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 › 징비록 › 권11 진사록

왕 유격의 답서를 올려 보내고, 또 이산겸을 보내어 한강 남쪽에 둔친 적을 무찔러 칠 형세를 제독에게 몸소 논하게 한 일을 아뢰는 장계王遊擊答書上送且使李山謙進去親論勦擊漢南賊屯形勢於提督狀

징비록 懲毖錄 · 류성룡(柳成龍) · 1633년 간행 (임진왜란 뒤 지음) · 단락 1 · 한자 354자 · 낭독 3.1분

징비록 권11 진사록 임진왜란이 끝난 뒤 영의정 류성룡이 제 눈으로 본 것을 적어 남긴 기록. 「지난 일을 징계하여 뒷근심을 삼간다」는 뜻으로 이름을 붙였다. 전쟁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조정이 무엇을 놓쳤는지를 변명 없이 적었다. 이순신을 천거한 일, 명나라 군사와의 실랑이, 백성이 겪은 참상이 그대로 실렸다.

臣卽見王遊擊必迪答書其中有當事者有主和之意我故難以專主之語又云具禀經略及提督批示方可遵行其書監封上送從前。天將等已有講和之端而不肯明言蓋知我國痛心切骨於賊有寧死不和之意故前日沈遊擊往龍山時臣立於道左欲見而托以行忙馳去其還又不由此直自江華而去今又王遊擊所言如此若不於經略提督處痛陳力辨則將恐事機蹉失狼狽益甚而我國之事益無奈何不勝痛泣大槪倭奴雖憑據京城而其氣已衰若大軍牽掣其北而奇兵出於南道忠州以北一擧蕩滅則都城屯賊不待血刃而自潰此萬全之計不可失之機事勢灼然只在目前而遲疑不决師老力竭臣觀李山謙者頗有才氣言說通暢且從南方而來方留南兵二十餘人於其營故此處將官吳遊擊王遊擊以下於其所陳事情頗有傾聽萬一提督及經略一言見施則爲益不少山謙亦自願進去故使之速去臣前此已具呈文送于提督大意則已盡於其文伏乞。朝廷急速祈懇俾令大功有終

신이 곧 유격 왕필적(王必迪)의 답서를 보니, 그 가운데 「일을 맡은 이에게 화친을 주장하는 뜻이 있으므로 내가 오로지 주장하기 어렵다」는 말이 있었고, 또 「경략과 제독에게 갖추어 여쭈어 지시를 받아야 비로소 따라 행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그 글을 봉하여 올려 보냅니다.

앞서부터 명나라 장수들에게 이미 화친하려는 실마리가 있었으나 밝게 말하려 하지 않았으니, 대개 우리나라가 적에게 마음이 아프고 뼈에 사무쳐 차라리 죽더라도 화친하지 않겠다는 뜻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앞서 심 유격(沈遊擊)이 용산으로 갈 때 신이 길 왼쪽에 서서 보고자 하였으나 걸음이 바쁘다고 핑계하고 달려가 버렸고, 돌아올 때도 이곳을 지나지 않고 바로 강화에서 가 버렸습니다. 이제 또 왕 유격의 말이 이와 같으니, 만일 경략과 제독이 있는 곳에서 통렬히 아뢰어 힘써 따지지 않으면 일의 기회를 놓쳐 낭패가 더욱 심해지고 우리나라의 일은 더욱 어찌할 수 없게 될까 두렵습니다. 아프게 우는 마음을 이기지 못합니다.

대개 왜놈이 서울을 차지하고 있으나 그 기운은 이미 쇠하였습니다. 만일 큰 군사가 그 북쪽을 붙들어 당기고 기습하는 군사가 남도로 나가 충주 이북을 한 번에 쓸어 없앤다면, 도성에 둔친 적은 칼에 피를 묻히기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무너질 것입니다. 이는 만전한 계책이요 잃을 수 없는 기회이며, 일의 형세가 환히 눈앞에 있는데도 머뭇거려 결단하지 못하여 군사는 늙고 힘은 다합니다.

신이 이산겸(李山謙)이라는 자를 보니 재기가 꽤 있고 말이 트여 밝으며, 또 남쪽에서 왔고 바야흐로 남쪽 군사 스무 몇 사람을 그 진영에 머물러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곳 장수와 군관인 오 유격(吳遊擊)·왕 유격 이하가 그가 아뢰는 사정에 꽤 귀를 기울입니다. 만일 제독과 경략이 한 마디라도 행하여 준다면 이로움이 적지 않을 것이고, 산겸도 스스로 가기를 원하므로 빨리 가게 하였습니다.

신은 이보다 앞서 이미 정문(呈文)을 갖추어 제독에게 보냈으니 큰 뜻은 그 글에 다하였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조정에서 급히 간절히 청하여 큰 공이 마침이 있게 하소서.

협주 1

癸巳三月二十六日

계사년 삼월 스무엿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