받들고 벽제에서 패한 까닭을 아뢰다有。旨祇受後論碧蹄敗北緣由狀

징비록 懲毖錄 · 류성룡(柳成龍) · 1633년 간행 (임진왜란 뒤 지음) · 단락 1 · 한자 515자 · 낭독 4.6분

징비록 권10 진사록 임진왜란이 끝난 뒤 영의정 류성룡이 제 눈으로 본 것을 적어 남긴 기록. 「지난 일을 징계하여 뒷근심을 삼간다」는 뜻으로 이름을 붙였다. 전쟁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조정이 무엇을 놓쳤는지를 변명 없이 적었다. 이순신을 천거한 일, 명나라 군사와의 실랑이, 백성이 겪은 참상이 그대로 실렸다.

今見李提督則深以我國軍兵善遁爲戒碧蹄之戰未知何將奔北卿其詳覈。啓聞事本月初七日同副承旨成貼有。旨書狀臣在東坡祇受臣觀於前世危亂之時必有一二將才而今時則絕乏雖統率軍兵而部分不明約束不定紛然雜糅有同趨市之人及其遇賊之際望風奔潰不可收拾國事之至此者不過因此而然耳加以軍不精鍊而將無撫循之素下多飢困而上無吮疽之惠將卒之心不相合一何能使之赴蹈湯火乎近觀諸陣中惟高彥伯所率楊州之軍頗從彥伯指揮出入戰陣不避死生蓋緣彥伯平時頗得士心與同甘苦臨事約束堅明故如此只恨其軍數少不能摧郤大敵耳至於他將則誅殺軍士非不多而士卒益不用命以此知爲將之道不專在於嚴酷也其日碧蹄之戰臣在坡州見。天將初無號令約束之事早朝高彥伯隨查將先進碧蹄斬殺倭賊甚多李薲率軍陣于前路十里餘及提督不意挺身獨出馳去欲親自體探不爲戰備李薲聞提督之去從他路隨進未及合勢而。天兵已為退來若於交戰之際我軍精銳數千從傍突出橫擊賊陣則似當不至於敗衂而未能爲之若論其罪則李薲當之矣然此日之事。天將自無號令所致不但罪在我軍其時臣猶在坡州而元帥金命元隨。天將在後目見其事更當詳問處之聞碧蹄之役各官出站下人及輸運糧草之人爭先呼號奔走擁塞前道與軍兵相雜俱退或多爲賊所害者云大功不成遷延至此者實此日一戰爲祟追思至今徒切痛惋

「이제 이 제독을 보니 우리나라 군사가 잘 달아나는 것을 깊이 경계로 삼는다. 벽제 싸움에서 어느 장수가 달아났는지 알지 못하니, 경은 자세히 조사하여 아뢰라」 하신, 이달 초이렛날 동부승지가 관인을 찍어 내린 분부 글을 신이 동파에서 받들었습니다.

신이 보건대 지난 세상에는 위태롭고 어지러운 때에 반드시 한둘의 장수감이 있었는데 지금은 아주 없습니다. 비록 군사를 거느려도 나눔이 분명하지 않고 단속이 정해지지 않아 어지러이 뒤섞이니 장터로 달려가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적을 만나면 그 기세만 보고도 무너져 달아나 걷잡을 수 없습니다. 나랏일이 여기에 이른 것은 이 때문일 뿐입니다.

게다가 군사는 정예하게 단련되지 않았고 장수는 평소 어루만져 다독인 바가 없습니다. 아랫사람은 굶주리고 지친 이가 많은데 윗사람은 종기를 빨아 주는 은혜가 없습니다. 장수와 군졸의 마음이 하나로 합하지 못하니 어찌 끓는 물과 불속으로 뛰어들게 할 수 있겠습니까.

요사이 여러 진 가운데 보건대 오직 고언백(高彥伯)이 거느린 양주 군사만이 자못 고언백의 지휘를 따라 싸움터를 드나들며 죽고 사는 것을 가리지 않습니다. 이는 고언백이 평소 자못 군사의 마음을 얻어 괴로움과 즐거움을 함께하고, 일에 임하여 단속이 굳고 밝은 까닭에 그러한 것입니다. 다만 그 군사 수가 적어 큰 적을 꺾어 물리치지 못함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다른 장수로 말하면 군사를 베어 죽인 일이 적지 않으나 군졸은 더욱 명을 따르지 않습니다. 이로써 장수 되는 길이 오로지 모질고 혹독함에 있지 않음을 알겠습니다.

그날 벽제 싸움에 신은 파주에 있었는데, 명나라 장수에게 애초에 호령하고 단속하는 일이 없음을 보았습니다. 이른 아침에 고언백이 사 장수(査將)를 따라 먼저 벽제로 나아가 왜적을 벤 것이 매우 많았고, 이빈(李薲)은 군사를 거느리고 앞길 십여 리에 진을 쳤습니다. 그런데 제독이 뜻밖에 몸을 빼쳐 홀로 나아가 달려가서는 몸소 살펴보려 하였을 뿐 싸울 채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빈이 제독이 간 것을 듣고 다른 길을 따라 뒤따라 나아갔으나 미처 힘을 합치기 전에 명나라 군사가 이미 물러났습니다.

만일 싸움이 붙었을 때 우리 군사의 정예 수천이 곁에서 뛰쳐나와 적진을 옆으로 쳤더라면 패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듯한데 그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죄를 논한다면 이빈이 마땅히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날의 일은 명나라 장수에게 스스로 호령이 없던 데서 온 것이요, 죄가 우리 군사에게만 있지는 않습니다. 그때 신은 아직 파주에 있었고 원수 김명원(金命元)이 명나라 장수를 따라 뒤에 있으면서 그 일을 눈으로 보았으니, 다시 마땅히 자세히 물어 처결하소서.

듣건대 벽제 싸움에 각 고을에서 참에 나온 하인과 양식·꼴을 실어 나르던 사람들이 앞다투어 부르짖고 내달아 앞길을 막고 군사와 서로 뒤섞여 함께 물러나다가 더러 적에게 해를 입은 이가 많았다 합니다.

큰 공을 이루지 못하고 미적거려 여기에 이른 것은 실로 이날 한 싸움이 빌미가 되었습니다. 지금껏 돌이켜 생각하면 그저 애통하고 안타까울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