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 › 징비록 › 권11 진사록

유지를 받든 뒤 스스로 죄를 아뢰는 장계有。旨祗受後自劾狀

징비록 懲毖錄 · 류성룡(柳成龍) · 1633년 간행 (임진왜란 뒤 지음) · 단락 1 · 한자 1,452자 · 낭독 12.9분

징비록 권11 진사록 임진왜란이 끝난 뒤 영의정 류성룡이 제 눈으로 본 것을 적어 남긴 기록. 「지난 일을 징계하여 뒷근심을 삼간다」는 뜻으로 이름을 붙였다. 전쟁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조정이 무엇을 놓쳤는지를 변명 없이 적었다. 이순신을 천거한 일, 명나라 군사와의 실랑이, 백성이 겪은 참상이 그대로 실렸다.

前月二十八日右副承旨成貼以大臣受閫外之任云云有。旨書狀臣在東頗祗受臣本以至愚無狀冒受重任於國事板蕩之際其僨事辱國之狀固難悉數况與賊俱生坐淹時日京都未復而專仰。天兵臣子之罪萬死猶輕第臣之區區愚意則不得不達於。君父之前正月二十八日李提督自坡州欲退東坡臣與元帥金命元戶曹判書李誠中分戶曹判書林忠侃接待使李德醫運糧使權徵京畿觀察使李廷馨等同進廷辨於大將幕次問其退兵之由提督始辭不見但云此處不便駐軍姑退東坡留一二日休兵更進臣等以爲大軍一退機關甚重人聽驚惑將許多曲折移時爭辨最後提督出立幕前諸將環侍臣等進於其前或立辨或扣頭泣請提督反覆以少退更進之意論解不已至出。奏本見示臣手指。奏本中若干語辨爭不已大將張世爵至於發怒以足蹴迫通事使之速退臣等不得已皆各掩泣而退右相俞泓亦追到請之而不得其後欲自東坡退開城臣等叩心拊膺進退懇請者不記其數提督不得已紿臣等曰兵馬不可露處姑退開城我則當留駐此處臣等纔出墻外而提督跨馬馳去臣等雖立於路傍相顧駭歎而無如之何及還開城久留之時則講和之說尙未發端故臣只以登時進兵之意隨事祈懇而其時大軍旣退而坡州東坡等處人心動搖臣來在東坡提督至欲移權慄李薲之軍皆退臨津接待使李德馨韓應寅等陳其不可提督令開於臣臣卽遣從事官辛慶晋作書力陳坡州不可不守而其時臣在東坡金命元在坡州急於鎭定人心而提督之退兵平壤又出於不意故臣等未及馳去請止自此以後。天兵久留不還而查將獨留東坡不肯明言事情日遣金志貴往來於龍山等處取見。王子書及擄臣等書簡傳報提督臣慮其更有如平壤講解之事屢與金命元同見查將問其緣由則查將不言實狀只以大軍前進必期勦滅之言慰答而觀其辭色揣其所爲則多有可疑者一日臣直問提督之意如何則查將始以先爲圖出。王子後當進兵爲言臣極力辨正其言甚多查將猶以。王子爲諉臣不得已據大義攻破其說曰本國於倭賊有。廟社之讎不可共戴一天圖出。王子雖甚切迫而亦是第二件事旣而聞沈遊擊之來其日臣方以點視糧草往在德津壇卽遣從事官辛慶晋書小帖呈於道中勸令進兵臣追到欲與面辨則遊擊已在路中馬上擧手遙止不爲相見但語通事曰求見之意則吾已知之仍爲馳去其還不由東坡直自龍山從水路以去臣雖昏鄙無狀亦有人心豈有徒聞講和之說而甘心俯首不爲一言相及之理乎其後又聞開城留駐諸將中惟南將王必迪頗主用兵前後作書陳䇿請遣精兵繞出南路先擊漢南之賊以斷賊路王必迪亦以其計爲然同義兵將李山謙發遣炮手三十人往探道路其兵猶在振威而臣又作呈文馳送于平壤使李德馨等呈懇於提督臣之𤨏力微誠固已極盡無餘而於事無補臣罪當誅尙復何言但。天兵進退和戰制在經略與提督而提督在此之時旣不言和議退兵之後又在數百里之外在此查總兵以下又非主斷之將而至今諱其實每以行計用兵爲言臣雖欲碎首爭辨而其路無由故只得詳具此間聞見事狀盡達於。朝廷請急時區處區區妄料惟欲使。朝廷早聞曲折而致力於大將及經略所在之處以濟大計而已至於賊中出來王子書及擄臣賊酋文字臣亦見之其間固多有駭痛切骨之事而自古戰陣之間彼此事情關於機關者。朝廷不得聞知而失於酬應以至誤事者甚多故臣與金命元反覆詳議不得不達而又難直達或謄書上送或送於備邊司以備叅考處置而不知其陷於輕。朝尋國之罪此則迷臣昏謬輕妄料事不審之致罪何所逃大抵國事如此臣死已晚䇿勵疲鈍死於干戈臣之榮也近日各處軍民亦有死之心無生之氣臣未甞不約束諸將期於死戰自京城東西逐日血戰不敢以。天兵和戰之說而有所搖惑惟其食盡兵疲不能一决於數日之間以重。君父之憂臣之罪狀萬死猶輕國專至急閫外重任不可以負罪無狀之臣因循冒處使三軍之氣索然而諸將無復有禀畏之勢請亟下有司以正刑章而擇授可堪之人收拾萬一以濟時艱則臣雖死之日猶生之年臣不勝惶恐涕泣之至

지난달 스무여드렛날 우부승지가 관인을 찍어 내린, 「대신이 곤외(閫外)의 임무를 받았으니…」 하는 유지 글을 신이 동파(東坡)에 있으면서 받들어 받았습니다.

신은 본디 지극히 어리석고 하잘것없는데 나라 일이 흔들리는 때에 무거운 임무를 외람되이 받았으니, 일을 그르치고 나라를 욕되게 한 실상은 실로 다 셀 수 없습니다. 더구나 적과 함께 살아 앉아서 세월을 흘려보내고, 서울을 되찾지 못한 채 오로지 명나라 군사만 우러르니 신하의 죄는 만 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습니다. 다만 신의 구구한 어리석은 뜻은 임금 앞에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월 스무여드렛날 이 제독(李提督)이 파주에서 동파로 물러나려 하므로, 신은 원수 김명원(金命元)·호조판서 이성중(李誠中)·분호조판서 박충간(朴忠侃)·접대사 이덕형(李德馨)·운량사 권징(權徵)·경기관찰사 이정형(李廷馨) 등과 함께 나아가 대장의 막차에서 군사를 물리는 까닭을 따져 물었습니다. 제독은 처음에는 사양하고 보지 않았고, 다만 「이곳은 군사를 머무르기에 불편하니 우선 동파로 물러나 한두 날 머물러 군사를 쉬게 한 뒤에 다시 나아가겠다」 하였습니다.

신들은 큰 군사가 한 번 물러나면 일의 기미가 매우 중하고 사람들이 듣고 놀라 의혹할 것이라 하여, 허다한 곡절을 들어 때를 옮기며 다투어 따졌습니다. 맨 뒤에 제독이 막차 앞에 나와 서고 여러 장수가 둘러서 모시니, 신들은 그 앞에 나아가 더러 서서 따지고 더러 머리를 조아리며 울며 청하였습니다. 제독은 조금 물러나 다시 나아가겠다는 뜻으로 거듭 풀어 말하기를 그치지 않고, 주본(奏本)을 내어 보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신이 손으로 주본 가운데 몇 마디를 가리키며 따져 다투기를 그치지 않으니, 대장 장세작(張世爵)이 노여움을 내어 발로 통사를 차며 몰아 빨리 물러가게 하였습니다. 신들은 하는 수 없이 모두 각기 낯을 가리고 울며 물러났고, 우상 유홍(俞泓)도 뒤따라 이르러 청하였으나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 뒤 동파에서 개성으로 물러나려 하므로 신들은 가슴을 두드리고 치며 나아가고 물러가며 간절히 청한 것이 그 수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제독은 하는 수 없이 신들을 속여 말하기를 「군마를 한데에 둘 수 없으니 우선 개성으로 물러나게 하고, 나는 마땅히 이곳에 머물러 있겠다」 하였습니다. 신들이 겨우 담 밖으로 나오자 제독은 말에 올라 달려가 버렸습니다. 신들은 길가에 서서 서로 돌아보며 놀라 탄식하였으나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개성으로 돌아와 오래 머무를 때에는 화친하자는 말이 아직 실마리가 나지 않았으므로, 신은 다만 곧 군사를 나아가게 하자는 뜻으로 일에 따라 간절히 청하였습니다. 그때 큰 군사가 이미 물러나 파주·동파 등지의 인심이 흔들렸으므로 신이 와서 동파에 있었습니다. 제독이 권율(權慄)·이빈(李薲)의 군사를 옮겨 모두 임진으로 물러나게 하려 하므로 접대사 이덕형·한응인(韓應寅) 등이 그 옳지 않음을 아뢰니, 제독은 신에게 알리게 하였습니다. 신은 곧 종사관 신경진(辛慶晉)을 보내어 글을 지어 파주를 지키지 않을 수 없음을 힘써 아뢰었습니다. 그때 신은 동파에 있고 김명원은 파주에 있어 인심을 진정하기에 급하였으며, 제독이 평양으로 군사를 물린 것은 또 뜻하지 않은 일이었으므로 신들은 달려가 그치기를 청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 뒤로 명나라 군사는 오래 머물러 돌아오지 않고, 사 장수(査將)만 홀로 동파에 머물러 사정을 밝게 말하려 하지 않았으며, 날마다 김지귀(金志貴)를 보내어 용산 등지를 오가게 하여 왕자의 글과 사로잡힌 신하들의 편지를 얻어 보고 제독에게 전하여 알렸습니다. 신은 다시 평양에서 화친하던 일과 같은 것이 있을까 염려하여 여러 번 김명원과 함께 사 장수를 보고 그 연유를 물었습니다. 사 장수는 실상을 말하지 않고 다만 큰 군사가 앞으로 나아가 반드시 무찔러 없애기를 기약한다는 말로 위로하여 답하였으나, 그 말과 낯빛을 보고 그 하는 바를 헤아리니 의심할 만한 것이 많았습니다.

하루는 신이 제독의 뜻이 어떠한지 바로 물으니, 사 장수가 비로소 먼저 왕자를 내오도록 도모한 뒤에 마땅히 군사를 나아가게 하겠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신이 힘을 다하여 바로잡아 따진 말이 매우 많았으나 사 장수는 그래도 왕자를 핑계로 삼았습니다. 신은 하는 수 없이 큰 의리에 따라 그 말을 쳐 깨뜨려 말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왜적에게 종묘와 사직의 원수가 있어 한 하늘을 함께 이고 살 수 없습니다. 왕자를 내오도록 도모하는 일이 매우 절박하기는 하나 또한 두 번째 일입니다.」

이윽고 심 유격(沈遊擊)이 온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날 신은 바야흐로 양식과 마초를 점고하러 덕진단(德津壇)에 가 있었습니다. 곧 종사관 신경진을 보내어 작은 쪽지를 써서 길에서 바치고 군사를 나아가게 하기를 권하였습니다. 신이 뒤따라 이르러 얼굴을 보고 따지고자 하였으나, 유격은 이미 길에 있으면서 말 위에서 손을 들어 멀리서 막고 서로 보지 않았습니다. 다만 통사에게 「보자고 하는 뜻은 내가 이미 안다」 말하고 그대로 달려가 버렸습니다. 돌아올 때도 동파를 지나지 않고 바로 용산에서 물길을 따라 가 버렸습니다. 신이 비록 어둡고 비루하고 하잘것없으나 또한 사람의 마음이 있으니, 어찌 화친하자는 말만 듣고 마음을 달게 여겨 머리를 숙이고 한 마디도 미치지 않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그 뒤 또 개성에 머물러 있는 여러 장수 가운데 오직 남쪽 장수 왕필적(王必迪)이 군사를 쓰기를 꽤 주장한다는 말을 듣고, 앞뒤로 글을 지어 계책을 아뢰어 정예 군사를 보내어 남쪽 길로 돌아 나가 한강 남쪽의 적을 먼저 쳐서 적의 길을 끊기를 청하였습니다. 왕필적도 그 계책을 옳게 여겨 의병장 이산겸(李山謙)과 함께 포수 서른 사람을 내보내어 길을 살피러 가게 하였는데, 그 군사는 아직 진위(振威)에 있습니다. 신은 또 정문(呈文)을 지어 평양으로 달려 보내어 이덕형 등으로 하여금 제독에게 간절히 바치게 하였습니다.

신의 자잘한 힘과 작은 정성은 실로 이미 다하여 남음이 없으나 일에는 보탬이 없으니, 신의 죄는 마땅히 죽어야 할 것이라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다만 명나라 군사가 나아가고 물러나며 화친하고 싸우는 것은 경략과 제독에게 매여 있는데, 제독이 이곳에 있을 때에는 이미 화친을 말하지 않았고 군사를 물린 뒤에는 또 수백 리 밖에 있습니다. 이곳에 있는 사 총병 이하는 또 결단을 주장하는 장수가 아니면서 지금까지 그 실상을 숨기고 늘 계책을 행하여 군사를 쓴다는 말만 합니다. 신이 비록 머리를 부수며 다투어 따지고자 하나 그 길이 없으므로, 다만 그 사이에 듣고 본 일의 실상을 자세히 갖추어 조정에 다 아뢰고 때에 맞추어 급히 처리하시기를 청할 수밖에 없습니다. 구구히 망령되게 헤아리는 것은, 오직 조정이 일찍 곡절을 들어 대장과 경략이 있는 곳에 힘을 써서 큰 계책을 이루게 하려는 것뿐입니다.

적중에서 나온 왕자의 글과 사로잡힌 신하, 적의 우두머리의 글에 이르러서는 신도 보았으니, 그 사이에 실로 놀랍고 아프며 뼈에 사무치는 일이 많았습니다. 예로부터 싸우는 진 사이에 저쪽과 이쪽의 사정이 일의 기미에 관계되는 것을 조정이 듣고 알지 못하여 응대를 잘못하여 일을 그르친 것이 매우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김명원과 거듭 자세히 의논하여 아뢰지 않을 수 없었으나 또 바로 아뢰기 어려워, 더러 베껴 올려 보내고 더러 비변사에 보내어 참고하여 처리하도록 갖추게 하였습니다. 그것이 조정을 가볍게 여기고 나라를 함부로 여기는 죄에 빠지는 것임을 알지 못하였으니, 이는 미혹한 신이 어둡고 그릇되며 경망하여 일을 헤아림에 살피지 못한 탓입니다. 죄를 어디로 피하겠습니까.

대저 나라 일이 이와 같으니 신이 죽는 것도 이미 늦었습니다. 지치고 둔한 몸을 채찍질하여 창과 방패 사이에서 죽는 것이 신의 영광입니다. 요사이 각처의 군사와 백성도 죽을 마음이 있고 살려는 기운이 없으니, 신은 여러 장수에게 약속하여 죽기로 싸우기를 기약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서울 동서에서 날마다 피 흘려 싸우며, 명나라 군사가 화친하고 싸운다는 말로 흔들려 의혹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먹을 것이 다하고 군사가 지쳐 며칠 사이에 한 번 결단하지 못하여 임금의 근심을 무겁게 하였으니 신의 죄상은 만 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습니다.

나라 일이 지극히 급한데, 곤외의 무거운 임무를 죄를 지고 하잘것없는 신이 그대로 외람되이 차지하여 삼군의 기운을 쓸쓸하게 하고 여러 장수로 하여금 다시 여쭈어 두려워하는 형세가 없게 할 수는 없습니다. 급히 유사에게 내리시어 형벌의 법을 바로잡으시고, 감당할 만한 사람을 가려 맡기시어 만분의 하나라도 거두어 이 어려운 때를 건지게 하신다면, 신은 죽는 날이라도 오히려 살아 있는 해와 같을 것입니다. 신은 두렵고 황송하여 눈물 흘림을 이기지 못합니다.

협주 2

四月七日

사월 이렛날

저본은 林忠侃이나 朴忠侃의 잘못으로 봄