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진에서 나온 글을 봉하여 올려 보내다賊中出來書封上送狀
節到付倡義使金千鎰水使丁傑李蘋等本月十四日成貼馳報內守門將李藎忠黃廷彧孽族安鐸一時十三日入送賊中當日午時持書還出來言內與安鐸等自大古介經藥田前路至靑坡石橋下從橋下川邊之路越川過十餘家至一大家乃賊將淸正所在之處見淸正者年可三十與兩。王子共坐堂中盞忠就拜。王子前俯伏而哭。王子亦哭淸正再三回顧有不豫之色王子卽止哭問西關消息淸正使譯者問曰遠來危地無乃爲苦譯者乃前日叛國沙火同之弟云賊將指二。王子曰公見。王子肌膚顏色如何少無羸瘠可知吾厚待也且曰講和之事何以爲之速示可否則欲決行止今欲向關西而以講和一事迄今遲滯何以遷延無黑自乎今者日本關白發諸島之兵朝暮渡海入驅朝鮮直擣中原則悔無所及何不速爲之處藎忠答曰目令天將率百萬之師與本國報讎之兵振旅而來日本能戰則戰非所知也但講和之事我國難擅故禀於天將天將禀於天子往來禀。命之際動以旬月豐能速决賊將笑曰然仍與藎忠等對飯行酒三杯然後乃召黃廷彧父子及李瑛各自異處而來亦行酒三杯曰朝鮮上官今來于此公等相與傅言上官吿于大將前轉報。天將速定和議可也俄而賊將曰我有不得已入京事公等共坐于此以待吾還遂出去諸卒下之倭縵立帳外而守之。王子及三人共坐燈下各道辛苦之狀慘不恐聞。王子身著毛段道袍頭戴毛冠貂皮耳掩曰我常著白衣而今日則倭將逼令改著華服固辭則怒曰君欲著陋服示我薄待之意於來使乎云云故著之矣臨海君擧冠露額指瘡痕曰上來之時中路賊將持棒亂打傷破之處也黃廷彧亦曰路中以我爲知傳國寶所在之處而不爲指示無數歐打幾死得生李瑛則曰吾罵賊不屈再三欲殺而止頑命不死辱國之耻其可忍言云兩。王子欲乘賊將之出還入房中備書私簡云還入所寓處卽是翼廊房也夜深賊將始歸直入其房故三人及藎忠與從倭宿于別處翼日平明賊將使人問訊朝食後因授送。天將之書及兩。王子答書及諺書而皆不復相見因爲出來自京江至賊在之處十里之間處處橫屍人頭散亂臭穢難近而賊倭蹴踏而行云其李藎忠持來賊將送。天將書適沈遊擊來到求見故納于遊擊不得上使又有行在所了無臣字長紙封書開見則三擄臣聯名之書而言多可駭痛憤莫甚所當卽投火中而旣已開見棄置不可幷。王子答書皆爲上使事牒呈云云所謂。王子書一封則上送三擄臣一書則外書。行在所開圻而內外皆無臣字但云長溪君南兵使行護軍各著署而筆畫則似是黃赫所書旣無臣字而言多可駭此則必是賊將脅勒使爲極爲痛心故元書則不敢上送而其間事情則。朝廷不容不知故一依其樣謄書上送諺書則未來故移文推問矣臣等雖在此處而。天將所爲頓未聞知雖問於查將而亦未明言大槪以此擧止觀之則明有講和之意沈惟敬周弘謨旣爲進去十四日臣以看審全羅營出火事往在坡州日暮時唐人四五十騎馳來問之則以爲欲向京城云昨日又有指揮吳宗男者乃與黃應陽前日往來之人自寶山持宋經略牌文回來見從事官辛慶晉語之曰爾國糧草不敷而春耕已迫若過數十日百姓當糜爛俱盡賊若欲和退兵則不可不許其通貢而與之講解云因卽馳去臣自前年以後屢與唐人相接察其言語而得其情事只欲講解退兵以息兵禍爲心雖知我國於此賊有不共戴天之讐痛心切骨而不肯遽言其講解其實用兵之意未爲堅定蓋自碧蹄退軍之後無意於更進臣爲之日夜焦心痛骨而今此事勢又如此我國雖欲竭力呌呼其可得乎尤可悶痛者我國財殫於支給力竭於轉輸非徒京畿爲然忠淸全羅道無復有可支之勢且奉使督運之官多是年少不經事之人一諉於。天兵支待之急竭取公私之儲無復餘力而盡散官軍義兵不復以把守爲心故自漢江以南以及忠州之界一樣空虛而賊兵方四出搶掠遂日不已南方事勢日益危急臣本以庸劣無狀冒此重任徒以文移摧督而軍兵一散之後難可復合且到處倉糓無餘其僅得收聚者亦皆盡入於。天兵之糧。啓聞其數以示唐將不敢他用此外更無可措之䇿若非。朝廷深惟彼此之勢早賜指揮則如臣愚劣雖萬被誅難免誤事之罪至於和戰二策乃是國家存亡所係假使事勢極難實出於不得已之計天將猶當與我國十分商確臨機善處而使我不得與聞端緒尤爲悶欝李藎忠入送事則金千鎰等不禀於臣等而徑自爲之事涉率爾而因此探知賊勢不至於大害故姑未深責
창의사 김천일(金千鎰)과 수사 정걸(丁傑)·이빈(李蘋) 등이 이달 열나흗날 관인을 찍어 급히 보고한 것이 방금 이르렀습니다. 그 안에 이르기를, 수문장 이신충(李藎忠)과 황정욱(黃廷彧)의 서족 안탁(安鐸)을 열사흗날 한꺼번에 적진으로 들여보냈는데 그날 낮에 글을 지니고 돌아 나와 말하기를,
「안탁 등과 함께 대고개에서 약전 앞길을 지나 청파 돌다리 아래에 이르렀다. 다리 밑 냇가 길을 따라 내를 건너 열댓 집을 지나 한 큰 집에 이르니 곧 적장 청정(淸正)이 있는 곳이었다. 청정을 보니 나이는 서른쯤이고 두 왕자와 함께 마루에 앉아 있었다. 내가 나아가 왕자 앞에 절하고 엎드려 우니 왕자도 울었다. 청정이 두세 번 돌아보며 언짢은 빛이 있으므로 왕자가 곧 울음을 그치고 서관 소식을 물었다.
청정이 통역을 시켜 묻기를 「먼 위태로운 땅에 왔으니 괴롭지 않은가」 하였다. 통역은 곧 지난날 나라를 배반한 사화동(沙火同)의 아우라 한다.
적장이 두 왕자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공이 왕자의 살빛과 낯빛을 보니 어떠한가. 조금도 여위지 않았으니 내가 두터이 대접한 줄 알 만하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화친하는 일을 어찌하려는가. 빨리 옳고 그름을 보이면 가고 머무를 것을 정하려 한다. 이제 관서로 향하려 하는데 화친 한 가지 일로 지금껏 더디니 어찌 미루기만 하고 흑백이 없는가. 이제 일본 관백이 여러 섬의 군사를 내어 아침저녁으로 바다를 건너와 조선을 몰아 곧바로 중원을 친다면 뉘우쳐도 미칠 바가 없을 것이니, 어찌 빨리 처결하지 않는가」 하였다.
내가 답하기를 「지금 명나라 장수가 백만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나라의 원수 갚을 군사와 함께 군세를 떨쳐 온다. 일본이 싸울 수 있으면 싸울 것이니 내가 알 바가 아니다. 다만 화친하는 일은 우리나라가 마음대로 하기 어려운 까닭에 명나라 장수에게 여쭙고 명나라 장수는 천자께 여쭈니, 오가며 명을 여쭙는 사이에 걸핏하면 열흘 한 달이 걸린다. 어찌 빨리 결정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적장이 웃으며 「그렇다」 하고, 이어 나와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술 석 잔을 돌린 뒤에 황정욱 부자와 이영(李瑛)을 불러 저마다 다른 곳에서 오게 하고 또한 술 석 잔을 돌렸다. 그러고는 「조선의 상관이 이제 여기 왔으니 공들은 서로 이 상관에게 말을 전하여, 대장 앞에 아뢰고 명나라 장수에게 옮겨 알려 빨리 화의를 정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이윽고 적장이 「나는 부득이 서울에 들어갈 일이 있으니 공들은 여기 함께 앉아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라」 하고 마침내 나갔다. 여러 졸개 아래 왜인들이 장막 밖에 늘어서서 지켰다.
왕자와 세 사람이 등불 아래 함께 앉아 저마다 괴롭고 쓰라린 모양을 말하니 참혹하여 차마 들을 수 없었다. 왕자는 몸에 모단 도포를 입고 머리에 모관과 담비 가죽 귀마개를 쓰고 말하기를 「나는 늘 흰옷을 입었는데 오늘은 왜장이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으라 다그쳤다. 굳이 사양하니 성내어 『그대는 누추한 옷을 입어 내가 박대한다는 뜻을 오는 사신에게 보이려 하는가』 하므로 입었다」 하였다.
임해군이 관을 들어 이마를 드러내고 헌데 자국을 가리키며 「올라올 때 도중에 적장이 몽둥이를 들고 마구 때려 다쳐 터진 자리다」 하였다. 황정욱도 「길에서 내가 전국보 있는 곳을 안다고 여겼는데 가리켜 보이지 않는다 하여 수없이 때려 거의 죽었다가 살아났다」 하였다. 이영은 「나는 적을 꾸짖고 굽히지 않아 두세 번 죽이려다 그쳤다. 모진 목숨이 죽지 않았으니 나라를 욕되게 한 부끄러움을 어찌 차마 말하겠는가」 하였다.
두 왕자가 적장이 나간 틈을 타 방 안으로 도로 들어가 사사로운 편지를 갖추어 썼다 한다. 도로 들어간 머무는 곳은 곧 익랑방이다. 밤이 깊어 적장이 비로소 돌아와 곧바로 그 방에 들어간 까닭에 세 사람과 나는 따라온 왜인과 함께 다른 곳에서 잤다. 이튿날 새벽에 적장이 사람을 시켜 안부를 묻고, 아침을 먹은 뒤에 명나라 장수에게 보내는 글과 두 왕자의 답서와 언문 편지를 주어 보냈으며, 모두 다시 보지 못하고 그대로 나왔다. 경강에서 적이 있는 곳까지 십 리 사이에 곳곳에 주검이 가로놓이고 사람 머리가 흩어져 냄새가 더러워 가까이하기 어려운데 왜적은 발로 차며 다녔다」 하였다 합니다.
이신충이 가지고 온, 적장이 명나라 장수에게 보내는 글은 마침 심 유격(沈遊擊)이 와서 보기를 구한 까닭에 유격에게 바쳐 올려 보내지 못하였습니다. 또 행재소 앞으로 된, 신하 신(臣) 자가 전혀 없는 긴 종이 봉서가 있어 뜯어 보니 사로잡힌 세 신하가 이름을 잇대어 쓴 글인데 말이 놀라울 만한 것이 많아 애통하고 분함이 이보다 심할 수 없었습니다. 마땅히 곧 불속에 던질 것이나 이미 뜯어보았으니 버려 두는 것도 옳지 않아, 왕자의 답서와 아울러 모두 올려 보내는 일로 첩정하였다 합니다.
이른바 왕자의 글 한 통은 올려 보냅니다. 사로잡힌 세 신하의 글 한 통은 겉에 「행재소에서 뜯어 보시라」 썼는데 안팎에 모두 신하라 일컬은 데가 없습니다. 다만 장계군(長溪君)·남병사·행호군이라 하고 저마다 서명하였는데 글씨는 황혁(黃赫)이 쓴 듯합니다. 이미 신하라 일컬은 데가 없고 말이 놀라울 만한 것이 많으니, 이는 반드시 적장이 억지로 위협하여 하게 한 것이라 몹시 애통합니다. 그러므로 본디 글은 감히 올려 보내지 못하고, 그사이 사정은 조정에서 알지 않을 수 없는 까닭에 한결같이 그 모양대로 베껴 써서 올려 보냅니다. 언문 편지는 오지 않은 까닭에 공문을 보내어 물었습니다.
신들이 비록 이곳에 있으나 명나라 장수가 하는 바를 도무지 듣지 못하고, 사 장수(査將)에게 물어도 또한 밝히 말하지 않습니다. 대개 이 거동으로 보면 화친할 뜻이 있음이 분명합니다. 심유경(沈惟敬)과 주홍모(周弘謨)가 이미 나아갔습니다.
열나흗날 신이 전라 진영에 불난 일을 살피려고 파주에 가 있었습니다. 날이 저물 때 명나라 사람 사오십 기가 달려오기에 물으니 서울로 향하려 한다 하였습니다. 어제 또 지휘 오종도(吳宗道)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곧 황응양(黃應陽)과 함께 지난날 오가던 사람으로, 보산에서 송 경략(宋經略)의 패문을 지니고 돌아왔습니다. 종사관 신경진(辛慶晉)을 보고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양식과 꼴이 넉넉지 않은데 봄갈이가 이미 닥쳤다. 만일 수십 일이 지나면 백성이 마땅히 문드러져 다 없어질 것이다. 적이 만일 화친하여 군사를 물리려 한다면 그 조공 길 트기를 허락하고 더불어 화해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곧 달려갔습니다.
신이 지난해 뒤로 여러 번 명나라 사람과 만나 그 말을 살펴 사정을 알았는데, 다만 화해하여 군사를 물려 병화를 그치게 하려는 데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나라가 이 적과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요 뼈에 사무치게 애통해하는 줄 알아 선뜻 화해를 말하려 하지는 않으나, 실은 군사를 쓸 뜻이 굳게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대개 벽제에서 군사를 물린 뒤로 다시 나아갈 뜻이 없습니다. 신이 이 때문에 밤낮으로 애를 태우고 뼈가 아픈데 이제 형세가 또 이러하니, 우리나라가 비록 힘을 다해 부르짖고자 한들 그리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 딱하고 애통한 것은, 우리나라의 재물이 대주는 데 다하고 힘이 실어 나르는 데 다하여 경기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충청·전라도도 다시는 버틸 형세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명을 받들어 운송을 다그치는 관원은 흔히 나이 어리고 일을 겪지 않은 사람이라, 한결같이 명나라 군사 대접이 급하다는 데 미루어 공사 간에 쌓인 것을 바닥까지 거두어 다시 남은 힘이 없습니다. 관군과 의병은 다 흩어져 다시는 지키는 데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한강 이남에서 충주 지경까지 한결같이 텅 비었는데 적병은 바야흐로 사방으로 나와 노략질하기를 날마다 그치지 않으니, 남쪽 형세가 날로 더욱 위급합니다.
신은 본디 용렬하고 보잘것없는데 이 무거운 소임을 무릅써, 그저 공문으로 다그칠 뿐이요 군사가 한번 흩어진 뒤에는 다시 모으기 어렵습니다. 또 가는 곳마다 창고 곡식이 남지 않았고 겨우 거두어 모은 것도 모두 명나라 군사의 양식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수를 아뢰어 명나라 장수에게 보였으니 감히 달리 쓰지 못합니다. 이 밖에 다시 조처할 계책이 없습니다. 만일 조정에서 이쪽저쪽의 형세를 깊이 헤아려 일찍 지휘를 내리지 않으신다면, 신 같은 어리석고 용렬한 자는 비록 만 번 베임을 당한들 일을 그르친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화친과 싸움 두 계책은 곧 나라의 존망이 걸린 바입니다. 설사 형세가 몹시 어려워 실로 부득이한 계책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명나라 장수는 오히려 마땅히 우리나라와 십분 헤아려 의논하고 기미에 임하여 잘 처결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로 하여금 실마리조차 듣지 못하게 하니 더욱 답답합니다.
이신충을 들여보낸 일은 김천일 등이 신들에게 여쭙지 않고 지레 제멋대로 한 것이라 일이 경솔한 데 걸립니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적의 형세를 더듬어 알았고 큰 해에 이르지는 않은 까닭에 아직 깊이 꾸짖지 않았습니다.
협주 5
癸巳三月十六日在東坡
계사년 삼월 열엿새, 동파에서
저본은 吳宗男이나 吳宗道의 잘못으로 봄
지휘(指揮)는 명나라 무관 벼슬
장계군(長溪君)은 황정욱의 군호
심 유격은 곧 심유경(沈惟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